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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19-07-16 13:11:48

마이클 조던

파일:나무위키+유도.png   동명의 배우에 대한 내용은 마이클 B. 조던 문서를 참조하십시오.
마이클 조던의 주요 수상 및 헌액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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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년 미국 정부가 운영하는 국립 교육재단 스미소니언의 잡지, 스미소니언 매거진이 “미국사 가장 중요한 100인의 인물”을 선정했다. 미국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들을 뽑았기 때문에 미국인이 아닌 사람들도 많고 부정적인 인물들도 있다.
개척자들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헨리 허드슨 아메리고 베스푸치 존 스미스 조반니 다 베라차노
존 뮤어 메리웨더 루이스
윌리엄 클라크
새커거위아 키트 카슨 존 웨슬리 파월
닐 암스트롱
혁명가 & 저항가들
마틴 루터 킹 로버트 E. 리 토마스 페인 존 브라운 프레드릭 더글러스
수전 B. 앤서니 W. E. B. 두 보이스 테쿰세 타탕카 이요탕카 엘리자베스 케이디 스탠턴
말콤 엑스
대통령들
조지 워싱턴 토머스 제퍼슨 율리시스 S. 그랜트 우드로 윌슨 에이브러햄 링컨
제임스 매디슨 앤드루 잭슨 시어도어 루스벨트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로널드 레이건
조지 W. 부시
첫 여성들
포카혼타스 안나 엘리너 루스벨트 힐러리 클린턴 마사 워싱턴 오프라 윈프리
헬렌 켈러 소저너 트루스 제인 애덤스 이디스 워튼 베티 데이비스
사라 페일린
범법자들
베네딕트 아놀드 제시 제임스 존 윌크스 부스 알 카포네 빌리 더 키드
윌리엄 M. 트위드 찰스 맨슨 와일드 빌 히콕 리 하비 오즈월드 러키 루치아노
존 딜린저
예술가들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 앤디 워홀 프레데릭 로 옴스테드 제임스 애벗 맥닐 휘슬러 잭슨 폴록
존 제임스 오듀본 조지아 오키프 토머스 에이킨스 토마스 내스트 알프레드 스티글리츠
안셀 애덤스
종교인들
조셉 스미스 주니어 윌리엄 펜 브리검 영 로저 윌리엄스 앤 허치슨
조너선 에드워즈 L. 론 허버드 엘런 화이트 코튼 매더 매리 베이커 에디
빌리 그레이엄
팝 아이콘들
마크 트웨인 엘비스 프레슬리 마돈나 밥 딜런 마이클 잭슨
찰리 채플린 지미 헨드릭스 마릴린 먼로 프랭크 시나트라 루이 암스트롱
메리 픽포드
제국-건설자들
앤드루 카네기 헨리 포드 존 데이비슨 록펠러 존 피어폰트 모건 월트 디즈니
토머스 에디슨 윌리엄 랜돌프 허스트 하워드 휴즈 빌 게이츠 코르넬리우스 밴더빌트
스티브 잡스
운동선수들
베이브 루스 무하마드 알리 재키 로빈슨 제임스 네이스미스 아놀드 슈워제네거
타이 콥 마이클 조던 헐크 호건 짐 도프 세크리테어리엇
빌리 진 킹
출처 }}}}}}

The 50 Greatest Players in National Basketball Association History
NBA 역사상 위대한 선수 50인
in 1996. ESPN / 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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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트 서몬드 네이트 아치볼트 데이브 빙 데이비드 로빈슨 데이브 코웬스 돌프 세이즈 레니 윌킨스
래리 버드 로버트 패리시 릭 배리 마이클 조던 매직 존슨 모제스 말론 밥 페팃
빌 러셀 빌 셔먼 빌 커닝햄 빌 월튼 샤킬 오닐 샘 존스 스카티 피펜
아이재아 토마스 얼 먼로 엘빈 헤이즈 엘진 베일러 오스카 로버트슨 웨스 언셀드 윌리스 리드
윌트 체임벌린 월트 프레이저 제리 루카스 제리 웨스트 제임스 워디 조지 거빈 조지 마이칸
존 스탁턴 존 하블리첵 줄리어스 어빙 카림 압둘 자바 칼 말론 케빈 맥헤일 클라이드 드렉슬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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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Greatest Boys McDonald's All Americans
맥도날드 올 아메리칸이 선정한 위대한 소년 35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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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랜트 힐 글렌 로빈슨 닥 리버스 대니 매닝 데릭 로즈 도미니크 윌킨스 드와이트 하워드
랄프 샘슨 래리 존슨 르브론 제임스 마이클 조던 매직 존슨 바비 헐리 빈스 카터
샘 퍼킨스 샤킬 오닐 아마레 스타더마이어 아이재아 토마스 알론조 모닝 제리 스택하우스 제이 윌리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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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nba_jordan_38.jpg
시카고 불스 영구결번[1]
No.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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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애미 히트 영구결번
No. 23
네이스미스 농구 명예의 전당 헌액자
파일:external/www.hoophall.com/c9429ba857c3d4278a2431f0689f4e23_f560.jpg
마이클 조던
헌액 연도 200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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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 1992 1993
1996 1997 1998

1985년 NBA 올해의 신인상
랄프 샘슨 마이클 조던 패트릭 유잉
1988년 NBA 정규시즌 MVP
매직 존슨 마이클 조던 매직 존슨
1991년 ~ 1992년 NBA 정규시즌 MVP
매직 존슨 마이클 조던 찰스 바클리
1996년 NBA 정규시즌 MVP
데이비드 로빈슨 마이클 조던 칼 말론
1998년 NBA 정규시즌 MVP
칼 말론 마이클 조던 칼 말론
통산 5회 NBA 정규시즌 MVP 수상.
1991년 ~ 1993년 NBA 파이널 MVP
아이재아 토마스 마이클 조던 하킴 올라주원
1996년 ~ 1998년 NBA 파이널 MVP
하킴 올라주원 마이클 조던 팀 던컨
통산 6회 NBA 파이널 MVP 수상.
1987년 ~ 1993년 NBA 올해의 득점왕
도미니크 윌킨스 마이클 조던 데이비드 로빈슨
1996년 ~ 1998년 NBA 올해의 득점왕
샤킬 오닐 마이클 조던 앨런 아이버슨
통산 10회 득점왕 수상, 역대 득점왕 횟수 1위
(1987년~1993년 7년 연속 득점왕, 1996년~1998년 3년 연속 득점왕 기록.[2])
1988년 NBA 올해의 수비수상
마이클 쿠퍼 마이클 조던 마크 이튼
1988년 NBA 올해의 스틸왕
앨빈 로버트슨 마이클 조던 존 스탁턴
1990년 NBA 올해의 스틸왕
존 스탁턴 마이클 조던 앨빈 로버트슨
1993년 NBA 올해의 스틸왕
존 스탁턴 마이클 조던 네이트 맥밀런
통산 3회 NBA 올해의 스틸왕 수상.
1988년 NBA 올스타 MVP
톰 챔버스 마이클 조던 칼 말론
1996년 NBA 올스타 MVP
미치 리치먼드 마이클 조던 글렌 라이스
1998년 NBA 올스타 MVP
글렌 라이스 마이클 조던 샤킬 오닐
팀 던컨[3]
통산 3회 NBA 올스타 MVP 수상.
1987년 ~ 1988년 NBA 슬램덩크 컨테스트 우승자
스퍼드 웹 마이클 조던 케니 워커
통산 2회 NBA 슬램덩크 컨테스트 우승자.

파일:sportsillustrated_logo.png
1991년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 선정 올해의 스포츠맨
파일:external/cdn-jpg.si.com/michael-jordan-soty-cover2.jpg
조 몬타나 마이클 조던 아서 애시
}}}||
파일:샬럿 호네츠 마사장.jpg
샬럿 호네츠 구단주
마이클 제프리 조던
(Michael Jeffrey Jordan)
생년월일 1963년 2월 17일 ([age(1963-02-17)]세)
국적 파일:미국 국기.png 미국
출신지 뉴욕브루클린
출신학교 노스 캐롤라이나 대학교
노스 캐롤라이나 타 힐스 (1981~1984)
신장 198cm
체중 98kg[4]
포지션 슈팅 가드[5]
후원사 에어 조던[6][7]
드래프트 1984년 드래프트 1라운드 3순위
시카고 불스 지명
역대 소속팀 시카고 불스 (1984~1993)
버밍햄 배런스[8] (1994)
시카고 불스 (1995~1998)
워싱턴 위저즈 (2001~2003)
등번호 23번[9], 45번[10], 9번[11] 12번[12]
수상내역 NBA Finals 우승 6회 (1991-1993, 1996-1998)
정규시즌 MVP 5회 (1988, 1991-1992, 1996, 1998)
NBA Finals MVP 6회 (1991-1993, 1996-1998)
NBA All-Star Game MVP 3회 (1988, 1996, 1998)
NBA Defensive Player of the Year 1회 (1988)
NBA All-Star 14회 (1985-1993, 1996-1998, 2002-2003)[13]
All-NBA First Team 10회 (1987-1993, 1996-1998)
All-NBA Second Team 1회 (1985)
NBA All-Defensive First Team 9회 (1988-1993, 1996-1998)
NBA Rookie of the Year (1985)
NBA All-Rookie First Team (1985)
NBA Slam Dunk Contest champion 2회 (1987-1988)
NBA scoring leader 10회 (1987-1993, 1996-1998)
NBA steals leader 3회 (1988, 1990, 1993)
1984 로스앤젤레스 올림픽 금메달
1992 바르셀로나 올림픽 금메달
명예의 전당 헌액

1. 개요2. 상세
2.1. 조던의 제왕적 면모2.2. 독한 놈 마이클 조던
3. 생애4. NBA에 미친 영향5. 기록6. 플레이 스타일
6.1. 역사상 가장 강력한 공격무기6.2. 가장 압도적인 수비수6.3. 슈팅가드 포지션의 혁신을 가져오다
7. 관련 일화8. 이것저것
8.1. 넘사벽 인기

1. 개요

파일:external/www.mevsmj.com/jordan-23.jpg

미국의 전 NBA 농구 선수로 포지션은 슈팅 가드. 현재 NBA 팀 샬럿 호네츠의 구단주 겸 사업가이다.

별명은 Air, His Airness[14], MJ[15], Black Cat[16], GOAT[17] 등으로 불리고, 한국에선 농구황제, '그 분', 마사장, 쪼잔왕, 미카엘 요르단, 역사상 최고의 소인배, 신발장수 아저씨(...)[18] 등으로 불린다. 농구를 넘어 90년대 미국문화의 아이콘 중 한 명이었던 남자.

2. 상세

선수 시절 등번호는 23번.[19][20] 워낙 그가 유명해서 농구의 23번 하면 99.9% 조던. 농구가 아니더라도 조던 세대들은 숫자 23을 조던넘버라고 부르기도 한다.[21] 농구인들 끼리는 암묵적으로 23번이 축구에서 10번의 상징 그 이상으로 여겨 지거나 아예 부담으로 느껴지는 경우도 있는 만큼 조던이 아무 의미 없던 특정 백넘버[22]에 이 정도 의미를 부여했을 정도로 얼마나 대단한 업적을 남겼는지 어렴풋이 알 수 있다. 그의 시그니처 농구화로는 에어 조던이 있다.

지금도 NBA를 비롯하여 전세계 농구를 대표하는 역사상 최고의 선수이자 슈퍼 스타.[23][24] 농구 그 자체를 대표하는 선수. NBA를 지금의 위치로 올려놓은 두 인물 중 하나로, 나머지 한 명이 커미셔너를 역임한 데이비드 스턴임을 감안할 때, 선수인 그의 영향력은 절대적이라 봐도 좋다. 의심할 여지가 없는 농구선수 역대 탑1이다.

미국에서는 NFL에 대적할 수 있는 스포츠가 없다고 할 수 있지만, 농구도 조던이 선수로서 뛰던 시절엔 그 관심도에서 밀리지 않았고, 그는 실질적으로 NBA라는 리그를 세계적인 리그로 만든 인물이다. 통산 게임당 득점이 30.1점으로 올 타임 1위에 자리잡고 있는 역대 최고의 스코어러였으며[25], 올해의 수비수상을 수상받은 경력이 있을 정도로 수비력 역시 역대에서도 손에 꼽히는 수준이다. 거기에 계약서에 "상기에 명시된 경기 이외에 몇 경기를 그저 농구가 좋아서(for the love of the game) 돈을 받지 않고 뛰어 줄 수도 있다"고 할 정도로 그야말로 '농구에 미친 사람'이었다. 그리고 미디어에 자신을 포장할 줄도 알았으며, 이미지 메이킹에도 천부적인 소질을 발휘, 결과적으로 농구황제로 불린다.

조던은 매직 존슨, 래리 버드의 라이벌리 시대가 끝나가는 시기인 1990년 초에 최정상 자리를 차지하면서 자연스럽게 NBA 대표스타로 떠오를 수 있었고, 그 당시부터 위성 방송으로 라이브 경기를 세계에서 비교적 싼 값에 송출할 수 있는 시대가 열렸기 때문에 운이 좋았다고 할 수도 있다. 더군다나 지금과 같이 인터넷이나 스마트 기기들로 활발히 정보교환이 되는 시기도 아니라 이미지 메이킹에 더욱 편리한 시대였기도 했다. 매직 존슨이나 줄리어스 어빙 같은 그 이전 세대의 NBA 간판이었던 선수들과 비교해보면 시기적으로 굉장히 잘 타고났다고 할 수도 있다. 물론 이런 기회를 잡은 건 온전히 그의 실력. 실제로 그 이전에 시대를 지배한 러셀과 체임벌린의 경우 서로 대등한 라이벌이었고, 70년대 최고 선수인 카림은 이때 우승이 한번에 불과하며, 매직과 버드도 실적은 매직이 좋지만 둘 역시 대등한 라이벌이었고, 2000년대에 두각을 나타낸 샤킬 오닐, 팀 던컨, 코비 브라이언트 역시 누가 압도적으로 최강이라고 할 정도는 아닌데 조던은 90년대 독보적인 원톱으로 나머지 슈퍼스타들을 전부 콩라인으로 만들 정도였다. 팀성적 + 개인성적의 조합으로 이처럼 압도적인 선수는 그 이전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아직까지 나타나지 않고 있다. 인기 면에선 시대를 잘 타고난 부분도 있지만, 실력 면에선 이미 역대 최고라 인정받는 마당에 딱히 태클을 걸 건덕지가 없는 것.
사실 "시대를 잘 타고났다"고 말하기가 좀 애매한게, 조던 수준의 실력과 인기를 지닌 선수는 그 이전에도 이후에도 없었기 때문에 비교할 대상이 없기 때문이다. 만약 매직, 버드나 어빙, 후대의 코비, 르브론 등이 최소한 리그 내에서 입지가 조던과 비슷한데 노출도의 차이로 조던이 압도적인 상품가치를 갖게 되었다면 시대차이에서 원인을 찾을 수 있겠지만, 이들은 조던만큼의 입지를 가진 적이 없다. 특히 조던의 경우 현재 스타들에 비해 노출도에서 훨씬 떨어진다. 이득이 되는건 오직 이미지 메이킹 하나 때문인데, 사실 조던은 본인의 소심하고 지독하기까지 한 승부근성이 다 까발려진 이후인 2010년 이후에도 계속해서 농구선수들 중 압도적인 인기를 자랑했다. (밑의 기타 항목의 Harris Poll참고) 또한 지금도 그가 역대 최고의 선수라는 걸 부인하는 이들은 거의 없다. 종합해보면 노출도면에서 선배들보다 유리했을지는 모르나, 까놓고 말해 후배들보다 이득을 본 부분은 없다. 조던이 압도적인 농구황제로 추앙받는건 르브론 등 다른 선수들보다 뛰어난 실력과 성과를 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은퇴선수들은 현역선수들에 비해 선수평가에서 불리한 경우가 많은데 조던의 역대 1위자리는 요지부동이다.

압도적인 실력과 시대적 배경을 떠나도 그의 생애 자체가 마치 짠 것처럼 너무나도 드라마틱한 것 역시 그의 인기에 한 몫하고 있다. 잘하는 선수야 많았지만, 이렇게 각본을 쓴 것처럼 농구인생이 드라마틱하고 극적인 요소가 많은 농구선수는 없었다.

고등학교 시절 탈락 후 실력을 갈고닦아서 전미 최고수준의 유망주가 됐고, 1학년때 당시 기준으로 농구 역사상 가장 많은 유료관중들 앞에서 역전 위닝슛을 터뜨린 것까지는 그렇다고 쳐도, 부상 당하고 복귀한지 얼마 안되어 역대 최고의 팀을 상대로 터뜨린 63점 플레이오프 신기록, NBA역사상 최초로 시리즈 최종전에서 지고있는 팀이 버저비터로 역전승한 The Shot, 리그 최하위권 팀에 데뷔해 한단계 한단계씩 성장하며 리그 최강이던 피스톤즈를 상대로 레벨업을 하듯 매해 1패씩 줄여나가다가 승리, 디펜딩 챔피언은 아니지만 80년대를 지배한 매직의 마지막 파이널과 맞물린 그의 첫 파이널, 대관식을 하듯 매직과 비슷한 방식으로, 매직보다 더 뛰어난 활약을 하며 승리해 첫 우승, 같은 포지션의 라이벌이었던 클라이드 드렉슬러와 맞붙어 모든 면에서, 심지어 약점이라 여겨졌던 3점슛에서조차 그를 능가하며 두번째 우승, 동년배들 중 처음으로 MVP투표에서 조던을 제낀 절친 찰스 바클리를 능가하며 한 세번째 우승, 모든 걸 이룬 바로 그 해 찾아온 아버지의 피살이라는 비극, 이로 인해 정상의 자리에서 미련없이 은퇴, 아버지와의 추억이 서린 야구라는 스포츠로 도피, 야구계 파업과 함께 복귀, 복귀해서 겪은 좌절, 좌절을 딛고 이뤄낸 NBA사상 한 시즌 역대 최다승 기록, 복귀 후 네번째 우승을 하필 아버지의 날에 이뤄냄, 다시 오른 파이널 무대에서 팽팽히 맞선 승부처, 제대로 걷기조차 힘들 정도로 안 좋은 몸상태를 딛고 이뤄낸 승리, 마지막 파이널 무대에서 믿었던 2인자의 부상 재발, 동료들의 단체 부진을 딛고 원맨쇼로 꾸역꾸역 따라가다가 마지막 순간에 스틸+역전위닝샷, 리그 최고의 선수로 우승까지 거머쥔 상태에서 다시 한번 정상에서 미련없이 은퇴, 웬만한 선수들은 커리어에 몇번 있는 정도인 극적인 사건이 거의 매해 있을 정도로 엄청난 드라마의 주인공이기도 했다.[26]

2.1. 조던의 제왕적 면모

"마이클이 (첫 번째로) 컴백한 뒤 멤버들은 다들 알아서 열심히 뛰었다. 연습도 전쟁이었다.[27][28] 때문에 나로서는 좀 편한 점도 있었다. 불스가 대학생이라면 (샤킬 오닐코비 브라이언트가 이끈) 레이커스는 초등학생들이었다. 이들의 집중력이 떨어졌기 때문에 내가 선수들 개개인에 좀 더 시간을 할애할 필요성을 느꼈다."
필 잭슨 - 1989~1998년 시카고 불스 감독
"어떤 팀이든 간에 우열순서의 확립은 필수적이야. 우리 팀의 경우엔 별 문제가 없었어. 우리에겐 마이클이 있었으니까. 다른 사람들은 그저 지켜보기만 하면 되는거지. 물론 그건 리더가 없을 때에는 상당히 어려울거야. 하지만, 우리에게는 NBA에서 가장 위대한 아니, 모든 스포츠를 통틀어 가장 위대한 리더가 있었어. 모두가 그를 절대자로서 인정했고, 데니스도 마이클에게 대들지 않았어. 아니, 그럴 생각조차 없었지."
스티브 커 - 1993~1998년 시카고 불스 포인트 가드

실제로 조던 본인은 제왕적인 면모를 가진 인물이었다. 소심 쪼잔왕 조던 시대의 시카고 불스샌안토니오 스퍼스에서 수차례 우승을 경험했고, 2014년부턴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에서 감독을 맡고 있는 스티브 커는 "연습 때 마이클이 하도 지독하게 갈궈대서 경기때는 긴장하는 선수가 거의 없었다. 경기보다 연습이 더 힘들었으니까. 사람들은 데니스 로드먼이 마이클한테 대들다가 쫄아서 얌전히 지낸 줄 아는데 그건 모르는 소리다. 애초에 로드먼은 마이클에게 대들 생각 자체를 한 적이 없었다." 라고 말한 바 있다.[29][30]어떤 경기에서는 스카티 피펜이 4쿼터에 조던과 필 잭슨의 지시를 무시하고 결정적인 포지션에서 슛을 던졌는데, 조던이 그 즉시 타임아웃을 부르고 면전에서 피펜을 호되게 질책했던 일도 있었다.

