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뤽 고다르의 주요 수상 이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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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위원상 | ||||||||||||||||||||||||||||||||||||||||||||||||||||||||||||||||||||||||||||||||||||||||||||||||||||||||||||||||||||||||||||||||||||||||||||||||||||||||||||||||||||||||||||||||||||||||||||||||||||||||||||||||||||||||||||||||||||||||||||||||||||||||||||||||||||||||||||||||||||||||||||||||||||||||||||||||||||||||||||||||||||||||||||||||||||||||||||||||||||||||||||||||||||||||||||||||||||||||||||||||||||||||||||||||||||||||||||||||||||||||||||||||||||||||||||||||||||||||||||||||||||||||||||||||||||||||||||||||||||||||||||||||||||||
제66회 (2013년) | → | 제67회 (2014년) | → | 제68회 (2015년) | ||||||||||||||||||||||||||||||||||||||||||||||||||||||||||||||||||||||||||||||||||||||||||||||||||||||||||||||||||||||||||||||||||||||||||||||||||||||||||||||||||||||||||||||||||||||||||||||||||||||||||||||||||||||||||||||||||||||||||||||||||||||||||||||||||||||||||||||||||||||||||||||||||||||||||||||||||||||||||||||||||||||||||||||||||||||||||||||||||||||||||||||||||||||||||||||||||||||||||||||||||||||||||||||||||||||||||||||||||||||||||||||||||||||||||||||||||||||||||||||||||||||||||||||||||||||||||||||||||||||||||||||||||
고레에다 히로카즈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 → | 장뤽 고다르 (언어와의 작별) 자비에 돌란 (마미) | → | 요르고스 란티모스 (더 랍스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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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colcolor=#fff> 장뤽 고다르 Jean-Luc Godard | |
출생 | 1930년 12월 3일 |
프랑스 파리 | |
사망 | 2022년 9월 13일 (향년 91세) |
스위스 홀르[3] | |
국적 | [[프랑스| ]][[틀:국기| ]][[틀:국기| ]] | [[스위스| ]][[틀:국기| ]][[틀:국기| ]][4] |
신체 | 170cm |
직업 | 영화감독, 영화 평론가, 각본가, 배우 |
활동 | 1954년 ~ 2022년 |
데뷔 | 1954년 영화 '콘크리트 작전' |
학력 | 소르본 대학교 (인류학 / 중퇴) |
부모 | 아버지 파울 고다르[5] 어머니 오딜 모노[6] |
배우자 | 안나 카리나 (1961~1965) 안 비아젬스키[7](1967~1979) 안마리 미비유[8](1971~2022 / 사실혼) |
친척 | 이종사촌 페드로 파블로 쿠친스키 |
서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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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세상엔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이 있다. 보이는 것만 찍으면, 당신은 TV 영화를 만들 뿐이다."[9][10]
"Il y a le visible et l'invisible. Si vous ne filmez que le visible, c’est un téléfilm que vous faites."
"Il y a le visible et l'invisible. Si vous ne filmez que le visible, c’est un téléfilm que vous faites."
프랑스의 영화감독, 영화 평론가.
누벨바그의 핵심 인물로, 여러 혁신적인 업적과 시도로 영화 혁명가라 불린다.
누벨바그의 카예 뒤 시네마 출신 감독 5명 중 마지막 생존자이자[11] 2022년까지 활동한 유일한 누벨바그 멤버였다. 그러나 2022년 9월부로 스위스에서 조력 자살로 생을 마감했으며 이로써 누벨바그 사조의 중추적인 인물 5인이 모두 사망하게 되었다.
2. 소개
일생에 걸쳐 영화의 최전방에 서서 영화란 무엇이고 무엇이어야 하는지를 자신이 만드는 영화 그 자체를 통해 열변을 토했다. 또한 현대 영화의 시작점으로 평가받기도 한다.[12]
영화는 영화라는 이름을 가진 고유의 예술 장르이고, 그것은 문학적 가치가 있는 이야기를 깔끔하고 명료하게 잘 표현하는 것이 아닌, 오로지 영화만이 할 수 있는 표현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13] 그래서 카메라와 음향을 통해 다른 예술 장르로 할 수 없는 표현들을 만들기 위해 무한한 실험을 했다. 고다르가 수행한 영화의 문학으로부터의 독립, 혹은 혁명을 짧은 글로 자세히 설명할 수 없지만, 요약하자면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이와 같은 이유로 고다르 영화를 이해할 수 없다는 사람들이 많다. 정규 교육을 받아온 사람이라면 문학적 관습을 벗어나야만 느낄 수 있는 그의 영화를 누구나 무의식적으로 받아들이기 어렵기 때문이다.
장뤽 고다르는 "영화를 만들기 위해 필요한 것은 여자와 총이 전부다."라고 말했다. 사실 고다르의 초중기 영화에는 치정 문제가 줄거리에 나오거나, 총이 소품으로 등장하는 게 많다. 그러나 후기에 오면서는 항상 최전위에 서있는 사람답게 영화의 형식뿐만 아니라 소재 면에서도 매우 다양화하여 영화사를 영화로 만든다거나, 팔레스타인 문제를 다루는 등의 시도를 했다. 전반적으로 후기로 갈수록 아카이브 푸티지를 활용하거나 에세이 영화적인 성향이 강해지는 편이다.
