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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인 | 첫째 부인 클로디아 풀크라 · 둘째 부인 스크리보니아 · 셋째 부인 리비아 드루실라 | ||
자식 | 딸 대 율리아 · 양아들 가이우스 카이사르 · 양아들 루키우스 카이사르 · 양아들 티베리우스 · 양아들 대 드루수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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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란 | 일리리아 대반란 | ||
기타 | |||
장소 | 아우구스투스 영묘,(), · 판테온 | ||
기타 | 칭호 · 기원전 23년 로마 헌정위기 |
<colcolor=#FFD700> 토이토부르크 전투 Battle of the Teutoburg Forest | ||
시기 | 서기 9년 9월 | |
장소 | 독일 니더작센 주 칼크리제(Kalkriese) | |
원인 | 로마 제국에 대한 아르미니우스의 저항 | |
교전 세력 | (공격) 패 | <rowcolor=black> (방어) 승 |
주요 인물 | 지휘관 | 지휘관 |
참가자 | 참가자 | |
병력 | 14,000 ~ 22,752명 | 15,000 ~ 20,000명 |
피해 | 전사자 : 16,000 ~ 20,000명 | 피해 규모 불명 |
결과 | 로마 제국의 참패, 3개 군단 궤멸 | |
영향 |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게르마니아 정복 좌절. |
1. 개요
서기 9년, 게르마니아의 '토이토부르크 숲(독일어: Teutoburger Wald 토이토부르거발트)[1]'에서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로마 제국과 게르만족 연합군 사이에 벌어진 전투로 현대 독일어로는 'Varusschlacht'(바루스 전투)라고 부르지만 'Schlacht im Teutoburger Wald'(토이토부르크 숲의 전투)[2]나 'Hermannsschlacht'(헤르만 전투)라는 명칭으로도 불린다. 단, '헤르만 전투'라는 명칭은 주로 과거에 통용되었던 명칭이라고 한다. 로마 역사가들은 이 전투를 바루스의 재앙(Clades Variana, 클라데스 바리아나)이라고 불렀다. 이원복은 《먼나라 이웃 나라》 <이탈리아> 편에서 토이부르거 숲 전투라고 표기했다. 한국에서는 토이토부르크 숲의 전투라고도 표기한다.
이 전투에 투입된 로마군 3개 군단 및 그 보조군이 모두 전멸하는 대참패를 겪었으며, 이 전투 이후 로마 제국은 게르마니아로 진출하려던 계획을 포기하게 되었다. 그리고 게르만족은 로마 문명의 영향권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문화와 언어를 유지하게 되었다.
2. 상세
2.1. '로마군 참패'의 배경
한창 지중해를 자기 호수처럼 이용하고 남/서유럽, 북아프리카, 레반트 및 아나톨리아 전역을 지배하던 당시 로마는 명실상부한 당대 지역 초강대국으로 군림한 시기였다. 오랜 내전을 종식시킨 아우구스투스의 성공적인 군제 개혁과 함께 수많은 실전을 치러온 군대를 가지고 있었고, 나라 자체가 하나의 중앙집권적인 국가였다. 특히 지중해에서 한가닥하던 카르타고와 마케도니아 왕국, 셀레우코스 제국,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이집트, 폰투스 왕국과 같은 국가들을 상대로 전면전을 벌여 모두 승리했기에 자신감도 넘쳤다.그런 강대국인 로마에게도 가장 중요한 화두가 있었는데 킴브리 전쟁때부터 로마를 괴롭혀온 게르만족의 본거지인 고대 로마의 북쪽 땅인 게르마니아 정벌이었다.
특히 아우구스투스의 양아버지였던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갈리아를 거의 평정할 즈음 게르마니아의 일부까지 진출해 보려고 시도했지만, 게르마니아 대삼림지대의 복잡성과 게르만 부족들의 호전성 때문에 큰 피해가 날 것을 우려해 포기했었는데 이로 인해 게르만족은 로마로서는 '묵과하기에는 위협적인 변수'로 남아 있었으며, 그렇기에 이러한 변수를 제거하고자 하는 목소리가 커져갔다.
기원전 27년, 카이사르의 후계자였던 아우구스투스가 권력을 움켜쥔 뒤, 갈리아 정복 이후 로마에 굴복한 갈리아인들이 반 로마 봉기를 일으키자 마르쿠스 빕사니우스 아그리파를 파견해서 진압했는데, 이 과정에서 반란군에게 무기를 공급한 것이 레누스 강(라인 강) 너머의 게르만족들임을 알게 되었고 이에 아그리파는 레누스 강을 건너 게르만족에게 응징을 가하기도 했다.
같은 해, 아우구스투스는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와 티베리우스를 데리고 직접 라인란트 근처의 갈리아 변경을 방문했다. 이는 그가 후계 구도에서 염두에 둔 두 소년에게 갈리아와 게르마니아 일대에서 군사경험과 군무교육을 시키기 위함이었는데, 당시 아그리파는 라인란트 일대에 주둔 중인 로마군 편성 외에도 갈리아 일대의 전반적인 로마화 작업과 인프라 구축에 힘을 쏟고 있었는데 이 때문에 병력이 부족했던지라 제대로 된 군사적 기동은 하지 못했다.
기원전 20년, 아그리파의 지휘하에 로마 제국의 갈리아 속주화 작업이 거의 마무리되었고 아우구스투스는 다음해인 기원전 19년부터 로마군을 대대적으로 갈리아와 게르마니아 사이의 변경 지역으로 이동시키며 게르마니아 정벌 계획을 본격화시켰다. 황제의 게르마니아 정벌 계획의 구체적 목표는 레누스 강, 즉 오늘날의 라인 강이었던 국경을 엘베 강까지 확장시키는 것이었다.
이런 긴박함 속에서 기원전 18년과 17년 사이에, 게르만족들이 도하한 후 갈리아 일대의 로마군을 공격했고 이를 막기 위해 마르쿠스 롤리우스의 5군단이 출전했는데, 오히려 게르만족에게 패배했다. 로마의 군단급 부대를 패배시킨 만큼 아우구스투스는 게르마니아 문제를 심각하게 바라보게 되었으며, 더 이상 게르마니아 전쟁을 미룰 수 없다는 판단을 내리게 되었다. 따라서 기원전 16년, 황제는 이 사건을 이유로 갈리아 일대의 새로운 군대 재편 및 자금 문제까지 직접 손을 보게 되었고 3년의 시간을 들여, 게르마니아 전쟁을 수행할 본부격의 역할을 하게 될 도시와 군사기지, 원활한 전쟁자금 및 세수 체계를 구축했다.
