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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3-06 07:18:22

엘리자베스 테일러

엘리자베스 테일러의 주요 수상 및 헌액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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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기사 서임자 (여성)
British Da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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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보기: 기사 서임자 (남성)
GBE 파일:Grand Cross of the Order of the British Empire_.jpg
엘런 테리
(1925)
넬리 멜바
(1927)
헬렌 그윈-본
(1929)
헬렌 헤이먼
(2012)
DBE 파일:external/s-media-cache-ak0.pinimg.com/52c72c2877342657973629b416017239.jpg
이디스 에번스
(1946)
데프니
듀 모리에

(1969)
애거서 크리스티
(1971)
시슬리 손더스
(1979)
주디 덴치
(1988)
매기 스미스
(1990)
다이애나 리그
(1994)
로이스
브라운-에번스

(1999)
셜리 배시
(2000)
엘리자베스
테일러

(2000)
줄리 앤드류스
(2000)
제인 구달
(2003)
헬렌 미렌
(2003)
조안 플로라이트
(2004)
비비안
웨스트우드

(2006)
자하 하디드
(2012)
제럴딘 앤드루스
(2013)
안젤라 랜스버리
(2014)
메리 퀀트
(2015)
크리스틴
스콧 토머스

(2015)
안나 윈투어
(2017)
올리비아
드 하빌랜드

(2017)
줄리 월터스
(2017)
캐서린 그레인저
(2017)
메리 비어드
(2018)
엠마 톰슨
(2018)
로잘린 히긴스
(2019)
트위기
(2019)
수잔 힐
(2020)
올리비아
뉴튼 존

(2020)
앤 마리 라퍼티
(2020)
실라 행콕
(2021)
바네사
레드그레이브

(2022)
※ 참고: List of Dames Commander of the Order of the British Empi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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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FI 선정 가장 위대한 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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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9년 미국 영화 연구소(AFI)가 선정한 역사상 가장 위대한 남, 여배우 순위이다.
1위2위3위4위5위
험프리 보가트
캐서린 헵번
케리 그랜트
베티 데이비스
제임스 스튜어트
오드리 헵번
말론 브란도
잉그리드 버그만
프레드 아스테어
그레타 가르보
6위7위8위9위10위
헨리 폰다
마릴린 먼로
클라크 게이블
엘리자베스 테일러
제임스 캐그니
주디 갈런드
스펜서 트레이시
마를레네 디트리히
찰리 채플린
조안 크로포드
11위12위13위14위15위
게리 쿠퍼
바버라 스탠윅
그레고리 펙
클로데트 콜베르
존 웨인
그레이스 켈리
로런스 올리비에
진저 로저스
진 켈리
메이 웨스트
16위17위18위19위20위
오슨 웰스
비비안 리
커크 더글러스
릴리안 기시
제임스 딘
셜리 템플
버트 랭카스터
리타 헤이워드
막스 형제
로렌 바콜
21위22위23위24위25위
버스터 키튼
소피아 로렌
시드니 푸아티에
진 할로우
로버트 미첨
캐롤 롬바드
에드워드 G. 로빈슨
메리 픽포드
윌리엄 홀든
에바 가드너
같이 보기: 영화, 사랑 영화, 뮤지컬 영화, 영감을 주는 영화, 배우, 영화 음악, 명대사 }}}}}}}}}}}}

AFI 평생 공로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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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fffff {{{#!folding [ 펼치기 · 접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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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년 1974년 1975년 1976년 1977년
존 포드 제임스 캐그니 오슨 웰스 윌리엄 와일러 베티 데이비스
1978년 1979년 1980년 1981년 1982년
헨리 폰다 앨프리드 히치콕 제임스 스튜어트 프레드 아스테어 프랭크 카프라
1983년 1984년 1985년 1986년 1987년
존 휴스턴 릴리안 기시 진 켈리 빌리 와일더 바버라 스탠윅
1988년 1989년 1990년 1991년 1992년
잭 레먼 그레고리 펙 데이비드 린 커크 더글러스 시드니 푸아티에
1993년 1994년 1995년 1996년 1997년
엘리자베스 테일러 잭 니콜슨 스티븐 스필버그 클린트 이스트우드 마틴 스코세이지
1998년 1999년 2000년 2001년 2002년
로버트 와이즈 더스틴 호프먼 해리슨 포드 바브라 스트라이샌드 톰 행크스
2003년 2004년 2005년 2006년 2007년
로버트 드 니로 메릴 스트립 조지 루카스 숀 코너리 알 파치노
2008년 2009년 2010년 2011년 2012년
워렌 비티 마이클 더글러스 마이크 니콜스 모건 프리먼 셜리 맥클레인
2013년 2014년 2015년 2016년 2017년
멜 브룩스 제인 폰다 스티브 마틴 존 윌리엄스 다이앤 키튼
2018년 2019년 2022년[1] 2023년
조지 클루니 덴젤 워싱턴 줄리 앤드류스 니콜 키드먼
[1] 2020년 시상 예정이었으나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의 확산으로 인해 시상식 개최가 2년 연기되었다. }}}}}}}}}}}}

파일:oscar_logo.svg
아카데미 진 허숄트 박애상 수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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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데미상 수상의 하나로, 오랜 기간 영화 산업 전체의 발전에 현저한 공적이있는 인물에게 수여되는 상이다. 보통 아카데미상과는 달리, 영화 예술 과학 아카데미의 이사 회원이 후보 선정과 투표를 한다.
1957년1958년1960년1961년1962년
Y. 프랭크 프리먼 새뮤얼 골드윈 밥 호프 솔 레서 조지 시튼
1963년1966년1967년1968년1969년
스티브 브로이디 에드몬드 드페티 조지 베그넬 그레고리 펙 마샤 레이
1970년1971년1973년1974년1975년
조지 제셀 프랭크 시나트라 로절린드 러셀 류 와서만 아서 B. 크림
1976년1978년1979년1980년1982년
줄스 C. 스테인 찰턴 헤스턴 레오 자페 로버트 벤자민 대니 케이
1983년1984년1985년1986년1990년
월터 미리쉬 M. J. 프랭코비치 데이비드 L. 월퍼 버디 로저스 하워드 W. 코치
1993년1994년1995년2002년2005년
오드리 헵번
엘리자베스 테일러
폴 뉴먼 퀸시 존스 아서 밀러 로저 메이어
2007년2009년2012년2013년2014년
섀리 랜싱 제리 루이스 오프라 윈프리 제프리 카첸버그 안젤리나 졸리
2015년2016년2020년2021년2022년
해리 벨라폰테 데비 레이놀즈 지나 데이비스 대니 글로버 마이클 J. 폭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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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Kennedy Center honors.jpg
케네디 센터 공로상 수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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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수상자
{{{#!wiki style="margin: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colbgcolor=#000000> 1978년 <colbgcolor=#fff,#1f2023>매리언 앤더슨, 프레드 아스테어, 조지 발란신, 아르투르 루빈스타인, 리처드 로저스
1979년 에런 코플런드, 엘라 피츠제럴드, 헨리 폰다, 마사 그레이엄, 테네시 윌리엄스
1980년 레너드 번스타인, 제임스 캐그니, 애그니스 데밀, 린 폰탠, 리언타인 프라이스
1981년 카운트 베이시, 케리 그랜트, 제롬 로빈스, 헬렌 헤이스, 루돌프 세르킨
1982년 조지 애벗, 릴리안 기시, 베니 굿맨, 진 켈리, 유진 오르만디
1983년 캐서린 던햄, 엘리아 카잔, 프랭크 시나트라, 제임스 스튜어트, 버질 톰슨
1984년 레나 혼, 대니 케이, 잔카를로 메노티, 아서 밀러, 아이작 스턴
1985년 머스 커닝햄, 밥 호프, 아이린 던, 앨런 제이 러너, 프레더릭 로, 베벌리 실즈
1986년 루실 볼, 레이 찰스, 제시카 텐디, 험 크로닌, 예후디 메뉴힌, 앤서니 튜더
1987년 페리 코모, 새미 데이비스 주니어, 베티 데이비스, 네이선 밀스타인, 알윈 니콜라이
1988년 앨빈 에일리, 조지 번즈, 마이어나 로이, 알렉산더 슈나이더, 로저 L. 스티븐스
1989년 해리 벨라폰테, 클로데트 콜베르, 알렉산드라 다닐로바, 메리 마틴, 윌리엄 슈만
1990년 디지 길레스피, 캐서린 헵번, 라이즈 스티븐스, 줄리 스턴, 빌리 와일더
1991년 베티 콤덴, 로이 에이커프, 아돌프 그린, 헤럴드 니콜라스, 로버트 쇼, 그레고리 펙
1992년 라이어널 햄프턴, 폴 뉴먼, 조앤 우드워드, 진저 로저스, 므스티슬라프 로스트로포비치, 폴 타일러
1993년 자니 카슨, 아서 미첼, 게오르그 솔티, 스티븐 손드하임, 매리언 윌리엄스
1994년 커크 더글러스, 아레사 프랭클린, 모튼 굴드, 해럴드 프린스, 피트 시거
1995년 자크 당부아즈, 메릴린 혼, 비비 킹, 시드니 푸아티에, 닐 사이먼
1996년 에드워드 올비, 베니 카터, 조니 캐쉬, 잭 레먼, 마리아 톨치프
1997년 로렌 바콜, 밥 딜런, 찰턴 헤스턴, 제시 노먼, 에드워드 빌렐라
1998년 빌 코스비, 프레드 엡, 존 칸더, 윌리 넬슨, 앙드레 프레빈, 셜리 템플
1999년 빅터 보르게, 숀 코너리, 주디스 재스민, 제이슨 로바즈, 스티비 원더
2000년 미하일 바리시니코프, 척 베리, 플라시도 도밍고, 클린트 이스트우드, 안젤라 랜스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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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수상자
{{{#!wiki style="margin: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colbgcolor=#000000>2001년<colbgcolor=#fff,#1f2023>줄리 앤드류스, 밴 클라이번, 퀸시 존스, 잭 니콜슨, 루치아노 파바로티
2002년 제임스 얼 존스, 제임스 리바인, 치타 리베라, 폴 사이먼, 엘리자베스 테일러
2003년 제임스 브라운, 캐럴 버넷, 마이크 니콜스, 로레타 린, 이작 펄만
2004년 워렌 비티, 오시 데이비스 & 루비 리, 엘튼 존, 조앤 서덜랜드, 존 윌리엄스
2005년 토니 베넷, 수잔 파렐, 줄리 해리스, 로버트 레드포드, 티나 터너
2006년 주빈 메타, 돌리 파튼, 스모키 로빈슨, 스티븐 스필버그, 앤드루 로이드 웨버
2007년 레온 플라이셔, 스티브 마틴, 다이애나 로스, 마틴 스코세이지, 브라이언 윌슨
2008년 모건 프리먼, 조지 존스, 바브라 스트라이샌드, 트와일라 사프, 더 후
2009년 멜 브룩스, 데이브 브루벡, 그레이스 범브리, 로버트 드 니로, 브루스 스프링스틴
2010년 멀 해거드, 제리 허먼, 빌 존스, 폴 매카트니, 오프라 윈프리
2011년 바바라 쿡, 닐 다이아몬드, 요요마, 소니 롤린스, 메릴 스트립
2012년 버디 가이, 더스틴 호프먼, 레드 제플린, 나탈리아 마라코바
2013년 마티나 아로요, 허비 행콕, 빌리 조엘, 셜리 맥클레인, 카를로스 산타나
2014년 알 그린, 톰 행크스, 퍼트리샤 맥브라이드, 스팅, 릴리 톰린
2015년 캐롤 킹, 조지 루카스, 리타 모레노, 오자와 세이지, 시실리 타이슨
2016년 마르타 아르헤리치, 이글스, 알 파치노, 마비스 스태플스, 제임스 테일러
2017년 카르멘 드 라발라데, 노만 레어, 글로리아 에스테판, LL 쿨 J, 라이오넬 리치
2018년 셰어, 필립 글래스, 레바 매킨타이어, 웨인 쇼터, 해밀턴 팀 (린 마누엘 미란다, 토마스 카일, 알렉스 라카뫄르, 앤디 블렝큰불러)
2019년 어스, 윈드 앤 파이어, 세서미 스트리트, 샐리 필드, 린다 론스태드, 마이클 틸슨 토머스
2020년 데비 엘렌, 조안 바에즈, 가스 브룩스, 미도리, 딕 반 다이크
2021년 저스티노 디아즈, 베리 골디, 론 마이클스, 베트 미들러, 조니 미첼
2022년 조지 클루니, 에이미 그랜트, 글래디스 나이트, 타니아 레온, U2 (보노, 디 에지, 애덤 클레이튼, 래리 뮬렌 주니어)
2023년 퀸 라티파, 르네 플레밍, 빌리 크리스탈, 디안 워윅, 배리 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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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goldenglobe_cecildemil.png
골든글로브 세실 B. 드밀상 수상자
{{{#!wiki style="margin: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1952년 1953년 1954년 1955년 1956년
세실 B. 드밀 월트 디즈니 대릴 F. 재넉 진 허숄트 잭 L. 워너
1957년 1958년 1959년 1960년 1961년
머빈 르로이 버디 아들러 모리스 슈발리에 빙 크로스비 프레드 아스테어
1962년 1963년 1964년 1965년 1966년
주디 갈랜드 밥 호프 조셉 E. 레빈 제임스 스튜어트 존 웨인
1967년 1968년 1969년 1970년 1971년
찰턴 헤스턴 커크 더글러스 그레고리 펙 조안 크로포드 프랭크 시나트라
1972년 1973년 1974년 1975년 1977년
앨프리드 히치콕 새뮤얼 골드윈 베티 데이비스 핼 B. 월리스 월터 미리쉬
1978년 1979년 1980년 1981년 1982년
레드 스켈튼 루실 볼 헨리 폰다 진 켈리 시드니 푸아티에
1983년 1984년 1985년 1986년 1987년
로런스 올리비에 폴 뉴먼 엘리자베스 테일러 바버라 스탠윅 안소니 퀸
1988년 1989년 1990년 1991년 1992년
클린트 이스트우드 도리스 데이 오드리 헵번 잭 레먼 로버트 미첨
1993년 1994년 1995년 1996년 1997년
로렌 바콜 로버트 레드포드 소피아 로렌 숀 코너리 더스틴 호프먼
1998년 1999년 2000년 2001년 2002년
셜리 맥클레인 잭 니콜슨 바브라 스트라이샌드 알 파치노 해리슨 포드
2003년 2004년 2005년 2006년 2007년
진 해크먼 마이클 더글러스 로빈 윌리엄스 안소니 홉킨스 워렌 비티
2009년 2010년 2011년 2012년 2013년
스티븐 스필버그 마틴 스코세이지 로버트 드 니로 모건 프리먼 조디 포스터
2014년 2015년 2016년 2017년 2018년
우디 앨런 조지 클루니 덴젤 워싱턴 메릴 스트립 오프라 윈프리
2019년 2020년 2021년 2023년
제프 브리지스 톰 행크스 제인 폰다 에디 머피
}}}}}}}}} ||

