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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오르그 솔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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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기사 서임자 (남성)
British Knigh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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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스
스콧 셰링턴

(1922)
에드워드
빅터 애플턴

(1946)
리들리
스콧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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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더릭 벤팅
(1934)
에드먼드 힐러리
(1953)
게오르그 솔티
(19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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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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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비드 린
(1953)
마이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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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9)
알렉 기네스
(1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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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 이시고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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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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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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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
마이클 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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샘 멘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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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저 디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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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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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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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디 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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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즈오 이시구로
(2018)
마이클 모퍼고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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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매카트니
(1997)
제프 허스트
(1998)
나이젤 쇼트
(1999)
니콜라스 윈턴
(2003)
닉 팔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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링고 스타
(2018)
케니 달글리시
(2018)
루이스 해밀턴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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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오르그 솔티의 주요 수상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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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라모폰 명예의 전당 헌액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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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blebgcolor=#FFF,#1f2023>파일:D8FE539D-CCB2-44DA-9D5B-B6EEC0E8759F.png그라모폰 명예의 전당은 예술적 탁월함, 혁신, 혹은 상상력을 통해 클래식 음악 녹음에 기여한 예술가들을 기리기 위해 만들었다.
★는 첫 발표(2012년)때 헌액된 인물들이다.
☆는 두번째 발표(2013년)때 헌액된 인물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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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네디 센터 공로상 수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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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수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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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000> 1978년 <colbgcolor=#fff,#1f2023>매리언 앤더슨, 프레드 아스테어, 조지 발란신, 아르투르 루빈스타인, 리처드 로저스
