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라모폰 명예의 전당 헌액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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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ärta Birgit Nilsson
1918년 5월 17일 ~ 2005년 12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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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스웨덴 출신의 소프라노 가수로 성향은 드라마티코/리릭 소프라노 계열.국내의 성악계가 이탈리아 오페라에 지나치게 편중되어 있는 탓에 비르기트 닐손을 투란도트로만 유명한 소프라노라고 알고 있는 성악도들이 많고 본 문서 역시 그런 내용 일변도로 작성되어 있었다. 하지만 닐손은 투란도트를 제외하면 주요 레퍼토리의 대부분이 독일 오페라였으며, 바그너,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베토벤 등의 오페라에서 최고로 평가받는 소프라노 중 한 명이다.[1]
2. 일생
1918년 스웨덴 출생으로 데뷔는 비교적 늦은 1947년에 했다.데뷔부터 바그너 오페라에서 커리어를 쌓았다. 늦은 나이에 데뷔했지만 바그너 오페라에서 비교적 빠르게 인정받아 이후 그녀의 메인 홈그라운드가 된 성지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에 1954년 데뷔했다. 데뷔 당시 맡았던 롤은 지금 기준으로는 다소 놀랍게도 로엔그린의 엘자였다. 오이겐 요훔의 지휘였는데, 바이로이트 극장의 특이한 구조 때문에 데뷔 당시 무척 당황했다고 한다. 1950년 중반까지 커리어 초창기에는 엘자, 지글렌데와 같은 조금 소프트한 배역도 맡았다.
닐손은 이전까지 최고의 바그너 소프라노였던 플라그슈타트가 1952년 은퇴하게 되면서 매우 빠르게 그 자리를 대체했다. 배역 또한 바그너 소프라노의 정점에 있는 브륀힐데와 이졸데 역으로 옮겨갔다. 50년대 후반에 바이로이트를 포함한 전세계 극장에서 최고의 바그너 소프라노로서 입지를 확고히 했다.
닐손은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에서 50년대 후반부터 70년대 초반까지 10여년간 브륀힐데, 이졸데 배역을 독점하면서 최고의 바그너 소프라노로 군림했다. 바이로이트에서 이렇게 한 가수가 대표적인 배역을 이렇게 장기간 독점한 예는 이전에도 이후에도 없었다.
1958년부터 1965년까지 데카의 존 컬쇼와 게오르그 솔티, 그리고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녹음한 전설적인 니벨룽의 반지 4부작과 역시 칼 뵘과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이 1967년에 제작한 전설적인 반지 4부작에서 동시에 히로인 브륀힐데 역을 맡으며 시대를 대표하는 바그너 소프라노로서의 음반사에 이정표를 남겼다. 또한 브륀힐데와 더불어 바그너 소프라노의 정점에 있는 이졸데 역에서도 역시 대체가 어려운 최고의 가수로 군림하였고 역시 존 컬쇼, 게오르그 솔티, 빈 필하모닉과 칼 뵘,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에서 동시 이 역으로 녹음을 진행했다.
바그너에 이어 그녀에게 두번째로 중요한 레퍼토리인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에서도 그녀는 살로메, 엘렉트라 등에서 시대를 대표하는 소프라노로 명성을 쌓았다. 슈트라우스 역시 칼 뵘, 게오르그 솔티, 제임스 레바인 등 거장들과 함께 명반으로 꼽히는 여러 음반을 남겼다.
한편 1950년대 후반부터는 푸치니의 투란도트의 타이틀롤을 맡기 시작했다. 주로 상대역은 프랑코 코렐리였다.
그녀는 1970년대에 들어서자 소프라노들 중에서도 원로급 대우를 받기 시작했는데 자신보다 나이가 4살 어렸던 레나타 테발디가 은퇴하고 3년 위인 엘리자베트 슈바르츠코프가 은퇴를 하자 그 경향이 더 두드러졌다.
1977년에는 2차 세계대전때 활동했던 자라 린더[2]와 프로그램에 출연하고 1981년에는 같은 스웨덴출신의 가수 릴 린드포스[3]와 Tv쇼에 출연하는 등 인기를 누렸고 1983년에 은퇴한 이후 주로 독일이나 스웨덴계열의 방송에 출연하기도 했다.
