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스피 해의 어느 섬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무함마드 |
1. 개요
페르시아어: علاءالدین محمد خوارزمشاه (ʿAlā al-Dīn Muḥammad)1169년 ~ 1220년
호라즘 왕조의 제7대 술탄으로, 호라즘의 무함마드 2세라고도 불린다. 부왕 알라 웃딘 테키시(1132~1200)와 튀르크계 유목민 출신의 테르켄 하툰(1148~1233)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의 치세에 호라즘 왕국은 최전성기를 이루었지만 이 막강한 국력이 도리어 왕조의 멸망을 초래하고 말았는데, 하필 그의 치세에 칭기즈칸이 이끄는 세계 최강의 몽골 제국이 세력을 확대하고 있었기 때문. 이에 대해서는 후술한다.
2. 생애
2.1. 호라즘 왕조의 최전성기를 이끌다
한국에는 칭기즈 칸에게 공격당해 나라를 말아먹은 왕으로 흔히 알려져있지만 무능한 왕은 결코 아니었으며 객관적으로 보면 오히려 굉장히 유능한 군주였다.아버지대부터 급속도로 확대된 호라즘 제국을 물려받아 1204년, 고르 왕조의 무이즈 앗 딘 무함마드(무함마드 고리)의 호라산 침공을 격퇴하고 역으로 고르 왕조의 거점인 헤라트를 빼앗았으며, 1215년 고르 왕조를 아예 멸망시켜버렸다. 이어 1210년에는 서요와 단교하고 지금의 우즈베키스탄 중부에 있던 마와라안나훌을 장악하였으며 같은해 타바리스탄의 바반드 왕조를 멸망시켜 버린다, 1212년에는 서카라한 왕조를 멸망시킨 뒤 사마르칸트를 손에 넣는다. 이로써 무함마드 2세대에 호라즘 왕조는 서쪽으로는 이라크에 있던 아바스 왕조를 압박하고, 동쪽으로는 막 서요를 무너뜨린 몽골 제국과 맞닥트리는 최대 영토를 확보한다. 또한 이 때 그는 동방의 알렉산더, 제2의 알렉산더, 지상의 알라, 알라의 그림자라고 불리면서 호라즘과 그의 위상은 중앙아시아 및 이슬람권 지역에서 명성을 떨치게 된다.
이렇게 몽골 제국과 맞닥트리면서 교류를 실시했고 무하마드2세도 칭기즈 칸도 양측이 꽤 국력이 강하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어서 일단 서로 척지지 말자고 생각하며 교역을 진행했다. 게다가 칭기즈 칸도 금나라와 서요가 가장 눈엣가시였기에 호라즘을 적대해봤자 그리 좋은 일이 아니라고 판단까지 하던 상황이었다.
그러나 몽골 제국과의 한 사건이 훌륭한 군주였던 그의 몰락을 초래한다.
2.2. 망국의 군주가 되다
1218년, 몽골 제국은 통상 사절단을 호라즘에 파견한다. 그러나 호라즘의 국경도시 오트라르의 총독 이날축(Inalchuq)이 통상 사절단을 간첩 혐의로 살해하는 사건이 발생한다.[1]당연히 칭기즈 칸은 사신을 호라즘 제국으로 보내 공식 사과와 함께 이날축을 처벌하라고 요구한다. 그런데 문제는 당시 오트라르 총독이었던 이날축이 무함마드의 모후인 테르켄 카툰의 사촌이었다는 것. 그래서 태후 테르켄 카툰은 이날축의 처벌에 반대하였고, 무함마드도 칭기즈 칸의 사신이 갖고 온 편지의 내용[2]에 모욕을 느껴, 몽골측 항의서신을 가지고 온 사신을 살해하고 같이 온 무슬림은 수염을 깎아서 돌려보냈다. 예나 지금이나 수염은 남성성의 상징이었고, 특히 당시시대 남성에게 수염을 깎이는 것은 큰 모욕이었기에, 돌아온 사신단의 몰골과 이야기를 보고 진심으로 격노한 칭기즈 칸인데다가 일단 금나라, 서요를 일단 꺾어놓은 상황이어서 결국 1219년 대대적인 침공을 감행했다.
호라즘은 명장 티무르 말릭을 중심으로 몽골 군에 나름대로 저항하였으나 갑작스런 (혹은 무리한) 영토 확장으로 인해 유목민들을 비롯한 현지 주민들의 반감을 사 이들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였고[3], 상기한 이날축 문제에서도 드러났듯이 어머니 테르켄 카툰과 그 친정가인 칸그리 부족을 비롯한 여러 부족들과의 대립으로 인해 군대를 집중해 대회전을 시도할 생각은 꿈도 못 꾸었으며[4], 사마르칸트·부하라 같은 각 도시에 군대를 분산하여 몽골 군에 맞서다가 몽골 군의 각개격파로 전부 박살났다.