오죽하면 "당시 필 잭슨은 감독이 아니었다. 마이클이 감독이었다."라고 말하는 사람까지 있을 정도다. 김수겸?[31] 드물게도 스티브 커가 보기와는 다르게 조던에게 상당히 개긴 케이스.[32] 스티브 커 외에 스카티 피펜 역시 조던을 상대로 쫄지 않고 도전을 하는 선수였는데, 비록 조던과 피펜이 사적으로 친한 것은 아니지만 조던은 피펜을 존중했다고 한다. 반대로 성격이 유순한 호레이스 그랜트는 조던이 제법 힘들게 굴었다고.[33] 1차 쓰리핏의 주전 센터였던 빌 카트라이트도 라커룸에서 그간 조던한테 워낙 갈굼을 당하며 쌓인 것이 폭발해 조던의 면전에서 다리를 부러뜨리겠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고 한다.[34]

국내에 많이 퍼진 이야기로 절친 찰스 오클리와 트레이드되어 불스에 온 빌 카트라이트를 조던이 못살게 굴었다가 있는데 이건 악의적인 해석이 꽤 들어간 이야기다. 조던이 오클리 트레이드에 분노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 분노는 카트라이트보다는 구단주와 프런트를 향한 것이었고 합류초반에 상냥한 성격의 카트라이트가 코트 위에서 전투적이지 못할거라고 생각하다가도 오해를 풀고 팀원으로 받아들였다. 조던은 승리에 모든 것을 거는 타입의 선수였기 때문에 전쟁같던 연습시간, 제왕같은 성격때문에 동료들을 빡세게 다루더라도 그것이 불화와 팀 와해로 이어지지 않도록 참을 수 있는 면모도 가지고 있었다.
다만 조던 룰스 책에도 나온 내용으로 조던이 카트라이트에게 까칠하게 굴거나 일부러 잡기 힘든 빠른 패스를 얼굴로 던져서 놓치게 만드는 등 망신을 주는 행위를 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는 카트라이트를 꼬집어 괴롭히기보다는 끝없는 승부욕을 가진 조던이 동료들을 자극하기 위해 다른 동료들에게도 행한 방식이다. 피펜과 그랜트를 포함한 다른 주축 선수들도 이에 똑같이 당했으며, 기대가 클수록 이런 조던의 도전은 더욱 심했다.[35][36] 카트라이트의 경우 계속된 부상으로 기동력과 득점력이 크게 하락했고, 조던 본인 페이스에 맞춰 따라올 수 있을지 의구심이 들었기 때문에 계속 실험한 것이다. 게다가 그의 대가로 포기한 찰스 오클리는 리그 수위권 리바운더일 뿐 아니라, 리바운드를 잡고 바로 속공하는 조던에게 롱패스를 찔러주는 센스가 있을 정도로 "빠릿빠릿한" 선수였다. 단순히 조던의 절친이 아니라 불스에서 매우 중요한, 젊은 선수였다. 근데 나이도 더 많고 부상도 잦은데다 이미 벤치로 물러난 선수를 데려오니 의구심이 안 들수가 없다. 그러나 카트라이트가 수비의 앵커 역할 할 것이라 믿었던 불스 프런트의 안목은 정확했고, 조던 역시 카트라이트의 가치를 알게되자 그를 신뢰했다. 상술한 갈등은 어디까지나 영입 초반의 일이다.

카트라이트는 그 이후 제왕적인 조던의 리더십의 뒷면에서 팀원들을 보듬어주는 역할을 맡았고[37] 1차 쓰리핏의 멤버로 활약했다. 조던의 안 좋은 면을 폭로하기로 유명했던 그랜트와는 달리 카트라이트는 은퇴 이후 조던에 대해 불만의사를 내비친 적은 없다.

이렇듯 이미 90년대 초반에 팀원들 사이에 정리가 끝난 조던과 카트라이트의 갈등 스토리지만 지금도 지속적으로 확대해석되어 조던을 끝없이 깎아내리는 사람들에게 악용되는 경우도 있다.

2.2. 독한 놈 마이클 조던

어떤 일을 하기에 앞서 스스로 그 일에 대한 기대를 가져야 한다.
You have to expect things of yourself before you do them.
나는 농구를 시작한 이래 9,000번 이상의 슛을 놓쳤다. 나는 거의 300번의 경기에서 졌다. 나는 26번의 경기를 결정짓는 위닝샷을 놓쳤다. 나는 실패하고, 실패하고, 또 실패했다. 그것이 내가 성공한 이유다.
마이클 조던, 나이키 광고에서.
마이클 조던을 이기기 위해서는 그의 심장을 도려내야 한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잘 모르는데 그것(그의 강심장)이 그의 최고의 재능이기 때문이다. (그의 강함의 비결은) 그의 정신 속에, 그의 마음 속에 있다.
You're gonna have to cut Michael Jordan's heart out to beat him. Because, people don't understand that's his greatest talent. It is in his inner gut, it is in his inner heart,
조지 칼 1992~1998 시애틀 슈퍼소닉스 감독

물론, 천부적인 재능과 하늘이 내린 육체가 있었으나 자신의 위치에 만족하지 않고 끊임없이 엄청난 노력을 더했다. 이 모두가 조화를 이루면서 천재가 노력까지 해서 더 높은 위치까지 올라간 인물이다. 특히, 이런 노력의 바탕에는 그 스스로가 지닌 엄청난 승부근성과 경쟁심이 있었다. 타인의 비난이나 태클에 지독할 정도로 집착해서 그걸 앙갚음을 해주는지라...

숱한 사례가 있었지만, 몇 가지만 이야기하면

* 1995시즌, 밴쿠버 그리즐리스와의 경기에서 그리즐리스가 4쿼터 시작 후 11:2로 앞서나가자, 그리즐리스 선수 데릭 마틴(Derrick Martin)이 마이클 조던에게 “우리가 오늘 널 박살낼 거라고 했지?(I told you that we’re gonna beat you tonight.)”라며 조롱했다. 이 말을 듣고 빡친 조던은 4쿼터 6분동안 19득점 꽂아 넣으며 팀의 승리를 이끌었는데, 위의 영상 3분 50초쯤 보면 경기 중 덩크를 성공시키고 밴쿠버 벤치로 가서 "입 닥쳐, 이 X만한 개자식아.(Shut up, you little bitch.)"라고 말하는게 나온다.

마음만 먹으면 꼭 그 플레이를 실현한다는게 조던 최대 강점이다. 실제 조던이 포인트가드를 보던 시즌에는 (30득점, 8리바운드, 8어시스트, 2스틸, 1블락) 모든 부분 초과를 찍었을 정도였다. 만약 당시 어떤 기자, 타구단관계자가 '시즌 트리플더블은 조던 이라도 무리' 라고 말했다면 분명 어렵지 않게 시즌 트리플더블을 만들었을 것 이다. 하지만 르브론, 웨스트브룩 유형의 선수들과 달리 조던은 득점력 자체가 팀을 승리로 이끌었고 본인도 잘 알기에 무리해서 다른 부분 스탯을 올리려 하지 않았다. 르브론의 경우 A 패스욕심과 폭탄돌리기 패스로 보인다는 점에서 커리어 내내 비판을 받았고 웨스트브룩의 리바운드는 거품이 낀 기록으로서 상대방 마지막 자유투시 OKC 빅맨 2명 스크린을 걸고 웨스트브룩이 수비리바운드를 잡거나 양보로 인해 리바운드를 잡는 등 많은 희생으로 시즌 트리플 더블을 완성한 것으로 의심된다는 점에서 비판을 많이 받았다. 물론 시즌 트리플 더블은 그 의미가 크기에 시즌 MVP를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던의 89시즌 당시 트리플 더블이 무서웠던 이유는 다음과 같다. 조던은 원래 트리플더블에 목메는 선수가 아니었다. 조던은 89시즌 이전까지 통산 트리플더블이 네 시즌동안 5번, 이후론 10시즌동안 8번에 불과했다. 이 시즌에 65경기를 소화한 시점까지 그는 32.6득점 7.6어시스트 7.6리바운드를 기록하고 있었다. 트리플더블은 5개. 그러나 언론에서 득점만 뛰어날 뿐, 어시스트와 리바운드가 약하다는 기사를 트리플 더블을 바탕으로 냈다. 조던은 이 기사를 접하자마자 이에 시위 하듯이 나머지 16게임동안 10개의 트리플 더블을 찍었다. 정확히는 7게임 연속 트리플 더블 후 한경기 쉰 후에 3연속 트리플 더블을 달성했다. 말 그대로 원하면 원하는 대로 스탯을 찍은 것이며, 더욱 무서운 건 그 기간동안 득점은 그대로였다는 점이다. 심지어 11경기 중 10개를 하던 (그 중 7개 연속) 기간에는 33.6점 11.4어시스트 10.8리바운드, 득점/리바운드/어시스트가 모두 올랐다. 이로 인해 해당시즌 조던은 32.5득점, 8어시스트, 8리바운드를 달성했다. 물론 여기까지는 공격과 리바운드 관련 스탯만 본 것이다. 조던이 88시즌 수비왕 및 스틸왕을 받았다는 것을 생각해보자. 당시 그가 리그 최고의 수비수였다는 점 까지 고려하면... "공격은 관중을 부르고 수비는 승리를 부른다." 수비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해 인용되는 이 격언을, 문자 그대로 모두 달성한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승부근성과 경쟁심이 너무 지나쳐서 병적일 정도였다는 평까지 듣는데, 심지어 플레이오프 중간중간 쉬는 날에 도박이나 골프, 여타 스포츠를 통해 끊임없이 자기 자신의 승부근성을 불태웠다고 한다. 뭐 이렇게 보면 도박 중독(…)에 가까워 보이고, 이런저런 루머[45][46]도 무수히 많았지만 스포츠 도박은 전혀 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이며, 덕분에 자기 자신의 본업이나 생활에는 별 영향을 미치지는 않은 걸로 보인다.[47]

그리고 이러한 승부근성을 바탕으로 NBA 역사상 가장 뛰어난 클러치 플레이어로 손꼽힌다. 상대팀은 몇 초가 남건 2점차건 3점차건 경기 종료 직전 그가 볼을 잡았다 하면 에워싸기 일쑤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차례 팀을 위기에서 구해냈다. 그 스스로가 클러치 타임의 플레이를 설명할 때조차 "그 순간은 나 스스로가 가장 유리하다고 느낀다" 라고 할 정도.

그의 클러치 능력이 가장 빛났던 곳은 플레이오프와 파이널 무대였다. 실제로 매직 존슨, 래리 버드 등의 레전드들부터 코비 브라이언트, 르브론 제임스 등 현대의 위대한 선수들까지 역대급 선수들도 거의 전부 플레이오프에서 자신의 팀보다 낮은 전력의 팀에게 패배하는 "업셋(upset)" 경험이 한두번씩은 있다. 그러나 조던은 13번 플레이오프에 진출하는 동안 단 한번도 업셋당한 적이 없다.[48]

또한, 대부분의 선수들이 수비가 치열해지는 플레이오프에서는 득점이 정규시즌과 대비해 그대로거나 떨어지는 반면, 조던은 정규시즌->플레이오프->파이널로 가면 갈수록 평균 득점이 쭉쭉 상승하는 매우 희귀한 케이스였다. 98시즌엔 정규시즌 득점이 풀시즌 기준으로 신인시절 이후 최악인 28점대로 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플레이오프에선 32.4점, 파이널에선 무려 33.5점을 기록했다.[49]

사실 정규시즌 득점기록은 윌트 체임벌린이 대부분 앞서지만, 플레이오프에선 윌트조차 비교가 안된다. 플레이오프 득점기록을 보면 말 그대로 조던의 독무대다. 역대 플레이오프 한경기 최다 득점 기록을 보면 1위, 공동 3위를 포함해 상위 10위까지의 기록중 딱 절반인 5개가 조던의 기록이다.[50] 플레이오프때 60점을 넘긴 유일한 선수가 조던과 엘진 베이러뿐이며[51] 현대 50점을 넘긴 횟수만 봐도 조던 8회, 윌트 체임벌린 4회, 앨런 아이버슨 3회, 제리 웨스트 2회이다. [52] 누적기록의 경우 조던이 179경기밖에 뛰지 않아 그렇게까지 압도적이진 않다. 2017 플레이오프에 르브론 제임스가 조던을 제치고 역대 1위에 올랐을 정도. 하지만 평균에선 33.4점으로 압도적인 1위를 유지하고 있다. 역대 유일하게 플레이오프 평균이 30점이 넘는 선수로 다른 정상급 득점원들(제임스 28.4점, 제리 웨스트 29.1점, 케빈 듀란트 28.8점 등)과는 말 그대로 '''단위가 다르다. 게다가 듀란트, 제임스 등은 현재 커리어 중반이라 은퇴할 때쯤 되면 평균이 더 떨어질 게 확실시되므로... 사실 현 상위 5인 중 210경기 미만으로 뛴 유일한 선수가 조던일 정도로 적게 뛴 선수였음에도, 20년 가까이 통산 기록 1위를 기록했다는 것만 봐도 그의 평균이 얼마나 무지막지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의외로 NBA 파이널 1경기 역대 1위는 조던이 아닌 엘진 베일러가 갖고 있는 61점 기록이다. 조던은 55점으로 릭 베리와 함께 공동 2위. 그러나 다른 기록들은 여전히 압도적이다. 그가 93파이널에서 기록한 평균 41점은 당연히 역대 1위이고, 연속 20점 이상 경기 (35경기)와 연속 40점 이상 경기(4경기) 기록을 모두 보유하고 있다. (연속 30점 이상은 엘진 베일러가 보유)위에 언급됐듯 조던은 4경기 연속으로 40점을 넘겼는데, 그 외에 한번이라도 연속 40점을 기록한 선수는 웨스트와 샤킬 오닐 뿐이다.

조던의 플레이오프 통산 평균은 33.4점, 파이널 평균은 33.6점으로 다른 선수들이 근접조차 못하는 압도적인 1위이다.

이러한 경쟁심과 승부근성을 바탕으로 쌓아올린 스스로에 대한 자부심도 엄청나서 상대 선수와 팬들의 기를 압도적인 플레이와 트래쉬 토킹으로 죽여버리곤 했다. 일례로 애틀랜타 호크스, 마이애미 히트 등에서 뛰었고, 1994 캐나다 농구월드컵 드림팀 2기의 일원이었던 스티브 스미스와 매치업 했을 때, 조던이 경기중 갑자기 '38'(Thirty eight)을 흥얼거렸다. 스티브는 영문을 몰라 "너 뭐하냐?" 했는데 곧 '36'... '34'... 그렇다, 그날 조던의 목표 득점(…)이었다고 한다. 물론 달성했다.[53]그 외에 "나 오늘 50점 정도 넣을 것 같은데, 자네 아들이 보고 있다면 미안하게 됐어 낄낄"(...) 실제로 조던은 당대 최고 트래쉬 토커였던 게리 페이튼과 버금가는 트래쉬 토커였다.[54][55] 이렇게 보면 정말 어그로 투성이인 인물이지만, 실력이 너무도 아득해서 상대팀 팬들조차도 욕을 퍼붓다가 그가 플레이를 펼치면 넋을 잃고 바라봐야만 했다.

스포츠 일러스트지와의 악연도 유명한데 자기 야구선수 시절 악평을 했다고 93년부터 지금까지 인터뷰를 거부하고 있다. 50세 생일날 표지는 허락했지만 인터뷰는 거부했다고(...).

2013년 2월 17일 50세 생일을 맞아서 이런저런 칼럼이 전 세계에서 폭주했는데 아래의 칼럼을 읽어보면 조던의 경쟁심이 어느 정도인지, 그리고 그것들로 인해 그가 겪고 있는 나름의 애환을 살펴볼 수 있다. 인간미가 느껴지는 조던의 모습을 보고 싶은 팬이라면 추천.1편2편3편

3. 생애

마이클 조던/생애 문서 참조.

4. NBA에 미친 영향

파일:1988 slam dunk contest.jpg
1988년 슬램덩크 컨테스트에서 선보인 자유투 라인 덩크[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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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 조던의 위대함은 그가 경력을 통해 쌓은 실적과 기록, 그리고 아직까지도 채 식지 않은 인기로 증명되고 있지만, 더욱 대단한 것은 다음과 같은 영향을 아직까지도 NBA에 남기고 있다는 점이다.

5. 기록

※ 모든 기록은 10위 이내 입상 기록만 기재함.









