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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구스투스 영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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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구스투스 영묘의 전경(2019. 03.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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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원 상상도
유네스코 세계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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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한글 [1]
영어 [2]
프랑스어 [3]
국가·위치 이탈리아 로마, 바티칸 시국
등재유형 문화유산
등재연도 1980년
등재기준 (i)[4], (ii)[5], (iii)[6], (iv)[7], (vi) [8]
지정번호 91

1. 개요2. 건설3. 안장자들4. 훼손5. 여담

[clearfix]

1. 개요

로마 제국의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기원전 28년에 지었으며, 로마 제국의 황제와 황족들의 유골이 안장된 영묘(靈廟)이다.

2. 건설

기원전 31년, 안토니우스클레오파트라 7세악티움 해전에서 승리하면서 명실상부한 로마의 지배자가 된 아우구스투스는 수도 로마에 대대적인 건축 붐을 일으켰는데, 그 첫 번째 계획으로 착수한 공사가 바로 자신과 후손들이 묻힐 대규모 무덤의 건설이었다.

건설 이유는 옥타비아누스로 불리던 시절, 아우구스투스가 숙적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와의 대립이 심화될 무렵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이 당시 그는 살아있던 안토니우스 유언장을 공개하며 자신과 안토니우스의 내전을 로마와 이집트의 대결로 보기 좋게 포장했다. 그리고 이때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에게 단단히 실망한 원로원과 로마시민들에게 "죽어서도 저와 제 가족들은 로마에서 잠들겁니다"라는 선언을 공개적으로 했다. 따라서 이 무덤은 아우구스투스의 약속이었고, 그가 내전에서 승리한 이후 그와 그 일가의 애국심과 정통성을 상징한 건축물이었다.

그럼에도 해당 영묘의 건립은 로마인들이 말하는 "전쟁의 종지부를 찍는 세계의 평화"를 상징하는 차원에서 건립된 기념비적 사업인 터라 원로원과 로마인들의 지지를 받았다. 따라서 아우구스투스 영묘는 로마인들의 지지 속에 위치가 정해지고 설계를 거쳐 기원전 28년부터 건설이 시작됐다.

건축 설계를 맡은 이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해당 영묘 설계에 영감을 준 건축물은 마케도니아 왕국의 전설적인 정복군주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영묘와 기원전 350년경 건설된 마우솔로스 영묘라고 한다.

아우구스투스 영묘가 들어선 장소는 캄푸스 마르티우스(마르스 광장) 인근으로, 당시에는 '도심'으로 여겨졌던 세르비우스 성벽[9]의 바깥에 속했는데, 이는 시내에 무덤을 쓰지 않는 당대 로마인의 관념을 거스르지 않기 위한 것이었다.

영묘는 지름 90m, 높이 42m의 원형 대리석 건물이었으며, 크게 3층으로 이루어진 건축물 형태였다. 영묘 외부에는 노송나무를 심어 사철 푸른색을 유지했다. 영묘의 원뿔 지붕 제일 높은 꼭대기에는 무덤을 건설한 아우구스투스의 동상이 세워져 있었고, 영묘의 통로 앞쪽 좌우에는 로마에서 제작한 화강암 오벨리스크가 배치되어 있었는데, 현재는 에스퀼리노 언덕산타 마리아 마조레 대성당퀴리날레 언덕이탈리아 대통령 관저 퀴리날레 궁으로 각각 옮겨졌다. 이 때문에 에스퀼리노 언덕과 퀴리날레 언덕의 오벨리스크에는 이집트 상형 문자가 새겨져 있지 않다.

대개의 로마 시대 건축물처럼 대리석에는 염료를 활용해 추가 장식을 했다고 한다.