파일:screen_actors_guild_logo.png
영화배우조합 평생 공로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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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6px -1px -11px"
1962년 1964년 1965년 1966년 1967년
에디 캔터 스탠 로렐 밥 호프 바버라 스탠윅 윌리엄 가건
1968년 1969년 1970년 1971년 1972년
제임스 스튜어트 에드워드 G. 로빈슨 그레고리 펙 찰턴 헤스턴 프랭크 시나트라
1973년 1974년 1975년 1976년 1977년
마샤 레이 월터 피전 로절린드 러셀 펄 베일리 제임스 카그니
1978년 1979년 1980년 1982년 1983년
에드가 버겐 캐서린 헵번 레온 아메스 대니 케이 랄프 벨라미
1985년 1986년 1987년 1988년
폴 뉴먼 조앤 우드워드 나네트 페브레이 레드 스켈튼 진 켈리
1989년 1990년 1991년 1992년 1993년
잭 레먼 브록 피터스 버트 랭카스터 오드리 헵번 리카르도 몬탈반
1994년 1995년 1996년 1997년 1998년
조지 번즈 로버트 레드포드 안젤라 랜스버리 엘리자베스 테일러 커크 더글러스
1999년 2000년 2001년 2002년
시드니 푸아티에 오시 데이비스 루비 디 에드워드 애스너 클린트 이스트우드
2003년 2004년 2005년 2006년 2007년
칼 말든 제임스 가너 셜리 템플 줄리 앤드류스 찰스 더닝
2008년 2009년 2010년 2011년 2012년
제임스 얼 존스 베티 화이트 어니스트 보그나인 메리 타일러 무어 딕 반 다이크
2013년 2014년 2015년 2016년 2017년
리타 모레노 데비 레이놀즈 캐롤 버넷 릴리 톰린 모건 프리먼
2018년 2019년 2020년 2021년
앨런 알다 로버트 드 니로 취소[1] 헬렌 미렌
[1] 코로나 바이러스 확산으로 인한 시상 취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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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기네스 세계기록 로고.svg
Guinness World Records
First actress to break the $1 million threshold
(영화 출연료 100만 달러를 돌파한 최초의 여배우)
대상 기록 장소 등재 시일
ELIZABETH TAYLOR
FIRST FIRST
(NOT APPLICABLE)
기네스 등재 기록 링크


역대 아카데미 시상식
파일:oscar_logo.svg
여우주연상
제33회
(1960년)
제34회
(1961년)
제35회
(1962년)
시몬 시뇨레
(꼭대기 방)
엘리자베스 테일러
(버터필드 8)
소피아 로렌
(두 여인)
제38회
(1966년)
제39회
(1967년)
제40회
(1968년)
줄리 크리스티
(달링)
엘리자베스 테일러
(누가 버지니아 울프를 두려워하랴?)
캐서린 헵번
(초대받지 않은 손님)

전미 비평가 위원회
파일:전미 비평가 위원회 로고.png
여우주연상
1965년 1966년 1967년
줄리 크리스티
(닥터 지바고/달링)
엘리자베스 테일러
(누가 버지니아 울프를 두려워하랴?)
이디스 에반스
(위스퍼러스)

역대 영국 아카데미 시상식
파일:BAFTA 로고.svg
여우주연상
제19회
(1966년)
제20회
(1967년)
제21회
(1968년)
줄리 크리스티
(달링)
엘리자베스 테일러
(누가 버지니아 울프를 두려워하랴?)
이디스 에반스
(위스퍼러스)

역대 골든 글로브 시상식
파일:goldenglobe.png
여우주연상 - 드라마
제16회
(1959년)
제17회
(1960년)
제18회
(1961년)
수전 헤이워드
(나는 살고싶다)
엘리자베스 테일러
(지난 여름, 갑자기)
그리어 가슨
(캠포벨로의 일출)

역대 베를린 영화제
파일:베를린 국제 영화제 로고.svg
은곰상 - 여자연기자상
제21회
(1971년)
제22회
(1972년)
제23회
(1973년)
시몬 시뇨레, 셜리 맥클레인
(고양이), (데스퍼레이트 캐릭터스)
엘리자베스 테일러
(해머스미스 이즈 아웃)
없음

역대 다비드 디 도나텔로상 시상식
파일:David di Donatello logo.png
황금접시상(Targa d'oro)
제4회
(1959년)
제5회
(1960년)
제6회
(1961년)
소피아 로렌
(검은 난초)
/ 수잔 헤이워드
(나는 살고싶다)
엘리자베스 테일러
(지난 여름 갑자기)
없음
외국여자배우상(Migliore Attrice Straniera)
제11회
(1966년)
제12회
(1967년)
제13회
(1968년)
줄리 앤드루스
(사운드 오브 뮤직)
엘리자베스 테일러
(말괄량이 길들이기)

/ 줄리 크리스티
(닥터 지바고)
페이 더너웨이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
/ 캐서린 헵번
(초대받지 않은 손님)
제16회
(1971년)
제17회
(1972년)
제18회
(1973년)
알리 맥그로우
(러브 스토리)
엘리자베스 테일러
(화려한 사랑)
라이자 머넬리
(캬바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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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리우드 명예의 거리 입성자
Hollywood Walk of Fame St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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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d4a1a1><colcolor=#FFD700> 이름 엘리자베스 테일러
ELIZABETH TAYLOR
분야 영화
입성날짜 1960년 2월 8일
위치 6336 Hollywood Blv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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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544C91><colcolor=#ffffff>
엘리자베스 테일러[1]
Dame Elizabeth Taylor
DBE
[2]
파일:elizabeth-taylor-time-life-magazine-philippe-halsman-03-802x1024.jpg
본명
일리저버스 로즈먼드 테일러
Elizabeth Rosemond Taylor
출생
1932년 2월 27일
영국 잉글랜드 런던 히스우드
사망
2011년 3월 23일 (향년 79세)
미국 캘리포니아로스엔젤레스
국적

[[영국|]][[틀:국기|]][[틀:국기|]] |
[[미국|]][[틀:국기|]][[틀:국기|]]
신체
160cm[3]
직업
배우
활동
1942년2003년
배우자
칸래드 니컬슨 "니키" 힐튼 주니어(1950년 결혼 – 1951년 이혼)
마이클 와일딩(1952년 결혼 – 1957년 이혼)
마이크 타드(1957년 결혼 – 1958년 사별)
에디 피셔(1959년 결혼 – 1964년 이혼)
리처드 버튼(1964년 결혼 – 1975년 이혼)/(1975년 결혼 – 1976년 이혼)
존 워너(1976년 결혼 – 1982년 이혼)
래리 포튼스키(1991년 결혼 – 1996년 이혼)
자녀
장남 마이클 하워드 와일딩 주니어(1953년생)
차남 크리스터퍼 에드워드 와일딩(1955년생)
장녀 일리저버스 "라이저" 타드 티비(1957년생)
차녀 머리어 버튼 카슨(1961년생)[4]
종교
크리스천 사이언스유대교
별명
리즈(Liz)[5]
서명
파일:liz_taylor_signiture.jpg
링크
파일:홈페이지 아이콘.svg / 엘리자베스 테일러 재단 /
파일:X Corp 아이콘(블랙).svg / 파일:IMDb 로고.svg / 파일:페이스북 아이콘.svg / 파일:인스타그램 아이콘.svg / 파일:기네스 세계기록 로고.svg[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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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544C91><colcolor=#fff> 일본어 エリザベス・テイラー
중국어 伊莉莎白·泰勒
그리스어 Ελίζαμπεθ Τέιλορ
러시아어 Эли́забет Те́йлор
아랍어 إليزابيث تايلور
페르시아어 الیزابت تیلور
히브리어 אליזבת טיילור
}}}}}}}}} ||

1. 개요2. 생애3. 주요 출연 작품
3.1. MGM 아역스타 시절3.2. MGM 성인연기자 전성기3.3. 리즈&딕 시절3.4. 하향기3.5. 연극
4. 사회공헌 활동
4.1. HIV/에이즈 운동
5. 종교6. 외모 특징7. 인간관계
7.1. 결혼과 이혼7.2. 가족7.3. 친구
8. 패션과 보석
8.1. 패션8.2. 보석
9. 어록10. 여담11. 매체에서

[clearfix]

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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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고백>(1965)
난 그녀의 독보적인 재능과 직업정신에 압도되었다. 직관력이 뛰어나고 순간적인 감정몰입에 능했는데 그걸 지켜보는 건 일종의 특권이었다. 톱스타가 되면 거기에 안주해 제멋대로 구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녀는 늘 열의를 갖고 자신을 새로운 한계로 밀어부쳤다. 전설 그 자체인 그녀를 알고 지냈다는 사실이 매우 자랑스럽다.
폴 뉴먼
영국과 미국의 배우, 인권운동가.

