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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를레네 디트리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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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3년 11월 독일의 공영TV인 ZDF가 독일 국민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를 바탕으로 ‘가장 위대한 독일인 1백인’을 발표한 명단이다.
TOP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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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라트 아데나워 마르틴 루터 카를 마르크스 한스, 죠피 숄 남매 빌리 브란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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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위~100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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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라트 추제 요제프 켄테니히 알베르트 슈바이처 카를하인츠 뵘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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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무트 슈미트 레진 힐데브란트 알리체 슈바르처 토마스 고트샤크 허버트 그로네메이어
26위27위28위29위30위
미하엘 슈마허 루트비히 에르하르트 빌헬름 콘라트 뢴트겐 귄터 야우흐 디터 볼렌
31위32위33위34위35위
얀 울리히 슈테피 그라프 사무엘 하네만 디트리히 본회퍼 보리스 베커
36위37위38위39위40위
프란츠 베켄바워 오스카 쉰들러 네나 한스 디트리히 겐셔 하인츠 뤼만
41위42위43위44위45위
하랄트 슈미트 프리드리히 대왕 임마누엘 칸트 패트릭 린드너 하르트무트 엥겔
46위47위48위49위50위
힐데가르트 폰 빙엔 하이노 리하르트 폰 바이츠제커 클라우스 폰 슈타우펜베르크 마를레네 디트리히
51위52위53위54위55위
로베르트 코흐 요슈카 피셔 카를 마이 로리오 알베르투스 마그누스
56위57위58위59위60위
루디 푈러 하인츠 에르하르트 로이 블랙 하인츠 하랄트 프렌첸 볼프강 아펠
61위62위63위64위65위
알렉산더 폰 훔볼트 피터 크라우스 베르너 폰 브라운 디르크 노비츠키 캄피노
66위67위68위69위70위
프란츠 요제프 슈트라우스 세바스티안 크나이프 프리드리히 실러 리하르트 바그너 카타리나 비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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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츠 발터 니콜 프리드리히 폰 보델슈윙흐 오토 릴리엔탈 마리온 돈호프
76위77위78위79위80위
토마스 만 헤르만 헤세 로미 슈나이더 스벤 하나발트 바이에른의 엘리자베트 여공작
81위82위83위84위85위
빌리 밀로위치 게르하르트 슈뢰더 요제프 보이스 프리드리히 니체 루디 두치크
86위87위88위89위90위
카를 레만 베아테 우제 트뤼머프라우 카를 프리드리히 가우스 헬무트 란
91위92위93위94위95위
알브레히트 뒤러 막스 슈멜링 카를 벤츠 프리드리히 2세 라인하르트 메이
96위97위98위99위100위
하인리히 하이네 게오르크 엘저 콘라드 두덴 제임스 라스트 우베 젤러
출처
같이 보기 : 위대한 인물 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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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를레네 디트리히의 주요 수상 및 헌액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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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FI 선정 가장 위대한 배우
파일:미국영화연구소 로고.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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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9년 미국 영화 연구소(AFI)가 선정한 역사상 가장 위대한 남, 여배우 순위이다.
1위2위3위4위5위
험프리 보가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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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리 그랜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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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스튜어트
오드리 헵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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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를레네 디트리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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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드니 푸아티에
진 할로우
로버트 미첨
캐롤 롬바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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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리 픽포드
윌리엄 홀든
에바 가드너
같이 보기: 영화, 사랑 영화, 뮤지컬 영화, 영감을 주는 영화, 배우, 영화 음악, 명대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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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리우드 명예의 거리 입성자
Hollywood Walk of Fame St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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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d4a1a1><colcolor=#fff,#000> 이름 마를레네 디트리히
Marlene Dietrich
분야 파일:할리우드 명예의 거리 영화 심볼.jpg 영화
입성날짜 1960년 2월 8일
위치 6400 Hollywood Blvd. }}}}}}}}}

<colbgcolor=#332b2b><colcolor=#fff> 마를레네 디트리히
Marlene Dietrich
파일:마를레네 디트리히.jpg
본명 Marie Magdalene Dietrich
마리 막달레네 디트리히
출생 1901년 12월 27일
독일 제국 프로이센 왕국 베를린
사망 1992년 5월 6일 (향년 90세)
프랑스 파리
국적
[[독일|]][[틀:국기|]][[틀:국기|]] →
[[미국|]][[틀:국기|]][[틀:국기|]]
직업 배우
활동 1919년 - 1984년
신체 168cm
가족 배우자 루돌프 지버 (1923–1976, 사별)
딸 마리아 리바 (1924년생)
종교 루터교무신론[1]
서명 파일:Marlene Dietrich Autograph 1933.png
링크 파일:IMDb 로고.svg
1. 개요2. 인기 및 위상3. 생애
3.1. 주요 출연 작품3.2. 가수 활동
4. 스타일5. 가족 관계
5.1. 자녀 학대 논란
6. 사생활7. 여담

[clearfix]

1. 개요

파일:Marlene_Dietrich.gif
독일 출신의 미국 배우.