이것의 첫 시작은 갈리아 총독의 사저와 관저가 있는 루그두눔에 전쟁 자금을 위한 조폐국을 신설하는 것으로, 신설된 조폐국은 병사들의 월급과 전쟁비용 자금원이 되었다. 이와 동시에 아우구스투스는 갈리아 일대에서 대대적인 인구조사를 통해, 인구에 따른 세금 체계를 마련했고, 중장기적인 로마 시민권자 및 보조병 지원 인구 파악까지 진행했다. 또 그는 갈리아를 장기적으로 보호하기 위해 새로운 서부전선 기지를 만들었는데, 이는 그의 양자인 네로 클라우디우스 드루수스 게르마니쿠스(대 드루수스)가 정식 총독으로 부임해 온 이후 레누스 강변에 위치한 세 곳, 즉 스트라스부르, 마인츠, 크산텐의 기지 건설로 이어졌다.
기원전 15년, 아우구스투스는 친애하는 황자였던 대 드루수스를 카이사르 가문의 클리엔테스 속주인 갈리아 속주의 총독 자격으로 파견했는데, 대 드루수스는 양부의 명령에 따라 전쟁기지 역할을 겸할 루그두눔으로 아내인 소 안토니아, 장남인 게르마니쿠스를 데리고 들어가 살면서, 아그리파의 전례를 참조해 갈리아와 게르마니아 일대에 대한 정보 파악에 주력했다. 이후 아우구스투스는 기원전 13년, 대 드루수스를 정식 총독으로 삼았는데, 이 시기 동안 그는 갈리아 행정 및 방어 체계, 세금 징수 문제를 정비하며 곧 벌어질 레누스 강 일대에서의 전쟁 대비에 들어갔다. 동시에 대 드루수스의 형이었던 티베리우스는 기원전 15년부터 동생을 도와 알프스 산맥과 갈리아 일대에서의 군사행동을 병행하면서, 다누비우스(다뉴브 또는 도나우) 강 전선을 중심으로 영토 확장 프로젝트를 총괄했다.
기원전 9년 아우구스투스는 티베리우스[3]와 대 드루수스[4]를 주축으로, 누나의 큰 딸인 대 안토니아의 남편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5] 등의 남자 친인척과 제국 내 주요 장군들에게 게르마니아를 정벌하라 명령하였고 마침내 로마 제국의 게르마니아 전쟁이 시작되었다.
게르마니아 전쟁 개시 당시에는 8개의 로마 군단이 투입되었으며, 여기에 추가로 병력이 충원되어 총 11개 군단이 집결한, 그 규모로는 당시까지의 로마군 출정 역사상 첫 번째인 제2차 포에니 전쟁, 두 번째인 킴브리 전쟁, 세 번째인 갈리아 전쟁에 이은 네 번째로 거대한 규모의 병력 집결이었다.
그러나 게르마니아 정벌은 생각했던 것만큼 쉽지 않았고, 엄청난 세금이 지출되면서 로마 제국 내부에서도 비판이 제기되었다. 그래도 개전 이후 4차에 걸친 원정을 이끈 대 드루수스의 전공은 대단했고, 특히 그의 마지막 원정은 동시대의 마르쿠스 벨레이우스 파테르쿨루스와 후대의 수에토니우스 및 디오 카시우스 등의 증언처럼 로마인들 사이에서 거의 게르마니아가 정복되었다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로 대단했다.
하지만 엘베 강을 처음 돌파한 제4차 원정을 끝마친 뒤, 개선 군단과 함께 레누스 강을 도하하던 총사령관 대 드루수스가 낙마 사고로 그만 29세의 젊은 나이에 요절하고 말았다. 이때 아우구스투스는 엄청난 충격을 받았는데, 대 드루수스의 장례식에서 아버지 및 국가 최고 지도자 모두의 위치에서 연설을 시작했다.
“죽은 아들의 유지를 받들어 반드시 이를 마무리짓겠다.”
“저에게도 사랑하는 아들 드루수스처럼 영광스러운 최후를 달라.”
“저에게도 사랑하는 아들 드루수스처럼 영광스러운 최후를 달라.”
연설 마지막 무렵에는 게르마니아 전쟁에 대한 지속 의지를 신에게 맹세했다.
대 드루수스의 사고사 이후, 그의 형 티베리우스가 물려받은 게르마니아 전쟁은 기원전 8~7년 동안 수감브리족 외에는 별 저항없이 진행되었다. 그러나 아우구스투스의 후계 문제로 티베리우스가 로마로 소환되고, 그 뒤를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가 이어받을 즈음부터 로마의 게르마니아 전쟁 진척 상황은 시들해졌고 노련한 장군이었던 마르쿠스 비니키우스가 아우구스투스의 명령에 따라 속주화 작업을 위해 파견될 무렵부터 거의 10년 동안 전쟁은 잠시 중단되었다.
이후 티베리우스가 이끄는 로마군의 활약으로 서기 5년 즈음 드디어 로마군은 엘베 강까지 진출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여전히 많은 게르만 부족들이 로마에 굴복하지 않고 있어 게르마니아는 몹시 불안정한 상황이었다.[6] 당시 로마군의 영향에 들어간 것은 티베리우스가 정복하기 시작한 라인 강 하천의 교역 루트였지, 튀링거발트(튀링겐 숲) 등등의 게르마니아 영토 요충지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울창한 삼림 지대는 아니었다.
2.1.1. 일리리아 대반란으로 인한 게르마니아 방면 병력 차출
일리리쿰과 판노니아의 총독이었던 마르쿠스 발레리우스 메살라 메살리누스는 티베리우스에게 보내기 위해 속주민들을 징발하여 대규모의 보조병 부대를 창설한 후 라인 강 전선으로 파견했다. 그러나 그들은 도중에 데시타이트족인 바토와 브레우키족인 바토를 지도자로 내세워 일리리아 대반란을 일으켰다.아우구스투스는 급히 티베리우스에게 일리리아를 평정하라고 지시했다. 당시 게르마니아 정벌을 위해 무려 11개의 로마 군단이 참전하고 있었는데, 티베리우스는 마르코만니족의 부족장인 마르보두스와 평화협약을 맺은 뒤 8개 군단을 이끌고 일리리아로 진격했다. 아우구스투스는 게르마니아가 충분히 안정되었다고 오판한 뒤, 유능한 행정가를 보내 게르만족을 다스리기로 했다. 그리하여 동방의 유대 등지에서 난폭한 속주민들을 진압하고, 탁월한 행정 능력을 보여준 푸블리우스 퀸크틸리우스 바루스를 게르마니아 총독으로 임명했다. 발칸 반도의 일리리아 대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티베리우스와 그 휘하의 8개 군단이 AD 6년 ~ AD 9년 사이에 게르마니아에서 발칸으로 이동했고, 게르마니아 방면 로마군은 제17군단, 제18군단, 제19군단의 3개 군단만 남았는데, 이는 아우구스투스가 치명적인 병력 배분을 강행한 것이었다.