3. 일생
그는 부유한 파리지앵의 가정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그에게 독일의 낭만시, 이해하기 어려운 프랑스 소설들을 읽게 했다. 2차 대전 동안은 스위스의 가족 저택에서 지냈다. 전후 파리로 돌아온 그는 시네마테크 프랑세즈를 중심으로 한 영화 클럽에 가입했다. 프랑수아 트뤼포나 클로드 샤브롤, 앙드레 바쟁, 에릭 로메르 등과 같은 사람들을 만나 영화에 대해 이야기를 많이 했다. 이들은 3년간 약 2천여 편이 넘는 영화를 보며, 열띤 토론을 볼였다. 오후 내내 영화를 다섯 편이나 보면서, 각 장르마다 스타일과 형식을 이해하려 노력했다.[14] 그리고 자기가 분석한 걸 카이에 뒤 시네마에 기고했다.원래 카이에 뒤 시네마라는 영화 잡지의 평론가였다. 집세를 내기 위해 친척들이나 동료 직원들의 돈을 훔쳤다. 이 때문에 고다르의 아버지는 보석금으로 아들을 꺼내서 잠시 정신 요양원에 보냈고, 그는 이 사건으로 부유한 집안과 결별하게 된다.
그 뒤로 스위스의 댐 공장에서 일했다. 사람들에게 많이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이 댐 공장에서 일할 때 찍은 영화가 그의 첫 영화 '콘크리트 작전(Operation Beton, 1954년작)'이다. 그는 평론가를 하면서도 영화를 만들 마음이 있었다. 그랬기에 이후 자신이 영화를 찍을 때를 대비해 사실상 견습용으로 만들게 된 것인데, 그런 의미로 찍은 다큐멘터리 영화라 대단한 내용은 없고 댐 공장에서 어떤 식으로 건설 일을 하는지 담은 정도이지만, 자세히 보면 그 이후 나온 수많은 영화들에서 보여지는 고다르 특유의 내레이션과 편집 방식의 기미가 조금 느껴지기는 한다. 20세기 폭스의 파리 지사에서 언론 홍보로 일하기도 했다. 와중에 24살 때 어머니를 교통사고로 잃으며 힘든 시간을 보냈었다.
1960년 '네 멋대로 해라'로 쿠엔틴 타란티노 수준의 충격적인 데뷔를 한 뒤, 수많은 영화를 발표했다. 대본 없이[16] 찍었으며, 점프 컷을 자주 사용한 걸로 유명하다. 초창기에는 1930년대 할리우드 영화에 영향을 받은 듯한 스토리와 파격적인 연출의 영화라면, 이후 영화는 마르크스주의와 68 운동에 경도되면서도 팝 아트적인 스타일리시를 공유하는 영화를 보여준다. 이후 지하 세계로[17] 파고들어 가 특이한 영화들을 줄창 만들어 냈다.[18] 그러나 혁명과 투쟁 정신이 더 이상 세상을 움직일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만 고다르는 '할 수 있는 자가 구하라(인생)'로 지하 세계에서 벗어나 다시 상업 영화계[19]로 돌아왔고, 그 이후에는 정치색을 약화시키고 좀 더 예술성에 경도된 영화들을 만들기 시작했다.
사실 그의 영화는 보는 재미가 거의 없는 편이다. 그래서 영화학도들에게는 가히 윌리엄 셰익스피어 같은 존재다. 위대하기도 하지만 지루함과 짜증감도 안겨주기 때문. 그러나 정성일은 고교 시절 고다르의 영화 '기관총 부대'를 프랑스 문화원에서 처음 보고 세상이 뒤집히는 듯한 충격을 받고, 고다르 영화를 한 편이라도 더 보려고 계속 프랑스 문화원 상영회에 참석했다고 한다. 심지어 순수 영어 자막뿐이라 정확히 뭔 내용인지도 몰랐음에도 그 카메라의 움직임들을 따로 느낀 순간 그것만으로 기쁘고 재미있었다 한다.
그래도 현대 영화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사람 중 하나이다. 그는 영화란 "현실, 그리고 그로부터 파생된 문학과는 다른, 또한 다른 예술 장르와는 구별되어야 할 고유의 장르"라는 개념에 충실하였다. 영화사에 가장 강한 혁명을 보여준 사람인 것이다. 그리하여 촬영을 계획하며 렌즈를 선택할 때도 그 영화만의 속성이 부각되는 방식을 끊임없이 고민하였다. 미국 한 대학에서 강연할 때, 한 학생이 그를 가리켜 "우리에게 그는 밥 딜런과 마찬가지로 절대 누구와도 대체할 수 없는 존재"라고 말했다.
안타까운 부분은 그의 뜻을 제대로 이어받는 후계자가 없다는 것이다. 사실은 그럴 사람이 있었는데, 단순 육체노동자 출신으로 고다르의 연출부 생활을 시작하여 조연출까지 하다 영화를 만들기 시작한 '장 외스타슈'(Jean Eustache)라는 감독이다. 그는 '포스트 누벨바그'라 불리며 그의 혁명 후계자로 인정받기 시작한 상태였다. 고다르와 누벨바그의 동료들도 인정한 훌륭한 작품[20]도 어느 정도는 남겼는데, 자금 사정 때문에 대부분 단편 영화였고 장편은 단 두 편뿐이다. 안타깝게도 더 예술 세계를 뻗어가야 할 시점에 장기간 생활고에 시달려[21] 40대 중반이라는 젊은 나이에 자살[22][23] 을 선택했고, 결국 그로 인해 제대로 된 후계자의 역할을 다 하지 못하고 영화 인생을 마감하게 된 것이다.[24] 고다르도 이를 안타깝게 생각하였다. 물론 그가 남긴 몇몇 작품만으로도 훌륭하다는 평가는 받으나, 70편이 넘는 영화를 만들어낸 고다르처럼 그가 긴 영화 인생을 이어가지 못한 것은 포스트 누벨바그의 움직임을 단편적으로 만든 중요한 요인이고 안타까운 점이다.
