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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인 | 첫째 부인 클로디아 풀크라 · 둘째 부인 스크리보니아 · 셋째 부인 리비아 드루실라 | ||
자식 | 딸 대 율리아 · 양아들 가이우스 카이사르 · 양아들 루키우스 카이사르 · 양아들 티베리우스 · 양아들 대 드루수스 | ||
전투 | |||
내전기 | 무티나 내전 · 해방자 내전 · 페루시아 내전 · 시칠리아 내전 · 안토니우스-옥타비아누스 내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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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란 | 일리리아 대반란 | ||
기타 | |||
장소 | 아우구스투스 영묘,(), · 판테온 | ||
기타 | 칭호 · 기원전 23년 로마 헌정위기 |
악티움 해전 영어: Battle of Actium | ||
시기 | 기원전 31년 9월 2일 | |
장소 | 그리스 악티움 곶 | |
원인 | 옥타비아누스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분쟁. | |
교전 세력 | 옥타비아누스 | 안토니우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
지휘관 | 옥타비아누스 마르쿠스 빕사니우스 아그리파 루키우스 아룬티우스 마르쿠스 루리우스 티투스 스타틸리우스 타우루스 |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가이우스 소시우스 루키우스 겔리우스 포플리콜라 푸블리우스 카니디우스 크라수스 마르쿠스 옥타비우스 마르쿠스 인스테이우스 ← 퀸투스 델리우스 클레오파트라 7세 |
병력 | 갤리선 400척 보병: 16,000명 궁병: 3,000명 | 갤리선 250척 수송선 30 ~ 50척 보병: 20,000명 궁병: 2,000명 |
피해 | 사망: 2,500명 | 사망: 5,000명 250척 나포 |
결과 | 옥타비아누스의 승리. | |
영향 | 안토니우스의 죽음과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멸망. 제정 로마의 시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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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악티움 해전은 기원전 31년 로마 공화정 시대에 옥타비아누스 측 마르쿠스 빕사니우스 아그리파가 이끄는 해군이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 7세의 연합 함대와 싸운 해전으로, 로마의 오랜 내전을 끝내는 계기가 되었다.
아우구스투스가 세운 악티움 해전 기념비의 일부분 |
2. 전조
2차 삼두정으로 알려진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 간 정치적 협약은 안토니우스가 옥타비아누스의 누이인 옥타비아와 이혼하고 클레오파트라와 결합하면서 깨졌다.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 사이 로맨스는 정치적 스캔들로 번졌다. 안토니우스가 클레오파트라와 연합하여 이집트를 중심으로 동방의 새로운 국가를 세우려 한다는 의심이 나돌았다.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는 둘 다 정치적인 배경을 카이사르에 두었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옥타비아누스는 카이사르의 누이의 유일한 혈족이었으며 무엇보다 카이사르의 유언장에 직접 후계자로 지명을 받은 상태였다. 그리고 안토니우스는 카이사르 밑에서 군사적인 명성을 떨친 장군이었다.
안토니우스는 초기에는 옥타비아누스와 협력하여 키케로와 원로원파를 제거하는 데 전념했다.[1] 이 일이 끝나자 그는 삼두 간의 약정에 따라[2] 그는 알렉산드리아로 향했다.[3] 그곳에서 클레오파트라를 만나, 그녀가 카이사르와 낳은 자식인 카이사리온을 후계자로 내세울 기미를 보였다. 그리고 동방 원정을 다녀온 안토니우스는 그 개선식을 알렉산드리아에서 하면서 클레오파트라에게 왕중왕이라는 칭호를 주고[4] 카이사리온이야말로 진정한 카이사르의 후계자라고 주장했다.[5]
이러한 행위는 표면적으로 공화정을 유지하던 로마의 정책에 반했다.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가 로마 공화국을 무너뜨리고 카이사리온을 앞세워 로마의 왕 노릇을 하려고 하므로 그를 국가의 적으로 선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안토니우스가 알렉산드리아를 로마 공화국의 수도로 삼으려고 한다고 말했다.[6]
2차 삼두정의 기간이 만료된 기원전 33년, 안토니우스는 원로원에게 그의 직위를 연장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이는 옥타비아누스가 자신의 직위에 너무 집착했기 때문이었다. 그동안 둘의 사이는 점점 나빠졌다. 안토니우스는 옥타비아누스가 삼두정의 일원인 레피두스를 무시하고 있고 또 섹스투스 폼페이우스에게서 빼앗은 땅을 그가 멋대로 소유하고 있다고 했다. 게다가 그가 새로 징집한 병사의 절반을 자신에게 보내지 않고 있다고 불평하였다. 한편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가 제멋대로 섹스투스 폼페이우스를 처형했음을 비판했다. 그리고 안토니우스에게는 이집트에 제멋대로 머물 권한이 없으며, 동방에서 거둔 전리품의 절반을 보내지도 않았다고 불평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안토니우스는 오히려 카이사리온의 권한을 강화했고, 이것은 옥타비아누스에게는 큰 위협이었다.