보라색 눈으로 유명한 고전 할리우드 시대의 배우로, 30년 가까이[7] 박스오피스 정상을 차지하는 인기를 누리며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에 다섯 번 후보로 지명되고 그 중 두 번[8] 수상했다. 골든 글로브 2회[9], BAFTA 1회, 베를린 국제 영화제 1회 수상자이기도 하다. AFI 선정 100년간 가장 위대한 여성 배우 7위에 뽑히기도 했다. 말년엔 자신의 명성을 발판으로 유명인들 가운데 에이즈 퇴치 운동을 가장 먼저 시작하고 주도적으로 앞서 박애주의자로 칭송 받았다.

초등학생 나이에 대스타가 되어 일상이 낱낱이 언론을 타게 되면서 유년기를 상실한 뒤 어른이 되어서는 더 큰 성공을 이뤄낸, 할리우드에서 매우 흔치 않은 사례다.[10] 어려서부터 "유명세가 마치 공기와 같을" 정도로 대중에게 공개된 삶을 살았기 때문인지 동시대의 스타들과 달리 사생활을 숨기지 않았고, 이는 오늘날 스타-대중의 관계에 큰 영향을 주었다. 또한 인권 운동 참여, 화려한 개인사, 그에 따른 고난 등 현 할리우드의 공식이 된 스타성의 필수 구성 요건들을 가장 앞서 제시한 인물들 중 하나로 여겨진다. <클레오파트라>로 할리우드 배우 최초 출연료 백만 달러 계약을 이뤄냈으며 이를 기념하는 공식행사까지 가졌으나 제작이 늦어져 개봉년도로는 여배우 최초의 기록이다.[11]

2. 생애

파일:Two-year_old_Elizabeth_Taylor,_mother_Sara_Sothern,_and_brother_Howard,_1934.jpg
런던 햄스테드에서 미술중개상인 미국인 프랜시스 렌 테일러[12]와 역시 미국인인 연극배우 출신 새러 바이올러 웜브롯[13]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형제자매로는 오빠 하워드가 있다. 엘리자베스라는 이름은 할머니의 이름을 따왔다고 한다.

영국에서 미국인 부모 사이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출생 때부터 미국과 영국의 이중국적을 가지고 있었다.[14] 부계가 미술중개업에 종사한 덕에 미술품에 조예가 깊었고 유복한 환경에서 자라났다. 두 살 때부터 교양 목적으로 발레와 노래 교습을 받았고 네 살 때부터 승마를 익혔으며, 왕족들과 학교를 다녔다. 덕분에 테일러가 3살 때 나간 학교 발표회에 엘리자베스 2세가 참석해 지켜보기도 했다.

고위직들로부터 제2차 세계 대전의 전화가 영국에 감돈다는 귀띔을 받고 테일러가 7살이 됐을 때 일가족이 귀국해 LA에 자리 잡았다. 아버지는 베벌리힐스에서 유명인사들이 드나드는 화랑[15]을 운영했고, 가족들은 주말마다 말리부에서 바베큐 파티를 했다. 고모할아버지 하워드 영은 특히 재산이 많아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와 같은 거물들과 친밀한 사이였고, 뉴욕 펜트하우스에 거주하면서 코네티컷주에는 대저택을, 플로리다주엔 겨울 전용 휴양지를 구비하고 있었는데, 슬하에 자녀가 없어[16] 테일러 가족을 대리로 삼아 자신의 부를 마음껏 누리게 해주었다.

테일러는 "유명하지 않았던 순간을 기억할 수 없을" 정도로 아기 때부터 빼어난 외모로 근방에 소문이 자자해 할리우드 진출을 자주 권유 받았다. 그러나 부모님은 딸을 연예계에 내놓는 걸 선뜻 내켜하지 않았고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주인공 스칼렛과 레트의 딸 보니 역할 제의도 거절해버렸다. 그러나 테일러의 연기 활동이 아직 가족들에게 많이 낯선 미국 사교사회에 녹아드는 데 도움이 될 거란 판단이 서자[17] 1941년 테일러가 9살이 됐을 때 영화사와 계약을 체결했다.[18]

테일러는 1942년 10세 때 배우로 데뷔했으며 12살에 <녹원의 천사> 주연을 맡으며 단숨에 스타덤에 올랐다. 이는 "또래 아이들이 누리는 평범한 삶과의 영원한 결별"을 뜻하기도 했다. 이때부턴 "화장실도 마음대로 갈 수 없게 되었다." 또한 아버지가 술에 취하기만 하면 두들겨 패기 시작했다. 테일러의 말로 미루어 보면, 어린 딸이 자신보다 더 많은 돈을 벌게 된 것을 참지 못했기 때문으로 보인다.[19] 모순되게도 테일러의 데뷔를 주저하던 어머니를 설득했던 건 먼저 마음이 바뀐 아버지 쪽이었다. 래시 시리즈 오디션 기회조차도 아버지의 친구가 MGM의 제작자여서 받게 된 것이었다.
파일:elizabeth taylor.jpg
유서프 카쉬가 1946년 테일러가 14살 때 찍은 작품

15살 때 MGM 창립자 루이 B. 메이어가 매니저 역할을 해주던 어머니에게 언어폭력을 쓰며 고압적으로 구는 걸 보고 "너나 스튜디오나 다 꺼져버려!"라고 소리 지른 적이 있다. 부회장들까지 나서서 중재했지만 테일러는 끝까지 사과를 거부했고 루이 B. 메이어가 오히려 어머니에게 사과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테일러는 이때 MGM에서 자신을 내쫓지 않는 걸 보고 본인의 상품 가치를 깨달았다고 한다. 테일러의 어머니는 촬영장마다 일일이 쫓아다녀 지나친 과보호가 비아냥을 샀는데, 사실 이 덕분에 테일러는 20세기에 활동한 다른 아역스타들과 달리 마약 강요나 성희롱 같은 더러운 일을 한 번도 겪지 않을 수 있었다.[20]

성인 연기자로 대중의 눈에 확실하게 도장을 찍게 해준 작품은 1951년작 <젊은이의 양지>다. 이때부터 할리우드에 TV와 경쟁해야 하는 세상이 도래하고 기존 영화 체계가 전부 허물어지게 된다. 테일러는 딱 이 시기부터 성인 연기자로 활약했음에도 그 직전에 아역 스타로서 전통 스튜디오 양식을 제대로 다 경험했던 특별한 경우이기 때문에 "할리우드 황금기 스튜디오 체계가 남긴 최후의 유산"이라고 한다.[21]

이후 2001년까지 50편의 영화 - 드라마나 미니시리즈, 성우로 출연한 것까지 합치면 80여 편 - 를 찍었다. <자이언트>, <클레오파트라>, <뜨거운 양철지붕 위의 고양이> 등도 대표작이다. 특히 개봉 당시 실제 배우자였던 리처드 버튼과 함께 출연한 <누가 버지니아 울프를 두려워하랴?>에서 실감나게 막장 부부 연기를 보여준 게 유명하다.

평생 연기 수업 한 번 받은 적 없이 현장에 바로 투입되었음에도 처음부터 뛰어난 연기를 선보였다. 테일러는 기억력과 현장집중력이 뛰어난 배우였다. 배우라면 웃고 떠들다가도 큐 신호에 즉각 연기에 몰두해야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촬영 직전에 준비가 필요하다며 대사를 다시 확인하거나 집중을 위해 워밍업을 하며 다른 배우들을 기다리게 하는 행위를 이해하지 못했다. 실제로 모든 장면의 촬영을 단 한 번의 시도만으로 완벽하게 해내는 걸로도 정평이 나있었다. 코미디, 심리극, 스릴러 등 다양한 장르를 전부 능란하게 소화해낼 정도로 연기폭도 넓었다. 이에 부합하는 영예로운 상을 많이 탄 축에 속하지만, 그만큼 "스넙" 당한 적도 많아 이미 당대부터 미모 때문에 연기력을 정당하게 평가 받지 못하는 여배우의 예시로 자주 꼽혔다.

출연작 제목대로 태어났을 때부터 미모, 돈, 연기력까지 그야말로 "모든 것을 다 가졌던 여성"이었지만 타고난 조건들이어서 그랬는지 이 모두에 그다지 자부심을 느끼지 못하며 살았다. 그러다가 모두가 꺼리던 HIV/에이즈 인권 운동에 앞장서면서 "처음으로 삶에 목적 의식을 갖게 된다."

1983년 12월 5일 알코올 의존증 문제를 해결하고자 베티 포드 센터[22]할리우드 스타 최초로 자진 입소했다. 자니 카슨, 메리 타일러 무어 등 동료 스타들이 그 뒤를 따랐고, 덕분에 중독 문제를 쉬쉬하던 미국 사회의 판도가 완전히 뒤집혀 오늘날 일반 대중들이 중독 문제를 주변인들과 공유하고 치료소에서 적절한 조치를 받게 되었다. 1984년 1월 20일 퇴소했지만, 1988년 다시 한 번 들어갔다. <녹원의 천사>에서 승마 연기를 하다가 척추를 다친 게 고질병이 되어서 허리 통증을 해결하려다 진통제에 중독돼 고생하기도 했는데, 이는 의료진이 의도적으로 유도한 과잉복용 때문이었다. 1990년 캘리포니아 의료위원회는 80년대에 테일러에게 진통제 처방전을 수천 장 내준 3명의 의사를 적발했고 후에 경고장을 보내 견책했다.

태어났을 때부터 멀쩡한 신체기관이 전무한 수준이라 온몸의 장기를 돌아가며 수십 번의 수술을 받았다. 가장 오래된 최초의 기억이 "고통"일 정도였다. 래리 킹조차도 왜 나한테만 이런 가혹한 질병들이 벌어지나 하늘을 원망한 적 없냐고 안타까워했을 정도. 평생 밤마다 끙끙댔지만 티내지 않고 밝게 생활했다. 수많은 병마와 각종 사건들을 이겨냈기 때문에 "생존자"라는 표현이 자주 붙었다.

