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모에 미러 (일반/어두운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08-20 19:27:35

코가 마사오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0;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814d12, #b38b46 30%, #b38b46 70%, #814d12);"
{{{#fff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1977년 1978년 1984년
오 사다하루
(야구선수)
코가 마사오
(작곡가)
하세가와 가즈오
(배우)
우에무라 나오미
(산악인)
야마시타 야스히로
(유도선수)
1987년 1989년 1992년
키누가사 사치오
(야구선수)
미소라 히바리
(가수)
지요노후지 미쓰구
(스모선수)
후지야마 이치로
(가수)
하세가와 마치코
(만화가)
1993년 1996년 1998년 2000년
핫토리 료이치
(작곡가)
아츠미 키요시
(배우)
요시다 타다시
(작곡가)
구로사와 아키라
(영화감독)
다카하시 나오코
(마라톤 선수)
2009년 2011년 2012년
엔도 미노루
(작곡가)
모리 미츠코
(배우)
모리시게 히사야
(배우)
일본 여자축구
국가대표팀
요시다 사오리
(레슬링 선수)
2013년 2016년 2018년
다이호 고키
(스모선수)
나가시마 시게오
(야구선수 출신 감독)
마쓰이 히데키
(야구선수)
이초 가오리
(레슬링 선수)
하부 요시하루
(쇼기기사)
2018년 2023년
이야마 유타
(바둑기사)
하뉴 유즈루
(피겨 스케이팅 선수)
쿠니에다 신고
(휠체어 테니스 선수)
}}}}}}}}}}}}

<colcolor=#ffffff>
こが まさお
古賀 政男
코가 마사오 | Koga Masao
파일:코가 마사오.png
<colbgcolor=#262b3e> 출생 1904년 11월 18일
후쿠오카현 오카와시[1]
사망 1978년 7월 25일 (향년 73세)
도쿄도 시부야구
학력 선린상업학교 (졸업)
메이지 대학 (상학 / 학사)
직업 작곡가, 기타리스트, 만돌린 연주자
활동기간 1931년 ~ 1978년
레이블 일본 콜럼비아
테이치크 엔터테인먼트
빅터 레코드

1. 개요2. 생애3. 사후4. 대표작

[clearfix]

1. 개요

일본작곡가이자 기타리스트로, 일본 쇼와 시대 당시 5,000곡 이상을 작곡하여 가요계의 큰 발전에 기여한 인물이다.

2. 생애

1904년 11월 18일, 후쿠오카현에서 8형제 중 여섯째로 태어났다. 그러나 5세 때 아버지가 사망하며 가세가 급격히 기울자 2년 후 가족들과 맏형이 일하고 있는 일제강점기 조선으로 건너가 초기에 인천부에서 생활하다가 경성부에 정착해 생활했다.

이 때 재종으로 부터 일본의 악기 중 하나인 '다이쇼고토 (大正琴)'[2]를 받아 악기를 처음 접했고, 이후 중학교 3학년 때 넷째형으로부터 만돌린을 소개받아 이 때부터 음악계에 입문하기로 마음을 먹게 된다고

선린상업학교를 졸업한 뒤 귀국하여 오사카의 상점에 취업해 근무하였고 메이지 대학에 입학해 1923년 만돌린 클럽 창설에 참여하였다.[3] 1929년 대학교 졸업 이후에도 만돌린 클럽의 지휘자가 되어 음악활동을 이끌었고, 그 해 6월 정기 연주회에서 자체적으로 만든 왈츠곡인 '影を慕いて' (그림자를 쫓아)라는 노래를 발표하였는데 이 곡에 지난 1928년 정기 연주회에서 같이 활동을 시작한 가수 사토 치야코 (佐藤 千夜子)[4] 가 제작에 참여하여 당대 최고로 불린 가수의 연주자로 참여하는 영광을 누리기도 했다.

이듬해인 1930년 '影を慕いて' (그림자를 쫓아)와 '日本橋から' (니혼바시에서)라는 곡을 발표할 때 사토 치야코가 부르고 이번에는 코가 마사오가 단독으로 만돌린을 연주하기도 했다. 또한 1931년 일본 콜럼비아의 전속 작곡가로 영입되어 본격적인 음악활동을 시작했다. 그러나 처음 영입제의가 들어왔을 때 막상 자신이 없어 문예반을 지원했지만 콜럼비아의 강력한 의지로 작곡가로 영입되었다고 한다. 이 때 마침 도쿄음악학교에 재직 중이던 후지야마 이치로를 만나 듀엣으로 활동을 시작했는데 후지야마 이치로의 가창력과 음색이 코가 마사오의 연주실력이 어우러져 코가 마사오의 재능을 한 층 업그레이드 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조선에서 살며 민요를 많이 접했고 원시적 엔카(艶歌)에 한국민요를 결합하여 1920년대부터 술은 눈물인가 한숨인가(酒は淚か溜息か)', '그림자를 사모하여(影を慕いて)' 등을 내놓으며 현대적 엔카(演歌)를 창시했다.##

1938년 외무성 음악친선사절로 하와이아르헨티나를 방문하였으며, 이 때 NBC에 코가의 작품이 15분에 걸쳐 소개되기도 하였다.

1958년 일본작곡가협회를 창설, 초대 회장에 취임하여 일본 레코드 대상을 제작하기 시작하였다. 이 후 1978년 6월 17일 자신이 창설한 메이지 대학 만돌린 클럽 제102회 정기연주회 지휘를 마지막으로 그 해 7월 25일, 자택에서 급성 심부전으로 세상을 떠났다.

3. 사후

4. 대표작

'影を慕いて' (그림자를 쫒아) [5]
'丘を越えて' (언덕을 넘어) [6]


[1] 출생 당시 미즈마군 다와구치촌[2] 기타와 가야금, 아코디언을 섞은 형태로 보인다. 현악기와 건반악기를 혼합한 케이스로 쇠로 만든 다섯개의 줄을 숫자가 적혀있는 건반을 누르며 튕기면 소리가 나는 방식이다. 통통 튀는 맑은 소리로 만돌린과 비슷한 소리가 난다.[3] 이 동아리는 1924년 5월 31일 우에노 자치회관에서 제1회 연주회를 개최하였고, 당시의 전통이 현재까지 이어져 2023년 창설 100주년을 눈 앞에 두고 있다고 한다.[4] 1897년 ~ 1968년, 도쿄 행진곡을 대표작으로 활동했던 가수로서 도쿄음악학교를 졸업하고 이탈리아에 유학하여 성악을 전공한 유학파로 신여성으로 불린 인물이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도 상당히 비슷한 행적을 보인 가수가 있었는데, '사의 찬미'를 부른 윤심덕이다. 이 둘은 학력과 행적 등에서 상당히 비슷한 점이 많았지만 윤심덕1929년 향년 29세로 요절했고, 사토 치야코는 40년 뒤인 1968년 사망했지만 말년에도 사기와 절도 행각을 일삼으며 따가운 눈초리를 받기도 했다[5] 1931년 작, 위 영상은 코가 마사오 본인이 직접 노래를 불렀다.[6] 1931년 작, 위에서 설명했던 메이지 대학 만돌린 클럽의 연주와 코가 마사오의 지휘, 후지야마 이치로의 노래로 방송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