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리 쿠퍼의 주요 수상 및 헌액 이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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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야 | 파일:할리우드 명예의 거리 영화 심볼.jpg 영화 | ||
입성날짜 | 1960년 2월 8일 | ||
위치 | 6243 Hollywood Blvd.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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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151538><colcolor=#ffffff> 게리 쿠퍼 Gary Cooper | |
본명 | Frank James Cooper 프랭크 제임스 쿠퍼 |
출생 | 1901년 5월 7일 |
미국 몬태나주 헬레나 | |
사망 | 1961년 5월 13일 (향년 60세) |
미국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 | |
국적 | [[미국| ]][[틀:국기| ]][[틀:국기| ]] |
신장 | 191cm |
직업 | 배우 |
활동 | 1925년 – 1960년 |
학력 | 그린넬 칼리지 |
종교 | 성공회 → 가톨릭 |
가족 | 아버지 찰스 쿠퍼 (1865. 9. 15 ~ 1946. 9. 18.) 어머니 앨리스 쿠퍼 (1873. 10. 10. ~ 1967. 10. 6) |
배우자 베로니카 쿠퍼(1933년 결혼) (1913. 5. 27. ~ 2000. 2. 16) | |
딸 마리아 쿠퍼 (1937년 9월 15일 ~ ) | |
서명 | |
링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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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할리우드 역사상 손 꼽히는 미남 배우 중 하나이다.
2. 인기 및 위상
현실에선 상류사회 출신으로 평생 고급 취미를 즐겼으며, 세련된 태도로 여성들로부터 엄청난 인기를 얻었지만, 스크린상에선 그와 정반대되는 이미지를 구축했다. 겁먹은 눈빛, 부드러운 말씨와 행동거지가 특징인, 정직하면서도 고독한 미국인의 표상이었다. 게리 쿠퍼의 스크린 속 페르소나는 인생 역경을 세상의 마땅한 이치인양 불평 없이 감내하고 인간미가 넘쳤는데, 이는 현실에선 잘 볼 수 없는 기세를 지니고 야단스럽던 초인 위주였던 기존의 할리우드 남자주인공 상과는 사뭇 달랐다. 존 웨인과 함께 서부극을 상징하며,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2회 수상할 정도로 연기도 호평 받은 명배우이다.활동 당시 미국인들이 얼마나 게리 쿠퍼를 선망의 대상으로 여겼는지는 어빙 벌린이 1929년에 작곡한 Puttin' On The Ritz[1]의 1946년 편곡 가사만 봐도 알 수 있다.
Dressed up like a million dollar trouper
백만장자 배우가 된 것처럼 차려입고
Trying hard to look like Gary Cooper (Super Duper)
게리 쿠퍼처럼 보이기 위해 노력하지
백만장자 배우가 된 것처럼 차려입고
Trying hard to look like Gary Cooper (Super Duper)
게리 쿠퍼처럼 보이기 위해 노력하지
70년대 미국 영화나 드라마 속에서도 쿠퍼의 사망 직전 10대였을 20대 여성들이 "게리 쿠퍼 최고!"를 외치며 건배사하는 장면이 종종 나왔다.
3. 외모 특징
'가장 미국적인 미남'이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할리우드를 대표했던 미남 배우였다. 쿠퍼의 미모에 대한 명성은 특히 현재는 상당수가 유실 영화가 된 20대 시절의 출연작들에서 비롯되었다.미국의 32대 대통령 프랭클린 D. 로저벨트는 사석에서 쿠퍼를 가리켜 "만약 제가 치른 대통령 선거에 그 친구가 나왔다면 여지없이 패하고 말았을 겁니다. 그렇게 생긴 친구는 생전 처음 봤어요. 그리고 그 웃음은 또 뭐라고 표현해야 합니까? 아마 여자 유권자들에게 몰표를 얻었겠죠"라고 평가했다고 한다.[2]
또한 미국의 모 정치인은 "저 배우 너무 잘생긴 거 아냐? 이러다 정치인들 인기 다 떨어지겠군."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4. 생애 및 활동
4.1. 배우 데뷔 전
미국 몬태나주 헬레나(Helena)에서 1901년 5월 7일에 태어났다. 본명은 프랭크 제임스 쿠퍼(Frank James Cooper).부모님은 잉글랜드 이민자 출신으로 헬레나 외곽에 600 에이커, 즉 70만 평이 넘는 대농장을 소유하고 있어서 자연스레 어려서부터 형 아서(Arthur)와 어울리며 승마와 카우보이 기술을 터득할 수 있었다. 아버지 찰스 쿠퍼(Charles Cooper)는 판사로 복무한 법조인이었다.