6. 플레이 스타일

동부컨퍼런스에서 감독으로 일하다 보면 누구나 능력이 향상된다. 마이클 조던을 상대하기 위해 엄청난 고민과 연구를 하기 때문이다.
前 뉴욕 닉스 감독 제프 밴 건디
"당신은 하늘을 날 수 있나요?"
"조금은요."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이 열렸을 때 기자와 조던의 대화 내용[66]

플레이 스타일은 시기에 따라 세 가지로 나뉘는데 우선 블랙캣이라 불리던 초창기 시절에는 NBA 역사상 슈팅 가드 초일류로 분류되는 타고난 운동능력을 위주로 한 페인트존 닥돌과 그에 이은 득점 및 파울겟 능력, 풀업 점퍼를 기반으로 점수를 따내는 식이었다. 전성기에 비해 점퍼가 안정적이지는 않았지만, 원체 사기유닛인지라 인사이드를 미친듯이 돌파해 들어갔다. 당시 동영상을 보면 사기에 가까운 운동능력으로 붙잡아도 비집고 들어가고 돌파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물론 당시 조던의 점프슛이 안좋았던것은 아니다. 조던은 데뷔 이후부터 항상 점퍼와 자유투가 좋은 선수였다. 다만 그가 슛 매커니즘을 완성시킨 89년 이후부턴 막을 수 없게 된 것일 뿐이다.)[67]

블랙캣 시절의 조던은 돌파에 있어 티맥, 그랜트 힐 등등과 함께 역대 최고의 퍼스트스텝을 지닌 스윙맨이었으며(베이스라인 포스트업으로 시작되는 스핀무브 퍼스트스텝은 가히 대적할 자가 없다), 그의 최대의 장점이라고도 볼 수 있는 말체력과 바디밸런스는 간결한 무브와 미세한 페이크만으로도 쉽게 수비를 제치고 공중에서 빅맨들과 맞부딪히면서도 안정적으로 마무리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그것도 경기당 40분씩 82경기 꼬박꼬박 뛰던 양반이.[68] 젊었을 때 조던은 정말 말도 안되게 빨라서 어께를 움찔하는 것만으로 수비수의 타이밍을 뺏고 순식간에 돌파해버리곤 했다. 젊은 시절 조던의 사기적인 민첩성에 대해선 이 영상을 참고하자. 이때문에 일부 팬들은 드리블 실력이 다른 특급 스윙맨에 비해 떨어진다고 오해하기도 하는데, 페이크 하나만 하고 돌파할 수 있는데 쓸데없이 잔드리블을 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안 하는 것이다. 애초에 조던은 드리블을 하면서 최고속력으로 달릴 수 있는 선수이다.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그렇다고 이 시절 조던이 점퍼가 평균 이하였던 건 절대 아니다! 애초에 농구가 돌파로 모든 득점을 해낼 수 있는 것도 아니고,[69] 그랬다면 루키 시즌에 28점씩 때려박을 수 있을리가.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 있는데 그의 고감도 점퍼의 타점은 당시부터 매우 높은 편이었다. 다만 슈팅 매커니즘이나 폼에 있어서 약간 어설펐던 것이 사실이고, 이에 대해서는 대학시절 은사인 딘 스미스 또한 루키 시즌 이후 조던에게 점퍼를 보완하라고 조언했다고 한다. 뭐 그 이후에는 다들 아시는 대로... 완전체가 되었다. 90년대 초반 첫 번째 쓰리핏 시절을 보면 운동능력과 기술이 완벽하게 조합된 농구의 신을 볼 수 있다.

굳이 약점을 들자면 3점슛의 성공률이 슈팅 가드로서는 낮은 편이다. 실제로 루키시즌과 3번째 시즌까지는 3점슛 야투 성공율이 15% 정도였다. 하지만 그의 전매특허인 돌파에 이은 앤드원 플레이(득점 인정 반칙)가 있기 때문에 큰 상관은 없었다. 애초에 게임당 평균 30점을 넣어주는 선수인데 3점 좀 못 넣은들 뭐가 대수겠냐만. 그리고 3점도 평소엔 그저 보통의 가드 수준이다가, 누가 3점이 안좋다고 입이라도 벙긋하면 불타오른 승부근성으로 전반에만 3점 6개를 넣기도 했다. 그것도 파이널에서. 사실 3점슛 성공률이 낮은 이유는 마이클 조던이 농구를 배우던 학창시절에는 3점슛에 대한 규정이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동년배에도 이후 3점슛을 장착한 슈터들이 몇 있긴 했지만 조던 입장에선 굳이 플레이스타일을 바꿔가면서까지 3점슛을 익힐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르브론 제임스 문서에도 나와 있지만 조던의 첫 세번의 파이널과 르브론의 12~14 파이널을 비교하면 (르브론이 폭망한 07,11파이널이 빠져서 오히려 르브론에 유리한 비교이다.) 조던은 세번의 파이널에서 삼점슛 57개를 던져 24개를 성공 (성공률 42.1%)시켰고 르브론은 77개를 쏴서 29개를 넣었다(37.7%). 물론 두 경우 모두 단축라인이 아닌 정상적인 삼점라인. 즉 중요한 순간에는 3점이라도 쏠쏠하게 넣어줬다. 때문에 이는 크게 약점이었다고 보긴 힘들다.

넘사벽의 운동능력, 기술 때문에 많이 부각되지 않는 내용이지만 그의 가장 무시무시한 점 중 하나는 그의 끝을 모르는 체력이었다. 그는 만 35세였던 97-98시즌까지 평균 38.8분, 만 40세를 넘긴 마지막 시즌엔 전경기 출장에 평균 37분을 기록했는데, 이 정도 출장시간은 젊은 선수들 사이에서도 드물다.
단순히 오래 뛰는 것 외에도 그는 체력소모 자체가 엄청나게 많은 선수들 중 하나였는데, 공격에서 그는 골밑돌파를 적극적으로 시도해 자유투를 많이 얻어내는 선수였으며 볼이 없을때 스크린을 타고 돌아나오는 움직임도 많았다. 또한 수비에서는 자기 마크맨을 집요하게 괴롭힐 뿐만 아니라 끊임없는 도움수비를 통해 상대팀을 견제했는데, 당연히 이런 식의 수비는 체력소모가 장난이 아니다. 실제로 공격부담이 큰 선수가 이렇게 수비까지 큰 부담을 안는 경우는 거의 없는 이유가 체력소모 때문이다. 이 때문에 공수겸비인 코비 브라이언트도 나이가 들며 수비력이 크게 줄었고, 르브론 제임스의 경우에도 만 30세이던 2014년 이후 수비팀 선정 이력이 없다. 그럼에도 조던은 만 35세이던 98시즌까지 리그 최고의 수비수 중 하나였다.[70]
그가 유독 플레이오프와 큰 경기에 강했던 것도 따지고보면 이와 관련이 있는데, 플레이오프 후반쯤 되면 왠만한 말체력이라도 지치기 마련이다. 그러나 조던은 이런 체력이 있으니 파이널 최후반까지 좋은 활약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체력적 한계에 부딫혔던 98년 파이널같은 경우에도 슈팅부진에 시달리면서도 결국 결정적인 스틸에 이은 결승점을 넣었으니 체력 뿐 아니라 정신력과 집중력도 역대 최고였다고 볼 수 있다.

체력과 동일선상에 있는 얘기로 나이를 들면서 기량을 보존하는 것도 다른 슈퍼스타들보다 월등했다. 80년대 데뷔한 선수들 중에는 로버트 패리쉬, 카림 압둘자바, 존 스탁턴&칼 말론 등 괴물들도 있지만 보통 현대처럼 관리를 받지 않고 부상을 안고 뛰는 경우도 많았기 때문에 (래리 버드와 케빈 멕헤일 모두 부상을 안고 뛰다가 선수생명이 짧아졌다) 현대처럼 커리어가 길지 않았다. 조던보다 두 살 많은 아이재아 토마스나 버드는 13년, 멕헤일은 14년 뛰었고, 그 외에도 15년 이하로 뛰는 선수들이 흔했다. 그러나 조던은 35세까지 리그 최고의 선수로 군림했으며, 40에 가까운 나이에 복귀했을때도 놀라운 모습을 보였다.[71] 18-19시즌 기준 만 34세인 르브론이 현저한 기량 저하를 보여주고 있고, 코비 브라이언트 역시 만 34세 기준으로 퍼스트팀 선정이 끊기고 큰 부상을 당해 완연한 하락세였다는 걸 생각하면 35세에 MVP/득점왕/수비퍼스트팀/파이널 MVP를 싹쓸이한 조던의 위엄은 놀라운 수준이다.
부상을 잘 안 당한 것도 있지만, 부상을 당하고 참는 능력도 대단했다. 워싱턴 위저즈 시절 복귀 후 첫 시즌에 그는 시즌 후반, 새크라멘토 킹스 전에서 동료와 부딪혀 반월상연골 파열이란 부상을 당했음에도 해당 경기에서 41분을 뛰고, 부상이 더 심해져 수술을 해야할 때까지 무릎통증을 참고 7경기동안 35.9분이나 뛰었다. 심지어 수술 이후에도 시즌아웃되기 전까지 벤치에서 7경기를 더 뛰었다. 즉, 조던은 다른 80년대의 레전드들, 버드나 아이재아 토마스 등과 마찬가지로 뛸 수 없을 때까지 뛰는 선수로, 그의 놀라운 출장경기수는 여기서 오는 것이다. 뒤집어 보면 몸을 사리지 않는(심지어 은퇴할때까지 수비도 공격만큼이나 빡세게 했다) 플레이스타일임에도 저 늦은 나이까지 기량을 유지했다는 것이 더 놀라운 것.

조던이 은퇴한지 어느덧 20년을 향해가는 중이지만 조던의 플레이들은 영상과 움짤로 꾸준하게 현시대의 NBA팬들에게도 감탄을 자아내게 하고 있다. 조던을 깎아내리면서 자신이 응원하는 선수를 찬양하려는 일부 팬덤들[72]조차도 입을 다물게 할 정도. 본격적으로 NBA와 미디어가 상호작용을 보이기 시작한 90년대를 지배했던 선수이니만큼 영상자료가 많이 남아있어 과대평가 논란조차도 없는 선수다.[73]

종합적으로 역동적으로 정형감있게 보여주는 가히 완벽한 스킬과 최고의 운동능력,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강철같은 신체와 체력, 거기에 불타는 승부욕과 강심장을 소유한 최고의 선수라고 할수있다.

6.1. 역사상 가장 강력한 공격무기

조던의 공격스타일을 종합하자면 다음과 같다: 골밑 ~ 20피트까지 범위에선 역대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무시무시한 위력을 지닌 득점원.
시기에 따라 비중의 차이는 있지만 그는 페이스업/포스트업 모두 능했으며 그 상태에서 언제든지 점퍼를 쏘거나 바로 돌파로 전환하는 능력도 대단했다. 실제로 그는 슛거리가 현대 슈팅가드들에 비하면 비교적 짧지만 중거리슛에 있어선 역대 최고 수준의 정확도를 자랑하며, 페이더웨이나 고속이동 중 풀업점퍼의 정확도 역시 비할데 없이 안정적이고 정확하다. 골밑 마무리는 가드로서 마찬가지로 역대 최고 수준으로 양손레이업 모두 정확할 뿐 아니라 덩크로 강한 마무리를 하거나 훅슛까지 능했다.[74]

미친듯한 돌파와 비교적 거리가 짧은 중거리 점퍼를 주무기로 했던 80년대에는 조던의 야투 성공률이 대단히 높았는데, 평균 32점을 53.9%의 확률로 넣고, 그 전 시즌에는 평균 35점을 53.5%의 확률로 넣은 적도 있다. 물론 르브론 제임스의 경우 55.1%의 야투율을 기록한 적도 있지만, 보통 야투율은 슛을 많이 던질수록, 그리고 팀원들이 약할수록 (수비가 자신에게 집중되기 때문에) 떨어진다는 걸 생각하면 원맨팀에서 저 스탯을 찍은 조던이 얼마나 사기적인지 알 수 있다.[75] 르브론의 경우 저 미친 야투율을 찍을때 평균득점이 27점이었으며 클리블랜드 원맨팀 시절에 생애 유일한 득점왕(평균 30점)을 찍었을 때 야투율은 48.1%였다. 심지어 조던은 악질 수비로 유명한 "배드보이즈" 피스톤즈를 상대로 야투율 77%로 59점을 넣은 적도 있다![76]

2년차 시즌에 큰 부상을 당한 이후 복귀하고 블랙캣 시절 리그 최강의 슬래셔로서 NBA를 씹어먹은 후, 필 잭슨의 트라이앵글 오펜스에서 플레이할 때에는 신체 능력에 상당히 의존하는 플레이의 약점을 보완하고 체력을 관리하기 위해 포스트업을 기반으로 해 페이드어웨이를 주 무기로 활용하였다. 트라이앵글 오펜스의 원래 이름이 트리플 포스트 플레이일 정도로 포스트 플레이가 핵심인 작전이었다. 때문에 포스트 업으로 공간을 잡아먹어줄 수 있는 수준급 빅맨이 반드시 필요했는데,[77] 불스는 수준급 빅맨이 없는 대신, 조던의 포스트업이 탑 레벨의 센터급으로 뛰어난 덕에 효과적인 전술 수행을 해낼 수 있었다. 조던은 슈팅 가드로서도 장신인 198cm의 키에 웨이트로 다져진 엄청난 근육 덕분에 웬만한 포워드 수준의 피지컬을 지녔고, 그덕에 어마어마한 근력으로 포스트 플레이를 펼치며 트라이앵글 오펜스를 효과적으로 활용하여 상대방 가드포워드들, 심지어 센터까지도 농락하는 플레이를 펼칠 수 있었다.[78]

거기다 2차 3연패 시절의 완성도는 이전보다 더욱 상승해 더블팀을 붙이지 않으면 그냥 점수를 자동 헌납하는 수준까지 이르었다. 특히 뒤로 돌아 포스트업을 하면서 상대 수비를 밀어내며 갑자기 턴어라운드 페이드어웨이를 구사하는데, 본디 페이드어웨이 자체가 적중률이 떨어지고 거기다 수비가 붙으면 한없이 낮아진다. 게다가 림 위치조차 제대로 파악이 안된 턴어라운드 슛이라면 가장 적중률이 낮을 수밖에 없는데, 조던은 이런 슛 적중률이 뛰어났다! 우리나라 농구 팬들은 이 말도 안되는 슛을 사기더웨이[79]라 부른다. 그럼에도 상대가 외곽만을 경계하는 순간엔 자비없이 인사이드로 파고들어 여지없이 더블 클러치나 더블 클러치로 안되면 트리플 클러치 덩크를 꽂아대서 나이를 의심케 만들었다.

페이스가 떨어진 90년대에서 하프코트에서 위력도 무서웠지만 80년대 조던의 장점 중 하나는 오픈코트에서 무시무시한 위력이었다.[80] 당시 시카고에서 자주 하던 플레이 중 하나가 빅맨들이 리바운드를 하고 바로 장거리 아웃렛 패스를 던져주는 것인데, 이걸 바로 조던이 받아 마무리하는 것. 포인트가드급 스피드에 스몰포워드급 키와 파워를 지닌 조던이 달리기 시작하면 제대로 따라붙을 수 있는 선수들이 거의 없었는데, 그는 발빠른 가드들이 막기는 너무 크고 강했으며 그와 비슷하거나 더 큰 키의 선수들은 그냥 달려서 간단히 제쳐버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CAwQjDQUs6c 이 영상을 보면 그가 오픈코트에서 얼마나 무서운 선수였는지 알 수 있다. 여담으로 위에 언급된 "리바운드 후 장거리 아웃렛 패스"를 가장 잘해주는 선수가 바로 찰스 오클리였는데, 조던 본인과의 친분도 있지만 코트 위에서 누구보다도 호흡이 잘 맞는 동료였기에 그가 트래이드되고 그토록 열받아한 것. 그의 대가로 받아온 빌 카트라이트는 당시 계속된 부상으로 이미 전성기 기량을 많이 잃어버리고 패트릭 유잉의 백업으로 전락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물론 카트라이트는 수비에서 앵커 역할을 훌륭히 해 3연패의 주역 중 하나로 인정받고 있지만.

조던을 상대해본 선수들이나 조던에 대해 잘 아는 전문가들은 예외없이 "조던이 현재 뛰면 훨씬 많은 득점을 했을 것이다"라고 하는데, 이는 당연한 것이 현재룰에서 조던을 막을 방법은 거의 없다. 첫번째는 포스트업. 일단 지역방어가 허용된 현재 센터들의 포스트업을 막는게 더 수월해진 것은 사실이지만[81] 조던의 포스트업은 센터들처럼 골밑이 아니라 중거리슛 지역에서 시작하기 때문에 수비 범위를 좁혀서 막기가 힘들다. 일단 먼저 언급해야할 지역방어로 골밑을 견제하기 쉬운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번째는 골밑에 수비가 몰려서 외곽이 비어도 외곽슛은 성공확률이 낮아 어느 정도 리스크를 감수할 수 있고[82] 두번째, 센터들은 더블팀 당했을때 오픈된 선수에게 빼줄 수 있는 능력이 전반적으로 떨어지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83] 그럼 조던의 경우에는 어떻게 될 것인가? 조던이 포스트업하는 중거리 지역으로 수비가 집중되면, 골밑이 비어버리고 조던은 포인트가드급 시야를 가진 선수라 외곽이든 골밑이든 오픈된 동료들에게 빼줄 수 있다. 실제로 지역방어 허용 이후에도 코비 브라이언트 등 외곽선수들의 포스트업은 전혀 지장을 받지 않았다. 즉, 조던의 포스트업은 룰 변화에 전혀 지장을 받지 않는다.

두번째는 돌파. 조던은 특히 젊은 시절에 돌파가 주무기인 선수였으나 당시는 현재보다 훨씬 더 거칠게 막을 수 있었고, 특히 공격수를 손으로 견제하는 "핸드체킹"이 가능해 돌파 = 엄청난 체력소모였다. 이 때문에 조던은 돌파만 주구장창 한게 아니라 오히려 초창기부터 대부분의 득점이 점프슛이었다. 핸드체킹은 94년에 1차 개정, 2004년에 2차 개정되었는데 특히 결정적인게 이 2차 개정으로 공격수의 진행방향에 지장을 전혀 못 주게 되었다.

자, 조 듀마스와 데니스 로드맨이 밀고 당기고, 골밑에서 빌 레임비어와 릭 마혼이 구타를 하는데 시리즈 평균 32점을 넣던 조던이[84], 돌파하는데 아무도 건드리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도대체 돌파로 몇점을 넣겠는가? 추가로 당시엔 4대센터를 위시한 우수한 센터들이 골밑에 우글거렸다. 그러나 현재는 블럭을 평균 3,4개씩 할 정도로 높이가 대단한 센터가 없다. 지역방어? 수비3초룰이 있기 때문에 센터가 골밑에 짱박혀있지 못한다.

공격페이스 자체도 80년대만큼 빠른데, 80년대처럼 두들겨 맞지 않고 돌파하는데 아무도 손을 못 간다댄다? 조던이 평균 40점을 훌쩍 넘길 것이라는 예측은 지극히 현실적인 전망이다. 아니, 조던이 실제로 평균 37점을 넣었다는 걸 생각하면[85], "제발 돌파해주세요"라고 하는 듯한 룰에서 평균 3점만 올라갈 것이라는게 오히려 보수적인 예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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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정도는 해야 올타임 No. 1[86]

말년의 워싱턴 시절에 이르러서는 몸을 한층 더 불려 3번 포지션에서도 뛰었다. 스피드와 탄력은 사라졌지만, 특유의 강골에서 나오는 강력한 파워와 슛터치를 이용한 포스트업-사기더웨이로 마지막 시즌까지 평균 20득점을 기록했다.