기원전 32년, 원로원 의원 대략 3분의 1과 집정관 두 명이 안토니우스의 편에 섰다. 이들 집정관들은 옥타비아누스가 없는 틈을 타 안토니우스를 옹호했고, 이튿날 옥타비아누스는 이들에게 로마를 떠나 안토니우스와 합류하라고 말했다. 이 소식을 들은 안토니우스는 클레오파트라와 함께 에페소스로 이동해 상당수의 함대를 모았다. 그 후 카니디우스 크라수스를 아르메니아에 보내 그곳에 있는 안토니우스의 주력 부대를 배에 싣고 오게 했다.
옥타비아누스 역시 전쟁 준비에 서둘렀다. 기원전 31년 옥타비아누스의 장군 마르쿠스 빕사니우스 아그리파는 안토니우스의 동맹 도시인 그리스계 도시 메토네를 점령했다. 옥타비아누스는 뒤이어 안토니우스와의 전쟁을 공식화하기 위해 원로원에게 이집트에 선전포고를 할 것을 종용했다. 그리하여 원로원은 마침내 선전포고를 결의하고 안토니우스에게 있던 모든 권한을 회수했다.
3. 전투
안토니우스는 이탈리아 본토를 공격하려는 생각을 품었기 때문에 그리스 서쪽으로 이동하였다. 하지만 곧 옥타비아누스의 함대가 철통같이 감시하고 있음을 발견하였고 따라서 파트라이라는 그리스 도시로 철수했다. 그 뒤 그의 육군 본대는 악티움 도시의 근교로 이동하였고 그의 함대도 육군 근처에 정박했다.
이에 대응하여 옥타비아누스는 곧장 안토니우스를 공격하자는 제안을 하였으나 많은 장군들의 반대에 부딪혀 그 해를 넘겼다. 기원전 31년 초엔 아무런 군사적 마찰 없이 지나갔는데, 그동안 아그리파의 육군 본대는 그리스 서부 도시들을 점령해 나갔다. 이는 안토니우스의 주의를 분산시키기 위해서였다.
이러한 조용한 흐름은 8월 말까지 지속되었고, 마침내 아그리파의 육군 본대가 안토니우스 본대의 맞은편에 도달하였다. 안토니우스가 적극 대처하지 못한 이유는 그의 본대가 동방 전역에 흩어진 상태라 집결시키는 것에 시간이 걸렸기 때문이었다.
옥타비아누스의 본대가 도달하자 안토니우스는 자기 본대를 북쪽에서 철수시킨 뒤 남쪽에 집결하도록 하였다. 이때 클레오파트라는 안토니우스에게 조언하길, 이 지역에서 싸우기는 불리하므로 육군을 단단히 요새화 된 도시들에 주둔시킨 뒤 해군을 알렉산드리아로 철수해야 한다고 하였다. 클레오파트라가 제공한 함대는 안토니우스 군의 주력이 되었으므로 클레오파트라의 조언을 무시할 수 없었다. 따라서 안토니우스는 이 의견에 동의했다.
이 소식을 듣고 옥타비아누스는 이를 어떻게 막을까 논의를 벌였다. 그 결과 9월 1일, 그는 자신의 선박에게 전투 준비를 갖추도록 명령하였다. 9월 2일, 안개가 끼고 파도가 거센 날, 안토니우스의 함대가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이를 본 옥타비아누스는 그의 함대에게 안토니우스 함대의 우측으로 이동하도록 하였다. 안토니우스는 자신의 함대가 포위될 것을 우려하여 옥타비아누스의 함대를 공격하도록 명령하였다.
