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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01-30 17:21:03

몽골 제국의 서방 원정


파일:몽골 제국 및 원나라 문장 white.svg 몽골 제국의 대외 전쟁·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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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전투 교전국
<colbgcolor=#004DB1> 몽골-서하 전쟁
,1205 ~ 1227,
서하
몽골-금 전쟁
,1211 ~ 1234,
<colbgcolor=#004DB1> 오사보 전투·야호령 전투·회하보 전투
,1211,
금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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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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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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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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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9 ~ 1221,
파르완 전투
,1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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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0 ~ 1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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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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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1 ~ 1259,
몽골 제국의 서방 원정
,1236 ~ 1241,
레그니차 전투
,1241,
모히 전투
,1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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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남송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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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5~12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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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60,
일본 원정
,1274, 1281,
베트남 원정
,1257, 1284, 1287,
쩐 왕조 }}}}}}}}}
몽골 제국의 서방 원정
파일:batu.jpg
주황색 화살표가 몽골군의 동선이다.
기간
1236년~1241년 (5년)
장소
동유럽 일대
원인
몽골 제국의 유럽 정복 야욕
교전국 및 교전 세력

[[몽골 제국|]][[틀:국기|]][[틀:국기|]]
볼가-불가리아 칸국
파일:키예프 루스 국장.svg 파일:Symbol_Duchy_of_Ryazan.svg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52px-Seal-of-Alexander-Nevsky_1236_Avers.svg.png 파일:체르니히우.png 키예프 루스
쿠만-킵차크 연맹

알라니아 왕국
푸르가스 공국
파일:헝가리 왕국 국기(1196-1301).svg.png 파일:크로아티아 왕국 국기.svg 헝가리-크로아티아 왕국
파일:폴란드 왕국 국기.svg 폴란드 대공국 연합군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20px-Seal_of_Templars.jpg 성전 기사단
파일:구호기사단 깃발.svg 구호기사단
파일:튜튼 기사단 깃발.svg 튜튼 기사단

[[오스트리아|]][[틀:국기|]][[틀:국기|]]
파일:보헤미아 왕국 국기(1305).png 보헤미아 왕국
마이센 변경백국
지휘관

[[몽골 제국|]][[틀:국기|]][[틀:국기|]]바투총사령관

[[몽골 제국|]][[틀:국기|]][[틀:국기|]]수부타이부사령관

[[몽골 제국|]][[틀:국기|]][[틀:국기|]]베르케

[[몽골 제국|]][[틀:국기|]][[틀:국기|]]오르다

[[몽골 제국|]][[틀:국기|]][[틀:국기|]]귀위크

[[몽골 제국|]][[틀:국기|]][[틀:국기|]]몽케

[[몽골 제국|]][[틀:국기|]][[틀:국기|]]바이다르

[[몽골 제국|]][[틀:국기|]][[틀:국기|]]카단

[[몽골 제국|]][[틀:국기|]][[틀:국기|]]보롤다이

[[몽골 제국|]][[틀:국기|]][[틀:국기|]]부리

[[몽골 제국|]][[틀:국기|]][[틀:국기|]]샤이반

[[몽골 제국|]][[틀:국기|]][[틀:국기|]]부체크
파일:키예프 루스 국장.svg 미하일 2세
파일:Symbol_Duchy_of_Ryazan.svg 표도르†
파일:Symbol_Duchy_of_Ryazan.svg 유리 잉그바레비치†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52px-Seal-of-Alexander-Nevsky_1236_Avers.svg.png 유리 2세†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52px-Seal-of-Alexander-Nevsky_1236_Avers.svg.png 프세볼로트 유리예비치†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52px-Seal-of-Alexander-Nevsky_1236_Avers.svg.png 므스티슬라프 유리예비치†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52px-Seal-of-Alexander-Nevsky_1236_Avers.svg.png 블라디미르 유리예비치†
파일:체르니히우.png 바실리 이바노비치†
바흐만†
루수단
파일:헝가리 왕국 국기(1196-1301).svg.png 파일:크로아티아 왕국 국기.svg 벨러 4세
파일:폴란드 왕국 국기.svg 헨리크 2세
코티얀 칸†

[[오스트리아|]][[틀:국기|]][[틀:국기|]] 호전공 프리드리히 2세
전력
30만~50만(중세 러시아 기록)
120,000~140,000명(현대 추정1)
60,000[1]→40,000명[2] (현대 추정2)[3]
- 25,000~30,000명의 기병
키예프 루스군 5만~10만명[4]
폴란드 공국 연합군 2,000~8,000명 이상
헝가리-크로아티아-오스트리아 연합군 25,000명~80,000명 이상
결과
볼가-불가리아 칸국멸망(1236)
알라니아 왕국멸망(1239)
키예프 루스붕괴(1240)
쿠만-킵차크 연맹멸망(1241)
푸르가스 공국멸망(1240년경)
영향
몽골 제국의 동유럽-서아시아 지역에 대한 지배
루스 공국들의 몽골-타타르의 멍에 시작
바투 칸킵차크 칸국 건국
피해규모
몽골군 14,000명 이상 사상 키예프 루스 국민 50만명 이상 사망
헝가리 왕국 전국민의 20% 이상 사망, 포로, 국토의 절반 이상 황폐화

1. 개요2. 배경3. 전개
3.1. 1차 키예프 루스 침공3.2. 진압기3.3. 2차 키예프 루스 침공
4. 몽골군 내부의 갈등과 귀위크의 회군5. 동유럽 침공6. 결과7. 영향8. 이후9. 그 이후의 동유럽 침공 야욕
9.1. 귀위크 칸이 교황에게 보내는 서신

[clearfix]

1. 개요

"카얄릭[5]호라즘에서부터 삭신[6]불가르, 그리고 그 방향으로 타타르의 말발굽이 미치는 곳까지..."
칭기즈 칸주치에게 한 분봉.[7]
"우리의 죄악 때문에 알 수 없는 민족들이 도착했다. 그들의 기원이나 그들이 어디에서 왔는지, 또는 그들이 어떤 종교를 믿는지 아무도 알지 못했다. 그것은 오직 신만이 아시며, 아마도 책에 통달한 현자들만이 알 것이다."
키예프 루스의 한 역사가
몽골 제국오고타이 칸바투를 통해 단행한 군사 원정.