3. 안장자들

아우구스투스가 영묘를 건설한 목적은 국립묘지나 본인 신격화 아래 권력을 절대시하려는 이유가 아니었다. 그는 내전기 당시의 약속 그대로 자신과 후손들이 묻힐 무덤을 마련하기 위해, 사비로 이 영묘를 건립했다. 로마인의 삶과 죽음에서 집안과 가문마다 재산과 사회적 위엄에 따라 매장 방식, 가족 공동묘 구성 등을 가지고 있고, 사후에도 그들이 클리엔텔라 관계 아래 함께 납골묘에서 공유된 가족으로 남는 것을 떠올릴 때, 국립묘지 개념보다는 엄밀한 의미에서 아우구스투스와 그의 일가인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즉 카이사르 가문 사람들이 묻혀 삶과 죽음을 함께 할 가족 공동무덤이었다.

따라서 후대 로마 황제들은 해당 무덤을 황제, 황후, 황족만 묻히는 국립 묘지로 생각하지 않았고, 자신들이 제위에 오르면 반드시 묻힐 특별한 공간이라고 정의하지 않았다. 그래서 아내, 친자녀가 없던 네르바 외의 비(非)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황제, 황후, 황족들은 이곳에 묻히지 않았다. 플라비우스 왕조의 세 황제 베스파시아누스, 티투스, 도미티아누스 모두는 그들 선대부터 묻힌 플라비우스 가문 공동 묘지에 안장됐고, 트라야누스는 아내와 함께 묻힐 곳을 조성해 합장 형태 유골함에 담겨 영원히 잠들었으며,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아예 새로운 하드리아누스 영묘를 건설했다. 그리고 세베루스 왕조를 세운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는 두 아들과 함께 스스로 셀프 입양 선언으로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의 정치적 양자를 선언하고 이름에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안토니누스를 넣으면서 마치 한 가문인양 하드리아누스 영묘에 잠들었다. 하지만 하드리아누스 영묘 역시 세베루스 왕조 황제 중 세베루스 알렉산데르가 사후 복권 후 다시 묻히지 않고, 사실상 영묘의 역할을 다하는 식으로 처리됐다. 그래서 군인황제시대 황제들 중 로마나 이탈리아 땅에 잠든 푸피에누스, 발비누스, 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를 비롯한 황제들은 거진 각자 석관을 넣을 무덤을 조성해 출신 가문의 공동묘에 묻히는 식으로 잠들었다. 왜냐하면 하드리아누스 영묘 역시 하드리아누스가 본인과 양자, 일가 친척들을 위한 가족 공동묘로 조성한 장소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로마 제정 역사에서 아우구스투스 영묘에 마지막으로 국가 전체의 관심 아래 황제나 황족이 정식 매장된 일은 네르바였고, 마지막으로 로마 황제나 황후의 시신이 이 건물에 모셔진 때는 율리아 돔나의 시신이 세베루스 왕조가 부활된 뒤에 정식 화장 직전의 시신 보관소로 잠시 이용될 때 뿐이었다.

가족 공동묘지였기 때문에, 당연히 아우구스투스 일가의 직계들이 정식 화장 후 매장됐다. 하지만 가장 먼저 영묘에 가장 먼저 안장된 사람은 아우구스투스가 아니라 그의 조카이자 사위였던 마르켈루스였다. 아들이 없었던 아우구스투스가 후계자로 염두에 둔 사람인데다가 젊은 나이에 로마를 휩쓴 전염병에 걸려 어이없게 요절했기 때문에 황제의 슬픔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 때문에 갓 완공된 영묘에는 마르켈루스의 유골을 안장했다.

두 번째 안장자는 아우구스투스 평생의 친구이자 조력자였으며, 그의 사위가 되어 외손자들을 낳아준 마르쿠스 빕사니우스 아그리파였다. 아그리파는 아우구스투스의 상속자이며 양자로 2대 황제가 되는 티베리우스의 장인이자 그의 군사,행정 실무를 가르친 스승이기도 했으며, 두 외손자의 친부인데다, 아우구스투스가 본인의 진심을 유일하게 털어 놓던 유일한 친구였다. 더해 그는 사망 전 호민관 특권을 받은 상태였고, 사인은 공무 중 건강 악화로 인한 급사였다. 이런 인간적 관계, 국가서열 등의 이유로 아그리파 사망 직후, 아우구스투스는 18살의 나이부터 늘 함께 한 친구의 죽음을 슬퍼했고 국장으로 열린 엄숙한 장례식 후 아그리파의 추모는 국가애도기간으로 결정되어 한달간 엄숙히 집행됐다.