1979년 에런 코플런드, 엘라 피츠제럴드, 헨리 폰다, 마사 그레이엄, 테네시 윌리엄스
1980년 레너드 번스타인, 제임스 캐그니, 애그니스 데밀, 린 폰탠, 리언타인 프라이스
1981년 카운트 베이시, 케리 그랜트, 제롬 로빈스, 헬렌 헤이스, 루돌프 세르킨
1982년 조지 애벗, 릴리안 기시, 베니 굿맨, 진 켈리, 유진 오르만디
1983년 캐서린 던햄, 엘리아 카잔, 프랭크 시나트라, 제임스 스튜어트, 버질 톰슨
1984년 레나 혼, 대니 케이, 잔카를로 메노티, 아서 밀러, 아이작 스턴
1985년 머스 커닝햄, 밥 호프, 아이린 던, 앨런 제이 러너, 프레더릭 로, 베벌리 실즈
1986년 루실 볼, 레이 찰스, 제시카 텐디, 험 크로닌, 예후디 메뉴힌, 앤서니 튜더
1987년 페리 코모, 새미 데이비스 주니어, 베티 데이비스, 네이선 밀스타인, 알윈 니콜라이
1988년 앨빈 에일리, 조지 번즈, 마이어나 로이, 알렉산더 슈나이더, 로저 L. 스티븐스
1989년 해리 벨라폰테, 클로데트 콜베르, 알렉산드라 다닐로바, 메리 마틴, 윌리엄 슈만
1990년 디지 길레스피, 캐서린 헵번, 라이즈 스티븐스, 줄리 스턴, 빌리 와일더
1991년 베티 콤덴, 로이 에이커프, 아돌프 그린, 헤럴드 니콜라스, 로버트 쇼, 그레고리 펙
1992년 라이어널 햄프턴, 폴 뉴먼, 조앤 우드워드, 진저 로저스, 므스티슬라프 로스트로포비치, 폴 타일러
1993년 자니 카슨, 아서 미첼, 게오르그 솔티, 스티븐 손드하임, 매리언 윌리엄스
1994년 커크 더글러스, 아레사 프랭클린, 모튼 굴드, 해럴드 프린스, 피트 시거
1995년 자크 당부아즈, 메릴린 혼, 비비 킹, 시드니 푸아티에, 닐 사이먼
1996년 에드워드 올비, 베니 카터, 조니 캐쉬, 잭 레먼, 마리아 톨치프
1997년 로렌 바콜, 밥 딜런, 찰턴 헤스턴, 제시 노먼, 에드워드 빌렐라
1998년 빌 코스비, 프레드 엡, 존 칸더, 윌리 넬슨, 앙드레 프레빈, 셜리 템플
1999년 빅터 보르게, 숀 코너리, 주디스 재스민, 제이슨 로바즈, 스티비 원더
2000년 미하일 바리시니코프, 척 베리, 플라시도 도밍고, 클린트 이스트우드, 안젤라 랜스버리
}}}}}}}}} ||
21세기 수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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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000>2001년<colbgcolor=#fff,#1f2023>줄리 앤드류스, 밴 클라이번, 퀸시 존스, 잭 니콜슨, 루치아노 파바로티
2002년 제임스 얼 존스, 제임스 리바인, 치타 리베라, 폴 사이먼, 엘리자베스 테일러
2003년 제임스 브라운, 캐롤 버넷, 마이크 니콜스, 로레타 린, 이작 펄만
2004년 워렌 비티, 오시 데이비스 & 루비 리, 엘튼 존, 조앤 서덜랜드, 존 윌리엄스
2005년 토니 베넷, 수잔 파렐, 줄리 해리스, 로버트 레드포드, 티나 터너
2006년 주빈 메타, 돌리 파튼, 스모키 로빈슨, 스티븐 스필버그, 앤드루 로이드 웨버
2007년 레온 플라이셔, 스티브 마틴, 다이애나 로스, 마틴 스코세이지, 브라이언 윌슨
2008년 모건 프리먼, 조지 존스, 바브라 스트라이샌드, 트와일라 사프, 더 후
2009년 멜 브룩스, 데이브 브루벡, 그레이스 범브리, 로버트 드 니로, 브루스 스프링스틴
2010년 멀 해거드, 제리 허먼, 빌 존스, 폴 매카트니, 오프라 윈프리
2011년 바바라 쿡, 닐 다이아몬드, 요요마, 소니 롤린스, 메릴 스트립
2012년 버디 가이, 더스틴 호프먼, 레드 제플린, 나탈리아 마라코바
2013년 마티나 아로요, 허비 행콕, 빌리 조엘, 셜리 맥클레인, 카를로스 산타나
2014년 알 그린, 톰 행크스, 퍼트리샤 맥브라이드, 스팅, 릴리 톰린
2015년 캐롤 킹, 조지 루카스, 리타 모레노, 오자와 세이지, 시실리 타이슨
2016년 마르타 아르헤리치, 이글스, 알 파치노, 마비스 스태플스, 제임스 테일러
2017년 카르멘 드 라발라데, 노먼 리어, 글로리아 에스테판, LL 쿨 J, 라이오넬 리치
2018년 셰어, 필립 글래스, 레바 매킨타이어, 웨인 쇼터, 해밀턴 팀 (린 마누엘 미란다, 토마스 카일, 알렉스 라카뫄르, 앤디 블렝큰불러)
2019년 어스, 윈드 앤 파이어, 세서미 스트리트, 샐리 필드, 린다 론스태드, 마이클 틸슨 토머스
2020년 데비 엘렌, 조안 바에즈, 가스 브룩스, 미도리, 딕 반 다이크
2021년 저스티노 디아즈, 베리 골디, 론 마이클스, 베트 미들러, 조니 미첼
2022년 조지 클루니, 에이미 그랜트, 글래디스 나이트, 타니아 레온, U2 (보노, 디 에지, 애덤 클레이튼, 래리 뮬렌 주니어)
2023년 퀸 라티파, 르네 플레밍, 빌리 크리스탈, 디안 워윅, 배리 깁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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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미 어워드#s-3.3.1|그래미 어워드 공로상 수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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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6px -1px -15px"
<colbgcolor=#fff,#353535>1967년게오르그 솔티, 존 컬쇼
1968년듀크 엘링턴, 빌리 스트레이혼, 크시슈토프 펜데레츠키
1970년로버트 무그
1971년크리스 알버트슨, 존 하몬드, 레리 힐러, 폴 웨스턴
1972년비틀즈
1977년토머스 에디슨, 레오폴드 스토코프스키
1979년고다드 리버슨, 프랭크 시나트라
1981년카운트 베이시, 에런 코플런드
1983년레스 폴
1984년버르토크 벨러
1985년엘드릿지 R. 존슨
1986년조지 거슈윈, 아이라 거슈윈
1987년해럴드 알렌, 에밀 벌리너, 제롬 컨, 조니 머서
1989년월트 디즈니, 퀸시 존스, 콜 포터
1990년딕 클라크
1991년밀트 가블러, 베리 골디, 샘 필립스
1992년토마스 A. 도시, 크리스틴 파논, 오스카 해머스타인 2세, 로렌즈 하트
1993년아흐메트 에르테군, 네스시 에르테군, W. C. 핸디, 조지 T. 사이먼
1994년노먼 그란츠
1995년피에르 코세트
1996년조지 마틴, 제리 웩슬러
1997년허브 앨퍼트, 제리 모스, 버트 배커랙, 핼 데이비드, 알란 제이 러너, 프레드릭 뢰베, 제리 리버와 마이크 스톨러
1998년홀렌드-호지어-홀렌드, 프란시스 W. 프레스톤, 리처드 로저스
1999년갬블 & 허프
2000년클라이브 데이비스, 필 스펙터
2001년아리프 말딘, 필 라몬
2002년톰 다우드, 앨런 프리드
2003년알란 로막스, 뉴욕 필하모닉
2004년게리 고핀 & 캐롤 킹, 오린 키프뉴스, 마리안 멕파랜드
2005년호기 카마이클, 돈 코넬리우스, 알프레드 라이언, 빌리 테일러
2006년크리스 블랙웰, 오웬 브래들리, 알 슈미트
2007년에스텔 액스턴, 코시마 마타사, 스티븐 손드하임
2008년클라렌스 애반트, 잭 홀츠만, 윌리 미첼
2009년조지 아바키안, 엘리엇 카터, 알렌 투생
2010년해롤드 브래들리, 플로렌스 그린버그, 월터 C. 밀러
2011년알 벨, 윌마 코자트 파인, 브루스 룬드벌
2012년데이브 바솔로뮤, 스티브 잡스, 루디 반 겔더
2013년알란 버그만 & 마릴린 버그만, 레오나드 체스 & 필 체스, 알란 W. 리빙스턴
2014년엔니오 모리코네, 릭 홀, 짐 마샬
2015년베리 만 & 신시아 웨일, 리차드 페리, 조지 웨인
2016년존 케이지, 프레드 포스터, 크리스 스트레비치
2017년톰 벨, 모 오스틴, 랄프 피어
2018년빌 그레이엄, 세이무어 스테인, 존 윌리엄스
2019년루 애들러, 애쉬포드 & 심슨, 조니 멘델
2020년프랭크 버클리 워커, 켄 에를리히, 필립 글래스
2021년에드 처니, 베니 골슨, 베이비페이스
2023년헨리 딜츠, 엘리스 마살리스, 짐 스튜어트
같이 보기: 평생 공로상 수상자 · 레전드상 수상자}}}}}}}}}

