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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3-01-22 03:24:03

구로사와 아키라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주요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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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7년 1978년 1984년
오 사다하루
(야구선수)
코가 마사오
(작곡가)
하세가와 가즈오
(배우)
우에무라 나오미
(산악인)
야마시타 야스히로
(유도선수)
1987년 1989년 1992년
키누가사 사치오
(야구선수)
미소라 히바리
(가수)
지요노후지 미쓰구
(스모선수)
후지야마 이치로
(가수)
하세가와 마치코
(만화가)
1993년 1996년 1998년 2000년
핫토리 료이치
(작곡가)
아츠미 키요시
(배우)
요시다 타다시
(작곡가)
구로사와 아키라
(영화감독)
다카하시 나오코
(마라톤 선수)
2009년 2011년 2012년
엔도 미노루
(작곡가)
모리 미츠코
(배우)
모리시게 히사야
(배우)
일본 여자축구
국가대표팀
요시다 사오리
(레슬링 선수)
2013년 2016년 2018년
다이호 고키
(스모선수)
나가시마 시게오
(야구선수 출신 감독)
마쓰이 히데키
(야구선수)
이초 가오리
(레슬링 선수)
하부 요시하루
(쇼기기사)
2018년
이야마 유타
(바둑기사)
하뉴 유즈루
(피겨 스케이팅 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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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아카데미 시상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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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로상
제62회
(1990년)
구로사와 아키라
외국어 영화상 수상작
제23회
(1951년)
제24회
(1952년)
제25회
(1953년)
르네 클레망
(말라파가의 성벽)
구로사와 아키라
(라쇼몽)
르네 클레망
(금지된 장난)
제47회
(1975년)
제48회
(1976년)
제49회
(1977년)
페데리코 펠리니
(아마코드)
구로사와 아키라
(데르수 우잘라)
장자크 아노
(색깔 속의 흑백)

역대 베니스 영화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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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사자상
제14회
(1950년)
제15회
(1951년)
제16회
(1952년)
앙드레 카야트
(재판은 끝났다)
구로사와 아키라
(라쇼몽)
르네 클레망
(금지된 장난)

역대 베니스 영화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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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사자상
제17회
(1953년)
제18회
(1954년)
제19회
(1955년)
페데리코 펠리니
(비텔로니)
존 휴스턴
(물랑 루즈)
알렉산드르 푸쉬코
(사드코)
엘리아 카잔
(워터프론트)
미조구치 겐지
(산쇼다유)
구로사와 아키라
(7인의 사무라이)

페데리코 펠리니
()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
(여자 친구들)
로버트 알드리치
(빅 나이프)
볼프강 슈타우터
(Ciske de Rat)
샘슨 삼소노프
(Poprigunya)

역대 칸 영화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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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종려상
제32회
(1979년)
제 33회
(1980년)
제34회
(1981년)
폴커 슐뢴도르프
(양철북)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
(지옥의 묵시록)
구로사와 아키라
(카게무샤)

밥 포시
(재즈는 나의 인생)
안제이 바이다
(철의 인간)

역대 영국 아카데미 시상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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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상
제33회
(1980년)
제34회
(1981년)
제35회
(1982년)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
(지옥의 묵시록)
구로사와 아키라
(카게무샤)
루이 말
(아틀란틱 시티)

역대 베를린 국제 영화제
파일:베를린 국제 영화제 로고.svg
은곰상 : 감독상
제8회
(1958년)
제9회
(1959년)
제10회
(1960년)
이마이 타다시
(순애보)
구로사와 아키라
(숨은 요새의 세 악인)
장 뤽 고다르
(네 멋대로 해라)

역대 일본 아카데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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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우수 각본상
제23회
(2000년)
제24회
(2001년)
제25회
(2002년)
이와마 요시키,
후리하타 야스오
(철도원)
구로사와 아키라
(비 그친 후)
쿠도 칸쿠로
(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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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로사와 아키라
[ruby(黒澤, ruby=くろさわ)] [ruby(明, ruby=あきら)]|Akira Kurosaw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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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910년 3월 23일
일본 제국 도쿄도 시나가와구
사망 1998년 9월 6일 (향년 88세)
도쿄도 세타가야구 세이조
국적 일본 파일:일본 국기.svg
수훈 문화공로자 (1976년 수상)
문화훈장 (1985년 수상)
도쿄도 명예도민 (1996년 수상)
국민영예상 (1998년 사후 추서)
종3위 (1998년 사후 추서)
직업 영화 감독, 각본가. 프로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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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체 <colbgcolor=#fff,#1f2023>182cm, B형
학력 케이카 중학교 (졸업)
가와바타 미술학교 (졸업)
활동 기간 1943년 – 1998년
묘소 가마쿠라시 엔요인(安養院)
부모 아버지 구로사와 이사무
어머니 구로사와 시마
배우자 야구치 요코[1]
(1921년 8월 27일 – 1985년 2월 1일; 향년 63세)
(1945년 – 1985년,[2] 사별; 1남 1녀)
자녀 아들 구로사와 히사오 (1945~)
구로사와 카즈코 (1954~)
손자 손자 카토 타카유키 (1977~)
손녀 구로사와 유 (1982~)
}}}}}}}}}

1. 개요2. 생애
2.1. 출발과 전성기2.2. 굴곡과 재부상2.3. 말년
3. 제작 스타일4. 평가
4.1. 단평
5. 일화
5.1. 출연 배우들5.2. 기행5.3. 《8월의 광시곡》 논란5.4. 황당한 청혼5.5. 관동 대지진
6. 여담7. 필모그래피

[clearfix]

1. 개요

일본영화 감독. 오즈 야스지로, 미조구치 겐지, 나루세 미키오와 더불어 일본 영화계의 4대 거장#[3][4]으로 꼽히는 감독이며, 일본 영화계를 넘어서 세계 영화계에 엄청난 족적을 남긴 위대한 영화 감독이다. 세계 영화사에서 절대 빼놓을 수 없는 인물로 미국과 유럽의 수많은 거장들로부터 존경받고 있는 세계 영화계의 거장이다.[5]

