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미스소니언 선정 미국 역사상 가장 중요한 인물들 | ||
{{{#!wiki style="word-break: keep-all; margin: 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 2014년 미국 정부가 운영하는 국립 교육 재단 스미스소니언 재단의 잡지, 스미스소니언 매거진이 “미국사 가장 중요한 100인의 인물”을 선정했다. 미국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들을 뽑았기 때문에 미국인이 아닌 사람들도 많고 부정적인 인물들도 있다. | |
<colbgcolor=#000047><colcolor=#ffc224> 개척자들 |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 헨리 허드슨 · 아메리고 베스푸치 · 존 스미스 · 조반니 다 베라차노 · 존 뮤어 · 메리웨더 루이스 · 사카자위아 · 키트 카슨 · 존 웨슬리 파월 · 닐 암스트롱 | |
혁명가 & 저항가들 | 마틴 루터 킹 · 로버트 E. 리 · 토머스 페인 · 존 브라운 · 프레드릭 더글러스 · 수전 B. 앤서니 · W. E. B. 듀보이스 · 테쿰세 · 타탕카 이요탕카 · 엘리자베스 케이디 스탠턴 · 말콤 엑스 | |
대통령들 | 조지 워싱턴 · 토머스 제퍼슨 · 율리시스 S. 그랜트 · 우드로 윌슨 · 에이브러햄 링컨 · 제임스 매디슨 · 앤드루 잭슨 · 시어도어 루스벨트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 로널드 레이건 · 조지 W. 부시 | |
첫 여성들 | 포카혼타스 · 엘리너 루스벨트 · 힐러리 클린턴 · 마사 워싱턴 · 오프라 윈프리 · 헬렌 켈러 · 소저너 트루스 · 제인 애덤스 · 이디스 워튼 · 베티 데이비스 · 세라 페일린 | |
범법자들 | 베네딕트 아놀드 · 제시 제임스 · 존 윌크스 부스 · 알 카포네 · 빌리 더 키드 · 윌리엄 M. 트위드 · 찰스 맨슨 · 와일드 빌 히콕 · 리 하비 오즈월드 · 러키 루치아노 · 존 딜린저 | |
예술가들 |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 · 앤디 워홀 · 프레더릭 로 옴스테드 · 제임스 애벗 맥닐 휘슬러 · 잭슨 폴록 · 존 제임스 오듀본 · 조지아 오키프 · 토머스 에이킨스 · 토머스 내스트 · 앨프리드 스티글리츠 · 앤설 애덤스 | |
종교인들 | 조셉 스미스 · 윌리엄 펜 · 브리검 영 · 로저 윌리엄스 · 앤 허치슨 · 조너선 에드워즈 · 라파예트 로널드 허버드 · 엘런 화이트 · 코튼 매더 · 매리 베이커 에디 · 빌리 그레이엄 | |
팝 아이콘들 | 마크 트웨인 · 엘비스 프레슬리 · 마돈나 · 밥 딜런 · 마이클 잭슨 · 찰리 채플린 · 지미 헨드릭스 · 마릴린 먼로 · 프랭크 시나트라 · 루이 암스트롱 · 메리 픽포드 | |
제국 건설자들 | 앤드루 카네기 · 헨리 포드 · 존 D. 록펠러 · J. P. 모건 · 월트 디즈니 · 토머스 에디슨 · 윌리엄 랜돌프 허스트 · 하워드 휴즈 · 빌 게이츠 · 코닐리어스 밴더빌트 · 스티브 잡스 | |
운동선수들 | 베이브 루스 · 무하마드 알리 · 재키 로빈슨 · 제임스 네이스미스 · 아놀드 슈워제네거 · 타이 콥 · 마이클 조던 · 헐크 호건 · 짐 도프 · 세크리테리엇 · 빌리 진 킹 | |
출처 | }}}}}}}}} |
<colcolor=#fff><colbgcolor=#000> 제58,59대 미합중국 연방하원의원 윌리엄 랜돌프 허스트 William Randolph Hearst | |
출생 | 1863년 4월 29일 |
미국 캘리포니아 주 샌프란시스코 | |
사망 | 1951년 8월 14일 (향년 88세) |
미국 캘리포니아 주 베벌리힐스 | |
국적 | [[미국| ]][[틀:국기| ]][[틀:국기| ]] |
직업 | 언론인, 기업인, 정치인 |
신체 | 191cm |
학력 | 하버드 대학교 (중퇴) |
정당 | (1884년~1904년,1914년~1934년) (1934년~1951년) |
부모 | 아버지 조지 허스트 어머니 피비 허스트 |
배우자 | 매리언 데이비스 |
자손 | 조지, 윌리엄 주니어, 존, 랜돌프, 데이비드, 퍼트리셔 레이크 |
서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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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윌리엄 랜돌프 허스트(William Randolph Hearst, 1863년 4월 29일– 1951년 8월 14일)는 미국의 미디어 그룹 허스트 커뮤니케이션즈의 창업주다. 국내에선 '미국의 신문왕'으로 알려져있는 인물이기도 하다.[navertv(43994770)] |
[다큐] 영상의 세기 PREMIUM 제08부 - 미국. 자유의 국가의 비밀과 거짓中[1][2] |
2. 생애
퓰리처와의 경쟁을 풍자한 만평.[3] |
미국 캘리포니아 주 샌프란시스코의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조지 허스트는 골드 러시 때 캘리포니아로 이주해 와 광산업으로 큰 돈을 벌었다. 어머니인 피비 허스트는 아들이 10살 때부터 같이 유럽을 여행다녔는데, 이때 경험은 허스트에게 큰 영향을 준다.