2. 배경

몽골 제국은 몽골-호라즘 전쟁을 겪으면서 더 서쪽으로 향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그 상상은 정찰로 시작됐던 제베와 수부타이의 서부 원정으로 구체화되게 된다.

몽골 제국아시아 지역을 대부분 정복한 뒤, 이제 본격적으로 한 번 발 담갔다 뺀적있는 서쪽의 유럽으로 진군하고 있었다. 칭기즈 칸 사후 후계 구도가 정리되는 상황에서 발생한 얼마 간의 지배력 공백으로 인해서, 칭기즈 칸 시기에 멸망했던 나라들 중 일부가 다시금 세력 확장을 꾀하고 있었다. 이에 몽골 제국의 제2대 군주였던 오고타이 칸1235년에 열린 쿠릴타이에서 유럽쪽으로의 서방 원정을 결의했다. 장남 주치 가문의 당주인 바투가 서방 원정군의 총사령관에 임명되었고, 부장은 칭기즈 칸의 노장이자 이미 칼가강 전투 등 유럽군과의 교전 경험이 있었던 수부타이가 맡았다. 이 서방 원정군은 몽골 기병대, 튀르크계 보병 등으로 구성되었는데, 출정한 몽골군은 중앙아시아에서 유럽·러시아까지 완전하게 정복하고 헝가리 왕국으로 서진했다. 이 시기 몽골군은 항복받은 지역에서 징집한 병사들까지 포함하여 대군을 형성했다.

대원정을 떠나기전에 몽골군은 바시키르인을 정벌했고, 바시키르인은 많은 분견대를 서방 원정에 할당하게 된다.

3. 전개

볼가-불가리아 칸국은 몽골 제국이 접근한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루스 공국들 약탈을 즉시 그만두고 평화 협상을 체결한다. 그리고 루시 공국들도 같은 정보를 입수했기 때문에 볼가 불가리아의 전쟁 준비를 지원하기 시작한다. 볼가 불가리아는 수비군을 늘리고, 도시들을 요새화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몽골군은 번개처럼 빠르게 1236년에 볼가 강을 넘었고, 그대로 볼가-불가리아 칸국을 멸망시킨다.

3.1. 1차 키예프 루스 침공

파일:13세기 초 루스 지도.png
분열되어 있는 키예프 루스
한편, 키예프 루스는 분열될대로 분열돼 있었다. 1228년부터 1236년까지 키예프 루스 내전인 '남부 러시아 내전(갈리시아-볼하니아 계승 전쟁)'이 일어나 헝가리와 폴란드까지 참여하고 지들끼리 도시를 파괴하며 초토화 작전을 펴는 등, 몽골 제국에 맞설 단결력이 부족했다.

1237년 가을, 바투 칸은 정찰을 한 다음, 키예프 루스의 최동단인 라쟌 공국의 공작이었던 유리 잉그바레비치에게 대사를 파견해 사람, 공자(공작의 아들), 말을 비롯한 모든 것의 십분의 일을 바치라고 요구한다. 유리 잉그바레비치는 거부한 뒤, 즉시 블라디미르-수즈달 대공 유리 2세와 키예프 대공 미하일 2세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우리가 없어지면, 모두가 너희 것이 되리라."
"Коли нас не будет, то всё ваше будет"
랴잔 공작 유리 잉그바레비치가 항복을 요구하는 몽골 대사에게.
일설에 따르면 유리 잉그바레비치는 자신의 아들 표도르를 선물과 함께 몽골의 대사로 보냈는데, 바투 칸은 연회를 열고 그 자리에서 라쟌 공국을 침공하지 않겠다고 했다고 한다. 그런데 연회의 분위기가 무르익자 바투 칸은 취했는지 표도르의 아내와 동침을 요구했고 표도르가 거부하자 표도르를 비롯한 대사들을 죽여버렸다고 한다.메르키트 콤플렉스 실패 그 소식을 들은 표도르의 아내 유프라크시아는 아들과 함께 탑에서 몸을 던졌다고 한다.

1237년 말, 볼가-불가리아 칸국의 난민들이 유리 2세에 의해 키예프 루스에 정착하게 된다. 그리고 몽골군은 랴잔 공국에 도착한다.

1237년 11월, 바투 칸은 블라디미르-수즈달 공국의 대공이었던 유리 2세의 궁정에도 사절을 보내 항복을 요구한다. 유리 2세는 선물은 바쳤지만 항복을 거부했다. 유리 2세는 라쟌 공국을 지원하기 위해 장남 프세볼로트 유리예비치에게 지원군을 주고 파견한다.

