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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안 마리아 볼론테

지안 마리아 볼론테의 주요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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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니스 국제 영화제 명예 황금사자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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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603b35><colcolor=#fff> 지안 마리아 볼론테
Gian Maria Volonté
파일:gianmariavolonte.jpg
출생 1933년 4월 9일
이탈리아 왕국 밀라노
사망 1994년 12월 6일 (향년 61세)
그리스 플로리나
국적
[[이탈리아|]][[틀:국기|]][[틀:국기|]]
묘지 이탈리아 사르데냐 라 마달레나 마달레나 섬 묘지
신체 키 182cm, 눈동자 녹갈색
직업 배우
영화 데뷔 1960년 영화 '위장함 X호의 최후'
활동 1960년1994년
학력 실비오 다미코 국립 극예술원
가족 딸 조반나 볼론테(1961년생)
링크 파일:IMDb 로고.svg

1. 개요2. 생애
2.1. 어린 시절2.2. 경력2.3. 정치 활동2.4. 사생활
3.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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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탈리아의 배우. 다양한 인물로 완벽하게 변신하는 뛰어난 연기력과 노골적인 좌파 성향으로 유명하다. 세르조 레오네 감독의 서부극 《황야의 무법자》 (1964)와 《석양의 건맨》 (1965)에 악역으로 출연하여 세계적인 명성을 날렸다.

70년대에는 이탈리아 영화사는 물론 세계 영화사에 한 획을 긋게 되는데 마르코 벨로키오, 엘리오 페트리, 프란체스코 로시 감독의 정치 영화에 주연으로 출연했다. 특히 1972년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공동 수상한 엘리오 페트리 감독의 《천국으로 가는 노동계급》과 프란체스코 로시 감독의 《마테이 사건》, 2편의 영화에서 모두 주연이었다. 줄리아노 몬탈도, 타비아니 형제, 질로 폰테코르보 감독과도 작업했으나 한국에는 이 쪽 작품이 개봉된 것이 없다. 정치 지향적인 다큐멘터리를 몇 편 감독하기도 했다.

장 피에르 멜빌 감독의 《암흑가의 세 사람》 (1970), 엘리오 페트리 감독의 《완전 범죄 (Indagine su un cittadino al di sopra di ogni sospetto)》 (1970)도 그의 대표작.

다비드 디 도나텔로 남우주연상을 2회, 은 리본상 남우주연상을 3회 수상했고, 1983년 칸 영화제에서 《마리오 리치의 죽음 (La mort de Mario Ricci)》으로 남우주연상을, 1987년 베를린 국제 영화제에서 《모로 사건 (Il caso Moro)》으로 은곰상을 수상하였다. 프란체스코 로시 감독은 그가 "캐릭터의 영혼을 훔쳤다"고 말했고 줄리아노 몬탈도 감독은 “그를 보면 배우라는 직업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1991년 제48회 베니스 국제 영화제에서 평생공로상을 받았고, 테오 앙겔로풀로스의 1995년 영화 《율리시즈의 시선》 촬영 중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볼론테의 무덤은 그의 유언에 따라 사르데냐 섬 라 마달레나의 작은 공동묘지에 있다. 묘석에는 생전에 그의 요트에도 새겨져 있던 폴 발레리의 <해변의 묘지> 싯구가 새겨져 있다 (“Le vent se lève! . . . il faut tenter de vivre!).

2. 생애

2.1. 어린 시절

볼론테는 밀라노에서 태어났지만 토리노에서 자랐고 스스로 토리노 사람이라고 여겼다. 그의 어머니 카롤리나 비안키는 부유한 밀라노 사업가 집안 출신이었고 아버지 마리오 볼론테는 파시스트 장교였다. 마리오는 2차대전 종전 후 재판을 받아 30년 형을 선고받고 1946년 11월부터 1954년 8월까지 약 8년 동안 복역했다. 어머니 카롤리나는 방을 세놓고 귀중품을 팔아 살림을 꾸려갔다. 마리오는 1960년 4월에 과실치사죄로 재수감되어 복역하다가 건강상의 이유로 석방되었고 1961년 토리노에서 폐암으로 사망했다.

