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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형극장
유네스코 세계유산 | ||
이름 | 한국어 | 렙티스 마그나 고고 유적†[1] |
영어 | Archaeological Site of Leptis Magna | |
아랍어 | موقع لبدة الأثري (لبتس ماغنا) (لبدة الكبرى) | |
프랑스어 | Site archéologique de Leptis Magna | |
국가·위치 | 리비아 무르쿠브 주 콤스 | |
등재유형 | 문화유산 | |
등재연도 | 1982년 | |
등재기준 | (i)[2], (ii)[3], (iii)[4] | |
지정번호 | 183 |
Leptis Magna
아랍어: لَبْدَة
페니키아어: 𐤋𐤐𐤒 / 𐤋𐤐𐤒𐤉 (Lpq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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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렙티스 마그나 유적은 리비아의 수도인 트리폴리에서 해안을 따라 동쪽 (미수라타 및 시르테 방면)으로 90여 km 가면 나온다. 위의 지도에서 보이듯, 유적은 훔스 (콤스) 시내 동쪽에 위치해 있다. Lectis, Lepcis, Lubta 등으로도 불리는 렙티스는 페니키아-로마 시대의 유적으로, 북아프리카의 로마식 도시 유적 중 가장 그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다. 리비아의 대표 관광지이며, 트리폴리와 정기적인 교통편이 활성화 되어 있다.
2. 역사
흔히 로마의 식민도시인 콜로니아라는 배경으로, 로마인 퇴역 정착 도시로 알고 있는 경우가 많다. 그렇지만 렙티스는 페니키아인의 식민 도시로 건설되었다. 기원전 500년 이전인, 기원전 7세기 후반 페니키아인의 정착지로 건설된 렙티스는 와디 레브다 하구에 위치한 카르타고 제국의 주요 도시임에도 일찍부터 그리스인 정착촌이 생기고 추가 건설되는 등 많은 일이 있었다. 따라서 도시 이름 역시 다양했다.LPQ(페니키아어: 𐤋𐤐𐤒) 또는 LPQY(𐤋𐤐𐤒𐤉)로 쓰여진 렙티스 어원은 " 건설하다 " 또는 " 조각을 모으다 " 를 의미하는 셈어 어근 LFQ 와 연결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것은 아랍어에도 흔적이 존재한다고, 2004년 리핀스키와 에드워드 공동 연구에서 발표됐다. 이런 페니키아식 도시명은 이후 고대 그리스 세계를 통일한 마케도니아 왕국의 정복군주 알렉산드로스 대왕 이후, 이 일대에 대왕의 보호를 받는 그리스인들이 식민도시 구역을 건설한다. 이 과정에서 카르타고에게 렙티스는 카르타고 제국의 일원으로 굳혀졌다. 그렇지만 렙티스는 이때부터 헬레니즘화 된다. 따라서 그리스인의 북아프리카 진출 이후, 와디 레브다 하구에 위치한 렙티스는 고대 그리스어로 Λέπτις로 표기되고, 로마인을 비롯한 지중해 세계에 렙티스(Léptis)로 알려지는데, 이때 그리스인과 카르타고인 모두는 카르타고와 가까운 튀니지 쪽의 렙티스와 구분코자, 대(大) 렙티스를 뜻한 렙티스 메갈레(Léptis Megálē , 고대 그리스어: Λέπτις μεγάλη)라고 불렀다. 또 그리스 세계의 영향을 받으면서, 주민의 그리스어 사용이 일반화되어, 알렉산드로스 대왕 이후 그리스인에게 네아폴리스(Neápolis , 고대 그리스어: Νεάπολις, "신도시")라는 이칭으로도 불렸다.
그러다가 로마가 카르타고를 멸망시키고, 렙티스 마그나 일대를 기원전 2세기 이래 시르티카 지방 또는 트리폴리타니아 지방으로 부르면서부터, 오늘날까지 잘 알려진 이름인 렙티스 마그나가 되었다. 이때 이탈리아 출신 로마인이 퇴역 후 렙티스 일대의 땅을 받아 정착했는데, 로마인은 렙티스를 라틴어화하면서 렙키스(Lepcis)라고 불렀다. 이후, 서기 2세기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 시대인 트라야누스 황제 아래에서 정식으로 콜로니아 승격과 과세 특권을 받으면서부터, 렙티스 마그나는 트라야누스 황제의 본래 성씨인 울피우스에서 따온 콜로니아 이름인 울피아 트라야나(고대 라틴어: Vlpia Traiana)라는 이칭을 얻었다.