파일:Grammy.svg
'''[[그래미 어워드#s-5.3.2|그래미 어워드 평생 공로상 수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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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px -15px"
<colbgcolor=#fff,#353535>1963년빙 크로스비
1965년프랭크 시나트라
1966년듀크 엘링턴
1967년엘라 피츠제럴드
1968년어빙 벌린
1971년엘비스 프레슬리
1972년루이 암스트롱, 마할리아 잭슨
1984년척 베리, 찰리 파커
1985년레너드 번스타인
1986년베니 굿맨, 롤링 스톤스, 안드레스 세고비아
1987년로이 에이커프, 베니 카터, 엔리코 카루소, 레이 찰스, 패츠 도미노, 우디 허먼, 빌리 홀리데이, 비비 킹, 아이작 스턴, 이고르 스트라빈스키, 아르투로 토스카니니, 행크 윌리엄스
1989년프레드 아스테어, 파블로 카잘스, 디지 길레스피, 야샤 하이페츠, 리나 혼, 레온타인 프라이스, 베시 스미스, 아트 테이텀, 사라 본
1990년냇 킹 콜, 마일스 데이비스, 블라디미르 호로비츠, 폴 매카트니
1991년매리언 앤더슨, 밥 딜런, 존 레논, 줄리 스턴, 키티 웰스
1992년제임스 브라운, 존 콜트레인, 지미 헨드릭스, 머디 워터스
1993년쳇 앳킨스, 리틀 리처드, 델로니어스 몽크, 빌 먼로, 피트 시거, 패츠 월러
1994년빌 에반스, 아레사 프랭클린, 아르투르 루빈스타인
1995년팻시 클라인, 페기 리, 헨리 맨시니, 커티스 메이필드, 바브라 스트라이샌드
1996년데이브 브루벡, 마빈 게이, 게오르그 솔티, 스티비 원더
1997년바비 블랜드, 에벌리 브라더스, 주디 갈란드, 스테판 그라펠리, 버디 홀리, 찰스 밍거스, 오스카 피터슨, 프랭크 자파
1998년보 디들리, 밀스 브라더스, 로이 오비슨, 폴 로브슨
1999년조니 캐쉬, 샘 쿡, 오티스 레딩, 스모키 로빈슨, 멜 토메
2000년해리 벨라폰테, 우디 거스리, 존 리 후커, 미치 밀러, 윌리 넬슨
2001년비치 보이스, 토니 베넷, 새미 데이비스 주니어, 밥 말리, 더 후
2002년카운트 베이시, 로즈메리 클루니, 페리 코모, 알 그린, 조니 미첼
2003년에타 제임스, 조니 마티스, 글렌 밀러, 티토 푸엔테, 사이먼 앤 가펑클
2004년밴 클라이번, 펑크 브라더스, 엘라 젠킨스, 소니 롤린스, 아티 쇼, 독 왓슨
2005년에디 아놀드, 아트 블래키, 카터 패밀리, 모턴 굴드, 재니스 조플린, 레드 제플린, 제리 리 루이스, 젤리 롤 모턴, 파인톱 퍼킨스, 스태플 싱어즈
2006년데이비드 보위, 크림, 멀 해거드, 로버트 존슨, 제시 노먼, 리처드 프라이어, 더 위버스
2007년조안 바에즈, 부커 티 앤 더 엠지스, 마리아 칼라스, 오넷 콜먼, 도어즈, 그레이트풀 데드, 밥 윌스
2008년버트 배커랙, 더 밴드, 캡 캘러웨이, 도리스 데이, 이작 펄만, 맥스 로치, 얼 스크럭스
2009년진 오트리, 더 블라인드 보이즈 오브 알라바마, 포 탑스, 행크 존스, 브렌다 리, 딘 마틴, 톰 팩스톤
2010년레너드 코헨, 바비 다린, 데이비드 "허니보이" 에드워즈, 마이클 잭슨, 로레타 린, 앙드레 프레빈, 클락 테리
2011년줄리 앤드류스, 로이 헤인즈, 줄리아드 현악 콰르텟, 킹스턴 트리오, 돌리 파튼, 라몬즈, 조지 비벌리 시어
2012년올맨 브라더스 밴드, 글렌 캠벨, 안토니우 카를루스 조빙, 조지 존스, 더 멤피스 혼즈, 다이애나 로스, 길 스콧 헤론
2013년글렌 굴드, 찰리 헤이든, 라이트닝 홉킨스, 캐롤 킹, 패티 페이지, 템테이션스
2014년비틀즈, 클리프턴 체니어, 아이즐리 브라더스, 크라프트베르크, 크리스 크리스토퍼슨, 아르만도 만사네로, 마우드 파웰
2015년비 지스, 피에르 불레즈, 버디 가이, 조지 해리슨, 플라코 지메네즈, 루빈 브라더스, 웨인 쇼터
2016년루스 브라운, 셀리아 크루즈, 어스 윈드 앤 파이어, 허비 행콕, 제퍼슨 에어플레인, 린다 론스태드, Run-D.M.C.
2017년셜리 시저, 아마드 자말, 찰리 프라이드, 지미 로저스, 니나 시몬, 슬라이 스톤, 벨벳 언더그라운드
2018년할 블레인, 닐 다이아몬드, 에밀루 해리스, 루이스 조던, 더 미터스, , 티나 터너
2019년블랙 사바스, 조지 클린턴 / 팔리아멘트-펑카델릭, 빌리 엑스타인, 도니 해서웨이, 훌리오 이글레시아스, 샘 & 데이브, 디안 워윅
2020년시카고, 로버타 플랙, 아이작 헤이즈, 이기 팝, 존 프라인, 퍼블릭 에너미, 시스터 로제타 사프
2021년그랜드마스터 플래시 앤 더 퓨리어스 파이브, 라이오넬 햄프턴, 마릴린 혼, 솔트 앤 페파, 셀레나, 토킹 헤즈
2022년보니 레잇
2023년바비 맥퍼린, 너바나, 마 레이니, 슬릭 릭, 나일 로저스, 슈프림즈, 하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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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E
게오르그 솔티 경
Sir Georg Solti
파일:external/i.telegraph.co.uk/georg_solti_2394328b.jpg
<colbgcolor=#00001b><colcolor=#fff> 본명 <colbgcolor=#ffffff,#2d2f34>슈테른 죄르지(Stern György)
국적 헝가리 파일:헝가리 국기.svg | 독일 파일:독일 국기.svg영국 파일:영국 국기.svg
출생 1912년 10월 21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부다페스트
사망 1997년 9월 5일 (향년 84세)
프랑스 앙티브[1]
작위 기사[2]
직업 지휘자
학력 부다페스트 프란츠 리스트 국립 음악 아카데미
1. 개요2. 생애3. 데카와의 파트너쉽4. 이름의 표기와 발음5. 기타

