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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 존속 기간: 1349년 ~ 1460년
동로마 제국의 제후국으로 수립되어 본국인 로마 제국이 멸망한 이후에도 존속하다가 내분으로 멸망한 나라.
2. 역사
4차 십자군 이래 모레아[1]는 십자군 국가인 아카이아 공국의 지배 아래 있었다. 1259년 옛 동로마 제국 영토 일대에서 패권을 장악하고 콘스탄티노폴리스 수복이 임박한 니케아 제국과 이피로스 전제군주국, 아카이아 공국, 시칠리아 왕국의 반(反) 니케아 동맹군이 격돌한 펠라고니아 전투에서 니케아가 승리를 거둔 후 아카이아 공작 기욤 드 빌아르두앵(Guillaume de Villehardouin)은 니케아 황제 미하일 8세에게 포로로 잡혔다. 포로로 잡힌 기욤은 니케아의 감옥에 3년 넘게 수감되어 있다가 미하일 8세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수복하고 동로마 제국을 재건한 1262년, 석방되는 조건으로 펠로폰네소스 반도 남동쪽의 미스트라스, 그랑마뉴, 모넴바시아의 3개 요새를 동로마 제국에 할양했다. 4차 십자군 이후 처음으로 다시 모레아에 발을 딛은 동로마 제국은 이 지역을 거점으로 아카이아 공국과 수 차례 전쟁을 벌이며 영토를 확장했다.1308년, 안드로니코스 2세는 모레아 지역의 방위를 위해 칸타쿠지노스 가문의 미하일 칸타쿠지노스에게 '데스포티스' 작위를 하사하고 모레아 지역을 통치하게 했다.[2] 1320년부터 동로마 제국의 황족이였던 콘스탄티노스 아센[3]의 원정으로 동로마 제국의 모레아 영토는 점차 늘어났고, 이후 모레아의 데스포티스는 계속 칸타쿠지노스 가문이 세습했지만 공식적으로 하나의 번국을 이룬 것은 아니었는데, 1349년 요안니스 5세와의 내전 끝에 황제 자리에 오른 칸타쿠지노스 가문의 요안니스 6세는 모레아의 데스포티스인 자신의 아들 마누일 칸타쿠지노스에게 안정적인 기반을 만들어주기 위해 정식으로 모레아를 데스포티스가 통치하는 번국으로 개편하였다. 이후로도 모레아 전제군주국은 칸타쿠지노스 가문이 계속해서 다스리다가 1383년에 황가인 팔레올로고스 가문에게 넘어갔다.
동로마의 국운이 다해서 바람 앞의 등불이나 다름 없던 요안니스 8세 재위 기간 동안 모레아는 요안니스 8세의 동생인 콘스탄티노스, 디미트리오스, 토마스가 공동 통치하고 있었다. 그 중 콘스탄티노스와 디미트리오스는 요안니스 8세 사후 제위 계승권을 놓고 분쟁을 벌였는데, 콘스탄티노스가 오스만 술탄국의 술탄 무라트 2세의 지지를 받아 황제 콘스탄티노스 11세로 즉위했다.
콘스탄티노스 11세는 오스만 술탄국의 지지를 받아 즉위했지만 오스만의 위협으로부터 나라를 지키기 위해 헌신하여, 마지막 전투에서 최후까지 결사항전하다가 장렬하게 전사했는데, 그의 죽음과 함께 2,200여년을 이어온 로마 제국은 최후를 맞이했다.
이렇게 제국이 멸망한 이후에도 제후국인 모레아 전제군주국은 당분간은 독립을 유지할 수 있었으나, 공동 통치자인 디미트리오스와 토마스가 권력 투쟁을 벌이면서 암울해지기 시작했다. 그들은 모레아의 단독 통치자가 되고 명목상의 로마 황제 칭호를 계승하기 위해 치열한 암투를 벌였는데, 1460년에 이르러 정쟁이 극에 달하자 디미트리오스는 동생 토마스를 축출하기 위해 형을 죽인 원수인 술탄 메흐메트 2세를 끌어들였다.