자식들이 자신들의 뿌리인 영국 문화를 익히길 원했던 어머니 앨리스 쿠퍼(Alice Cooper)의 주도로 초등학생 시절 형과 함께 영국으로 유학을 떠났는데, 이때 학교에서 프랑스어를 익힌 덕에 프랑스어 대사를 소화해내곤 했다. 발음은 프랑스 현지인들도 만족하는 수준이다. 같은 시기에 라틴어도 수학했다. 16살 때 제1차 세계 대전에 미국이 참전하게 되면서 영국에서 돌아왔다.
아이오와에서 리버럴 아츠가 발달한 예술대학 그린넬 칼리지를 다니면서 미술 쪽으로 진로를 갖기로 결심했지만 심각한 교통사고를 당하면서 1920년 여름 학업을 중단하게 된다. 둔부의 부상을 완화 시키기 위해 승마 치료를 시도했는데, 4년 뒤 영화판에 입문할 때 이때 본의 아니게 집중 연마하게 된 승마 실력이 큰 도움이 된다.
졸업 후에는 잠시 신문사에서 정치만평을 그리기도 했지만 돈이 되지 않았다. 아버지가 몬태나주 대법원에서 퇴임하면서 친척의 재산 처분을 돕기 위해 로스앤젤레스로 거처를 옮기게 되자 쿠퍼는 부모님을 따라간다. 이때도 쿠퍼는 여전히 직업 (만)화가로 성공하겠다는 포부를 품고 있었지만 성인으로서 독립적으로 생계를 유지해야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돈벌이에 필사적이었다. 쿠퍼는 1924년 12월 그저 돈을 벌려고 영화에 승마 스턴트맨으로 출연한 것을 계기로 배우의 길을 걷게 된다.
4.2. 영화판 데뷔
길고 늘씬한 쿠퍼는 에이전트 낸 콜린스[3]의 눈에 띄었다. 콜린스는 이미 프랭크 쿠퍼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는 배우가 있음을 지적하며, 콜린스 자신의 고향 이름인 인디애나주 게리(Gary)로 바꿀 것을 제안한다.<The Winning of Barbara Worth>(1926)에 이름도 안 나오는 단역으로 출연했을 때 기회가 왔다. 빌머 뱅키의 구혼자 역 배우가 영화에서 하차하면서 쿠퍼가 크레딧에 세 번째로 이름이 올라가는 위치로 승격됐던 것이다.
파라마운트 픽처스는 쿠퍼를 주급 150 달러에 계약했는데, 파라마운트 소속이었던 당대 최고의 스타 클래러 보우가 쿠퍼를 처음 보고 연애적인 의미에서 맘에 들어하면서 자신의 차기작 <It>(1927)의 작은 역할에 쿠퍼를 꽂아넣는다. "잇걸(It-girl)"이란 용어가 처음 탄생하게 된 바로 그 영화였다. 둘의 연애담이 화제가 되면서 쿠퍼 역시 "잇보이(It-boy)"로 불렸다.
덕분에 쿠퍼는 처음으로 크레딧 최상단에 이름이 올라간 주연작 <애리조나 천지(Arizona Bound)>(1927)를 찍게 된다. 전형적인 카우보이 영웅 역할이었다. 이어 쿠퍼는 보우의 주연작에 다시 한 번 보조역으로 들어가게 되는데, 바로 제1회 아카데미 작품상을 수상한 윌리엄 A. 웰먼 감독의 무성 영화 <날개>(1927)였다. 화이트(White) 생도 역으로 출연한 쿠퍼는 190cm가 넘는 우월한 기럭지와 잘생긴 얼굴로 강한 인상을 남겼다.
유성영화 시대가 도래하면서 쿠퍼는 새로운 연인 루페이 벨레즈[4]와 나온 <Wolf Song>(1929) 등 부분 유성 영화들에 출연하기 시작했다.
