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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미상 |
사망 | 미상 |
아버지 | 안드로니코스 아센 |
어머니 | 타르카나이오티사 |
형제자매 | 마누일 콤니노스 라울 아사네스, 요안니스 아사네스, 옐레니 아사니나 |
남편 | 요안니스 6세 |
자녀 | 마테오스, 마누일 칸타쿠지노스, 안드로니코스 칸타쿠지노스, 마리아 칸타쿠지니, 테오도라 칸타쿠지니, 엘레니 칸타쿠지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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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동로마 제국 팔레올로고스 왕조의 아우구스타, 동로마 황제 요안니스 6세의 황후.2. 생애
동로마 제국 모레아 속주의 에피트로포스(epitropos)를 역임한 안드로니코스 아센과 마하일 두카스 글라바스 타르카네이오테스의 딸인 타르카나이오티사의 2남 2녀 중 셋째 딸로 출생했다. 그녀의 친할머니는 이리니 팔레올로기나로, 동로마 황제 미하일 8세와 테오도라 팔레올로기나 황후의 딸이다. 이리니는 요안니스 칸다쿠지노스와 결혼하여 마테오스, 마누일 칸타쿠지노스, 안드로니코스 칸타쿠지노스, 마리아 칸타쿠지니, 테오도라 칸타쿠지니, 엘레니 칸타쿠지니 등 여섯 남매를 낳았다.요안니스 칸타쿠지노스는 안드로니코스 3세의 충실한 조언자로, 제국이 오랜 침체에서 벗어나 외세에 적극적으로 맞서는데 상당부분 기여했다. 그러던 1341년 6월 14~15일 안드로니코스 3세가 열병에 시달리다 사망했고, 장남 요안니스 5세가 뒤를 이었다. 하지만 그의 나이는 9세에 불과했기 때문에, 상황은 매우 위태로웠다. 이에 칸타쿠지노스는 사보이아의 안나 황후가 아들의 섭정을 맡게 하였다. 그러나 안나 황후는 칸타쿠지노스가 찬탈하려 할지도 모른다고 의심했다. 그녀는 알렉시오스 아포카브코스, 총대주교 요안니스 칼레카스와 연합하여 칸타쿠지노스를 제거할 음모를 꾸몄다.
1341년 7월 중순 요안니스가 세르비아, 불가리아, 오스만 베이국의 침략에 맞서기 위해 자비를 들여 군대를 충원한 후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떠났다. 그는 세르비아의 스테판 두샨, 불가리아의 이반 알렉산더르, 오스만 베이국의 오르한과 두루 조약을 맺어 평화를 이룩한 후 9월에 수도로 귀환했다. 얼마 후, 아카이아 공국이 제국에게 귀순한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요안니스는 협상을 하기 위해 군대를 이끌고 9월 23일 트라키아로 갔다. 안나 황후는 이때를 틈타 칸타쿠지노스를 국가의 적이라고 선언하고 작위를 박탈하고 재산을 몰수했다.
칸타쿠지노스는 이에 맞서 1341년 10월 26일 디디모티코에서 병사들의 추대를 받아 황제 요안니스 6세로 즉위하였고, 이리니는 남편의 곁에서 황후로 즉위했다. 이리하여 제2차 팔레올로고스 내전이 발발했다. 불가리아는 요안니스 5세와 안나 황후의 편을 들었고, 세르비아의 스테판 두샨은 요안니스 6세를 지원했다. 또한 오스만 베이국의 오르한 1세도 내전에 개입해 요안니스 6세를 지원했고, 베네치아, 제노바도 내전에 가담했다. 요안니스 6세가 발칸 반도 각지를 돌며 세력을 키우는 동안, 이리니는 디디모티코에서 정부를 운영했다.
1347년 2월 3일, 6년에 걸친 내전 끝에 양측이 합의했다. 요안니스 6세는 수석 황제가 되었고, 요안니스 5세는 공동 황제가 되었다. 또한 요안니스 5세와 요안니스 6세의 딸 엘레니 칸타쿠지니가 결혼했다. 이렇게 평화가 겨우 도래한 듯했으나, 1352년 요안니스 5세가 제3차 팔레올로고스 내전을 일으켰다. 이에 요안니스 6세는 요안니스 5세를 폐위하고 아들 마테오스를 공동 황제로 지명했다. 그러나 상황은 점점 요안니스 5세 쪽으로 유리해졌고, 결국 1354년 12월 4일 콘스탄티노폴리스가 넘어가자 요안니스 6세와 이리니 황후는 함께 퇴위했다. 그녀는 키리아 마르타 수녀원의 에우제니아 수녀로서 말년을 보냈다. 그녀가 언제 사망했는지는 기록이미비해 알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