렙티스 역사를 살펴보면, 기원전 7세기 후반 페니키아인 정착도시로 건설됐다. 하지만 페니키아인의 렙티스 시절 이야기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다만, 기원전 515년경 스파르타의 왕자로 클레오메네스 1세의 동생 도리에노스(도리에누스)가 그리스인 식민도시를 건설하려고 했고, 페니키아계 렙티스인들이 그 시도를 물리칠 만큼, 도시 국력 자체가 강력하고, 카르타고 제국 안에서 매우 독립적인 세력이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런 렙티스는 이후 카르타고 제국의 일부로 번성하면서, 도시에 그리스계 주민이 꾸준히 정착했다. 그러던 와중 카르타고가 포에니 전쟁에서 로마에게 패배하고, 옛 카르타고 제국 일대가 로마의 속주가 되면서부터 로마의 지배를 받는다. 로마는 일단 렙티스에게 독립적인 상태를 유지하는 대신, 반(半) 식민도시화하였다.
로마 시대 렙티스의 복원도
열주 유적
카르타고의 지배를 받으며 트리폴리타니아를 대표하는 항구 도시로 성장한 만큼, 눈독을 들인 외세는 많았다. 따라서 렙티스 마그나는 카르타고 멸망 이후 공백 속에서 로마의 동맹국인 누미디아에 점령되었다. 하지만 곧 유구르타 전쟁 후 로마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로마 공화국은 도시 통제를 위해 우선적으로 소규모 수비대와 함께, 로마군 퇴역병과 그 가족을 보냈고, 렙티스를 반(半) 식민도시로 만들었다. 이탈리아계 로마시민으로 구성된 주민들이 곧 도시 권력을 차지했고, 원로원의 비호를 받는 이탈리아 출신 로마 상인들이 도시에 정착했다.
렙티스 마그나는 카르타고 근처의 소(小) 렙티스와 달리 번영해, 은과 청동으로 만든 자체 주화를 주조할 특권도 로마에게 허락받았다. 이때 발행된 주화에는 페니키아, 그리스, 로마 문화가 혼합된 새로운 페니키아식 문자를 혼용하고, 렙티스 마그나 특유의 헤라클레스와 디오니소스 이미지를 새겨졌다. 동시에 로마는 렙티스 주변 농지에 있던, 많은 올리브 나무 농장을 주목해, 많은 올리브 압착기를 만들어, 라티푼디움의 거점으로 활용했다. 그 결과, 기원전 46년경 올리브 오일 생산량이 너무 많아진 나머지, 카이사르의 내전 속에서 무력으로 경쟁자와 원로원을 제압한 종신 독재관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에게 렙티스는 세금으로 300만 파운드의 올리브유를 큰 부담없이 공급해 화제가 됐다.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양자로, 카이사르의 둘째 누나 율리아의 외손자인 옥타비아누스가 기원전 31년 악티움 해전 승리 후 로마 제정을 개막시킨다. 옥타비아누스는 기원전 29년 아우구스투스로 불렸고, 곧 속주 개편 등을 발표했다. 이렇게 아우구스투스 통치와 함께 로마 제정이 시작되면서부터, 렙티스 마그나는 엄청난 변화를 겪는다. 아우구스투스의 허락 아래, 렙티스 마그나는 콜로니아(식민 도시) 지위를 가지고 있지 않음에도, 따로 키비타스 리베라 에트 임뮤니스(civitas libera et immunis), 즉 자유 공동체로 불리며, 속해 있던 아프리카 속주 총독 지휘 속에서 반(半) 독립된 트리폴리타니아 지방의 실질적인 주도 위치를 갖는다. 이때 렙티스 마그나는 아프리카 속주 총독 휘하에 분류된 지역임에도 따로 렙티스를 중심으로 한 별도의 통제권을 아우구스투스에게 부여 받았다. 그 배경에는 제3 아우구스타 군단(Legio III Augusta)이 주둔하고, 병영 도시 겸 퇴역 군인들의 식민 도시로서 계획적인 바둑판식 시가지가 조성되었던 것이 컸다. 따라서 총독 휘하 부총독이나 행정관의 관리 대신 따로 황제가 두 명의 현지 이탈리아계 로마시민에게 소페트로 불린 지방 행정관 직을 내려 관리받았다.
아우구스투스 사후, 즉위한 아우구스투스의 양자, 후계자인 2대 황제 티베리우스는 마우레타니아 문제 등으로 북아프리카 일대의 일부 통치를 수정하는 과정에도 렙티스 마그나의 이전 지위를 재차 보장해줬다. 티베리우스는 선황 아우구스투스의 결정을 항구화하면서 아프리카 속주에 정식 병합 후 관리했다. 3대 황제 칼리굴라는 렙티스 마그나를 중심으로 한 트리폴리타니아 지역 무역 거점과 체계를 꾸려 로마 행정 역량을 집중시켰다. 그 결과, 렙티스 마그나는 네로 시대 당시 도시 번영과 생활 수준을 상징한 원형 극장을 갖게 됐고, 도시가 부유해지면서, 정식으로 도시 규모를 인정받는 무니키피움 지위를 얻게 됐다. 그러다가 트라야누스 황제에게 렙티스가 정식으로 콜로니아로 승격됐다.