본래 신체가 NBA 선수 중에서도 특출난 강골이고,[87] 점프력이 압도적이고 순발력도 타의 추종을 불허해서 실제로 경기를 보고 있으면 '농구 참 쉽게 하는구나' 싶다. 팀 던컨과는 다른 의미로 실제로 그가 슛을 쏘는데 다른 선수들이 점프조차 못 하고 바라보거나[88] 포스트업에 퉁퉁 밀려나가는 꼴을 보면 담합인가 싶지만 진실은 그저 사기유닛.

당시 조던은 단순히 리그 최고의 득점원이 아니라 리그 역사상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압도적인 득점원이었다. 1980년대 당시 페이스가 빨라 평균득점이 높았기에 90년대, 00년대에 비해 득점하기 쉬웠다고 착각하는 이들이 있는데, 당시엔 페이스도 빨랐지만 어마어마하게 거칠고 공격수를 보호하는 규칙이 없어서 (플래그런트 파울이 일반파울과 페널티가 별 차이가 없었던 시절이다) 공격을 시도하는 것만으로 상상을 초월하는 구타와 체력소모에 시달려야 했다. 이 때문에 개인득점을 보면 전체적으론 (페이스가 매우 느렸던 90년대를 제외하면) 00년대와 별 차이가 없으며 2010년대 중후반 이후와 비하면 오히려 개인스탯들은 그때가 더 적다.[89] 그런데 조던은 이 와중에 군계일학 수준으로 높은 스탯을 기록했다.

조던이 첫 득점왕을 차지한 86-87시즌 당시 그는 37.1점을 기록했는데, 2위 도미니크 윌킨스가 29점, 3위 알렉스 잉글리쉬가 28.6점이었다. 실제로 윌킨스는 전 시즌에 평균 30점으로 득점왕을 차지했다. 즉, 28~30점 정도면 득점왕이 가능한 시절이었던 것이다. 조던만 아니었다면. 조던과 2위 그룹과 차이는 8점이 넘었다.

그 다음 시즌 조던은 35점, 윌킨스는 30.7점으로 4.3점 차이가, 88-89시즌엔 또 조던이 리그 내에서 유일한 30+득점자가 되며 32.5점, 2위 29.1점을 넣은 칼 말론과는 3.4점 차이가 났다. 89-90시즌에 말론은 스텝업해서 31점을 기록하지만, 조던도 스텝업해서(...) 33.6점, 1991시즌엔 동료들에게 더 많은 득점기회를 주느라 31.5점에 그치지만(...) 말론은 29점이라 또 리그 내 유일한 30+득점자, 1991-92시즌엔 팀이 67승이나 올리고 스카티 피펜이 올NBA세컨팀에 오르는 등 성장하면서 30.1점까지 떨어지지만 2위 말론은 28점이었다.
92-93시즌은 만 33세였던 윌킨스가 분전하며 88시즌 이후 최고 성적인 29.9점을 올리지만 그를 가로막고 있는건 32.6점의 조던이었다.

전체적으로 득점왕 7연패 기간동안 그는 득점 2위와 최소 2.1점차, 최고 8.1점차, 평균 3.65점차에 달하는 압도적인 격차로 매번 여유있게 득점왕 자리에 올랐다. 그가 평균 30점을 우습게 넘겨서 "80년대엔 페이스가 빨라 고득점을 올리기가 쉬웠다"고 착각, 내지는 폄훼하는 이들도 많지만, 조던이란 존재가 없었다면 이 7년동안 2번만 빼고 5번이나 20점대 득점왕이 나왔을 것이다. 그만큼 94년 핸드체킹 1차 개정 이전까지 고득점을 올리는 건 고된 일이었다. 이를 감안하면 당시 조던의 득점에 대해 페이스 조정한답시고 20점대 후반이라고 주장하는 건 말도 안되는 것. 80년대 선수들은 현재처럼 소프트한 수비에서 뛴게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풀시즌 기준으로 최근 10시즌, 2008-09시즌부터 2017-18시즌까지 득점왕들이 2위와 얼마만큼 격차가 있었는지 살펴보자. 09시즌엔 드웨인 웨이드가 30.2점으로 1.8점차, 10시즌은 케빈 듀란트가 30.1점으로 0.4점차, 11시즌 듀란트 27.7점으로 1점차, 12시즌은 듀란트가 28점으로 0.1점차, 13시즌은 카멜로 앤서니 28.7점으로 0.6점차, 14시즌 듀란트는 32점으로 4.6점차, 15시즌 러셀 웨스트브룩은 28.1점으로 0.7점차, 16시즌 커리는 30.1점으로 1.1점차, 17시즌 웨스트브룩 31.6점으로 2.5점차, 18시즌 하든이 30.4점으로 2.3점차이다.

평균적으로 2위와의 점수차는 1.5점차이며, 저 열명 중 조던이 7연패 기간동안 가장 압도적이었던 2.1점차를 능가하는 점수차를 낸 선수는 듀란트 (14시즌. 4.6점), 웨스트브룩 (17시즌, 2.5점), 하든(18시즌, 2.3점) 뿐이다. 저 중 조던만큼 압도적이었다고 할 수 있는 선수는 듀란트 뿐이고, 그나마 듀란트는 나머지 시즌 점수차가 0.1점, 0.4점, 1점에 그친다.

즉, 현재 뛰고 있는 득점기계 중 누구도 최전성기 조던만큼 압도적인 득점력을, 그것도 꾸준히 보여준 선수는 없다. 심지어 조던은 전성기가 완연히 지난 2차3연패 시기 때도 2위와 점수차가 3.5점, 2.2점, 0.4점이었는데, 1997-98시즌의 기록은 농구선수로서 할아버지인 만 35세에 기록한 것.

다만 2018-19시즌에 오랜만에 조던만큼 압도적인 득점원이 나왔는데 바로 제임스 하든, 크리스 폴의 부상과 부진으로 공격을 도맡아하면서 결국 36.1점으로 2위인 폴 조지를 무려 8.1점차로 앞서는 득점왕이 되었다. 이 점수차는 위에 언급한 87시즌의 조던과 윌킨스와 같은데, 뒤집어 말하면 하루가 멀다하고 괴랄한 기록을 내던 하든처럼 압도적인 득점원이 바로 당시의 조던이었던 것이다. 물론 이제 득점왕 2회를 차지한 하든과 달리 조던은 득점왕 10회를 차지할 정도로 오랫동안 뛰어난 득점력을 유지했다. 게다가 하든은 플레이오프에서 출장시간이 늘어났음에도 정규시즌 기록보다 현저히 못 미치는 31.6점 (야투율 41.4%)을 기록했다. 조던은 매번 정규시즌보다 수비가 빡세지는 플레이오프에서 오히려 기록이 올라갔다는 걸 생각하면 그 괴물같은 득점력을 보여주던 하든도 아직 갈길이 멀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당시 조던보다 더 압도적인 득점레이스를 보여준 유일한 선수는 윌트 체임벌린이 있다. 윌트는 데뷔하자마자 37.6점으로 2위와 차이가 5.4점, 그 다음 시즌부터 3.6점, 18.8점, 10.8점, 5.5점, 3.7점, 2.2점을 기록했다. 실제로 득점퍼포먼스만 따지고보면 이 시절 윌트의 그것은 조던조차 아득히 능가한다.
그러나 윌트의 스타일은 당시 팀을 승리로 이끌지 못했으며, 두번째로 위에도 언급되었지만 플레이오프에서 조던의 득점기록은 윌트조차 비교가 안될 정도로 압도적이었다.

그렇다고 그가 공을 독점하는, 속칭 '볼호그'도 아니었다.[90] 기본적으로 오프 더 볼 무브로 상대 수비를 제치는 능력 또한 최강이라 선수들이 그의 기민한 움직임에 속아 애초에 매치업 자체를 이루지 못한 상태로 수비를 강요당하는 상황을 왕창 발생시켜서 상대팀 수비를 초토화시키곤 했다. 시카고 시절 경기를 보면 분명 공도 안 가진 조던의 컷인에 상대팀이 우왕좌왕 거리다 와르르 무너져 내리고 조던은 유유히 점프슛을 던지는 상황이 끝도 없이 연출되었다. 결국 팀 전원이 조던 한명 때문에 혼돈의 카오스를 연출해야 했다. 이 때문에 실제로 초기 조던과 혈전을 벌였던 디트로이트 피스톤즈는 아예 조던을 막기 위한 수비인 조던 룰을 고안해냈는데, 지역수비는 비교도 안되게 악랄한 수비전략이었다.[91][92]
파일:MJ_JordanRule.jpg
“조던 룰”[93]

조던 룰은 지역수비 따위와 비교될 전술이 아니었다. 말 그대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어떻게든 조던을 막아야 해!" 라는 사고의 산물로, 조던이 인사이드로 들어오는 순간 단체로 두들겨 팬다는 전술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6.2. 가장 압도적인 수비수

수비력도 최강이었다. 87~88 시즌에 DPOY(수비왕)을 수상한 것은 물론[94]이고 이때부터 1차은퇴 시즌과 복귀시즌을 제외한 9시즌 연속(87~93 6연속, 95~98 3연속) 올 디펜시브 퍼스트팀 가드로 선정되기도 했다. 이런 격언도 있었다. "조던을 막는 것만을 걱정하지 마라. 조던이 너를 막는 것도 걱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가드가 갖춰야 하는 모든 수비 방법 모두 전부 다 잘했다. 낮고 안정적인 수비 자세는 기본이요 사이드 스텝도 소위 미쳤었다. 단순 스텝만을 밟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과의 거리, 속도를 고려해 크게 스텝을 한 번 밟음으로써 돌파를 완전히 틀어막을 정도로 스텝을 잘 밟았다. 또한 수비시에도 압도적인 퍼스트스텝과 말체력은 똑같아서 퍼리미터 디펜스 능력 또한 역대급이었다. 스틸 능력 또한 일품. 볼을 운반하는 가드들을 특유의 아우라와 운동능력으로 압박하고 약간의 틈이라도 보이면 바로 스틸해냈다. 피펜/조던의 수비 콤비에게 가드가 공을 빼앗긴다면 이어지는 것은 두 마리 야생마들의 속공 후 가벼운 2점 헌납...[95] 이러한 도박적인 수비가 먹힐 수 있던 것은 스틸 실패시 보이는 빈틈도 앞서 말한 스텝을 활용함으로써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커버했기 때문이다. [96]또한 그놈의 승부욕 때문에 어떤 상황에서도 상대방을 막는 것에 대해 절대 포기를 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가드 주제 블락샷이 1개 넘는 수치가 그것을 증명한다. 1차 은퇴 전에는 경기 당 1개씩 기본 성공. 가드에게 평균 블락 1개는 어마어마한 수치다. 드웨인 웨이드의 별명이 왜 동부 센터였는지 생각해 보자. 공격을 주도적으로 하는 선수라 수비할 때의 체력을 관리했어도 괜찮았을 텐데 조던은 그런 거 없었고, 항상 최선을 다해 수비를 했다. 그런데도 40분 이상 꼬박꼬박 82 풀경기 소화... 혹자는 이렇게 공격과 수비 양쪽에서 모든 힘을 쏟아 넣고도 경기력에 지장이 없을 정도의 끝없는 체력이 그의 실력의 원천이라고들 한다. 동시대에 찰스 바클리나 도미니크 윌킨스같은 라이벌들의 경우, 마음만 먹으면 좋은 수비를 보여주지만 시즌 내내 그런 모습을 보여줄 수 없었다는 점을 보면 진정한 괴물. 손이 빠른 덕분에 스틸 또한 경기 당 2개 이상씩 꼬박꼬박 성공시켜 통산 스틸 3위, 플옵 통산 2위일 정도.

2차 3연패 당시 조던은 체력적 안배를 위해 상대방 에이스에 대한 수비를 전담하지 않고 론 하퍼, 피펜 등의 선수들과 함께 번갈아가며 하는 경우가 많았다.[97] 그 여파로 이때의 수비력이 과소평가받을 때도 있는데, 이때도 조던의 수비력은 리그 최고 수준이었다.

이 영상은 98년 동부 컨퍼런스 결승전 7차전에서 조던이 레지 밀러를 막을때의 모습인데, 밀러는 이 게임에서 22점을 넣었지만 조던이 막고 있을 때는 필드골을 단 한개 성공시키는데 그쳤다. 게다가 밀러는 경기 내내 론 하퍼와 조던이 돌아가며 막다가 4쿼터에 들어가면서 조던이 전적으로 막기 시작했는데, 큰 경기에 강하기로 유명한 밀러가 4쿼터에 단 한 점도 넣지 못했다.

그가 밀러를 막을 수 있었던 건 그의 1대1 수비력도 있었지만 결정적으로 그가 힘과 민첩함, 센스를 동시에 갖춘 수비수라 상대 빅맨의 스크린을 깨는데 탁월한 재능을 갖고 있었다. 당시 페이서스의 데일 데이비스, 안토니오 데이비스는 큰 덩치와 강한 힘, 탁월한 수비력으로 "Davis brothers(물론 실제 형제는 아니다)"라고 불리며 인디애나 가드들의 보디가드 역할을 했고, 223cm에 달하는 릭 스미츠도 거대한 덩치로 스크린을 해줬는데, 이들의 스크린 플레이는 1대1 기술이 탁월하지 못한 레지 밀러가 수비수를 요리조리 떼어놓는데 결정적인 도움을 주었다. 그런데 조던은 앞서 언급한 대로 누가 스크린을 해주더라도 매치업 상대를 악착같이 따라가는 능력이 탁월했기 때문에 조던이 막을때는 밀러가 거의 무력화되었다. 심지어 후술되는대로 나이가 들고 발이 느려져서 운동능력으로 커버하기 힘들자 아예 상대 공격의 흐름과 매치업 공격수의 움직임을 예측해 스크린을 피해 돌아가는 등 뛰어난 센스를 보였다.

게다가 2차 3연패 기간이라도 "예전에 비해 수비를 나눠한다" 수준이지 수비에 쏟는 에너지나 수비공헌도 자체도 리그에서 한손에 꼽히는 수준이었다. 즉, 수비력이 한참 떨어진 이 때 조던만 보더라도 역대급 가드수비수였다.
특히 맨투맨 수비는 35세까지 리그 최고였던 게 조던이고, 특히 작고 재빠른 선수에 대한 수비는 피펜이나 하퍼보다 월등했다. 이 때문에 96년 플레이오프 동부 결승에서 앤퍼니 하더웨이가 미쳐 날뛰자 조던이 동원됐고, 97년 1라운드 워싱턴 시리즈에서는 당시 전성기를 달리던 포인트가드 로드 스트릭랜드과 매치업을 해 고전시키기도 했다. 백미가 2차전인데 https://m.youtube.com/watch?v=n3JqY3CECW8 돌파력이 좋지만 외곽이 약한 스트릭랜드의 돌파를 철저히 봉쇄해 어려운 슛만 하게 만들어 야투율이 5/18, 27.8%에 그치게 했다. 어시스트는 8개. 만34세, 플레이오프에서 보여준 수비력이란게 포인트. 게다가 스트릭랜드는 묘하게 저평가된 선수인데 바로 다음 시즌인 98시즌에 어시스트왕과 함께 올 NBA세컨팀까지 오른 선수였다. 참고로 수비로 상대를 발라놓고 조던 본인은 저 경기에서 55점 야투 62.9%를 찍는 극도의 이기주의를 보였다.
조던 정도 덩치의 선수에게 몸을 많이 낮춰야하고 활동량이 많은 포인트가드 수비는 힘들기 때문에 잘 안 시킨다는 걸 생각하면 (그래서 보통 론 하퍼가 막는다. 어차피 하퍼는 공격은 잘 안하니까) 이 중임을 믿고맡길 정도로 조던의 수비력이 시카고에서 절대적인 비중을 차지한다는 걸 알 수 있다. 물론 그와 대등한 비중을 차지하는 다른 선수는 피펜.

경기에 대한 집중력을 최고조로 이끈 상황에서는 이런 수준의 플레이[98]를 하기도 했다. 해당 영상은 뉴욕 닉스와의 '92~'93 시즌 동부 컨퍼런스 준결승 7차전인데, 경기를 시종일관 불스가 압도하였으며 특히 링크된 영상은 그의 경기에 대한 집중력이 어떤 수준인지, 그가 어떻게 경기를 지배하는지 증명하는 매우 유명한 시퀀스이기도 하다.

맨투맨 수비력 외에 팀수비 측면에서도 역대급 선수였다. 불스는 88년에 빌 카트라이트를 영입하기 전까지 골밑존재감이 전혀 없는 팀이었는데(찰스 오클리는 좋은 선수였지만 키가 작았다) 불스의 센터 수비전술 중 하나가 빅맨들이 일단 버텨주면 조던이 기습적으로 헬프를 들어와 블럭해버리는 것이었는데, 조던이 높이와 스피드, 센스를 모두 갖춘 가드라 가능했다. 드웨인 웨이드가 탁월한 블럭실력으로 "동부 센터"란 별명을 얻었지만 오리지널, 그리고 한 수위의 선수가 바로 조던이었다. 이 능력을 바탕으로 그는 4대센터를 전부 블럭해봤는데 (오닐은 매직에서 루키 시즌을 보내던 시절), 심지어 하킴 올라주원과 랄프 샘슨의 트윈 타워를 한 경기에 두번 다 블럭한 적이 있었다. 심지어 나중에 동료가 되는 데니스 로드맨이 그를 한번 블럭하자, 잔뜩 약이 올라 같은 경기에서 그를 세번이나 블럭해버리는 복수를 하기도 했다. 로드맨이 공격 시도 자체를 거의 안 하는 선수란 점, 공격시 그의 주 매치업도 아니란 걸 생각하면 노골적으로 노린 것.
조던은 실제로 자신의 수비에 대해 "상대 팀의 모든 선수들이 나를 경계하고, 뒤돌아보며 내가 어디있는지 찾기를 바란다"라고 했는데, 실제로 불스를 상대하는 팀들은 조던의 헬프디펜스를 항상 의식해야 했다. 98년 파이널 6차전 마지막 순간에 나온 역전슛이 가장 유명하지만, 그 직전에 나온 것이 그의 기습적인 더블팀으로 인한 스틸. 대단한 건 당시 불스에 팀수비로 따지면 그를 능가하던 피펜까지 있었다는 것, 그리고 스피드, 힘, 높이와 마무리능력을 지닌 둘의 속공 전개 능력이 워낙 뛰어나 잠깐만 방심하면 스틸 후 이들의 속공이 이어졌다는 것이다.