하버드 대학교에 진학하지만, 공부보다는 파티와 학생 신문 발행에 열중하면서 졸업하지는 못한다. 1887년 아버지가 소유하던 《이그재미너》를 경영하면서 신문계에 진출했다. 주의원이 되기 위한 수단으로만 신문을 생각한 아버지와 달리, 윌리엄은 자기 신문의 발행 부수를 늘리기 위해 모든 방법을 동원한다.
1895년 뉴욕의 《모닝 저널》을 인수해 《저널 아메리칸》으로 바꾸고 또 다른 신문왕 조셉 퓰리처의 《월드》와 경쟁했다.
뉴욕 저널에 보도된 메인호 폭파 사건. |
Destruction of War ship Maine was the work of an enemy.
메인호 폭파 사건은 적의 음모였다.
$50,000 Reward for detection of the perpetrator of the Maine outrage!
메인호 사태의 가해자 제보 보상 5만 달러!
메인호 폭파 사건은 적의 음모였다.
$50,000 Reward for detection of the perpetrator of the Maine outrage!
메인호 사태의 가해자 제보 보상 5만 달러!
신문자 《뉴욕 저널》(New York Journal)의 사주를 하면서 행동 언론이라는 아이디어를 통해서 스스로 뉴스를 생산하고 기사화하는 방법을 고안하였으며, 1895년 미국-스페인 전쟁을 부추기는 기사를 선정적으로 게재하여 전쟁을 촉발시켰다.[4]
이후 미국 17개 도시에서 일간지를 매수 및 창간하고 INS 통신사와 출판사, 3개 방송국을 자기 손에 두어 거대한 언론 제국을 형성하였고 현재에는 조셉 퓰리처와 함께 황색언론의 기수로 평가받고 있다.
그러나 신문사의 재정 관리는 규모에 비해 부실한 편이었고, 대공황 시기 큰 타격을 받는다. 1951년 베벌리힐스에서 사망한다.
3. 정치 행보
1906년 뉴욕 주지사 선거 허스트 포스터 |
그의 미국 내셔널리즘적 성격에도 불구하고, 초기 정치 사상은 자신의 배경과 달리 진보주의, 대중주의에 가까웠다. 반부패, 노동권, 8시간 근로제도를 주장하고 트러스트에 대한 통제도 지지했다. 진보주의자 허스트는 자신의 언론 제국을 아낌없이 이용하여 민주당 진보파,노동계층의 유력 후보로 자리잡았다. 1904년 미국 대통령 선거 민주당 경선에도 도전했지만 앨턴 B. 파커에게 밀려 낙선한다. 하원의원 임기 후 뉴욕시장 선거, 뉴욕 주지사 선거[5]에도 출마했지만 모두 낙선한다. 뉴욕시장 낙선 이유는 태머니 홀[6]이라는 정치 조직 때문이었다. 허스트는 반 태머니 홀 개혁 후보로 출마했지만 조직력에서 밀려 두번 다 패배하고 말았다. 연이은 선거 패배 후에는 보수화되어 고립주의, 반국제연맹 주장을 한다.