세 번째 안장자는 아우구스투스의 아내 리비아 드루실라가 첫 남편 사이에서 얻어 낳은 대 드루수스다. 그는 2대 황제 티베리우스의 친동생이자 아우구스투스의 양자이면서 조카 사위로, 아그리파 생전부터 아우구스투스가 마르켈루스 이후 차기황제로 낙점한 후계자였다. 그러나 드루수스는 게르마니아 정복을 거의 완성한 뒤, 현직집정관 신분으로 아우구스투스의 지원 아래 개선식을 거행하기 직전 29살의 한창 나이에 낙마사고 후유증으로 요절했다. 따라서 연이어 세 명의 후계자들을 떠나보낸 아우구스투스는 하늘에 대고 신을 원망하며 울분을 토할 정도로 크게 좌절했다. 특히, 누구보다 아낀 양자 드루수스 사망에 큰 충격을 받은 황제는 황후와 함께 이 일로 심리치료를 받을 정도로 낙담해, 황궁 곳곳에 죽은 양자의 살아생전 크기의 조각상을 놓고 대화를 나누며 떠나보낸 드루수스의 빈자리를 극복했다고 한다.

조카, 친구이자 사위, 양자이자 조카사위를 연이어 떠나보낸 아우구스투스는 이후 양자로 일찍히 입적시킨 두 외손자 가이우스 카이사르, 루키우스 카이사르를 먼저 떠나보냈고, 이들의 시신 역시 정식 화장 후 본인이 상주가 되어 매장을 지켜 봤다. 이후 그는 양자 티베리우스를 정식입적 후 공동황제로 승격시킨 뒤에야 자신이 만든 이 영묘에 묻혔다.

아우구스투스 사후, 영묘에 매장된 황족은 아우구스투스의 손자로 대 드루수스의 장남이며 티베리우스의 양자인 게르마니쿠스였고, 그 다음은 티베리우스의 친아들 소 드루수스였다. 이들은 모두 아우구스투스가 서기 4년 당시부터 제왕교육 아래 티베리우스 사후 나란히 제위를 보장한 황족들이었다. 두 사람 사후에 매장된 사람은 아우구스투스의 아내로 로마 최초의 아우구스타로 등극한 리비아 드루실라이며, 그 다음은 2대 황제 티베리우스였다. 티베리우스 사후에 매장된 황족은 3대 황제 칼리굴라의 어머니 대 아그리피나와 그의 두 형 네로 카이사르, 드루수스 카이사르였다. 이후 매장된 사람은 아우구스타 칭호를 가지고 있던 황족인, 아우구스투스의 조카로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소 옥타비아 부부의 막내딸이며 대 드루수스의 아내, 칼리굴라와 티베리우스 게멜루스의 할머니 소 안토니아, 그 다음은 암살된 뒤에 가매장 후 정식 장례를 거쳐 국장으로 매장된 칼리굴라였다. 칼리굴라 이후엔 4대 황제 클라우디우스 1세였다. 그리고 아우구스투스의 직계 혈육 중 최후의 매장자는 적통 상속자였던 브리타니쿠스였다.

아우구스투스 영묘에 안장 후 영면에 든 이들은 당시 로마인들의 장례 문화 중 공화정기 파트리키, 노빌레스 가정의 장례 전통에 따라 매장됐다. 따라서 황제와 황후, 황족들은 사망 후 정식 장례식 후 추모식을 거쳐 화장되었고, 납골 항아리[10]에 담겨졌다. 이 과정에서 황제 혹은 남성황족들이 대표로 로스트라에서 고인을 추모한 것에 그치지 않고, 아우구스투스의 양자 드루수스(대)의 사례처럼 황제가 살아생전 인간됨과 업적을 기리는 헌정시와 비문도 함께 조성했던 것으로 보인다. 동시에 드루수스 사망 후 납골묘 구성 기록에서 드러나듯, 로마 제국과 황제, 원로원 차원에서의 헌사 혹은 추모도 따로 집행된 것으로 보이며, 황제가 개인적 차원에서 따로 방문한 것으로도 보인다.