몽골에게 잡히면 끝장이라는 생각에[5] 무함마드는 이후 니샤푸르를 거쳐 카스피 해의 외딴 섬[6]까지 도망갔다가 거듭된 도주로 인한 극도의 불안감과 피폐함 등으로 인해 1220년 병에 걸려 사망했다. 한때 호라즘 왕국의 최전성기를 이끌었던 명군이라 불렸던 무함마드는 칭기즈 칸을 과소평가한 정치적 판단미스 하나로 나라를 통째로 잃었으며 자기 자신도 그의 유언(“그토록 넓은 영토를 다스리던 내가 지금은 무덤 하나 정할 땅조차 없이 죽는구나...”)처럼 비참하게 죽고 말았다.
이로써 호라즘 왕국은 사실상 멸망했으며 그의 장남 잘랄 웃딘이 술탄을 칭하며 몽골군에 끈질기게 저항하지만 몽골군에게 밀려 결국 인도로 피신했다. 인도의 도움을 얻는데 실패한 잘랄 웃딘은 이후 이란 북부, 캅카스, 아나톨리아 일대를 돌아다니며 저항운동을 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고 끝내 몽골에 패해 사망하게 된다.
3. 평가
몽골에게 허망하게 패배하고 그 거대한 제국을 송두리째 먹히면서 저평가받는 면이 있으나 분명 호라즘의 최전성기를 이끈 유능한 군주였다. 몽골과의 전쟁에서 취한 분산배치를 통한 농성 전략도 내부 반란의 우려와 호라즘 특유의 지형을 믿고 세운 나름 합리적인 전략이었고, 잘랄 웃 딘이 주장한 병력을 모아 회전을 벌이는 전략도 그 속을 들여다보면 뚜렷한 한계가 있다는 점에서[7] 마냥 아들보다 못한 군주였다고 저평가하기는 어렵다.따라서 알라 웃 딘이 저지른 가장 큰 실책이라면 급격히 팽창한 제국의 상태가 불안정함에도 불구하고 지나친 자신감에 차서 몽골을 상대로 도발을 했다는 점이 있을 것이다. 그나마도 그동안 그의 주변국들은 호라즘에게 늘상 두들겨 맞기만 했기에, 몽골 역시 그럴거라 오판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결국 몽골군의 그의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밸런스 파괴 수준의 강군이었던 것이 그의 불운이었고, 지속적인 성공으로 자신감이 지나쳤던 것이 화를 불렀던 셈.
[1] 신화 위키의 호라즘 항목에 따르면, 이날축은 당시 '가이르 칸'이라는 호칭을 갖고 있었는데 통상 사절단 중 힌두인 상인이 그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고 예의를 갖추지 않아 불만을 갖고 있던 차에 그들이 가지고 온 공물에 욕심이 생겨 사절단을 죽였다고 한다.[2] 무함마드를 '사랑하는 나의 아들'이라고 호칭했다. 그런데 여기에 따르면 몽골에서는 이러한 표현이 친근함의 표현에 불과하지만, '지상의 알라'로 스스로를 여기던 무함마드에게는 상당한 모욕이었다고 할 만큼 서로 문화적 차이로 인한 오해로 시작되었다. 나이도 무함마드 2세가 연하인건 맞지만 7살이 적을 뿐이라 모르는 사람 입장에서는 대단히 모욕적으로 느낄만도 하다.[3] 그리고 몽골 군이 쳐들어오자 이들은 잽싸게 몽골 군의 편이 된다.[4] 이들이 전투 중 배신이라도 때리면 패배는 물론 자신의 목숨까지 위태롭다. 실제로 회전 중 군대 일부가 배신해 패배한 사례는 굉장히 많다.[5] 무함마드가 달아났다는 말에 제베와 수부타이를 파견하며 "그 자가 어디로 도망가던 나는 그를 끝까지 뒤쫒을 것이다. 그를 숨기는 곳은 전부 폐허로 만들어버리겠다"라고 선포했다고 한다. 실제로 했는지 안 했는지는 좀 불확실하지만 이날축 정도는 아니어도 외교적 쌍욕을 퍼부은 그가 붙잡였을 때 죽임을 당할 거라는 두려움은 당연했다.[6] 아베스쿤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는 섬이었는데 현재는 물에 잠겨서 존재하지 않는다.[7] 대규모 회전을 벌인다면 많은 병력의 이점을 살릴 수는 있겠으나, 역으로 회전에서 패배할 경우 그대로 야전군이 증발해버리기에 이후에 몽골군에게 실제 역사보다 더욱 쉽게 제국 전체가 먹혔을 가능성이 높다. 게다가 회전을 벌이기엔 내부 반란의 우려도 있었고, 몽골군은 이미 금나라와의 전쟁에서 다수의 군대를 회전으로 숱하게 격파한 바가 있어 호라즘군이라고 해서 승리를 장담하기는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