대공황이 터지자 1932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당의 후보로 뽑힌 프랭클린 D. 루즈벨트를 지지했지만[7] 루즈벨트의 진보좌파적 뉴딜 정책에 강하게 반발하면서 공화당으로 전향하고 1936년에는 알프 랜던을 지지한다.[8] 이 과정에서 허스트는 친노동 진보 언론인이라는 평판과 인기를 잃는다. 이 와중에 나치당의 총선 승리를 반공주의의 승리라고 축하하고 아돌프 히틀러를 옹호한 흑역사도 있다.
4. 소속 정당
소속 | 기간 | 비고 |
| 1884 - 1904 | 입당 |
1904 - 1906 | 창당 | |
1906 - 1914 | 창당 | |
| 1914 - 1934 | 복당 |
| 1934 - 1951 | 입당 사망 |
5. 선거 이력
연도 | 선거 종류 | 선거구 | 소속 정당 | 득표수 (득표율) | 당선 여부 | 비고 |
1902 | 미국 연방하원의원 선거 | 뉴욕 11구 | | 26,953 (69.07%) | 당선 (1위) | 초선 |
1904 | 미국 연방하원의원 선거 | 26,255 (59.33%) | 재선 | |||
1905 | 뉴욕시장 선거 | 뉴욕시 | 224,929 (37.16%) | 낙선 (2위) | ||
1906 | 미국 주지사 선거 | 뉴욕 | 691,105 (46.62%) | [9] | ||
1909 | 뉴욕시장 선거 | 뉴욕시 | 154,187 (25.88%) | 낙선 (3위) | ||
1910 | 미국 부지사 선거 | 뉴욕 | 60,286 (4.21%) |
6. 여담
키는 191cm로 장신이다. 근데 대두여서 그렇게 안보인다.(...) 아들들도 비슷한 키의 장신인데 아버지처럼 대두여서 비율이 영 좋지 않다.(...)세기의 영화라고 평가받는 《시민 케인》에서 풍자되기도 했으며, 그로 인하여 윌리엄 랜돌프 허스트는 시민 케인에 대해 엄청난 훼방을 놓게 되었다. 결국 《시민 케인》은 현대의 극찬과는 달리 흥행도 실패하고 1942년 아카데미상 9개 부문에 후보로 올라갔으나 각본상만을 수상하는 데에 그쳤다. 이 때문에 1942년 아카데미 시상식은 역대 최악이란 불명예를 안게 되었다. 당시의 제작 과정을 담은 영화 《맹크》가 2020년에 개봉하기도 했다. 영화에서 허스트 역은 찰스 댄스가 맡았다.
아카데미 작품상 후보에 올랐던 에드워드 G. 로빈슨 주연의 《Five Star Final》(1931)는 당시 신문사들의 행태를 비판한 작품이다. 제목은 별 다섯 개를 "Final(최종)"이라는 단어와 함께 1면에 박은 신문 판본을 뜻하며, 제1차 세계 대전 시절 신문업계에 도입된 서체 이름이기도 하다. 윌리엄 랜돌프 허스트는 이 영화를 자신에 대한 개인적 공격으로 여겨 산하 발행 매체들을 통해 해당 영화를 폄하했고 극장주들이 영화를 상영하지 못하도록 크게 압박했다. 때문에 이 영화는 프로듀서가 공식적으로 크레딧에 기재되지 않았다. 하지만 방해와 달리 흥행에 성공해[10] 방해 공작은 실패로 돌아갔다.
제작사 카즈머팔리턴 픽처스를 통해 클래런스 브라운이 연출하고 라이어널 배리모어가 주연한 《Looking Forward》(1933)를 적극 지원했다. 영화 제목은 같은 해 프랭클린 D. 로저벨트 대통령이 발간한 책에서 따온 것이었는데 대통령 본인의 사용 허가를 받아낼 수 있도록 힘쓰기도 했다.
《007 네버 다이》의 종반부에도 극중 악당이자 미디어 재벌인 엘리엇 카버가 허스트의 사례를 들먹이며,[11]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하는 장면이 나온다.[12]
미국 캘리포니아 주에는 그가 건설한 거대한 허스트 캐슬이 자리잡고 있다.
라디오가 고가품이던 1920년대에 허스트의 지하실에는 세 대의 라디오가 놓여있었다고 하다. 당시의 라디오는 주파수를 튜닝하기 매우 어려웠기 때문에, 아예 각 방송국 주파수에 맞춰놓은 라디오를 들여놓은 것.
