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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19-07-20 12:27:01

시민 케인


AFI 선정 100대 영화(200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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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위권 영화 목록
1위 시민 케인
2위 대부
3위 카사블랑카
4위 레이징 불
5위 사랑은 비를 타고
6위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7위 아라비아의 로렌스
8위 쉰들러 리스트
9위 현기증
10위 오즈의 마법사}}}}}}

시민 케인 (1941)
CITIZEN KANE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Citizenkane.jpg
감독 오슨 웰스
각본 오슨 웰스
출연 오슨 웰스, 조셉 코튼, 조지 클루리스, 도로시 커밍고어, 에버릿 슬론, 루스 워릭, 윌리엄 알랜드등
장르 드라마, 느와르[1]
촬영 그렉 톨랜드
음악 버나드 허먼
개봉일 1941년 5월 1일
상영 시간 119분
제작사 RKO 라디오 픽처스, 머큐리 프로덕션
배급사 RKO 라디오 픽쳐스
국내등급 15세 이상 관람가

1. 개요2. 상세3. 줄거리4. 제작 비화5. 평가와 해설
5.1. 왜 훌륭한가?5.2. 비판
6. 기타

1. 개요

게임의 규칙〉과 함께 현대 영화에서 가장 선구적인 작품
앙드레 바쟁[2]
영화사에 남을 기적 같은 작품, 걸작의 수준을 뛰어넘는 작품[3]
로저 이버트
영화 역사상 최고의 걸작 중 하나라 불리우는 오슨 웰스1941년 영화. 많은 평론가들과 매체에서 20세기 영화 최고의 걸작을 언급할 때 빠지지 않는 영화이다.

2. 상세

1940년, 겨우 25세였던 웰스는 이 작품의 제작, 연출, 주연을 혼자 도맡았다.[4] 더욱 놀라운 점은, 이 영화가 데뷔작이라는 것. 또한 전설적인 영화음악가 버나드 허먼의 데뷔작으로도 유명하다.

그러나 당대 황색매체를 지배하던 신문왕 윌리엄 랜돌프 허스트는 케인이란 인물이 자신을 모델로 만들었다고 여겨 온갖 방해를 놓았고, 영화는 당시 흥행에선 참패하고 말았다. 이러한 이유로 42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은 〈나의 계곡은 푸르렀다〉에게 돌아갔다. 〈시민 케인〉은 9개 부문에 후보[5]로 올라갔으나 각본상만을 수상하는 데 그쳤는데, 덕분에 오늘날까지도 이는 최악의 아카데미 시상식 중 하나로 회자되고 있다.[6]

그렇게 영화도 잊혀지나 싶었으나, 40년대 후반부터 프랑스를 중심으로 재평가가 이루어지기 시작하여 지금의 위치에 오르게 되었다.

개봉년도와 '최고의 영화'라는 별명 때문에 낡고 졸린 영화라 생각하기 쉽지만, 저작권이 끝난 지금에 봐도 세련되고 재미있는 영화다.[7] 웹상에서 정식으로 다운로드 받을 수 있고 VOD도 있어 관람하기 쉽다. 유튜브에만 검색해도 볼 수 있을 정도.

3. 줄거리

주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이 문서가 설명하는 작품이나 인물 등에 대한 줄거리, 결말, 반전 요소 등을 직·간접적으로 포함하고 있습니다.

하단의 〈시민 케인〉 스토리 설명은 네이버 영화에서 발췌했다.

1940년, 뉴욕에서 인콰이어러지를 비롯, 수많은 신문들의 발행인이었던 찰스 포스터 케인(Charles Foster Kane: 오슨 웰스 분)이 죽었다. 그는 당시 70세로 세계에서 손꼽히는 부자였으나 죽음 직전에는 플로리다의 대저택 제나두에서 은둔 생활을 하고 있었다. 케인은 생전에 많은 정치인과도 친분을 맺고 있었고, 미국 정책에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기도 했다. 자신에 대한 여러 얘기들에 대해 케인은 "나는 현재 미국인이고 과거에도 미국인이었으며 앞으로도 항상 미국인일 것이다."라고 말로 일축하곤 했다.

잡지 편집장인 록스턴은 케인의 죽음 내면의 것을 취재하고자 기자인 제리 톰슨(Jerry Thompson: 윌리엄 올런드 분)에게 케인이 죽기 전에 말했다는 '로즈버드'가 무슨 뜻인지 알아오라고 한다. 톰슨은 케인의 주변 인물을 샅샅이 취재한 결과 다음과 같은 기사를 작성한다.