2. 생애

2.1. 출발과 전성기

1910년 일본 도쿄 근교에서 태어났다. 본래는 화가를 지망하여 한때 화가로 활동하기도 했으나,[6] 26세에 화가 생활을 접고[7] 오늘날 도호(東宝) 영화사의 전신인 P.C.L 영화제작소에 입사하여 야마모토 가지로(山本嘉次郞) 감독 밑에서 조감독으로 영화 감독의 경력을 시작했다.
파일:external/ojsfile.ohmynews.com/IE000976580_STD.jpg
젊은 시절의 구로사와 아키라

1943년 흑백 영화 스가타 산시로를 통해 영화 감독에 데뷔하였다.[8] 이후 주로 인간적인 휴머니즘을 다룬 《가장 아름다운 자》(1944년), 《우리 청춘 후회 없다》(1946년) 등을 제작하며 도호의 간판 감독으로서 활약했다. 그 후 도호가 공산당 계열의 노조로 인해 노동쟁의가 일어나자 도호에서 퇴사하고 나루세 미키오 등과 함께 '영화예술협회'를 설립, 다이에이 등 타사에서 영화 제작을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이에이와 함께 1950년에 만든 영화 《라쇼몽》이 1951년 베니스 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를 수상하였고, 구로사와 아키라는 일약 세계적인 감독으로 급부상했다.

이 시기,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에 대해서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자 그의 페르소나로 불리는 배우 미후네 토시로와 만났다. 야마모토 가지로의 영화에 오디션을 보러왔다가 떨어진 미후네를 보고서 소위 필이 꽂힌 구로사와가 야마모토를 적극 설득해서 캐스팅했으며 1948년 자신의 영화 《주정뱅이 천사》에 미후네를 캐스팅하여 스타의 반열로 밀어 올렸고 이후 구로사와와 미후네는 찰떡 콤비로 활약하게 되었다. 그리고 1954년, 미후네가 주연으로 활약하였으며 구로사와에게 불멸의 명성을 가져다준 영화 《7인의 사무라이》가 개봉. 이 영화는 베니스 영화제 은사자상을 수상했으며 단순히 한 영화로만 끝난 게 아니라 이에 지대한 영향을 받은 할리우드 감독들에 의해 이후에도 그 아우라를 드리운 작품이기도 하다. 대표적으로 스티븐 스필버그, 조지 루카스 등의 이후 작품에서 그런 모습이 드러났으며, 자세한 사항은 항목 참조.

1957년에는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비극 맥베스를 일본풍으로 바꿔 만든 《거미집의 성》을 만들어 호평을 받았고 1958년에는 《숨은 요새의 세 악인》을 만들어 흥행 성공. 이 성공 이후 아예 독립 프로덕션인 구로사와 프로를 설립하고 1961년요짐보》, 1962년천국과 지옥》 등을 만들며 대감독의 명성을 쌓아 나갔다. 다만 이 독립 프로모션은 사실 구로사와 본인의 의도가 아니라 그에게서 단물만 빼먹고 싶었던 도호의 계산에서 나온 것으로, 《숨은 요새의 세 악인》의 제작 예산이 당초 예상을 훨씬 웃돌자 도호는 구로사와에게 제작비 초과에 따른 리스크를 떠넘기기 위해 독립 프로덕션 설립을 유도한 것. 결국 1965년 개봉한 《붉은 수염》이 촬영 기간과 예산의 대대적인 초과로 인한 불협화음을 빚고 원래부터 계산적이었던 양자의 관계는 극도로 악화되었다.

2.2. 굴곡과 재부상

이 무렵 할리우드에서 감독직 제안이 들어오자 구로사와 아키라는 미련 없이 미국으로 건너가 《폭주 기관차》의 감독을 맡아 작품 제작에 들어갔다. 그러나 원래 각본을 맘에 들어하지 않은 구로사와가 각본을 뜯어고친 데다가 흑백 35mm 촬영을 원한 미국 프로듀서와 컬러 65mm 촬영을 원한 구로사와와의 갈등으로 결국 영화 제작이 무산되었다.[9] 1968년에는 미일 합작으로 진주만 폭격을 다룬 영화 《도라 도라 도라》의 총감독을 맡았지만 미국 측 제작사인 20세기 폭스 사, 일본 측 제작사인 토에이 영화사와 촬영 일정 등의 문제로 대립했고 결국 감독에서 강판되고 말았다.[10] 이때의 정신적 타격에다 다른 여러 가지 문제들이 겹쳐 1970년자살 미수 사건을 일으키기도 했다.

1970년대에 접어들면서 일본 영화는 쇠퇴의 길을 걷게 되었고 구로사와처럼 이미 대감독으로서 명성이 자자한 감독 역시 5년에 한 편이나 영화를 내놓을 수 있을까 말까 할 정도로 여건이 열악해졌다. 이에 그는 1975년 소련으로 건너가 소련과 일본 합작 영화 《데르수 우잘라(Дерсу Узала)》의 제작을 주도하고 감독을 맡았고, 이 영화로 1975년 모스크바 국제 영화제 금 게오르기상(대상)과 1976년 아카데미 외국어 영화상을 수상하면서 다시 재기의 발판을 마련했다.[11] 이후 구로사와는 해외 자본을 끌어와 영화를 만드는 합작 영화 제작 방식으로 예술성에 치중한 여러 작품들을 만드는데 1980년 조지 루카스와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 감독이 프로듀서로 참여해 구로사와에게 제작비를 조달해 준 대작 《카게무샤》(당시 일본 영화 사상 최대의 제작비인 600만 달러가 투입)가 26억 엔의 수익을 올리고 제30회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하며 완벽히 재기에 성공, 화려한 귀환을 알렸다.[12]

2.3. 말년

파일:external/cache5.amanaimages.com/50100271547.jpg
1990년 아카데미 평생공로상 수상 후 조지 루카스 감독(좌측),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우측)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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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05월 10일 칸 영화제에서. 가장 왼쪽의 사나이가 지금 호호 할아버지가 된 마틴 스코세이지인데 보다시피 이때는 꽤 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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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년의 구로사와

1985년에는 프랑스와 합작하여 셰익스피어의 《리어 왕》을 일본풍으로 각색한 영화 《》을 제작, 이 역시 평단의 호평을 받았으며 1990년에는 워너 브라더스가 제작을 맡고 스티븐 스필버그가 프로듀서를 담당한 영화 《》을 만들어 호평을 받았다.