속주민에 대한 강경적인 대응이 주류였던 바루스가 유대에서 부임하던 중, 난폭한 속주민들에 대한 진압을 잘 했던 것을 전해듣고 일부러 그를 게르마니아 총독으로 부임시켜놓고도, 그 이후에 일리리아 대반란 때문에 8개 군단이나 빼가고, 꼴랑 3개 군단만 남겨놓았으며, 당시 게르마니아에서 바루스가 3개 군단만으로 기존의 강압적인 통치 방식을 게르만족들에게 실행했던 것을 고려하면, 아우구스투스가 최악의 인사 조치를 단행한 것이었다.[7]
2.1.2. 아르미니우스의 등장
바루스는 게르마니아 방면 사령관으로 부임한 뒤 게르만족의 로마화 작업에 착수했다. 그는 각 부족들에 관료를 파견하여 로마법을 준수하라고 명령했고, 부족장들의 정책에 여러 번 간섭했다. 게다가 게르마니아에서 찾기 힘든 귀금속으로 세금을 낼 것을 강요해 게르만족의 불만을 한층 더 고조시켰다.이때 게르만족 출신으로 바루스의 부관이었던 아르미니우스라는 인물이 등장했다. 그는 게르만족의 일파인 체루스키족의 군장 세기메루스의 아들이었다. 세기메루스는 대 드루수스의 게르마니아 정벌 때 로마군에 항복하고 그의 두 아들을 로마에 인질로 보냈다. 그래서 아르미니우스는 어린 시절부터 '세계의 수도'로 불리며 번영을 누리던 로마에서 성장했다. 그는 로마군 보조 군단에서 군사교육을 받고 에퀴테스(기사 계급)까지 올랐으며, 로마 시민권을 얻었다. 아르미니우스는 로마 제국의 정치적인 환경과 군사적인 역량에 대해서 직접 배웠고, 토이토부르크 전투가 있기 전에 체루스키족으로 이루어진 보조병 부대를 이끌면서 로마군에서 종군했다. 아르미니우스는 로마 문화에 잘 적응하는 것처럼 보였고, 로마군에 오랫동안 종군한 경력 덕분에 누가 봐도 친 로마파 게르만 귀족이었다. 그 덕분에 게르마니아 총독 바루스는 로마 시민이자 게르만족 출신인 아르미니우스를 총애했다.[8]
그러나 겉보기와는 달리 아르미니우스는 로마에 대한 저항 의지로 가득했다. 그는 애초에 로마 제국에 굴복할 생각이 없었다. 아직도 왜 그가 로마에 저항을 했는지에 대해서는 논의가 분분하다. 로마 제국의 막강한 군사력이 게르마니아에서 약해진 사이에 체루스키족의 왕이 되기 위해서, 또는 로마군에 종군하면서 그들의 압제에 학대받는 피지배인들을 보면서 몇 십년 동안 떠나있었던 자신의 고향에 연민을 가져서라는 의견 또한 있다. 다만 그가 게르마니아의 여러 부족을 통합하겠다는 생각까지는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게르마니아에는 (로마인들의 기록만으로도) 50여개가 넘는 부족이 난립하고 있었고, 아르미니우스 자신은 아버지 세기메루스가 로마군에게 굴복하고, 본인은 로마에서 유년기를 보내어 심각한 페널티를 안고 있었다. 실제로 그는 죽는 순간까지 체루스키족 내에서조차 세게스테스 등의 다른 귀족들에게 압도적인 권력을 행사하지는 못했다. 애초에 게르마니아의 부족들은 서로간의 수많은 알력 다툼으로 단결하기가 거의 불가능했고, '아르미니우스가 게르마니아를 통일시켜서 왕이 되겠다는 야망을 가졌다'는 것은 후대 독일인들 사이에 불어닥친 민족주의의 바람이자 창작이었다.
일설에는 바루스가 아르미니우스를 대단히 신임하기는 했지만 그를 지휘관 같은 중요한 직책이 아닌 겨우 도시 치안관 정도로만 계속 대우해서 거기에서 오는 불만과 소외감을 가지고, 로마군의 힘을 빌려 체루스키족의 왕이 되려는 계획을 수정하여 반란을 계획했다는 미확인 정보도 있다.
무슨 이유이건 간에 아르미니우스는 겉으로는 로마 제국에 순종하는 현지인으로 행세했지만, 게르마니아 북부로 돌아온 AD 7년~8년부터는 꾸준히 자신의 계획을 진행해나갔다. 비록 수많은 게르만 부족들은 공동체 의식은 희박했지만 바루스의 야만적이고 폭압적인 통치에 대해서는 분노하고 있었기 때문에 게르만 부족들은 서로 간의 갈등을 멈추고, 아르미니우스의 연합에 동참했다.
아르미니우스의 숙부들 중 토이토부르크 전투와 연관된 사람은 잉고메르(Ingomer 또는 Ingiuomer)뿐이었는데, 그는 조카인 아르미니우스를 적대하지도 않았지만 토이토부르크 전투 당시에는 로마군에 맞서지도 않는 중립적인 자세를 취했다.
아르미니우스의 장인이었던 세게스테스는 바루스에게 사위인 아르미니우스가 반란을 꾀하고 있다고 고변했지만, 바루스는 이를 무시했다. 아르미니우스가 배신할 리 없다고 굳게 믿었으며, 아르미니우스에 대한 세게스테스의 증오를 잘 알고 있었고, 시리아와 유대에서 총독으로 일하면서 모함을 통해 경쟁자를 제거하는 행태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르미니우스와 공모자들은 일리리아 대반란을 일으킨 자들을 주의깊게 연구하고, 이로부터 로마군을 무찌를 방안을 모색했다. 그들은 곧 로마군을 함정으로 유인하여 최대한 섬멸하기로 결의했다.
이를 까맣게 모르고 있었던 바루스는 어느 날 로마에 복속된 한 마을에서 반란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아르미니우스는 바루스에게 이런 것을 가만히 둬선 안 된다며 그가 직접 나서서 해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번 반란이 일어나면 다시는 재발하지 못하도록 무자비하게 토벌해왔던 바루스는 이번에도 친히 휘하의 모든 군단 병력을 이끌고 출진하기로 결정했다. 3개 군단 외에도 6개의 보조군 대대, 그리고 3개의 기병대 중대 등을 포함한 대병력이었다.