[Clearfix]

1. 개요

파일:external/www.bach-cantatas.com/Solti-Georg-32.jpg
Sir Georg Solti, KBE.[3] 1912년 10월 21일~1997년 9월 5일

헝가리 출신의 명지휘자.[4]

바이에른 국립 가극장, 프랑크푸르트 오페라, 로열 코벤트가든 오페라, 시카고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상임지휘자를 역임했다. 1953년에 독일(서독) 시민권을, 1972년에 영국 시민권을 취득했다. 헝가리 본명은 슈테른 죄르지(Stern György)이다.[5]

영국 시민권을 취득한 후에도 퍼스트 네임은 George가 아닌 독일식 Georg를 계속 이름으로 사용했다. 실제 미국이나 영국에서는 죠지 숄티라고 발음하는 경우도 있고, 게오르그 솔티에 가깝게 발음해주는 경우도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대부분 게오르그 솔티라고 표기하고 있다. 자세한 내용은 아래의 발음 문단을 참고한다.

그래미 어워드 역대 최다 수상자로 유명하기도 한데, 총 31회의 수상 기록을 가지고 있다. 그 때문에 다른 장르의 뮤지션 팬들이 검색하다가 곧잘 접하게 되는 인물이기도 하다. 비욘세라든지 칸예 웨스트라든지

2. 생애

주페, 경기병 서곡 (rec. 1959)버르토크, 현악기, 타악기 그리고 첼레스타를 위한 음악 (rec. 1963)

헝가리의 부다페스트에서 독실한 유대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양친 모두 유대인이었다. 어린 시절은 유복했던 듯 하나 그의 아버지는 제1차 세계대전 때 애국심에서 전쟁국채에 투자했지만 전쟁에서 패하면서 국채의 가치는 떨어졌고 그의 아버지는 가난해졌다. 그는 피아노에 재능이 있었는데, 부유한 삼촌들 덕분에 그는 음악 공부를 할 수 있었다. 부다페스트 에르노 포도르 음악원을 거쳐 프란츠 리스트 아카데미에 편입하였다. 버르토크(Béla Bartók), 베이네르(Weiner Leó), 도흐나니(Ernő Dohnányi) 등에게 사사했다. 10대 시절 지휘에 매력을 느껴 지휘자의 꿈을 품게 되었다. 10대 중반에는 피아노 레슨으로 스스로 학비를 보탤 수 있게 되었다. 그는 피아노에 뛰어난 재능을 가졌지만, 연습을 게을리하는 학생이었고, 열심히 연습하라는 주변의 요구에 대해 왜 열심히 해야 하냐고 반문하였다. 그는 아카데미에서 지휘 수업을 들었지만 선생님의 자질에 불만을 품었고 수업에 만족하지 못했다.

1930년 아카데미를 졸업하였고, 1930년대에 헝가리 국립가극장(Hungarian State Opera)에서 조수(répétiteur)로 일했다. 1932년 요제프 크립스가 있던 독일 카를루스에 극장로 이적했고 이무렵 성을 슈테른에서 솔티로 개명했다. 하지만 1933년 나치가 집권하자 헝가리로 돌아왔다. 1937년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에서 아르투로 토스카니니의 조수로 일할 기회가 주어졌다. 당시 잘츠부르크에 독감이 유행하던 바람에 조수(répétiteur) 2명이 연이어 일을 못하게 되었고, 대타로 급하게 투입되었다. 토스카니니의 조수 경력 덕분에 그의 몸값은 올랐고 몇개월 후에 헝가리에서 지휘자로 데뷔했다. 하지만 곧 제2차 세계 대전이 터졌다. 유대인이었기 때문에 그는 독일은 물론이고 헝가리에서 활동에 어려움을 겪었다. 헝가리 역시 반대유인법이 제정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쟁 중 폭격으로 쑥대밭이 되어가고 있던 런던에 지휘자난이 생기자 기회를 얻어 로열 오페라 하우스에서 러시아 발레를 지휘하며 잠시 일하기도 했지만, 평론가들로부터 실랄한 혹평을 받았다. 당시 타임지는 "그의 지휘는 너무 폭력적이다. 오케스트라를 채찍질하고 음악을 학대하여 섬세하고 아름다운 분위기를 위험에 빠뜨렸다."고 평했다. 이후 런던에서 더이상 지휘할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