이후 80대에 접어든 90년대에도 《8월의 광시곡[13], 《마다다요[14]를 연출하는 등, 활발히 활동했지만, 차기작 '바다는 보고 있었다'와 '비 그친 후'의 각본을 집필하던 중 교토여관에서 골절에 따른 부상으로 요양 생활에 전념하다 뇌졸중으로 인해 1998년 9월 6일 8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3. 제작 스타일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은 처음에는 저예산 영화를 주로 만들었는데 일례로 초기의 걸작인 《라쇼몽》도 열 명가량의 배우들이 제한된 공간에서 촬영했다. 하지만 점차 그의 영화 제작에 드는 예산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우선 그는 아래에도 서술하는 기행으로 유명한 만큼, 굉장히 까다로운 제작 방식을 고수했다. 일본어 위키백과의 내용에 따르면 1. 타협을 허락하지 않는 연출로 유명하고, 2. 몇 개월에 걸쳐 진행하는 배우들의 연기 리허설은 물론, 3. 스태프들과 배우들을 대기시키면서 연출 의도에 따른 적절한 날씨를 며칠씩 기다리기도 했으며, 4. 카메라가 찍히지 않는 곳까지도 세심하게 디테일에 신경 썼던 건 기본. 거기다 말을 빌리지 않고 몇십 마리를 통째로 구입해 장기간 다시 조교하고 사용했다든가 촬영지의 민가가 방해된다는 이유로 예산으로 사들인 뒤 철거를 강요하기도 했다. 여러 개의 카메라를 동시에 돌려 촬영한다는 멀티캠 수법까지도 사용했다.

이들 모두 돈이 무수하게 들어가는 일로 7인의 사무라이 이후 블록버스터급 영화들의 제작비는 예산 초과는 기본이었고 이에 일본 내에서 제작비를 조달하기 어렵자 해외 자본을 끌어들이는 데 적극 나서게 되었다. 참고로 이에 관련된 일화로,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은 그의 손으로 고지라 영화를 만들고자 평생 스폰서를 구했지만 실패했다.[15] 그 발단은 어떤 배우가 구로사와에게 "감독님도 한번 고지라 같은 거 찍어보시면 어때요?"라고 농담 삼아 묻자 구로사와는 "한번 만들어볼까?"라고 대답한 것으로 시작했는데, 나중에 도호의 촬영소장이 그 이야기를 듣고 "구로사와 씨가 진지하게 고지라를 만들면 도호가 망할지도 모른단 말야!"라며 다시는 그런 이야기를 하지 말라는 주의를 줬다고 한다.(고지라는 도호가 판권을 가진 작품이다.)

한편 영화 제작의 신기술 도입에 적극적이긴 했지만 특수촬영(특촬)에 대해서는 심드렁했다. 상술한 도호의 '고지라'에 대해서도 긍정적으로 평가하긴 했지만 도호의 장기였던 미니어처 세트 촬영에 대해선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그러나 후기 작품인 《란》과 《꿈》에서는 미니어처 세트 촬영과 특촬 기술을 도입하기도 했다.

세계적인 거장이긴 했지만 카게무샤가 대박 나기 전까지만 해도 일본 영화계에서는 천덕꾸러기 신세였다. 그가 제작하는 영화의 제작비와 규모가 너무 커서 일본 영화계에서는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 카게무샤의 경우도 결국 미국에 건너가 조지 루카스,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의 도움으로 20세기 폭스사의 제작비 지원을 받아 완성되었다고 한다. 그 덕분에 일본 영화 개봉 금지 시절 "미국 자본으로 만들어진 영화로서 미국 영화(?)로" 개봉하려고 한 바 있었다. 그러다 무산되고 결국, 일본 영화 개방 후 국내 정식 개봉된 두 번째 일본 영화(1998년 12월)가 되었다. 원래 첫 개봉작으로 예정되었으나, 프린트를 다시 뜨는 작업에 시간이 걸려 버려, 기타노 다케시 감독의 'HANA-BI'에 최초 개봉의 영광(?)을 넘겨주었다. 영화적인 완성도나 인기는 카게무샤 쪽이 더 높지만 정작 감독 본인은 후속작인 을 위한 서막 정도로 생각했다고. 실제로 두 영화는 인간성에 대한 불신이나 허무주의 같은 테마를 공유하고 있다. 란 쪽의 테이스트가 너무 지독해서 문제지만…[16]

4. 평가

구로사와 아키라는 세계 영화사에서 그 이전까지 존재하지 않았던 서사 전개 방식과 영화적 테크닉을 만들어낸 천재적인 예술가이다. 《7인의 사무라이》에서 여러 명의 히어로가 동일한 하나의 목표를 위해 뭉친다는 서사 구조를 처음으로 보여주었으며, 《라쇼몽》에서는 그 이전까지 과거 회상의 기능으로만 사용되었던 플래시백이라는 영화 테크닉을 영화사상 처음으로 개별적인 인물들이 자기 입장에서 주장하는 주관적인 스토리로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도 했다. 또한, 《요짐보》에서는 정의로운 목적이 아니라 자신의 이득을 챙기기 위해 행동하는 인물이 정의로운 결과를 가져오는 스토리를 보여줌으로써 '안티 히어로'라는 캐릭터성을 처음으로 만들어낸 인물로 평가받기도 한다. 뿐만 아니라 《숨은 요새의 세 악인》에서는 주요 캐릭터가 아닌 두 농부의 시점에서 스토리가 시작되어, 주요 캐릭터의 이야기로 서서히 전환되는 서사 기법을 보여주었는데, 이에 깊은 영향을 받은 조지 루카스스타워즈 에피소드 4에서 이러한 서사 기법을 따라했다. 이처럼 70~80년대의 할리우드는 구로사와 아키라의 유산이라고 일컬어질 정도로 미국 영화계에도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17] 뉴욕 대학교 영화과에서는 감독의 이름을 딴 감독론 수업이 단 네 개만이 개설되어 있는데, 그 네 명의 감독이 앨프리드 히치콕, 존 포드, 루이스 부뉴엘 그리고 구로사와 아키라이다.