추가로 볼에 대한 집념이 엄청난지라 허플플레이도 뛰어났다. 불스에서 허슬플레이하면 로드맨이 워낙 유명하지만 조던 역시 주저하지 않고 루스볼 하나를 잡기 위해 코트에 온몸을 던지던 선수였다.

이 영상에서는 앨런 아이버슨이 루키 시즌 당시 경기도중 조던과 잠깐 매치업이 되었던 것을 회상하는데 (이때 아이버슨은 포지션이 포인트 가드라 주로 론 하퍼가 막았다) 이때 아이버슨이 조던을 크로스오버로 제치고 득점을 한 장면이 있었다. 당시 "황제가 애송이에 농락당했다"고 미국 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크게 화제가 되었지만, 정작 아이버슨은 20여년이 지나고 이를 회상하면서 "내 최고의 기술을 제대로 먹였는데 조던이 슛을 거의 블럭할 뻔했다"며 이를 두고 crazy하다고 감탄했다.[99]

마이클 조던의 수비 레슨 비디오를 보면 그의 수비방식에 대해 나오는데, 이걸 보면 그가 왜 역대 최고의 맨투맨 수비수인지 알 수 있다. 기본적으로 농구에서 공격수는 (개인 측면에서 보면) 세가지 옵션이 있다. 슛/패스/돌파이며 이게 전부 다 되는 선수를 Triple Threat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조던의 수비 스탠스를 보면 이 세 가지를 동시에 전부 견제하는 방식이다.
돌파의 경우, 조던은 상대 공격수의 돌파성향에 따라 선호하지 않는 방향으로 돌파하게 유도한다. (당연히 상대 선수 성향을 미리 연구한다는 것이 전제된다) 보통 돌파를 견제할때 수비수는 사이드스텝이 용이하도록 (정면에서 봤을때) 양쪽으로 넒게 자세를 잡는데 조던은 오히려 한쪽발이 앞으로 가도록 해 (정면에서 봤을때) 왼쪽이든 오른쪽이든 어느 한쪽으로 치우쳐서 자세를 잡는다. 이렇게 되면 장점은 공격수가 조던이 치우친 방향으로 돌파할 경우 더 빨리 따라갈 수 있지만, 단점은 반대쪽으로 돌파할 경우 스탠스를 바꿔야하므로 늦을 수가 있다. 그런데 위의 아이버슨 막는 비디오에서 볼 수 있듯이 조던은 이 스탠스를 정말 빨리 바꾼다. 자세한 상황은 후술. 이때문에 한쪽으로만 견제하다가 반대쪽을 공략당함으로 생기는 페널티를 최소화한다. 당연하지만 조던 수준으로 재빠르고 스텝이 정확한 선수가 아니면 시도할 수 있는 방법이 아니다.
돌파를 견제하면서 동시에 양손으로 패스를 견제하는데 이때 쓰이는 게 상대 공격수 앞에 놓인 오른손이다. 이 오른손은 끊임없이 움직이면서 공격수의 시야와 위로 가는 패스를 방해한다. 반대로 왼손은 아래에 놓여서 아래로 가는 패스를 견제하면서 동시에 스틸을 시도한다. 조던이 지적했다시피 심판들은 위에서 아래로 쳐내는 스틸은 파울을 부는 경향이 높지만 아래에서 위로 쳐내는 스틸에 대해선 관대하기 때문에 주로 아래에서 위쪽으로 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슛의 경우는 부가적인 것에 가까운데 많은 수비수들은 돌파를 견제할 때 양손이 아래로 가 있지만 조던의 경우 한 손이 기본적으로 거의 항상 얼굴께에 있으므로 블럭을 뜨는데 유리한 위치에 있다.

위의 아이버슨을 막는 비디오를 보면 무엇보다 돋보이는게 위에 언급된 그의 풋워크이다. 처음 아이버슨을 막을 때 보면 레슨비디오에서 나온 것처럼 왼발을 앞으로 놓고 아이버슨이 왼쪽으로 돌파를 하도록 유도한다.[100] 그런데 아이버슨이 크로스오버를 써서 왼쪽으로 돌파하는 듯 보이자 바로 양쪽으로 견제가 가능하도록 스탠스를 중립적으로 바꾸고 (자세히 보면 이 때 작게 스틸시도를 한번 한다) 크로스오버에 완전히 낚인 이후에도 무게중심을 잃지 않아 바로 스텝을 밟고 블럭을 뜬 것이다. 즉, 처음부터 왼쪽 돌파를 견제하고 있었음에도 오른쪽으로 돌파한다고 생각하자 즉각적으로 견제방향을 바꾼 것.
이 때문에 아이버슨은 본인 말마따나 자신의 최고 기술이 제대로 먹혔음에도 견제상태에서 터프샷을 쏴야 했다.

워싱턴 시절에는 운동능력이 엄청나게 떨어진 지라 더 이상 일류수비수는 아니었지만, 이때조차 특유의 높은 농구 이해도와 센스를 이용해 기가 막힌 수비를 펼친 적이 있다. 이 글과 영상은 조던의 복귀 첫 시즌 당시 당대 최고의 슈퍼스타이던 빈스 카터와 첫 대결을 다루고 있다. 이 영상을 보면 전반에 조던은 카터를 상대로 좋은 수비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카터의 사기적인 운동능력에 밀려 23점을 헌납하는 등 탈탈 털린다.[101] 그리고 후반에 조던은 작정한 듯 카터를 마크하는데, 공을 아예 못잡게 하는 디나이 수비를 이용해 카터가 공을 못 잡거나 어렵게 잡도록 한다. 또한 발은 느려졌지만 스크린을 뚫고 지나가는 대신 상대 공격의 흐름과 카터의 움직임을 예측해 스크린을 피해 돌아가는 등 센스로 운동능력 저하를 커버한다. 이에 카터는 짜증섞인 반응을 보이면서 경기를 망치고 결국 후반 무득점에 그치고 만다.

6.3. 슈팅가드 포지션의 혁신을 가져오다

일단 조던 전까지 NBA 슈팅가드 변천을 보면 초기부터 상당히 오랫동안 조력자 위치의 포지션이었다. 당시 농구는 무조건 빅맨이 우선시되었으며 조지 마이칸, 밥 페팃, 돌프 셰이즈 등에서부터 다들 알고 있는 윌트 체임벌린/빌 러셀로 이어지는 빅맨진이 중요시되었고, 그 다음 중요한 포지션은 밥 쿠지를 위시한 포인트가드였다.[102]
농구가 현재와 매우 달랐던 극초기를 제외한다면 이름을 알아둬야할 최초의 슈팅가드 중 하나가 바로 51년 데뷔했고, 보스턴 왕조 극초기의 멤버였던 (61년 은퇴) Bill Sharman이다. 밥 쿠지의 백코트 파트너였던 샤먼은 역사상 야투율 4할을 넘는 최초의 가드 중 하나였으며 현재도 남아있는 "플레이오프 연속 자유투 성공"(56개)의 보유자일 정도로 매우 정확한 슈터였다.
두번째로 언급할만한 위대한 슈팅가드는 바로 러셀과 커리어 거의 전체를 함께 했던 Sam Jones. 또한 윌트의 첫 우승을 함께한 전설 "할 그리어" 역시 손꼽히는 슈팅가드였다

그리고는 60년대, 70년대, 80년대 넘어가면서 길거리 농구의 전설이자 화려한 농구의 끝판왕인 Earl "The Pearl" Monroe, 화려한 농구의 끝이었던 "The Pistol" Pete Maravich," 조던의 우상이자 어마어마한 운동능력으로 폭발적인 득점력을 자랑했던 "The Skywalker" David Thompson[103], 수비왕 2회에 빛나는 수비의 달인 Sidney Moncrief등이 있었다.

애매한 케이스는 제리 웨스트이다. 현재 그는 슈팅가드로 분류되지만 현역 시절 그는 리딩을 주로 했다. 실제로 그는 슈팅가드 게일 굿리치와 출전했는데 (즉 PG로 출전했다) 굿리치 역시 PG와 SG 사이에 있는 선수였지만 주 볼핸들러와 패서는 웨스트였다. 즉, 현대로 치면 웨스트는 득점형 PG에 가까운 듀얼가드였으며, 이는 디트로이트의 데이브 빙 역시 마찬가지였다.
두번째로 애매한 케이스는 조지 거빈으로 거빈은 최전성기였던 스퍼스 시절 가드 두명과 같이 뛰는, 즉 스몰포워드 위치에서 출전해 사실상 스몰포워드에 가깝게 뛰었다. 당시 그의 사이즈(201cm)나 그의 주 득점영역은 스몰포워드의 것이었으며, 1대1 플레이 및 스스로 득점기회를 만들어내는데 능하다거나 높은 야투 역시 마찬가지로 SF에 가까웠다. 어찌보면 슈팅가드와 스몰포워드를 오가는 선수란 의미의 "스윙맨"과 가장 잘 맞는 이가 바로 거빈이었다.[104]

종합하면 당시 가장 뛰어난 선수들이 바로 이 선수들이었다. 크게 보면 득점과 리딩을 하는 웨스트/빙/굿리치/할 그리어 형, 슈팅가드 본연의 업무(외곽에서 득점지원)에 충실한 샤먼/존스/그리고 이들 수준엔 못 미치지만 대니 에인지/데일 엘리스/짐 팩슨형, 화려한 개인기로 스스로 만들어내는 내외곽 득점에 능한 얼 먼로/피트 매러비치/톰슨 형, 마지막으로 스몰포워드에 가까운 슈팅가드인 거빈형까지 있었다.[105][106] 이걸 보면 슈팅가드가 왜 당시까지 슈팅가드 포지션에 대한 기대치가 낮았는지 알 수 있는데, 슈팅가드 포지션은 단 한명의 MVP도 배출하지 못했으며 저들 중 단연 뛰어난 선수들인 제리 웨스트나 거빈은 각각 포인트가드,스몰포워드에 가까운 선수이다. 얼 먼로는 뛰어난 PG, 센터인 월트 프레이저와 윌리스 리드와 함께 한 선수이며, 피트 매러비치는 비효율로 악명이 높았다. 왕조의 롤플레이어였던 샤먼, 존스, 에인지 등도 마찬가지. 톰슨은 뛰어났지만 위에 말한대로 전성기가 짧았고 우승으로 이끌진 못했다. 거빈 역시 한계가 있었다.
여기서 나온 말이 "득점왕은 우승을 못한다 (Scoring champions do not win championships)"였다. 사실 마이칸과 카림 압둘자바란 득점왕 챔피언이 있었다는 걸 생각하면 이 말의 진짜 뜻은 외곽에서 뛰는 선수가 득점왕을 하는 팀은 우승을 못한다.란 말에 가까울 것이다. 외곽에서 뛰면 득점확률이 낮을 수밖에 없는데 이 선수에게 공격권을 몰아주면 팀의 득점효율이 떨어지기 때문.

이 상태에서 데뷔한 것이 조던이었다.

조던의 플레이스타일은 사실 위에 언급된 조지 거빈형에 가까웠다. 그러나 조던과 거빈, 그 전에 온 어떤 슈팅가드와도 차이점이 있었다면 조던은 다 잘했다. 그것도 득점과 수비는 역대최고를 다투는 수준. 캐치앤슛, 리딩플레이도 능했으며, 수비는 질식수비 수준에 1대1 득점은 역대 최강 수준이었다. 심지어 리바운드도 잘했다. 만능형이 아니라도 원체 포지션 자체가 가치가 높은 센터 외에 다른 포지션에선 이런 만능형 선수가 이전에도 있었으나 (매직 존슨, 래리 버드) 슈팅가드에서 이 정도로 다재다능하고 탁월한 선수는 사실상 조던이 처음이었다. 조던으로 인해 "빅맨이 아닌 득점왕은 비효율적"이란 편견이 깨졌으며, 이는 그 이후 "제2의 조던 찾기" 광풍과 조던형 선수들의 시대로 이어졌다. 코비 브라이언트, 트레이시 맥그레디, 빈스 카터, 레이 알렌 등 만능형 스윙맨들은 2000년대를 화려하게 수놓았다. 다만 이들 중 코비를 제외하면 스스로 팀에서 독보적인 공격비중을 차지하며 우승한 선수는 없고, 코비 역시 파우 가솔이란 확실한 2옵션을 얻고야 우승할 수 있었다. 이후 슈팅가드의 트렌드는 다시 바뀐다.
아이러니하게 조던 이전의 슈팅가드들이 그랬던 것처럼 슈퍼스타급인 "조던형 스윙맨" 들 중에서도 조던같은 스타일로 조던만큼 효율적인 농구와 파괴력을 보이는 선수는 없었던 것이다. 어찌보면 당연한 것이 조던은 역대 최고의 선수라고 인정받는 선수였고, 그와 같은 선수는 이전에도 이후에도 없었기 때문. 조던이 "외곽에서 뛰는 득점왕은 우승을 못한다"는 편견을 깼지만 그런 케이스는 그 이전에도 이후에도 없었듯이, 너무나 독보적인 재능의 소유자였기에 그만 그 벽을 넘을 수 있었을 뿐 그가 가져온 혁신이 이어지지는 못했던 것이다. [107]

어찌됐건 그 이전까지 중심에서 벗어나있던 슈팅가드란 포지션의 가장 화려한 전성기를 이끈 선수.

7. 관련 일화


마이클 조던의 커리어 첫 번째 경기는 1984년 10월 26일 시카고 불스 vs 워싱턴 불리츠전으로 시카고 스타디움 홈경기.
마이클 조던의 커리어 마지막 경기는 2003년 4월 16일 워싱턴 위자즈 vs 필라델피아 세븐티식서스전으로 웰스 파고센터 원정경기.[108]