런던에서 일자리가 끊긴 후 토스카니니에게 미국에서 취업할 수 있도록 부탁할 목적으로 스위스 루체른으로 떠났다. 하지만 실패하였고, 막스 히르겔이라는 테너가 바그너 트리스탄을 연습하는 조수로 채용되어 생계를 이어갈 수 있었다. 이후 스위스에서 피아니스트로 돈벌이를 했다.

하지만 종전 후에는 완전히 팔자가 뒤바뀌었는데 독일의 거장지휘자들이 대거 연주 금지된 덕분에 지휘 경력이 손가락에 꼽을 정도로 일천했음에도 불구하고 1946년 일거에 유서깊은 바이에른 국립가극장의 음악 감독이 되었다. 하지만 얼마 후 연주금지가 풀린 전임자 한스 크나퍼츠부슈가 시민들의 열렬한 환호를 받으며 귀환했고, 솔티의 인기는 떨어졌다.

한편 1946년 그는 '반주 피아니스트'로 DECCA사와 계약을 맺고 음반을 녹음하기 시작했다.[6] 하지만 그는 데카사에 지휘를 하고 싶다고 고집을 부렸고 결국 지휘로 베토벤 에그몬트 서곡을 녹음할 기회가 주어졌으나 반응은 좋지 못했다. 솔티 본인도 훗날 매우 서투른 연주였다고 평했다. 그러고 한동안 지휘자로서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지만 2년 후 아마도 헝가리인이라는 이유로 헝가리와 밀접한 연관이 있는 하이든 교향곡 103번 녹음 세션에 다시 투입되었는데, 당시 녹음 세션을 맡게 된 신예 프로듀서 존 컬쇼는 솔티의 지휘를 대단히 좋게 평가했다. 당시 DECCA가 독일 관현악 레퍼토리를 위해 섭외했던 빌헬름 푸르트벵글러, 한스 크나퍼츠부슈, 에리히 클라이버,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등의 지휘자들은 매우 권위적이었던 반면에 지휘자로서 이제 막 경력을 쌓아가기 시작하던 솔티는 프로듀서에게 매우 고분고분한 지휘자였다. 컬쇼의 자서전에 따르면 컬쇼는 프로듀서가 지휘자를 장악하고 컨트롤해야 한다고 믿었던 인물이며, 실제로도 녹음 스튜디오에서 여러 거장 지휘자들을 길들이기 위해 심리전을 펼쳤던 인물이었다.

1952년 결국 뮌헨 국립가극장을 떠나 프랑크푸르트 시립 가극장(Frankfurt City Opera)으로 옮겨갔다. 여기서 숄티는 9시즌 동안 지휘했다. 한편 조국 헝가리가 공산화되자 솔티는 앞으로 평생 헝가리 땅으로 돌아갈 수 없을 것으로 생각하고 1953년에 서독 시민권을 취득했다.

1950년대 후반 DECCA에서는 고참 프로듀서들이 은퇴하면서 존 컬쇼가 메인 프로듀서의 자리에 올랐고, 컬쇼가 강력하게 선호했던 솔티가 큰 기회를 부여받기 시작했다. 50년대말부터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등과 여러 녹음을 남기기 시작했고, 그의 명성을 세계적으로 알리기 시작했다. 특히 1958년부터 1965년까지 이어진 리하르트 바그너니벨룽의 반지 전곡 녹음은 음반계에 큰 이정표를 세웠고 게오르그 솔티의 명성을 확고히 하는 계기가 되었다.

1961년부터 1971년까지 영국의 로열 코벤트 가든 오페라(Royal Opera House, Covent Garden)의 음악감독으로 재직했다. 재직기간 동안 코벤트 가든 오페라의 명성을 세계적인 수준으로 높인 공로를 인정받아 1972년 엘리자베스 2세 여왕으로부터 기사작위를 받았다. 솔티는 작위를 받기 몇 개월 전에 영국 시민권을 취득했다. 솔티는 시카고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상임지휘자 자리에 20년 넘게 있었지만 그는 시카고로 이사하지 않고 런던에 자택이 있었으며 시카고에서는 호텔에만 머물렀다.[7] 1971년에 코벤트 가든 오페라 음악감독직에서 물러났지만 이후에도 극장측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면서 정기적으로 지휘했다.

1969년에는 시카고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상임지휘자로 임명되어 22년간 장기재직했다. 시카고 심포니 상임지휘자 시절은 솔티에게나 시카고 심포니에게나 리즈 시절이라 할 수 있는데, 솔티는 나중에 상임지휘자에서 스스로 물러날 즈음에 이르러 시카고 심포니는 내 자식과도 같은 존재라고 말할 정도로 깊은 애정을 표했다. 다만 시카고 심포니 재임 초기에는 코벤트가든 등 기존에 예약되어 있던 스케줄 때문에 솔티가 시카고에 많은 시간을 할애할 수 없었는데 이 때문에 수석객원지휘자직을 신설하여 카를로 마리아 줄리니를 영입하였다. 솔티는 일부러 자신과 다른 스타일의 지휘자인 줄리니를 선택하여 오랜 설득 끝에 그를 수석객원지휘자로 영입하는데 성공했는데, 줄리니는 솔티와는 대조적인 스타일의 지휘자였기 때문에 이 영입은 시카고 심포니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평가된다. 솔티는 줄리니의 후임으로도 자신과 대조적인 성향의 지휘자인 클라우디오 아바도를 수석객원지휘자로 영입했다.