두 선단은 악티움 해협 밖에서 조우하였다. 안토니우스 휘하의 함대는 500척이었는데 그중 전함은 230척이었다. 옥타비아누스에겐 전함 250척이 있었다. 옥타비아누스의 함대는 해협 밖에 있었고 좌익에 위치한 아그리파가 지휘하였다. 안토니우스는 우익을 지휘하였고 클레오파트라가 이끄는 선단은 맨 뒤에 자리 잡았다.
전투는 오후 내내 지속되었으나 우열을 가리지 못했다. 안토니우스의 함대에겐 거대하였고 커다란 충각이 있었다. 따라서 이 배는 충돌하여 충격을 주는 방식에 유효하였으나, 충돌에 실패했다면 충각의 무게 탓에 병사들은 한동안 작은 배의 병사들의 투창, 혹은 화살 공격에 노출된다는 약점이 있었다.
안토니우스에겐 불행히도 그가 부리는 배들 상당수는 정원이 부족하였다. 안토니우스 군이 옥타비아누스의 군을 기다리는 동안 말라리아가 유행하여 많은 병사들이 목숨을 잃었기 때문에 안토니우스는 많은 배들을 비운 뒤 불태울 수밖에 없었다. 많은 노잡이들이 죽었기 때문에 안토니우스의 거대한 전함의 장점을 살리는 전투를 하기가 어려웠다.
이에 반해 옥타비아누스의 함대는 작은 배들을 모아 숙련된 뱃사람들을 태웠다. 이런 작은 배들의 우수한 기동력을 바탕으로 이들은 선회하여 투창을 하는 방식의 전투에 능하였다. 이들은 안토니우스 함대의 커다란 전함을 우회하여 충돌한 뒤 뒤이어 투석, 투창을 하며 싸웠다.
전투하기 직전 안토니우스 측의 장군 중 퀸투스 델리우스가 옥타비누스에게 투항한 뒤 안토니우스의 전략을 폭로했다. 안토니우스는 그의 거대한 전함들로 아그리파의 북쪽 측면을 공격하려고 계획하였다. 옥타비아누스는 이러한 계획을 파악한 뒤 거리를 두면서 머무르고 있었다. 마침내 안토니우스는 그의 함대의 전열을 넓힌 뒤 전진하여 옥타비아누스와 싸웠다. 후방에 있었던 클레오파트라는 전투의 긴장감과 격렬함을 견디지 못하고 자신의 함선에 후퇴를 명령한다. 그러자 클레오파트라의 함대는 그들의 기함을 따라 퇴각하였다.
안토니우스는 클레오파트라의 철수 신호를 못 보았다. 이 때문에 자기가 전투에서 패배했다고 오판하여 철수하는 이집트 함대를 따라갔다. 지휘관이 이탈하자 안토니우스 군은 혼란에 빠졌고 공포심은 병사들 사이에 전염되었다. 이에 반해 옥타비아누스 군은 기세를 타 맹렬히 공격하기 시작한다. 어둑해질 무렵 안토니우스 함대의 대부분은 파손되거나 불태워지게 된다. 안토니우스는 작은 배로 갈아탄 뒤 달아났으며 이를 소수의 몇몇 함대가 따라갔다. 뒤에 남겨진 함대는 옥타비아누스의 군에 붙들리거나 파손되고 말았다.
전투가 끝나자 옥타비아누스는 자신이 직접 병사들과 함께 난파된 선원들을 구하느라 배 위에서 밤을 지새웠다. 다음날 아침 안토니우스의 남겨진 육군은 옥타비아누스에게 항복의 사절을 보냈다. 뒤이어 안토니우스 군의 진영이 점령되었으며 이렇게 옥타비아누스는 로마의 유일한 지배자가 되었다.
4. 클레오파트라의 도주
우선 위 지도를 살펴보자. 옥타비아누스의 함대는 외해 쪽에서 안토니우스 함대와 대치하는 형국이었고, 클레오파트라의 함대 60여 척은 안토니우스 함대 후방에 위치하였다.
흔히 클레오파트라가 후퇴했다고 알려졌는데, 지도에 나오듯 엄밀히 말해 후퇴한 것은 아니다. 후퇴했다면 그리스 내해인 암브라키아만으로 갈 수 있을 뿐 이집트로는 도저히 갈 수 없다. 즉, 후퇴가 아니라 전진한 것이다.[7] 클레오파트라의 함대는 안토니우스 함대의 좌익과 옥타비아누스 함대의 우익을 지나쳐 그대로 전진 돌파한 것이다. 이렇게 클레오파트라의 함대는 돌파하여 남하한 채로 그대로 이집트로 도망갔다.