2.2. 전투의 경과 및 직후
로마군의 출병 후, 게르마니아의 지리에 어두웠던 바루스는 아르미니우스에게 길 안내를 맡겼고, 아르미니우스는 로마 군단을 게르만족이 잔뜩 매복하고 있었던 울창한 토이토부르크 숲속으로 안내했다.아르미니우스는 토이토부르크 숲에 로마군을 안내한 후 자신의 부하들을 데리고 와서 지원하겠다며 로마군 대열을 이탈했고 잠시후 자신의 부하들로 하여금 로마군을 공격했다. 20km에 달하는 긴 행군 대열을 이루고 있었던 로마군은 갑작스러운 게르만족의 기습에 노출되었다. 게르만족은 우선 투창을 계속 던져 로마군에게 피해를 주고 충분히 약해졌다고 생각하자 곧 내려와 로마군과 전투를 개시했다. 그러나 무장과 훈련이 잘 된 로마군은 기습을 당한 상황속에서도 게르만족의 공격을 물리쳤으며, 그 뒤 숙영지를 짓고 그날 밤을 보냈다. 그러나 로마군은 이미 적진의 한복판에 들어온 상태였고, 앞으로 틀림없이 게르만족이 숨어 우글거리고 있을 빽빽한 숲을 계속해서 뚫고 나가야 하는 상황이었다. 만일 로마군의 지휘관이 뛰어난 장군이었거나 혹은 지역의 지리를 잘 알고 있었다면 이런 난관을 타개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바루스는 쭉 행정 관료로만 일했고, 지리에도 밝지 못했다.
다음날 아침 로마군이 주둔지로 돌아가기 위해 출발하자 또다시 게르만족이 공격을 시작했다. 로마군은 다시 이 공격을 물리쳤으나 울창한 숲이 로마군으로 하여금 효과적인 전술을 펼칠 수 없게 만들어 오직 병사 개개인의 전투력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때문에 전투를 거듭할 때마다 로마군의 사상자는 점점 늘어갔다. 이 전투에서도 로마군이 입은 피해가 꽤 되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마군은 오직 주둔지로 돌아갈 생각밖에 없어 조급해했다. 이러한 조급함 때문에 로마군은 아르미니우스가 예상한 길로만 행군했고, 덕분에 아르미니우스는 지속적으로 로마군을 괴롭힐 수 있었다. 숲을 빠져나와 탁 트인 언덕에 오른 로마군이 다시 다른 숲으로 진입할 때를 즈음하여 비가 내렸다. 습기에 취약한 활과 화살이 무력화되었고, 갑옷도 무거워져 병사들의 전투력이 급격히 떨어졌다.
다시 밤이 찾아왔지만 바루스는 이번에는 숙영지를 마련하는 대신 야간 행군을 강행해 빠르게 숲을 돌파하기로 계획했다. 그러나 아르미니우스가 이미 숲에서 빠져나갈 언덕 사이의 외길을 커다란 담벼락을 쌓아 봉쇄하고, 양쪽 언덕에 병력을 숨겨두고 있었다. 조급함에 사로잡힌 바루스는 그대로 아르미니우스의 함정에 병력을 밀어넣었고, 그 순간 후방에서 나타난 게르만족 병력이 로마군의 퇴로를 차단하며 언덕 사이에 갇힌 로마군을 향해 돌무더기를 쏟아부었다. 잠도 자지 못한 채 피로에 찌든 로마군은 처절하게 저항하며 담벼락을 뚫어보려고 애를 썼지만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탈출에 대한 희망이 꺼져가자 로마군은 동요하기 시작했다. 혼란을 수습해야 할 지휘관들 마저 공포에 사로잡혔다. 부사령관인 기병 대장 누모니우스 발라는 독단적으로 휘하 기병대를 이끌고 도주를 시도했다가 게르만족에게 붙잡혀 살해당했고, 바루스와 그의 부관들도 땅바닥에 칼을 꽂고 그 위에 엎어지며 자결했다. 지휘부가 붕괴되면서 남은 로마군도 모조리 죽거나 생포당했다. 이 처참한 전투 끝에 17군단, 18군단, 19군단의 병력은 말 그대로 괴멸되었다.
로마군의 주전력이 완전히 사라지자 게르만족은 무주공산이 된 로마군 진영들을 일제히 공격했고, 함께 게르만 땅에 발을 들였던 로마군의 가족과 군무원 등 비전투원들 역시 생포되었다. 그나마 자결할 무기라도 갖고 있었던 군인들은 운이 좋았다고 볼 수 있으나 그럴 선택권조차 없었던 일반인들이 게르만족에게 어떤 끔찍한 일을 당했는지는 오로지 당사자들과 신만이 알고 있을 것이다. 이 때 살해당한 여자와 아이들의 시체에서 내장을 꺼내 제사를 지냈다는 기록도 있는데 그 내장을 나무에 주렁주렁 걸어 놓았고 시체는 나무 밑에 버려두었다고도 한다. 사로잡힌 로마 군인들 역시 협상용 인질도 없이 전부 살해당했으며 무수히 많은 머리가 잘려나가 숲속 이곳 저곳에 매달렸다. 복수를 위해 뒤늦게 달려온 지원군도 이 처참한 광경을 보고 나서 모조리 전의를 상실해버렸다고...
이후 로마군의 17군단, 18군단, 19군단은 로마 제국이 멸망할 때까지 다시는 편성되지 않았다. 이 패배를 로마가 얼마나 수치스럽게 여겼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다. 당시 이미 노년이었던 아우구스투스 황제는 3개 군단이 전멸하고 20년 동안 일궈온 모든 것이 사라졌다는 소식을 듣고 심각한 충격에 빠졌다. 수에토니우스에 따르면, 그는 밤에 혼자 집에 틀어박혀 다음과 같이 절규했다고 한다.
"바루스! 바루스! 내 군단을 돌려다오!!!"
이 때 벽에 스스로의 머리를 찧으며 자해를 할 정도로 자책했다 한다. 그리고 야사에 따르면 이로부터 5년 후 임종 직전에 이런 말을 남겼다고 한다.
패배의 결과로 감당할 수 없는 거대한 병력의 공백이 생긴 로마 제국은 20년에 걸쳐서 점령하고 다스리던 라인 강 동쪽의 게르만 영토를 모두 잃고 말았다.
노란색 부분이 토이토부르크 전투로 상실한 영역이다.
게르마니아 원정의 최종 목표지였던 엘베 강까지 1/2 정도 이른 영토를 한순간에 잃었다. 사실 병력을 잃은 것보다 이 문제가 더 심각했다.
게르마니아 영토를 상실하여 갈리아 지방까지도 위험해질지도 모르는 상황이 되자 아우구스투스는 게르마니아 남부 일대에서 독자적인 군사 활동을 수행하고 있었던 루키우스 노니우스 아스프레나투스의 2개 군단을 갈리아로 이동시켜 이 지역에서 발생할 수 있는 반 로마 봉기를 방지하도록 했다. 여기에 게르마니아 최대의 로마 요새인 앨리스의 총독이었던 루키우스 카이시디우스는 게르만족의 맹공을 겨우 물리친 뒤 라인 강을 건너 갈리아에서 아군과 합세했다.