불안정한 가정 상황 속에서 볼론테는 열네 살에 학업을 포기했다. 1950년 프랑스에서 몇 달간 사과 따는 일을 한 후 이탈리아로 돌아와 토리노의 연기 학교 Studio Drammatico Internazionale I Nomadi 에 다녔다. 이 시기에 알베르 카뮈장폴 사르트르의 작품에 매료되었고 1951년, 토리노 I Nomadi 극단의 장 아누이의 《안티고네》로 처음 정식 무대에 섰다. 그 뒤로 몇 개의 극단을 거친 볼론테는 1954년에 이탈리아 최고의 연기 교육기관인 실비오 다미코 국립 극예술원에 입학했다. 이 학교에서 오라치오 코스타에게 많은 영향을 받았고, 볼론테는 후에 그에게서 텍스트를 분석하고 캐릭터를 파악하는 법을 배웠다고 술회했다. 3년 과정의 이 학교에서 볼론테는 처음에는 두드러지지 않았으나 곧 두각을 나타냈고, 3학년이 되자 교사들은 자신들이 천재를 상대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한다. 그러나 볼론테가 이 학교를 정식으로 졸업했는지는 확실치 않다. 문서 상 기록이 없으며, 몇 몇 동료들은 그가 퇴학당했다고 기억한다. 이 학교는 재학 중 외부 활동을 금지했는데, 경제적으로 너무나 곤궁했던 볼론테는 외부의 작품에 출연했고 이 때문에 퇴학당한 것으로 생각된다.

2.2. 경력

실비오 다미코 국립 극예술원을 떠난 뒤 볼론테는 여러 극단과 TV에서 활동했다. 첫 TV 연기는 장 라신의 비극을 원작으로 한 《페드라》 (1957)의 이폴리토 역이었다. 1959년에는 표도르 도스토옙스키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TV 드라마 《백치》에 출연했다. 이 작품은 크게 성공했고 로고진 역을 맡은 볼론테의 연기도 주목을 받았다.

1959년에 볼론테는 트리에스테에서 사뮈엘 베케트의 《크랩의 마지막 테이프》 이탈리아 초연에 연출자이자 배우로 참여했다.

1964년에는 유태인 학살에 대한 교황 비오 12세의 침묵을 비판하여 이미 베를린에서 세계 초연 당시 스캔들을 일으켰던 롤프 호흐후트의 《신의 대리자》를 로마의 소극장에서 무대에 올리려고 시도했다. 경찰은 공공 질서를 이유로 공연을 막았고, 결국 《신의 대리자》는 낭독의 형태로 발표되었다.

볼론테는 1960년에 이탈리아/미국 합작 전쟁 영화 《위장함 X호의 최후 (Under Ten Flags)》로 영화에 데뷔했다. 비평가들의 호평을 받은 타비아니 형제의 첫 장편 극영화 《Un uomo da bruciare》 (1962)로 영화 첫 주연을 맡지만 이 영화는 배급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 1964년, 금전적인 이유로 출연한 세르조 레오네 감독의 《황야의 무법자》는 세계적인 히트작이었다. 이 영화는 '자국산' 작품에 대한 대중의 불신을 피하기 위해 제목과 포스터에 미국 영화를 연상시키는 이름을 사용했다. 악역을 맡은 볼론테는 존 웰스라는 이름으로 표시되었다.

주연으로서 볼론테의 대중적 성공은 1964년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의 서거 4백 주기를 기념하기 위해 제작된 RAI 방송국의 3부작 TV 시리즈 《미켈란젤로의 생애》에서 미켈란젤로 역을 맡으면서부터였다. 실베리오 블라시 감독은 1963년에 연출자와의 의견 차이로 RAI의 《죄와 벌》에서 하차한 후 TV에서 배척되고 있던 볼론테를 관계자들의 조언을 뿌리치고 캐스팅했다.

1965년에는 《석양의 건맨》의 악역 엘 인디오 역을 맡았다. 볼론테는 스파게티 웨스턴 장르의 다른 영화, 다미아노 다미아니 감독의 《장군에게 총알을 (Quién sabe?)》 (1966), 세르조 솔리마 감독의 《장고, 피의 향연 (Faccia a faccia)》 (1967)에도 출연했고, 《장군에게 총알을》은 사파타 웨스턴 (멕시코 혁명을 소재로 정치적 메시지를 담은 스파게티 웨스턴)의 효시로 여겨진다.

비토리오 가스만과 함께 출연한 마리오 모니첼리 감독의 《브랑칼레오네 원정대 (L'armata Brancaleone)》 (1966)은 볼론테의 몇 안 되는 코미디 영화로, 이탈리아 영화사에 남는 대 히트작이었다.