한편, 안토니우스의 함대는 3면으로 나뉘어 옥타비아누스 함대와 백중세로 싸우는 와중이라 전황을 파악하기 힘들었는데, 후방에 위치해 클레오파트라의 함대는 전황을 한눈에 파악하기 딱 좋은 위치에 있었다. 이런 판국에 클레오파트라의 함대가 도망치는 것을 보고 안토니우스 함대의 병력들이 무슨 생각을 했을지는 분명하다.
물론 안토니우스도 전장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이라 이렇게 파악했을 것이 분명하다. 따라서 악티움을 최후의 결전장이라 생각지 않은 안토니우스도 함선 40척과 함께 클레오파트라를 따라서 도망쳤다. 이렇게 두 지휘자가 도망치자 팽팽하던 전선은 순식간에 무너지고 말았다. 즉 클레오파트라가 도망친 결과 안토니우스 함대의 붕괴를 초래한 것이 명백하다. 덴마크 역사학 교수 Carsten Hjort Lange는 만약 클레오파트라가 도망치지 않았다면 안토니우스가 악티움 해전의 승자가 되었을 수도 있었다는 분석까지 내놨다.[8]
옥타비아누스 함대가 클레오파트라의 함대를 추적하지 못한 이유는 안토니우스 함대와의 전투가 한창인 데다가 호각으로 싸우고 있었기 때문에 도저히 클레오파트라의 함대를 추격할 병력을 빼낼 여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만약 이때 클레오파트라가 적진 돌파를 하고 도망치는 대신, 그대로 옥타비아누스의 우익을 안토니우스 함대의 좌익과 협공했다면 역사는 크게 바뀌었을지도 모른다. 옥타비아누스의 전 병력이 250척이었으니 우익 함대는 많아야 80척 정도일 텐데, 팽팽하던 전선에 새로운 선박 60여 척이 합류했다면 어찌 될지 모르는 일이니까.
옥타비아누스와 아그리파는 도망치는 함대에 클레오파트라가 탑승했음을 분명히 알았을 것이다. 악티움 해전이 벌어지기 직전에 안토니우스의 심복인 퀸투스 델리우스가 투항하면서 안토니우스 군의 전투 계획과 배치를 알려 주었기 때문이다. 옥타비아누스와 아그리파가 내전을 끝내는 확실한 방법으로 상대 수괴를 잡는 것이라는 상식을 모를리는 없을 테니, 클레오파트라를 추격하는 함대를 보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을 것이다. 그런데 클레오파트라의 함대에도 이를 뒤따라 퇴각하는 안토니우스의 함대에도 추격 함대를 보내지 못했다는 것은 클레오파트라가 도주할 때 전황이 팽팽했다는 증거요, 안토니우스 측에 불리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클레오파트라는 전투의 긴장감과 격렬함을 견디지 못하여 자신의 함선에 후퇴를 명령했다는 내용은 2세기 로마의 역사학자 카시우스 디오(Cassius Dio)의 저술에 나온다. 물론 2세기 사람인 카시우스 디오가 클레오파트라와 인터뷰한 것도 아니니 클레오파트라의 심정을 알 수는 없었겠지만, 그럼에도 현대 학자들이 일반적으로 이 판단을 부정하지 않음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클레오파트라가 도주함은 전술적, 상식적으로는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은 일이었고, 결국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가 몰락하는 단초가 되었다.
5. 전황에 대해
해군으로 승부를 하겠다는 안토니우스의 전략은 크게 나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안토니우스의 세력은 풍요로운 동방을 기반으로 하고 있는 데다 클레오파트라의 적극적인 후원을 받아 동원할 수 있는 자금이 넉넉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자금력에 의해 무장의 질이 좌우하는 해군에 의존하는 것은 안토니우스에게 있어 일리가 있는 생각이었다.[9]그러나 악티움 해전의 결과는 안토니우스의 참패였다. 여러 가지 불운이 겹쳤으나 가장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것은 클레오파트라의 이탈과 뒤 이은 안토니우스의 이탈이었다. 이수스 전투나 가우가멜라 전투에서 다리우스의 이탈이 승부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 것처럼 악티움에서도 같은 결과가 나온 것이다.