영화감독을 작가로 칭한 최초의 사람들 중 한 명이기도 하다. 그가 인정한 최초의 작가 감독은 할리우드 스릴러의 대가 앨프리드 히치콕이다. 정작 당시 히치콕이 왕성하게 활동하던 미국이나 영국에서는 영화감독이라는 자리는 단순히 '영화 찍는 데 필요한 기술자들을(촬영, 조명, 음향, 미술 등) 감독하는 관리자' 정도의 인식이었다.[25]
가장 좋아한 영화감독은 일본의 미조구치 겐지라고 한다.[26] 어떤 기자가 그에게 가장 좋아하는 영화 감독 3명이 누구냐고 묻자 '미조구치, 미조구치, 미조구치'라고 말하고 자리를 떴다고 한다.[27] 미조구치 겐지가 살았거나 영화 촬영한 지역을 보기 위해 일본 여행을 간 것이 일본 내에서도 화제가 되었고 지금도 고다르가 방문한 지역 중에는 그가 와서 찍은 사진들을 전시해 놓은 경우도 있다. 그만큼 그의 영화를 좋아한 걸로 보인다. "미조구치는 '크레인 숏'을 만든 것이나 다름없다."고 할 정도로 미조구치 겐지의 영화에서 크레인 숏 방식으로 찍은 롱 테이크 장면들을 좋아했다고 한다. 실제 고다르 영화에는 미조구치 겐지의 카메라 워킹을 오마주하여 촬영한 장면들이 꽤 있다고 한다. 대표적인 것은 영화 미치광이 피에로의 마지막 엔딩 장면[28]이다.
미국 감독으로는 니콜라스 레이를 가장 좋아한다고 한다. 평론글에 '영화는 니콜라스 레이다'라는 말을 한 적도 있다고 한다.
이탈리아 페이크 다큐멘터리 영화 알제리 전투가 베네치아 국제 영화제에서 호평을 받으며 대상인 황금사자상을 받자 다른 프랑스 영화인들과 같이 반발하여 즉각 퇴장한 바 있다.[29] 2000년 초반, 한국 인터넷에서 그가 잠을 자다 급사했다고 헛소문이 나와 많은 사람들이 낚인 바 있다. 몇몇 예술 영화 동호회 모임에선 그의 죽음을 기리며 명복을 비는 건배를 했다. 이 낚시가 통한 게 1999년 잠을 자다 갑자기 급사한 스탠리 큐브릭이 죽은 지 얼마 안 되어서였다.[30]
말년의 모습 |
2022년 9월 13일 만 91세의 나이를 일기로 사망하였다.# 사망 전 은퇴작이 될 영화가 있다는 뉴스가 떴으나 사망 당시엔 별다른 정보는 없었다. 2023년 3월 조력자가 밝히길 공식적인 은퇴작으로 기획된 Funny Wars와 Scenario는 물론 이외에도 작업해 둔 영화가 있다고 한다. 사후 공개 형식으로 계속 풀릴 것으로 보인다. 출처 조력 자살로 영면하였는데[31], 딱히 아프지는 않고 삶에 지쳐서 선택했다고 한다. #
장례식은 따로 열지 않고 화장했다고 한다.
그의 은퇴작이자 유작 Funny Wars가 제76회 칸 영화제에 상영되었으며, 다른 유작인 Scenario도 [32] 제77회 칸 영화제에서 공개되었다.
4. 성격
주로 도서관과 박물관에서 지식을 습득했고 스스로를 박물관의 아이라고 이야기했다.프랑수아 트뤼포와는 서로를 끔찍이 아끼던 절친이었으나, 1970년대부터 갑자기 견원지간이 되어버렸다. 고다르가 마르크스주의로 변한 탓이라고 혹자들은 본다. 결정적인 계기는 아메리카의 밤 시사회였다고 하는데, 고다르는 영화를 역겹다고 까대자 트뤼포가 반발하면서 틀어졌고 이 이후론 완전히 절교해 죽을 때까지 서로 만나지 않았다고 한다.[33] 이에 대해선 두 가지 소문이 있는데 원래 영화에 대해 계획된 내용을 고다르와도 상의한 적이 있는데 그 당시 계획과 이후 실제 찍기 시작한 후의 영화 내용이 너무 많이 달라진 것을 알게 된 고다르가 실망하고 분노해 출연하기로 한 것도 안 하고 비난했다는 설과, 고다르가 특별 출연 하기로 한 걸 트뤼포가 취소시켜 이에 분노했다는 설, 이 두 가지다.[34]
서로 원수가 된 후엔, 언제 친구였냐는 듯 서로를 헐뜯었다. 트뤼포가 고다르의 자서전 제목으로 "한번 쓰레기는 영원한 쓰레기"를 추천해 줬다고. 고다르는 나중에 트뤼포가 뇌종양으로 죽어가자, "그렇게 나쁜 책을 많이 읽어서 그래."라고 깠다.[35]
로만 폴란스키가 고다르를 누르고 각색권을 차지한 적이 있는데, 그로부터 꽤 시간이 흘러 찰스 맨슨 사건이 일어나자 "세상에… 거봐… 나한테서 각색권을 빼앗아 가더니만…."이라 말했다.
이러다 보니 인간관계에 트러블이 많았고 프랑스 언론하고도 그렇게 사이가 좋진 않았다.[36]1974년부터 파리를 떠나 그르노블을 거쳐 스위스로 이주한 것도 이 때문일 듯.
