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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우구스투스(Augustus)는 로마 제국 황제를 의미하는 칭호다. 로마의 초대 황제인 옥타비아누스가 최초로 사용한 고대 로마의 칭호다. 아우구스투스의 여성형 명사인 아우구스타(Augusta)는, 최초의 아우구스투스가 된 옥타비아누스가 자신의 아내 리비아 드루실라에게 유언장을 통해, 서기 14년 이름을 율리아 아우구스타로 개명하게 하면서부터, 로마 제국과 동로마 제국의 여제나 황후들에게 주어지는 칭호가 되었다. 로마 제국이 멸망한 뒤 이 칭호는 귀족 남자들의 이름에 종종 사용되기도 했다.2. 상세
'아우구스투스(Augustus)'는 '증가'를 의미하는 라틴어 단어 'augos'에서 파생된 용어[1]로, '고귀한 자'를 의미한다. 옥타비아누스가 칭호로 채택하기 전에는 로마 다신교에서 다소 모호하게 쓰이는 경칭이었다. 갈리아 키살피나 속주에서 발견된 기원전 58년에 세워진 비문에는 로마 가정의 신 라레스를 아우구스투스로 지칭했으며, 라틴어 시와 산문에서는 이미 신성하거나 종교적인 객체가 더욱 고양되거나 확대되는 것을 표현하는 용어로 사용되었다. 일부 사료에서는 신들의 계시를 새점 등을 통해 알아볼 수 있는 아우구르가 지닌 영험한 기운을 '아우구스투스'라고 밝히기도 했다.기원전 28년, 내전의 유일한 승리자가 된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옥타비아누스가 원로원에서 제2차 삼두정치 하의 공화정을 공개 지적, 비판했다. 그는 옥타비아누스파의 부당함 대신 숙적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와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를 중심으로 한 이들이 이 체제 아래에서 명령을 편법, 불법 아래 정례화했다고 했다. 따라서 그는 치유와 평화 아래 이 모든 것을 본인이 수여받아 행사 중인 권력 아래 무효화했다. 그리고 기원전 27년 1월 13일, 옥타비아누스는 다음과 같이 발표한다.
"새로운 공화정 체제의 회복, 새로운 공화국으로의 복구"
이 발표 후, 옥타비아누스는 자신이 비상 대권을 받은 모든 권력을 로마 원로원과 로마 시민에게 되돌리겠다고 발표했다. 그러자 로마 원로원은 어리둥절하다가 환호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원로원 의원 루키우스 무나티우스 플란쿠스가 옥타비아누스에게 그동안의 공적, 헌신에 어울린 아그노멘을 올릴 것을 건의했다.
안토니우스파였다가 옥타비아누스파로 전향한 전력이 있었던 루키우스 무나티우스 플란쿠스는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옥타비아누스에게 "아우구스투스(AVGVSTVS)"이라는 존칭을 언급했고, 옥타비아누스파 인사들이 옥타비아누스와 그 일가 전체, 친인척의 위엄과 헌신을 찬사했다. 그 결과, 옥타비아누스는 만장일치 아래 로마 역사상 최초로 아그노멘 이상의 유일무이한 새로운 이름을 수여받게 된다. 따라서 기원전 27년 1월부터 옥타비아누스는 "아우구스투스"로 불리게 된다.
옥타비아누스는 아우구스투스 칭호를 받고, 이를 교묘한 방법 아래 로마에서 가정의 신으로 숭배된 라레스와 연관시켰다. 동시에 로마의 건국자 로물루스를 언급하며 8월의 징조라고 표현하면서, 이를 8월 이름으로 삼는다. 이때 옥타비아누스파는 카이사르 옥타비아누스를 로마의 두 번째 건국자라고 하며, 이름에 로물루스를 넣고자 했다. 그러나 이런 방법은 로물루스가 왕이라는 점에서 설령 전설과 현실을 합쳐 홍보한들, 공화주의 전통이 강한 로마인에게 큰 거부감을 줄 위험이 높았다. 그래서 옥타비아누스는 아우구스투스 칭호를 기원전 27년 1월 13일 받기 전까지, 그 스스로를 '디비 필리우스'라는 애매모호한 언급 아래 양부 카이사르와 본인이 신중하게 차이점이 명확하다는 식으로 행동했다. 동시에 그는 이 칭호를 받을 당시, 이미 원로원에게 프린켑스 세나투스로 공식 임명, 취임했고, 원로원 회의를 주재하면서 악티움에서의 승리를 선전하며 길고 긴 내전을 종식시킨 사람임을 자연스럽게 연출했다.
아우구스투스 칭호를 본인의 추종자들에게 선사받는 형태로 손에 넣은 옥타비아누스는 이후 주변에서 개명을 해야 될 독특하고 고귀한 승인에 빚지는 형태처럼 임했다. 그리고 기원전 27년 1월 16일, 아우구스투스 칭호를 수여받고 3일 뒤, 마치 본인의 성씨 율리우스를 포기하는 형태 아래 공식 이름을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디비 필리우스 아우구스투스(Imperator Caesar Divi Filius Augustus)로 삼고, 이를 공적 삶의 정식 직함으로 삼는다. 옥타비아누스를 흔히 아우구스투스라고 부르게 된 것이 이때부터인데, 그는 이 칭호를 로마 귀족의 정신 그 자체로 불린 성씨를 포기하면서 취하며, 정치적 상징을 끌어 올린다.