1994년과 1995년엔 두 번의 고관절 교체 수술이 있었다. 1997년엔 뇌졸중이 뇌종양 제거 수술로 이어졌다. 2002년엔 피부암 방사선 치료를 견뎌야 했다. 1998년과 2004년엔 등에 압박골절이 일어나 수술을 거쳤고 말년엔 휠체어 신세를 지기도 했다.

2011년 3월 23일 울혈성 심부전증 투병 중 향년 79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친구 조운 콜린스는 유명인의 사망에 언론 취재가 이 정도로 몰려든 건 다이애나 왕세자비의 타계 이후로 처음 겪는 장면이었다고.[23] 장례식은 비공개로 가족끼리 치렀으며, LA 인근의 포리스트 론 공원묘지에 묻혔다.[24] 2012년 사후 수익 랭킹 1위를 차지했고[25] 2017년까지 최상위 명단에 연속으로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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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4회 아카데미 시상식 中에서

3. 주요 출연 작품

3.1. MGM 아역스타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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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MGM 성인연기자 전성기

화면 속 존재감, 민감하고 깊이 있는 연기, 인물에 대한 상상력, 압도적인 관능미 등 사람들이 배우에게서 꿈꾸는 모든 것을 총체적으로 보여준 시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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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리즈&딕 시절

주로 리처드 버튼과 협업하며 일과 사랑을 양립하던 시기다. 둘은 언론에서 "리즈&딕(Liz&Dick)"으로 불리며 함께 하는 모든 것이 늘 큰 화제를 모았다. 흥행력이 최고조에 올라 내내 최상위권을 유지했고 예술적으로 큰 성과도 있었지만 후반엔 소위 "하이 캠프"스러운 진부한 영화들만 생산해내 비판 받았다. 보통 영화사에 뜻깊은 기여를 한 연기는 60년대 후반이 마지막이었던 것으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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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하향기

TV 출연이 잦아졌고, 연기력이 작품별로 들쑥날쑥하는 경향을 보였다. 70년대까진 흥행력 면에서 여전한 위세를 지녀 마이클 케인과 <화려한 사랑(Zee and Co)>(1972)을 찍을 때 케인의 10배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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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연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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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당시 상황을 소재로 BBC4에서 상상을 가미해 <Burton & Taylor>라는 TV 영화를 제작한 바 있다. 헬레나 본햄 카터가 테일러였고 도미닉 웨스트가 버튼이었는데, 평은 그리 좋지 않았다.

4. 사회공헌 활동

전세계에 의료 관련으로 사재를 자주 쾌척했다.

1968년, 1966년에 심장마비로 사망한 절친 몽고메리 클리프트를 기리며 심장병 연구 재단을 세우고 100만 달러를 기부했다.

특히 아프리카에 병원을 짓는 데 돈을 보태기 위해 여러 번 보석을 팔았다. 1978년엔 '테일러-버튼 다이아몬드'를 팔아 일부를 보츠와나 병원 건립 자금으로 냈다.

4.1. HIV/에이즈 운동

80년대 중반 절친이었던 록 허드슨에이즈에 걸리자 에이즈 연구 문제에 천착하기 시작했다. 1985년 허드슨이 UCLA 메디컬 센터(UCLA Medical Center)에 입원해 있을 땐 첩보작전을 방불케하는 방식으로 기자들을 따돌리며 병문안을 다녔고, 허드슨의 주치의이자 1981년 학계에서 에이즈를 신종 질병으로 최초 규명했던 면역학자 마이클 S. 고틀립(Michael S. Gottlieb)을 만나 설명을 듣기도 했다. 고틀립에 따르면, 테일러는 자신이 허드슨으로부터 HIV를 옮게 될까봐 걱정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자신이 면역체계가 무너져있는 허드슨에게 혹시 모를 병균을 옮길까봐 걱정했다고 한다.

AIDS Project Los Angeles(APLA)에 합류한 테일러는 그해 9월 최초의 에이즈 모금행사인 Commitment to Life를 조직하고 주관했다.[39] 그리고 허드슨이 죽기 전날밤 뼈 밖에 남지 않은 그의 몸을 보면서 "내 모든 생명력을 다 쏟아부어서라도 이 병이 뭔지 밝혀내고 아예 절단을 내겠다"고 결심했다.

결국 10월에 허드슨이 사망하고 비슷한 시기 친딸처럼 여기던 며느리 에일린 게티[40]마저 에이즈에 걸리자 에이즈 정복에 사활을 걸었다. 테일러는 에이즈를 향한 사회의 "거대하고 요란한 침묵"에 "분노"하고 있었다. 테일러는 캘리포니아주를 기반으로 하던 National AIDS Research Foundation(NARF)의 이사진에 합류했다가 1986년 전국 규모 단위의 에이즈 연구 자선단체 앰파(amFAR)[41]를 공동 창설했다. 앰파는 이후 전세계 3,300개 에이즈 연구팀을 후원했다. 앰파의 설립 기금엔 록 허드슨이 이를 위해 유언장에 지정해놓았던 250,000 달러가 포함돼있었다. 테일러가 앰파를 통해 이룬 업적은 의학박사 마틸드 크림(Mathilde Krim)의 노고와 함께 HBO 다큐멘터리 "The Battle of amfAR"에서 조명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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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미국 대통령 로널드 레이건호모포비아로 에이즈의 존재와 그로 인한 피해를 철저히 무시하고 있었다. 테일러는 적극적으로 로비에 들어갔다. 그리고 1987년 로널드 레이건에겐 편지를 쓰고 영부인 낸시 레이건과는 만나서 대화를 나누며 앰파의 기금 마련 만찬에 참석해 공개 발언을 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로부터 7주 뒤, 테일러의 편지에 설득된 레이건은 자리에 참석해 에이즈의 무서움과 조치의 필요성을 인정했다. 에이즈의 존재가 규명된지 6년만의 일이었다.

사회가 그저 "경멸하고 무시하고 조롱만 할 뿐" "에이즈의 급속한 확산은 외면"해 "아무도 감히 나서지 못하던 시절"에 이런 활동은 친구 엘튼 존[42]의 말처럼 "연민"은 물론 굉장한 "용기"를 필요로 했다. 더 노멀 하트의 작가 래리 크레이머는 테일러는 "우리를 위해 싸워준 최초의, 그리고 최고의 유명인사"였으며 "다른 유명인사들은 바람 맞히던 자리에도 남들의 시선을 상관하지 않고 언제나 나타나주었다"고 술회했다. 테일러는 환자들의 익명성을 보호하기 위해 몰래 호스피스 봉사를 다니면서 필요한 게 무엇인지 환자들로부터 직접 얘기를 듣고 실천했다. 테일러의 광범한 활동은 에이즈 사태에서 마치 "자연이 부리는 거대한 힘"처럼 작용했다.

이와 같은 공로를 인정 받아 1987년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았다.

1989년 테일러는 태국의 최초 에이즈 기금 마련 행사를 위해 방콕을 방문했다. 당시 태국 정부는 에이즈 창궐을 부인하고 있었고 HIV 보균자들은 바로 직장과 마을에서 쫓겨나곤 했다. 테일러는 그중 하나이며 수혈을 통해 감염된 에이즈 환자의 요청으로 만남을 갖고, 장갑을 끼지 않은 채 악수하는 사진을 찍어 HIV 보균자들은 두려워해거나 비난할 대상이 아니며, 수혈만으로도 걸릴 수 있다는 사실을 널리 알렸다. 전세계 환자들의 낙인을 벗겨냈을 뿐만 아니라 이를 계기로 태국 적십자사의 국립 혈액 센터가 전수 조사에 들어가 수많은 이들의 목숨을 미리 구할 수 있었다.
파일:Elizabeth_Taylor_AIDS_Foundation-600x315.jpg

1991년엔 HIV 보균자들의 치료에 중점을 둔 본인만의 '엘리자베스 테일러 에이즈 재단(The Elizabeth Taylor AIDS Foundation)'을 설립했다.

한편, 1991년 맨해튼 기반의 예술단체 Visual AIDS는 HIV/에이즈 환자들에 대한 연대 메시지를 표명하는 빨간 리본을 만들게 된다. 현재 쓰이고 있는 다른 모든 비슷한 캠페인 리본들의 원조다. 이 단체의 사무총장 넬슨 샌토스(Nelson Santos)에 따르면 "빨간 끈을 한 번 겹쳤을 뿐인" 이 리본은 "엘리자베스 테일러가 착용한 순간, 국제적으로 유명한 에이즈 연대 메시지의 상징이 되었다." "테일러는 이 리본을 거의 몸에서 떼지 않았다."
파일:20220920_161245_Kip Rano_Shutterstock.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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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문라이트>(2016)의 대본을 쓴 터렐 앨빈 맥크레이니는 2017년 제89회 아카데미 시상식 후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어머니는 내가 22살 때 에이즈 합병증으로 돌아가셨다. 그로부터 한 달여 전에 나는 (초고인) "Moonlight Black Boys Look Blue"을 완성했다... 25년 전인 1992년 엘리자베스 테일러는 폴 뉴먼과 작품상을 시상할 때 에이즈 확산 저지에 대한 관심을 촉구하기 위해 하얀 드레스 위에 빨간 리본을 달고 있었다... 오늘 나는 영예롭게도 어머니와 엘리자베스 테일러를 대표하기 위해 25년 전과 똑같이 하얀 양복 위에 빨간 리본을 달았다."
파일:BTRf.gi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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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4월엔 에이즈로 사망한 프레디 머큐리 추모 콘서트에 나와 에이즈에 관해 이야기했다. 콘돔 사용을 통한 감염 예방을 홍보하기 위해 손에 콘돔을 든 모습으로 1992년 11월호 베니티 페어 표지에 등장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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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은 공적을 인정 받아 테일러는 1993년 아카데미 진 허숄트 박애상 등 인권 관련상을 수차례 받았다. 현재 테일러의 자녀들과 손주들은 물론 케이트 버튼 등 테일러의 전남편들이 다른 결혼(들)에서 얻은 자녀들과 그 후손들도 테일러의 재단에 후원하거나 일에 깊이 참여하고 있다.

2019년 미국 하원의장 낸시 펠로시는 29년 전인 1990년 HIV에이즈 관련 기금 조성이 논의되던 국회 하원 예산위원회 회의에 참석해 증언을 하던 테일러, 그리고 바로 그 옆에 함께 있던 자신의 사진을 공유하며 테일러의 노고를 기렸다. 1990년 조지 H. W. 부시 대통령이 에이즈 사망 환자의 이름을 딴 라이언 화이트 법안(Ryan White CARE Act)에 서명하게 된 데엔 테일러의 활동이 큰 부분을 차지하는 것으로 평가된다. 테일러는 1986년과 1992년에도 HIV/에이즈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의회를 방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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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테일러는 바이러스성폐렴으로 폐 수술을 받았는데 에이즈 환자들을 너무 가까이 해서 에이즈에 걸린 거라는 소문이 돌아 이를 부인하는 공식 성명을 내는 웃지 못할 일도 있었다.[43]

1996년 에이즈를 주제로 한 유엔 총회에 참석해 연설했다.

할리우드 황금기 스타들 중에서 성소수자 인권운동에 개입했던 사람은 테일러가 유일하며, 성소수자 인권이 바닥이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온갖 루머가 양산되고 인신공격을 당하는 수모를 겪었다. 이 점을 성소수자 인권운동가들은 아직도 안타깝고 미안하게 여기고 있다.