건물 구조를 살펴보면 총 3개의 방으로 이루어진 구조로 건물 가운데에는 아우구스투스의 자서전인 《업적록》이 적힌 청동판 등이 위치해 있었다. 그리고 영묘 심장부에 있는 방은 황제들 외의 안치자들의 매장실로 이용됐다. 이 매장실은 추모실을 거쳐 계단을 따라 내려가면 나오며, 그 위를 통해 마련된 건물 형태의 공간에는 아우구스투스와 그 후임 황제들의 유골항아리가 영면해 있던 것이 재개장 전 복원 공사 중 확인됐다.

2021년 3월 1일 재개관에 앞서 추가로 밝혀진 바에 따르면, 아우구스투스를 비롯해 티베리우스, 가이우스(칼리굴라), 클라우디우스는 다른 남녀황족들과 같은 유골항아리 매장실을 사용하지 않고, 아우구스투스의 동상 아래에 위치한 가장 높은 매장공간에 안치됐던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또한 아우구스투스 직계 남녀황족들의 유골항아리는 석회를 발라 매장실에 안치된 이후 쉽게 훼손되지 못하게 보호 작업을 한 것으로 확인됐으며, 하드리아누스 영묘와 달리 아우구스투스 영묘 안장자들은 그들의 비문, 업적 소개와 추모 내역을 비롯해 황족들의 유골항아리, 매장 장소도 공개됐다.

아래 정리된 안장자들은 기록상 신원이 명확하게 확인된 황제, 황후, 황족들이다. 참고로 비고에 설명된 인물간 관계는 혈연관계 기준으로 기술됐으며, 황제의 경우 굵은 글씨로 표시하겠다.
안장자 출생 사망 비고[11]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 BC. 42년 B.C. 23년 아우구스투스의 조카 겸 사위
마르쿠스 빕사니우스 아그리파 B.C. 63년 / 64년 10월 / 11월 23일 B.C. 12년 아우구스투스의 사위, 티베리우스의 장인, 드루수스(소)의 외할아버지, 칼리굴라의 외할아버지
네로 클라우디우스 드루수스 게르마니쿠스(드루수스(대)) B.C. 38년 / 23년 3월 B.C. 9년 9월 14일 티베리우스의 동생, 리비아 드루실라의 차남, 아우구스투스의 조카 사위, 옥타비아(소)의 사위, 안토니아(소)의 남편, 게르마니쿠스와 클라우디우스의 아버지, 칼리굴라와 브리타니쿠스의 할아버지
소 옥타비아 B.C. 69년 B.C. 11년 아우구스투스의 누이, 안토니우스의 아내, 게르마니쿠스와 클라우디우스의 외할머니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B.C. 20년 4년 2월 21일 아그리파의 장남, 아우구스투스의 외손자
루키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B.C. 17년 2년 8월 20일 아그리파의 차남, 아우구스투스의 외손자
아우구스투스 B.C. 63년 9월 23일 14년 8월 19일 로마 제국 초대 황제 ,리비아 드루실라의 남편
게르마니쿠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B.C. 15년 5월 24일 19년 10월 10일 칼리굴라의 아버지, 클라우디우스의 형, 옥타비아(소)의 외손자
드루수스 율리우스 카이사르(드루수스(소)) B.C. 13년 23년 9월 14일 티베리우스의 외아들, 네로 클라우디우스 드루수스 게르마니쿠스의 사위, 칼리굴라의 오촌당숙이자 고모부
리비아 드루실라 B.C. 58년 1월 30일 29년 9월 28일 아우구스투스의 아내,고대 로마의 초대 아우구스타. 티베리우스와 대 드루수스의 어머니, 게르마니쿠스와 소 드루수스, 클라우디우스의 할머니, 칼리굴라와 브리타니쿠스의 증조할머니
빕사니아 아그리피나 B.C. 14년 33년 10월 17일 아우구스투스의 외손녀, 게르마니쿠스의 아내, 칼리굴라의 어머니, 네로의 외할머니
네로 율리우스 카이사르 게르마니쿠스 6년 30년 게르마니쿠스와 아그리피나의 장남, 칼리굴라의 첫째형, 클라우디우스의 조카, 네로의 외삼촌
드루수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게르마니쿠스 7년 33년 게르마니쿠스와 아그리피나의 차남, 칼리굴라의 둘째형, 클라우디우스의 조카, 네로의 외삼촌
티베리우스 B.C. 42년 11월 16일 37년 3월 16일 로마 제국 제2대 황제
율리아 안토니아 B.C. 36년 1월 31일 37년 9월 / 10월 아우구스투스의 조카, 네로 클라우디우스 드루수스 게르마니쿠스의 아내, 게르마니쿠스와 클라우디우스의 어머니, 가이우스(칼리굴라)의 할머니
가이우스(통칭: 칼리굴라) 12년 8월 31일 41년 1월 24일 로마 제국 제3대 황제
율리아 리빌라 18년 41년 / 42년 게르마니쿠스와 아그리피나의 막내 딸, 칼리굴라의 여동생, 네로의 이모
클라우디우스 B.C. 10년 8월 1일 54년 10월 13일 로마 제국 제4대 황제
브리타니쿠스 42년 2월 12일 55년 2월 11일 클라우디우스의 외아들, 칼리굴라의 사촌동생
포파이아 사비나 30년 65년 네로의 아내
네르바 30년 11월 8일 98년 1월 27일 로마 제국 제12대 황제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의 황제와 황족들이 묻히던 영묘답게 대부분의 아우구스투스의 일가들이 매장되어 있다.