8. 이것저것

8.1. 넘사벽 인기



[1] 해당사진은 조던이 1차 은퇴를 하고 난 후인 1994년에, 새롭게 1994-95 시즌을 맞아 개장한 유나이티드 센터에서 치러진 영구결번식 행사이다. 당시 현역이던 그의 동료들과 필 잭슨 감독을 포함해 그의 대학 은사인 딘 스미스, 1984년 올림픽 감독이자 레전드 대학 감독인 바비 나이트, 스파이크 리 등 수많은 유명인사들이 참석했으며, 래리 버드, 매직 존슨, 그의 절친이자 레전드인 찰스 바클리 등이 영상으로 축하 메시지를 보냈다. 당시 사회를 맡은 조던의 친구이자 방송인 아마드 라샤드는 행사 도중에 조던이 돌아올 것을 간청하기도 했다. 재밌는건 당시 잭슨 감독은 조던이 복귀할 것, 그리고 40살까지 뛸 것이라고 예상했는데, 이게 그대로 이뤄졌다는 것. 사실 조던이 워낙 젊었고 실력이 워낙 뛰어났기에 조던이 복귀할 거라고 예상하는 사람들이 당시 꽤 많긴 했다. 여담이지만 1999년에 시카고에서 2차로 은퇴선언을 했을때 (98-99시즌은 직장폐쇄로 99년이 될때까지 시즌개막을 안 했기에 99년 1월이 되어서야 은퇴 기자회견을 했다)는 별도의 영구결번식을 진행하지 않고 그냥 결번만 되었다.[2] 루키시즌인 1985년, 부상으로 시즌을 접다시피한 1986년, 1차 은퇴시기인 1994~1995년을 제외하면 1998년 2차 은퇴시기까지 한 해도 득점왕을 놓친 적이 없다. 2위가 저 유명한 윌트 체임벌린의 7회인데 마사장은 그걸 연속으로 하고도 한 번의 은퇴 번복 후에 3번을 더 연속으로 했다. 충격과 공포. 워싱턴 시절 포함 시즌 평균 득점 30.1점 / 플레이오프 평균 득점 33.4점으로 1위.[3] 샤킬 오닐과 팀 던컨은 1999년의 MVP가 아니고 2000년의 MVP다. 1999년에는 파업으로 올스타전이 열리지 않았다.[4] NBA 활동 당시의 체중이다. 현재체격을보면 당연히 훨씬 더 나간다. 운동량이 어마어마하게 많은 프로선수들은, 레지 밀러나 케빈 가넷처럼 원래 마른 체형이 아닌 이상 은퇴 후 몸무게가 꽤 많이 는다. 사실 몸무게 변화가 꽤 있었는데 데뷔 당시 그는 190파운드 (85.5kg) 정도로 마른 체격이었고 이후 90kg초반 정도가 되나, 배드보이즈에 대항하기 위해 근육을 10파운드 이상 늘려 95kg 정도 체중을 93년 은퇴 당시까지 유지했으며, 2차 은퇴 당시엔 조금 더 벌크업을 해 98-100kg 정도였다. 이때가 가장 유명했던 때라 조던관련 잡지기사나 카드 등에 이렇게 많이 표기되는데, 워싱턴 시절엔 쉬고 나이도 들어서 몸도 좀 불었기에 이보다 더 나갔었다.[5] 2차 은퇴까지 커리어의 대부분을 SG로 뛰었지만 수비시에는 상대방의 PG를 맡는 경우도 많았다. (사실 트라이앵글 오펜스에서 맡은 역할은 가드보다는 포워드에 가깝긴했지만 수비는 주로 상대 가드를 막았으니까.) 3차 은퇴 이전인 워싱턴 시절에는 주로 SF로 뛰었다. 1988-89 시즌에는 포인트 가드로도 뛴 적이 있었는데, 89년 3월 25일 경기를 시작으로 11경기 동안 트리플 더블 10번을 달성하기도 했다. 시즌 평균은 32.5득점 8리바 8어시. 사람이 아니다[6] 나이키가 전 종목 통틀어서 종신 계약한 3명의 선수 중 한 명이다. 다른 2명은 르브론 제임스, 크리스티아누 호날두.[7] 현재 조던과 나이키의 관계는 단순히 후원사와 선수 간의 관계 수준이 아니다. 에어 조던은 마이클 조던의 영향력을 통해 인지도 높은 나이키의 프리미엄 독자 브랜드로 올라섰다.[8] 시카고 화이트삭스 산하 더블A 팀이다.[9] 23번을 단 이유는 매우 유명한데, 조던과 그의 형 래리는 마당에 있는 골대에서 주구장창 1대1을 했는데, 어린 시절 마이클은 그를 한번도 못 이겼다고 한다. 그러자 "형의 반이라도 됐으면..."하는 마음에 형 번호인 45번의 절반 정도인 23번을 택했다고...[10] 첫번째 복귀 당시 달았던 번호, 잠시 야구로 외도했을때 달았던 번호이기도하다.[11] 올림픽 출전 당시 달았던 번호.[12] 1990년 올랜도 원정에서 누군가가 23번 유니폼을 훔쳐가는 바람에 급한대로 남아있던 12번 유니폼을 입었다. 원정팬의 유니폼을 빌려입으려고 했지만 사이즈가 작았다고 한다. 이 경기의 사진을 찾아보면 등번호는 있는데 이름 마킹이 없다.[13] 1986년엔 팬투표로 선발이 됐으나 부상 때문에 뛰지 않아 실제 출전은 13회.[14] His Highness + Air. 참고로 소유대명사 + Highness는 왕족들에게 붙이는 경칭이다. 우리 말로 하면 전하 혹은 폐하.[15] 마이클 잭슨의 별명이기도 하다. 스파이더맨에서 메리제인을 MJ라고 부르기도 한다.[16] 젊은 시절에 한시적으로 불리웠던 별명.[17] Greatest Of All Time의 약자이다. goat는 염소라는 뜻도 있어서 종종 언어유희로 사용되기도 한다. 파일:external/nbamania.com/mania-done-daf5ecf65fdf650a73cd39c1e5e09aca_20150710240501_imudnqvh.jpg 파일:external/nbamania.com/mania-done-daf5ecf65fdf650a73cd39c1e5e09aca_20150710240501_twqnzutl.jpg 이런 식으로[18] 만화 달숙이에서 실명 그대로 등장하는데 첫 등장부터 신발을 팔고 있었다.[19] 조던은 그의 형 래리 조던과의 1:1 농구시합에서 항상 이겨 본 적이 없다고 한다. 래리 조던의 학교 선수 시절 등번호는 45번이였는데, 마이클은 형의 반만큼만이라도 농구를 잘 했으면 좋겠다는 의미로 45번의 2분의 1인 23번을 선택한 것. 아래에 서술되지만, 1차 복귀 이후에는 잠시 45번을 달기도 했었으나, 그 시즌 도중에 23번으로 돌아갔다.[20] 근데 막상 형 래리 조던은 엄청난 농구실력에도 키가 173cm(5피트8인치)에 그친 바람에 농구를 접어야했다. 사실 조던 집안에선 178cm(5피트10인치)인 아버지 제임스가 그나마 큰 편일 정도로 어머니 들로리스와 5남매를 통틀어 180을 하나도 못 넘길 정도로 키가 작은 집안이다. 혼자 198cm(신발신은 키)나 되는 마이클이 별종인 셈. 마이클의 장남 제프리는 185, 차남 마커스는 193 (둘다 농구화 신은 신장)으로 그나마 큰 편이지만 그래도 아직까지 조던 집안의 최장신은 마이클 조던이다. 물론 둘째 아내 이베트 프리토와 2014년에 낳은 쌍둥이 딸들이 엄청난 장신이 되거나 자녀를 더 가진다면 모르지만...[21] 데이비드 베컴이 레알 마드리드로 이적하며 등번호 7번을 사용할 수 없게 되자 조던을 존경하는 의미에서 23번을 선택하기도 했다. 두 레전드의 선택을 받은 농구 외 스포츠에서도 상징적인 번호.[22] 현재까지 23번을 주로 달고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선수는 조던 외에는 프랭크 램지와 캘빈 머피 뿐이며, 훗날 헌액이 사실상 확실시되는 르브론 제임스까지 해봐야 네 명이다. 게다가 램지는 50년대 선수였고 램지와 머피 둘 다 NBA를 주름잡던 선수들은 아니었기 때문에 번호 자체의 상징성은 사실상 거의 없었다. 오히려 NBA에서 전통적으로 레전드들이 많이 달았던 번호는 33번으로 카림 압둘 자바, 래리 버드, 패트릭 유잉, 알론조 모닝, 스카티 피펜, 그랜트 힐 등 수많은 슈퍼스타들이 달았고, 샤킬 오닐조차도 원래 아마추어 시절 33번을 달다가 (유잉을 존경해서 선택한 번호이다.) 프로 입단 이후엔 33번을 누가 이미 달고 있어서 32번으로 바꿨다. 레이커스로 이적해서는 레전드 카림 압둘 자바 때문에 33번이 결번되어 있어 34번을 선택했는데 34번 역시 결번되었다.[23] 이 사실을 보여주는 사례 중 하나로 2K게임즈에서 제작한 NBA 2K12에서는 전설의 농구선수 18명의 팀을 플레이 하여 플레이한 선수들의 팀을 해금해서 그 팀과 선수들로 통상경기에서 게임을 즐길수 있는 그레이티스트 모드가 있다. 여기서 버젓이 1번, 즉 맨 앞에 위치하고 계신다. 참고로 2번은 매직 존슨, 3번은 래리 버드.[24] 당장 아무 사람이나 붙잡고 아는 농구 선수 한 명을 말해보라하면 열에 아홉은 조던을 말한다. 은퇴한지 20년이 다되어가고 그의 영향력을 직관이 아닌 매스컴으로만 접해온 한국 사람들도 이 정도인데 그의 영향력과 실력을 직접 본 미국인들의 조던을 바라보는 시선은 어떻겠는가![25] 워싱턴 복귀 이후 상당히 떨어진 수치이다. 그 전까지는 31.5득점.[26] 이 점 때문에 그의 워싱턴 복귀를 안 좋게 보는 팬들도 많다. 물론 워싱턴 시절에도 커리어 로우 득점을 한 이후 비판의 시선을 잠재우는 51점, 역대 유일하게 40점을 넘긴 40대 선수, 버저비터 게임위닝샷 이후 해설자의 "Michael Jordan, the greatest player of all time!"이란 외침 등 기억에 남는 순간들이 많았지만, 시카고 시절만큼 극적인 순간은 없었다. 또한 조던은 큰 무대에서 강한 선수라 플레이오프와 결승에서 잊지못할 순간들을 남겼는데 플레이오프에 한번도 진출을 못했다. 무엇보다 조던은 완벽이란 이미지가 강했는데, 커리어 내내 플레이오프 진출, 91년 이후 풀시즌을 소화했을땐 한번도 시즌 최종전에서 패배한 적이 없음, 누구도 부인 못하는 리그 최고의 선수였을때 은퇴, 등 완벽한 선수였다. 그러나 워싱턴 시절로 그의 "인간적인"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이에 비하면 비인간적인) 모습을 통해 그 이미지가 많이 옅어졌다.[27] 실제로 조던은 본인의 무시무시한 승부욕과 연습량 때문에 나태한 선수들을 용납하지 않았다. 또한 나태하진 않더라도 움직임이 둔하거나 해서 팀 연습을 따라오지 못하는 선수들은 무섭게 몰아세웠는데 이 희생양이 된 선수가 바로 빌 카트라이트였다. 지못미 조던이 카트라이트를 싫어한 이유 중 하나가 그의 절친인 찰스 오클리를 보내고 받은 선수란 것이었으나, 더 중요한 것은 당시 노장이었고 건강이 안 좋던 카트라이트는 둔한 움직임 때문에 공격에서 총알같이 빠른 조던의 패스를 놓치기 십상이었고 부족한 공격 기술 때문에 공격 기회를 날려먹곤 했다. 샘 스미스의 《Jordan Rules》라는 책에 따르면 조던은 팀 동료들에게 카트라이트에게 패스하지 말라고 강요하기도 했다고 한다.[28] 그러나 마찬가지로 책에 나오는 내용이지만 1년간 갈등을 겪고 난 뒤 조던은 카트라이트가 수비에서 해주는 공헌, 그리고 부드러운 리더로서 팀 동료들을 이끄는 것을 인정하고 갈등을 봉합했다고 한다. (물론 친하진 않았다. 이후에 3연패 기간 동안 둘은 공동주장으로 활약한다.) 문제는 이 책이 92-93시즌에 나왔는데 당시 기자들이 조던과 카트라이트가 1년 뒤 화해하고 우승할때는 큰 갈등이 없었다는 건 쏙 빼놓고, 앞의 자극적인 부분(패스 금지, 공개적 갈구기)만 크게 보도해서 마치 불스의 팀 케미스트리가 아직도 개판인 것처럼 몰아간 것이다. 때문에 당시 선수단은 크게 분노했으며, 93시즌 내내 이어진 조던의 도박 스캔들 관련 조사와 더불어 팀 분위기가 어수선해지는데 한 몫 했다.[29] 실제로 로드맨은 아이제아 토마스, 마이클 조던 등 강력한 카리스마를 바탕으로 한 리더를 좋아했다. 불스로 온 계기가 코트 위에서 신사적이고 상대적으로 유순한 데이비드 로빈슨의 성격이 우승으로 이끌기에는 부족했다고 느껴서 이다.[30] 로드맨은 찰스 바클리, 찰스 오클리, 알론조 모닝, 드마커스 커즌스등 에 비하면 오히려 얌전한 선수이다. 요란한 염색과 코트 밖에서 기행이 이미지를 만든 것이지 농구에 관해서는 그 누구보다 팀에 헌신했고 감독, 리더의 말에 잘 따른 선수이다.[31] 그만큼 조던이 절대적인 카리스마로 선수단을 휘어잡았다는 소리지, 조던이 감독을 무시하거나 항명을 했다는 얘기가 절대 아니다. 오히려 조던은 필잭슨을 굉장히 존중했으며, 잭슨을 잡지 않으면 바로 은퇴하겠다고 공언할 정도였다. 실제로 후술되는 스티브 커와의 마찰 이후에도 조던이 뉘우치는데 잭슨의 조언이 컸으며, 로드맨, 피펜은 앙숙에 가까웠는데 둘이 화해하고 잘 지내는데도 잭슨의 리더쉽이 컸다. 샤킬 오닐도 잭슨에게 무한한 존중을 표한 걸 보면 그만큼 필 잭슨이 감독으로서 리더쉽이 뛰어난 인물이었다고 볼 수 있다.[32] ESPN Sports century의 조던 편에서 두 선수가 밝힌 바에 따르면 일의 전말은 다음과 같다. 연습 경기 중 커와 조던이 매치업되었는데 (조던 주장에 따르면) 심판들이 커에게만 유리하게 불렀다고. 그러자 조던이 슬슬 열이 뻗치면서 상당히 거칠게 플레이하기 시작했고 트래쉬 토크까지 시도하자 커도 지지 않고 맞받아쳤다고. 결국, 분위기가 과열되면서 조던이 주먹으로 커를 가격했고, 이후 연습이 중단되었다고 한다. 두 선수의 체격, 운동능력, 힘 차이를 생각하면 커가 대단한 것. 조던은 이후 커에게 전화해서 사과를 했으며 이후 커의 승부 근성을 높게 평가해서 존중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후 커와 조던은 서로 잘 지냈다. 은퇴 전까지 쭉 한 팀에서 지내면서 96-97 파이널 샷을 패스해주기도 했다. 위에 언급된 싸움에 대해 커는 인터뷰에서 "이 사건 이후 마이클이 나를 정말 존중하게 되었다"면서 조던이 자신에게 쥐여사는 동료보다 자신에게 덤빌 수 있는 동료를 더 존중한다고 한 바 있다. 츤데레?[33] 다만 그랜트는 ESPN의 빌 시몬스가 진행하는 b.s. report에 출연해 조던과 친한 것은 아니었지만, 사이가 나쁘지는 않았다고 해명한 바 있다. 또 그랜트는 여기서 조던을 높게 평가했는데, 본인이 뛰었던 2000년대 초 레이커스와 1990년대 초 불스와의 비교에서 불스의 손을 들어주며 "마이클은 어떻게든 승리하는 방법을 찾아내는 선수다."라고 평한 바 있다.[34] 다만 조던이 빌 카트라이트를 유독 못살게 굴었던 것은 당시 시카고의 보디가드이자 팀 내에서 얼마 안 되는 조던의 절친이기도 했던 찰스 오클리를 뉴욕 닉스로 트레이드를 시키고 데려온 선수가 빌 카트라이트였기 때문이기도 했다. 이때 조던의 분노가 얼마나 극심했던지 단장의 사무실까지 찾아가 몇 시간이나 시위를 할 정도였다고. 내 친구 돌려줘 힝? 그리고 상술되어있듯 둘은 화해하며 갈등을 봉합한다.[35] 피펜은 자신을 가혹할 정도로 대하는 조던에게 오히려 악으로깡으로 덤벼들었고, 그 덕에 엄청난 속도로 성장한 케이스이다. 피펜은 무명대학의 무명선수, 드래프트 당시 고작 1년 선배였고 2라운드 출신 벤치멤버에 불과한 데니스 로드맨에 비교되던, 총재조차 본명을 헷갈려 드래프트장에서 이름을 잘못 부른 (...) 듣보잡이었다. 그런 피펜이 역대 위대한 50인에 들 정도로 성장한 것.[36] 이런 조던의 도전에 대응하는 방식은 다양한데, 피펜은 이를 정면으로 받아쳤고, 그랜트는 이를 받아들였지만 조용히 상처를 받았고 (이 때문에 그랜트는 누구보다도 조던을 존중하지만 개인적으로 친하진 않았다) 롱리는 이를 호인답게 웃으며 받아들였다. 위에 언급된 커도 특이한 케이스로 실력은 조던이나 피펜에 비할바가 못됐지만 조던을 숭배할 뿐인 다른 롤플레이어들과 달리 정면으로 받아친 것이다. 싸움 이후 조던이 커를 존중하고, 클러치 슛을 맡길 정도로 신뢰했던 것도 이와 일맥상통한다. 팩슨의 경우 일화가 알려져있지 않지만 그 까다로운 조던이 꽤나 신뢰한 걸 생각하면 뭔가 있을 가능성이 높다. 이런 조던과의 관계가 최악까지 치달았던 것이 바로 콰미 브라운으로,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콰미의 맨탈이 그리 훌륭하지 않은 것도 있고 (다른 팀에서도 말썽을 일으켰다) 고졸인 그가 어려서 상처입기 쉬운 섬세한 성격이었던 것, 그리고 80년대 거칠었던 문화에서는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던 것이 밀레니엄 세대인 콰미에겐 충격적으로 다가온 (즉, 세대 차이) 것도 있다. 조던의 성격 자체가 극단적으로 승부욕이 강하고 까다롭고 예민한 등 어렵다는 것도 크다. 물론 조던의 갈굼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선수들도 있는데 듣보잡 벤치선수들에겐 애초에 기대치가 없으므로 심하게 갈구지 않았으며, 론 하퍼나 존 샐리, 데니스 로드맨처럼 자신과 경력도 비슷하고, 직접 맞붙으며 실력을 인정한 선수들은 자유롭게 내버려뒀다. 하퍼같은 선수들하곤 워낙 친하기도 했고, 캐브스 시절 치열하게 맞붙으며 인정한 상대니 갈굴 이유도 없었다.[37] 피펜의 유명한 Sit-down 사건 직후 라커룸에서 조용히 눈물을 흘리며 그에게 실망을 표했고, 피펜이 이에 크게 뉘우치게 한 것도 카트라이트이다. 많이들 간과되는게 이 사건은 4차전이었고, 당시 불스는 전력상 우위인 닉스를 상대로 7차전까지 갔다. 즉, 이런 참사에도 팀케미스트리를 유지한 것. 여기엔 1차3연패 시절부터 조던과 함께 공동주장이었던 인격자 카트라이트의 역할이 컸다. 그러나 이 시즌 이후 자유계약으로 시애틀로 이적, 여기에 피펜의 절친이자 동기인 그랜트까지 팀을 떠나 케미가 완전히 붕괴하게 된다.[38] 아직까지도 그 관객의 정체가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아서 소문에 따르면 유타 재즈 구단주였다고 하는데, 칼 말론증언에서도 누구인지 정확히 모르겠다고 한다. 사실 이 시점에서 유타 재즈 구단주일 가능성은 없다고 봐야한다. 구단주 래리 밀러는 말론이 입단하던 85년에 구단주가 되었고, 말론과도 당연히 잘 알던 사이였는데 저렇게 모르는 사람인것처럼 표현할리가 없기 때문이다.