친구 바브라 스트라이샌드는 테일러를 두고 "(형체가 없던) 에이즈에 얼굴을 달아준 인도주의자"였다고 기렸다. 테일러의 팬 케이티 페리는 테일러의 생애를 다룬 팟캐스트 "Elizabeth the First"에서 "최초의 진정한 인플루언서였다"고 정의 내리기도 했다.

5. 종교

어머니를 따라 크리스천 사이언스라는 개신교파를 믿고 있었지만, 랍비의 아들이었던 유대인 남편인 마이크 타드가 1958년 사망하고 찾게 된 유대교 회당에서 정신적 안정을 느끼고 1959년 개종했다. 히브리어 이름은 엘리셰바 라헬.[44]

같은 해 이스라엘 채권을 10만 달러 구매해 투자 형태로 시오니즘에 경제 지원을 한 사실이 아랍권의 반감을 사서 통일 아랍 공화국[45]에서 테일러의 출연작 전체가 상영 금지되었다. 1962년 <클레오파트라> 촬영 땐 유대교인이 클레오파트라를 연기하는 것에 분노한 이집트 당국에 의해 입국을 불허 당하기도 했다. 그러나 정작 개봉 후 영화의 전세계적 인기가 이집트 홍보에 긍정적 도움이 됐다는 결론을 내린 당국은 1964년 1월 테일러와 관련된 규제를 해금했으며 직후 이집트에서도 해당 영화 상영이 시작되었다.

유대교 신자가 된 뒤 이스라엘유대인 문제에 적극적으로 개입했다. 1967년엔 소련의 반이스라엘 입장을 비판하며 모스크바 방문을 취소했다. 1975년엔 유엔의 결의안이 반이스라엘적이라며 항의서한을 보내기도 했다. 시몬 비젠탈 센터의 후원자였으며, 친구 새미 데이비스 주니어와 함께 유대 민족 기금[46] 행사에 참여한 적도 있다. 1976년 엔테베 작전 개시 직전에 우간다의 엔테베 공항에 팔레스타인 해방인민전선의 인질로 잡혀있던 248 에어 프랑스 승객들과 자신을 교환해달라고 이스라엘 정부에 자청한 적이 있다. 이는 당시엔 함구되었다가 나중에 공개되었다. 1982-3년엔 이스라엘 총리 메나헴 베긴, 국방장관 아리엘 샤론, 레바논 대통령 아민 제메옐[47]을 각각 만나 평화 협정을 촉구하기도 했다.

6. 외모 특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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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클레오파트라>(1963)
(美)의 화신(The Beauty Incarnate)
- 뉴욕 타임즈[48]
전남편 리처드 버튼의 표현에 따르면 "신비로운 가슴"과 19인치의 매우 잘록한 허리를 갖춰,[49] 당시 할리우드가 추구하던 이상적인 몸에 완벽하게 부합했다. 인위적으로 그린 것처럼 짙게 타고난 눈썹"까마귀 깃처럼" 윤이 나는 흑발, 그에 대비되는 "석고 조각처럼" 새하얗고 "도자기처럼" 매끄러운 피부[50] 역시 각광 받았다. 실물을 접한 사람들은 평균을 훌쩍 뛰어넘는 커다란 눈에 강하게 압도되곤 했는데 리처드 버튼은 "내가 일평생 본 눈 중에서 가장 큰 눈"이라고 평하기도 했다. "오른쪽 뺨의 검은 사마귀조차도 애교점으로 인식"되었다.

또한 첩모중생증으로 태어나 속눈썹이 두 겹으로 나서[51] 마스카라가 필요 없을 정도였다. <래시 집에 오다>(1943)에 함께 출연했던 배우 로디 맥다월[52]은 테일러가 촬영에 들어간 첫날부터 혼이 났던 일화를 전하기도 했다. "저 여자앨 촬영장에서 당장 내보내 - 눈화장이 너무 진해, 마스카라를 너무 많이 얹었잖아." 물을 묻힌 수건으로 테일러의 눈을 문지르고 나서야 촬영기사는 그게 천연이라는 걸 깨달았다.

그 유명한 보라색 눈은 단지 사진이나 영화 속에서만 그렇게 보인 게 아니다. 오히려 실제로 보면 더 선명한 보라색이어서 당대의 무수한 동료 배우, 감독, 제작자, 분장사, 기자들이 예외 없이 상세히 증언하고 있다. 테일러가 보라색눈을 가졌다는 사실은 동시대 업계인들과 관객들에겐 왈가왈부할 여지가 없는, 지극히 당연한 상식이었다. 데뷔 전 아버지의 화랑에 들리던 손님들 사이에서 이미 입소문이 자자하게 나있었을 정도.더 가디언 보라색 렌즈가 없던 시절 테일러를 오랫동안 전담했던 대역 배우는 테일러의 보라색 눈과 최대한 닮아보이게 하기 위해서 시중에 나와있던 렌즈들을 조합하며 애써야했던 고충을 털어놓았다.뉴욕타임즈[53] 또한 테일러의 눈엔 특유의 오묘한 광채가 있어서 오팔에 비견되기도 했다.

재밌는 점은 테일러는 연보라색(lavender), 자색(purple), 청자색(periwinkle blue), 흰색을 좋아했는데, 전자의 두 색깔은 테일러의 눈색을 표현할 때 기자들과 동료 업계인들이 자주 쓰던 표현이기도 했다는 것이다.

코와 입술과 얼굴 윤곽의 유려한 곡선은 어머니로부터, 숯같은 눈썹과 빽빽한 속눈썹, 길고 깊은 눈매와 강렬한 눈빛은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것이다. 아버지와 판박이로 닮은 오빠 하워드도 <녹원의 천사>에 엑스트라로 나온 것을 시작으로 배우 활동을 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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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들의 스타[54] 테일러가 나타나면 스타들조차도 다들 홀린 표정으로 바라봤다고 한다. MGM 촬영장 내에 위치한 교사[55]에서 함께 수업을 들었던 데비 레널즈에 따르면 본인을 포함한 전교생이 재학 내내 테일러의 경이로운 미모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고.

그럼에도 테일러는 자기 외모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오히려 어느 쪽이었냐면 싫어하는 편에 속해 자신의 출연작들을 보는 걸 극히 꺼릴 정도였다. 존 워너와의 결혼 생활 중 우울증으로 지나치게 쪘던 살을 감량했던 때를 제외하곤 평생 관리조차 하지 않았다. 이는 사실 70년대 이후 배우 경력이 하강하게 된 원인 중 하나이기도 하다. 반면에 나이 먹는 걸 그저 기쁜 과정으로 받아들이는 원동력이 되기도 했다. 노화 현상을 오히려 즐기는 모습을 보이는 인터뷰도 자주 했다. 노화에 대한 이런 긍정적 태도는 테일러가 사망 직전까지 명랑한 성격을 꾸준히 유지하고 활발히 외부 활동을 벌일 수 있던 밑바탕이 되었다.