또한 구로사와 아키라의 영화는 영상의 회화적인 미학성으로 꼽히며 특히 독특한 색채와 구도의 시각적 표현으로 많은 사람들을 사로잡았다. 서양화가 생활을 한 경력 덕인지 그의 영화에는 화면 속의 운동감, 회화적인 색채감, 구조가 매우 뛰어나다. 기타노 다케시는 구로사와 아키라의 영화에서 아무 장면이나 정지시켜 놓아도 그 자체로 완벽한 사진이 된다고 감탄하기도 했으며, 로버트 알트만은 '구로사와 아키라 영화의 움직임과 구도는 나에게 클래식 음악의 베토벤이다.'라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또한 적절한 몽타주, 롱테이크를 통해 관객들의 몰입도를 높이는 것 역시 특징으로 특히나 《쓰바키 산주로》, 《천국과 지옥》에서 보여준 자연물을 통한 인물의 성격, 내적인 심리 변화, 상황의 분위기를 전달하는 연출이나 뛰어난 운동감은 높은 평가를 받는다.

한편으로 그의 영화에 보편적으로 흐르는 주제는 인간에 대한 깊은 통찰에서 오는 휴머니즘 의식이다. 순수함에 대한 본질을 찾으려는 노력이 아낌없이 드러나며 공감을 불러 일으킨다는 평가. 예를 들면 《라쇼몽》같은 경우 끝없이 비극적인 상황을 펼쳐주다 마지막에 이르러 희망적인 낙관을 하게끔 만드는 엔딩은 그 백미로 꼽히며 소위 시대극에 있어 매우 독특한 서사 구조를 남겼다. 물론 이는 비단 시대극뿐만 아니라 현대물에서도 드러나는데 특히 세대 간의 갈등, 반전 영화에서도 자주 나타난다. 또한 쿠로사와 아키라의 영화들은 어느 문학 작품 못지않게 인간이란 무엇이고 삶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과 본질적인 질문을 던지는데, 《살다》에서 삶의 의미를 상실한 어느 말단 공무원이 이야기라든가, 《카게무샤》에서 타인을 흉내 내다가 정작 자신의 본질을 상실해 버린 인간의 모습 등에서 구로사와 아키라 영화의 깊이를 느낄 수 있다.

구로사와 아키라의 영화는 할리우드의 감독들에게도 엄청난 영향을 주어, 그에게 깊이 감명받았음을 항상 언급했던 조지 루카스는 스타워즈 에피소드 4를 만들면서 구로사와의 《숨은 요새의 세 악인》의 스토리를 거의 베끼다시피 했으며, 구로사와 아키라의 사무라이 영화에 대한 오마주를 캐릭터나 오프닝, 엔딩 등에서 드러낼 뿐만 아니라, 일부 쇼트는 그대로 컷바이컷으로 베끼다 싶을 정도로 자신의 영화에 따오며, 구로사와 영화로부터 받은 영향력을 숨김없이 드러냈다. 이외에도 윌리엄 프리드킨의 《프렌치 커넥션》의 전철 장면은 구로사와의 《천국과 지옥》의 기차 시퀀스를 참고했다고 하며, 스티븐 스필버그는 《미지와의 조우》에서 《거미집의 성》의 한 장면을 따라했고, 《레이더스》에서는 인디아나 존스의 얼굴이 드러나지 않고 뒷모습만 보이는 장면을 《요짐보》에서, 《쉰들러 리스트》의 컬러 부분은 《천국과 지옥》에서, 《라이언 일병 구하기》에 나오는 오마하 해변의 전투 신 중 자신의 팔이 절단된 팔을 들고 있는 남자의 샷은 《》의 전투 신에서 영감을 받은 것이라고 본인이 직접 언급하였다. 아울러 피터 잭슨은 《반지의 제왕: 두 개의 탑》에서 전투신 중에 활을 당기는 장면을 《7인의 사무라이》에서 활을 당기는 장면에서 따왔다고 하며, 톰 크루즈 주연의 《라스트 사무라이》에서도 여러 장면들이 구로사와의 영화에서 인용되어 온 것들이다. 뿐만 아니라 최근으로 오면 조스 웨던어벤져스를 감독할 때 《7인의 사무라이》를 당연히 참고했다고 한다.[18]

이탈리아의 영화 감독 세르조 레오네는 구로사와 아키라의 《요짐보》를 무단으로 표절하여 스파게티 웨스턴이라는 장르의 효시로 평가받는 데뷔작 《황야의 무법자》[19]를 만들기도 했다. 세르조 레오네는 《황야의 무법자》가 《요짐보》를 리메이크한 것이라고 주장했지만, 사실 구로사와 아키라의 동의를 전혀 구하지 않은 무단 번안이었고, 구로사와 아키라의 영화를 컷 바이 컷으로 도장 찍듯이 베낀 수준이었기에, 말썽이 되자 결국 흥행 수입의 15%를 구로사와 감독에게 주고 구로사와는 이 영화가 리메이크라는 것을 동의하는 것으로 타협을 보았다고 한다.[20] 여담이지만 지금은 사라진 영화 관련 사이트 nKINO에서 칼럼니스트 김정대가 쓴 세르조 레오네 관련 칼럼에 따르면 구로사와가 《황야의 무법자》를 본 뒤 세르조 레오네에게 "당신의 영화를 재미있게 잘 보았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제 영화더군요." 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고 하는데, 이 편지를 받은 레오네는 환호하면서 주변인들에게 "구로사와가 내 영화를 재밌게 봤대!" 라고 자랑했다고 한다.(…) 또한 같은 칼럼에 따르면 결국 표절 판결이 난 뒤 흥행 수입의 15%가 아니라 《황야의 무법자》의 아시아 배급권을 넘겨주는 쪽으로 결론이 났으며 여기에는 아이러니하게도 구로사와가 《요짐보》로 번 돈보다 《황야의 무법자》로 번 돈이 더 많았다는 후일담이 덧붙여진다. 그리고 《요짐보》는 이후 월터 힐 감독의 《라스트맨 스탠딩》을 통해 정식으로 리메이크되기도 했다. 한편 《7인의 사무라이》도 존 스터지스 감독의 서부극 《황야의 7인》으로 리메이크된 바 있다. 영화 연구자들은 서부극의 역사는 존 포드의 정통 서부극에서 시작되어 구로사와 아키라의 사무라이 영화를 거쳐, 세르조 레오네의 수정주의 서부극(소위 말하는 '스파게티 웨스턴')으로 넘어갔으며, 이를 다시 쿠엔틴 타란티노를 비롯한 90년대 미국 헐리우드 감독들이 영향을 받았다고 말한다.