토마스는 오스만 제국과 디미트리오스의 연합군을 이기지 못하고 교황령으로 망명했다. 디미트리오스는 술탄의 제후가 되어 모레아의 단독 통치자가 되길 희망했으나, 술탄은 그를 가택연금에 처하고 모레아를 오스만 제국의 직할령으로 만들었다.[4]
이로써 모레아 전제군주국은 본국과는 달리 내분으로 허무하게 멸망하였고, 교황령으로 망명했던 토마스는 교황에게 명목상으로나마 황제 대접을 받다가 1465년에 사망했다. 그리고 명목상의 로마 황제위와 모레아 전제군주 작위는 그의 아들 안드레아스 팔레올로고스가 승계했는데, 안드레아스는 방탕하게 살면서 교황에게 지원받은 돈을 탕진하여 프랑스의 샤를 8세, 스페인의 이사벨 1세와 페르난도 2세에게 제위를 팔아넘기고 비참하게 살다가 1502년에 사망했다.[5] 다만 학자들 사이에서는 교황에게서 받은 생활비 자체가 부족했기에 방탕하고 뭐고 할 것도 없었다고 본다. 이때 안드레아스에겐 자식도 없었기에 동로마의 마지막 황실인 팔레올로고스 왕조의 직계 혈통은 단절되었다.[6][7]
모레아의 수도였던 미스트라스는 그 유명한 스파르타와 가까우며, 변변한 옛 유적이 남아 있지 않는[8] 스파르타에서 유적이라 하면 이 시기에 세워진 유적이 많다.
3. 역대 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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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 팔레올로고스 | 안드레아스 팔레올로고스 | }}}}}}}}}}}}}}} |
[1] 펠로폰네소스 반도는 중세 시대에 모레아라고 불렸다.[2] 미하일의 가문명을 보고 눈치 챘을 수도 있겠는데, 훗날 일시적으로 팔레올로고스 왕조로부터 제위를 찬탈하는 요안니스 6세와 같은 칸타쿠지노스 가문 출신이다.[3] 불가리아 제국의 황제 이반 아센 3세의 아들과 이리니 팔레올로기나 사이의 아들로, 이리니 아사니나의 아버지다.[4] 이후 디미트리오스는 에디르네에서 감금 생활을 하다가 1470년에 사망했다.[5] 그러나 프랑스와 스페인의 왕들은 진지하게 황제 칭호를 산 것이 아니라, 거지에게 적선하는 마음가짐으로 돈을 준 것이라서 실제로 칭제하진 않았다.[6] 안드레아스의 누나 조이가 소피아로 개명하고 모스크바 대공국의 이반 3세와 결혼하여, 그녀의 후손들이 차르로 군림하긴 했는데, 그녀의 혈통은 17세기 초에 단절되어 이후에 제위를 차지한 로마노프 왕조에는 팔레올로고스의 피가 흐르지 않는다.[7] 잘 알려지진 않았지만 이탈리아 반도의 몬페라토 변경백국은 안드로니코스 2세의 아들을 시조로 하는 팔레올로고스의 방계 가문이 통치하고 있었는데 만토바 공국의 곤차가 가문과의 혼인을 통해 곤차가 가문에 그 혈통이 섞이게 되었고, 다시 곤차가 가문의 일원이 로렌 가문의 일원과 혼인했고, 나중에는 로렌 가문 출신의 프랑수아 에티엥이 마리아 테레지아와 결혼하여 합스부르크-로트링겐 가문에 미약하게나마 팔레올로고스의 피가 흐르게 되었다. 다만 합스부르크-로트링겐 가문은 신성 로마 제국의 후계국인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제위를 요구하는 것과 별개로 동로마 제국의 황제위는 요구하지 않고 있다.[8] 검소함을 숭상하여 이렇다할 거대한 건축물을 남기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