돈이 많다보니 온갖 예술품도 사다 모았는데 이에 관해 웃기는 일화도 있다. 하루는 한 예술품을 언론에서 보고 살려고 하니 이미 사갔다는 말에 그걸 사고자 탐정을 고용해 찾게했다. 이 탐정은 해외까지 오고가며 1년 가까이 고생하다가 돌아왔는데 허스트에게 으르렁거렸다. 왜 그러냐고 하자 마지막에 그걸 산 사람이 바로 허스트였다는 것! 그가 창고를 찾아보니 그 예술품이 먼지 투성이로 방치되어 있었다고....[13]
찰리 채플린과 영화제작자 타머스 H. 인츠[14]의 죽음에 관련된 이야기도 있는데 찰리 채플린이 허스트의 정부 매리언 데이비스와 불륜 관계였고, 한창 검열삭제(혹은 키스)중에 허스트와 사람들이 들어오는 바람에 들켰다고 한다. 격분한 허스트가 두 사람에게 총을 쐈는데, 그만 총알이 빗나가서(!) 엄하게 옆에 있던 타머스 H. 인츠가 맞았다는 설이 있어서 실제로 곤혹을 치렀다. 이 루머가 퍼진 게 인츠가 피투성이로 실려나왔다는 증언과 함께, 채플린이 말과 달리 인츠 장례식에 참석한 사진이 공개되는 등 석연찮은 의혹이 있었기 때문이다. 다만 관계자들이 전부 함구한 채 사망한지 오랜 시간이 지나서 어디까지나 루머로 그치고 있다.
퍼트리셔 허스트 |
[1] 2018년 2월 10일 방영.[2] 영상 매체의 탄생 이후 전세계 기록 보관소에서 발굴한 영상으로 비밀과 거짓으로 뒤덮인 "자유의 나라" 미국에 주제를 맞춘 NHK의 다큐.[3] 두 사람이 입고 있는 옷은 황색언론을 풍자한 캐릭터인 옐로 키드(Yellow Kid)에게서 가져온 것이다.[4] 사실 메인 호의 침몰 원인은 아직 정확하게 밝혀진 원인만 무성하다. 미국이 공동 조사를 거부해서 결성된 스페인 단독 조사단은 탄약실 유폭으로 결론냈고, 미국 내에서도 보일러 과열 등 여러 가설이 제기됐다. 그러나 당시 상황을 고려하면 뉴욕 저널이 주장한 적(스페인)의 선제공격이 원인이었을 가능성은 낮다는 게 중론이다. 최근 연구에 따르면 유실된 기뢰가 매설지역을 벗어나 해류를 따라 떠돌다가 운 나쁘게 메인호와 충돌했을 가능성도 있다고 한다.[5] 상대는 이후 1916년 미국 대통령 선거 공화당 후보, 연방대법원장인 찰스 에번스 휴즈[6] 아일랜드계 미국인 가톨릭 신자들이 주요 구성원이었다. 유명한 태머니 홀 회원에는 앨 스미스가 있다.[7] 경선에서는 존 낸스 가너를 지원해 캘리포니아주 대의원이 그를 지지하게 했다.[8] 1924년 대선 민주당 후보인 존 W. 데이비스, 1928년 대선 민주당 후보인 앨 스미스도 랜던을 지지했다. 다만 이들은 공화당에 입당하진 않았다.[9] 독립당-민주당 단일 후보[10] 310,000달러 예산에 820,000를 벌었다.[11] 미국-스페인 전쟁을 앞두고 허스트가 사진기자에게 "자네가 사진을 찍어오면, 난 전쟁을 일으키지"라고 말했다는 내용.[12] 참고로 네버다이의 메인 악역 카버는 현존하는 미디어 재벌 루퍼트 머독을 빗댄 캐릭터라는 평을 받았다.[13] 앗! 시리즈의 '미술이 수리수리'에서 이 일화를 소개할 때는 그의 저택인 허스트 캐슬 한 구석에 포장도 안 뜯은 채 처박혀 있었다고 나오며, "어쨌거나 소유주를 찾았으니, 흥정은 잘 했을까?"라고 놀리면서 에피소드를 마무리짓는다.[14] Thomas H. Ince. 1880 - 1924. 초기 서부극 제작자로 유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