4.3. 스타덤
쿠퍼는 드디어 1929년 경력 최초로 전면 유성영화 <The Virginian>에서 서부극 영웅상의 원형을 제시하며 명실상부한 스타덤에 오른다. 악한들이 난무하는 서부를 배경으로 하는 빅터 플레밍 연출의 이 영화에서 쿠퍼는 도덕적 계율에 따라 완고하게 행동하는 한편 동부 출신 교사에게 구애하는 선역을 연기했다.1930년작 <모로코>에서는 세계적인 배우 마를레네 디트리히와 함께 출연했다.
쿠퍼는 프리 코드(Pre-Code) 누아르 <시티 스트리트(City Streets)>(1931)에서 다시 한 번 클래러 보우와 출연할 뻔 했지만, 보우는 스캔들, 대중의 지나친 관심, 과로 등으로 인해 신경쇠약에 걸려 하차하고 만다.[5] 1930년 한 해 동안 주연작을 6편이나 찍으며 장기가 다 상하고 15kg 이상 살이 빠졌던 쿠퍼 역시 과로 누적으로 똑같이 신경쇠약에 걸려 31-32년에 촬영을 쉬며 유럽 상류사회에서 백작부인[6]의 손님으로 있으면서 사교생활을 했다.
파라마운트는 휴식을 끝내지 않으면 탑급 자리를 캐리 그랜트로 영영 교체해버리겠다고 협박해 쿠퍼를 다시 할리우드로 돌아오게 만들었다. 이로 인해 둘이 함께 나온 작품이 <악마와 심해>(1932)다.
한때 쿠퍼는 2년 연속 가장 수입이 많은 스타였고 세금도 가장 많이 냈다.[7] 쿠퍼는 일생동안 크고 작은 역 다 합쳐서 115개의 영화에 출연했는데 (IMDb 기준) 대표작으로는 <요크 상사>와 <하이 눈>, <무기여 잘 있거라>,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등이 있다. 특히 <요크 상사>와 <하이 눈>은 쿠퍼에게 두 번이나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받는 영광을 안겨준다.[8] 가장 미국적인 미남이라는 평가도 프랭크 카프라 감독의 작품에서 구축된 것이 많으며, 결정적으로 <요크 상사>에 출연해 원조 캡틴 아메리카의 모습을 보여주며 제대로 각인되었다.
그 이외에도 <디즈씨 도시에 가다>, <야구왕 루 게릭>으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에 지명되기도 했으나, 아쉽게 후보에 그쳤다.
5. 정치 성향
제1차 세계 대전 당시에는 몬태나주 자신의 가문 소유 목장에서 카우보이로 살았고, 제2차 세계 대전 당시엔 38세라서 징집 대상이 아니었다.#게리 쿠퍼는 그의 아버지처럼, 공화당 지지자였다. 그는 1924년 대선에서 공화당 후보 캘빈 쿨리지에게, 1928년과 1932년 대선에서도 공화당 후보인 허버트 후버에게 투표했다. 또한 1940년 대선에선 웬델 윌키 후보의 캠프에서 선거운동을 도왔다. 프랭클린 D. 루즈벨트가 네번째 임기를 위해 출마했던 1944년 대선에서는 공화당 후보 토머스 E. 듀이의 선거운동을 도왔으며 당시 루즈벨트의 뉴딜 정책을 비판하기도 했다. 1952년 공화당 대선 경선에서는 강한 반공주의와 강경 보수 성향이었던 로버트 A. 태프트 후보를 지지했다.
또한 게리 쿠퍼는 반공주의자였다. 냉전 초기 매카시즘 당시 월트 디즈니 등과 함께 아예 반공 단체를 손수 만들어 미 정부의 할리우드 마녀사냥에 동참했다. 다만 이들은 매카시즘의 창시자 조지프 매카시가 권력을 얻기 위해 조작하여 공산당 몰이를 한 것과 달리 반공 신조를 지키기 위해서 한 것이라 비난의 강도가 적다. 쿠퍼는 할리우드 블랙리스트에 올랐던 <하이 눈>(1952) 작가 칼 포먼과 거리를 두는 걸 거부하기도 했다. <하이 눈>은 매카시즘을 비판하는 의도가 담긴 일종의 우화이기도 했다.