장뤽 고다르의 이러한 발언들을 보면 유명 감독의 또라이 기질이 있어 보이지만 악질과는 거리가 멀고 주변인들에 의하면 화가 나면 심하게 빈정대거나 선을 넘긴 해도 인간성 있고 재치 있는 사람이라고 한다.
5. 대표작
- 샤를로트와 베로니크, 혹은 모든 남자의 이름은 패트릭이다(Charlotte et Veronique, ou Tous les garçons s'appellent Patrick, 1959)
고다르 초기의 위트 있는 재기발랄한 단편 영화이다.(19분)[37] 프랑스의 자유로우면서도 가벼운 청춘들의 남녀 관계를 보여준다. 같은 원룸에서 사는 대학 친구 샤를로트와 베로니크가 수업 끝나고 오후 2시~3시 사이에 공원에서 만나기로 했다. 자기를 패트릭이라 소개한 한 남자에게 각자 작업을 당하면서[38], 못 만나게 된 뒤 집에 돌아와 서로 자신에게 작업을 건 남자와 각각 내일과 모레 만나기로 했다는 걸 자랑하다[39], 다음 날 함께 길거리에서 그 남자가 다른 여자에게 작업 거는 걸 보고 서로 당한 걸 깨닫고 창피해하면서도 '너 남자 취향 괜찮아졌다?'며 허무한 대사를 치면서 그냥 걸어가는 장면으로 끝나는 영화다. 제목처럼 영화는 두 가지 의미로 해석이 된다. '샤를로트와 베로니크'로 대표되는 가식과 지적인 허영으로 가득한 프랑스 젊은 여자들[40]의 이야기이기도 하면서 '패트릭'이라는 이름으로 대표되는 프랑스 젊은 남자들의 허세와 뻥으로 도배된 속물스러운 작업 이야기[41]이기도 하다. 패트릭이 한 헌팅 장면[42]의 빠른 속도가 고다르의 영화적 능력을 보여주며 재미를 유발한다.[43] 마지막에 네 멋대로 해라의 마지막 장면처럼 고다르 영화 특유의 '카메라 정면으로 보기' 기법이 쓰인다. 남자 주인공에게 당한 걸 깨닫고 여주인공끼리 대화하다 베로니크가 "내일 (데이트 못 하게 생겼으니) 나랑 데이트해 줄래?"라며 샤를로트에게 농담을 하자 갑자기 샤를로트가 고개를 확 돌려 카메라를 정면으로 보며 "네가 내 (데이트) 상대가 되어주겠다면"이라고 말한다.[44] 추후 고다르 영화의 특징인 여러 문제에 대한 폐부를 찌르는, 메시지를 통한 풍자의 시작이라고 볼 수도 있다.[45] - 네 멋대로 해라 (À bout de souffle, 1959)
주인공(장폴 벨몽도)은 밀수를 하는 걸로 추정되는 사람으로(영화에서는 주인공들의 배경에 대해서 설명, 묘사를 하지 않는다.) 경찰을 죽이고 도주해 경찰에게 쫓긴다. 그 과정에서 여자(진 시버그)를 만나 살다 추적하는 경찰의 총에 맞아 죽는다. 1984년 할리우드에서 리처드 기어 주연으로 "브레슬러스(Breathless)"란 제목으로 리메이크했는데 평은 극과 극이다. 그렇지만 쿠엔틴 타란티노가 좋아하는 영화 목록에 있다. 감독 본인이 주인공의 공개 수배가 걸린 신문을 보다 주인공을 경찰에게 신고하는 사람으로 나오며 장피에르 멜빌이 소설가로 출연한다. 해외에 발표된 것은 1960년이다. 실제 영화의 소재가 된 것은 트뤼포가 찾은 신문 기사라고 한다. 한 남자가 경찰을 죽이고 연인인 여성과 달아났는데, 마지막에 여성이 배반했다는 것이다. 트뤼포가 이를 간략한 트리트먼트로 만들었고 고다르가 이것을 소재로 만든 영화이다. 기사의 내용이 그대로 영화에 들어가는 내용이기는 한데, 그 중간 과정이 일반인이 저 이야기를 접했을 때 일반적으로 상상할 만한 과정과는 꽤나 다른 스타일로 전개된다. "어떻게 그 이야기가 이렇게 풀리지?" 싶을 정도였다.
마지막 장면에서 남자 주인공이 총 맞아 죽어가며 하는 대사 "역겨워…"가 유명하다.[46] 심지어 주인공은 이 말을 하면서 죽을 때 자기가 자기 손으로 자기 눈을 감게 하면서 죽는다. 그리고 여주인공은 이런 남자 주인공의 언행을 지켜보다 갑자기 카메라를 노려보며 "역겹다는 게 무슨 뜻이냐?"고 다른 행인에게 물어보고는 훌쩍 떠나버린다. - 미치광이 피에로 (Pierrot le fou, 1965)
- 여자는 여자다 (Une Femme Est Une Femme, 1961)
- 비브르 사 비 (Vivre Sa Vie, 1962)
- 경멸 (Le Mepris, 1963)[47][48]
- 기관총 부대 (Le Carabiniers, 1963)
- 작은 병정 (Le Petit Soldat, 1963)[49]
- 국외자들 (혹은 외부자들, Bande A Part, 1964)
- 알파빌 (Alphaville, 1965)
- 중국 여인 (La Chinoise, 1967)[50]
- Masculin Feminin(1966)[51]
- 주말 (Le Week-end, 1967)
- 넘버 투 (Numero Deux, 1975)[52]
- 할 수 있는 자가 구하라(인생) (Sauve Qui Peut(La Vie), 1980)
- 리어 왕 (King Lear, 1987)
- 포에버 모차르트 (For Ever Mozart, 1996)
- 영화사(들) (Histoire(s) Du Cinéma, 1998)
- 사랑의 찬가 (Éloge de l'amour, 2001)
- 아워 뮤직 (Notre Musique, 2004)
- 필름 소셜리즘 (Film Socialisme, 2010)
- 언어와의 작별 (Adieu Au Langage 3D, 2014)
장 뤽 고다르가 만든 최초의 장편 3D 영화로[53], 자비에 돌란의 <마미>와 함께 칸 영화제 심사위원상[54] 수상했다. 그리고 암컷 개 Roxy Miéville이 개 종려상도 수상했다. 그러나 이때에도 참석하지 않았다. 대신 자신이 만든 영상을 보냈다. - 이미지 북 (2018)
2018년 칸 영화제 경쟁 부문 초청작으로[55] 특별상 수상. 놀랍게도 이번엔 기자 회견장에 페이스타임로나마 참석해 스마트폰을 보면서 질의응답을 하는 모습을 보였다.