솔티는 시카고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방대한 양의 음반녹음을 남겼다. 솔티는 시카고에서 재임기간 동안 파리 오케스트라런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상임지휘자직을 맡기도 했지만 교향악, 관현악 음반 녹음은 거의 전부 시카고 심포니와 함께 이루어졌다. 베토벤 교향곡 전집을 2회 녹음했고, 이외에도 주요 레퍼토리를 시카고 심포니와 전집 단위로 녹음했다. 경쟁 음반사에 비해 상대적으로 교향악 지휘자 라인업이 빈약했던 데카사에서 솔티는 70년대 이후 데카의 간판인 관현악 지휘자가 되어 정통 레퍼토리들을 전곡단위로 녹음했다.

오페라는 오페라에 익숙한 코벤트가든이나 빈 필 등 오페라 전문 오케스트라와 녹음했지만 1976년 바그너의 방황하는 네덜란드인 녹음에 시카고 심포니를 처음 기용한 후 바그너베토벤 피델리오, 베르디 오텔로 등 관현악의 비중이 큰 오페라 녹음에서 시카고 심포니를 기용했다. 1991년 숄티는 자신이 지나치게 오래 집권하는 것이 오케스트라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며 스스로 상임지휘자직을 다니엘 바렌보임에게 넘기고 물러났다.

1972년에는 카라얀의 뒤를 이어 파리 오케스트라의 상임지휘자가 되었으나 악단 경영진측과 갈등 끝에 1975년에 사임했다. 나중에 파리 바스티유 오페라의 음악감독을 맡았던 바렌보임과 정명훈이 잇달아 곤욕을 치르고 물러났을 때 솔티는 "파리는 원래 그런 곳"이라며 바렌보임과 정명훈을 두둔하기도 했다. 특히 솔티의 후임으로 파리 오케스트라에 취임하여 장기간 재임했던 바렌보임의 융화력을 높이 사서 나중에 시카고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후임에 앉히기도 했다.

1979년부터 1983년까지 런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상임지휘자 겸 예술감독을 맡았다. 런던 필 재임기간 동안에는 에드워드 엘가의 작품을 레퍼토리에 추가하였다.

1983년에는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에 초빙되어 니벨룽의 반지 4부작을 지휘하여 큰 화제를 모았다. 1976년 야심차게 준비했던 100주년 반지 프로덕션에 대한 논란에 휩싸이자[8] 차기 프로덕션의 지휘자로 솔티를 섭외했다. 솔티는 바이로이트측에 여러가지 까다로운 요구를 했는데, 특히 연출 측면에서 과감하게 솔티의 요구를 수용하여 자연주의 연출로 제작하기까지 했다.

또 솔티는 오케스트라의 호른 파트를 시카고 심포니 단원들로 대체하려다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의 호른수석인 베를린 필의 게르트 자이페르트 등이 반발하여 역풍을 맞기도 했다. 또 타이틀 롤인 지크프리트역의 라이너 골트베르크(Reiner Goldberg) 등과도 갈등을 일으켰는데, 결국 골트베르크가 건강상의 이유로 하차하고 급히 만트레트 융(Manfred Jung)으로 교체되기도 했다. 이처럼 준비과정부터 순탄치 않았던 1983년 링은 프리미어 이후에 역시 논란에 휩싸였는데, 특히 피터 홀의 보수적인 연출은 보수적인 관객들에게는 좋은 평가를 받았지만, 진보적인 평론가들에게는 혹평을 받았다.[9] 또 교체된 타이틀롤인 만트레트 융에 대해서도 혹평이 있었다. 솔티의 지휘 자체는 직전 프로덕션의 피에르 불레즈가 워낙 말아먹은 바람에 긍정적으로 평가받았지만 기대했던 만큼 대단하지는 않아다는 평이었다. 결국 1983년이 그의 처음이자 마지막 바이로이트 출연이 되었다.

시카고 심포니 오케스트라에서 물러난 이후에는 객원지휘자로 활발하게 활동했다. 1994년에는 카네기홀에서 미국의 젊은 음악도들을 위한 "Solti Orchestral Project"를 진행했고 이는 동영상과 음반으로 출시되기도 했다.[10]

1991년에는 모차르트의 타계 200주기 당일인 12월 5일 오스트리아 비엔나에서 열린 레퀴엠 연주를 지휘했다. 앞서 카라얀, 번스타인이 타계한 후라서 생존해 있던 대지휘자들 가운데 명성이 높았던 솔티가 이 세기의 음악사적 이벤트를 지휘하게 된 것이다.

1995년 루트비히 판 베토벤의 생애를 다룬 영화 불멸의 연인, 1997년에는 톨스토이의 소설 안나 카레니나의 음악 감독을 맡기도 했다.