이 둘이 이탈하기 전엔 아그리파가 지휘하는 옥타비아누스 군은 우세하지도 않았고 또한 전술적으로 더 나은 상황이었던 것도 아니었다. 이는 아그리파의 군사적 재능이 안토니우스를 능가하지 못했기 때문이며 이는 과거 공화정 파의 브루투스와 카시우스의 상대로 한 회전에서 안토니우스가 승리한 반면 아그리파는 패배했음을 보면 알 수 있다.[10]
그러나 안토니우스는 이 전투에 대해 결정적인 오판을 하였는데 그는 이 전투를 대수롭지 않다고 여긴 것이었다. 그는 이 전투를 단지 알렉산드리아로 철수하는데 벌어진, 대단찮은 의미를 가진 교전이라 생각하였고, 따라서 악티움을 빠져나가면서 옥타비아누스의 해상봉쇄가 실패했다며 비웃었다.
하지만 안토니우스의 판단과는 달리 로마의 시민들과 속주민들은 이 교전을 사실상 패권을 다투는 결전이라고 생각하였으므로 악티움의 패전은 모든 이들이 안토니우스로부터 등을 돌리게 되는 결과를 낳았다.[11]
또한 안토니우스는 로마인들의 민심을 크게 잃은 상태였는데 그 이유는 그가 로마를 삼분하여 클레오파트라의 아들들에게 공동 통치하게 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한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이 상황에서 안토니우스를 지지하는 이유는 단지 그가 막강한 병력과 동방 및 이집트의 부를 소유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악티움에서 패전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안토니우스의 세력은 계속해서 이탈한 것이었다.[12]
무엇보다 이들 안토니우스의 병력들이 원래는 다 로마군이었으므로, 당연히 로마의 영토를 안토니우스가 멋대로 갈라 먹고 이집트 여왕의 따까리 노릇을 한다고 불만을 품었다. 그런 상황에서 패배했으니 더 이상 그들이 안토니우스를 믿고 따르기를 거부하는 계기가 될 수 있었던 것.
결국 안토니우스는 악티움 해전의 의미와 그 패전이 어떤 결과를 초래할 것인가에 대한 이해도가 전혀 없었고 따라서 태연하게 철수한 것이었다. 그가 클레오파트라를 전투에 동행한 것도 미심쩍은데 클레오파트라의 진언인 알렉산드리아로 철수한 뒤 싸울 것 역시 굉장히 소극적인 작전이었기 때문이었다. 클레오파트라는 자신의 해군 전력이 노잡이를 그리스에서 충분히 모집할 수 없어서 그러했을 터이다. 하지만 당시 엄청난 경제력을 자랑하던 그리스를 싸움 없이 내주고 철수한다는 것은 당시 안토니우스가 유일하게 내세울 수 있는 '군사적 강력함'이라는 이미지를 그냥 내던지는 셈이라 현명한 조언이 아니었다.
안토니우스는 로마에서의 정치판에 오래 굴렀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상황에서의 완벽한 판단 미스로 인해 결코 패배 할리 없어 보였던 악티움 해전을 이탈함으로써 패배를 초래하고 말았다.
그 결과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 그리고 카이사리온은 일 년 뒤 모두 목숨을 잃고 옥타비아누스, 즉 아우구스투스의 로마 제정이 시작된다.
6. 그 후
두 권력자들에게 있어서 악티움 해전의 결과가 끼친 영향은 상당하였다. 악티움 해전 이전 안토니우스는 19개 군단과 1만 2천 기병을 보유했지만, 이 해전 이후 이들의 대부분이 탈영했다. 로마 원로원이 그를 반역자로 선포하고 모든 공직에서 추방하였기에, 안토니우스는 더 이상 동방에 명령을 내릴 권한이 없었다. 옥타비아누스는 이를 파악하여 안토니우스를 쫓지 않았고 대신 그해 겨울을 그리스에서 보냈다. 이 지역에서 그는 안토니우스를 버리고 자신에게 항복을 하러 온 사절을 맞이하며 분주히 지냈다.옥타비아누스는 그가 머물던 그리스 도시 사모스에서 클레오파트라의 사절을 맞이했다. 클레오파트라는 그에게 자신이 왕위에서 물러나겠다는 뜻을 밝히며 회유하려 하나 옥타비아누스는 이에 대해 아무런 대답을 주지 않았다. 안토니우스는 옥타비아누스에게 자신의 큰아들인 안틸루스를 보내 은퇴한 뒤 아테네에서 소시민으로 살겠다고 말하지만 옥타비아누스는 이것에 대해서도 대답하지 않았다. 그 대신 옥타비아누스는 양측의 군대로 안토니우스를 압박했다. 코르넬리우스 갈루스는 군대를 이끌고 안토니우스가 있던 파래토니움에 진격하였고 옥타비아누스는 다른 군대를 이끌고 페루시움으로 갔다. 안토니우스는 갈루스 군을 상대하지만 격파당하고 이집트로 향했다.