그러나 이 왕조의 마지막 황제 네로는 매장되지 못했다. 그는 로마 외곽에 자리한 본가 아헤노바르부스 가문의 공동 묘지 중 선친 해방노예들의 이름이 박힌 석관에 매장됐다. 왜냐하면 아우구스투스 일가에 입양됐음에도 살아있을 무렵 국가의 적으로 규정됐고, 탄핵 당시 아우구스투스 일가에게 벌인 행적이 범죄로 규정되어 그 자격이 박탈됐기 때문이다.

아우구스투스 일가 황족 중에도 반역이나 추방을 당한 이들 역시 영묘에 매장되지 못했다. 아우구스투스의 친딸 대 율리아, 외손주 소 율리아, 아그리파 포스투무스는 아우구스투스 생전 모든 상속권과 특권이 박탈[12]된 까닭에 사후에도 매장되지 못했고, 네로에게 반역죄와 간통죄 누명을 뒤집어 쓰고 처형된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두 딸 클라우디아 안토니아, 클라우디아 옥타비아 자매 역시 네로의 명령 아래 매장되지 못했다. 또한 세야누스와 불륜을 저지르며 남편 드루수스 율리우스 카이사르를 독살하고 급사로 꾸며낸 장본인 리빌라와 그녀의 딸로 남편 네로 카이사르, 시동생 드루수스 카이사르에게 누명을 씌워 제거하는데 합세한 율리아 리비아, 리빌라의 아들로 칼리굴라 손에 죽임을 당한 티베리우스 게멜루스 역시 처형과 숙청 속에서 반역과 연관된 이유로 이 곳에 매장되지 못했다.

반면 네 황제의 해 이후 제위에 오른 황제인 갈바, 마르쿠스 살비우스 오토, 비텔리우스는 개인 자격으로 개인묘지에 안장되거나(갈바, 오토), 테베레강에 시신이 던져졌다.(비텔리우스)

이탈리아와 서양 학자들에 따르면 플라비우스 왕조베스파시아누스와 그의 두 아들은 모두 플라비우스 가문 개인 무덤에 안장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서기 98년 사망한 네르바 황제는 아우구스투스 일가가 아님에도, 재위 기간 중 사실상 강금 형태가 되었고 유가족들 역시 네르바에게 유산 상속을 못 받는 특수한 상황 등을 이유로, 사후 원로원의 지시로 아우구스투스 영묘에 매장됐다.