[39] 영상 3분 20초,[40] 사실 윌킨스는 레전드 도미니크 윌킨스의 친동생으로, 형과 마찬가지로 운동능력이 매우 뛰어나 조던을 상대적으로 잘 막는 선수이긴 했다. 그는 1급 수비수까진 아니었지만 당시 조던은 너무나 빠르고 강한 선수라 일단 그의 운동능력을 어느 정도 따라갈 수 있는 선수여야 매치업을 할 수 있었다. 실제로 80년대 후반 캐브스에서 가장 좋은 외곽 수비수는 크레익 일로였지만 조던을 막는게 상성이 좋았던 선수는 89시즌까지 클리블랜드에서 뛴, 운동능력과 사이즈가 되고 팔이 긴 론 하퍼였다. 캐브스는 전 시즌에 57승을 거두고도 조던을 못 막아 불스에 석패했기 때문에 전 시즌까지 뉴욕에서 뛰던 윌킨스를 조던을 막으란 특명을 주고 영입한 것이다. 당시 언론에서는 Jordan stopper"란 수식어까지 붙었을 정도. 물론 윌킨스고 하퍼고 조던에게 "덜 털렸다" 수준이지 잘 막진 못했다. 하퍼는 말 한번 잘못 했다가 플레이오프에서 한 경기 55점을 얻어맞을 정도.[41] http://cafe.daum.net/ilovenba/7n/245200 영어 원문기사: http://articles.chicagotribune.com/1988-05-01/sports/8803130519_1_bulls-domination-craig-ehlo-solitary-confinement 사실 하퍼로선 좀 억울할 만한 것이, 해당 멘트는 기자들과 얘기하다가 자연스레 나온 말일 뿐이었고 정작 하퍼와 조던은 바로 전 주에 같이 식사를 할 정도였기에 신경전을 벌일 이유가 전혀 없었다. 조던의 거의 편집광적인 승부욕의 피해자. 여담이지만 하퍼는 성격이 좋기로 유명한 인물이라 시카고 시절에도 조던을 포함해 다른 팀원, 관계자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했으며, 이런 하퍼의 리더십, 원만한 성격과 트라이앵글 오펜스에 대한 높은 이해도 때문에 필 잭슨이 레이커스 감독으로 부임할 당시 은퇴하려던 하퍼를 만류하고 자기 팀으로 데려온 적이 있다.[42] 서태웅이 풍남전에서 한 쪽을 다치자 두 눈 감고 던진 장면은 이 부분을 참조했다. 무톰보 신인시절은 91-92시즌이고, 전국대회연재는 1996년도 이다.[43] 링크 영상의 2분 36초부터.[44] 사실 밴 건디의 해당 코멘트는 억지인것이, 조던의 친구들은 한번도 그를 슬슬 대한적이 없다. 조던을 가장 괴롭힌 것은 피스톤즈지만, 1차 3연패 기간에 그를 가장 육체적으로 몰아붙힌 시리즈, 그가 가장 심하게 부진했던 시리즈가 바로 닉스를 상대한 92년 동부 준결승, 그리고 93년 동부 결승이다. 조던의 절친들인 패트릭 유잉과 찰스 오클리가 엄청나게 하드파울을 해대는 바람에 그는 골밑돌파를 거의 할 수가 없었던 것. 오클리는 조던을 내동댕이치거나 유잉은 돌파하는 조던의 얼굴을 팔꿈치로 가격하기도 했다. 한번은 조던이 덩크를 하는데 유잉이 뒤에서 밀자 (다행히 착지를 잘했지만 잘못하면 다칠수도 있었다) 조던이 화가 끝까지 나 소리를 지르고 주먹을 휘두르며 유잉에게 다가간 적이 있었다. 스스로의 회고로 "한번은 시리즈 도중 싸울 뻔했죠 (At one point in that series, I was ready to go to blows with him)"라고 한 시점. 조던은 NBA에서 친한 선수들이 많았지만 당시는 이런 친분과 상관없이 빡세게 농구했다. 또 다른 예가 붙을때마다 승부욕을 불태우며 트래쉬 토킹하며 치열하게 맞붙은 찰스 바클리와 조던 (바클리는 심판 판정에 항의하며 "저건 파울 맞아요! 저 놈이 마이클 조던이건 아니건요!"라고 빈정거렸다가 테크니컬을 받기도 했다), 그리고 조지타운 선후배인 유잉과 알론조 모닝이 있다. 이들은 유잉이 모닝에게 신장 하나를 떼어주겠다고 검사를 받을 정도로 절친했는데, 유잉의 표현의 따르면 자신들은 형제나 다름없지만 코트에선 서로 죽이려고 했다고 한다.[45] 조던이 은퇴하고 야구에 도전한 이유가 사실 조던이 자신이 출전한 경기를 포함해서 NBA 경기들에 돈을 걸다가 걸린 걸 조던의 상품성 때문에 징계를 주지 않고 참던 NBA 수뇌부가 폭발한 것이라거나, 심지어 아버지가 살해당해서 늪에서 발견된 것도 도박빚이 원인이었다는 루머가 있을 정도.[46] 물론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이 정도 건이라면 그건 상품성과 무관하게 언젠가 터져버릴 시한폭탄과 같은 문제가 되기 때문에 그대로 안고 가려야 갈 수가 없다. 게다가 버리지 않고 상품성을 보존한답시고 징계 대신 다른 스포츠, 그것도 프로에 도전하게 내버려 둔다는 게 말이 되는가? 몸이 완전히 망가질지도 모르는데? 일부 농구팬들의 생각과 달리 야구는 어깨와 무릎에 엄청난 무리를 주는 스포츠다. 그나마 조던이라 2년 동안 이런 뻘짓을 하고도 농구하는게 가능했던 것 뿐이다. 실제로는 이건 거의 미친 짓이고, 은퇴 후 몇 년을 딴 짓하다 복귀해서도 여전한 지배력을 보여주며 성공한 사례는 그만이 유일하다.[47] 조던은 98년 은퇴 당시 5억 달러였던 재산을 2014년 기준으로 10억 달러까지 불렸다. 조던이 도박빚에 시달릴 정도로 재산관리를 못하는 사람이었다면 벌써 파산했어야 정상인데, 실제로 연봉으로만 2억 달러를 번 아이버슨을 포함해 상당수 NBA 선수들이 은퇴 후 재산관리를 못해서 파산했다. 즉, 실제로 조던이 도박중독이었다면 아무리 재산이 많아봤자 지금쯤 다 날렸을 것이다. 조던이 도박을 즐긴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도박과 아버지 살해건, 야구 도전을 연결시키는 건 어디까지나 가십성 음모론에 불과하다. (실제로 이런 식의 기사는 주류 언론에서는 다루지도 않으며 가십성 인터넷 언론에서나 나오는 얘기다. 이런 매체들의 신뢰도는 그야말로 찌라시 수준. 엘비스 프레슬리가 살아있다는 음모론과 비슷한 수준이라고 보면 된다.) 심지어 NBA 사무국이 조던의 아버지를 청부살해했다는 이야기까지 떠돌기도 하는데 NBA 사무국이 이 정도 사건을 저지르고 묻어버릴 정도로 파워가 있다고 생각한다면, NBA가 어떤 식으로 구성되어 있는지 전혀 이해를 못하는 꼴. 참고로 NBA 사무국의 최정점에 있는 총재의 연봉이 800만 달러로, NBA 선수 중에서는 평균(5~600만)보다 약간 많고, 스타팅 멤버급의 선수의 연봉도 되지 못한다. NBA는 구단주들의 돈으로 돌아가는 리그다. 그리고 돈줄을 쥐고 있는 이들이 가장 큰 권력을 쥐고 있는 것은 현대 사회 어디에서나 통용되는 진리이다. NBA 총재는 리그가 잘 돌아가게 하기 위해 구단주들이 뽑은 월급쟁이 사장이지, 결코 절대권력자가 아니다.[48] 오히려 89시즌엔 결승 상대인 LA 레이커스조차 스윕해버린 압도적 전력의 디트로이트 피스톤즈에게 유일하게 플레이오프 패배(2패)를 안길 정도로 강팀들을 물고 늘어졌다. 참고로 배드 보이스는 백투백 우승 시즌에 플레이오프에서 7경기 패배했는데 이중 5경기가 조던 불스에 의한 패배였다. 비록 연장 접전 끝에 패하긴 했지만 역대 최강의 팀 중 하나이자 당대 최강의 수비팀인 86 보스턴 셀틱스를 상대로 플레이오프 기록인 63점을 세운 것도 그의 강심장을 드러내는 사례라 할 수 있겠다.[49] 게다가 당시 박스스코어를 보면 알 수 있듯이 98파이널은 시카고가 평균 88점, 유타는 80점에 시리즈 통틀어 90점을 넘긴 적이 시카고가 2,3차전에서 두번뿐일 정도로 저득점 시리즈였으며, 시카고 불스는 피펜이 15.7점, 쿠코치가 15.2점, 롱리와 하퍼가 5.3점, 5점을 넣은걸 제외하고는 한명도 4점을 못 넘길 정도로 단체로 공격에서 삽을 펐다. 즉, 당시 불스는 수비를 분산시켜 그의 어께를 가볍게 할 선수가 없었으며 그나마 활약한 경기가 있었던 피펜과 쿠코치가 한 경기 활약하고 다음 경기 부진하는 식이었다. 즉, 집중수비를 받으면서 팀득점의 38%나 넣은 것으로 단순환산해서 팀평균이 100점 경기에서 38점을 넣은 셈이다. 심지어 2004년 2차 핸드체킹룰 개정 전이라 외곽선수들에 대한 수비가 훨씬 빡센 시점.[50] 출처[51] 베일러가 전성시절 활약할때는 공격해서 득점하기가 현대 농구 보다 훨씬 쉬운편이었다.[52] 50점을 2회 이상 기록한 선수는 이들 뿐이며, 찰스 바클리(56점),레이 알렌(51점), 코비 브라이언트(50점), 빈스 카터(50점), 칼 말론 (50점), 도미니크 윌킨스(50점) 등도 한번씩 넘겨본 적이 있다. 르브론도 최근에 51점을 기록하며 여기에 합류했는데 문제는 르브론만 져서 파이널 게임에서 50점을 넣고도 진 유일한 선수가 됐다.[53] 목표 득점을 정하고 뛰는 선수이니 정말 차원이 다른 선수이다. 조던에게 1차, 2차 개인스탯 따위는 정말 숫자에 불과한 선수이다. 참고로 2차 스탯은 기준이 명확하지 않아 단순 참고용으로 해석해야 한다. 공을 많이 소유하는 선수들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하기에 레지 밀러, 클레이 탐슨유형의 슛터에게는 낮게 측정된다.[54] 페이튼이 상대를 인격적으로 도발하는 입발이었다면, 조던은 상대방을 실력으로 무시해서 살짝 비꼬는 입발. 혹자는 우아하다고도 표현했지만 달리 보면, 생각하면 할수록 열받고 짜증나는데, 근데 틀린 말도 아니고 이기지는 못하겠고. 사람 환장하게 하는 트래쉬 토킹의 소유자였다.[55] 물론 조던도 페이튼의 트래쉬토크에는 넌더리를 치면서 '그의 아가리에 농구공을 쳐넣고 싶었다.'라고 말했다.[56] 80년대 덩크 컨테스트는 현재처럼 독특한 아이디어보다는 덩크의 완성도를 보는 성향이 더 강했다. 따라서 똑같은 덩크를 매년 보여줘도 감점 요소가 되지 않았으며, 도미니크 윌킨스의 파워풀한 투핸드 윈드밀, 마이클 조던의 자유투라인 덩크는 그들이 컨테스트에 나올 때마다 매번 선보이는 "필살기"급 덩크였다. 실제로 조던은 1985, 87, 88년 세번 출전하면서 매번 자유투라인 덩크를 선보였는데, 85년엔 준우승, 87년과 88년엔 우승을 차지했다. 그러나 똑같은 자유투라인 덩크라도 신인이던 85년엔 다소 뻣뻣하게 팔만 쭉 뻗어서 덩크를 한 반면, 87년에는 좀 더 공중동작이 가미되었고, 아예 팔다리를 접었다가 펴면서 역동적으로 덩크를 한 88년도의 덩크는 역대 최고의 덩크 중 하나로 꼽힌다.[57] 사실 이러한 견해는 다소 비약이라고도 볼 수 있다. 실제로 80년대 NBA의 흥행을 주도했던 매직 존슨래리 버드는 각각 가드, 포워드 포지션에서 리그를 지배했다. 다만 매직은 카림 압둘자바, 버드는 로버트 패리시와 같은 리그 정상급 센터들과 함께 뛰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정상급 센터없이 리그를 지배했던 마이클 조던의 시카고 불스가 기존의 NBA 패러다임에서는 벗어나 있다는 것도 맞는 말이다.[58] 조던이 딱히 남들이 하지 않는 독특한 플레이를 한건 아니기 때문에 농구의 패러다임을 바꾸었다는 말은 다소 어폐가 있다. 다만 NBA의 인기를 끌어올려 NFL이나 MLB와도 경쟁을 할만한 단체가 되는데 지대한 공헌을 하고 수많은 스윙맨들이 난립하는데 우상으로서 공헌을 한 것은 사실이기 떄문에 'NBA'의 패러다임을 바꿨다고 할수는 있을지도 모른다.[59] 정확히 말하면 매직 존슨에서부터 시작된 변화의 정점을 찍은게 바로 조던이다. 예전에는 큰 선수들은 당연히 골밑플레이를 익혔으나 빅맨의 체격으로 퍼리미터에서 뛰는 매직의 등장은 70년대생 선수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주었고, 기존의 센터급 선수들이 다재다능한 포워드가 되는데 영향을 주었다.(직접적으로 영향을 받았다고 밝힌 대표적인 선수들이 크리스 웨버케빈 가넷이다. 특히 가넷은 첫 올스타전에서 매직과 하이파이브를 하고 "이 손 안 씻을 거에요!"라고 카메라를 향해 농담할 정도로 매직을 존경한다) 그러나 70년대 후반 이후 태어나 매직보다는 조던을 보며 자란 코비 브라이언트, 트레이시 맥그레디 등 스윙맨들이 난립하게 된다. 한편 이러한 변화가 지속되며 빅맨이건 윙플레이어들이건 너나할 것 없이 골밑기본기와 풋워크보다는 화려한 외곽플레이를 연습하는 트렌드가 자리를 잡았다.(80년대만 해도 외곽 선수들도 골밑플레이 능력을 갖고 있었다. 당시 스몰 포워드인 제임스 워디나 도미닉 윌킨스, 슈팅 가드인 마이클 조던이나 클라이드 드렉슬러 등의 경기를 보면 주 활동반경이 중거리였음에도 골밑에서 훅슛과 골밑슛 등이 능했다) 또한 조던이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친 부분은 아니지만, 조던 시대에 NBA가 크게 성장하며 어린 선수들이 당장 리그에 뛰어들어 큰 돈을 만질 수 있게되자 고졸 및 대학 1년만 다니고 데뷔하는 선수들이 폭발적으로 많아지게 된다. 문제점은 기본기는 대학시절에 대부분 배우는데 고졸 선수의 난립으로 기본기가 부족한 선수들이 크게 늘어났다는 것 (기본기 부족, 빅맨인데도 골밑 기술 부족을 동시에 보여준 선수가 한때 케빈 가넷에 비견되던 초대형 유망주였지만 아무것도 못하고 사라진 조나단 벤더이다) 현재 NBA는 고졸을 금지시키며 기본기 부족 문제는 어느 정도 해결됐지만, 외곽 중시 트렌드로 인해 센터 유망주들이 씨가 말라 버리며 NBA 팀들 역시 탁월한 센터 없이 농구를 하는 방향으로 전술을 짜기 시작했다. 이를 통해 현재와 같이 센터에 의존하지 않고 외곽에서의 볼과 선수들의 움직임이 중요한 시스템 농구, 퍼리미터 위주 농구가 대세가 되었다. 또한 가드나 포워드들 사이에서 훅슛 등 골밑에서 득점기술은 거의 찾아보기 힘들지만 (돌파에 이은 레이업과 다른 개념이다) 대신 3점슛이 기본 소양으로 자리잡아, 현재 3점을 아예 못 쏘는 1~3번은 매우 드물고, 반대로 3점을 수준급으로 쏘는 빅맨들이 많아졌다. 즉, 무게중심이 골밑에서 외곽으로 바뀌었다. 정리하자면, 조던 혼자서 패러다임을 바꾼 것은 아니지만 현재처럼 트렌드가 바뀌는데 크게 영향을 준 인물인 것은 맞다.[60] 다만 현재 "수비수가 공격수에게 손도 못 대는(공격진행방향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면 댈 수 있다. 밀면 안 되는 것) 심한 핸드체킹룰은 2004-05년에 도입되었다. 이로 인해 그 다음 시즌, 무려 득점 상위 5걸 중 4명이 커리어하이를 기록하는 득점 인플레가 일어나기도. 이 중 앨런 아이버슨은 전성기가 지났고 평균 20점을 넣는 크리스 웨버가 합류했음에도 3점 가까이 올랐다. 또한 이들은 모두 그 다음 시즌, 팀내 상황이나 기량에 큰 변화가 없었음에도 득점이 크게 하락했다. 르브론과 코비는 각각 4,5점씩이나... 이는 핸드체킹룰 변화에 익숙치 못한 수비수들이 초기에 대응을 못했다가 이에 익숙해진 것이라고 추측이 가능하다.[61] 2012년에 드림팀 결성 20주년 기념으로 nba tv에서 제작한 "The Dream Team"이라는 다큐멘터리에서 드러난 내용이다. 당시 FIBA에서 "다른 나라의 프로들은 아마추어로 분류되어 올림픽 참가가 가능했다"며 모든 나라의 프로팀이 올림픽에 나갈 수 있다는 룰 개정안을 통과시킨다. 이에 미국은 팀을 결성하기 시작했는데 당시 u.s. basketball committee 소속이자 NBA VP를 지낸 로드 쏜이 처음 연락한 멤버가 조던이었다. 그러나 조던은 이미 금메달도 있는데다가 "올림픽에 나가 혼자 고생하긴 싫다"며 다른 정상급 선수들의 참여여부에 따라 결정하겠다고 했고 이에 따라 매직 존슨, 래리 버드, 찰스 바클리등 당대 최고 스타들로 구성하기 시작한 것이다. 조던이 선수촌 입소 못한 걸 아쉬워했는지 여부는 다큐멘터리에 나오지 않으나 조던이 거의 매일 척 데일리 드림팀 감독과 골프를 치며 친해졌다는 내용은 나온다.과연 친목왕 척 데일리 또한 골프치고, 연습하고, 밤새 카드치고, 잠깐 눈붙이고, 경기하고를 반복하자 동료들이 그의 괴물같은 체력에 놀라며 질려하는 모습이 나온다.[62] 출처[63] 참고로 조던은 커리어 통산 NBA 파이널에 6번 진출했고 6번 모두 우승했으며, 6번 모두 MVP에 선정되었다. 이 때문에 국내 한정으로 조던에게 털린 선수들의 팬들 사이에서 666 대악마(...) 드립이 돌기도 했다.[64] 단일시즌 PER가 30+이상이면 역대급 선수라고 평가 받는데, 단일시즌 30+ PER를 4회이상 기록한 선수는 마이클 조던르브론 제임스뿐이다..[65] Value Over Replacement Player. 대체선수대비 생산력 지표.[66] 사실 질문 자체는 병크에 가까운 내용인데 위트 있게 받아쳐서 명언으로 남은 부분. 이 외에도 "신이 된 기분이 어떠냐?"란 이뭐병스러운 질문도 받은 적이 있다.[67] 점프슛은 슛(농구) 항목에도 나와있지만 점프해서 올라오는 모멘텀을 자연스럽게 손목까지 전달해서 쏘는 슛이다. 그런데 대학시절부터 프로 초창기까지 조던은 손목 감각에 크게 의존해서 슛을 쐈다. (자유투는 초창기부터 완성되어 있었지만 이건 정자세에서 쏘는거니까) 엄청난 점프력과 균형감각의 소유자였던 조던은 일단 뛴 상태에서 수비를 제치고 더블클러치 점프슛을 던지는 등 플레이가 잦았는데 문제점은 이렇게 쏘는 슛은 포물선이 극히 낮아 거리가 멀면 성공률이 극히 떨어진다는 것. 이 때문에 조던은 중장거리 점프슛을 계속 연습해서 무기로 장착했다. 그러나 확률높은 공격을 선호하는 본인 성향도 있고, 장거리점프슛은 다른 슈터의 수준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에 삼점슛은 한번도 주요옵션으로 사용한 적이 없다. 