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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실리오 피치노 라틴어: Marsilius Ficinus[1] 이탈리아어: Marsilio Ficino | |
출생 | 1433년 10월 19일 |
피렌체 공화국 필리네발다르노 | |
사망 | 1499년 10월 1일 |
피렌체 공화국 카레지의 메디치 빌라 | |
직업 | 의사, 철학자 |
학파 | 신플라톤주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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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이탈리아 토스카나에 있던 피렌체 공화국의 의사, 인문주의자, 신플라톤주의 철학자. 플라톤을 깊게 연구해 플라토닉 러브라는 말을 재창조한 인물이며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대표적인 철학자로 꼽힌다. 저명한 메디치 가문의 후원 아래 피렌체 아카데미를 이끌었으며, 플라톤의 모든 작품, 플로티누스의 엔네아데스와 주요 신플라톤주의자들의 작품들을 라틴어로 번역했다. 그리스 원전을 라틴어로 번역하고 해석함으로써 플라톤주의를 서유럽으로 귀환시키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 인물로 평가받는다.2. 생애
그의 아버지는 코시모 디 조반니 데 메디치의 후원을 받던 의사였으며 마르실리오 역시 코시모의 후원을 받던 학자였다.1437년부터 개최된 페라라-피렌체 공의회에서 동방 정교회와 서방 가톨릭 교회의 분열을 치유하려는 시도가 실패한 동안, 코시모 디 조반니 데 메디치와 이탈리아 지식인들은 신플라톤주의 철학자 게오르기오스 게미스토스 플레톤을 알게 되었다. 그는 피렌체의 인본주의자들을 몹시도 매료시켜서 그들은 그를 제2의 플라톤이라고 이름지었다.[2] 이때 플레톤과 함께 피렌체 공의회에 왔던 그리스 철학자 요안 아르기로포울로스[3]는 동로마 제국이 멸망한 이후 모레아를 거쳐 1456년 피렌체로 망명하여 그리스어와 문학을 강의했고, 피치노는 그의 제자가 되었다.[4]
플레톤에게 깊은 영향을 받은 코시모는 피렌체에 플라톤의 아카데미아를 부활시킬 목적으로 그가 가진 수많은 저택들 가운데 일부를 학술기관으로 사용하기로 결정했다. 1462년 코시모는 피치노에게 플라톤의 작품에 대한 그리스어 필사본을 제공했다. 이를 토대로 피치노는 플라톤 전작을 라틴어로 번역하기 시작했다. 중세 서유럽에서 플라톤 저작 가운데 라틴어로 번역된 것은 소수에 불과했다. 피치노는 장기간의 노고 끝에 1484년 마침내 플라톤 전작의 라틴어 번역을 출간했다. 그의 번역은 이후 300년 이상 플라톤 연구의 표준이 되었다. 피치노는 고대 후기의 신플라톤주의 관점에서 플라톤을 해석했기 때문에 신플라톤주의자라고 할 수 있다.[5] 다만 그는 플레톤과 달리 기독교를 신플라톤주의적 이성으로 설명할 수 있다고 믿고 신플라톤주의를 신봉했다.#
또한 그는 플라톤 저작의 이해를 돕기 위해 요약과 해설을 제공했으며, 일부 저작에 대해서는 주해서를 집필하기도 했다. 나아가, 그는 중세 서구에 직접적으로 알려져 있지 않던 고대 후기 플라톤주의자들의 주요 저술들을 번역함으로써 플라톤주의 연구의 지평을 확대했다.
3. 기타
오늘날 육체적 사랑과 대비되는 정신적인 사랑을 의미하는 플라토닉 러브를 처음 쓴 사람이 바로 피치노다. 피치노는 플라톤의 에로스 개념과 아리스토텔레스, 키케로, 단테의 개념 등을 결합하면서 '플라토닉 러브'라는 개념을 재해석하여 만들어낸다. 그에 따르면 '플라토닉 러브'는 플라톤이 묘사한 사랑이고, 그것은 즉 신의 사랑이었다. '플라토닉 러브'는 마르실리오 피치노의 편지와 그가 주석을 단 <향연>과 에서 처음 쓰였다. 피치노의 '플라토닉 러브' 개념은 15,16세기 전반 유럽의 문학에 큰 영향을 끼쳤다.또한 헤르메스 트리스메기스투스 그리스어 문서들을 라틴어로 번역하여 유럽의 연금술이나 오컬트, 마법, 점성술, 신비주의에도 영향을 미쳤다.
[1] 마르실리우스 피키누스[2] 피치노 역시 그를 제2의 플라톤이라고 공경했다.[3] 15세기 이탈리아에서 고전 그리스 학문의 부흥을 개척한 그리스의 이주 학자 중 한 명으로 모레아 전제군주국에서 일했으며 피렌체 공의회의 동로마 사절단의 일원이다.[4] 코시모는 1456년에 아르기로포울로스를 불러 피렌체로 이주시켰으며, 피치노가 나이가 들고 학식이 높아지자 몬테베키오의 별장에서 인근 카레지 별장으로 불러 단둘이 만나거나 때로는 여러 친구들과 어울려 철학적 문제를 밤늦게 토론했다고 한다.[5] '신플라톤주의'(Neoplatonism)는 고대후기 플로티누스와 그의 학파의 사조를 지시하기 위해 근대에 도입된 용어이다. 신플라톤주의는 플라톤주의 전통에 속하며, '신플라톤주의자'들은 스스로를 '플라톤주의자'라고 불렀다. 마찬가지로 피치노도 자신을 플라톤주의자라고 여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