6. 가족
- 아내
뉴욕 사교계에 데뷔하자마자 명사가 된 12살 연하의 베로니카 "로키" 쿠퍼[9]를 1933년 초 파티에서 만났다. 라키가 MGM의 예술 감독이었던 삼촌 세드릭 기븐즈[10]를 방문한 것이 계기가 됐다. 그해 12월 15일 결혼했다. 1930년대에 스키트 사격 캘리포니아 여성 챔피언 등으로 활약한 운동선수여서 라키라는 애칭으로 불렸다.
1933년에 잠깐 샌드라 쇼(Sandra Shaw)라는 활동명으로 배우 일을 한 적이 있다.
- 딸
라키는 1937년 외동딸 머리어 쿠퍼를 출산했다. 화가다. 피아노 연주자이자 작곡가인 바이런 재니스(Byron Janis)와 결혼해 마리아 쿠퍼 재니스(Maria Cooper Janis)가 되었다.
쿠퍼의 장신을 그대로 닮아 훤칠하고 비율이 매우 좋은 편이다.
1999년 Gary Cooper Off Camera: A Daughter Remembers란 회고록을 냈다. 부녀 관계가 좋았던 모양으로 쿠퍼를 따뜻한 시선으로 묘사하고 있다. 서문을 톰 행크스가 썼다.
7. 사생활
폭력 성향이 있던 루페이 벨레즈와의 동거도 1931년에 쿠퍼가 신경쇠약으로 잠시 연기 생활을 쉬게 만든 원인 중 하나였다. 쿠퍼가 휴식을 선언한 뒤 시카고로 떠날 때 뒤쫓아온 벨레즈가 쿠퍼가 탄 기차칸에 총을 몇 발 쐈다는 당시 기사들이 있다.직후 31-32년 사이에 10살 연상의 사교계 명사 카를라 덴티체 디 프라소 백작부인의 호의 하에 유럽 전역을 돌아다녔는데, 당시 둘이 불륜 관계였다는 얘기도 있다.
쿠퍼는 결혼 후에도 많은 염문설이 터져나왔다. 잉그리드 버그먼의 자녀들은 어머니가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1943)를 찍을 때 쿠퍼에게 흠뻑 빠져있었다고 증언하기도 했다.
이러한 쿠퍼의 여성 관계는 1946년과 1947년쯤에는 절정에 이르렀고, 심심하면 언론 지상을 장식했다. 그래도 대부분의 여성들과는 짧은 인연으로 끝났지만, 25살 연하의 여배우 패트리샤 닐과는 꽤나 심각한 사이로 접어들었다. 그녀와는 영화 <마천루>(1949)의 촬영이 끝난 1948년 10월부터 부적절한 관계에 빠지게 되었는데, 닐이 쿠퍼의 아이도 임신했었다. 그러나 로키는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던 관계로 쿠퍼의 이혼 요구에 응하지 않았고 결국 닐은 낙태를 하게 된다. 이 일로 1951년 5월, 쿠퍼와 로키는 별거를 시작했다. 닐은 자살을 시도했지만 목숨은 건졌다. 대신 당분간 병원 신세를 져야만 했고, 그 여파로 이후의 경력도 기대만큼 풀리지 않았다.
1951년 쿠퍼는 그녀에게 성탄절에 모피 코트를 이별 선물로 주며 헤어졌다. 이후 쿠퍼는 유럽에 머물렀으나, 1952년에 다시 패트리샤 닐과 함께 쿠바로 향했고, 쿠퍼의 오랜 절친인 어니스트 헤밍웨이로부터 둘의 관계를 응원 받고자 했지만 실패했다. 그해 패트리샤 닐은 "작은 여우들"을 쓴 극작가 릴리언 헬먼의 파티에서 당시 뉴욕에 살던 작가 로알드 달을 만났고, 1953년에 쿠퍼와 헤어져 달과 결혼해 5명의 아이를 낳고 살다가 1983년에 이혼했다.
쿠퍼는 닐과 헤어진 다음 해인 1954년에 아내 로키와 재결합했다.
1956년엔 스웨덴 여배우 아니타 엑베리와도 염문이 터졌었다.