다만 세계적인 거장임에도 정작 일본 내에서는 그 독선적인 스타일 때문에 여러 영화 관계자와 마찰을 빚었으며 당시 영화 제작자나 감독에 대한 낮은 인식도 한몫하여 상당히 무시당했다고 전해진다. 그에게 직접적으로 비난을 하던 인물[21]도 있었고 심지어 일본 영화 관련 기구가 그를 부정적으로 보며 해외 영화제 시상을 딴지 걸던 일까지 있었을 정도라고 한다.

특히 1950년대라쇼몽》이 비평에서 대박을 거두고 《7인의 사무라이》가 흥행과 비평으로 세계적 대박을 거둘 때조차도 그는 제작자들에게 별별 모욕을 다 당했는데 일례로 《라쇼몽》 같은 경우 제작사인 다이에이의 대표 나가타 마사이치가 계속 제작비를 아끼라며 끼어들고 영화 내용이 도대체 뭔지 모르겠다며 악평만 늘어놓는 통에 스스로 제작을 포기하려다가 참았으며,[22] 영화를 다 만들고 나서도 "(나가타)저놈을 확 두들겨 패줄까" 하는 생각까지 했다고 한다. 참고로 《라쇼몽》은 등장인물이 10명도 안 되고, 배경도 한정한 나름 저예산 영화였다. 그런데 항상 구로사와를 혹평하던 나가타는 정작 라쇼몽이 베니스 영화제 그랑프리와 아카데미상 외국어 영화상을 수상하며 유명세를 타자, "내가 없었더라면 이 영화가 있을 수 있었겠느냐?" 라는 투로 자신의 공로를 자랑하는 데 바빴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당연히 구로사와의 기분은 아주 나쁠 수밖에 없었다. #

이외에도 《7인의 사무라이》 역시 제작비 문제로 일부 수정을 가할 수밖에 없어서 매우 안타까워하기도 했다. 이쪽은 제작자들이 아주 "당신 영화계에서 아주 매장시킨다?" 라는 식으로 협박을 하면서 끼어들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고. 게다가 목과 손목을 그어 자해하며 자살 파동을 일으킬 당시, 일본의 극우파 중 일부에게도 정신 나간 감독이라고 억울하게 까이기도 했었으며 이후 한동안 해외 자본의 투자를 받아 영화를 만들 때도 일본 영화계에서 단지 이국적인 요소들에 인상을 받고 상을 주었다는 등의 비판이 끊이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1986년 BBC 인터뷰 1990년에 한국의 월간 영화 잡지 로드쇼에서 게재된 인터뷰에서 "해외에서도 알아주는 감독님이신데 일본에서는 뭔가 어려운 점이 있었나요?" 라는 질문에 "해외에서만큼, 아니 그 절반이라도 일본에서도 인정했더라면 더욱 좋을 텐데 말이죠." 라고 대놓고 말했을 정도이다.[23]

다만 구로사와 아키라의 이런저런 불만과 달리 실제로 그가 일본 국내에서 거장으로서의 대우를 제대로 못 받았던 것은 아니다. 1976년에는 일본 정부로부터 문화 공로자로 선정되었고, 1985년에는 영화 감독으로서는 최초로 문화훈장을 수상하였으며, 비록 사망한 이후에 받기는 했지만 국민영예상(1998년에 14호)을 수상하는 등, 일본 국내에서도 거장으로서의 대우를 꾸준히 받은 영화감독이었다.

구로사와는 아시안위크와 CNN이 선정한 '예술문학문화' 부문에서 '세기의 아시아인'으로 선정되며 20세기에 아시아의 발전에 가장 크게 기여한 다섯 명의 사람들 중 한 명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4.1. 단평

구로사와 아키라는 우리 시대의 그림이 포함된 윌리엄 셰익스피어이다.
스티븐 스필버그#

구로사와는 영화의 진수 중 하나였다. 비전을 강력한 예술 작품으로 바꾸는 그의 능력은 비할 바 없다.
조지 루카스#

'거인'이라는 용어는 예술가를 묘사하는 데 너무 자주 사용된다. 하지만 구로사와 아키라의 경우, 이 용어가 들어맞는 드문 예 중 하나다.
마틴 스코세이지#

대부분의 감독들은 그들의 알려져 있는 걸작 하나를 가지고 있다. 구로사와에게는 적어도 8개나 9개가 있다.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

펠리니, 구로사와, 부뉴엘타르콥스키와 함께 영화 예술의 가장 높은 신전에 서있다.
잉마르 베리만#

5. 일화

5.1. 출연 배우들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작품에는 대개 주성치 사단처럼 같은 배우가 계속 나왔다. 상술한 대로 그의 페르소나 관계의 인물로 불린 미후네 토시로(16작품)가 그 필두로 보통 미후네는 건달 깡패 떠돌이 사무라이 등 강자 역할을 맡으며 얼굴과 이름을 알렸다. 하지만 붉은 수염을 이후로 둘은 작품을 같이 하지 않게 된다. 그 후론 미후네 토시로와 나올 때 주로 조연으로 나온 나카다이 타츠야가 구로사와 아키라의 페르소나로 나온다. (카케무샤, )

한편 가장 많은 작품에 출연한 배우는 《7인의 사무라이》와 《살다》에서 명연을 펼친 시무라 타카시로 무려 21작품이며 그는 보통 스승, 지도자, 나약한 인간을 맡았다. 이외에는 《백치》, 《나쁜 놈일수록 잘 잔다》와 《라쇼몽》의 모리 마사유키나 초중기 작품 모두에서 주요 조연을 맡은 지아키 미노루, 히다리 보쿠젠 등이 있다. 보다 자세한 사항은 참조.

