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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소피아 대성당의 기둥에 새겨져 있는, 아우구스타를 상징하는 모노그램 | |
라틴어 | Augusta / Augustae(복수형) |
그리스어 | αὐγούστα |
영어 | Augusta[1] |
중국어 | 오고사탑(奥古斯塔) , 아오고사탑(阿烏古斯塔) |
1. 개요
로마 제국과 동로마 제국에서 황후 등 지배 계급의 여성에게 수여하던 경칭. 아우구스투스의 여성형 표현으로, 기원전 27년부터 시작된 로마 공화국 프린키파투스 시대 이래 로마 여성이 받을 수 있는 최고의 영예로운 칭호 중 하나이다. 종종 동양에서 황후로 번역되나, 실은 그보다 폭넓은 개념의 칭호로 로마 황제의 아내뿐만 아니라 어머니, 딸, 누나, 여동생 등 황가의 여성들에게도 부여되었다.2. 역사
이 칭호를 최초로 부여받은 사람은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의 아내이자 2대 황제 티베리우스의 어머니 리비아 드루실라이며, 황제의 아내가 아닌 여성으로 이 칭호를 최초로 수여받은 이는 대 드루수스[2]의 아내, 리비아 드루실라의 며느리이자 4대 황제 클라우디우스 1세의 어머니인 소 안토니아[3]다.클라우디우스 1세의 계후 소 아그리피나가 아들 네로 때 아우구스타 칭호를 갖고 사실상 여제로 군림한 이래, 로마인들에게 황후, 공주 개념을 벗어난 칭호 개념으로 그 의미가 확대됐다. 따라서 이 시기부터 자신의 이름으로 동전을 발행하고 보라색 복식을 입을 권리가 부여됐다.
네로 아래에서 황제의 딸에게 수여되는 선례가 만들어졌다. 그러나 네로 시대의 혼란을 수습한 플라비우스 왕조 아래에서 아우구스타 칭호는 현직 황제의 배우자 외에는 수여되지 않았다.
서기 2세기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 이래, 이 칭호는 로마 황제의 여자 형제, 딸, 며느리, 조카 등에게 수여되거나 죽은 사람에게 추증되는 형태로 여자 황족들의 지위를 뜻하는 개념처럼 되었으나 이런 모습에도 불구하고 아우구스타 칭호는 현직 황제의 아내에게 우선적으로 수여되었다.
또 아우구스타 칭호는 원로원과 황제가 주는 영예를 받을 수 있는 필수 조건 직책이 되도록 조치가 취해져, 이때부터는 황제와 마찬가지로 이를 만장일치로 수여하는 원로원에서 기록말살형의 처벌 근거로 사용되게 됐다. 즉, 2세기부터 아우구스타 칭호를 수여받은 여성이 복수일 경우에도 그 차이를 두도록 조치가 취해졌고, 아우구스타가 복수일 경우에도 황제의 어머니, 아내, 여자형제 사이에서 그 영예가 구분되도록 조치가 취해졌다.
서기 3세기 초 세베루스 왕조의 아우구스타 율리아 돔나가 최초로 태후에 해당되는 칭호인 '피아 펠릭스 아우구스타'를 수여받은 이래 그 직이 보다 세분화됐다. 이 시기부터 아우구스타는 '마테르 세나투스[4]', '마테르 카스트로룸[5]', '마테르 파트리아에[6]' 등의 칭호를 부여받을 수 있었다.
세베루스 왕조의 시리아 에메사 왕가 출신 여인들 아래에서 아우구스타 칭호가 특권화되고, 섭정 혹은 여제 비슷한 칭호로 남용됐다. 이때의 아우구스타는 황제와 같은 상징 색상 외에도 독자적인 비서 기구와 경호부대 등을 함께 보유했다. 따라서 세베루스 왕조 아래의 일명 '에메사 여인들' 또는 '시리아 여인들'은 어떤 선대, 후대 아우구스타보다 가공할 권력을 누렸다.
율리아 돔나는 남편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사망 직후, 상술한 피아 펠릭스 아우구스타 칭호를 황제의 제호처럼 사용했고, 수많은 공식적인 지위와 영예를 아우구스타 칭호에 더했다. 아울러 율리아 돔나는 아들 카라칼라와 함께 광범위한 군사 원정과 지방 순회를 나서며, 황제의 파트너 아우구스타 등극 체제를 완성했다.