2. 인기 및 위상

할리우드에서 활동하며 세계적인 스타가 되었다. AFI 선정 가장 위대한 여성 배우 9위를 차지했다. 독특한 얼굴 생김새와 분위기, 그리고 탁음을 내세운 노래로 굉장한 인기를 자랑했으며 남장 여자 이미지로는 거의 첫 줄에 올라와 있을 정도로 패션 쪽으로도 대단했던 아이콘이다. 중성적인 매력과 양성애자였던 사실 때문에 그레타 가르보와 마찬가지로 여성 팬덤이 두터웠던 것으로도 유명하다 . 아카데미상골든 글로브에 후보로 오른 적이 있지만 수상에는 실패했다.

3. 생애

마리 막달레네 디트리히(Marie Magdalene Dietrich)는 1901년 12월 27일 독일 제국베를린에서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외갓집이 보석상 및 시계 제조상을 하는 부유한 집안이었다.

1907년 여성편력이 심했던 군인 아버지 루이(Louis)가 사망한 뒤 어머니 요제피네(Josephine)는 두 자매를 프로이센 귀족 방식으로 키우기 위해 엄격하게 훈육했다.
파일:dietrich-154-0630-1.jpg
1910년, 체조복을 입고 있다.
여기에 제1차 세계 대전까지 발발하자 안 그래도 자유로운 성향의 마리 막달레네 디트리히의 반항심은 더 격하게 들끓기 시작했다. 학교 교사와 관계하는 바람에 해당 교사가 학교에서 쫓겨나기도 했고, 바이올린을 가르치던 선생과도 사귀었다. 집안의 전통을 따라 루터교회 신자로 자랐으나 이때 전쟁당사국 양측의 목사들이 각자의 승전을 위해 신에게 기도하는 걸 보고 믿음을 완전히 상실해 무신론자가 되기도 했다.
파일:dietrich-1-0630-1.jpg
파일:Mdfddddd.jpg
1918년
조엘-하인첼만 아틀리에 작품[2]
1918년
일찍부터 연극에 흥미를 보였고, 집에서 발레, 바이올린, 피아노를 배우며 바이올린 연주자를 꿈꿨으나 손목 부상으로 꿈을 접어야했다.

1923년 가족들이 쓰던 "레네"라는 애칭에 자신의 본명을 조합해 마를레네 디트리히라는 이름으로 데뷔했다. 마침 전후 베를린은 퇴폐 문화가 절정에 달해있었고, 디트리히는 춤이 섞여있는 동성애적 색채의 풍자익살극 공연을 뛰었는데, 치마를 입은 채 다리를 드는 동작이 있는데도 속옷을 착용하지 않아 밤문화를 즐기는 고객들 사이에서 이름을 떨쳤다.

무성영화 몇 편에서 작은 역할로만 나오다가 1930년 영화 <푸른 천사>의 팜 파탈 주인공을 맡으면서 알려지기 시작했다. 이를 통해 여배우의 맨다리가 최초로 영화 포스터에 나왔다. 이때부터 사생활은 매우 무절제했지만 작업에만큼은 강박에 가까운 자기 규율을 적용하며 늘 성실하게 임했다.

이전부터 할리우드에서 주로 활동했지만 나치당의 협력 제안을 거절한 후엔 1937년 아예 미국에 망명하였고, 1939년 독일 국적 포기와 동시에 미국 국적을 취득하게 되었다. 독일에 남은 유태인 스탭들을 구하기 위해 노력하였으며, 연합군을 위한 전시공채 판매에 적극 협력해 무려 100만 달러 이상을 모금하기도 했다.