1983년에 있었던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100주년 공연에서는 레온틴 프라이스와 루치아노 파바로티 전에 노래 순서를 받았는데 출연 가수들 중 가장많은 박수갈채를 받았고 유일하게 2곡을 부르고 꽃다발을 받았고 연설기회까지 얻었다.[4]
그러나 이 공연을 끝으로 그녀는 활동을 줄이더니 이듬해인 1984년에 은퇴했다.
1996년의 제임스 레바인 취임 20주년 기념공연에는 깜짝 출연해 78살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발퀴레의 간단한 타이틀롤을 선보였다.
2005년 고향 스웨덴의 바스투라 카루프에서 87세의 나이로 영면했다.
3. 평가와 성향
닐손의 연기력과 표현력에 대해서는 논란이 분분하지만 가창력에 있어서 만큼은 엄청난 기교와 성량을 선보여준다.주로 그녀가 맡아온 역할들은 이러하다.
-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살로메>, <엘렉트라>
- 투란도트의 타이틀롤
모두가 강력한 성량과 오케스트라의 소리를 뚫는 목소리 크기를 요구하는 곡들이다(...) 그 밖에는 의외로 토스카가 높이 평가받는다. 로린 마젤의 지휘로 프랑코 코렐리와 함께 녹음한 음반이 매우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
수없이 많은 바그너 공연을 했고 음반을 남기면서 다양한 테너들과 함께 했지만, 그녀와 콤비를 이룬 대표적인 헬덴 테너는 볼프강 빈트가센이다.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에서 50년대 후반부터 70년대 초까지 10여년 동안 트리스탄과 이졸데, 니벨룽의 반지 4부작에서 함께 공연을 했다. 또 전설적인 명반인 게오르그 솔티와 칼 뵘의 니벨룽의 반지 4부작 및 뵘의 트리스탄과 이졸데에서도 역시 함께 주연으로 녹음했다.
그녀의 다큐 영상에도 잘 나오지만 지아니 라이몬디가 카바라도시를. 그리고 닐손이 토스카를 맡는 장면이 있는데 닐손의 분장실에 라이몬디가 찾아와 "제발 목소리로 날 죽이지 말아요. 닐손" 이런다던가[5] 아니면 프랑코 코렐리와의 일화도 그러하다. 코렐리는 테너 중에서 성량이 가장 강하고 높은 사람으로 잘 알려졌는데 이런 목소리가 닐손과 잘 어울렸다.
예시로 플라시도 도밍고는 자신이 27세에 처음 투란도트의 타이틀롤을 맏았는데 첫 투란도트의 데뷔무대는 환상적이었다고 말했다.[6]
연기력을 두고 하는 말은 그녀의 체격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동작이 빠르지 못하거나 몸짓의 표현력이 떨어진다는 것, 하지만 그럼에도 닐손은 연기력을 제치고 매우 뛰어난 가창력 덕에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소프라노 중에 한 사람으로 남았다.
비주얼 측면을 빼고 성악 자체로만 보면 닐손의 가창은 톤칼라, 발성, 성량, 음정, 기교 등에서 모두 대단히 높은 수준에 있으며, 여러 면에서 표본이라 할 만하다. 하지만 이렇게 성악적으로 완벽에 가까운 뛰어난 가창에도 불구하고 감정 표현이 결여되어 있다는 점이 최대의 단점으로 꼽히며, 이점이 그녀의 주요 레퍼토리를 극도로 편중되게 한 결과를 가져왔다.
4. 일화들
-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은 비공식석상에서 닐손에 대해 토스카의 스카르피아를 분장없이도 연기 가능하다고 했다. 한번은 닐손이 리허설 도중 진주목걸이를 끊어 먹자 카라얀이 진주를 주워주면서 그 진주가 진짜 진주인지 가짜 진주인지 물었다고 한다.그러자 닐슨은 그가 준 월급으로는 가짜 진주 밖에 못산다며 장난을 쳤다.
- 닐손은 1965년에 카라얀과의 녹음계획에 대해 카랴얀이 자신을 녹음 작업에 포함시킬 마음이 없다고 말했다. 카라얀이 한번은 피아노를 치면서 닐손과 리허설을 했는데 여러 번 말하길 "닐손. 다시 불러봐요. 당신의 노래에는 감정이 없어요. 감정을 살려서 노래해요."라고 했다고 한다.