알렉산드리아에서 안토니우스는 소규모 옥타비아누스 군을 맞아 승리를 하였으나, 이런 승리에도 불구하고 안토니우스 휘하의 병사들은 계속 탈영하였다. 안토니우스는 다시 군대를 소집해 옥타비아누스의 주력 군과 회전을 치르나 그는 이 싸움에서 철저하게 패배했다. 안토니우스는 배를 타고 달아나는 도중에 클레오파트라가 생포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자기 몸을 칼로 찔러 자살을 시도했는데, 큰 상처를 입었으나 바로 죽지는 않았다. 클레오파트라는 이 소식을 듣고 안토니우스를 자신이 머물던 영묘로 데려왔는데, 안토니우스는 클레오파트라의 품에서 숨을 거두었다. 그 뒤 클레오파트라는 옥타비아누스에게 탄원하기 위해 영묘에서 나와 궁전으로 갔다.
그러나 옥타비아누스는 클레오파트라와 그의 아들을 살려줄 생각이 없었고[13] 이에 따라 클레오파트라는 기원전 30년 8월 12일 자결했다. 옥타비아누스는 그 뒤 곧 카이사리온을 죽이고 자신이 유일한 카이사르의 아들임을 천명하였다.
옥타비아누스는 악티움에서의 승리로 로마의 유일한 지배자가 되었고, 마침내 로마 최초의 황제인 아우구스투스로 즉위했다. 그리하여 악티움 해전은 로마 공화정이 붕괴하고 로마 제국이 들어섬을 결정짓는 전투가 되었다. 또한 이 전투의 결과로 이집트가 독립국에서 로마의 일개 영토로 전락함으로써 최후의 헬레니즘 국가는 종말을 맞았다.
7. 미디어에서
클레오파트라의 비극을 다룬 많은 작품에서 반드시 묘사되는 부분이다. 가장 드라마틱하게 그린 부분이 바로 플루타르코스의 대비 열전 안토니우스 부분, 이야기 자체는 간략하지만 인물들의 심리를 잘 나타낸다.엘리자베스 테일러가 나온 영화 <클레오파트라>(1963)에서는 상당히 돈을 들여서 재현하고 있지만 난데없이 등장한 깜찍한(?) 전황 설명용 모형 배가 이미지를 망치고 있다. 실제 역사와는 달리 이 작품에서는 처참한 대결전이 벌어지고 안토니우스의 배가 손수 옥타비아누스의 기함을 제압하는[14] 장면을 보여준다. 의외로 전투신 연출은 영 아니라는 평.
미드 ROME에서는 많은 시청자들의 기대를 저버리고
콜린 맥컬로의 Masters of Rome 시리즈 마지막 편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에서는 이 전투를 안토니우스의 시각대로 위에 설명한 것처럼 해상 봉쇄를 뚫고 그리스를 포기하는 사건으로 그리고 있다. 의견 충돌 끝에 철수한 클레오파트라와 그를 따라서 봉쇄선을 돌파한 안토니우스, 그리고 돌파에 실패해서 항복하거나 파손된 부하들을 그리고 있으며 말 그대로 시시하게 생각되었지만[15] 이 전투 결과로 세력균형이 확실히 바뀌었음을 나타낸다.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의 확장팩 로마의 부흥에서 세 번째 캠페인 첫 번째 시나리오로 등장. 옥타비아누스의 입장으로 플레이하며, 안토니우스와 이집트의 마을 회관을 파괴하고 오른쪽에 있는 클레오파트라의 배를 격침시키는 것이 목표다.
김태권의 십자군 이야기 2권 프롤로그에서 다뤘는데, 옥타비아누스를 근본도 없는 로마판 부시로 해석하고, '적아를 가리지 않고 넓은 존경을 받던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를 중동의 밀을 차지하기 위해 시민들을 선동해서 음해한 후 처단한 흉악한 인물로 묘사하는 어마어마한 무리수를 뒀다.