3. 데카와의 파트너쉽

영국 클래식 레이블 데카와 평생에 걸친 파트너쉽을 지속했다. 데카와 계약을 맺은 것은 여러가지로 숄티에게는 큰 행운이었다. 데카가 처음에 그와 계약을 맺은 것은 유명 연주자나 성악가의 반주자로 기용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당시 피아노 반주자는 음반 표지에 이름이 실리지 않는 경우가 많을 정도로 형편없는 대우를 받았다. 솔티는 데카에서 피아노 반주자로 일하면서 컬쇼 등의 프로듀서에게 자신의 지휘 열망을 열심히 피력했다. 이를 계기로 솔티는 본격적으로 지휘자 활동을 시작하게 되었다.

당시 데카는 거액을 들여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독점 계약을 맺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빈 필의 주요 지휘자들은 대부분 DG 소속이었다. DG 소속이었던 칼 뵘은 빈 필에서도 가장 영향력 있는 지휘자였고 빈 필과 무척 녹음하고 싶어했지만 데카와 빈 필의 독점 계약 때문에 1970년 이전에는 녹음을 할 수 없었다. 숄티는 데뷔 초창기에 아직 빈 필의 정기연주회 지휘자로 초빙받은 적 조차도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빈 필과 가장 많은 녹음 세션을 갖는 행운을 누릴 수 있었다.[11] 하지만 초기 녹음 세션에서 빈 필을 통솔하는데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숄티의 공격적인 해석과 비전통적인 지휘법에 대해 특히 노장 단원들의 반발이 있었고 일부 단원들은 녹음 세션을 박차고 나가기도 했다. 때문에 한동안 숄티의 빈 필 녹음세션은 비정예 멤버로 꾸려졌다.

1958년부터 1965년에 걸쳐 진행된 숄티와 빈 필의 니벨룽의 반지 전곡 녹음은 세계최초로 스테레오로 녹음[12] 된 니벨룽의 반지 전곡 음반사에 남을 대규모 프로젝트였고, 64년의 신들의 황혼 세션은 BBC에서 다큐멘터리로 만들기도 했다. 당시 데카의 놀라운 녹음기술과 화려한 성악진 등으로 엄청난 화제와 성공을 거둔 녹음 프로젝트였다.

이 녹음은 원래 한스 크나퍼츠부슈를 기용하려 했으나 크나퍼츠부슈가 워낙 녹음에 비협조적인 지휘자였기 때문에 결국 이 녹음 세션은 숄티에게 돌아왔다.[13] 하지만 당시만 해도 지휘자 경력이 일천했던 숄티가 이런 대작 녹음에 기용되는 것에 대해 회의적인 시각도 상당수 존재했는데, 경쟁사인 EMI의 프로듀서 월터 레그는 이 녹음이 50장도 팔리기 힘들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14] 그러나 결과적으로 이 반지 세트는 출시 후 현재까지 약 1,800만장이 팔려, 클래식 음반 역사상 가장 많이 팔린 음반이 되었다.

모차르트, 베르디, 바그너, 말러,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버르토크 녹음이 유명하다.

4. 이름의 표기와 발음

일단 그가 공식적으로 사용한 퍼스트 네임은 Georg이며, George(조지)라는 철자를 사용한 적은 없다. 시카고 심포니 상임지휘자로서나, 영국 시민권을 취득한 후에도 언제나 그의 이름은 Georg였다.

그가 영국 시민권자인데 왜 독일식인 게오르그로 발음하냐고 따지는 경우가 있다. 일단 게오르그는 독일식 발음이 아니다. 독일식 발음 표기는 게오르크이다. 참고로 솔티는 1953년 독일(서독) 시민권을 취득했고, 이후 1972년 영국 시민권을 취득했다. 이후 그가 영국 시민권을 취득하면서 독일 국적을 포기했는지 여부에 대해서는 알려져 있지 않다. 참고로 영국 정부에서는 1948년 이후 복수 국적(dual citizenship, also known as dual nationality)을 전면 허용하고 있다. #

영미권 클래식 라디오 진행자를 위한 발음 가이드에서는 게오르그 숄티라 나와 있다. 다만 괄호 속에 조지 숄티를 표기해 놓았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영미권에서는 주로 친숙한 조지라고 발음하는 경우가 더 많아 보인다. 옥스포드 사전에서는 조지 숄티라고 발음한다. 낙소스 비디오에 올라온 다큐멘터리에서도 그 발음을 확인할 수 있다.

한국에서는 오랫동안 게오르그 솔티라는 표기가 굳어져 왔다. 고 클래식 음악가 정보에도 게오르그 솔티 혹은 숄티를 사용한다. 한국어 위키피디아에는 조지 숄티라고 되어 있다. KBS 클래식 FM에서는 해당 프로그램의 진행자에 따라 게오르그 솔티라고 읽을 때도 있고 조지 숄티라고 읽을 때도 있다. 국내 로컬/라이선스 기획 박스셋의 이름은 솔티시모이다. 여기서는 "게오르그 솔티"라는 표기를 사용하였다. 일본어 위키피디아는 게오르크 솔티라는 독일어에 가까운 표기를 쓴다.

S에 /ʃ/ 발음이 적용되는 이유는 헝가리어로 된 성씨기 때문이며, 이것이 솔티가 되려면 헝가리어 특성상 Sz가 되어야 한다. 예) George Szell(조지 셀). 여기에 대한 설명은 헝가리어 문서에 자음 문단에도 있다. 그래서 각 국가 위키피디아에서 이름에 대한 IPA표기는 없어도 성에 대한 IPA표기가 있는 것이다.