1237년 11~12월, 표도르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유리 잉그바레비치는 분노해 블라디미르-수즈달 공국의 프세볼로트 유리예비치의 지원군을 기다리지 않고 옆에 있던 무롬 공국의 공작 유리 다비도비치의 군대와 같이 보로네시 강에서 바투수부타이가 이끄는 몽골군과 맞부딪힌다.(보로네시 강 전투) 피비린내 나는 전투 끝에 랴잔-무롬 연합군은 패배하고 무롬 공작 유리 다비도비치는 전사한다.

일설에서는 이를 두고 의도적으로 유리 잉그바레비치를 도발했다고 보기도 한다. 아들을 모욕한 뒤 죽임으로써 잉그바레비치가 흥분을 유도했고 실제로도 지원군을 기다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1237년 12월 16~21일, 몽골군은 발리스타를 동원한 5일간의 포위 공격 끝에 키예프 루스의 일원이었던 라쟌 공국을 함락시킨다.(랴잔 공성전) 랴잔은 불태워졌고 주민들은 학살되었으며, 랴잔 공작 유리 잉그바레비치와 그 가족원들은 모두 처형된다.
"죽은 자들을 위해 눈물을 흘릴 자조차 없었다"
몽골군의 라쟌 공국 파괴에 대해 전해지는 말
1238년 1월, 콜롬나에서 장남 프세볼로트 유리예비치는 랴잔 공국의 잔여병과 노보고르드 공국에서 온 지원병과 함께 바투수부타이가 이끄는 최대 7만명으로 추산되는 몽골군과 맞붙는다. (콜롬나 전투) 이 전투에서 블라디미르-수즈달-랴잔-노브고르드 공국의 병력은 15,000명에서 20,000여명[8]에 달했는데, 이를 칼가강 전투 이후로 몽골군이 처음으로 루스의 주력군과 맞붙은 전투라고 평가하기도 한다. 치열한 전투에서 몽골군이 약 10,000명 이상의 사상자가 발생했으나 승리했고 프세볼로트 유리예비치는 패배하여 도망친다. 아들의 패전 소식을 들은 블라디미르-수즈달 대공 유리 2세는 공작들과 보야르 회의를 소집하고 군대를 모으기 위해 출발한다.

1238년 1월 15일, 몽골군은 블라디미르-수즈달 대공국의 도시 모스크바를 포위한다.

1238년 1월 20일, 몽골군은 5일간의 공성전 끝에 모스크바를 함락시킨다. 유리 2세의 막내 아들이자 유리 2세가 직접 모스크바 공작으로 임명했던 블라디미르 유리예비치는 포로로 잡힌다.

1238년 2월 3일, 몽골군에 의해 키예프 루스의 일원이었던 블라디미르-수즈달 대공국의 수도였던 블라디미르가 포위된다.

공성전 과정에서 몽골군은 포로로 잡혔던 유리 2세의 막내 아들 블라디미르 유리예비치를 살려주는 대가로 항복하라고 요구했고, 요구를 거부하자 블라디미르 유리예비치를 어머니와 형제들 앞인 블라디미르의 명소 황금문에서 처형한다.

공성전이 진행되던 와중, 콜롬나 전투에서 패배해 블라디미르로 도망왔던 프세볼로트가 포위를 풀기 위해 선물을 가지고 바투에게 찾아갔지만, 바투는 가차없이 프세볼로트 유리예비치를 죽여버린다.

1238년 2월 7일, 4일만에 수도 블라디미르가 함락된다. 본가였던 블라디미르는 불태워졌고 가뜩이나 사람이 많이 죽은 유리 2세의 공작가는 멀리 시집갔던 딸 하나를 제외하고 몰살당한다. 이때 유리 2세의 차남 므스티슬라프도 사망한다. 유리 2세는 북쪽으로 도망쳐 군대를 모은다.

1238년 2월 22일~3월 5일, 바투수부타이가 이끄는 몽골군은 블라디미르-수즈달 대공국과 인접한 공국인 노브고르드 공국를 침공해 도시 토르조크를 점령한다. 바투가 이 성을 점령하는데 2주가 소요되었는데 수부타이가 오자 3일만에 함락당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1238년 3월 4일, 시트 강에서 유리 2세가 새로 블라디미르-수즈달 대공국의 부속 공국들(로스토프 공국, 야로슬라블 공국, 유글리츠키 공국, 유리에프 공국)을 모아 소집한 군대가 보롤다이가 이끄는 몽골군에 의해 전멸하고 유리 2세도 전사한다.(시트 강 전투) 보롤다이가 엄청난 속도로 군대를 진격시켜서 유리 2세는 준비를 시간이 없었다고 한다. 군대가 절단당하고 포위섬멸되는 와중 도망가다 기마병에게 살해된 유리 2세는 목이 잘려 바투에게 선물로 보내진다. 그렇게 모든 아들과 딸 하나를 잃고 복수를 계획했던 아버지는 허무하게 사망한다. 몽골군이 이 전투에서 승리함으로써 키예프 루스의 마지막 주력군이 붕괴되었고 승세는 확실히 몽골군에게 기울게 된다.

한편, 이 전투 이후 보롤다이의 군대에는 전염병이 돌아 매우 약화되게 된다. 또 봄이 되며 북부 러시아는 라스푸티차가 시작됐고 말이 기동성이 느려지게 된다. 여러가지 요인이 겹치며 노브고르드 공국에 대한 공세 능력이 상당수 상실돼 몽골군이 노브고르드 공국을 더 침략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다.