이후, 아우구스투스는 다양한 민족, 문화가 공존한 로마 제국 상황에 맞게, 자신의 칭호와 명예를 확장하고 확인했다. 로마와 이탈리아에서는 본인 일가의 경칭을 자연스럽게 확장했지만, 아시아와 비티니아에서부터 시작된 통치자 숭배는 영혼과 보호자에 대한 신임 형태로 제전을 열고, 권력자의 위엄을 확립하는 형태로 추진한다. 이 작업은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정복 이후, 카이사르 일가와 옥타비아누스의 클리엔테스들이 많은 갈리아에서도 진행되는데, 아우구스투스는 갈리아에 자신의 양자 대 드루수스를 본인 호위대를 붙여 파견하면서, 지역 공동체의 라레스 아우구스티 아래, 로마 제국의 중앙 집권화와 본인 일가의 정통성을 홍보한다. 그렇지만 아우구스투스가 심혈을 기울었던 대 드루수스, 가이우스 카이사르, 루키우스 카이사르는 모두 요절했고, 아우구스투스의 후계자는 유언장을 통해, 티베리우스가 된다.
옥타비아누스가 사망하고 난 뒤 그의 후계자와 이후 로마 황제들이 상속 형태, 원로원 하의 공인 아래 사용한다. 티베리우스는 이때 서기 14년 전까지는 티베리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로 서명했다가, 가문명인 율리우스 대신 티베리우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로 포고문과 서명에 주로 표기했다. 그리고 서기 37년 그 다음 황제가 된 가이우스 카이사르 게르마니쿠스가 원로원 공인 아래 공동 상속자인 고종사촌이자 육촌 티베리우스 게멜루스와 달리 임페라토르, 프린켑스, 폰티펙스 막시무스 직을 단독 승계하고, 아우구스투스 칭호를 독점했다. 칼리굴라는 애매모호한 로마 황제의 직위를 구체적인 법적 권한 아래 소유자에게 고유한 칭호임을 굳혔다. 그리고 이는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의 안토니누스 피우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루키우스 베루스 통치까지 오직 황실 직계만의 전유물로 로마인에게 당연시된다. 이로써 디오 카시우스의 평 그대로 아우구스투스는 칼리굴라 등극부터 황제를 의미한 확고한 칭호임이 재확인된다. 이후,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가 네로의 몰락을 끝으로 무너지고, 네 황제의 해의 승리자 베스파시아누스 아래에서 플라비우스 왕조가 수립되면서, 아우구스투스 칭호는 임페라토르, 카이사르와 함께 로마 황제 및 그 제위계승자, 황족의 전유물로 성문화된다.
플라비우스 왕조부터 로마 황제들은 아우구스투스 칭호를 카이사르, 임페라토르와 함께 일종의 공식적인 칭호로 성문화하여 공식화했다. 따라서 로마 제국 아래에서 아우구스투스는 황제를 뜻한 칭호 중 하나로 굳어지게 되었다. 아우구스투스 라는 칭호를 가진 황제의 즉위일은 '임페리 다이스(dies imperii)' 라고 일컬어졌으며, 매년 기념 행사가 개최되었다.
칼리굴라가 시작한 황제의 즉위일은 아우구스투스 칭호를 원로원에게 받은 날이 되어, 매년 기념되는 형태가 됐다. 그러다가 2세기 말, 셉티미우스 세베루스가 다섯 황제의 해 속에서 유일무이한 권력자가 되고, 세베루스 왕조를 창건한 뒤부터는, 원로원 외에도 각지의 로마군에서 새로운 황제에게 아우구스투스라고 칭송될 때부터 매년 기념되는 식으로 확장된다. 그러다가 군인황제시대를 종식시킨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사두정을 만들면서, 아우구스투스는 정제가 취하는 칭호가 되었다.
동로마 제국의 이라클리오스 황제 이래 그리스어가 공식 문서에 보편적으로 쓰이면서, 아우구스투스는 그리스식 용어인 '아우토크라토르(autokratōr)'로 변용되었으며, 바실레우스와 함께 제국이 멸망할 때까지 황제만이 쓸 수 있는 칭호였다.
서로마 제국 멸망 이후 이 칭호를 받은 가장 유명한 인물이 프랑크 왕국의 카롤루스 대제이다.
3. 여담
중국어에서는 보통 '오고사도(奥古斯都)'라고 음역한다. 가끔 '아오고사도사(阿烏古斯都斯)'라고 음역하는 경우도 있다. 그리고 아우구스타는 '오고사탑(奥古斯塔)' 혹은 '아오고사탑(阿烏古斯塔)'이라 음역한다.4. 관련 문서
[1] 영어로 증가를 뜻하는 augment가 여기서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