2.3. 이후의 게르마니아 전쟁
서기 10년, 일리리아 대반란을 평정한 티베리우스가 라인 강으로 이동하여 강 연안의 요새 방어 능력을 강화하고 병력을 재배치했다. 이후 라인 강을 건너 농작물을 파괴하고 마을을 불태우는 등 보복 전쟁을 벌였지만, 깊숙이 들어갔다가 바루스와 같은 꼴이 되는 걸 우려하여, 인구를 분산시켜 친 로마파 게르만족을 로마 제국 휘하에 편입시키고 로마 점령지에 이주시키는 것에도 집중했다.
뒤이어 서기 11년 게르마니쿠스가 후속 병력을 이끌고 티베리우스와 합류했고, 게르마니쿠스는 게르만 부족들을 토벌하는 군사 활동 중에 토이토부르크 숲에 가서 로마군의 유해를 찾아내어 수습했다. 로마 제정기의 역사가인 타키투스가 이때의 장면을 서술했다.
로마군의 해골이 나무에 수도 없이 박혀있었는데 이는 사로잡은 로마군을 산 채로 나무에 꽂아 죽인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수많은 제단이 설치되어 있었는데 이는 게르만족이 로마군 병사들을 오딘에게 제물로 바치는 제사 의식을 치르기 위해 설치한 것이었다.[9]
서기 12년 겨울 티베리우스와 게르마니쿠스가 로마로 귀환한 뒤, 아우구스투스는 권력 승계를 위해 티베리우스는 남게 하고, 게르마니쿠스를 라인 강 전선 총사령관으로 선출했다. 게르마니쿠스는 대대적인 복수전을 벌이고자 군대를 집결시켰다.
그러나, 원정을 개시하기 전인 서기 14년 8월, 아우구스투스가 붕어했다. 타키투스와 디오 카시우스는 아우구스투스가 죽기 직전에 제국의 확장을 종식하라는 부탁을 했다고 기술했다. 하지만 이 일이 실제로 있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으며, 티베리우스가 선제의 이름을 빌렸을 가능성도 있다.
아우구스투스가 붕어하고 티베리우스가 제2대 황제에 오른 해에 그 후 티베리우스의 황위 승계에 불복하여 반란을 일으킨 군단병들을 제압한 게르마니쿠스는 로마군을 이끌고 라인 강을 건너는 군사 행동을 개시했다.
게르마니쿠스는 마르시족이 축제를 하며 잠이 든 틈을 타서 그들을 모두 죽이고, 게르만족의 수많은 마을을 파괴하면서, 해군을 잘 활용하여 원정군의 보급을 책임지게 하고 적의 매복 공격을 모조리 격파했다.
서기 15년, 토이토부르크 숲에서 잃어버린 3개의 독수리 군단 깃발 중 하나를 탈환했다.
서기 16년, 휘하 부장이자 아르미니우스의 친동생이었던 플라부스 등과 함께 이디스타비소 전투에서 아르미니우스를 상대로 대승을 거두었다. 이후 앙그리바리 방벽 전투에서 재차 격돌해, 아르미니우스의 게르만 동맹군을 와해시키고 두 번째 독수리 깃발을 되찾았다.
그러나 얼마 후에 티베리우스 황제로부터 원정을 중단하라는 명령서가 도착했다. 게르마니쿠스는 원정을 지속할 의사를 표명했으나, 영토 확장은 이미 불가능하여 의미가 없다고 판단한 티베리우스가 강력하게 명령하자 어쩔 수 없이 점령한 영토를 친 로마파 게르만 부족들에게 나눠주고 로마군을 라인 강 서쪽으로 철군시켰다. 이리하여 게르마니아 전쟁이 막을 내렸다. 로마와 게르만족은 라인 강과 도나우 강을 경계로 삼았다.
서기 19년, 게르마니쿠스는 시리아의 안티오키아에서 사망했다. 향간에서는 그와 갈등을 벌이고 있었던 시리아 총독 그나이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가 독살했거나 강력한 황위 경쟁자를 두려워한 티베리우스가 독살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서기 21년, 아르미니우스는 게르만족 간의 권력 다툼으로 인해 반대파의 자객들에게 암살당했다. 로마를 상대로 동맹을 맺었던 아르미니우스와 마르코만니족의 족장 마로보두스 사이에서 전쟁이 발발했다. 그 결과 마로보두스가 대패하여 로마로 망명했지만, 아르미니우스는 마르코만니족을 완전히 제압하지는 못했다. 그 후에도 게르만족의 통합을 추진했으나, 서기 21년에 아르미니우스는 부족 간의 권력 다툼 끝에 살해당했다.
'아르미니우스가 숙부인 세게스테스에게 자신을 밀고한 친 로마파라는 누명을 씌워 죽이는 바람에 인심을 잃고 살해되었다'는 주장은 전혀 아니며 출처 불명의 지어낸 이야기이다. 아르미니우스의 숙부는 잉고메르였고, 그는 토이토부르크 전투때는 중립을 취하다가 이후에는 아르미니우스를 도와서 로마군에 맞섰으나 마지막에는 아르미니우스의 적인 마로보두스의 편을 들었던 바가 있었다. 다만 세게스테스는 친 로마파가 맞으며 바루스에게 아르미니우스의 계획을 고한 것도 타키투스, 벨레이우스, 수에토니우스 등의 로마 역사가들이 기록하는 바이다. 그는 아르미니우스와 체루스키 부족 내 권력을 두고 다투는 사이였고, 딸인 투스넬다가 아르미니우스와 결혼하자 임신한 그녀를 납치해 로마군에게 전리품으로 바친 인물이었다.
마지막 로마군 독수리 깃발은 디오 카시우스에 따르면 클라우디우스 1세 치세였던 서기 41년 푸블리우스 가비니우스가 카우키족을 격파하며 되찾았고#, 포로로 잡혀 노예 생활을 하던 극소수의 운좋은 군단병들을 서기 50년 푸블리우스 폼포니우스 세쿤두스가 카티족 침략을 소탕하는 과정에서 구출했다고 한다.#
3. 의의
토이토부르크 참사의 역사적 의의는 로마군의 패배와 로마군의 전사자의 수 등이 아니라 로마 제국과 아우구스투스의 대응전략이다. 로마 역사에서 어떤 다른 전투와는 달리 토이토부르크 전투는 새로운 전략 수립에 영향을 끼쳤다. 토이토부르크 이전에 발생한 로마의 패배들은 일시적인 좌절로 여겨졌지만 토이토부르크는 그 지역에서 로마의 팽창을 항구적으로 중단시켰다는 점에서 로마에게 있어 실질적인 최초의 군사적인 패배였다.
- 김상엽, <토이토부르크 대참사와 로마 제국의 대응전략>, 《서양고대사연구》, 제43권, 2015, pp.190-225, p.217.
- 김상엽, <토이토부르크 대참사와 로마 제국의 대응전략>, 《서양고대사연구》, 제43권, 2015, pp.190-225, p.217.