찰스 포스터 케인은 1862년, 콜로라도 주 리틀세일럼에서 태어났다. 케인의 집에 있던 하숙생이 준 쓸모없는 광산에서 노다지가 쏟아져, 케인 가족은 벼락부자가 된다. 케인의 어머니 메리(애그니스 무어헤드 분)는 콜로라도 깡촌에서 자라는 것보다 더 좋은 기회를 주고 싶었는지, 동부에 거주하는 재력가 월터 파크스 새처(조지 컬러리스 분)에게 어린 케인과 광산 운영권과 수익을 맡긴다.[8] 이때 케인은 가기 싫어서 저항을 하지만 끌려간다. 동부의 재력가 밑에서 성장한 케인(버디 스완 분)은 25살이 되었을 때 재산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며 뉴욕 인콰이어러지를 인수한다. 처음 신문 발행 날 노동자의 입장에서 일해나가겠다는 케인의 야심찬 선언이 실리고, 폭로 기사들로 인콰이어러지는 발행부수가 급격히 늘어난다.

1900년, 케인은 대통령의 질녀인 에밀리 노턴(Emily Norton: 루스 워릭 분)과 결혼하고 아들 찰스 주니어가 태어난다. 그러나 케인은 미모의 여가수 수전 알렉산더(Susan Alexander: 도러시 코밍고어 분)와 사랑에 빠진다. 선거에 나선 케인은 부정한 애정 행각(스캔들)이 발각돼 낙선한다. 그후 케인은 아내와 이혼하고, 1918년에는 에밀리와 아들이 교통사고로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후 케인은 수전과 결혼하고 수전을 가수로 데뷔시키지만 결과는 참혹했다. 케인은 수전에게 계속 노래를 부르라고 종용하지만 수전의 자살 소동으로 그만 둔다. 1929년에는 케인의 신문사 중 가장 중요한 신문사가 문을 닫는다. 1932년 수전도 떠나고 케인은 극도로 난폭해진다. 더 이상 누구도 케인의 말에 귀를 귀울이지 않는다. 케인은 결국 홀로 숨을 거둔다.

이상의 기사 작성 과정에서 톰슨은 끝까지 로즈버드가 무슨 뜻인지 알아내지 못하고 단지 같은 인간으로서 비참한 최후를 마친 케인 때문에 슬픔만을 느꼈을 뿐이다. 취재를 마치며 톰슨은 모든 걸 다 가졌던 케인이 죽기 전 마지막으로 떠올린 것은 아마도 그가 가지지 못했거나, 잃어버린 것일 무언가 일 것이라 말한다. 케인의 화려한 유산들 중 값이 나가는 물건들은 경매로 팔려가기 위해 쌓여있고 더는 쓸모없게 된 케인의 물건들이 불 속에 던져진다. 그중 하나는 케인이 어린 시절에 즐겨 탄 썰매이다. 그 썰매에는 로즈버드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바로 그 썰매의 이름이 로즈버드이다. 부와 명예를 다 가졌던 케인이 가장 그리워했고 결코 가지지 못했던 것은 잃어버린 그의 소박한 유년기였던 것이다.

4. 제작 비화

오슨 웰스가 촬영 전에 〈역마차〉를 약 40번 넘게 보며 공부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 달 동안 매일 저녁을 먹은 뒤, 극장을 찾아가 〈역마차〉를 보았다. 보면서 '어떻게 이렇게 됐지?', '왜 이렇게 됐지?' 스스로 질문을 던졌다. 그것은 학교 가는 일과 같았다.
ㅡ 오슨 웰스 출처
감독 오슨 웰스는 케인 역의 젊은 시절부터 70대 노년의 모습까지 연기를 모두 맡았는데, 자연스러운 모습을 위해 분장에 공을 많이 들였다고 한다. 당시에 메이크업 아티스트였던 모리스 시더먼은 웰스의 얼굴 전체를 본 따서 연구했다고. 얼굴 본을 뜬 동안에 소설 〈악의 제국〉을 다른 스태프에게 읽게 시켜 웰스에게 들려줬다고 한다.[9]

젊은 시절의 경우, 오슨 웰스가 25살이었을 때에 찍은 영화이긴 하지만 한층 풋풋하고 어린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서 볼살 부분을 뒤로 잡아당겼다고 한다. 노년의 경우에는 콘택트 렌즈를 이용해 흐릿한 빛의 눈을 만드는 등 섬세하게 표현했다.