블라디미르-수즈달 공국이 함락되자 바투 칸은 자신의 군대를 더 작은 부대로 나누어 블라디미르-수즈달의 14개 도시를 약탈했다. 약탈당한 도시는 블라디미르 공국의 수도였던 로스토프, 우글리치, 야로슬라블, 코스트로마, 카신, 크스냐틴, 고로데츠, 갈리치, 페레슬라블-잘레스키, 유리예프-폴스키, 드미트로프, 볼로콜람스크, 트베리, 그리고 토르조크였다.

몽골군은 중국의 공성 무기를 사용해 많은 도시의 성벽을 파괴했다. 가장 점령하기 어려웠던 곳은 체르니고프 공국의 작은 공국 코젤스크였는데, 이곳의 소년 공작 바실리(칼가강 전투에서 전사했던 므스티슬라비치의 아들일 가능성이 높다)와 주민들은 몽골군에 맞서 7주간 저항하며 몽골군 4,000명을 죽였다. 이 저항기간은 몽골군의 1차 침공중 가장 길게 공성전을 버틴 기간이다. (코젤스크 공성전)

이때 바투는 혼자서 코젤스크 공국을 점령하고 있었는데, 놀랍게도 바투가 혼자서 7주나 함락시키지 못했던 도시를 귀위크,부리,카다안은 3일만에 함락 시켜버렸다. 이 이후로 사령관이었던 바투의 위상은 많이 떨어지게 된다.

그러나 유럽에서는 이 전투를 바투의 실책이 아닌 바실리 공작의 공에다 초점을 맞추면서 결사항전의 좋은 예로써 소개되고 있다고 한다.

코젤스크를 함락한 후 몽골군은 코젤스크를 '사악한 도시'라고 불렀고, 점령 후에 바실리를 처형하고 유아를 포함한 모든 주민을 죽이라고 명령했다고 한다. 전설에 따르면, 몽골군이 접근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키테즈라는 마을 전체가 주민들과 함께 호수에 잠겼고, 전설 속에서 그 모습이 오늘날까지도 볼 수 있다고 전해진다.

몽골의 침공으로부터 파괴를 면하거나 거의 피해를 입지 않은 주요 공국과 도시 중심지로는 노브고로드, 프스코프, 스몰렌스크, 폴로츠크, 비텝스크, 그리고 아마도 로스토프와 우글리치가 포함되었다. 몽골군은 노브고로드를 공격할 계획이었으나, 공국이 선제적으로 항복을 선택하면서 형제 도시들과 같은 운명을 피할 수 있었다.

블라디미르-수즈달 공국을 철저히 약탈하는 것으로 제1차 키예프 침공은 일단락된다.

3.2. 진압기

1238년 여름에서 1239년 여름까지, 몽골은 새로 영토를 확장하기보다 아직도 존재하는 저항들을 진압하기 위해 움직였다. 특히 킵차크인들이 살던 볼가 강 하류에서 문제가 심각했다.

진압되지 않았던 쿠만족들 중 가장 강력했던 바흐만이 일으킨 봉기도 이 시기에 진압됐다. 바흐만은 쿠만족 난민들을 모아 봉기를 일으켰는데 몽케가 수장으로 수부타이 부장으로 파견되어 이를 진압했다. 이때 몽골군은 100명이 탈 수 있는 200척에 달하는 배를 준비해서 볼가 강을 따라 순식간에 남하했다고 한다.

1238년 중반, 바투 칸은 크림 반도를 약탈하고 모르도비아의 반란을 진압했다.

1239년, 몽골군 중 일부는 조지아를 침공하고 있었다. 조지아의 여왕 루수단은 교황 그레고리오 9세에게 몽골군의 만행을 설명하며 구원을 요청했으며, 그러면서 동방 교회와 서방 교회의 통일에 찬성한다고 추가로 덧붙였다. 그러나 교황은 교회를 재결합시키기 위해 선교사를 파견할 것을 제안했을 뿐 별다른 도움을 제공하지 않았다. 이 무렵 몽골 군대는 아니와 카르스 등 왕국의 남부인 아르메니아 일대를 초토화시키고 있었다. 서방으로부터 어떠한 도움을 기대할 수 없게 되자, 루수단은 결국 항복을 결심하고 재상 아센을 바투 칸에게 보내 협상을 진행하도록 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조지아의 귀족들에게 몽골 귀족들과 동등한 지위를 보장한다.
2. 조지아는 (시르반샤와 같은) 이슬람 봉신국들을 상실하지만, (아르메니아와 같은) 기독교 봉신국들은 그대로 유지한다.
3. 조지아 왕국은 매년 50,000개의 금화(금 약 250kg)를 지불하고 추가로 다양한 공물을 바친다.
4. 조지아 군대는 몽골의 호위군(케식)에 편입된다.
5. 루수단의 아들을 조지아의 왕으로 인정한다.
–1239년 조지아-몽골 조약–

1239년 11~12월, 몽골군은 조지아를 침공하면서 그 옆의 알라니아 왕국도 같이 침공했고, 귀위크, 몽케, 카단 부리가 이끄는 몽골군은 15일간 수도를 공격해 함락시켰다.

한편 키예프 루스에선 스몰렌스크 공작이 키예프 루스의 1차 침공 도중 전사했는데, 리투아니아가 이 틈새를 놓지지 않고 쳐들어와서 트베리 공작이 피난민들을 이끌고 방어해야 했다.

3.3. 2차 키예프 루스 침공

1239년 가을, 정비를 마친 바투 칸은 페레야슬라프 공국을 점령해 함락시킨다.