8. 사망
쿠퍼는 1960년 4월 전립선에 암이 생겼음을 알고 수술을 받았으나, 이미 폐와 뼈로 전이된 상황이었다. 이후 쿠퍼는 요양 생활에 들어갔으나 병세는 좀처럼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쿠퍼가 투병 중이라는 사실은 1961년 4월 17일 절친 제임스 스튜어트가 쿠퍼를 대신해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특별 공로상을 받던 중 "쿠퍼가 위중한 상태다"라고 울먹이면서 알려졌다.쿠퍼는 코앞까지 다가온 죽음을 담대하게 받아들였다고 한다. 펄튼 신[11] 주교의 Peace of Soul를 자주 읽으며 평화를 찾기도 했다.
결국 1961년 5월 13일 쿠퍼의 사망 소식이 보도되었다. 사망 6일 전은 쿠퍼의 생일이었는데, 이때 쿠퍼는 이미 혼수상태에 빠져 있었다. 향년 60세.
쿠퍼의 화려한 장례식을 라이프誌는 왕족의 장례식이라 평했다.
많은 동료들이 추도사를 남겼다.
세계는 지금 가장 아껴온 남자를 잃었다.
존 웨인
존 웨인
그의 힘은 모든 이에게 보다 큰 힘을 주어왔다.
오드리 헵번
오드리 헵번
세계에서 가장 사랑받던 남자.
엘리자베스 테일러
엘리자베스 테일러
그는 죽을 때까지 한번도 자신이 우수한 배우라는 생각을 가져본 일이 없는 사람이다. 나는 죽을 때까지 그보다 더 위대한 배우를 만나 보지 못할 것이다. 그는 항상 사람들이 왜 자기를 좋아하는지를 궁금해 하다가 죽었다.
윌리엄 와일러
윌리엄 와일러
원래 쿠퍼의 유해는 산타 모니카의 거룩한 십자가 묘지[12]에 묻혔으나 유족들과 보다 가까운 롱아일랜드 사우스 햄튼 성심 묘지[13]로 이장되었다. 아내 라키도 사망 후 쿠퍼의 곁에 묻혔다.
9. 주요 출연 작품
- Three Pals, 1926
- Watch Your Wife, 1926
- 몽상의 낙원(The Winning of Barbara Worth), 1926
- 그것(It), 1927
- 아기 엄마(Children of Divorce), 1927
- 애리조나 천지(Arizona Bound), 1927
- 영양마적(The Last Outlaw), 1927
- 네바다의 사나이(Nevada), 1927
- 날개, 1927[14]
- 보오 사브루우(Beau Sabreur), 1928
- 대위의 딸(Doomsday), 1928
- 시험결혼(Half a Bride), 1928
- 라일락 타임(Lilac Time), 1928
- 희망의 배(The First Kiss), 1928
- 팔리지않는 천사(The Shopworn Angel), 1928
- 배반자(Betrayal), 1929
- Wolf Song, 1929
- The Virginian, 1929
- 텍사스 무숙(The Texan), 1930
- 파라마운트 페레이드(Paramount Parade), 1930
- 오직 용기뿐(Only the Brave), 1930
- 모로코(Morocco), 1930
- 7일간의 휴가(Seven Days Leave), 1930
- 약탈자(The Spoilers), 1930
- 와이오밍 사나이(A Man from Wyoming), 1930
- 개척자(Fighting Caravans), 1931
- 시티 스트리트(City streets), 1931
- 잃어버린 포옹(I Take This Woman), 1931
- 화물선과 여자(His Woman), 1931
- 헐리우드는 대소동(Make me a Star), 1932
- 악마와 심해(Devil and the Deep), 1932
- 백만장자라면(If I had a Million), 1932
- 무기여 잘 있거라(A Farewell to Arms), 1932
- 오늘만의 생명(Todaly We Lieve), 1933
- 초연과 장미(Operator 13), 1933
- One Sunday Afternoon, 1933[15]
-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1933
- 삶의 설계(Design for Living), 1933
- 영원한 맹세(Now and Forever), 1934
- 결혼의 밤(The Wedding Night), 1935
- 피터 이벳슨(Peter Ibbetson), 1935