비슷하게 최악의 참패로 꼽히는 카르헤 전투, 아라우시오 전투, 칸나이 전투, 아드리아노플 전투 등과 더불어, 로마 제국 역사상 최악의 패전 중 하나로 기록되고 있다.
칸나이 전투에서 한니발 바르카가 군사적으로 대승을 거뒀지만, 로마의 동맹을 끊는 데는 실패해서 영토를 잃거나 전선이 무너지진 않았고, 로마가 병사를 어떻게든 다시 조달해서 한니발을 구석으로 몰아 물리칠 수 있었다. 그러나 토이토부르크 전투는 참패한 결과 속주 영토를 잃어버려서 후술할 티베리우스와 명장 게르마니쿠스가 군대를 이끌고 올라가 게르만족을 물리치지 못했다면, 국력이 절정에 도달한 로마가 이때의 게르만족에게 망하진 않았겠지만, 다른 인근의 속주들까지도 악영향을 받아서 혼란에 빠질 수도 있었다.
토이토부르크 전투로 인하여, 게르만족들은 로마의 직접 통치에서 벗어나 게르만 고유의 특색을 보존하게 되었다. 만약에 로마의 게르마니아 정복이 성공하여 대 게르만족 통치가 지속되었더라면 히스파니아(스페인, 포르투갈), 갈리아(프랑스)의 사례와 같이 게르만족 역시 로마화되었을 것이고 게르마니아(독일) 역시 라틴어권, 그리고 로마 이후에는 로망스어권이 되는 등 라틴권에 편입되어 서양의 역사가 크게 바뀌었을 것이다.[10] 게르만족의 대이동으로 게르만족이 서로마를 멸망시켜 중세 시대의 중추 세력이 되었다는 역사적인 사실에 비춰본다면 서구의 역사가 크게 바뀌었던 역사적인 전투 중의 하나이다. 다만 이 경우 훈족이 곧바로 로마를 공격하게 된다.
4. 칼크리제 유적지와 논란
현재 역사학자들은 출토된 유물을 근거로 니더작센 주 오스나브뤼크 북쪽에 위치한 브람슈(Bramshe) 시의 칼크리제(Kalkriese)를 가장 유력한 토이토부르크 전투 후보지로 보고있다. 다만 칼크리제에서 발굴된 몇몇 유적은 기존에 알려진 토이토부르크 전투 진행 양상과 일치하지 않는 면이 존재해 가장 유력한 후보지일 뿐 여전히 정확한 장소에 대한 논란은 계속 이어지고 있다.전투 당시 로마군이 울창한 숲속에서 거의 궤멸 당한 상태였고 대부분 로마 역사가들은 토이토부르크 전투를 '바루스의 비극'이라고만 명시해두었기 때문에 2000년에 가까운 세월동안 전투가 벌어진 위치는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가장 중요한 단서는 타키투스 연대기 1권 60-32절 언급된 『연대기』 제1권 60–62절에서 언급된 '살투스 튀토부르기엔시스(saltus Teutoburgiensis)' 라는 이름였는데 이는 베스트팔렌 중부의 리페강과 엠스강 상류 사이 지역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으로 추정되었다. 이를 기반으로 많은 역사학자들은 주로 지명과 하천명, 고대 작가들이 묘사한 지형, 선사시대 도로망에 대한 조사, 그리고 고고학적 발견을 전투 장소를 추정했는데 명확한 것은 없었다. 1966년 하랄트 페트리코비츠(Harald Petrikovits)는 수백 가지에 이르는 추정을 다음과 같이 총 4가지로 정리했다.
북부 이론: 비엔 언덕(Wiehen Hills)과 베저 언덕(Weser Hills) 북쪽 가장자리
리페 이론: 토이토부르크 숲 동쪽 절반 또는 이 숲과 베저강 사이
뮌스터란트 이론: 토이토부르크 숲 남쪽, 베쿰(Beckum) 근처 또는 그 동쪽 지역
남부 이론: 베스트팔렌 저지대의 남동쪽 구릉 지대
1987년에 영국의 아마추어 고고학자 토니 클런(Major Tony Clunn)소령이 칼크리제 언덕(Kalkriese Hill)에서 우연히 금속탐지기로 로마 동전을 찾다가 발견한 것에서 촉발되면서 연구는 빠르게 진전되기 시작했다. 이곳에서 토니 클런은 아우구스투스 시대의 동전과 함께 타원형 납제 로마 투석탄을 발견하였다. 즉 아우구스투스의 게르마니아 전쟁 시절 로마군이 해당 지역에서 활동한 것을 입증하는 결정적인 증거를 발견한 것.리페 이론: 토이토부르크 숲 동쪽 절반 또는 이 숲과 베저강 사이
뮌스터란트 이론: 토이토부르크 숲 남쪽, 베쿰(Beckum) 근처 또는 그 동쪽 지역
남부 이론: 베스트팔렌 저지대의 남동쪽 구릉 지대
해당 발견이 보고된 이후, 1987년 오스나브뤼크 문화사 박물관(Kulturhistorisches Museum Osnabrück)의 고고학팀이 볼프강 슐뤼터(Wolfgang Schlüter) 교수의 지휘 아래 칼크리제 일대에 대한 발굴을 시작하였고 1990년 이후에는 괴팅겐 대학교 수잔네 빌버스-호슈트(Susanne Wilbers-Rost)교수가 발굴 작업을 이어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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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크리제 유적 발굴을 토대로 복원한 아르미니우스의 방벽[11] | 칼크리제 유적지에서 발굴된 로마군 기병 마스크 |
또한 2022년 독일 보훔 광산박물관(Deutsches Bergbau-Museum Bochum)연구진이 칼크리제에서 출토된 비철금속 유물과 할턴, 당슈테텐(Dangstetten), 노이스(Neuss), 크산텐(Xanten), 빈디쉬(Windisch) 등 총 7개 로마 군단 주둔지에서 수집한 약 550개의 금속 샘플을 상호 비교한 결과, 칼크리제 출토 유물들(허리띠 버클, 옷핀, 끈 고리 등)이 토이토부르크 전투 이전 토이토부르크 숲에서 전멸하기 이전 19군단이 주둔한 것으로 알려진 당슈테텐 및 할턴 출토품과 금속 조성이 유의미하게 일치함을 발견하며 칼크리제 유적이 토이토부르크 전투의 유적지라는 주장에 큰 힘을 실어주었다. #
2018년엔 거의 온전한 형태의 로리카 세그멘타타가 발굴되었는데, CT 촬영을 통한 추적 결과, 아우구스투스 시대에 제조된 것으로 밝혀졌다. 이는 적어도 아우구스투스 말기 시기 로마군이 로리카 세그멘타타를 채용하고 있었음을 증명하게 된다.
현재 칼크리제 유적지에는 2001년 칼크리제 박물관이 설립되었고 2009년에는 칼크리제 박물관 및 공원이 설립되어 현재까지 운영 및 활발한 발굴 활동이 이루어지고 있다.