- 카라얀은 한번 준비한 오페라 프로덕션이 공연이 끝나고 폐기되는 것을 아까워 하여 전세계 주요 극장이 프로덕션을 공유하는 방안을 주창하였고, 이를 실현시키기 위해 그동안 수준 낮은 퀄리티 때문에 출연을 꺼려오던 메트로폴리탄 오페라[7]에 처음으로 출연하게 되었다. 카라얀은 잘츠부르크에서 공연한 바그너의 니벨룽의 반지 프로덕션을 그대로 메트에서 공연하였는데, 카라얀의 연출은 조명이 매우 어두웠다. 그러자 닐손은 리허설에서 광부들이 쓰는 헤드라이트를 쓰고 나와 카라얀에게 반항을 표하기도 했다. 닐손은 카라얀의 어두운 조명 때문에 공연에 지장이 많았다면서 뉴욕에서 카라얀을 비난하는 기사를 내기도 했다.
- 카라얀과의 관계가 국내에는 감정 싸움처럼 왜곡되거나 잘못 이해되고 있는 감이 있는데, 본질적으로 카라얀의 성향에 그녀의 목소리가 맞지 않았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닐손은 앞서 언급되었듯이 50년대 후반부터 60년대에 녹음된 메이저 레이블의 바그너 소프라노 배역을 거의 독점하다시피 녹음했을 정도로 대체가 불가능한 최고의 바그너 소프라노였다. 하지만 예외가 있는데,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이 1967년부터 1971년에 걸쳐 녹음한 니벨룽의 반지에는 기용되지 않았다. 2년 후 녹음된 트리스탄과 이졸데 역시 마찬가지였다. 닐손은 바그너 오페라에서 최고의 기교와 톤칼라, 성량을 모두 보여주었지만 카라얀이 추구하는 섬세한 표현력이 다소 부족했고 이에 카라얀은 그녀 대신 보다 섬세한 표현력을 지닌 헬가 데르네슈 등을 녹음에 기용하곤 했다. 성량은 스튜디오에서의 녹음으로 어느정도 보완 가능한 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카라얀의 이런 면모는 닐손에게만 해당된 것이 아니라 다른 배역 역시 마찬가지였다. 카라얀은 브륀힐데나 이졸데의 상대 배역인 지크프리트, 트리스탄 역에도 역시 당대 최고의 헬덴 테너였던 볼프강 빈트가센을 외면하고 당시에는 거의 무명이었던 헬게 브릴리요트 등을 기용했다. 헬게 브릴리요트는 바그너 테너 중 보기드문 유려한 미성을 가지고 있었지만 성량이 풍부하지 못했다. 카라얀은 실제 공연에서는 음반과 달리 현장에서 4관 대편성 오케스트라를 커버할 수 있는 닐손이나 제스 토마스 등을 기용하곤 했다.
- 오스트리아의 대 지휘자인 카를 뵘은 닐손이 오페라 무대를 은퇴하면 자신도 오페라 지휘를 그만두겠다고 선언했지만 뵘이 87세를 일기로 1981년에 먼저 사망하면서 이뤄지지 못했다. 그만큼 닐손이 늙은 나이에도 무대에 섰다는 반증이다. 참고로 닐손은 1982년에 오페라 무대를 떠났다.
- 프랑코 코렐리와 사이가 안 좋았다고 하는데 1981년에 프랑코 코렐리와 TV쇼에 출연해 우정을 과시했다.[8] 그냥 카더라통신의 일부로 보는게 좋다.[9] 닐손 자체의 성량이 너무나 강해서 테너들과 듀엣으로 부르는 곡들은 목소리가 묻혀버리고 녹음반의 경우에는 편집자가 일부러 닐손의 목소리를 줄이든지 테너의 목소리를 높히든지 했지만 코렐리는 테너들 중 가장 성량이 강한 사람이라 그럴 이유가 없었고 해서 코렐리와 닐손의 듀엣은 매우 어울렸다.
- TV 출연을 자주했다. 은퇴 전인 50대 초반부터 죽는 그 순간까지 말이다. 앞서 말한 프랑코 코렐리, 자라 린더, 릴 린드포스와 함께 토크쇼나 TV쇼를 하고 은퇴후에는 인터뷰나 토크쇼, 스웨덴이나 독일의 TV광고에 나오기도 하고 심지어는 몰래카메라의 대상(!)[10]이 되기도 하였다.