네르바가 묻힌 뒤, 영묘는 더이상 사용되지 않았다. 이유는 납골항아리를 안치할 공간이 만원이 되었기 때문이라는 주장이 있는데, 이는 세베루스 왕조 시절에 종종 시신 안치 보관소로 이용됐다는 점을 볼 때 사실이 아닐 확률이 높다고 한다.[13] 따라서 네르바 다음 황제인 트라야누스 황제는 자신이 만든 트라야누스 포룸에 있는 원기둥[14]에 황후와 함께 안장되었다. 반면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해당 영묘 확장 공사 대신 아예 테베레강 서안에 새로운 황제 묘를 건설하는데, 통칭 '하드리아누스 영묘'로 불리는 이 영묘는 로마 제국 멸망 이후에 교황청의 성채로 개조되어 오늘날에는 산탄젤로 성(카스텔 산탄젤로)이라는 이름으로 유명하다.

4. 훼손

해당 영묘는 로마 황제들에게 국립묘지로 인식된 장소라기보다는 아우구스투스와 그 일가의 개인묘지 개념이었고, 하드리아누스 이래로 황제들의 무덤은 하드리아누스 영묘였지만 국가 차원에서 이를 관리했다. 전승된 이야기들에 따르면 해당 영묘 역시 410년 서고트의 왕 알라리크가 로마를 포위하고 약탈했을 때, 이 영묘 역시 도굴 되면서 항아리들은 내부 장식품들과 함께 약탈당했다고 한다. 따라서 해당 영묘도 항아리 관석들만 남아 있다고 알려졌고, 황제와 황족들의 유골함이 훼손돼 찾을 수 없다는 것이 정설처럼 알려졌다.

이는 하드리아누스 영묘와 트라야누스 원주도 이 때 도굴당했고, 로마 전체가 약탈됐기 때문에 신빙성이 높았던 주장이었다.[15] 더군다나 영묘는 중세를 거치면서 요새로 전용되어 크게 훼손되었고, 교회와 영주 등이 영묘를 장식한 대리석 조각을 건축 자재로 이용해 뼈대만 남은 상태인데다, 농민과 전문 도굴꾼, 유지, 교회 등이 영묘 안치자들의 유골을 담은 납골 항아리 등을 노리고 조직적 차원에서 도굴을 시도해 이런 주장은 완전 복원 공사 전까지는 정설로 확정됐다.

더군다나 19세기에는 투우장, 공연장으로 쓰인 까닭에, 1930년대에 들어와서야 당시 이탈리아 왕국의 독재자였던 베니토 무솔리니가 이를 싸그리 정리하고 복원했다고 해도 제2차 세계 대전 때문에 완전히 복원되지 못했다. 설상가상 사적으로 지정되었다고 해도, 아우구스투스 영묘는 로마 시내 불량배들의 장소로 이용되어 우범장소가 되고 무단으로 쓰레기가 투기되는 등 훼손이 심각했다. 따라서 영묘 훼손은 다른 로마 시대 유적과 비교해 생각보다 상태가 심각해졌고, 관리가 허술해 2007년부터 2021년까지 대대적인 보수 공사를 가졌으며, 2021년 3월 1일(현지 시간)에 영묘만 우선 시민들에게 공개되었다.

방치된 영묘는 복원 프로젝트가 진행되면서, 매장자 중 마르쿠스 빕사니우스 아그리파의 비문이 발견된다거나, 유골항아리가 깨지고 마구 흩뿌려진 것으로 추정된 것으로 여겨진 황족들의 매장실에서 영면한 황족들의 유골항아리 등이 하드리아누스 영묘와 달리 온전한 상태도 꽤 존재함이 확인됐다. 이는 로마인들이 석회를 바르고 쉽게 훼손하지 못하게 보호한 노력 덕분이라고 한다. 이에 대해 탈리아 방송 매체들은 중세 시대 도굴꾼들이 이를 깨기 위해 시도한 곡괭이 자국이 아우구스투스의 누나 옥타비아의 납골항아리와 매장공간에서 확인됐고, 다른 황족들의 매장공간에서도 비슷한 흔적이 있었다고 한다. 허나 도굴꾼들의 노력에도 석회가 워낙 단단하고 두꺼워 이 시도가 실패했다고 한다.