웰스는 다른 장면을 찍을 때는 케인의 첫 부인 에밀리 역을 맡은 루스 워릭에게 이것 저것 디테일한 주문을 많이 했지만, 영화학도들이 한번쯤 공부하고 넘어가는 그 유명한 아침식사 장면에서는 별 주문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웰스의 말에 따르면, 이 장면에서는 세월이 흐르면서 에밀리와 달리 괴물로 변해가는 케인을 표현하고 싶었다고 한다. 워릭이 연기한 에밀리의 초반 느낌 그대로 가주길 바랬기 때문에 이 씬을 찍을 때는 크게 지시하지 않았다고 한다.[10]

에밀리 역을 맡은 루스 워릭의 말에 따르면 오슨 웰스는 워릭에게는 젠틀하게 대했지만, 수전 역을 맡은 도러시 커밍고어에게만은 배우들과 스탭진 앞에서 공공연히 모욕을 주는 등 안 좋게 대우했다고 한다. 워릭이 이를 이상하게 여겨 웰스에게 왜 그녀를 그런 식으로 대하느냐고 묻자, 웰즈는 "그녀는 마지막 장면에서 나를 진심으로 증오해야한다." 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워릭이 "감정 연기를 위해서 배우가 진짜로 학대당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하자 웰스는 "그녀는 배우가 아니라, 수전 알렉산더 그 자체다. 그리고 그녀는 분명 그녀가 맡은 역처럼 살아갈 것[11]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12] 오슨 웰스가 커밍고어에게 한 처우가 도덕적으로 옳으나 그르냐에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어째든 영화 후반부 수전이 케인을 독기어린 눈으로 노려보는 연기가 놀랍도록 생생했던 것은 이 때문이다.

웰즈는 원래 조지프 콘래드의 소설 《어둠의 심연》을 영화화하려고 했는데, 제작비가 너무 많이 든다는 걸 알고 포기했다. 그리고 대신 만든 것이 이 〈시민 케인〉이다. 참고로, 소설 《어둠의 심연》은 후대 감독에 의해 끝내 영화화되는데, 그 결과물이 바로 〈지옥의 묵시록〉.

5. 평가와 해설

영화 〈시민 케인〉이 왜 훌륭한지 3시간도 넘게 말할 수 있습니다.
이동진, 벨벳 골드마인 시네마톡 중
In 1941, Welles was both beginner and expert, undergraduate and professor, young Charlie and old Charles Foster. And if he never had the boundless freedom and energy to make another film like Citizen Kane, neither did anyone else. It’s terrific.

1941년에 웰스는 초심자이자 전문가였고, 학부생이자 교수였으며, 젊은 찰리이자 나이든 찰스 포스터였다. 그리고 그가 <시민 케인>과 같은 다른 영화를 만들기 위한 무한한 자유와 에너지를 가지지 못했다면, 그 누구도 그럴 수 없었을 것이다. 이것은 무시무시하다.
-니콜라스 바버(Nicholas Barber)[13], BBC Culutre
예술은 개인적인 감상과 해석도 중요하기에, 이 문서에는 도움이 될 만한 평가와 해설만 골라 짧게 기술한다.

5.1. 왜 훌륭한가?

'최고의 영화'라 불리는 만큼, '왜 훌륭한가?'에 대한 답도 평자마다 다양하다. 주로 거론되는 평가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영화 문법의 종합과 강렬한 시각성. 당시 절정을 향하던 몽타주미장센 기술을 〈시민 케인〉은 최적의 조합으로 활용하였다. 특히 미장센은 딥 포커스라는 신기술과 거울 이미지의 활용으로 그 가능성을 드넓혔다. 표현주의 세트와 리얼리즘 조명을 하나의 조화로운 세계로 만든 것 또한 극찬받는 점이다. 예를 들어, 〈시민 케인〉의 세계는 리얼하지만, 영화를 이끌어가는 톰슨 기자는 내내 얼굴이 그림자에 가려 전혀 보이지 않는다. 첫 신문 발행 날, 노동자의 입장에서 일하겠다는 선언에 젊은 케인이 서명할 때, 역시나 케인의 얼굴은 그림자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14] 거울과 창문을 사용하여 한 화면 안에서 두 가지 상황이 동시에 진행되는 장면이 많다. 이 또한 미장센의 예시가 될 수 있다. 화면과 분리된 소리는 몽타주 이론의 응용이 된다.