마기아 레코드 마법소녀 마도카☆마기카 외전의 푸엘라 히스토리아 2편 알렉산드리아의 신기루 편에서 짤막하게 다루었다. 클레오파트라가 마법소녀인 에보니를 전쟁에 참여시켰지만 에보니의 마법인 매료를 사용하기에는 혼전상황과 더붙어서 범위가 넒어서 에보니의 마법이 통하지 않아서 패배했다는 식으로 묘사했다.
[1] 원래 옥타비아누스는 원로원파의 명령으로 안토니우스를 치도록 되어 있었지만 이를 어기고 안토니우스와 손을 잡아 카이사르파를 결집하는데 성공해서 역으로 키케로와 원로원파를 쳤다. 물론 이 전쟁이 끝나면 옥타비아누스는 병권을 빼앗기고 숙청당할 것이 뻔했으므로 당연한 판단이었지만.[2] 원로원파를 숙청한 뒤 옥타비아누스는 이탈리아와 스페인, 갈리아를, 레피두스는 아프리카와 시칠리아를, 안토니우스는 동방을 통치하기로 밀약을 맺었다.[3] 원래 안토니우스에게는 풀비아라는 아내가 있었는데, 풀비아는 남편이 동방으로 떠난 뒤에도 로마에 남아서 옥타비아누스와 정치전을 벌이다가 패해 사망했다. 이후 옥타비아누스는 삼두정을 유지하기 위해 자기 누나인 옥타비아를 안토니우스에게 시집보냈다.[4] 정확히는 '왕 중의 여왕이자 왕자들의 여왕'이다.[5] 정확히는 자신이 통치하던 동방은 자신과 클레오파트라가 낳은 자식들이, 옥타비아누스가 통치하던 서방은 진정한 카이사르의 후계자인 카이사리온이 통치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물론 옥타비아누스든 안토니우스든 그들이 통치하던 영토는 전부 로마의 것이다.[6] 그리고 이는 수백 년 후 로마가 동서로 나뉘면서 실제로 이루어졌다.[7] 애시당초 후퇴했다면 옥타비아누스도 안토니우스도 한참 싸우던 와중이라 눈치채지 못했을 수도 있었다.[8] THE BATTLE OF ACTIUM: A RECONSIDERATION. 케임브리지 대학 출판국[9] 오히려 육군으로 싸울 경우 명분을 쥐고 있는 옥타비아누스에게 안토니우스의 병사들이 포섭되거나 탈영할 가능성이 높았다. 그에 비하면 배에 타고 있는 해군은 그리 쉽게 넘어갈 수는 없었고.[10] 아그리파도 유능한 장수였지만 이 시점에서는 아직 안토니우스를 능가하기는 일렀다. 무엇보다 그는 옥타비아누스와 비슷한 또래였고 이 때는 경험이 부족한 애송이 장수였다. 다만 이 때 후퇴한 것은 아그리파의 지휘가 부족했기 때문은 아니고 섬세한 성격의 옥타비아누스가 전투 중 스트레스를 참지 못하고 복통이 나서 그랬다는 말도 있다. 실제로 악티움 해전에서도 옥타비아누스는 배멀미 때문에 아무 것도 하지 못 하고 아그리파에게 모든 것을 맡겼다.[11] 심지어 안토니우스 휘하 로마군들도 이 전투를 결전이라고 여겼기 때문에 이 전투에서 패배하자 우후죽순처럼 옥타비아누스에게 항복하였다.[12] 안토니우스를 지지하던 가장 강력한 한 축이었던 군대가 무너졌으니 당연한 일이다.[13] 하지만 옥타비아누스가 정말로 죽이려고 했던 사람은 사실 카이사리온 하나뿐이었다. 카이사르의 유일한 자식은 옥타비아누스 자기 혼자로 충분했기 때문. 클레오파트라는 오히려 로마에 데려가서 자랑거리로 삼을 수 있었기 때문에 반드시 죽여야 할 이유는 없었다.[14] 물론 거기 타고 있는 사람은 진짜 옥타비아누스기 아닌 대역이었다.[15] 작중에서 옥타비아누스도 이 해전이 너무 시시하게 끝나서 후세 역사가들은 장황하게 각색할 것이라는 이야기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