1239년 10월 18일, 몽골군은 체르니고프 공국을 공격한다. 빠르게 함락된 페레야슬라프 공국과는 다르게, 체르니고프 성은 러시아에서 가장 큰 요새 중 하나였다. 그러나 몽골군은 투석기를 사용해 성벽을 부수고 체르니고프 공국을 함락시킨다. 체르니고프 공성전에서는 투석기가 사용되었는데, 이는 키예프 루스에게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키예프 루스측의 기록에서는 '그 끔찍한 기계에서 발사된 돌은 사람 4명이 함께 들 수 없었고, 일반 화살 사거리의 1.5배 이상 날아갔다.'고 말하고 있다. 또 그 투석기들은 중국의 기술이었으며 중국인 기술자들이 관리했다고 한다.

1239년 가을, 샤이반과 부체크가 이끄는 분견대는 크림 반도에 도착해 남부 해안선을 따라 도시들을 약탈한다.

1239년 겨울, 몽골군은 점령한 체르니고프와 페레야슬라블을 약탈했다.

1240년 11월, 몽골군은 키예프 루스의 수도 였던 키예프에 도착했다.

1240년 12월, 몽골군은 키예프를 함락시키고 약탈했다. 갈리시아-볼히니아 공국 또한 약탈당한다.

몽골군은 분열되어있던 키예프 공국들의 공국들을 하나하나 깨부수며 1240년, 결국 키예프 루스를 붕괴시킨다.

노보고르드 연대기에 따르면, 1240년 여름, 몽골군이 침입하지 않았던 혹은 못했던 노브고로드 공국에게 다른 루스 공국들이 다 개발살 나고 있다는 소식을 접수한 교황이 북방 십자군을 선포했고 스웨덴 군대가 쳐들어오게 되었다. 그러나 이것을 러시아의 전설적인 무장인 알렉산드르 넵스키가 네바 강 전투에서 무찔러 방어했다고 한다. 그래서 넵스키라는 이름도 얻었다. 이어진 북방 십자군 일파 리보니아 검 기사단의 침공속에서도 소수의 군대로 그들을 무찔렀다고 한다. 기록은 불확실하지만 현재 그는 러시아의 국민 영웅이다. 아무튼 넵스키는 노브고로드 공국을 보전하는데 성공했고, 바투 칸의 비위를 잘 맞춰 정복이후 루스 전역을 통치할 수 있는 지위를 제공받는다. 현재도 러시아인들은 만약 넵스키가 몽골군과 싸웠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궁금해하고 있다고 한다.

4. 몽골군 내부의 갈등과 귀위크의 회군

한편 몽골군에서는 러시아를 침공하던 도중 주치의 혈통 문제(메르키트 콤플렉스)가 뇌관으로 작용하면서 총사령관이던 바투가 칭기즈 칸의 다른 손자들[9]과 다툼이 벌어지게 되었다. [10] 귀위크는 바투 형제들의 실책을 보고 그들의 지휘 능력, 특히 바투의 역량을 불신했다. 귀위크는 바투에게, 바투는 화살통을 들고 다니는 늙은 여자일 뿐이라고 조롱했다. 결국 사촌들[11]에게 모욕을 당한 바투는 격노해서 숙부인 오고타이 칸에게 그대로 고했다. 바투의 보고를 받은 오고타이 칸도 격노해서 귀위크 등을 소환한 뒤 씨족 간에 분쟁을 일으킨 죄를 물어 갈궜다.

우구데이는 귀위크와 몽케에게 있던 우익군의 지위를 카단과 부첵에게 맡기고 돌아오라고 명령했다. 바투는 이들을 위해 티서강(티사강)과 도나우강 강변에서 이별연을 열었는데, 이 자리에서 귀위크는 전쟁에서의 바투의 소극적 태도를 비난했다. 몽골비사에 의하면 우구데이는 다시 서신을 보내 '...(이하 중략)... 너는 너의 주인(바투를 말한다.)이 러시아인과 킵차크를 정복하는 동안 그는 러시아인이나 킵차크인을 한 명도 제대로 붙잡지 못했고 염소 발굽도 얻지 못하지 않았느냐'며 속히 돌아오라고 책망하였다. 귀위크는 1240년 가을부터 서서히 회군을 준비한다.

1240년 겨울, 키예프를 점령한 직후 승전 축하연에서 총사령관 바투가 건배를 제의하고 술을 마시자, 귀위크는 자신이 칸의 아들이라며 자신이 먼저 건배 제의를 해야 한다, 혹은 자신이 먼저 잔을 들어야 한다고 이의를 제기했다. 이는 곧 언쟁으로 이어졌고, 이는 오고타이 칸에게 보고되었다. 오고타이는 그가 대칸의 아들이라는 지위를 이용해서 자신의 주군, 형을 능멸했다며 분개했다. 귀위크는 이에 오고타이 칸이 바투를 지지하자 불만을 품고, 전쟁 도중 자신의 병력을 슬그머니 뒤로 빼거나 지원을 주저하였다. 이는 그대로 오고타이 칸에게 보고되었다.