5.2. 기행

구로사와 아키라의 영화 관련 기행은 거미집의 성 등 일본에서 활동하던 적에도 유명했지만 할리우드 진출작인 《도라 도라 도라》에서 극에 달했다.[24]
파일:external/basementrejects.com/throne-of-blood-1957-movie-review-ending-arrows-taketoki-washizu-toshiro-mifune-akira-kurosawa-600x300.jpg

사실 이 자체는 촬영상의 트릭으로, 사실 화살은 한참 옆에 날아가는 것인데 촬영 각도로 바로 옆에 맞는 것처럼 속인 것이고, 화살을 낚시줄로 고정해서 날아가는 방향을 정했기 때문에 미후네 토시로가 진짜로 화살에 맞을 일은 없었다. 하지만 그래도 진짜 화살이 날아오는 상황인지라 미후네 토시로는 도저히 진정할 수 없었고 결국 '실감 나는 연기'를 해버렸다. 하지만 집에 돌아가서 혼자서 술을 마시던 중에 촬영 시의 생각이 떠오르자 술김에 칼을 들고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자택에 찾아가서 차로 빙빙 돌면서 "구로사와 바보!"라고 소리쳤다는 증언이 있다. 당시 사건은 도호에서 유명한 전설로 남아있다고 한다. #

5.3. 《8월의 광시곡》 논란

《8월의 광시곡》(八月の狂詩曲 Rhapsody In August, 1991년)은 구로사와 감독의 작품 중에서 동서양을 막론하고 비평가들과 평화운동가들에게 혹평을 받은 유일한 작품이다. 덧붙여서 이 영화는 1991년 칸 영화제에 출품되었지만 그 어떤 상도 수상하지 못했다.[27] 이 영화의 줄거리는 나가사키의 피폭자 친척을 일본계 미국인(리처드 기어 분)이 방문하여 미군의 잔인한 원폭 투하에 대해 죄책감을 느낀다는 내용이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 그려지는 일본인 피폭자들에 대해서는 홀로코스트 피해자처럼 묘사한 반면, 전쟁의 원인이나 일본군의 잔혹 행위에 대해선 일언반구도 없다는 것. 때문에 이 영화만 보면 미국만 나쁜 놈이고 일제는 그런 미국을 용서해 주는 대인배로 착각할 수밖에 없다.

이는 이 영화의 1년 전에 개봉한 전작 《》에서 나오는 한 에피소드에 2차 대전 당시 옥쇄를 명령하지만 부하들은 죄다 죽게 하고 홀로 살아남은 장교가 일본으로 돌아오던 길에 부하들의 원령이 나타나 절규하고 원망하는 모습을 보이자 그 장교가 울면서 사죄하며 "미안하다! 전쟁을 일으킨 우리가 미쳤다."고 말하는 장면이 담겨 있었던 것과는 너무나 대비되어 한국 비평가와 관객들에게서 충격과 공포 수준으로까지 받아들여졌다. 본인 역시 이 영화에 대해서는 언급을 꺼려 이 엄청난 돌변에 당시 한국 영화 기자가 인터뷰에서 "《꿈》을 만들고 극우파에게 살해 협박이라도 받아서 이렇게 만들었나요?"라는 비꼬는 듯한 질문을 하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을 정도.[28]

다만 이 영화에 대해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은 '전쟁은 정부, 국가들 사이의 것으로 민중들과는 무관한 것이라고 말하고 싶었다.'고 밝힌 바 있다.#

5.4. 황당한 청혼

1945년, 제2차 세계 대전에서 패망이 짙어지자 일본인들은 집단 자살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 시기에 구로사와 아키라는 자신의 2번째 감독작 가장 아름다운 자(一番美しく)의 주연 배우인 여배우 야구치 요코에게 청혼했는데 그 청혼문이 실로 황당하기 그지없어 전설로 회자되고 있다.
"일본이 패전할 것 같다. 만일 일본 국민 전체가 집단 자살해야 한다면, 우리 역시 죽어야 해. 죽기 전에 결혼 생활이 어떤지 경험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그런데 놀랍게도 이 어이없는 편지가 효력을 발휘하여 두 사람은 결혼에 골인했고, 부부는 1985년 야구치 요코가 사망할 때까지 39년을 별 탈 없이 해로했다.구로사와의 자살 기도는 예외로 치고

주변 증언에 따르면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적극적인 대시로 결혼까지 골인했다고 하며, 부부 사이의 금슬은 매우 좋았다 한다. 야구치 요코는 결혼 후 배우로서는 은퇴했지만 대외적으로 구로사와 기요란 본명 대신 야구치 요코란 예명을 계속 사용했었다. 그녀는 남편이 영화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구로사와뿐만 아니라 그 밑의 직원들의 도시락까지 싸는 극진한 내조를 했다고 하며, 그래서 구로사와 아키라 주변인들이 대모라는 별명으로 불렀다 한다. 딸 구로사와 카즈코 증언에 따르면 아버지 구로사와 아키라가 유일하게 꼼짝 못 했던 사람이 어머니였다고.

구로사와가 외국에서 기념품으로 아내를 위해 옷을 사 왔는데 옷이 크다며 "영감은 나랑 같이 산 세월이 얼만데 아직 내 치수도 모르시오."라고 구박당한 적도 있다 한다.