7. 인간관계

7.1. 결혼과 이혼

결혼을 여덟 번 한 것으로 유명하다.[56] 테일러는 "오히려 너무 청교도식으로 교육 받고 자라서, 사귀면 꼭 결혼해야 한다는 사고 방식이 크게 자리 잡았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고 설명하기도 했다. 그 말대로 결혼까지 못 간 교제 횟수는 아주 잠깐이라도 만나봤다고 일방적으로 주장하는 남자들까지 다 따져도 두 손으로 셀 수 있을 정도다. 일과 연애를 완전히 분리해 일 관계로 만난 사람들 중에 엮인 건 리처드 버튼이 유일하다.[57] 리즈&딕 시절이 대중에겐 가장 큰 인상을 남겼지만 테일러의 삶 전체로 보면 가장 예외적인 기간이라고 할 수 있다. 미혼 시절엔 육군사관학교 미식축구 스타 글렌 데이비스[58], 윌리엄 D. 폴리 주니어[59]와 건전한 청소년 교제를[60]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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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혼 계기는 와일딩이 테일러가 <자이언트>(1956)를 찍으러 떠난 사이 아이들을 테일러의 부모님께 맡겨놓고 집으로 스트리퍼 두 명을 불러서 칸피덴셜[63]지에 기사화 됐기 때문이다. 심경을 묻는 인터뷰 요청이 쇄도했지만 테일러는 침묵하다가 별거-이혼 수순을 밟았다. 또한 테일러는 결혼할 때 몰랐지만 사실 와일딩은 앨프리드 히치콕의 <무대 공포증>(1950)에 같이 나왔던 마를레네 디트리히와의 관계를 정리하지 않은 상태였다. 테일러가 이를 어느 시점에 알게 됐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그래도 와일딩을 아이들 아버지로서 끝까지 존중해 와일딩과 관계된 언급은 극도로 자제했고 자식들 앞에서도 단 한 번도 탓한 적이 없다고 한다. 더 나아가 와일딩 가계의 전통도 익히도록 키웠다. 디트리히와도 업계 동료로 무난하게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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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타드는 결혼 1년 만에 전 대통령 해리 트루먼만나러 가다가 뉴 멕시코에서 전용기 사고를 당한다. 탑승한 전원이 사망했다. 원랜 테일러도 함께 하기로 했던 여정이었지만 갑자기 고열에 시달려 집에 머물러 있었다. 첫째 딸은 막 6개월차가 된 터였다. 테일러는 죽을 때까지 타드의 죽음을 극복하지 못했다. "단 하루도 그를 떠올리지 않고 지나간 날이 없다." 테일러는 리처드 버튼과 더불어 자신이 사랑한 두 남자로 타드를 꼽았다. 타드의 급사 후 테일러가 유대교 관련 활동에 평생을 투신했고 엔테베 작전 때처럼 아예 목숨까지 내놓으려 한 적도 있기 때문에 버튼보다 타드를 더 사랑했을 거란 분석도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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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훗날 레널즈와 그 자녀들은 테일러의 연약해진 심리를 피셔가 계획적으로 파고든 당시 상황을 각자의 회고록을 통해 증언하게 된다. 그 중 하나가 스타워즈레아 공주 역을 도맡아했던 캐리 피셔다.[66] 당시 테일러를 걱정하며 지켜본 많은 주변인들은 "테일러가 타드의 뒤를 따라가기 위해 곧 자살할 거라고 생각했다." 전담 미용사 시드니 길러라프[67]에 따르면 테일러는 "깨어있는 동안에는 계속 비명을 질러댔다." 자해 시도를 하는 게 발각돼 진정제가 끊임없이 투여되기도 했다. 테일러의 이런 위태로운 상태를 에디 피셔는 접근하기 좋은 절호의 기회로 봤던 것이다.
레널즈가 밝혔던 얘기 중 가장 소름 끼치는 부분은 에디 피셔가 타드의 사망 즉시 "타드의 모든 점을 정확히 모방했다"는 사실이다. "인격을 아예 타드로 갈아끼운" 수준이었다고 한다. 피셔는 "원래 평생 술담배를 전혀 안 하던 사람이었는데, 타드처럼 술을 마시고 시가를 태우기 시작했다"고.
테일러는 경력을 그대로 이어가고 피셔는 재기하지 못한 것 역시 이런 정황들과 맥락이 맞닿아 있다. 이를 두고 "테일러의 팬들은 테일러를 용서하게 됐지만, 에디 피셔의 팬들은 끝까지 피셔를 용서하지 못했다"고들 한다.
테일러가 버튼과 사랑에 빠지면서 이혼을 요구하자 피셔는 재산 분할을 놓고 몇 달 동안 공개적으로 싸움을 걸었다. 그러나 1964년 3월 5일 테일러가 멕시코 법원에 낸 진정에 이의를 제기하는 걸 실패하면서 이혼이 결정났다. 둘은 40여 년이 지나고서야 통화를 재개했다. 그럼에도 캐리 피셔에 따르면, 테일러는 에디 피셔가 사망했을 때 가족의 죽음이라 여기고 울었다고 한다. 말년에 테일러는 피셔와의 결혼은 타드를 되살려놓는 하나의 방법이었다고 술회했다.
레널즈와 테일러는 테일러가 피셔와 이혼하고 버튼과 결혼한 직후인 1964년 관계를 회복했고[68], 제화업계 재벌과 재혼한 상태였던 레널즈와 테일러-버튼 부부가 함께 어울리기도 했다.[69] 캐리 피셔가 대본을 쓴 TV영화 <디즈 올드 브로즈>(2001)에 테일러와 레널즈가 함께 출연하기도 했을 정도. 캐리 피셔는 이 영화 속 대사들을 통해 간접적으로 아버지 에디 피셔를 또 한 번 비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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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트 스턴이 <클레오파트라> 촬영장에서 찍은 작품
버튼과 관계하면서 테일러는 피셔에게 대놓고 차가운 태도를 취했지만 피셔는 이미 할리우드 전체가 알게 된 이 염문에 대해 전혀 눈치를 채지 못하고 있었다. 피셔의 자서전에 따르면, 피셔가 이 둘의 밀월을 처음 알게 된 건 다름 아닌 당사자 버튼과의 직접 통화를 통해서였다.[71] 극도로 분노한 피셔는 바로 테일러와 살던 로마식 빌라 저택으로 달려와 테일러에게 총구를 겨눴지만, 곧 마음을 고쳐먹고 "괜찮아, 엘리자베스, 널 죽이지 않을 테니까. 그러기엔 넌 너무 아름다워"라는 말과 함께 총을 내려놓았다고.
테일러는 "세상에서 제일 유명한 사람"이란 별칭까지 있던 우상이었기 때문에 사회 각계에서 난리가 났다. 무려 미국 국회에서 두 사람의 재입국을 막아야 한다는 얘기가 나왔다. 교황청도 공개서한을 통해 꾸짖었다.[72] AFI 선정 가장 위대한 배우로 선정된 50명 중 셜리 템플, 프레드 어스테어, 제임스 캐그니 단 셋만 제외하고 전부 한 번 이상씩 불륜을 저질렀음에도 잉그리드 버그만과 테일러만이 극단적인 비난을 받은 건 매우 불공평한 처사였는데, 버그만은 외국인이라 단죄 받은 게 컸고, 테일러는 그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인기가 많은 세계적 스타라는 이유로 공격 대상이 되었다. 2인 구도 사진을 건지기 위해 전세계 파파라치들이 로마 촬영장 근처에 몰려들어 나무 위나 건물에 숨어있곤 했다. 이를 통해 오늘날 파파라치의 모습이 형태를 갖추게 되었다.[73]
결국 둘은 각자의 배우자와 헤어지고 결혼식을 올렸다. 둘의 결혼식은 '세기의 결혼식'이라고 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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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일러는 친구 셜리 맥클레인에게 "버튼은 사랑하는 방법을 알려준 남자"라고 말했다.[74] 버튼은 다혈질에다가 알코올 의존증까지 있어서 테일러와 엄청나게 싸웠지만 테일러가 가장 사랑한 남자였고, 테일러는 죽은 후에 함께 묻히고 싶다고 말하기도 했다. 버튼은 테일러의 사진 뒷면에 "그녀를 만나보지 못했거나 알게 된 적이 없는 사람은 삶에서 많은 걸 놓친 것이다"라고 적었다. 둘은 테일러가 에디 피셔와 준비해왔던 독일 태생 고아 머리어의 입양 수속도 함께 마쳤다.
버튼은 테일러에게 끝없이 보석을 선물했는데, 그중 일부는 아예 이름에 '테일러'나 '테일러-버튼'이 붙을 정도로 유명해졌다. 이혼 후 재혼을 감행할 정도로 서로에게 매료돼 있었지만 결국 두 번째 이혼으로 마무리 되고 말았다. 테일러는 "우린 너무 사랑해서" "서로의 사정과 감정과 영혼에 함몰된 나머지 개개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잃어버리는 경지"에 이르렀던 게 문제였다고 말했다.
결혼 전 버튼이 멕시코에서 <이구아나의 밤>(1964)을 찍을 때 테일러가 따라갔는데, 촬영장이 있던 항구 푸에르토 바야르타는 그 테일러와 버튼이 머물렀다는 사실만으로 큰 화제가 돼 하루 아침에 세계적인 관광 명소가 되었다. 둘은 이 영화를 감독한 존 휴스턴에게서 멕시코의 저택 까사 킴벌리(Casa Kimberly)를 사서 함께 거주한 적이 있다.
테일러는 버튼 사망 후에도 시아버지였던 필립 버튼을 자주 병문안 하고[75] 웨일스의 유족들을 챙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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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에게 유책이 있어서 헤어진 게 아니라 친구로 남았고, 워너의 자녀들은 특히 테일러와 가깝게 지냈다. 워너는 테일러가 여성의 평등한 권리에 대한 생각을 뿌리 내리게 해줬다고 말한 바 있다. 화술과 카리스마로 청중을 잘 휘어잡아 가는 곳마다 열렬한 호응을 얻었기 때문에 정치 다시 안 하냐는 질문을 꽤 받았는데, 정치판의 속성 자체에 큰 염증과 혐오를 느꼈음을 암시하며 손사래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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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너와 이혼 후 멕시코 변호사 빅토르 루나(Victor Luna)를 만나 1983년 약혼했다가 취소했고, 1984년 사업가 데니스 스타인(Dennis Stein)과 약혼했다가 역시 다음해 취소했다.

7.2. 가족

어렸을 때 자신을 때렸던 아버지를 용서해서 아버지까지 포함해 모든 가족들과 사이가 돈독했다. 매해 추수감사절 테일러의 자택 식탁에 모여앉는 친지들이 50명에 달했다.

7.3. 친구

테일러는 "한 번 우정을 쌓으면 끝까지 진정한 친구가 되어주는" 사람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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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터 스택폴(Peter Stackpole)이 1950년 <젊은이의 양지> 촬영 중에 쉬는 시간에 찍은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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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일러의 40세 생일파티에 참석한 그레이스 켈리의 머리를 만져주고 있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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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패션과 보석

8.1. 패션

엘리자베스 테일러는 패션계에서 손꼽히는 아이콘이었다. 이전 세대 스타들과 달리 힘을 주지 않고 모양만 가볍게 잡은 부드러운 펌을 했는데, 1950년대 내내 유행했다. 나이를 먹으면서는 스타일이 더 대담해져 70년대와 80년대엔 색이 짙은 눈화장과 미니스커트, 부분가발과 풍성한 주름 장식, 깃털목도리를 애용했다. 또 태닝, 풍만한 가슴을 강조하는 깊이 파인 목둘레선에 소장품인 화려한 보석들이 더해지면 극적 효과를 연출했는데 이에 따라 잡지 표지도 무수히 장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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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르 1963년 10월호 보그 1971년 4월호[87]

시그너처 룩 중 하나가 초록색 드레스다. 테일러, 자신의 남미 정체성을 숨겼던 리타 헤이워스 이렇게 두 사람을 주요 견본으로 삼고, 에바 가드너말년 자서전에서 영감을 얻은 베스트셀러 "The Seven Husbands of Evelyn Hugo"의 표지 일러스트가 초록색 드레스인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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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이너들과 친분이 많았다. 디자이너 발렌티노 가라바니와 절친한 사이였다. 1960년 발렌티노가 본인의 브랜드를 막 개시했던 신인 시절에 안면을 텄고, 여러 자선활동을 함께 했다.
디자이너 잔니 베르사체와도 절친이었다. 베르사체는 1992년 라인석을 꿰어 테일러의 대표작 속 배역들을 묘사한 "The Face"라는 볼레로 이브닝 재킷을 창작하기도 했다. 이 재킷은 테일러 사후 크리스티스 경매에서 예상가(15,000 - 20,000 달러)의 10배가 넘는 128,500 달러, 즉 2022년 가치로 2억원이 넘는 가격에 낙찰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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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이너 마이클 코어스의 우상이기도 하다. 1976년 인터뷰에서는 가장 좋아하는 디자이너로 홀스턴을 꼽았다. 디자인에 앞서 인간성이 좋고 친구이기 때문에. 테일러의 강력한 지원 덕에 홀스턴은 70년대를 대표하는 디자이너 중의 하나가 되었다.

저명한 패션 사진작가 브루스 웨버(Bruce Weber)와 90년대에 절친해져 웨버가 찍은 일상사진들이 많이 남았다.

할리우드 스타들이 본인 이미지와 아우라에 기반해 제작하는 향수 사업 류의 시초다.[88] 오래 가꾼 장미 정원에서 영감을 얻어 1987년 직접 기획해 내놓은 첫 개인 향수인 PASSION도 바로 남성용이 따로 나올 정도로 인기였지만, 1991년 엘리자베스 아덴과의 협업으로 낸 개인 향수 WHITE DIAMONDS는 그야말로 전세계에서 폭풍과 같은 반향을 일으켰고, 그 뒤로 너도나도 향수 사업에 뛰어들게 되었다. 총 12개의 향수와 코롱이 있다. 2010년에 낸 마지막 작은 팬들의 요청에 따라 작명한 VIOLET EYES다. 이 향수들은 2023년 현재도 엄청나게 팔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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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에는 제17회 미국 패션디자이너협회(CFDA)에서 Lifetime of Glamour Award를 받았다.