- 어느 벵갈 창기병의 삶(The Lives of a Benegal Lancer), 1935
- 진주의 수사(Desire), 1936
- 디즈씨 도시에 가다(Mr. Deeds Goes to Town), 1936
- 헐리우드 거리(Hollywood Boulevard), 1936
- 장군 새벽에 죽다(The General Died at Dawn), 1936
- 평원아(The Plainsman), 1936
- 바다의 혼(Souls at Sea), 1937
- 마르코 폴로의 모험(The Adventures of Marco Polo), 1938
- 푸른 수염의 여덞번째 아내(Bluebeard's Eighth Wife), 1938
- 목동과 귀부인(The cowboy and the Lady), 1938
- 보 게스티(Beau Geste), 1939
- 새벽의 토벌대(The Real Glory), 1939
- 서부의 사나이(The Westerner), 1940
- 서북 기마 경찰대(North West Mounted Police), 1940
- 존 도우와의 만남(Meet John Doe), 1941
- 요크 상사(Sergeant York), 1941
- 볼 오브 파이어(Ball of Fire), 1941
- 야구왕 루 게릭(The Pride fo the Yankees), 1942
-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1943
- 와셀박사 이야기(The Story of Dr. Wassell), 1944
- 쿠바의 신랑 이야기(Casanova Borown), 1944
- 무숙자(Along Came Jones), 1945
- 사라토가 본선(本線)(Saratoga Trunk), 1945
- 크로크 앤 대거(Cloak and Dagger), 1946
- 버라이어티 걸(Variety Girl), 1947
- 정복당하지 않는 사람들(Unconquered), 1947
- 착한 샘(Good Sam), 1948
- 마천루(The Fountainhead), 1949
- 커다란 감동(It's a Great Feeling), 1949
- 기동부대(Task Force), 1949
- 초연의 달라스(Dallas), 1950
- 해군과 숙녀(You're in the Navy Now), 1951
- 북을 울려라(Distant Drums), 1951
- 콜로라도의 혈전(Springfield Rifle), 1952
- 하이 눈, 1952
- Return to Paradise, 1953
- 황야의 선풍(Blowing Wild), 1953
- Boum sur Paris, 1953
- 베라 크루즈(Vera Cruz), 1954
- 악의 화원(Garden of Evil), 1954
- 우정있는 설복(Friendly Persuasion), 1956
- 하오의 연정(Love in the Afternoon), 1957
- 비밀의 연정(Ten North Frederick), 1958
- 쿠퍼의 분노(Man of the West), 1958
- 황야의 탈출(They Came To Cordura), 1959
- 교수목(The Hanging Tree), 1959
- 6년간의 유혹(The Naked Edge), 1961
10. 여담
- 원래 <The Great Moment>(1944)에 출연하기로 했었지만 파라마운트와 헤어지면서 이 영화에서도 하차해 대신 조울 믹크레이가 기용되었다.
- 평생 소화기관 문제를 앓았다. 민간요법으로 매일 아침 사우어크라우트를 한 캔씩 먹기도 했다.
- 1959년 4월 9일 가톨릭으로 개종했다. 대부는 사진작가인 친구 셜리 버든[17]. 버든은 코닐리어스 밴더빌트의 고조손이며, 당시 아내는 배우 더글러스 페어뱅크스의 조카였다.
- 1941년 3월 3일호 타임지 표지를 장식했다.
- 친구나 동료들 사이에선 쿱(Coop)이라고 불렸다.
- 게리 쿠퍼는 1930년대 초・중반 건강 문제로 의사의 권유에 따라 유럽과 미국을 오가며 치료에만 집중한 시기가 있었는데, 건강이 호전된 후 할리우드 영화업계로 돌아오니, 당시 한창 주가 상승 중이던 케리 그랜트를 예의주시하고 있던 쿠퍼의 에이전트가 우려를 표하자 "재치 있는 코미디언이기는 하지만, 내 경쟁 상대는 절대 안 됩니다."란 답변을 남긴 일화가 있다.