5.5. 관동 대지진

1923년 일본 관동 지방에서 발생한 대지진은 구로사와 아키라의 집안에도 직격탄을 날렸다. 집은 무너져 내렸고, 혼란 중에 그가 살던 마을에도 조선인들이 범죄를 저지르고 다닌다는 루머가 돌아 집집마다 보초를 내기에 이르렀다.

이에 구로사와의 형은 비웃음을 보내며 보초에 나가지 않으려 했기에, 어쩔 수 없이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이 죽도를 들고 보초로서 나갔는데, 엉뚱하게도 고양이 한 마리나 겨우 드나들 수 있는 하수관에 조선인들이 드나들 수 있다는 이유로 보초로 배치되었다.

하루는 어른들이 마을 우물을 사용하지 못하게 했고, 우물에 조선인들이 독을 탔다며 그 증거로 흰색 분필로 쓴 수상한 기호를 지목했는데, 그것은 당시 13살이던 구로사와가 이전에 아무 의미 없이 끄적거린 낙서였다고 한다. 관련 기사

조선인들을 잡아 죽이기 위해 결성된 자경단은 수염을 기른 사람[29]을 무조건 조선인으로 지목하고 뒤쫓았는데, 구로사와의 아버지도 수염을 길렀기 때문에 일가족이 미친 자경단에게 포위당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구로사와의 형은 무리를 비웃고 있었고, 어린 아키라는 겁에 질려 벌벌 떨고 있을 때, 아버지가 그들을 에워싼 무리를 향해 '바보 자식들!' 이라고 호통치자 어리둥절한 자경단은 하나둘씩 사라졌다고 한다.

이 유년 시절 기억이 인간의 존재에 대해 생각[30]해 보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6. 여담

파일:Kurosawa and John Ford.jpg
존 포드 감독의 1958년작 Gideon of Scotland Yard 촬영장에서의 구로사와 아키라 아내 야구치 요코와 함께.

7. 필모그래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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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로사와 아키라 감독 장편 연출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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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번역은 모두 국내 개봉명 혹은 수입명을 따른다. 다만 공동 감독을 맡았으나 후에 자신의 이름을 빼달라고 요구한 明日を創る人々(미국 개봉명 Those Who Make Tomorrow)의 경우 국내 번안 제목이 확인되지 않아 임의 번역으로 기재한다.
한국 제목 원 제목 개봉년도
스가타 산시로 姿三四郎 1943
가장 아름다운 자 一番美しく 1944
속 스가타 산시로 續姿三四郎 1945
호랑이 꼬리를 밟은 사나이 虎の尾を踏む男達 1945
우리 청춘 후회 없다 わが青春に悔なし 1946
내일을 만드는 사람들 明日を創る人々 1946
멋진 일요일 素晴らしき日曜日 1947
주정뱅이 천사 醉いどれ天使 1948
조용한 결투 静かなる決闘 1949
들개 野良犬 1949
추문 醜聞 1950
라쇼몽 羅生門 1950
백치 白痴 1951
살다 生きる 1952
7인의 사무라이 七人の侍 1954
산 자의 기록 生きものの記録 1955
거미집의 성 蜘蛛巣城 1957
밑바닥 どん底 1957
숨은 요새의 세 악인[36] 隠し砦の三悪人 1958
나쁜 놈일 수록 잘 잔다 悪い奴ほどよく眠る 1960
요짐보 用心棒 1961
츠바키 산주로 椿三十郎 1962
천국과 지옥 天国と地獄 1963
붉은 수염 赤ひげ 1965
도데스카덴 どですかでん 1970
데르수 우잘라 デルス・ウザーラ 1975
카게무샤 影武者 1980
1985
1990
8월의 광시곡 八月の狂詩曲 1991
마다다요 まあだだよ[37] 1993