둘째, 혁신적이고 모더니즘적인 스토리텔링. 시간순의 진행을 깨뜨리고 사건을 뒤섞어 놓았으며,[15] 이를 추리와 심리를 기준으로 정렬해 영화 스토리텔링의 혁명을 일으켰다. 또한 '로즈버드'라는 핵심 소재로 관객에게 관심을 유도하는 방식, 종국에 그 로즈버드의 정체를 몰래 드러냄으로써 관객에게 심오한 질문을 던지는 방식 또한 호평받는 점이다.

그래도 〈시민 케인〉이 왜 걸작인지에 대해서는, 역시 자신만의 견해가 필요할 것이다. 또한 영화사상 최고의 걸작이라는 데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그것이 문제가 되진 않을 것이다.
〈시민 케인〉을 잘 보기 위해서는 리뷰를 찾는 대신 이 영화를 백번 보는 쪽이 낫다(고 생각한다).[16]
정성일 #

5.2. 비판

일각에선 과대평가됐다라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주류 평단 내에서도 동일한 지적이 꾸준히 나오고 있다. 다만, 이 영화에 대한 것으로 비판이 나오는 것이지, 오슨 웰즈에 대한 찬사는 여전하다.

박찬욱은 저서 《박찬욱의 오마주》에서 다음과 같이 〈시민 케인〉을 비판했다.
과잉된 테크닉으로 점철된 영화로, 지나치게 신격화되고 과대평가된 작품이다. 적어도 영화사상 최고의 영화는 아니다. 오히려 오슨 웰즈의 다른 작품들이 훨씬 훌륭하다.
- 박찬욱

이외에도 많은 평론가들이 박찬욱과 동일한 이유에서 〈시민 케인〉이 과대평가되었다고 본다. 바로 윗 문단에서도 시민 케인을 감상하는 방법으로 인용되어있는 정성일 평론가는 1995년도에 작성한 칼럼에선 다음과 같은 평을 남겼다.[17]
시민 케인이 영화의 영화사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인 것은 사실이지만, 이 영화를 우리 시대의 걸작이라고 부르는 것은 성급한 일이다.
-정성일

또한 감독인 오슨 웰스보다 촬영 감독인 그렉 톨랜드의 공이 더 크다는 지적도 있다. 그렉 톨랜드(1904~1948)는 존 포드와 같은 감독과 작업하며 촬영 기술을 익혀왔고, 〈시민 케인〉에서 촬영술의 정점을 찍었다. 게다가 영화 촬영 당시에 초보감독이었던 오슨 웰스에게 많은 가르침을 준 사람이 그렉 톨랜드이기에, 일각에선 두 사람의 '공동 연출'이라 보는 것이 맞는다고 본다.[18]

몽타주미장센 등, 1940년대까지 나온 모든 영화 언어를 총망라했으나, 〈시민 케인〉 속 기법들은 당대 영화들에서도 사골 우려먹듯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그 참신함과 혁신성에 대해 의문을 표하는 이들이 많다.

최근엔 오슨 웰스 전문 연구자들도 〈시민 케인〉보다는, 〈악의 손길〉이나 〈위대한 엠버슨가〉를 최고로 치는 경향이 있다.

그 때문인지, 2012년 사이트 앤 사운드 선정 역대 최고의 영화 투표[19]에서 1위 자리를 〈현기증〉에게 내주고 2위로 내려왔다. 지속적인 비판의 목소리가 전세계 투표 결과에 반영된 셈. 2012년 투표 결과 그럼에도 2위라는 점을 보면 어떤 면에서는 시민 케인의 위엄이라고 할 수도 있을 듯. 실제 사이트 앤 사운드 선정 위대한 영화 순위에서 시민 케인은 첫 투표인 1952년 자전거 도둑에 이어 2위를 차지한 이후 1962년부터 줄곧 1위를 고수하다가 이번에 다시 2위로 내려간 것이다.

장 폴 사르트르는 개봉 당시에 이 영화를 혹평했는데, 그의 실존주의 사상과 맞지 않아 혹평한 것으로 사료된다. 그리고 앙드레 바쟁한테 역으로 당했다.

오슨 웰스팬들이나 영화 팬들 사이에서도 오슨 웰스 이야기가 나오면 반드시 언급되는 작품인데, 오슨 웰스을 단순히 시민 케인을 만든 감독 정도로 폄하되어 기억 되었다는 주장도 많다.