레오나르도 샤샤의 원작 소설을 영화한 《시칠리아의 음모 (A ciascuno il suo)》 (1967)는 볼론테의 경력에서 중요한 분기점이었다. 총 4편을 함께 한 엘리오 페트리 감독과의 첫 협업이었으며 은 리본상 남우주연상을 수상하며 이탈리아 영화계의 중요한 배우로 떠올랐다.

1967년 가을, 실베리오 블라시 감독은 볼론테를 TV 시리즈 《카라바조》의 카라바조 역으로 캐스팅했지만 방영되는 과정에서 RAI의 검열 개입이 있었고, 이에 블라시와 볼론테는 사법부에 압류 신청서를 제출하며 대응했다. 이 논란으로 인해 볼론테는 1982년까지 16년 넘게 다시는 TV에 출연할 수 없었다.

실화를 소재로 한 《밀라노의 강도 (Banditi a Milano)》 (1968)는 상업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었고 이탈리아 범죄액션 영화 (poliziotteschi)의 선구적인 작품으로 여겨진다.

제작자 마리나 치코냐의 부름을 받은 볼론테는 《어느 날 밤의 만찬 (Metti, una sera a cena)》 (1969)에서 맥스 역을 맡는 계약을 체결했다. 출연료는 그 때까지 받은 최고 금액인 6천만 리라였다. 그러나 볼론테는 첫 리허설 후 배역을 포기했다. 선급금은 돌려주었지만 다른 배우를 찾기 위해 기다리는 동안 촬영 시작이 막혔다는 이유로 제작진에게 고소당했다. 언론과 영화계의 공격을 받은 볼론테는 나중에 자신의 입장을 명확히 밝힐 수 있었고, 자신들의 이익만 추구하는 사람들에게 이용당할까 봐 더 유리한 계약 (디노 데 라우렌티스와 2년 동안 영화 4편)도 포기했다고 밝혔다.

마리나 치코냐와의 분쟁은 치코냐가 세 편의 영화가 포함된 새로운 계약을 볼론테와 체결하면서 해결되었다. 이 계약에는 장피에르 멜빌 감독의 《암흑가의 세 사람》 (1970)과 엘리오 페트리 감독의 영화 두 편이 포함되었고 《완전범죄》 (1970) 에서 그의 가장 유명한 연기를 하게 되었다. 1970년 칸 영화제 심사위원 대상, 1971년 아카데미 외국어 영화상 수상작인 엘리오 페트리 감독의 《완전범죄》 (1970)는 많은 사람들이 볼론테의 최고작으로 꼽는다. 자신의 정부를 살해하고 현장에 고의로 증거를 남기는 파시스트 경찰 간부 역을 맡은 볼론테의 연기도 절찬을 받았으며 볼론테는 이 작품으로 다비드 디 도나텔로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다.

볼론테는 제1차 세계대전 배경의 반전 영화 《반대하는 자들 (Uomini Contro)》 (1970)로 프란체스코 로시 감독과 처음 작업하게 된다. 로시 감독과는 총 5편의 영화를 함께 하며 《마테이 사건 (Il caso Mattei)》 (1972), 《그리스도는 에볼리에서 멈추었다 (Cristo si è fermato a Eboli)》 (1979) 등 여러 대표작을 남겼다.

말년에는 주로 이탈리아 밖에서 영화를 찍었다. 1994년 테오 앙겔로풀로스 감독의 《율리시즈의 시선》을 촬영하던 중 그리스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했고 그가 맡았던 역할은 엘란드 요셉손에게 돌아갔다.

2.3. 정치 활동

볼론테는 연기 경력 외에도 노동자의 권리를 위해 수많은 시위, 파업에 참가했고 주세페 피넬리에 관한 다큐멘터리 제작에 참여하는 등 격렬한 정치 활동가로도 활동했다. 그는 친 공산주의 성향으로 유명해서 미국 입국 비자는 물론, 멕시코로 가는 도중의 통과 비자조차 나오지 않을 정도였다. 1981년에는 자신의 요트를 이용해 공산주의자인 오레스테 스칼초네가 체포를 피해 이탈리아에서 탈출하는 것을 도왔다.