추가적으로 1990년 높이 2m, 너비 4~5m에 달하는 방벽의 흔적이 발굴되었는데 이를 발굴한 호슈트 교수는 'Germanenwalls' 즉 게르만 성벽이라고 명명하고, 당대 로마군 진지 축성 방식과 서로 다른 점을 들어 아르미니우스가 이끄는 게르만 족이 로마군의 탈출을 저지하기 위해 쌓았다는 장벽이 바로 그것이며 이 방벽에 갇혀 로마군이 궤멸되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2016년과 2017년 뮌헨 대학교 살바토레 오르티시(Salvatore Ortisi) 교수의 후속 발굴에서 당대 로마군이 사용했던 삽과 함께 게르만 방벽을 따라 동서남북 방면으로 로마군 형식의 급조된듯 불규칙한 V자 도랑이 발굴되었고 내부에선 220여개의 로마 동전과 로마군이 사용한 투석기 발사체로 추정되는 무기들이 발견되었고 2021년에는 남쪽에서 게르만족이 건설한 것으로 추정되는 방벽의 흔적이 발굴되었다. 이를 기반으로 오르티시 교수는 이 일대에 6헥타르 규모의 3000~4000명 가량의 로마군을 수용할 수 있는 기지가 건설되었다고 추정된다고 발표했다.# 이는 로마군이 게르만 족이 건설한 성벽에 갇혀 포위망을 뚫는 전투만 치룬 것이 아니라 로마군 역시 기지를 짓고 농성을 벌이기도 했다는 것으로 게르만족에 포위당한 후 절망한 바루스와 지휘부가 자살하고 나머지 로마군은 그 자리에서 학살 당했다는 디오 카시우스와 타키투스의 저술과는 다른 양상을 띄었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다.
다만 타키투스가 바루스가 행군 중 게르만족의 공격을 받고 건설한 첫 번째 주둔지는 '세개 군단이 작업한 넓은 둘레'를 가지고 있었다고 서술한 것을 고려하면 3000~4000명 정도밖에 수용할 수 없던 해당 기지는 토이토부르크 전투 초반부 행진 중 게르만 족의 습격으로 건설한 바루스의 첫 주둔지가 될 수 없으며 바루스의 첫 주둔지로 평가받는 유적은 아직 발굴되지 않은 상태이다. 따라서 이를 발굴한 오르티시 교수는 칼크리제 유적을 바루스와 로마군이 아르미니우스의 포위망에 갇혀 궤멸된 토이토부르크 전투 후반부가 벌어진 장소로 평가했다.#
한편 바루스와 3개의 군단이 밤을 보내기 위해 세웠다는 첫 번째 주둔지가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았고 2만명에 가까운 로마군이 전멸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고작 17명의 유골이 발굴된 것을 들어 칼크리제 유적이 게르마니아 전쟁기 로마군이 전투가 벌인 것은 맞지만 토이토부르크 전투가 벌어졌다는 결정적인 증거로는 부족하다는 일부 학계의 반박 의견이 존재해 여전히 정말로 토이토부르크 전투가 이곳에서 벌어진 것이 맞는지에 대해 논란이 이어지고 있다.
몇몇 학자들은 칼크리제 인근 게르마니쿠스의 게르마니아 원정 당시 군단의 기지 역할을 했던 할터른이 위치해 있다는 점, 칼크리제 인근 10km 지점에서 발견된 목재 도로가 게르마니쿠스가 원정 중이던 서기 15년 경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점, 칼크리제에서 1992년 출토된 검집에 서기 15년 게르마니쿠스 휘하의 아울루스 카에키나 세베루스가 이끄는 4개 군단이 게르만족에게 포위당했으나 돌파에 성공한 일명 '롱브리지 전투'의 참전 군단 중 하나인 제 1 아우구스타 군단의 약어로 추정되는 LPA가 새겨진 것을 들어 칼크리제 유적지가 토이토부르크 전투의 유적이 아닌 롱 브리지 전투의 유적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다만 이들은 토이토부르크 전투가 벌여졌다는 가장 강력한 증거 중 하나인 로마 동전 유적에 대해 당시 군단병들에게 새로 주조된 동전이 일선의 군단병들에게 완전히 유통되지 않았을 수도 있다고 주장하지만 당시 게르마니쿠스가 이끈 로마군이 실제로 서기 9년 이전 통용되던 화폐를 여전히 유통하고 있었는지 입증할 유물이 발견되지 않았고, 바루스의 3개 군단보다 더 많았던 4개 군단이 게르만족과 맞서 싸우며 지은 기지라고 보기엔 그 크기가 전술한대로 터무니없이 작았는데다, 전술한 독일 광산 박물관이 칼크리제에서 출토된 유물이 바루스와 함께 전멸한 19군단의 것이 맞다는 발표로 인해 학계에선 설득력이 높다고 보지 않고 있다.#
2024년 12월 독일 오스나브뤼크 대학 지리학과 요하임 하틀링 교수가 이끄는 연구진은 칼크리제 유적이 로마 시대 유적이 아닐 수 있다는 다소 충격적인 논문을 개재했다. 그의 연구진은 유적지 지표층과 함께 유적지 북쪽과 남쪽 부분에 위치한 로마의 것으로 평가받는 V자 도랑과 게르만족이 세웠다는 일명 게르만 방벽에 대해 발광 연대 측정을 수행하였는데 토이토부르크 전투의 유적이라고 평가 받는 일부 구조물이 중세시대에 지어진 것으로 측정된 것. 다만 하틀링 교수는 로마군과 게르만족의 유물이 집중적으로 발굴된 고토양층의 경우 로마 시대의 것으로 추정된다는 점, 연대 측정이 유적지의 극히 일부분에 대해서만 진행한 점을 들어 해당 유적지에서 로마군과 게르만족 간 전투가 벌어졌을 가능성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았다. #
이후 이에 대해 칼크리제 박물관 관장인 스테판 버마이스터 박사는 마지막으로 태양빛을 받은 시기를 추적하는 발광 연대 측정법이 가지는 한계점과 발굴 초기부터 확인된 유적지 내 중세 경작 활동을 들어 중세 시대 활동의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존재하는 해당 구조물에 대해 최초 건립된 연대를 중세 시대라고 확정짓기엔 단편적인 해석이며 현재까지 가장 강력한 증거로 자리잡고 있는 유물을 강조하는 것을 골자로 한 반박 논문을 발표했다.#
5. 기타
5.1. 미디어
히스토리 채널에서는 아르미니우스가 숲길을 가다가 숨어있었던 반대파 자객의 단검에 찔려 죽는 장면이 나온다.《The Eagles of Rome》이라는 이탈리아 만화에서 토이토부르크 전투와 아르미니우스를 다루고 있다. 픽션이 어느 정도 가미되었고, 만화에서 묘사되는 토이토부르크 전투도 매복이라는 점은 동일하지만, 아르미니우스가 숲속에 로마군을 몰아넣고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수렁이 있는 개활지에서 로마군을 포위 공격하는 공개적인 대규모 회전을 벌인다.