1943년에서 46년 사이에 미군 대상으로 500회 이상의 순회공연을 다니며 독일의 유명한 전시가요 릴리 마를렌영어로 번안하여 불렀다. 심지어 전선 바로 코앞에서 공연한 적도 있다. 공연계에서 군인들을 위로하기 위해 제공했던 무료 오락시설 스테이지 도어 캔틴[3]의 뉴욕 본점과 LA 지점에도 자주 출몰했다. 특히 <Kismet> 촬영 때문에 온몸이 금빛 페인트로 덮여있는 채로 나타났을 땐 군인들이 엄청나게 환호했다고 한다.
파일:Actress Marlene Dietrich kisses a soldier returning home from war, 1945.jpg
1945년, <귀환한 미군과 뉴욕에서>
어빙 헤이버먼[4]
이 때문에 전쟁 후에 독일에서 호불호가 갈리게 된다. 한편 당시 많은 미국 연예인들이 순회공연에 헌신했음에도 디트리히가 유독 회자되는 건 사기 증진을 위해 군인들과 입을 맞추거나 몸을 부비는 사진들을 대놓고 찍어댄 덕분이기도 하다. 1945년 미국 국방부로부터 자유 훈장[5]을 받기도 했다.
파일:dietricxxdh-9-0630-1.jpg
전후엔 가수 일에 더 집중했으며, 1960년도 순회공연 중에 고향 땅 베를린을 밟았을 때 엄청난 인기와 야유를 동시에 받았다.

1974년 호주 공연에서 무대 장치에서 떨어져 허벅지뼈가 골절되는 등 크게 다쳤고, 이후 파리 몽테뉴의 아파트에서 대부분의 생활을 침대에 누워 보내야만 했으며, 약물과 알코올에 중독돼 매일 폭음 끝에 취한 채로 잠이 들기 시작했다. 아파트에 들어올 수 있는 것은 가족들을 포함해 디트리히가 허락한 극소수의 지인뿐이었다. 그래도 은둔 직전까지 공연 활동을 벌이고 1978년 은퇴작도 찍은지라 노년 사진이 제법 남아있다.

1979년 엉덩이뼈가 골절된 뒤엔 침대맡에 핫플레이트를 놓고 끼니를 해결하고 소변은 리모주 항아리에, 대변은 캐서롤(casserole) 접시에 봐야했다.

1992년 심부전으로 프랑스 파리에서 90세의 나이로 눈을 감았다. "가족과 가까이에 묻히고 싶다"는 유언대로 베를린에 묻혔다.

3.1. 주요 출연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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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래비스 밴튼[9]의 의상.
* 금발의 비너스(Blonde Venus), 1932 - 헬런 패러데이/헬런 존즈/블란드 비너스[10]
"Hot Voodoo"라는 노래를 부르는 장면이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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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래비스 밴튼의 디자인.
* 사진(沙塵)(Destry Rides Again), 1939 - 프렌치[15]
파일:20221212_090514.jpg}}}||파일:dietrich-6-0630-1.jpg}}}||파일:Detrucme.jpg}}}||
사진 속 루비-다이아몬드 팔찌는 디트리히 본인 소유의 반 클리프 앤 아펠인데 다름 아닌 가터벨트에서 영감을 얻은 제품이다.
* 80일간의 세계일주, 1956
* 검찰 측 증인(Witness for the Prosecution), 1957[26]
* 악의 손길(Touch of Evil), 1958[27]
* 뉘른베르크의 재판, 1961

3.2. 가수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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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 저음역대와 그윽한 분위기 연출로 명성이 드높았다.

4. 스타일

파일:Marlene-Dietrich-in-Morocco.jpg
파일:MoroccoMD-MAIN1.jpg
1930년, <모로코>
남성용 정장을 수시로 착용하면서도 화장이나 악세사리로 기존의 전통적 여성미를 살짝 가미함로서 특유의 중성적 착장을 완성했다. 오로지 자기만족을 위해 입는다는 당당한 태도가 매력을 더했다. 달리 소속사나 스타일리스트의 도움을 받은 게 아니라 스스로 개발하고 정교화했기 때문에 현재까지도 남녀공용/양성 의복의 선구자로서 높이 평가 받고 있다. 디트리히는 특히 1900년대의 유행으로부터 영감을 얻었다. 오늘날 의상 업계는 여전히 디트리히가 창안한 스타일의 영향권 내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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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Ifhjke.jpg
1935년 194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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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보석 수집가로도 유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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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3년, Trabert & Hoeffer-Mauboussin[28]
오늘날엔 잘 안 알려져 있으나 활동 당시엔 상시 착용하고 다니던 에메랄드-다이아몬드 보석 세트들이 특히 디트리히의 상징이었다.

그밖에 기울여 쓴 모자, 모피, 짙은 립스틱도 주요 특징이었다.