6. 여담
- 페루 59대 대통령 페드로 파블로 쿠친스키의 사촌이다. 쿠친스키의 모친이 고다르 가문 출신이라고.
- 그의 사생활은 무척 금욕적이었다. 마약을 한 번도 한 적이 없다고 한다. 하지만 담배만은 예외적이라 골초다.
- 홀로코스트를 다룬 가장 대표적인 두 영화 쉰들러 리스트와 쇼아를 모두 거세게 비판한 적이 있다. 쉰들러 리스트에 대해서는 제66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을 수상하자 매우 불쾌해하며 "아직 밝혀지지 않은 사실을 영상으로 만들어 사람들을 즐겁게 해줌으로써 세상을 지배하려는 야망을 가졌다. 바로 그런 점에서 스필버그는 일종의 파시스트와도 같다."는 말을 남겼고, 쇼아에 대해서는 "이 영화는 아무것도 보여준 것이 없다. 아우슈비츠의 기록물을 자처하면서 그 이미지들을 보여주지도 않고 찾으려 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영화의 촛불은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꺼지고 말았다."며 비판했다. 고다르는 홀로코스트의 문제에 대해 재현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감독이었다. 이처럼 쇼아를 두고 벌어진 클로드 란츠만과 벌인 논쟁은 홀로코스트 재현의 문제 분석으로 자주 소환되는 사건이다.
- 위에서도 봤지만 스티븐 스필버그를 싫어한다. "나는 그를 개인적으로는 모른다. 또, 그의 영화가 그리 좋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는 말을 남겼고, 1995년에는 뉴욕 영화 비평가 협회에서 공로상을 수여하기 위해 고다르를 초대한 바 있으나, 고다르는 미국 영화, 특히 스티븐 스필버그를 혐오한다며 초대를 거절한 적까지 있다. 2001년 제66회 칸 영화제에 초청받았을 때 조차 기자단 앞에서 "예전의 비평가 시절로 돌아가 스필버그 영화의 한 장면 한 장면을 세밀히 분석해 볼 수도 있다."며 혐오감을 감추지 않았을 정도이다.
- 노년기부터 사람들 눈에 잘 안 띄고 은둔해 사는 걸로 유명했다. 스위스에 있는 자택의 모든 문과 창문은 단단히 잠겨있고, 초인종도 존재하지 않는다.[56] 다큐멘터리 영화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로 한때 친분이 있던 누벨바그 감독 아녜스 바르다가 직접 자택까지 찾아갔지만, 역시 문을 걸어잠근 채 문 앞에 적어둔 암호를 통해 만나지 않겠다는 의사를 밝혔다.[57] 대신 비대면 인터뷰나 통화는 관대했는지 사망 전까지도 간간이 하곤 했다.
- 전 부인 안나 카리나는 장뤽 고다르를 두고 "같이 있으면 무척 짜증 나지만, 떨어져 있으면 흥미롭고 재미있는 사람"이라 칭했다.
- 2017년 그의 생을 다룬 영화 <네 멋대로 해라: 장 뤽 고다르>가 개봉했다. 감독은 <아티스트>로 유명한 미셸 아자나비시우스다.[58]
- 가히 영화감독들의 영화감독이자, 평론가들 사이에서도 압도적인 지지를 받고 있는 감독이다. 2012년 사이트 앤 사운드에서 선정한 역대 최고의 영화감독 순위[59]에서 2위[60]에 올랐으며, 본인이 몸담기도 했던 저명한 비평지인 카이에 뒤 시네마에서도 연도별 베스트에 무려 26편이나 올라 가장 많이 베스트에 선정된 감독이 되었다.
- 잉마르 베리만은 고다르를 '얻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으며, 지적인 척이나 하고 너무 의식적으로 짜여 있으나 무의미하며 재미도 없고 지루하며 따분한 감독, 비평가들이나 보는 영화를 만드는 감독'이라 말했다. 정작 고다르는 베리만을 매우 높이 평가한다. #
- 베르너 헤어조크 또한 "나에게 고다르의 영화란 아주 잘 만들어진 쿵후 영화들에 비하면 지적인 척하는 가짜일 뿐이다'라는 말을 남겼다.