한번은 원정 도중 차가타이 가문의 부리가 바투를 공격했고, 귀위크는 이를 관망했다. 또 한번은 술좌석에서 귀위크가 바투를 비웃다가 시비가 붙기 직전까지 갔다. 원조비사와 집사(集史)에 따르면, 원정 중 차가타이 가문의 부리가 주치계열 왕자들과 말다툼을 벌인다. 이때 귀위크도 부리에 동조했다 한다. 원조비사에 의하면 전투 중의 상황을 보고받은 오고타이 칸은 분노했고, 귀위크를 해임, 본국에 소환을 명령했다. 오고타이 칸은 사자를 통해 서신을 보내 귀위크를 질책, 바투의 지시를 따르지 않은 것과, 바투는 총사령관으로서 귀위크의 상급자라는 점을 명시하고, 서방 원정대에서 한 일이 무엇이냐며 추궁했다. 집사(集史)에 의하면 귀위크가 귀환하면서 몽케도 같이 몽골로 돌아갔다 한다. 귀위크는 회군하면서 약 2만명의 군대를 데리고 돌아갔기 때문에 더 적은 군사로 바투 칸은 동유럽 원정을 진행하게 된다.

5. 동유럽 침공

헝가리에는 제베와 수부타이의 서부 원정을 겪고 1229년부터 러시아에서 넘어온 보야르들에 의해 몽골의 위협이 전해졌다.[12]

1239년 바투의 원정 때문에 쑥대밭이 된 키예프 공국에서 40,000호에 달하는 쿠만-킵차크인들이 탈출해 헝가리 왕국의 동쪽 국경에 접근해 자신들을 받아들여준다면 헝가리를 위해 싸우겠다고 제안했다. 벨러 4세는 이들과 손잡고 몽골 제국군의 예상되는 침략에 맞서기로 하고, 쿠만족 지도자 코티얀에게 추종자들과 함께 기독교로 개종한다면 피난처를 제공하겠다고 제안했다. 코티얀은 흔쾌히 수락하고 티서강변의 평원 지대에 정착했다. 쿠만인들은 그곳의 현지 주민들과 종종 마찰을 벌였고, 때때로 강도, 강간 등 여러 범죄를 저질렀다. 하지만 벨러 4세는 몽골군의 임박한 침략을 막으려면 쿠만인들의 협조가 필수적이라고 여겼기에 눈감아줬고, 헝가리인들은 자연히 쿠만인들을 감싸돌고 자신들의 고충을 알아주지 않는 왕을 원망했다.

서방 원정군 총사령관 바투는 이들을 당장 돌려놓으라고 헝가리 왕에게 최후통첩을 보냈다.
"당신한테 도망친 우리의 종인 쿠만족들을 당장 우리한테 돌려보내라. 쿠만족들은 말을 타고 있어서 달아날 수 있었지만, 당신들은 어떻게 달아날 셈인가?"
이는 쿠만족들을 돌려보내지 않으면 공격하겠다는 협박이나 다름없었지만 보내봤자 각개격파 당할거라는걸 눈치챈듯한 벨러 4세에게 거부당했고 곧 헝가리 침공이 준비되었다.

1240년 말, 바투 칸수부타이가 이끄는 몽골 제국군이 헝가리 동쪽 국경에 도달했다. 벨러 4세는 전국에 소집령을 내리고, 독일 기사들을 대거 고용했다. 그런데 쿠만족에게 반감을 품고 있던 헝가리 귀족들과 독일 기사들이 쾨텐을 습격해 살해해버리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에 분노한 쿠만족은 헝가리 남부로 이동하며 약탈과 파괴를 자행했다. 멘탈이 붕괴된 벨러 4세는 오스트리아 공작 프리드리히 2세에게 구원을 요청했지만, 별로 호전적이지 않은 호전공 프리드리히는 소규모 병력과 함께 오다가 소규모 몽골 제국군을 격퇴한 뒤 으로 회군했다.

수부타이는 헝가리를 본격적으로 침공하기 전에, 군대를 셋으로 나누어 측면에서 헝가리에 원병을 보내 올 수 있었던 폴란드 왕국을 미리 쳐부수기로 했다. 바투의 형 오르다(Orda)와 차가타이의 아들 바이다르(Baidar), 오고타이 칸의 차남 카단(Kadan)이 이끄는 북로군은 곧장 피아스트 왕가 계통의 공작들이 통치하고 있었던 폴란드의 제공국들을 습격하여 레그니차 전투를 치렀고, 바투와 명장 수부타이가 이끄는 본대는 카르파티아 산맥의 베레츠키 고개를 넘었다. 한편 남동부로 향한 남로군은 왈라키아와 몰다비아를 약탈한 뒤, 다뉴브 강을 따라 헝가리 평원까지 진출하여 모히 전투에 참전했다. 이후 바투는 1242년까지 헝가리와 폴란드 등 동유럽을 공격했다가 퇴각했다.[13]

1241년 1월, 원정에 동행했던 바이다르[14], 오르다[15], 카단[16]은 2개 튜멘(12,000~20,000명)을 폴란드를 침공했다. 이들은 기동력을 이용해 폴란드 각 소공국들의 군대가 연합하지 못하도록 각개격파했다.

1241년 2월 투르스코 전투(Battle of Tursko)에서 크라쿠프 태수(Voivode) 브워드지미에시(Włodzimierz)가 이끄는 약 1,500명의 병력이 몽골군에게 격파당했다.

3월 크라쿠프 근방 흐몔니크 전투(Battle of Chmielnik)에서 아직 규합되지 못한 폴란드군이 차가타이의 차남 바이다르가 이끄는 몽골군에게 크게 패배해, 폴란드 대공의 도시 크라쿠프를 무방비 상태로 만들었고, 크라쿠프로 진입한 몽골군은 도시를 완전히 파괴했다.

동시에 오고타이의 아들 카단이 이끄는 병력은 소폴란드(Małopolska) 지역의 남은 폴란드군을 타첵 전투(Battle of Tarczek)에서 격파하고, 4월 브로츠와프 근방에서 바이다르군과 합류했다.