- 할리우드에 진출했던 털룰러 뱅크헤드가 다시 연극계로 돌아오고 몇 년 뒤, 기자들이 할리우드로 갔던 이유를 물었을 때 뱅크헤드가 "쿠퍼와 X을 치기 위해서"였다고 답했던 걸로 알려져있고 매우 뱅크헤드다운 말이지만 출처가 없는 풍문이다. 대신 그 비슷한 말을 한 출처는 있다. 샘 재피[18]의 말에 따르면 뱅크헤드가 "그(쿠퍼)가 너무 좋아. 그와 X을 치고 말 거야"라고 해서 재피가 "너라면 당연히 가능하지"라고 답해줬다고 한다.[19]
- 국내에도 쿠퍼의 영화는 많이 들어왔고 70년대부터 90년대까지도 지상파 방송 주말 영화에서 자주 접했기에 활동 시기가 길다고 착각하기 쉬운데, 사망 연도가 61년이다. 출연작 대부분이 쿠퍼가 죽은 다음에 상영 또는 방송되었다. 그때는 직접 배급, 동시 개봉이 아니라 미국보다 몇 년씩 늦게 들어왔기 때문. 그리고 110편이 넘는 작품 중 국내 개봉작 대부분은 전쟁 영화와 서부극이었고, 손꼽을만큼 적은 스릴러, 멜로 몇몇 작품 외에는 국내에 많이 소개되지 않았다. 무성영화 시대의 끝자락부터 흑백 영화를 거쳐 컬러 시대까지 활동한 배우라서 초기작은 국내 개봉할 이유가 없기도 하다.
- 서부 영화에 많이 나왔는데, 정말로 총을 빠르게 잘 쐈다고 한다. 영화 장면을 봐도 총 뽑는 동작이 빠르다.
- 예술을 전공한 덕에 미술에 조예가 깊어 피카소와 절친한 사이이기도 했다.
- 1938년 전국 극장주들로부터 캐서린 헵번, 메이 웨스트, 에드워드 아놀드(Edward Arnold), 그레타 가르보, 조안 크로포드가 소위 "흥행 독약"으로 지목 받은 사태에서 이들의 반대 예시로 나왔다. 극장주들은 저런 배우들 쓰지 말고 제발 게리 쿠퍼 같은 배우를 써달라고 영화제작사들에게 읍소했다.
-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주인공 레트 버틀러 역은 원래 쿠퍼가 맡기로 되어 있었으나 대본을 본 쿠퍼가 거절했고, 이후 클라크 게이블이 낙점되자 쿠퍼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할리우드 역사상 최악의 실패작이 될 것이다. 그 실패작과 함께 나자빠지게 된 게 내가 아니라 클라크 게이블이라서 다행이다."[20]라고 악담한 적이 있다. 실상은 정반대였다. 이처럼 게이블을 라이벌로 여겼는지 경쟁 의식이 있었다고 한다.
- 앨프리드 히치콕 감독은 <해외 특파원>과 <사보타주>에 쿠퍼가 출연하길 원했으나, 이 역시 쿠퍼가 거절했다. 허나 이후 개봉된 <해외 특파원>을 보고 쿠퍼는 "출연했으면 좋았을 걸." 하고 후회했다고 한다.
- 그레고리 펙은 다양한 역할을 연기하는 것이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오히려 자신처럼 일정 영역의 연기를 꾸준히 하며 관객들에게 연기하는 인물들을 진정으로 믿게 만드는 게 더 중요하다고 봤는데, 그 예시로 쿠퍼를 들었다.
- 화가 중엔 프레드릭 레밍턴(Frederic Remington)과 찰스 매리언 러셀(Charles Marion Russell)을 좋아했다.
- 차를 굉장히 좋아했다. 생전에 자동차 만지기를 좋아했고 세차도 자신이 직접 정성들여 손수할만큼 차에 애정을 쏟았다고 한다.
1939년 호주머니 사정이 좋아지자 당시 최고급 차인 두센버그를 사서 라이프지에게 자랑하는 모습.
2018년 미국 페블비치 옥션에 저 차가 나타났고 2200만 달러에 낙찰됐다고 한다.
- 존 포드 감독과 함께 한 작품은 포드가 조감독으로 참여한 <마르코 폴로의 모험>(1938) 딱 1편뿐이다.