- 애니메이션 감독 오시이 마모루가 매우 존경하는 감독이다. 오시이 말로는 "영화의 역사는 고다르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 초기 작품 말고는 별로 재미는 없지만 위대한 감독이고 그의 영화는 교과서이다. 이런 재미없고 실험적인 영화를 스폰서를 계속 받고 찍었다는 점에서 그는 위대하다."고 평했다. 가장 좋아하는 작품은 알파빌이라고 하며 오시이의 영화 붉은 안경은 알파빌의 오마주이다. 오시이의 제자 카미야마 켄지는 오시이가 계속 고다르 영화를 보라고 해서 보다 팬이 되었다고 한다. #
- 타계 이후,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누벨바그 영화인 중 가장 아이코닉하며 단호하게 현대적이고 가장 자유로운 예술을 창안한 사람. 오늘 프랑스의 국보이자 가장 천재적인 비전을 가진 사람을 잃었다'며 애도의 메세지를 전했다.#
7. 필모그래피
자세한 내용은 장뤽 고다르/연출 작품 문서 참고하십시오.8. 외부 링크
MBC FM4U - 정성일, 이주연의 영화음악[1] 해당 상은 1951년부터 1982년까지 특별 심사위원상("Special Jury Prize")이라는 명칭으로 불렸다. 현재의 심사위원대상.[2] 수상 이후 1969년, 장뤽 고다르와 옴니버스 영화 《사랑과 분노》에 함께 참여했다.[3] 로잔 서쪽에 있는 마을이다.[4] 아버지가 스위스인이다.[5] 1899년 6월 1일 ~ 1964년[6] 1909년 ~ 1954년 4월 21일 교통사고로 사망[7] 브레송의 영화 〈당나귀 발타자르〉 주연으로 유명한 프랑스 여배우.[8] 스위스 출신 영화 감독. 남편과의 협업으로 유명하다.[9] 고다르의 영화 철학과 더불어, 그가 얼마나 대중문화를 혐오하는지도 엿볼 수 있는 발언이다.[10] 그러나 고다르는 1976년의 <6 x 2>를 비롯, <두 어린이의 프랑스 일주> 등 TV 작품을 제작하고, 인터뷰와 글을 통해 특히 TV의 생방송 형식에 미적 관심을 표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영화가 그렇듯 발언에도 모순되거나 불분명한 것이 많기 때문에 연구자들을 까다롭게 하고 있다.[11] 비-카예 뒤 시네마 멤버로는 1926년생인 자크 로지에가 생존해 있다. 다만 이 사람은 2001년 이후론 은퇴한 상태.[12] 대표적으로 '영화사는 고다르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는 말이 있다. 데이비드 와크 그리피스가 진정한 서사 영화의 시작점이라면, 고다르는 그 영화사의 흐름에 포스트모더니즘을 첨가한 현대 영화의 시작이라는 평가다.[13] 실제로 그런 문학적 영화 사조에 반하는 생각을 자신의 영화를 통해 표현한 적이 많은데, 1963년작 '경멸'(Le Mepris)에서는 오프닝 크레딧에 '장뤽 고다르 연출'이라 쓰지 않고 "장뤽 고다르가 작곡한 영화"라는 표현을 쓰기도 했다.[14] 고다르는 이러한 특성들을 이해하지 못해 장르적이지 않은 영화를 찍은 것이 아니라, 그런 기존 영화들이 단순화하여 답습하고 있던 스타일로부터 탈피하기 위해 자신의 영화관을 구축한 것으로 봐야 한다. 이런 태도는 고다르 영화 전체의 태도나 다름없음을 기억해야 할 필요는 있다. 애당초 기존 장르 영화들을 분석했다고 해서 그것들과 똑같이 찍을 필요는 당연히 없다.[15] 큰돈을 벌지 못했다는 것이지, 흥행을 아예 못 하기만 했다는 것은 아니다. 몇몇 영화는 예술적 평가를 받았을 뿐만 아니라, 68 혁명의 전조를 보이던 당시 프랑스의 흐름을 타 예술 영화치고 굉장히 흥행했다. 그러나 그 번 돈으로 다음 영화를 제작할 만큼의 수준이 안 된 건 사실이다.[16] 정확히는 스토리보드가 없다는 게 맞다. 단지 그의 시나리오가 전통적 영화 제작의 관점에서 디테일이 많이 부족한 정도라 무시당할 뿐, 분명히 기본적 시놉시스와 시나리오는 있었다. 물론 대본에 없는 장면이나, 대본과 다르게 찍은 장면도 꽤 있다 하지만. 일단 스토리보드는 없었고 시나리오는 있었다.[17] 단적으로 필름을 버리고 비디오로 촬영했다.[18] 이 시기는 진짜 하드코어한 영화 매니아들만 볼 수 있는 영화들로 이뤄졌다.[19] 잘 팔리는 영화라는 얘기가 아니라 구경거리로서의 영화, 즉 자본에 의해 돌아가는 영화를 말한다.[20] '엄마와 창녀'라는 유명한 작품으로 칸 영화제 심사위원 특별상을 수상했다.[21] 당시 68 혁명이 끝난 지 꽤 시간이 흘러 누벨바그의 흐름 역시 힘을 잃고 그 성향의 영화들이 점점 흥행력을 가지지 못하게 되었었다. 그래서 그의 영화 역시 흥행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22] 프랑스 영화계에서는 이는 단순한 생활고 탓이 아니라 부인의 자살로 충격받아 우울증에 걸린 영향이 더 크다는 소문이 있다. 