하지만 이 모든 역사보다 렙티스 마그나를 빛나게 한 사건은 당연코 렙티스 마그나 출신인 이탈리아계 로마인이며 황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의 등장이었다.
로마 시대에 특기할 만한 점은, 서기 193년에 세베루스 왕조를 개창하는 루키우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가 이곳에서 태어났다는 점이다. 세베루스는 즉위 이후 렙티스로 금의환향하며 여러 건물을 세웠고, 도시 이름에도 마그나 (그리스어로 '위대한') 호칭을 정식으로 붙였다. 또한 아프리카 속주를 경쟁자 클로디우스 알비누스 제거 후 분할하면서, 렙티스 마그나를 트리폴리타니아 속주의 주도로 선포하고, 렙티스 마그나에 제국의 부와 권력을 쏟아 부었다. 그 결과, 렙티스 마그나는 세베루스 왕조 아래에서 포에니쿠스(Poenicus) 지방 또는 푸닉 지방으로 불린 북아프리카 일대에서 카르타고, 알렉산드리아와 함께 지역 최고 도시를 놓고 자웅을 겨누는 대도시로 위세가 대단해졌다. 하지만 235년 세베루스 알렉산데르 황제가 마인츠에서 군대의 불신임 속에서 모후 율리아 마마이아와 함께 암살되고, 세베루스 왕조가 무너지면서, 중앙 정부 차원의 후원이 끊긴다. 설상가상 도시에 주둔한 제3군단 아우구스타가 고르디아누스 3세 아래에서 정치적 보복을 당해, 해체되고, 보복을 당하면서, 도시 분위기가 흉흉해지고, 지역 치안이 악화되면서 무역량 감소를 겪는다.
이렇게 쇠락하던 렙티스 마그나는 365년 쓰나미로 엄청난 타격을 입는데, 이런 상황에서 당시 황제인 발렌티니아누스 1세는 탐관오리로 악명 높은 총독 로마누스의 보고를 그대로 믿고, 쓰나미 피해로 흔들린 렙티스 마그나 주민과 지역 지도자들을 학살했다. 이 일에 관해, 동시대 역사가이자 군인 암미아누스 마르켈리누스는 렙티스 마그나에게 피해를 입힌 것은 쓰나미보다는 이 당시 총독이던 로마누스, 당시 황제였던 발렌티니아누스 1세였다며, 렙티스 마그나의 쇠락은 인재라고 밝혔다. 암미아누스 마르켈리누스는 "로마누스라는 부패한 로마 총독이 대규모 부족 습격 동안 도시를 보호하기 위해 뇌물을 요구하면서 위기가 악화되었다."고 전하면서, 발렌티니아누스 1세의 궁중 관료들은 로마누스에게 뇌물을 먹고 모른 척 했고, 당시 황제 발렌티니아누스 1세 역시 총독 말만 듣고, 렙티스 마그나 주민들을 반역죄로 학살하고, 마구잡이로 온갖 처벌을 가했다고 밝혔다. 이때 발렌티니아누스 1세는 쓰나미로 큰 피해를 입고 이재민이 발생해 정신없는 렙티스 마그나 주민과 도시에서 세금을 못내면서 거짓말을 한다고 역정을 냈는데, 그는 로마누스의 고발을 받자마자 괴씸죄까지 적용해 렙티스 측이 보낸 궁중 사절단을 반역혐의로 십자가형 등 잔혹한 방법으로 도시 대표들을 처벌하고, 렙티스 마그나 주민들에게도 혹독한 처벌을 가했다. 따라서 발렌티니아누스 1세, 로마누스의 폭정에 렙티스 마그나 주민들은 조상들이 살았던 이탈리아로 역이민하거나, 근처 도시로 대피했고, 도시는 회복 불가능할 정도로 쇠락한다.
다행히 테오도시우스 1세 시절이 되면서, 렙티스 마그나는 누명을 벗는데, 그럼에도 도시 경제는 예전처럼 좋아지지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 4세기의 베르베르 인의 침공, 5세기 반달족의 침공을 받는다. 그 결과, 도시는 완전히 쇠락했고, 작은 항구로 존속하다가, 결정적으로 11세기 파티마 왕조가 불러온 바누[5] 힐랄에게 파괴되어 현재와 같은 모습이 되었다.
3. 갤러리
세베루스 개선문
극장
4. 매체에서
대항해시대 온라인에서 유적 발견물로 구현되었다.리아드 사투프의 만화 미래의 아랍인 1권에서도 가족이 방문하며, 두 페이지 가량 묘사된다.
실제 모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