6. 기타



[1] 《할리우드 장르》의 저자로 유명한, 토머스 샤츠의 장르 분류[2] 프랑스 평론가. 카예 뒤 시네마에서 활동하며 누벨바그 감독들의 정신적 아버지 역할을 하였다.[3] 저서 〈위대한 영화〉에서 〈시민 케인〉을 소개하며 한 말.[4] 이 때문에 제작, 연출, 주연을 혼자 도맡은 작품인 에드 우드의 〈글렌 혹은 글렌다〉나 토미 웨소의 〈더 룸〉이 여기에 비유되곤 한다. 물론 이쪽은 못 만든 영화계의 〈시민 케인〉으로서.[5] 작품상, 감독상, 남우주연상, 각본상, 미술상, 촬영상, 편집상, 음악상, 음향상[6] 허나 21세기 들어 〈나의 계곡은 푸르렀다〉를 재평가하는 움직임이 있어, '최악'이라는 평가는 희미해지고 있다.[7] 다만 이것도 호불호는 있을수 있다. 꼭 봐야할 명작 영화라고 해서 봤는데 지루해서 실망했다는 반응도 있다.[8] 그 재력가는 그 수익금으로 케인에게 상류층 삶을 누리게 해주고, 케인이 성장하면 케인에게 광산 소유권과 수익금을 전달하기로 했다.[9] 출처: 〈시민 케인〉 다큐멘터리 It's All True[10] 1981년도 인터뷰 中[11] 실제로 영화 이후의 도러시 커밍고어의 삶은 녹록치 않았다. 1951년 공산당과의 관계 때문에 블랙리스트에 오르게 된 탓에 그 해에 찍은 영화가 그녀의 마지막 영화 작품이었고, 52년도에 TV 드라마 두어 개에 출연한 것을 마지막으로 그녀의 경력은 끝이 났다. 또한 그녀의 사생활도 순탄치 않았다. 알코올 중독에 빠지며 첫 결혼 생활에 실패했고, 이혼 과정에서 양육권을 전 남편이 가져갔다. 이 후 할리우드 지역에서 성매매죄로 체포되기도 했으며 결국 58세의 나이에 폐질환으로 사망한다.[12] 출처는 http://www.tcm.com/this-month/article/71618%7C71643/Behind-the-Camera.html.[13] BBC 컬쳐, 이코노미스트, 더 랩, 뉴욕 타임즈, 메트로, 더 가디언 등지에 투고를 하는 유명 저널리스트이자 영화 평론가다.[14] 이와 같은 빛과 그림자의 활용, 수평보다 수직성을 강조하는 앵글 때문에, 평론가들은 〈시민 케인〉을 '느와르'로 분류한다.[15]펄프 픽션〉이나 〈메멘토〉와 같은 영화가 이 방식을 사용한다.[16] 단, 이 발언은 영화가 21세기로 넘어오면서 외부와의 소통을 중시한다며, 20세기 영화의 예시로 〈시민 케인〉을 언급한 것이다.[17] 다만 영화의 해석에서의 접근법에서 논한 것이며, 그럼에도 시민 케인이 훌륭한 작품이라고 호평했다.[18] 오슨 웰스는 톨랜드의 가르침에 보답하고자, 영화 크레딧에 그의 이름을 자신의 이름만큼 크게 박아넣었다.[19] 사이트 앤 사운드는 BFI(영국영화연구소)에서 발간하는 잡지이다.[20] 그리고 결국 이 <하녀>를 모티브로 한 작품을 만들게 되는데 그게 바로...[21] 국내 방영판에선 장미봉오리라고 애절하게 말하는데 유령 성우가 바로 김기현.[22] 어두운 극장 안에서 케인의 눈부분이 다른 관객과 똑같이 밝게 강조된 것은 수전의 노래실력이 처참함을 다른 사람과 같이 알게 되었음을 시사한다. 한 장면에 많은 것을 담은, 시민 케인이 왜 명작이라 평가받는지 알 수 있는 한 장면.[23] 세명 가운데서 한명은 스노모빌로 이스마엘을 치여 죽이고 지하의 명계로 추락해 사망하고 한 명은 쇼거스한테 잡아먹히고, 한 명은 미쳐서 테켈리리라는 말밖에 못하는데 주변인들은 그걸 타이거릴리라고 알아듣는, 여러모로 안습한 사람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