5. 기타

다른 유명 지휘자들도 그렇지만, 솔티 역시 자신이 맡은 관현악단의 단원들을 훈련시키는 과정에서 엄격함을 주문, 요구하는 일이 많았다.# 이런 그의 특징과 대머리를 빗대어 '괴성을 지르는 해골'(screaming skull)이라는 별명이 붙여졌을 정도.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와의 일화도 유명하다. 정경화의 젊었을때 성질이 꽤 한가락 한 모양이라 여러 지휘자, 피아니스트들하고 수도 없이 싸웠다고 직접 말한 적도 있는데 그중 솔티와의 일화가 제일 유명하다. 리허설 중에 솔티가 정경화에게 "거길 왜 그렇게 연주하느냐" 라는 말에 정경화가 욱 해서 대드는 바람에 욕설이 오고가며 싸웠다고 한다. 서로가 한 말은 "한국잡년", "빌어먹을 독재자" 등.

지옥의 묵시록삽입곡으로 사용된 발퀴레의 기행DECCA 레이블에서 발배된 게오르그 솔티가 지휘한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연주곡이다.

동시대의 유명 지휘자들이 대부분 메이저 레퍼토리는 암보 연주를 선호했지만 솔티는 반드시 악보를 놓고 지휘했다. 이 밖에 악보를 꼭 지참하는 유명 지휘자로는 마리스 얀손스리카르도 무티 등이 있다.

[1] 휴가 중 갑자기 사망하였으며, 묘역은 부다페스트에 있다.[2] 대영제국 훈장 2등급(KBE). 2등급이므로 기사 칭호(Knighthood)가 훈장 서훈과 동시에 붙는다. 사망하기 세달 전 서훈명단에 올랐다. 유명인들이 받은 기사작위는 대부분 'Knight Bachelor'라는 것인데, KBE는 이보다도 한단계 격이 높다. 자세한 설명은 기사작위 항목 참조.[3] 1971년 명예 KBE훈장을 받았고, 1972년에 영국 국적을 취득하면서 정식 KBE로 전환되어 기사작위도 같이 받았다.[4] 헝가리는 저명한 작곡가들뿐만 아니라 내로라 할 명지휘자들을 배출했는데, 솔티의 선배격 지휘자들로는 프리츠 라이너, 조지 셀, 유진 오먼디, 안탈 도라티 등이 있다. 이 중 헝가리 국적을 유지한 사람은 많지 않지만, 저마다 세계적인 입지를 다졌다.[5] 숄티라는 이름은 헝가리의 도시인 숄트에서 나왔다. 편의상의 이유로 개명한 것이다.[6] 이 당시 데카에서 발매된 녹음들 중 게오르그 쿨렌캄프의 반주를 맡아서 녹음한 베토벤과 브람스의 바이올린 소나타 녹음이 남아있다.[7] 카라얀이 34년간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상임지휘자로 있으면서도 베를린에서는 호텔에서만 머물렀던 것과 비슷하다.[8] 파트리스 셰로가 연출하고, 피에르 불레즈가 지휘한 100주년 반지 프로덕션은 엄청난 논란과 비판에 휩싸였는데 토마스 만 등의 해석을 근거로 근대시대로 설정한 셰로의 연출은 모순점으로 논란이 일었다. 때문에 이 프로덕션은 프리미어 이후 연출에 대대적인 수정이 가해졌다. 이 작품을 처음 지휘해봤던 불레즈의 지휘에 대해서도 논란이 많았다. 불레즈의 지휘 역시 프리미어 이후 템포 등에서 많은 변화가 있었다. 이 프로덕션은 마지막해인 1981년에 녹음, 녹화되어 음반 및 영상물로 출시되었다. 많은 수정이 있었기 때문에 오늘날 평가는 다소 나아진 편이다.[9] http://www.wagneropera.net/RW-Performers/Georg-Solti.htm.바이로이트 역사상 최악의 실패작 중 하나로 기록됨., The disastrous Peter Hall-Georg Solti 1983 Bayreuth Ring is an exception. But it was so badly thought out, mishandled, and mismanaged on every front that it were better had it never been attempted.. 피터 홀과 게오르그 솔티의 재앙과도 같은 반지. 다시는 이런 시도가 일어나지 않아야 함. http://www.nytimes.com/1983/08/01/arts/opera-premiere-of-solti-hall-gotterdammerung.html 숄티의 프로덕션은 성공적이지 못해..가까스로 막을 내림[10] 해당 음반은 데카에서 발매된 "The Carnegie Project". 다만 일회성 기획으로 끝나서 아쉬운 점이 없지않아 있다.[11] 한국의 지휘자 정명훈도 이와 비슷한 사례다. 정명훈 역시 정식으로 빈 필의 정기연주회에 초빙된 적은 없지만, DG가 아시아시장을 위해 그를 밀고 있었기 때문에 빈 필과 녹음 세션을 가질 수 있었다.[12] 세계 최초의 스테레오 반지 녹음은 아니다. 세계 최초는 55년도 카일베르트가 지휘한 바이로이트 실황. Testament 레이블로 출시되었다. 솔티 반지는 세계 최초의 스튜디오 녹음 정도 되겠다.[13] 평론가 노먼 레브레히트의 인터뷰에 따르면 크나퍼츠부슈는 녹음 취지와 맞지 않는다고 생각한 프로듀서 존 컬쇼가 결사반대했다.[14] 월터 레그는 일부러 녹음 세션이 진행되던 비엔나로 가서 데카 스태프들과 우연히 만난 척을 하면서 이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