5. 가족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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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4년, 폴로 경기를 보러갔던
디트리히 부부와 마리아 리바와 타미

5.1. 자녀 학대 논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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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 마리아 리바는 어려서부터 어머니 디트리히의 일거수일투족을 하인처럼 시중 들어야 했다. 이미 3살 때 리바는 "자신에겐 어머니가 없고 자신이 모셔야 하는 여왕이 있을 뿐"이라는 걸 깨달았다고 한다. 특히 1930년대 초 할리우드로 간 뒤엔 아예 트래비스 밴튼이 디자인한 뒤 '디트리히 조수[33] 정복'이라 이름 붙인 흰색 코트까지 입고 다녀야 했다. 학교도 가지 못했다.

디트리히가 굳이 딸에게 의지한 이유는 자기 관리 과정을 다른 사람에겐 보일 수 없었기 때문이다. 디트리히가 체중관리를 위해 엡섬 소금[34]을 삼키고 음식물을 토해낼 땐 그 누구도 화장실에 들어오지 못하게 리바가 문 앞을 지키고 서있어야 했다. 테이핑으로 가슴 모양을 잡는 일도 리바가 도왔다. 촬영장에서 디트리히의 외양에 조금이라도 문제가 생기면 역시 타인의 눈에 띄기 전에 딸인 리바가 알려줘야했다.

심지어는 성관계 과정에 대한 자세한 묘사를 곁들인 연애 상담도 들어줘야 했다.

그래도 어린 시절엔 어머니가 자신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게 즐거웠고, 어른이 되어서야 이게 정상적인 모녀 관계가 아니었단 걸 확실히 깨달았다고 한다. 리바는 "마를레네 디트리히라는 사람을 일반인의 상식선에서 이해하려고 하면 안 된다"고 말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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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바는 1993년 "Marlene Dietrich: The Life"란 회고록을 출판했는데, 14살 때 자신이 주변의 남자애들에게 관심을 보이기 시작하자 갑자기 디트리히가 연인들 중 하나였던 레즈비언 시인 메르세데스 드 아코스타[35]의 비서였으며 성적으로 가학적인 성향이 있는 걸로 이미 유명했던 한 레즈비언을 미성년자인 자신을 돌봐줄 사람으로 붙이고 둘만 따로 살게 해 이 레즈비언이 자신을 성폭행하도록 유도하고 방치했다는 매우 충격적인 폭로를 했다.

성폭행은 일 년 반이나 이어졌고, 이 당시 자살충동에 시달리던 리바는 이 고통을 술에 기대 달래는 바람에 10대에 알코올 의존증 환자가 되었다.

디트리히는 딸이 결혼을 하고 손주를 낳아 자신만의 가정을 꾸리면 말년에 자신을 돌봐줄 사람이 없어진다는 이유로 딸이 레즈비언이 되길 원했다고 한다. 리바가 낳은 아들, 즉 손자가 결혼하게 됐을 때 디트리히는 참석을 거부했다.

성폭행 사건은 물론 어린 시절 반강제로 목격해야만 했던 디트리히의 수많은 연인들과 이들의 행각도 리바에게 깊은 트라우마로 남았다. 리바는 어머니 디트리히를 평생에 걸쳐 극심히 경멸했다. 그럼에도 어머니였기 때문에 디트리히의 공연들을 계속 보조했고, 말년의 디트리히 상태를 동정해 자주 찾아와 돌봤다. 디트리히도 손자들이 어렸을 때만큼은 할머니 노릇을 꽤 했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리바는 디트리히가 자기 아들들과 가까이 지내는 걸 원치 않았던 모양이다.

디트리히가 워낙 팬층이 두터워 폭로 당시 뉴욕타임즈 등 유력 언론으로부터 이제 와 이런 걸 들추는 저의가 뭐냐며 공격 당했다. 그래서 리바는 "인기가 있는 사람들은 무슨 일을 저지르든 봐주는 사회의 경향성은 크게 잘못됐다"고 성토했다. 책 속엔 디트리히의 생전에 이미 실체를 수없이 주변에 알려봤으나 철저히 묵살 당했던 것으로 여러 번 암시가 돼있다.