생활고도 있었으나, 외스타슈는 영화인이 되기 전 젊었을 때 막노동이나 청소부도 하면서 더 힘든 경제적 상황도 많이 겪은 편으로 알려져 있어 단순 생활고 탓이라 보기 힘들다. (다만 핵심 요인인 건 확실한데, 상속받은 아들이 부모의 자살에 상당히 충격을 받아 판권비를 높게 불렀고 외스타슈 영화는 오랫동안 봉인 상태였다고 한다. 2022년에야 재공개했을 정도.) 실제로 외스타슈가 자살하기 몇 년 전에 그의 부인이 자살했는데, 소문으로는 남편 외스타슈가 만든 영화 '엄마와 창녀'를 보고 자신과 남편 관계의 심연을 깨닫고 큰 충격을 받아 우울증에 걸려 견디지 못했기 때문에 자살한 것이라고 한다. 물론 자세한 진상 조사를 할 수 없는 부분이라 명확한 사실을 알 수는 없지만, '엄마와 창녀'의 내용을 생각해 보면 유추는 가능하다.[23] 제목을 보면 진짜 엄마와 창녀가 나올 것 같지만, 실제로는 전혀 그런 내용이 아니고 한 남자 주인공과 그와 육체적, 정신적 내연 관계에 있는 두 여자 주인공의 소통에 대한 이야기이고, 남자 주인공이 각각의 여성의 집에 찾아가 침대에 둘이서 함께 누워 대화하는 장면이 대부분인데, 여기서 적나라한 남녀 관계의 속마음 같은 것이 대사로 나온다. 말하자면 한 여자 주인공은 남자 주인공의 '엄마'(정신적 남녀 관계)의 비유되는 역할, 다른 한명은 '창녀'(육체적 남녀 관계)에 비유되는 역할이라는 뜻이다(그러나 실제로 창녀처럼 다룬다거나 하는 내용은 없다.). 이 영화의 가치가 인정받는 것도 그 대사 내용들이 프랑스어 특유의 뉘앙스와 어우러져 예술적이라는 평가를 받았기 때문인데, 어쨌거나 내용이 적나라한 부분이 있고 그것이 자기 남편이 만든 영화이고 자기와의 관계와 닮은 부분을 찾았을 수 있으니 어떤 성격의 여성이든 혹은 사람이든 정신적 충격을 받을 수도 있을 것으로 보인다. '영화 흥행이 안 돼 생긴 생활고'와 '아내의 자살로 생긴 우울증' 두 가지가 다 작용된 것으로 보는 게 일반적이다.[24] 그는 누벨바그 감독 중 유일하게 지식인이 아닌 노동자 계급 출신으로 누벨바그의 흐름에 가장 걸맞은 사람이었고, 가장 그 계급의 내면을 잘 담아낸 부분도 인정받는 작가이다.[25] 히치콕 자신은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26] 당연히 그도 고다르가 작가 감독으로 인정한 사람 중 하나이다.[27] 이와 같은 사례로 전설적인 걸작 시민 케인을 만든 오손 웰스는 영화 기자가 좋아하는 영화감독 세 명을 물었을 때 영화의 신 존 포드의 이름을 3번 말하고 간 적이 있다.[28] 주인공이 절벽에서 자기 얼굴에 폭약을 대량으로 두르고 스스로 불을 붙여 자폭하는데, 자폭하는 순간을 보여줄 때 익스트림 롱 숏으로 굉장히 멀리서 찍는다.[29] 당시 프랑스 영화인은 한 사람 프랑수아 트뤼포만 남아 손뼉을 치면서 축하해 주었다. 그리고 트뤼포는 프랑스 언론에게 엄청나게 비난당했지만 본인은 신경도 안 썼다.[30] 거기다가 큐브릭과 고다르는 나이대가 비슷하다. 큐브릭이 두 살 형이다.[31] 고다르가 살던 스위스는 조력 자살이 허용되는 나라다. 이미 2014년 제67회 칸 영화제 관련 인터뷰에서도 조력 자살에 대해 묻자 긍정적인 의사를 밝히기도 했다.[32] 특히 이 작품은 사망 전날 편집을 마쳤다고 한다.[33] 실제로 영화 세계도 누벨바그 이후론 상당히 극과 극으로 변했다. 고다르는 장피에르 고랭과의 협연 등으로 정치적으로도 미학적으로도 급진적이고 난해한 영화를 만들었다면 반대로 트뤼포는 대중적이고 고전 위주의 영화를 만들었다.[34] 실제로 이 영화는 누벨바그 추종자들 사이에서 누벨바그 고유의 정신을 버린 영화로 평가받아 비난받기도 했다.[35] 그래도 한편으로는 "우리(누벨바그 감독들)는 이제 우리의 가장 믿음직스러웠던 보호막을 잃어버렸다."라고 말하며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36] 물론 언론과 사이좋은 유명인이 더 드물다. 선 넘는 연예부 기자들은 만국 공통이라....[37] 이 영화가 가장 잘 알려진 단편 영화라 고다르의 최초 영화라 아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 전에 이미 '콘크리트 작전'과 '요염한 여인'을 연출했다.[38] 먼저 온 샤를로트가 공원에서 기다리다 패트릭에게 헌팅을 당해 다른 곳으로 이끌려 가는데, 나중에 온 베로니크가 샤를로트가 없으니 조금 기다리다 3시가 다 되다 보니 '안 오나 보다' 하고 가려 한다. 이때가 패트릭이 샤를로트와 내일 만나기로 약속까지 하고 헤어지게 되는 시점인데 겉옷을 갈아입고 그 공원으로 돌아가다 공원 정문 앞에서 베로니크를 마주쳐 또 헌팅한다.