8.2. 보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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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어록

그건 오늘을 포기하고 어제로 뛰어드는 행위에요. 내겐 아직 끝나지 않은, 깜짝 놀랄만큼 수많은 내일들이 있어요.
말년에 왜 회고록을 쓰지 않냐고 묻자
나는 항상 남편과 아이들을 원했지만, 가정주부로서의 내 삶은 한번도 상상해본 적이 없다.
내 자리는 관객들이 봐주는 영화속이다.
나는 평생 화려한 보석에 둘러싸여 살아왔다. 하지만 내가 정말 필요로 했던 것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누군가의 진실한 마음과 사랑, 그것 뿐이었다.
너무나 사랑하기에 헤어진다.
리처드 버튼과 이혼하면서
성공은 탈취제 같다. 과거의 향기를 다 앗아가 버리니까.
나는 많은 남편과 보석을 얻으려고 의도한 것이 아니었다. 누구에게나 그렇듯 내게도 삶은 그저 발생했다.
당신이 스캔들에 휘말릴 때 진짜 친구가 누구인지 알 수 있다.
아름다움.
아카데미 시상식 후 피로연에서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말을 꼽으라고 했을 때의 대답

10.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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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생 때 그린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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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면-우면으로 이뤄진 두폭화로, 테일러는 좌면에 등장한다. 즉 양면을 합치면 테일러가 그림 중앙에 놓인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윗줄: 로런 버콜, 작가 본인, 그레고리 펙, 진 할로우, 마를레네 디트리히, 조운 콜린스, 자니 카슨
아랫줄: 험프리 보가트, 캐서린 헵번, 존 휴스턴, 테일러.
* <Celebrity Night at Spago>, 1993년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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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가 직접 겪은 아카데미 파티 경험들을 토대로 그렸다.
윗줄: 제러미 아이언스, 숀 코너리, 밥 호프, 빌리 크리스틀, 진 시스컬, 울프갱 퍽[100], 모건 프리먼, 조지 번즈, 마이클 잭슨
아랫줄: 스위프티 러자[101], 그레고리 펙, 매기 스미스, 잭 니컬슨, 폴 뉴먼, 우피 골드버그, 테일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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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매체에서