이 전투를 모티브로 <박카스 스타리그 2008>에서 악령의 숲이라는 맵[12]을 공식맵으로 했으나, 러쉬 거리가 너무 가까운 데다가 유닛이 끼이는 사태가 벌어져 중간에 퇴출되었다.
<토탈 워: 로마2>에서 역사적인 전투로 재현되었다. 그런데 제작진이 바루스 까인지, 바루스가 군대를 버리고 도주하다가 아르미니우스에게 붙잡혀 애걸하다가 죽은 것으로 묘사되는데, 실제 역사에서는 자살했다. 꿈도 희망도 없는 상황이 잘 구현되어 있지만, 목적이 도주인 전투로 역사적인 전투 중에선 쉬운 편이다.
이 전투를 주제로 한 데스메탈 밴드 Ex Deo의 <Teutoburg>라는 곡이 있다. 브레이크 부분의 바루스의 복병이다!, 그리고 엔딩 부분의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내 군단을 돌려다오!라고 절규하는 부분이 있다.
넷플릭스에서 이 전투를 다루는 드라마 <바바리안>에서 아르미니우스가 바루스에게 게르만계 마르시족이 부족장의 아들을 인질로 주는 것을 거부한다면서 마르시족을 공격하자고 주장해 바루스가 이를 믿고 출전시키며, 바루스의 명령에 따라 아르미니우스가 선발대로 가서 정찰을 하기로 한다. 아르미니우스가 지시한 대로 게르만 연합군은 로마군을 분단시키기 위해 주변에서 나무들을 쓰러뜨린다.
분단한 로마군을 보고 게르만 연합군이 일제히 측면에서 공격하고 후발대로 간 바루스는 선봉이 공격받았다는 것을 전해듣고 개활지로 철수하지만, 게르만 연합군이 이를 예측해 개활지로 가서 불구덩이를 던져 로마군이 혼란에 빠져 분단되자 일제히 공격해 로마군이 몰살된다.
《로마 디펜스》에서도 한 번 언급이 되었는데, 비디메르의 군대를 섬멸하기 위해 매복전을 전개한 장소가 토이토부르크 숲이었던지라 주인공이 이 전투를 떠올리며 께름칙해 했다. 물론 전투의 결과는 제1차 전투와 달리 로마군이 게르만 세력에게 기습을 가해[13] 대규모 섬멸전으로 마무리되었으며, 이 전투로 게르만 부족들을 유화적으로 흡수해 확장한 엘베 강까지의 영토를 확실하게 안정화시킬 수 있었다. 여담으로 이후 토이토부르크로 해체된 17, 18, 19군단이 제2차 토이토부르크 전투 이후에 재건되었다.
[1] 현대 독일 니더작센 주와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주에 있는 낮고 울창한 숲이다.[2] Teutoburg(토이토부르크), 라틴어로는 Teutoburgiensis saltus(테우토부르그 숲)이라고 한다.[3]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양아들, 로마 제국의 제2대 황제[4] 게르마니쿠스의 아버지이자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양자였으며, 티베리우스 황제의 동생이었다.[5] 제5대 네로 황제의 할아버지[6] 율리우스 카이사르조차 갈리아를 완전히 로마의 영토로 만드는 데 7년이라는 세월이 걸렸다. 물론 오늘날 프랑스의 국토 넓이를 보면 정복에 7년 들어간 건 짧은 편에 속한다.[7] 티베리우스와 대 드루수스 형제는 카이사르와 아그리파의 전례를 참조해 게르마니아 내 게르만 여러 부족들과 동맹관계를 맺고, 이를 통해 전쟁을 진행시켰다. 이는 티베리우스보다 5~6살 많은, 그래도 젊은 편인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도 비슷했는데, 꽤 실력이 있는 이 사람조차 동방과 다른 게르만 부족들간의 관계 설정에서 그 특수성으로 꽤 고생했다. 더 정확히 말하면 바루스의 전임자 중 아헤노바르부스는 동방 스타일의 외교 전략을 게르만족과의 외교에서 그대로 차용했다. 이는 게르만 부족들과의 외교 전략과 맞지 않아 친 로마파 게르만 부족들 사이에서 불만이 터져 나왔는데, 급기야 ‘신뢰’를 중요시하는 게르만 부족 내 친 로마파 내부까지 흔들리게 했다. 그래서 티베리우스가 애써 신뢰 관계 정도로 만든 친 로마파 부족 대열의 유지를 위해 로마는 아헤노바르부스의 군공이 뛰어났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조기 소환했다. 따라서 아헤노바르부스의 사례처럼 로마가 동방의 파르티아, 아르메니아, 헬레니즘 보호국들과의 관계와 비슷하게 행동할 경우, 이는 경고등이 켜질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꽤 유연한 면이 있어서 게르만 부족들이 일단 불만은 품어도 반기는 안드는 수준에 머물게 한 아헤노바르부스와는 달리, 바루스는 통치술 역시 강압적이고, 폭압적인 방법도 주저하지 않았던 사람이라 문제가 커졌다.[8] 그가 바루스의 부관이었다는 주장도 있으나 원래 바루스의 부관은 레가투스인 누모니우스 발라(Numonius Vala)라는 인물이었다. 다만 대 게르만 통치에 있어서 바루스가 게르만 족 군장의 아들이라 현지 사정을 잘 알던 아르미니우스의 의견을 많이 참조한 것은 사실이었다.[9] 당시 서게르만족들 사이에서 오딘이 주신이었다.[10] 독일 귀족들이 중세에는 라틴어를, 근세에 들어서는 여기에 프랑스어까지 쓰기는 했으나, 그렇다고 독일어를 못하는 것은 또 아니었고, 대다수 민중들은 크게 저지 독일어 아니면 고지 독일어를 썼다. 하지만 로마 제국의 영토였다가 게르만계 프랑크 왕국의 영토가 된 프랑스는 지배 계층만 게르만계 프랑크족이었지 프랑스 민중의 대다수인 갈리아-로마인은 켈트식 야매 라틴어, 즉 오늘날 프랑스어의 모체 언어인 갈로로망스어를 사용했다.[11] 강행돌파를 하던 로마군은 이 방벽에 가로막혀 전멸한 것으로 추정된다[12] 원래 이름은 '토이토부르크'였다고 한다.[13] 보다 정확히는 기습전의 아이디어를 낸 것이 마리우스 밑에 갓 들어온 부르군트와 프랑크 등의 게르만 부족들이었고, 이때 주인공이 이끈 로마 군단들도 대부분 게르만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