한편, 폴란드 공국들을 다시 규합하며 연합군을 집결시키고 있었던 폴란드 대공 헨리크 2세는 모라비아와 성전기사단 등의 지원까지 얻어 몽골군에 일격을 가하려고 했다.

보헤미아 왕국의 왕 바츨라프 1세도 원병을 모아 한창 폴란드로 달려가고 있었다. 보헤미아 말고도 신성 로마 제국의 많은 제후국들이 원병을 파견한다는 약속을 했으나 더이상 시간을 지체할 수 없었던 헨리크 2세는 빠르게 출정해 몽골군과 맞서려고 했다.

대폴란드~소폴란드 지역을 초토화시키며 진군하던 몽골군은 1241년 4월 9일 실롱스크 공국의 레그니차에 모습을 드러냈고, 약 3,000 ~ 8,000명의 폴란드 연합군은 레그니차 전투에서 격돌한다.

한편, 1241년 봄에 몽골 제국군은 헝가리를 본격적으로 침공했다. 벨러 4세는 가급적 많은 병력을 끌어모은 후 적과 교전하려 했지만, 헝가리 귀족들은 왕의 허락 없이 몽골군과 독자적으로 싸웠고, 일부는 아예 영지로 돌아가버렸다. 결국 그는 이대로 지체하면 군대가 와해될 거라 여기고 모히 평원으로 진군해 마차를 이용하여 요새화된 야영지를 건설했다. 1241년 4월 10~11일, 몽골군 35,000~10만 명과 헝가리군 25,000~80,000명은 모히 전투에서 격돌했다. 초기에는 바투 칸의 무리한 사요 강 도하로 인해 몽골군이 큰 피해를 입으면서 헝가리군이 승기를 잡는 듯했지만, 수부타이가 다른 길을 통해 강을 건넌 후 역습을 가해온 데다 헝가리 귀족들이 왕의 통제에 불응하고 자기 뜻대로 행동하다가 각개격파당하는 바람에 전세가 급격히 기울었다. 벨러 4세는 동생 칼만과 함께 간신히 목숨을 건지고 도주했지만, 뒤에 남겨진 헝가리군은 궤멸되었다.

벨러 4세는 몇몇 추종자들을 데리고 포조니로 이동했다가 몽골 제국군이 추격해오자 오스트리아 공국으로 도주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 공작 프리드리히 2세는 그를 도와주긴 커녕 감옥에 가둔 뒤 오스트리아 국경 인근의 포조니, 쇼프론, 바스 주를 내놓으라고 강요했다. 벨러 4세는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한 뒤 겨우 풀려난 후 가족과 함께 크로아티아로 피신했다. 이후 교황청, 프랑스 왕국, 신성 로마 제국에 사절을 보내 구원을 호소했지만, 어느 곳에서도 구원군을 보내주지 않았다. 이후 몽골 추격대가 접근해오자, 가족들을 클리스 요새로 피신시킨 뒤 자신은 아드리아 해 연안의 트로기르로 피신했다. 추격대 지휘관 카단 칸은 벨러 4세가 가족들과 함께 있을거라 판단해 클리스 요새를 공격했지만 패배했고, 벨러 4세는 트로기르에 있는 것을 안 몽골군은 트로기르를 포위 공격했지만 크로아티아군에 의해 격파되어 돌아간다.

이후 중유럽의 강국인 신성 로마 제국[17]을 멸망시킬 계획을 세우던 도중, 몽골 본토에서 오고타이 칸의 병사(1241년 12월) 소식이 알려지자 새로운 칸을 뽑기 위해 본토에서 열리는 쿠릴타이에 참가하기 위해 회군하게 되었다.

1242년 3월에서 4월, 서방 원정군은 마침내 서서히 회군하기 시작했다.

6. 결과

모든 흑해와 카스피해 대초원은 주치 울루스의 일부가 되었고 바투는 볼가 강 하류에 수도를 건설했다.

7. 영향

8. 이후

9. 그 이후의 동유럽 침공 야욕

원정 중에 바투와 수부타이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에게 왕좌를 내놓으라고 한 적은 있지만 도달하지는 못하였다.

9.1. 귀위크 칸이 교황에게 보내는 서신

원정이 끝나고 귀위크는 몽골 제국의 대칸이 된다.
영원한 하늘의 힘에 기대어 (지상의) 모든 위대한 울루스(를 지배하는) 사해의 군주의 칙령.
이것은 대(大)파파(Papa-i kalan; 교황)에게 보내는 명령이다. 알고 깨달을지어다.

짐은 협의한 연후에 캐랠(Karal; 왕)들의 지방에 복속의 요청을 보냈노라. 만약 짐의 말이 도달하거든 교황인 그대는 왕들과 함께, 그대 스스로 짐의 어전에 와야 할 것이다. 그때에 야사(yasa; 법령)의 모든 명을 그대에게 들려줄 것이다.

또 한 가지.
그대는 내가 세례를 받으면 좋겠다고 하면서 너희들 자신을 알리고 요청을 보냈다. 이러한 그대의 요청을 짐은 이해하지 못하겠노라.

또 한 가지.
그대는 전갈을 내게 보내기를 "(당신은) 마자르(Majar)와 키리스탄(Kiristan)의 모든 땅을 정복하였는데, 영문을 알지 못하겠다. 그들의 죄가 무엇이었는지 말해 달라."라고 했다. 이 또한 짐은 이해하지 못하겠노라. 칭기스 칸과 카안(Qu'an; 우구데이 칸)은 두 지방에 온 세상이 복종해야 한다는 영원한 주의 부름(farman-i khuda; 신, 하느님)을 듣도록 전달하였다. (그러나) 부름을 그들은 듣지 않았다.