볼론테는 1977년까지 이탈리아 공산당의 당원이었다. 1975년 6월 16일, 볼론테는 라치오의 지역 의원으로 선출되었지만 6개월 만에 사임했다: "저는 공산주의에 대한 저의 욕구와 그들이 제안하는 정치 경력 사이에 괴리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들은 저를 기능인, 즉 당파주의에 얽매인 정치적 동물로 만들고자 했습니다. 저는 연구, 비판, 민주주의가 필요했습니다. 저는 제 정체성을 잃어가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제 자신과의 관계를 선택했습니다."

1992년 선거에서 이탈리아 공산당의 후신인 좌파 민주당의 후보로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2.4. 사생활

볼론테는 1959년에 배우인 티치아나 미스키와 결혼했으나 1960년 연극 《로미오와 줄리엣》에서 공연한 카를라 그라비나와 사랑에 빠졌다. 그라비나는 1961년에 딸 조반나를 낳았고, 볼론테가 유부남이었기 때문에 조반나는 어머니의 성을 따를 수 밖에 없었다. 볼론테와 미스키는 이탈리아에서 이혼법이 제정된 뒤 71년에야 정식으로 이혼했다. 볼론테와 그라비나는 1968년경까지 파트너였으나 그 사이에도 볼론테는 《Summit》 (1968)에서 공연한 미레이유 다르크 등 여러 여자와 관계가 있었고 결국 그라비나가 볼론테를 떠났다. 그 뒤 볼론테는 배우/각본가/감독 아르메니아 발두치와 동거하다가 1983년에 결혼했고 죽을 때까지 이혼하지 않았지만, 마지막 동반자는 안젤리카 이폴리토였다.

볼론테는 1980년 3월 21일에 종양 때문에 왼쪽 폐 전절제술을 받았다. 수술은 성공적이었으나 보험 문제 때문에 몇 년간 영화 일을 하기 어려웠고 우울증에 빠진 볼론테는 죽을 때까지 우울증에서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했다. 또한 수술 후에도 담배나 술을 끊지 않았는데 이는 그의 비교적 이른 죽음에 영향을 주었을 가능성이 높다.

볼론테는 바다를 사랑했고 요트도 가지고 있었다. 요트 이름은 사르데냐 섬의 마을 이름을 딴 Arzachena 였다. 또한, 요리하는 것을 좋아하고 뛰어난 요리사였지만 운전은 싫어했다고 한다.

동생 클라우디오는 젊은 시절에 형과는 정반대의 파시스트 성향을 보이다가 나중에는 전향했다. 클라우디오도 배우로 일했으나 1977년에 술에 취한 상태에서 살인을 저질렀고, 구금 중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3. 여담

* 한국에서는 보통 지안 마리아 볼론테로 표기되나, 국립국어원 외래어 표기 원칙을 따르면 잔 마리아 볼론테라고 표기해야 한다.
* 볼론테가 존경한 사람은 안토니오 그람시, 베르톨트 브레히트, 주세페 디 비토리오였다.
* 로리 갤러거가 볼론테의 팬이었다.
* 볼론테는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의 《대부》,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의 《1900년》 과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 페데리코 펠리니의 《카사노바》 출연 제의를 거절했다.
* 1972년 칸 영화제에서 엘리오 페트리 감독의 《천국으로 가는 노동계급 (La classe operaia va in paradiso)》와 프란체스코 로시 감독의 《마테이 사건 (Il caso Mattei)》이 공동으로 황금종려상을 수상했지만 두 편 모두 주연을 맡았던 볼론테는 남우주연상을 받지 못했고 “특별 언급”에 그쳤는데, 볼론테가 심사위원단에 보낸 전보 때문이라는 의견이 있다. 이 전보에서 볼론테는 영화제 규정 개정을 촉구하고 이탈리아에서 있었던 배우 피에르 클레망티의 마약 소지 혐의 투옥과 좌파 배우 루 카스텔의 추방을 비난했다.
* 2004년에 볼론테의 사망 10주기를 맞아 로마 시는 Casale di Nei 구역의 새로티생긴 거리를 그에게 헌정했다 (Via Gian Maria Volonté).
* 2011년에 볼론테의 이름을 딴 영화예술학교가 설립되었다 (Scuola d’Arte Cinematografica Gian Maria Volonté).
* 볼론테가 마지막으로 살았던 벨레트리 시는 2012년에 시립 극장을 리모델링 후 재개관하면서 그의 이름을 붙였다 (Teatro Artemisio-Volonté di Velletri).
* 2016년에 토리노 시는 Osasco 거리와 Spalato 거리 사이의 광장을 그에게 헌정했다 (Piazzale Gian Maria Volont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