- 상당한 대식가였다. 몽셰라 카바예는 각종 합병증과 잦은 수술로 비대해 진 것이지만 닐손도 못지않게 한 몸 했다. 닐손은 키가 174cm로 알려졌는데 그녀의 다큐멘터리를 보면 크리스마스에 자신의 집에 놀러온 손님을 위해 요리를 하다가 또는 만든 요리를 중간중간 먹는 모습이 보인다.
* 스웨덴 500크로나 지폐의 인물이다.
[1] 물론 바그너 오페라가 주로 여름철 등 특정 기간에 공연이 몰려 있는 편이고 독일 바깥의 극장에서는 당시 상시적으로 연주되는 레퍼토리는 아니었던 탓에 닐손은 이탈리아 오페라에서도 적지 않게 출연했고 그녀가 맡은 역을 대부분 어렵지 않게 소화했다. 하지만 투란도트를 제외하면 상술된 연기력 논란도 있고 이탈리아 오페라에서는 큰 족적을 남기지는 못했다.[2] 1907~1981. 2차세계대전 때 나치에 부역했다는 혐의를 받았다. 독일군을 위해 위문공연을 다니거나 했다. 특유의 중후하면서 허스키한 목소리가 매력적인 가수이다. 대표 노래로 Wunderbar가 있다.[3] 1940~, 스웨덴의 가수. 우리나라로 따지면 김연자와 같은 위치의 가수이다. 노래를 할 때 여러가지 기행을 선보였다.[4] 그녀가 어떠한 위치에 있었으며 인기와 대우를 받았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이 공연에는 몽셰라 카바예, 쓰리 테너는 물론 미렐라 프레니와 조안 서덜랜드 등 전설적 성악가들이 모두 나왔다.[5] 라이몬디가 닐손보다 5살이 작다.[6] 도밍고가 27살이었다면 닐손은 당시 50세였을 거다.. 아들뻘인 테너와 같이 공연을 해도 오히려 환상적이었다는 찬사에 꿀리지 않는 그녀의 가창력을 여질없이 드러내는 대목. 게다가 이 말은 인터뷰를 하는 기자 앞에서 닐손이 바로 옆에 있는데 한 말이다.[7]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의 명성은 세계적이지만 명성에 비해 오케스트라의 수준이 상당히 뒤쳐지는 것으로도 유명했다. 때문에 1970년대까지 메트로폴리탄은 변변한 오페라 음반 녹음도 하지 못했다. 1970년대 이후 제임스 레바인이 장기 집권하면서 메트 오케스트라의 수준도 많이 향상되었지만 여전히 세계적인 수준과는 거리가 있다는 평이 많다. 카라얀은 1950년대 이후 세계최고 수준의 빈 국립 가극장과 그 다음 수준에 있던 밀라노 스칼라 가극장 2곳에만 출연했다. 1965년 이후에는 스칼라좌에도 더이상 출연하지 않고 빈 국립 가극장(빈 필)과 베를린 필 두 개의 오케스트라만 데리고 오페라 공연을 했다. 카라얀이 1967년 메트에 출연한 것은 자신의 구상을 실현시키기 위해서 였다. 카라얀을 초청하는데 성공한 루돌프 빙은 카라얀이 와서 오케스트라의 수준을 보고 깜짝 놀라지 않을까 걱정했고 이는 현실이 되고 말았다.[8] 이 때 닐손이 일어나서 서로 포옹까지 하고 닐손은 코렐리를 오랜만에 봐 너무 기분이 들떠있다고 말했다.[9] 그러나 둘이서 무대에 오르기 전 목소리를 서로 작게 해 노래를 불러달라고 싸운 적은 있다. 근데 서로 지지 않으려고 목청껏 불렀고 그 공연은 대성공을 거두어 둘은 그 자리에서 화해했다고.[10] 비르기트 닐손이 기자와 인터뷰 하는 도중 차가 낭떠러지(그래봐야 높이는 한 4m 깊이다.)로 떨어지거나 사람들이 싸우는 것을 보여 줘 혼란스러운 분위기를 만들다 그녀를 놀래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