[39] 중간에 두 여주인공이 함께 외치는 대사가 영화 제목과 같다. "모든 남자들의 이름이 패트릭이네!"[40] 여주인공들은 극 중에서 서로 자신은 품위 있는 남자들만 만났다고 하며 농담인 듯하면서도 진지하게 자랑한다.[41] 심지어 같은 동네에서 작업을 하기 위한 대책인지 한 명 꼬시고 나서 바로 옷을 갈아입는다. 거기다 처음 본 여자한테 작업하는 거면서 '1달 동안 지켜봤어요.', '1년 동안 지켜보다 힘들게 말 거는 거예요.'라 허풍도 친다.[42] 패트릭은 처음에 모른 척 무시하는 여자에게 집요하게 빠른 속도로 말을 거는 것도 모자라, (지리학책을 들고 다니는 걸로 보아) 지리학 전공 대학생으로 보이지만 법대생이라고 했다가 공대생이라고 하면서 쉬지 않고 뻥을 치다 장난처럼 입맞춤까지 한다.[43] 미조구치 겐지에 대한 애정이 보이는 장면이 있다. 극 중 여주인공 중 한 명인 샤를로트가 혼자 책을 읽는데 작업을 걸러 온 남자 패트릭이 계속 말을 걸어도 대답하지 않자 '외국인이냐?'며 영국? 스웨덴인? 노르웨이? 핀란드? 독일인? 다 묻는데도 반응이 없자 누가 봐도 금발 유럽 사람인 그녀에게 '아하 역시 일본인이시구나?'라고 물으며 '미조구치… 구로사와…'라는 대사를 한다. 구로사와 아키라는 당시 유럽에서도 외국인치고는 꽤 평가받는 일본 영화인이었지만, 미조구치 겐지는 그 정도는 아니었음에도 고의로 미조구치를 앞에 넣은 고다르의 의도가 보인다.[44] 이는 프랑스 관객들에게 "너희들도 우리한테 데이트 신청해 볼래? 너희들도 이러고 살지?"라는 위트 섞인 메시지를 던지는 것이다. 혹은 고다르 자신을 대신하여 여배우가 "관객 당신들이 계속 내 상대(관객)가 되어주겠다면 영화를 계속 만들어서 보여주지"라는 입장을 보여주는 뜻일 수도 있다. 당연히 그 외의 여러 메시지로 해석 가능하다.[45] 물론 고다르가 모든 영화를 찍은 가장 핵심적인 목적은 단순한 사회적 메시지가 아니라 '존재'나 '이미지'를 언어와 접합시킬 수 있는가, 영화 구성 요소의 우열 관계를 가릴 수는 없지 않는가 등 영화적이면서 기호학적인 개념들에 대한 자신의 생각들을 확인하려는 무한한 실험에 가깝다.[46] 안노 히데아키의 엔드 오브 에반게리온 마지막 장면에서 아스카가 한 대사가 이 대사 오마주라는 이야기가 있다.[47] 놀랍게도 프리츠 랑도 여기에서 배역을 맡았다. 무려 본인 역으로.[48] 참고로 여주인공 역 배우는 브리지트 바르도다. (이 당시엔 탑급 미인 이미지의 여배우였다.)[49] 알제리 전쟁을 간접적으로 다뤘는데, 그 때문인지 프랑스 당국의 검열에 걸려 1960년에 만든 영화가 3년 동안 상영 금지를 당해 1963년에서야 개봉했다.[50] 마오이즘에 경도된 젊은이들을 다룬 영화. 당시 장뤽 고다르도 마오이즘에 푹 빠졌고, 마오이즘의 반관료주의는 68 혁명 당시 젊은이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지금 보면 다소 아스트랄할 수 있는 작품이다.[51] 오프닝과 엔딩 크레딧이 특이하다. 특히 Feminin에서 emin을 빼고 Fin, 즉 끝으로 바꿔버리는 엔딩이 인상적이다.[52] 장뤽 고다르가 나와 평범한 부부의 일상을 비디오로 분석하는 영화지만, 네 멋대로 해라의 리메이크라고 말한다. 검열삭제에 대한 언급이나 행위 등이 나오는 성인용이다.[53] 촬영에 사용된 카메라는 캐논 5D 마크-II 2대와 3D 촬영이 가능한 휴대폰 소니 MHS-FS3. 두 대의 DSLR을 사용했기에 3D로 관람할 시 양쪽 눈의 초점이 달라 눈이 피로한 장면들이 있다. 의도한 것인지는 불명이다.[54] 역대 최고령 심사위원상 수상자이다. 공동 수상한 자비에 돌란은 역대 최연소 수상자다.[55] 공교롭게도 2018년 칸 영화제 포스터 역시 미치광이 삐에로다.[56] 안나 카리나조차도 생전 고다르 관련 인터뷰 당시 관계에 대해 비교적 호의적으로 회고했지만, 자신을 포함해 아무도 만나려 하지 않는다(그럼에도 잘 지냈으면 한다)고 말했다.[57] 자세히는 현관 앞에 암호를 통해 "아녜스가 오니 옛날에 함께 만났던 죽은 친구 생각이 난다."는 뜻을 전달했고, 끝까지 문을 열지 않았다. 결국 이 암호를 전달받은 아녜스는 울어버렸다. 다만 실제로 메시지를 전달받은 걸 찍은 건지는 모호하다. 바르다는 픽션과 현실을 뒤섞는 경향의 감독이라 실제 경험을 재구성했을 여지도 있기 때문.[58] 고다르는 이 영화에 대해 '참 멍청한 아이디어다'라고 코멘트했다.[59] 영화 감독을 비롯한 영화업계인, 영화 평론가들이 선정한 순위를 합산하였다.[60] 1위가 알프레드 히치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