2021년부터 아우구스투스의 누나로 4대 황제 클라우디우스의 외할머니인 소 옥타비아의 유골항아리와 아그리파의 비문 등이 로마 시대 당시의 모습 그대로 대중들에게 처음 공개됐다.

2022년 6월부터는 다시 보수 공사에 들어가 일반인의 출입이 금지되었다.

5. 여담


[1] 로마 역사 지구 - 바티칸 시국의 유산들과 산 파올로 푸오리 레 무라 대성당[2] Historic Centre of Rome, the Properties of the Holy See in that City Enjoying Extraterritorial Rights and San Paolo Fuori le Mura[3] Centre historique de Rome, les biens du Saint-Siège situés dans cette ville bénéficiant des droits d'extra-territorialité et Saint-Paul-hors-les-Murs[4] 인간의 창의성으로 빚어진 걸작을 대표할 것[5] 오랜 세월에 걸쳐 또는 세계의 일정 문화권 내에서 건축이나 기술 발전, 기념물 제작, 도시 계획이나 조경 디자인에 있어 인간 가치의 중요한 교환을 반영[6] 현존하거나 이미 사라진 문화적 전통이나 문명의 독보적 또는 적어도 특출한 증거일 것[7] 인류 역사에 있어 중요 단계를 예증하는 건물, 건축이나 기술의 총체, 경관 유형의 대표적 사례일 것[8] 사건이나 실존하는 전통, 사상이나 신조, 보편적 중요성이 탁월한 예술 및 문학작품과 직접 또는 가시적으로 연관될 것[9] 다만, 일찍이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권력을 잡고 나서 펼친 수도 재개발에 의해 마르스 광장에도 많은 수의 공공건물이 세워짐과 동시에 비좁았던 세르비우스 성벽의 상당수가 파괴되었다고 한다.[10] 과거에는 하드리아누스 영묘에 안장된 로마 황제, 황후, 황족들의 유골항아리처럼 황금으로 제작되었다고 추정됐으나, 2021년 관광객들에게 첫 공개된 유골항아리는 놀랍게도 로마 시대 귀족이나 기사계급 출신들이 많이 사용한 대리석 등으로 만들어진 제품이었다. 참고로 2021년 복원 이후 공개된 유일한 유골항아리의 주인공은 아우구스투스의 누나, 게르마니쿠스&클라우디우스 형제의 외할머니 소(小) 옥타비아의 것이다.[11] 입양관계를 제외한 혈연관계 기준[12] 대 율리아는 아버지 명성에 먹칠을 한 대 사건을 저질렀기 때문에 아버지 생전에 먼 섬으로 귀양을 가서 쓸쓸히 죽었으며, 외손녀 소 율리아 역시 살아생전 외할아버지 아우구스투스와 사이가 나쁜데다 간통죄로 추방 후 섬에서 사망했다. 외손자인 포스투무스는 해당 문서 참조.[13] 애초 이 영묘 건립은 옥타비아누스가 안토니우스의 발언에 맞불을 놓고 본인 일가의 새로운 공동 납골당을 만들면서 시민에게 개방해 기부하겠다는 것에서 시작됐고, 건설 역시 공약 실현 때문이었다. 더욱이 플라비우스 왕조의 황제들이나 트라야누스, 하드리아누스가 증축을 하지 않았고, 이들은 거진 그들이 본래부터 가지고 있던 가족 무덤을 만들거나 아예 새로운 무덤 조성 공간을 지어 묻혔다.[14] 이 원기둥에는 그의 업적인 다키아 전쟁의 전 과정을 부조화하여 새겨넣었다.[15] 하드리아누스 영묘의 경우, 유골이 든 항아리는 테베레강에 던져버리고 청동상 등 값이 나가는 장식품들은 서고트족이 약탈해 가거나 테베레강에 버렸다고 한다. 다만 하드리아누스의 것으로 추정되는 항아리의 관석 하나는 남아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