엘라가발루스 시대에 이르게 되면, 율리아 돔나의 자매로 엘라가발루스의 외조모인 율리아 마이사 아래에서 아우구스타 칭호는 여제(女帝)로 완전히 굳어졌다.
율리아 마이사는 세베루스 왕조 복권 직후, 원로원에게 '아우구스타, 마테르 카스트로룸 에트 세나투스, 아비아 아우구스티(Augusta, mater Castrorum et senatus, avia Augusti, 아우구스타, 병영 및 원로원의 어머니, 황제의 할머니)'라는 제호를 수여받았다. 이 칭호를 통해 율리아 마이사는 원로원에 공식적으로 세나쿨룸을 설치해 이 특별 기구의 최고 위원이 되어 노골적으로 원로원에서 발언권을 행사했다. 그러나 세나쿨룸은 엘라가발루스와 엘라가발루스의 어머니인 율리아 마이사의 장녀 율리아 소아이미아스가 푸블리우스 발레리우스 코마존이 이끈 프라이토리아니 손에 살해되고, 이들 모자가 사실상 기록말살형에 처해지면서 폐지됐다. 이때 율리아 마이사는 근위대장 코마존, 플라비우스 안티오키아누스와 함께 이 사건을 계획했고, 사건 직후 자신이 책임져야 할 문제를 취임한지 얼마 되지 않았던 안티오키아누스에게 덮어 씌워, 그를 처형하고, 코마존을 강제 은퇴로 내몰았다. 동시에 그녀는 또 다른 외손자로 차녀 율리아 마마이아의 아들 세베루스 알렉산데르를 황제로 승인받아, 교묘하게 엘라가발루스 시절에 받은 경칭과 명예를 보존했다.
율리아 마이사 사후, 세베루스 알렉산데르 황제의 모후 율리아 마마이아 아래에서 아우구스타 칭호는 황제처럼 여제와 완전히 일치된 자리로 재해석됐다. 율리아 마마이아는 이모 율리아 돔나, 어머니 율리아 마이사, 언니 율리아 소아이미아스와 달리 아우구스타 칭호를 자신의 사유재산처럼 독식했고, 스스로를 율리아 아비타 마마이아 아우구스타라는 제호 아래 아들 알렉산데르 황제와 함께 통치하는 공치제로 등극했다. 하지만 그녀의 이런 행동은 아들 알렉산데르 황제 재위 초반의 안정에 기여했을 뿐, 제위를 흔들고, 원로원과 로마군의 법적 지위를 크게 훼손시켰다. 따라서 알렉산데르 마마이아라는 조롱과 비난을 노골적으로 받았고, 세베루스 왕조가 무너진 순간, 율리아 마마이아는 정치에 개입해 제국에 폐를 끼친 죄목 아래 원로원의 의결로 기록말살형에 처해졌다.[7]
군인황제시대에 이르러 아우구스타는 세베루스 왕조 시절과 달리,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집권 이전처럼 황제의 아내, 황제의 딸, 황제의 여자형제를 위한 경칭으로 회귀했다. 따라서 고르디아누스 3세의 아내 트란퀼리나, 필리푸스 아라부스의 아내, 필리푸스 2세의 어머니 마르키아 오타킬리아 세베라나 데키우스의 아내 헤레니아 에트루킬라 등은 세베루스 왕조 시절의 시리아인 아우구스타와는 다른 모습을 보여줬고, 권력을 잃는 순간 아우구스타 칭호를 보유했다는 이유로 처형, 추방되는 일을 겪지 않았다. 그렇지만 갈리에누스 황제의 정실 코르넬리아 살로니나는 갈리에누스 황제의 계모이자 발레리아누스 황제의 아내 코르넬리아 갈로니아와 달리, 아우구스타로 누린 권력이 컸고, 갈리에누스 아들들의 정통성 기반이 된 배경으로 율리아 마마이아의 예에 따라 참수되고 사후 명예가 박탈됐다.
[1] /ɔɡʌ́stə/로 읽는다.[2] 아우구스투스의 양자로 리비아 드루실라의 차남.[3] 아우구스투스의 친조카로,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와 소 옥타비아의 막내딸이다.[4] Mater Senatus, 원로원의 어머니[5] Mater Castrorum, 공동체/병영의 어머니[6] Mater Patriae, 조국의 어머니[7] 중대한 사안이었고, 황제와 원로원, 군대 모두의 지위 문제와 연관된 사안이라는 현실로, 막시미누스 트라쿠스가 몰락한 뒤 세베루스 알렉산데르가 복권된 이후에도 이 조치는 철회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