[1] 야구치 요코는 배우로서 예명이고 처녀 적 이름은 가토 기요, 호적상 이름은 구로사와 기요[2] IMDb에선 1945년 5월 21일 결혼했다고 나오고, 일본어 위키백과에선 1945년 3월경에 결혼했다고 나온다.[3] 구로사와 아키라는 일본 영화계의 천황이라는 별칭으로 불리기도 했다. 그만큼 일본 영화계에서도 독보적인 지위를 지니고 있는 감독이었던 것이다. 사실 이 별칭은 한편으로는 촬영 현장에서의 독재자스러운 모습을 비꼰 것이기도 했지만, 원래 구로사와뿐만 아니라 영화감독 중에는 촬영 현장에서 독재자스러운 모습을 보이는 감독들이 많다. 감독의 어원부터가...[4] 한편 스탠리 큐브릭도 영화계 최후의 군주라는 비슷한 별명을 가지고 있었다.[5] 스티븐 스필버그, 마틴 스코세이지, 조지 루카스,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 우디 앨런 (우디 앨런은 '리어왕'을 영화로 옮긴 구로사와 아키라의 '란'을 보고 나서 "셰익스피어를 찍을 수 있는 감독은 구로사와밖에 없다."고 평한 바 있다.# 또한 "당신은 왜 젊은 사람들을 싫어합니까?"라는 인터뷰어의 질문에 "내가 왜 구로사와 아키라가 누군지도 모르는 (젊은) 사람들과 친하게 지내야 합니까?"라고 답한 적도 있다.), 잉마르 베리만, 안드레이 타르콥스키,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 로버트 알트만 등등, 전세계의 수많은 거장들로부터 존경받고 있는 "거장들의 거장"이다.[6] 가와바타 미술학교 출신으로 1928년에는 일본의 미술가 단체 중 하나인 이과회(二科会)에서 개최한 이과전(二科展) 회화 부문에서 입선하기도 했다. 그 후 일본 프롤레탈리아 미술가 동맹에 참여했는데 이때 프롤레탈리아 화가이자 서양 화가인 오카모토 토키에게 그림을 배웠다고 한다.[7] 완전히 손을 뗀 건 아니고, 취미+스토리보드용으로 계속 그렸다. 감독으로써 명성이 생긴 이후로는 그의 그림이 영화 포스터에 쓰이기도 할 정도. 화풍은 본인이 좋아했던 빈센트 반 고흐를 위시한 인상파야수파의 영향을 받은 모습을 보인다.[8] 이 영화는 흥행에서 대히트했을 뿐만 아니라 일본의 영화 전문 잡지 '영화평론'에서 실시한 1943년도 우수 영화 전형에서 2위를 차지했을 정도로 평단의 호평도 받았다.[9] 후에 이 영화는 안드레이 콘찰롭스키 감독에 의해 완성되었다. 줄거리는 두 죄수가 탈옥을 감행하여 기차에 올랐다가 그 기차가 폭주하는 바람에 생기는 일을 다루는데, 구로사와는 영화가 시작하면 이미 기차가 폭주하고 있고 그 상황에서 점차 인물들의 사정이 밝혀지는 구조를 원했었으나 안드레이 감독의 손으로 완성된 영화는 그냥 두 죄수가 탈옥하는 부분부터 차근차근 따라간다.[10] 이후 구로사와 대신에 투입된 일본 쪽 감독은 한국에서는 《배틀로얄》로 유명한 후카사쿠 킨지 감독이다.[11] 다만 외국어 영화상 수상국은 일본이 아니라 소련이 받았다.[12] 카게무샤의 배급 수익은 당시 일본 영화 역대 1위를 기록했다.[13] 이 영화는 그 내용으로 인해 논란에 휩싸이기도 했다[14]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유작이며, 일본 작가 우치다 햣켄의 삶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다.#[15] 이 일화는 로버트 슈네이큰버그의 '위대한 영화감독들의 기상천외한 인생이야기'에서 고릴라오역되었지만 그 일러스트는 누가 봐도 고지라이므로 고지라를 잘못 번역한 것이 확실하다.[16] 란은 인간성을 처참히 부정하는 배드 엔딩으로 끝마치는 영화라 셰익스피어의 리어왕보다도 인간성을 더 비관적으로 파고든 작품이라고 평가받는다.[17] 70~80년대에 할리우드의 두 번째 전성기를 이끌었다고 평가받고 있는 미국의 영화감독들은 젊은 시절 구로사와 아키라의 영화에 매료되어, 구로사와 아키라의 영화를 보면서 영화를 공부한 세대다.[18] 출처 글 두 영화 모두 서로 다른 여러 인물이 한데 모여서 공동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힘을 합친다는 스토리이기 때문에 어벤져스를 7인의 사무라이의 히어로 버전이라 봐도 큰 무리는 없을 것이다.[19] 그래서 흔히 《황야의 무법자》를 역사상 가장 유명한 표절작이라고 부른다.[20] 단, 일각에선 구로사와가 동의한 적은 없다고 주장하기도 한다.[21] 일본의 영화 평론가 하스미 시게히코는 진정한 일본인들의 삶의 모습을 표현하지 않았다면서 구로사와 아키라를 다른 일본 감독들과 비교해서 깎아 내리기도 했다.[22] 나가타는 라쇼몽 시사회 도중 자리를 박차고 나가버리는 만행을 저지르기도 했다...[23] 다만 해외에서 인정받은 거장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조차도 생전에 아카데미상 작품상 노미네이트는 되지 못했고 감독상은 <란>으로 노미네이트가 되긴 했지만 받지 못했다. 아카데미상의 경우 20세기에는 외국어 영화에 작품상을 허용하지 않았을 정도로 백인 영화 감독들이 만든 백인들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에 지나치게 경도(傾倒)되어 있었기 때문이다.#[24] 사실 구로사와는 《콰이강의 다리》, 《아라비아의 로렌스》, 《닥터 지바고》 등으로 유명한 데이비드 린 감독과의 공동 프로젝트인 줄 알고 승낙한 것인데 막상 와보니 데이비드 린은 구로사와를 끌어내기 위한 미끼였고, 애초에 '도라 도라 도라'와는 전혀 무관계하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즉 구로사와는 20세기 폭스사로부터 사기 계약을 당한 것이다.[25] 촬영 시작, 종료를 알리는 소품[26] 당시 촬영 장면을 보면 근거리에서 스태프들이 직접 화살을 쏜 것으로 보인다.[27] 다만 해외에서의 혹평과 달리 일본 국내에서는 일본 아카데미상 우수 작품상, 우수 감독상을 수상하는 등, 그럭저럭 준수한 평가를 받았다.[28] 당시 한국의 영화 월간지 로드쇼에서도 1990년 칸 영화제 특집 기사 때 구로사와의 영화 에 대해서 엄청 크게, 호의적으로 기사를 실어 주었던 거랑 달리 8월의 광시곡에 대해서는 비판 일색의 기사를 내보냈다.[29] 당시 조선인들은 대부분 면도를 하지 않았다.[30] "어른들의 행동이 이러하거늘 나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도대체 인간이란 어떻게 된 존재인지 의아해하지 않을 수 없었다."[31] 간혹 구로자와라고 표기하는 매체가 있지만, 구로사와가 맞다. 여담으로 같은 성을 쓰고 있는 영화감독 구로사와 기요시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남남이다.[32] 2022년 1월 기준 일본 남성 평균이 170cm이다.[33] 이웃집 토토로구로사와 아키라가 가장 좋아하는 영화 100선에도 포함되었다. 애니메이션 영화로서는 유일하다.[34] 참고로 이 작품은 타카하타 이사오가 감독이었다. 물론 스튜디오 지브리 작품이긴 하다.[35] 미야자키 하야오는 이에 대해 구로사와의 발언이 만약 사실이라면 그가 실사 영화와 비교해서 애니메이션을 낮잡아 보는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에 자신은 구로사와의 말에 반대한다는 입장을 보였다.#[36] 조지 루카스스타워즈의 스토리라인을 이 영화에서 대부분 가져왔다.[37] 직역하자면 "아직이야"란 뜻인데 숨바꼭질에서 "아직 다 안 숨었다."라는 뜻으로 외치는 구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