- 그다지 유명한 배우가 아니라 많이 알려지진 않았지만, Geoff Pierson라는 배우가 쿠퍼를 많이 닮았다. 국내에선 <체인질링>에서 불의를 참지 않고 여주인공의 편에 선 강직한 변호사 역으로 유명할 듯. 실제 체인질링 촬영 중 감독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게리 쿠퍼처럼 연기해 줄 것'(Geoff Pierson as the esteemed lawyer with a Gary Cooper-like demeanor.)을 요구하기도 했다.# 또 <J. 에드가>나 <Rules Don't Apply>(2016) 같은 쿠퍼가 왕성하게 활동하던 시대 배경의 영화에 많이 출연하기도 한다.
- 시오노 나나미는 자신이 빌리 와일더가 이탈리아 방송과 인터뷰하는 장면을 시청한 적이 있다며 이를 에세이에 남겼다. 쿠퍼가 여성을 유혹할 때 "설마" "정말?" "처음 듣는 말인데" 이 세 마디면 충분했다고 말한 와일더의 말을 전한 뒤, 그만큼 여성의 말에 경청하는 게 중요한 거라고 해설했다.# 와일더는 실제로 몇 번 이탈리아를 방문한 적이 있지만 이탈리아 사람들은 이에 대해 단 한 명도 관련 글을 남기지 않았는지 혹은 현재까지 전해지지는 않은 건지 이탈리아어로는 위와 관련된 내용을 전혀 찾아볼 수가 없다.
- 어니스트 헤밍웨이와의 우정이 유명하다.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주연배우로 게리 쿠퍼를 강력히 추천한 일화도 있고, 이 둘의 우정을 그린 다큐멘터리 Cooper and Hemingway: The True Gen (2013)도 있다.
[1] 1982년 독일의 뮤지션 타코가 개작하면서 인기를 끌었다.[2] 대통령 같은 최고지도자의 경우 거구가 장점이 되는데, 루스벨트도 쿠퍼 못지 않은 거구(188cm)였지만 소아마비 때문에 부각이 잘 되지 않았다.[3] Nan Collins.[4] Lupe Vélez. 1908 - 1944. 멕시코 출신. 한참 인기를 구가 중이던 30대 중반에 갑자기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5] 이후 1933년 보우는 완전히 은퇴했다.[6] 카를라 덴티체 디 프라소(Carla Dentice di Frasso).[7] 게리 쿠퍼의 라이벌이라 자처한 존 웨인의 탈세 혐의와 대조적.[8] 역대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최다 수상 기록은 2013년까지 2회였다. 쿠퍼 이외에 두 번 수상한 배우는 프레드릭 마치, 스펜서 트레이시, 말론 브란도, 잭 니콜슨, 더스틴 호프먼, 숀 펜 등이 있다. 이후 이 기록은 2013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링컨 그 자체였다는 찬사를 받았던 다니엘 데이루이스가 세 번째 남우주연상을 수상하면서 깨졌다.[9] Veronica "Rocky" Cooper. 결혼 전 성은 발프(Balfe).[10] Cedric Gibbons. 아카데미 미술상에 무려 39번 후보 지명되고 11번 수상했는데 둘 다 아카데미 미술상의 역사상 최고 기록이다. 멕시코 출신의 유명 배우 돌로레스 델 리오의 남편이었다.[11] Fulton Sheen.[12] Holy Cross Cemetery.[13] Sacred Heart Cemetery.[14] 필름릴 길이로 따지면 겨우 60미터 남짓한 2분 30초 정도만 등장한다.[15] 흥행은 성공적이지 않았다. 1941년 라울 월시는 제임스 카그니를 기용해 가벼운 분위기로 개작했는데, 이 <더 스트로베리 블론드>는 흥행에 성공했으며 하스미 시게히코가 좋아하는 영화이기도 하다.[16] Mylene Demongeot. 1935 - 2022. 프랑스 배우로, 섹스 심벌로 유명했다. 삼악의 도론죠가 이 배우에서 모티브를 따왔다.[17] Shirley Burden.[18] Shalom "Sam" Jaffe . 1891 - 1984.[19] Joel Lobenthal의 "Tallulah!: The Life and Times of a Leading Lady"[20] "Gone With The Wind is going to be the biggest flop in Hollywood history. I'm glad it'll be Clark Gable who's falling flat on his nose, not m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