6. 사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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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post-480-0-83787300-1376073102.jpg
더글러스 페어뱅크스 주니어, 1937 }}}{{{#!wiki style=""
파일:hollywood-ca-marlene-dietrich-and-erich-maria-remarque-news-photo-1607999428.jpg
에리히 마리아 레마르크, 1939 }}}{{{#!wiki style=""
파일:Edimdddd.jpg
에디트 피아프,
스미소니언 국립 초상화 박물관 소장
}}}
파일:Shutterstock_295025u.jpg}}} ||<width=63.5%>
파일:Shutterstock_5885828f.jpg
||
파일:actress-marlene-dietrich-and-mike-todd-at-dinner-in-los-news-photo-1607998845.jpg}}} ||
마이크 타드, 1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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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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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말년에 가톨릭 신자가 됐다는 주장이 있으나 확실치 않다.[2] Joël-Heinzelmann Atelier[3] Stage Door Canteen.[4] Irving Haberman[5] 미국 대통령 자유 훈장과는 다른 것이며, 감사패 정도의 위치다.[6] 첫 유성영화 출연작. 오스트리아/미국 감독 요제프 폰 슈테른베르크가 독일에서 찍었다. 자기 대신 디트리히가 뜨자 에밀 야닝스가 매우 짜증을 냈다고 한다. 슈테른베르크는 이후 공사 양쪽으로 얽히면서 디트리히 대표작을 찍었다. 아예 크라이테리온 콜렉션 블루레이 박스셋으로 나올 정도.[7] 리프 전쟁 소재. 게리 쿠퍼 출연.[8] 폰 슈테른베르크 연출. 애너 메이 웡 출연.[9] Travis Banton. 1894 - 1958. 의상 디자이너. 디트리히와는 <모로코>(1930) 등 다수작을 협업했고, 메이 웨스트, 리타 헤이워스 등 무수한 할리우드 황금기 스타들의 의상들을 작업했다.[10] 폰 슈테른베르크 연출.[11] 루벤 마물리안 연출.[12] 파라마운트 & 폰 슈테른베르크 6/6.[13] 데이비드 O. 셀즈닉 제작. 샤를 부아예, 배절 래스본 출연.[14] 에른스트 루비치 연출. 멜빈 더글러스 출연.[15] 제임스 스튜어트 출연.[16] (존 웨인 1/3).[17] 르네 클레어 연출. 조 패스터낵이 제작한 마지막 디트리히 영화다. 앤 리베어 출연.[18] 라울 월시 연출. 에드워드 G. 로빈슨 출연.[19] 프레드 맥머리 출연.[20] (존 웨인 2/3).[21] (존 웨인 3/3).[22] 디트리히의 영화배우 데뷔작인 독일 무성영화 <Der Mensch am Wege(길가의 사람)>(1923)으로 감독 데뷔한 바 있는 윌리엄 디털리 연출.[23] 빅터 영이 영화를 위해 작곡한 "Golden Earrings"는 페기 리(Peggy Lee)가 불러 1947-8년에 인기를 끌었다. 레이 멀랜드 출연.[24] 빌리 와일더 연출. 진 아서 출연.[25] 앨프리드 히치콕 감독. 이 영화 속 디트리히의 자기 연출을 히치콕이 대단히 맘에 들어했다고 한다. 마이클 와일딩 출연.[26] 애거서 크리스티 원작. 빌리 와일더 연출. 찰스 로튼, 타이론 파워 출연.[27] 오슨 웰스 연출. 찰턴 헤스턴, 재넛 리, 자자 가보 출연.[28] 에메랄드는 카보숑(cabochon. 보석 컷팅을 하지 않고 매끈하게 연마만 하는 것.) 처리되었다.[29] Rudolf "Rudi" Sieber.[30] 예를 들어 <The Song of Songs>(1933)를 같이 찍었던 브라이언 어헌 같은 경우.[31] Maria Riva.[32] Tamara "Tami" Matul.[33] "attendant to Miss Marlene Dietrich"[34] Epsom salts. 엡섬 더비로 유명한 엡섬 시에서 1618년 처음 발견된 무기염이다. 건강 목적에서 다각도로 활용되는 가정용 황산 마그네슘. 주로 목욕용 소금으로 쓰거나 물에 타서 완하제로 마신다.[35] Mercedes de Acosta.[36] 디트리히는 시나트라에 대해 단 한마디만 했다고 한다. "부드러웠어."[37] 와일딩은 11살 연상의 유부녀인 디트리히와의 관계를 외부에 철저히 숨기고 있었기 때문에 첫 아내와 헤어지고 테일러와 두 번째로 결혼하기 전까지 주변에 여자가 전혀 안 보인다는 이유로 게이라는 의심을 크게 사기도 했다. 심지어 테일러에게 직접 이 게이 소문을 전해주며 결혼을 만류했던 연예계 관계자들도 있었다. 이때 상대로 지목됐던 사람은 스튜어트 그레인저다.[38] Betty Compson. 1897 - 1974.[39] Stefanie von Pfetten.[40] 이 둘은 <심판>(2017)에서 같이 작업한 적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