그들은 자만심을 품고 복종하지 않으면서 우리의 전령과 일치(Ilchi; 사신)를 죽였다. (그래서) 영원한 주께서는 그 자신의 뜻으로 지방과 주민을 절멸시켰다. 주의 명이 아니라면, 어느 누가 자신의 힘만으로 (적을) 죽이고 정복할 수 있다는 말인가.

마찬가지로 그대가 말하기를 "나는 기독교도(tarsa)이다. 주를 숭배하고 눈물을 흘린다."라고 한다면, 주께서 진실로 누구를 징계하고 누구에게 은총을 내리실지, 그대가 말하는 것을 (그 뜻대로 되리라고) 그대가 어찌 아느냐? 주의 힘이, 해가 뜨는 곳에서부터 지는 곳까지 모든 지방들을 짐에게 복종케 하였노라. 짐이 생각건대 주의 명령이 아니라면 누가 어떻게 그것을 할 수 있겠는가.

그러니 이제 그대는 진실된 마음으로 이렇게 말해야 한다. "복속(il)하겠습니다. 힘을 다 바치겠습니다." 그리고, 그대 스스로 왕들을 인솔하여 함께 경의를 표하고 짐을 섬기러 어전으로 오도록 하라. 그대의 복속은 그때 짐이 알리라. 만약 주의 명을 듣지 않고 짐의 명령을 어긴다면, 짐은 너희를 반역자(yaghi; 원수)로 알 것이고 또한 (그러하다는 것을) 너희들에게도 알려주리라.

만약 (너희들이 이 명령을) 어긴다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짐이 어찌 알겠는가? 오직 주께서만 안다.
귀위크 칸이 교황 인노첸시오 4세에 보낸 친서(원본 이미지 보기)
1246년 11월 사절 카르피니를 통해 전달되어 교황청 서고에 보관됨.
(김호동 교수 역# 일부 수정 후 인용)

교황은 이전에 서신을 보내 '침략행위를 그만두고 기독교로 개종할 것'과 '헝가리 왕국-크로아티아 왕국[18]을 침략한 이유를 설명할 것'을 요구했고, 귀위크는 이에 대한 답장에서 "네 요구를 둘 다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반박하며, "헝가리인은 칸에게 복종하라는 신의 명령을 믿지 않고 오히려 우리가 보낸 사신들을 죽였다. 신의 도움 없이 인간의 힘만으로 전쟁에서 이기는 건 불가능하다. 그런데 해 뜨는 곳에서 해 지는 곳까지 모든 땅이 우리에게 정복되었으므로 이것이야말로 신의 뜻이다. 너희는 어째서 신의 뜻에 반항하느냐. 당장 몽골 제국에 항복하고 교황을 비롯한 모든 왕공들은 나에게 친조하라"는 요지의 내용을 펼쳤다. 이는 몽골에서 평화가 의미하는 것은 강자의 평정 아래에 분쟁을 유발할 적대자가 물리적으로 나타나지 않는 상황으로 해석했기 때문.
[1] 초기[2] 귀위크 귀환 후 동유럽 침공 당시[3] https://proza.ru/2011/08/02/826[4] 당시 키예프 루스의 인구수가 750~1,200만명임을 고려하면 동원가능한 군대 수가 10만이 넘을 수도 있지만 예비군 체제가 미흡했던 봉건제의 한계로 더 동원할 수 없었다.[5] 카자흐스탄 제티수 주 인근[6] 볼가 강 하류[7] 주치는 칭기즈 칸 이전에 죽었기 때문에 이는 곧 주치의 아들 바투의 영지를 의미하는 것이었다.[8] 그러나 이중 민병대가 2/3이었다고 한다.[9] 귀위크로 대표되는 오고타이 가문 및 차가타이 가문[10] 단, 함께 왕따를 당하던 툴루이 가문과는 꽤 친했다.[11] 그 중에서도 특히 오고타이의 장남이었던 귀위크와 사이가 가장 나빴다. 일반적으로 사촌들이 혈통 문제를 걸고 넘어지며 바투에게 모욕을 주었다고 추측되나, 김호동 교수는 서방 원정 중에 바투가 보여준 무능함에 사촌들이 분노했기 때문이라고 추측했다. 그러나 원정 이전부터 귀위크 등 오고타이계 및 차가타이계 사촌들과는 이미 사이가 좋지 않았고, 이들의 분쟁에서 오고타이 칸이 바투의 손을 들어준 것은 그의 무능력을 옹호한 건 아니었을 것이다.[12] 현재 우크라이나 영토인 자카르파탸가 1918년 이전까지는 헝가리 영토였다. 그래서 헝가리 동부에는 슬라브계 귀족들이 제법 있었다. 헝가리와 슬라브 사이의 관계가 완전 낯설지만은 않았던 것이다.[13] 폴란드와 헝가리는 옛부터 지금까지 최우방으로, 동맹까지 맺는 친밀한 관계였다.[14] 차가타이 칸의 차남[15] 주치의 장남, 총사령관 바투의 형[16] 오고타이 칸의 아들[17] 당시 신성 로마 제국유럽의 중심이자 로마의 정통 후계국이라는 인식이 강했으며 굉장한 상징성을 가진 국가였다.[18] 헝가리 왕국은 라슬로 1세부터 크로아티아와 동군연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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