[1] 사진은 1948년 2월 21일자 라이프지에 실린 필립 할스만의 작품이다.[2] DBE를 받은 배우는 엘리자베스 테일러 외에 줄리 앤드루스, 헬런 미런, 매기 스미스, 주디 덴치, 크리스틴 스콧 토머스, 올리비어 더 해빌런드 등 열손가락 안에 든다. 다른 분야로는 추리소설 작가 애거서 크리스티가 DBE다. 다니엘 데이 루이스의 기사 준 2등급(Knight Bachelor)보다 높으며 KBE를 받은 찰리 채플린과 동등한 정식 2등급 기사 등급이다.[3] 활동 당시 신체 정보[4] 입양한 딸이다.[5] 본인은 어린 시절 오빠가 놀리던 별명("Lizzie the Cow, or Lizard")에서 유래된 이 애칭을 좋아하지 않았다. 발음이 hiss(히스. 야유하다, 쉭쉭대다 등의 뜻이 있다.)와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남편 타드가 사망할 때 타고 있던 전용기 이름이 하필 "The Lucky Liz"였다. 1992년 자니 카슨 에 출연했을 때도 이 애칭과 본명 중 무얼 더 선호하냐는 질문에 "엘리자베스"라고 답한 뒤 "엘리자베스라고 불리는 게 진심으로 더 좋다"고 다시 한 번 강조했다. 참고로 오빠와는 평생 우애가 좋았다.[6] 보유 기네스 기록이 엄청 많다.[7] 40년대 - 60년대.[8]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2회 이상 수상한 여배우는 10여 명에 불과하다. 대표적으로 잉그리드 버그먼, 올리비어 더 해빌런드, 비비언 리, 메릴 스트립, 조디 포스터 등이 있다.[9] 이중 한 회는 여우주연상이 아니라 연기특별상이다.[10] 이에 비견할 수 있는 경우는 마이클 잭슨 정도다. 주디 갈런드도 <오즈의 마법사>를 10대 후반인 청소년기에 찍었다.[11] 개봉년도순으로는 남녀 통틀어 말런 브랜도의 <바운티호의 반란>이 최초다. 두 영화는 상당한 공통점을 갖고 있다. 논란이 많은 실존 인물들이 주인공인 시대극이며, 크게 흥행했음에도(<바운티호의 반란>은 개봉년도 전체 흥행 5위, <클레오파트라>는 개봉년도 전체 흥행 1위.) 제작비를 너무 거하게 들여 회계상으론 거하게 말아먹었고, 아카데미와 골든 글로브의 작품상 후보에 동시에 올랐으며, 제작자와 감독이 징하게 싸운 악명 높은 촬영장이며, 그로 인해 한창 유망하던 명감독들이 은퇴를 결심하게 만들었다.[12] 1897 - 1968.[13] 1895 - 1994. 걸음마를 떼자마자 발레 훈련을 받은 무대 배우였다. 브로드웨이에서 활동했지만 결혼과 동시에 은퇴했다. 테일러가 출산한 뒤에는 바쁜 테일러를 대신해 아이들을 돌봐주곤 했다.[14] 당시에는 영국도 현재의 미국, 캐나다와 마찬가지로 국적 속지주의를 채택하여 부모의 국적과 관계없이 영국 영토 내에서 태어난 신생아에게는 자동으로 영국 국적을 부여하였다. 현재는 혈통주의로 개정되어 영국에서 태어났다고 자동으로 영국 국적이 부여되지는 않는다.[15] 1949년 하워드 휴즈는 이 화랑에 들린 테일러를 잠깐 보고 반해 테일러의 어머니에게 100만 달러(오늘날 원화 가치로 환산하면 100억이 넘는다)을 줄테니 테일러와 결혼할 수 있게 도와달라고 청하기도 했다. 결혼이 성사되면 테일러 한 사람을 위한 단독 스튜디오도 만들겠다는 계획도 밝혔다. 보석이 가득 담긴 서류가방을 보내기도 했다. 돈에 아무런 관심이 없던 테일러는 전혀 흥미를 느끼지 못했고, 전부 거절하고, 단 한 번도 만나주지 않았다.[16] 20대 초에 유행성 이하선염을 앓은 뒤 생식능력을 잃고 말았다.[17] 테일러가 화제거리가 되면 가족 전체가 사교사회의 주목을 받을 수 있지 않을까 정도의 생각이었다.[18] 이때 누가 실질적으로 스튜디오들과 테일러 가족 사이에 가교 역할을 했는지에 대한 설이 분분하다. 당대 최고의 연예 칼럼니스트 헤더 하퍼였다는 얘기도 있으나 하퍼와 테일러 가족은 전혀 친하지 읺았다.[19] 1999년 친구 바버라 월터스와의 인터뷰에서 밝힌 사실이다. 어려서 아버지에게 받은 학대는 마이클 잭슨과 가까워지게 한 공통분모이기도 하다.[20] 마약의 경우는 테일러의 작업 속도가 워낙 빨랐고 가는 체형이어서 작업 능률 향상과 체중 감량을 목적으로 하던 MGM의 소위 비타민 주사("vitamin shots")를 처방 받을 필요가 없기 때문이기도 했다.[21] 테일러는 세대적으로 보면 클래식 할리우드 말기를 장식한 비트 세대 할리우드 스타에 속한다. 하지만 동시대 배우들과 달리 셜리 템플처럼 일찍 데뷔해 클래식 할리우드 체계를 체험한 케이스.[22] Betty Ford Center. 전 영부인 베티 포드가 설립한 곳으로, 베티 포드도 사회 통념 때문에 알코올 의존증 문제를 방치하다가 뒤늦게 이를 대중과 공유한 바 있다.[23] 이로써 20세기 할리우드를 수놓은 고전배우들(비비언 리, 마릴린 먼로, 오드리 헵번, 그레이스 켈리) 대부분이 역사로만 남게 되었다. 현재는 소피아 로렌 정도 밖에 남지 않았다.[24] 절친 마이클 잭슨과 같은 묘지다.[25] 이전에 1위를 지속한 인물은 마이클 잭슨.[26] 당시 아역계의 교과서였던 셜리 템플을 기준으로 봤을 때.[27] 테일러는 성인이 된 후 아리아까지 소화해냈다.[28] 멀리서 리버스가 어머니 조운 리버스가 몇 년 동안 테일러를 조롱했던 일을 두둔하며 한 말이다. 이어지는 말은 다음과 같다. "모든 어린 소녀들은 자라서 테일러처럼 아름답고 화려해지길 바랐다 - 다이아몬드와 자기를 차지하려고 싸워대는 남자들 같은 걸. 어머니는 그런 환상 속 존재를 인간으로 되돌려놓으려고 한 것이다."[29] 테일러가 24살 때 죽었다.[30] 스포일러 사실 수전은 한 화가(피터 로퍼드 분)와 사랑에 빠져있었고, 어머니의 응원 하에 사랑의 도피를 한다.[31] 묵게 된 호텔의 로비와 방을 수십 개의 난초로 장식했다.[32] Larry Parks. 1914 - 1975.[33] Ethel Richardson. 필명 헨리 핸들 리처드슨(Henry Handel Richardson).[34] The Dorchester. 테일러-버튼은 이후 결별 전까지 이 호텔을 애용하며 엘리자베스 2세와 함께 대표 고객으로 꼽히게 되었다.[35] 사후엔 테일러를 두고 "우리 세대의 여신"이라고 정의 내렸다. 이버트는 테일러를 몇 번 가까이에서 본 적이 있다.[36] Lunt-Fontaine Theater.[37] "역사상 가장 위대한 여배우 중 하나"이며 테일러의 연기술이 "시대를 앞섰다는 걸 사람들이 언젠가 깨닫게 될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38] 이 공연이 끝나고 얼마 안 있어 사망했다.[39] 테일러를 비롯한 연예계 인사들이 에이즈 확산을 막기 위해 힘쓴 과정을 다룬 동명의 다큐멘터리가 개봉될 예정이다.[40] Aileen Getty. 진 폴 게티의 손녀다. 콘돔을 사용하지 않고 혼외정사를 한 게 원인이었다. 에이즈 환자가 된 건 1985년이고, 언론에 알린 건 농구선수 매직 존슨HIV 보균자라는 걸 고백한 후인 1991년이다. 처음엔 수혈 과정에서 걸렸다고 거짓말 했지만 곧 에이즈의 실체를 제대로 알려야 한다는 테일러의 뜻에 공감해 사실대로 고했다. 아들 크리스터퍼 와일딩과 게티는 이를 계기로 1987년에 이혼하며 8년 간의 결혼생활을 끝냈지만 테일러는 게티가 계속 자신을 "엄마"라고 부르게 해주었다. 게티 역시 에이즈 타파를 위해 힘쓰고 있는데, 입원했을 때 테일러가 행사에 대리 출석해준 적도 있다.[41] Foundation for AIDS Research. 미국 질병통제예방센터의 의사들을 모았다. 1983년 출범 때는 AIDS Medical Foundation(AMF)였는데, NARF와 합치면서 American Foundation for AIDS Research가 되어 이 이름을 2005년까지 유지하다가 American을 떼어버렸다.[42] 역시 에이즈로 친구들을 잃어 본인만의 에이즈 재단을 설립하고 관련 활동을 하면서 테일러와 가까워졌다. 테일러가 사망하자 콘서트에서 Don't Let the Sun Go Down On Me로 테일러를 기렸다.[43] 이 병은 1992년에 재발했다.[44] אֱלִישֶׁבַע רחל / Elisheba Rachel. 영어 이름 엘리자베스는 엘리셰바에서 유래한 것이다.[45] United Arab Republic. 짧게 존재했던 이집트, 시리아, 예멘 동맹. 1958년 이집트와 이 동맹을 맺었던 시리아는 1961년 내부에 쿠데타가 일어나면서 연대를 파기하게 됐다.[46] Jewish National Fund.[47] Amin Gemayel. 1942-.[48] "마릴린 먼로는 육감적인 배우(sex goddess)였고, 그레이스 켈리는 냉미녀(ice queen)였으며, 오드리 헵번이 영원한 말괄량이(eternal gamine)였다면, 엘리자베스 테일러는 미의 화신(beauty incarnate)이었다."[49] 관능미로 유명했지만, 의외로 체구가 굉장히 작았다. 실물을 처음 보고 너무 가냘퍼서 깜짝 놀랐다는 증언이 많다.[50] 나중에 한때 태닝에 열광해 검게 그을린 피부를 지니기도 한다.[51] 睫毛重生症, distichiasis. 테일러의 출생 시 의사는 이를 돌연변이(mutation)라고 기록했다. 기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눈 위쪽은 두 줄이었지만, 아래쪽은 한 줄이었다.[52] abc 뉴스 인터뷰 등에서 한 말이다. 평생 가까웠던 친구로, 나중에 <클레오파트라>(1963)에도 함께 출연했다.[53] 훗날 미국 렌즈 회사들은 최초로 보라색 컬러렌즈를 개발하면서 테일러의 눈을 집중적으로 연구했다.뉴욕타임즈 (더 자세한 관련 내용은 이 항목 참조.)[54] 이에 동의하지 않은 스타는 한때 같은 MGM 소속이었던 에바 가드너 정도다. 가드너는 미국 최대 출판사인 사이먼 앤 슈스터 수장 리처드 E. 스나이더에게 "테일러는 아름다운 게 아니에요. 예쁜 거지. 아름다운 건 나였죠"라고 했다. 그러나 이런 말도 하긴 했다. "테일러의 아름다움은 얼굴 코 입의 모양새나 그 굉장한 눈이 아니라 극소수에게만 주어지는 내면의 강인함과 활력에서 기인한다."[55] 캘리포니아 주법에 따라 교육연령이던 MGM 소속 스타들이 매일 일정시간 수업을 듣던 빨간 건물이다. 그 시절의 예고라고 할 수 있다.[56] 할리우드에 7-8번 결혼을 한 사람들은 테일러 외에도 상당수 존재한다. 테일러가 유독 이 화제로 유명한 건 본인 자체가 너무 유명하기 때문이다. 또한 이는 할리우드 내 최고 기록은 아닌데, 자자 가보라는 선배 배우가 9번에 달하는 기록을 보유하였기 때문이다. 다만 가보는 7번째 남편과 이혼하지 않은 채 재혼했기 때문에 8번째 결혼은 법적 효력이 없어 공식적으론 8번 결혼이다. 가보는 테일러의 첫 번째 남편 칸래드 니컬슨 "니키" 힐튼 주니어의 아버지 칸래드 힐튼 시니어와 1942년부터 1947년까지 결혼생활을 했는데, 1944년 당시 의붓아들이었던 니키 힐튼과 불륜을 저지른 적이 있다고 고백하기도 했다.[57] 심지어 이 원칙을 HIV/에이즈 운동과 유대교 관련 활동에도 적용했다.[58] Glenn Davis. 1924 - 2005. 포지션은 하프백. 별명은 "Mr. Outside." "Mr. Inside" 닥 블랜처드(Doc Blanchard)와 함께 묶여 유명세를 떨쳤고 웨스트포인트 미식축구팀 영구결번이 되었다. 테일러와는 군복무 중이던 1948년부터 교제를 시작했다. 그가 한국에서 복무하게 됐을 때 테일러는 그를 빼내려고 집안 연줄을 총동원했지만 실패했다. 수많은 위문편지로 장거리 연애를 했고 1949년 재회한 뒤 청혼을 거절하면서 헤어졌다. LA 램스에 스카웃되어 2시즌을 뛰었으나 부상으로 방출됐다.[59] William D. Pawley, Jr. 명문가 자녀로, 아버지는 브라질페루외교관을 역임했던 백만장자였다. 약혼까지 했었지만 취소했다.[60] 상대방이 입술 뽀뽀가 전부였다고 나중에 인터뷰했다.[61] Matinée idol. 젊은 여성팬층이 두터운 연기자.[62] 집안 사용인들의 증언에 따르면, 몇 주에 걸쳐 테일러를 바로 눈앞에 두고도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연기한 적도 있다고 한다. 때릴 때만 제외하고.[63] Confidential. 할리우드 황금기 시절 시대를 앞서는 최첨단 장비를 갖춘 사설탐정들을 고용해 물적 증거들을 토대로 스타들의 사생활을 폭로해 일대를 풍미했던 연예 잡지다.[64] 1948년 데뷔했고 페리 코모, 냇 킹 콜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 프랭크 시나트러가 피셔의 엄청난 인기에 자신의 시대가 끝났다고 생각해 자살 시도를 했을 정도다. 그러나 테일러와의 결혼을 부도덕하게 보는 업계와 세간의 평가에 이름을 내건 단독 TV쇼 <디 에디 피셔 쇼(The Eddie Fisher Show)>가 취소 당하면서 슬럼프에 빠진 뒤 재기하지 못했다. 할리우드 명예의 거리에 헌액됐다. 분야는 음악과 텔레비전. 할리우드에서도 손에 꼽힐 정도의 악명 높은 바람둥이였다.[65] 레널즈도 <태미와 독신자>(1957)에서 부른 노래가 빌보드 1위를 할 정도로 전성기였다.[66] 아버지 에디 피셔가 숱한 여성들과 바람피웠던 역사를 엮어 자서전으로 내자 DNA를 소독하고 싶다는 등 악감정을 내비쳤을 정도로 경멸감을 공공연하게 드러내곤 했다. 회고록에도 아버지가 테일러를 손에 넣기 위해 총동원한 수법들을 적나라하게 묘사했는데, 아버지의 성기까지 언급했다. 반대로 테일러에겐 수차례 존경심을 표했고 테일러를 위한 각종 행사에 모습을 드러냈다. 물론 과거 사건의 피해자로서 때로는 테일러를 디스하는 발언들도 했는데 아버지를 비난한 수위에는 비할 바가 못 된다.[67] Sydney Guilaroff. 할리우드 황금기를 대표하는 미용사로, 그외 주요 고객으로 프랭크 시나트러, 캐서린 헵번, 케리 그랜트 등이 있었다. 양성애자로 그레타 가르보와 염문설도 있다. 1938년엔 미국 독신 남성 최초로 입양을 허가 받기도 했다.[68] 런던행 여객선 퀸엘리자베스호에서 우연히 마주친 게 계기가 됐다.#[69] 그래서 레널즈와 그 자녀들이 버튼과의 살벌한 부부싸움에 대한 생생한 증언 역시 남기게 되었다.[70] 친구 로디 맥다월도 9살 때 테일러를 처음 보고 너무 완벽하게 완성돼있는 아름다운 얼굴에 폭소했다고 말한 바 있다.[71] “What do you think I’m doing? I’m f***ing your wife.”[72] "erotic vagrancy"란 표현이 유명하다.[73] 테일러가 할리우드 단골식당의 칠리를 로마까지 배달 시킨 얘기조차 아직도 회자되고 있다.[74] 버튼과 엮인 초기에 맥클레인이 두 사람 사이를 반대할까봐 울면서 한 말이었다. 맥클레인도 덩달아 울면서 알겠다고 했다고.[75] 다만 언론이 몰려오기 전에 자리를 떠야했기 때문에 매번 30분 이상 머물지 못했다.[76] 부고 기사 제목조차 "한때 엘리자베스 테일러와 결혼했던 전 상원의원 별세"였다.[77] 이 책이 베스트셀러로 등극한 이유는 테일러의 솔직하고 재기 넘치는 입담이다. 테일러는 데비 레널즈가 한참 자신과 사이가 안 좋던 시절에 자신이 가장 살쪘을 때의 사진을 냉장고 앞에 붙여놓고 반면교사로 삼으며 식욕을 다스렸던 일화를 풀어놓는다. 그러면서 레널즈에게 효과가 있었다면 여러분도 효과를 볼 수 있을 거라며 자신의 뚱뚱한 모습이 담긴 사진을 책에서 잘라 냉장고에 붙여보라고 권한다.[78] 기자가 직접 2주간 실천해본 더컷 체험담 기사가 있다.[79] 전미트럭운송노조(International Brotherhood of Teamsters)에서 보험으로 치료비를 지원해주었다.[80] Ardeshir Zahedi. 1928 - 2021.[81] 이건 비단 허드슨 뿐만이 아니라 먼저 촬영을 시작했던 모든 배우들 사이에서 조성된 공감대이기도 했다. 캐럴 베이커는 "딘이 자기들한테서 테일러를 뺏어갔다고 생각했다." 이때 딘은 테일러와 밤을 새워 대화하며 어려서 목사에게 성추행 당한 과거를 털어놓고 있었다.[82] 1993년 헵번이 사망한 후 장례식장에서 “하늘이 가장 아름다운 새 천사를 갖게 됐다”고 조문하였다.[83] 캐리 피셔는 "엄마는 테일러 '팬'이라 테일러를 미워하지도 못했다"며 차라리 자신이 테일러를 더 미워했다고 말했다.[84] 테일러는 잭슨의 스케줄을 전부 파악하고 있었다. 잭슨이 알려준 게 아니라 업계 연줄 덕이었다.[85] 대부는 맥컬리 컬킨.[86] Carole Bayer Sager. 작곡가로 더 유명하며 그래미 어워드, 아카데미상, 골든 글로브 등을 수상했다.[87] 사진작가는 앤서니 암스트롱존스(Antony Armstrong-Jones). 마거릿 로즈의 전 남편.[88] 사실 이를 시도한 최초의 스타는 소피아 로렌이지만 제품이 인기가 없어 묻히는 바람에 두 번째인 테일러가 실질적 원조로 여겨진다.[89] 이즈음 테일러, 로렌, 케네디는 모두가 동경하면서도 질시하는 여성들의 세 표본으로 같이 호명되곤 했다.[90] 버튼이 로렌과 영화를 찍으며 친구가 되고 서로를 배우로서 존경하게 되기 전의 일기다.[91] '나의 사랑하는 마할에게'라는 글귀가 새겨져있다.[92] 버튼이 발렌타인 데이 선물로 줬는데, 테일러는 이 목걸이를 라스베이거스 호텔방에서 잃고 몹시 놀란 적이 있다. 목에 걸치고 있다가 한순간 사라졌는데 키우던 개가 뼈를 물어뜯는 소리를 내서 개의 입안을 살펴보니 진주에 기적적으로 흠집이 안 나있었다.[93] 불가리의 장부 기록에 따르면. 다만 본인이 산 것인지 버튼이 사준 것인지의 여부는 불분명하다. 불가리도 자사의 역사를 정리하면서 이를 밝혀내려고 노력했는데 실패했다.[94] statement jewelry. 착용함으로써 삶에 대한 태도나 가치관을 표현하는 용도의 보석.[95] 버튼에 따르면, 이혼 사유엔 반려동물들 때문에 충돌한 비중이 크다고 한다. 버튼은 테일러만큼이나 반려동물들을 아꼈지만 그와 동시에 감당할 수가 없었다.[96] 요즘 연예인들도 은행일이라든지 여행 갈 때 예약을 안해본 사람이 적지 않다 하니, 아역 때부터 활동한 테일러가 그랬던 것은 놀랄 일은 아니다.[97] 같은 시기 본인 이름을 딴 메뉴를 가졌던 또다른 MGM 배우로는 뮤지컬 스타 시드 셔리스가 있다.[98] 나머지는 재클린 케네디 오나시스, 마릴린 먼로.[99] 베벌리힐스 호텔 내의 식사 공간으로, 무수한 영화의 배경으로 나왔다.[100] Wolfgang Puck. 소위 스타 셰프다. 1995년부터 아카데미 공식 파티 요리 메뉴를 담당했다.[101] Irving Paul "Swifty" Lazar. 파티 주최자. 무수한 할리우드 황금기 배우들의 에이전트였다.[102] Al Hirschfeld. 1903 - 2003.[103] 미국에서 널리 쓰인 테일러의 별칭.[104] Sherilyn Fenn. 트윈픽스로 유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