무서운 건 그럼에도 삼점슛으로 클러치슛을 터뜨린 적이 꽤 된다는 것. 97파이널 5차전은 아예 3점으로 위닝샷을 넣었고, 98시즌에 팀 던컨과 첫 만남에서 초반에 슈팅난조에 시달리다가 후반들어 점점 끌어올리더니 4쿼터 종료와 동시에 버저비터 3점을 꽂아넣어 경기를 연장으로 끌고가 결국 승리했다. 98 동부결승전 4차전에는 불안정한 상태에서 공을 잡자마자 버저비터 더블클러치 (...) 삼점슛을 던졌는데 정말 아깝게 림을 한번 흝고 돌아나왔다. 이때 해설자의 "It rimmed out!! It rimmed out! It rimmed out! It rimmed out!!! UN-BE-LIEEEEEE-VABLE!!!!"란 격앙된 해설이 일품. 조던 하일라이트 영상에 자주 등장하는 장면이지만 심지어 성공륭이 2할대 초반이던 80년대 후반 (89시즌 전. 당시 입던 매은 반바지로 유추가능하다) 경기에서 종료직전 반대쪽 코트에서 질주해와 버저지터 위닝샷을 넣는 장면이 있다. 삼점을 그리 잘 쏘는 선수도 아닌데 왜 삼점클러치슛을 감독이 맡기고, 또 그걸 잘 넣는지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 가지만 조던이란 선수가 원래 그렇다.[68] 90년대 조던에게 익숙한 한국 농구팬들이 80년대 조던의 경기를 보면 또 하나의 신세계를 느낄 수 있다. 웨이트가 완벽하지는 않고 플레이도 90년대에 비하면 영 엉성해 보이긴 하지만 그야말로 사람이 아닌 듯한 스피드와 탄력을 지녔다.[69] 아무리 돌파의 비중을 높여도 빅맨이 아닌 이상에야 농구에서 대부분의 득점은 점퍼다. 물론 르브론 제임스처럼 스윙맨이면서 돌파로만 20점씩 넣는 이상한 놈들도 있다. 다만 이것은 현재 NBA가 조던이 젊었던 시대에 비해 1,2차 핸드체킹룰 개정을 통해 돌파하는 선수들에게 손을 대서 방향전환을 방해할 수 없게 한 데다가 파울콜을 그때와 비교할 수 없이 엄격하게 불기 때문에 돌파하는 것에 대한 신체적 부담이 그때와 비교할 수 없이 적기 때문이다. 해당 영상에서 보면 알 수 있듯이 현재같으면 플래그런트 파울이 불릴만한 파울이 그냥 파울, 혹은 아예 불리지도 않고 징계감인 파울을 해도 퇴장조차 당하지 않고 경기를 속개하는 걸 볼 수 있다. 조던 vs 르브론 항목에도 나와있지만 폴 피어스나 빈스카터같은 2000년 이후 주로 뛴 선수들조차 90년대가 지금보다 훨씬 피지컬해서 지금이 득점하기 더 쉽다고 하고 있다.[70] 득표수가 적어서 큰 의미는 없지만, 98년 올해의 수비수 투표에서 조던은 4위였다.[71] 쉬다가 복귀했다고 몸 소모가 적다고 보는 이들이 있는데, 조던은 은퇴하고 관리받으면서 재활을 한게 아니고 그냥 골프치고 놀다가 복귀한 것이다. 당연히 현역시절에 비해 체중도 늘고 운동능력도 많이 떨어진 상태. 일반인들도 오랜만에 운동하면 감이 떨어지고 몸상태가 안 좋은데, 3년이나 놀다가 NBA로 복귀한 것이다. 그것도 만 38세에 나이에. 복귀가 가능한 것 자체가 놀라운 것이다. 일례로 더 젊은 나이에 은퇴하고 만 36세에 복귀한 매직 존슨은 32경기밖에 못 뛰었다.[72] 르브론 제임스팬들이 대표적이다.[73] 리그 초창기 선수였던 빌 러셀과 윌트 체임벌린은 자료가 많이 남아있지 않아 논란이 제기된 적이 많다.[74] 다만 습관인지 왼손 덩크의 비중은 극히 적었다. 그의 돌파력은 왼쪽/오른쪽 따질 것 없이 모두 위력적이었는데 유독 왼쪽으로 돌파하면 레이업으로 마무리하는 경우가 많았다.[75] 참고로 조던이 35점을 찍을때는 그를 제외하면 10점대 초중반이 팀내 2위일 정도로 공격력이 빈약했는데 저렇게 득점을 많이하면서 팀 내 야투율 1위였다.[76] 이 때 기록은 여기서 확인할 수 있다. 출처 이때 조던은 야투 27개 중 21개를 넣고 자유투 19개 중 17개를 적중시켰다. 이때 훗날 스타가 되는 스카티 피펜과 호레이스 그랜트는 경기당 20분 정도 출전하는 후보에 불과했던 터라 (이날 둘이 합쳐 슛 7개 던져 1점 넣었다) 이때는 그야말로 완벽한 조던의 원맨팀이었다. 오죽하면 팀내 2옵션이 득점이 아닌 리바운드와 수비에 특화된 파워 포워드 찰스 오클리(12.4점)일 정도. 심지어 팀에서 두자리수 득점을 한 선수는 이 둘뿐이었다.[77] 이 때문에 후에 LA 레이커스는 2000년대 초반의 샤킬 오닐, 그리고 그의 이적 후 영입된 파우 가솔같은 빅맨을 통해 트라이앵글을 완성시킬 수 있었다.[78] 사실 조던의 몸을 결정적으로 키워준 계기가 된 건 그 당시 "배드 보이즈" 라고 불렸던 아이재아 토마스를 중심으로 한 피스톤즈 덕분이었다. 당시 디트는 조던을 막기 위해 더블팀, 트리플팀을 기본으로 온갖 거친 방법을 동원하여 조던을 막았으며 (조던 룰) 제 아무리 최고의 기량을 가진 조던이었다고 하더라도 체력적으로 가드는 물론이거니와 더티한 포워드나 센터들이 피지컬 플레이를 하는걸 감당할 수 없었던 것. 결국 그 조던 룰을 이겨내기 위해 악착같이 웨이트를 하며 피스톤즈를 넘어서게 된다. 후에 조던도 인터뷰에서 그 점을 인정했다.[79] 이 사기더웨이는 카림 압둘자바가 구사하는 스카이 훅과 더불어 막을 수 없는 두가지 슛이라 불리우고, 조던 키드들은 휴식시간이나 체육시간에 이 사기더웨이를 열심히 흉내냈지만 아무나 할 수 있는거라면 사기더웨이가 아니다. 그리고 덕 노비츠키가 이 사기더웨이의 뒤를 잇고 있다. 이쪽은 아예 별명 자체가 사기꾼이다.(...) 노비츠키의 경우 7피트에 달하는 높이와 정확도가 사기라면 조던은 왠만한 선수들이면 터프샷일 정도로 뒤로 뛰면서 압도적인 안정감까지 갖췄다는게 사기다. 일단 페어더웨이를 구사하는 선수들은 상당히 많지만 대부분 포스트업 상태에서 돌아서 페이더웨이를 던질때 선호하는 방향이 있다. 케빈 가넷의 경우 왼쪽으로 돌았을때도 성공률이 높지만, 습관인지 거의 오른쪽으로 도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사실 오른손잡이의 경우 슛할때 자연스럽게 오른발이 앞으로 가기 때문에 오른쪽으로 도는게 자연스럽다. 왼쪽으로 돌면 공중에서 자세를 한번 더 잡거나 몸이 약간 비틀린 상태에서 쏴야 한다) 그런데 조던은 어느 쪽으로 돌든지 폼도 거의 똑같고 성공률도 동일했다. 이 것이 왜 큰 장점이 되냐면 골대를 등진 기준으로 볼때 왼쪽 베이스라인 쪽에서 포스트업을 했을때 무조건 오른쪽으로만 돌 경우 코트 중앙쪽에 밀집된 상대 수비에 부딫힐 확률이 높다. 그런데 왼쪽으로 돌아서 안정적으로 쏠 수 있다면 더블팀하러 들어오는 상대 수비수를 바보로 만들고 여유있게 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게 말이 쉽지 페이더웨이 자체가 터프샷에 해당하는지라 주무기로 쓸만한게 아니다. 그런데 조던은 이걸 주무기로 쓰면서도 성공률이 높으니 말도 안되는 것이다.[80] 물론 90년대에도 오픈코트에서 무서운 위력을 보였다. 당시 시카고는 조던-피펜-로드맨-하퍼까지 압박수비를 하고, 스틸이 나는 동시에 조던과 피펜이 야생마처럼 달려가서 마무리하는데 능했는데 둘 다 스피드, 점프력, 파워를 겸비했기 때문에 이들의 속공은 막기가 정말 힘들었다. 반대로 80년대에 하프코트에서도 누구도 막을 수 없는 돌파력을 무기로 페이스업에서 그냥 다 뚫어버리거나, 당시 이미 장착하고 있던 포스트업 페이더웨이나 (물론 완성도는 90년대가 월등하다. 대표적으로 스텝 한번 밟아서 수비를 떨어뜨리는 능력) 포스트업 스핀무브 후 돌파, 더블클러치 점프슛 등 하프코트에서도 최강이었다. 다만 운동능력이 80년대엔 워낙 뛰어났기에 오픈코트에서 위력이 그만큼 더 뛰어났고, 반면 90년대에는 운동능력도 떨어지고 당시 추세 자체가 페이스가 낮은 저득점 농구였기에 하프코트 농구를 더 많이 한 것 뿐이다.[81] 다만 지역방어 때문에 포스트업형 센터가 사라졌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현재 대부분의 NBA팀들은 대인방어가 기본에 다양한 수비전술을 쓰고 있으며 지역방어를 최우선적으로 쓰는 팀은 없다. 애초에 지역방어를 깨는 최적의 방법이 3점슛인데, 지금처럼 3점슛을 많이 쓰는 시대에 지역방어를 주구장창 쓰면 망한다. 결정적으로 지역방어가 2001시즌부터 도입되었는데 샤킬 오닐, 팀 던컨 등은 별 지장없이 포스트업을 주요옵션으로 사용했다.[82] 물론 현재 NBA 트렌드 상에서는 무조건 옳다라고 보기 힘들다. 확률이 다소 떨어져도 기대값 자체는 3점이 우월하다는 것이 증명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다면 과거에 비해 수비범위가 넓어져서 포스트에 수비가 집중되지 않는데도 현대 빅맨들이 90년대보다 득점력이 떨어지는 이유는 무엇인가? 에 대한 질문이 나올수 있는데, 여러 분석이 있고, 룰의 변경으로 과거보다 더블팀하기 편해서라는 관점도 있지만, 단순히 그 선수들의 득점력이 그만큼 떨어지기 때문이라는 관점도 존재한다. 실제로 3점슛 라인 안에 수비가 집중되던 과거와 달리 2010년대 NBA의 수비범위는 상당히 넓은 편이다. 80년대 선수들의 경우 존 스탁턴같이 3점슛 능력을 지닌 가드도 3점슛을 극히 자제했고, 이 때문에 상대는 수비범위를 3점라인 안쪽으로 제한해 돌파위주 선수 입장에선 굉장히 밀도높은 수비를 뚫어야했다.[83] 이런 이유에서 현재의 NBA 트렌드 에서는 기본적으로 패스게임이 되는 엘리트 빅맨이 대접받는다.[84] 1990년 동부 컨퍼런스 파이널 당시. 참고로 이 수치는 역대급인 피스톤즈의 수비 때문에 상당히 떨어진 수치다. 그 전까지 1,2라운드에서 그는 평균 40점을 기록했다. 플레이오프에서.[85] 당시 득점 2위는 29점인 도미니크 윌킨스일 정도였다. 페이스와 팀전체 득점이 높아 착각하지만 80년대 후반~90년대 초반은 개인득점이 높은 시기가 아니었다. 자세한 상황은 밑에서 후술.[86] 여담이지만 이 트리플 클러치 장면을 다른 각도에서 찍은 영상을 보면 상대팀인 뉴저지 네츠 선수들도 이 플레이에 경악해서 팀 동료가 슈퍼플레이 한 것 마냥 환호하려다가 감독 눈치보고 급하게 주저앉는다.(...)[87] 부상을 입어도 참아내는 인내력 또한 있었지만 아무리 인내한다 해도 매 시즌 82경기를 풀로 소화하는 건 그냥 타고나야 한다. 그의 입지에 도전하는 이들이 기술적인 측면보다 더 좌절할 수밖에 없는 것이 바로 이런 괴물같은 체력. 물론 2년차때 부상을 당한 이후로 지독한 웨이트를 통해 근육을 단련한 덕도 있다. 신인시절에는 호리호리한 느낌의 선수가 점차 전신의 근육이 압도적인 수준이 된다. 하지만 웨이트 빡세게 하기만 해서 될 것만 같으면 아무나 세계 최고의 선수가 될 수 있을 것. 게다가 최근 연구결과에 따르면 근육량을 급격히 늘릴 경우 프로선수들은 부상 위험이 증가할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그런데도 40살까지 거의 풀 시즌을 매번 소화했으니 진정 괴물.[88] 상대해 본 선수들이나 전문가들에 따르면 눈, 어깨, 발, 무릎 등 온갖 부위로 일반인들은 아예 느끼지도 못하는 아주 작은 모션페이크들을 조합해 순간적으로 균형을 무너뜨리기 때문에 반응조차 못한다고. 심지어 포스트업 상태에서 등짝으로도 페이크를 넣는다고 한다. 결국 억지로라도 막으려 하면 앤드원 유도.[89] 80년대 선수들이 2차 스탯이 이상할 정도로 적게 나오는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하다. 당시 슈퍼스타들은 40분이 넘는 선수가 여러명 나올 정도로 오래 뛰었지만, 위에서 언급한 체력적 소모 때문에 현대농구와 같은 페이스로 스탯을 쌓기가 힘들었다. 그런데 현대농구 규칙 하에서 스탯 쌓는 페이스로 만들어진 2차스탯으로 당시 선수들을 평가하려고 하니 오류가 나기 십상인 것. 단적인 예로 1980-81시즌 당시 우승팀 보스턴 셀틱스에서 48분 환산 winshare 팀내 1위를 차지한 선수는 래리 버드가 아닌 세드릭 멕스웰이란 선수였다. 그렇다고 맥스웰이 좋은 선수였느냐? 평생 올스타 선정 한번이 없는 그냥 좋은 롤플레이어였다.[90] 여담이지만 블랙캣 시절, 정확히는 선수생활 3, 4년차때 시즌 평균 37.1, 35.0득점을 기록하며 백투백 득점왕을 차지하면서도 팀 성적이 1라운드 탈락, 2라운드 탈락으로 끝나자 언론에서 '득점욕만 있는 볼호그'라며 비난했는데, 바로 그 다음 시즌에 역사상 가장 위대한 퍼포먼스를 꼽으라면 반드시 언급되는 32 - 8 - 8의 평균 기록을 냈다. 이 시즌 중 7경기 연속 트리플 더블을 기록한 후, 8번째 경기에서 40득점 7리바운드 11어시스트를 기록하고 다시 세 경기 연속으로 트리플 더블을 기록했다. 시즌 내내 "내가 이래도 볼호그라고?"라고 시위한 셈. 또 여담이지만 91파이널 당시 역대 최고의 PG인 매직 존슨과 맞붙으며 "패스에서도 뒤지지 않는다"고 하고 싶었는지 시리즈 내내 고감도 패스를 선보이며 평균 31점 11어시스트를 기록하는 괴물같은 모습을 보여준다. 이때 호레이스 그랜트, 존 팩슨, 스카티 피펜 등 가리지 않고 A패스를 꽂아주면서도 평상시처럼 고득점을, 그것도 5할 이상의 높은 확률로 넣는 걸 보면 정신이 아득해질 정도...[91] 사실 단순한 지역수비보다 훨씬 악랄하고 빡센 전략이었다. 현재 NBA는 지역수비를 허용하지만 94년, 2005년 2차에 거친 핸드체킹룰 개정으로 공격수를 극도로 보호하는 성향을 갖고 있다. 개정 이전에는 수비수가 손으로 밀고당기며 공격수를 견제하는 "핸드체킹"이 가능했다. 그러나 핸드체킹룰 개정을 통해 공격수의 진행방향에 조금이라도 영향을 주면 바로 파울을 불도록 되었다. 물론 골밑에서는 이렇게 일일히 불면 진행이 불가능하나 문제는 외곽이었다. 이 때문에 2차 개정이 있었던 직후인 05-06시즌엔 스윙맨들의 개인평균득점 인플레가 일어나 코비 브라이언트가 35점, 전성기가 지난(31세) 아이버슨이 갑자기 커리어하이인 33점을 찍고, 이때 3년차에 불과했던 르브론 제임스도 31점을 찍고선 (이후에 득점왕에 오를때도 이 정도 득점은 불가능했다) 그 다음 시즌에 어떤 부상이나 외부 요소도 없이 평득이 급감했다. 어쨌건 현재 수비는 지역수비+공격자 보호 성향이 강한데, 80년대 당시엔 수비가 정말 거칠게 공격수를 몰아세우는게 가능했고 이 때문에 전반적인 스틸 수치가 더 높았다. 그런데 피스톤즈는 룰의 허점을 최대한 이용해 돌파를 견제하는 수비를 하면서도 그를 육체적으로 거의 구타하다시피했기 때문에 조던이 받는 압박은 역사상 그 어떤 스윙맨에 비할바가 아니었다. 후술되듯이 이런 수비 때문에 90시즌 플레이오프에서 조던은 1,2라운드에 평균 40점 야투성공률 54.4%를 기록하다가 피스톤즈를 상대하자 평균 32점 46.7%로 기록이 급감한다.[92] 여담이지만 이 때문에 맨투맨 수비 시기였음에도 당시 조던을 그나마 잘 막는 팀은 개인수비가 아닌, 팀수비로 막는 팀이었다. 실제로 디트로이트 피스톤즈도 리그 최고의 슈팅 가드 수비수인 조 듀마스가 있었지만, 강력한 팀 수비 때문에 그나마 막을 수 있었던 것. 그 외에 뉴욕닉스, 96년에 파이널에 붙었던 시애틀 슈퍼소닉스가 잘 막은 편이었다. 물론 여기서 잘 막았다는 기준은 평균 30점대 초반이다(...) 또한 시애틀이 막았을때 조던은 33세로 전성기가 지났었고 약간의 등부상을 안고 있었다. 그리고 피스톤즈는 팀이 불스보다 더 강해서 이긴 거지 위의 기록을 보듯이 조던 개인을 막는데 성공한 건 아니었다. 까놓고 말해 전성기의 조던을 봉쇄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물론 슛감이 안 좋은 날은 어떤 선수라도 부진할 수 밖에 없다. 여기선 수비로 조던을 봉쇄하는 것을 지칭하는 것) 그나마 조던이 막히기 시작한건 2차 3연패 때 나이를 들고 스타일이 점프슛 위주로 변하고 기량이 하락하기 시작한 이후였다.[93] 안면 블락을 시전하고 있는 존 샐리는 빌 레임비어와 함께 배드 보이스의 골밑을 책임지던 파워포워드였다. 아이러니하게도 두 번째 쓰리핏의 첫 우승이던 95-96 시즌에는 불스에 합류, 우승 멤버가 되었고, 은퇴하고 집에서 놀던 99-00 시즌에는 필 잭슨의 콜을 받고 LA 레이커스로 복귀, 우승 반지 하나를 추가했다. 이 쯤 되면 숨은 트라이앵글 오펜스 마스터 이 사진만 보면 오해하기 쉬우나 터프가이들이 드글거리던 당시 배드 보이스 멤버 중에서는 조 듀마스와 함께 그나마 성격도 점잖은 편이었고, 조던과 개인적으로도 친한 사이였다고 한다.[94] 수비왕이라는 상 상당수가 골밑을 지키는 파워 포워드센터에게 가는 것을 생각하면 역대 공격력 1위 슈팅 가드가 수비왕을 수상한다는 것 자체가 어찌 보면 기적이다. 그야말로 공수 완벽. 조던 이후로 2015년 현재까지 가드가 DPOY를 수상한 경우는 96년의 게리 페이튼뿐이다. 게다가 공수겸비의 선수들은 수비왕 투표에서 은근히 손해를 보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은근히 보수적인 미국의 기자단 (=투표단)이 한 선수에게 상이 몰리는 걸 어느 정도 경계하는 성향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88시즌의 조던은 MVP, 득점왕, 올해의 수비수를 독식했다.[95] 두 선수의 수비력은 막상막하지만 피펜의 경우 조던보다 약간 더 커 조던보다 더 큰 선수들을 막는 능력이 좀 더 좋고 팀 수비가 더 좋다. 하지만 대인수비와 가드들을 막는 능력의 경우 조던이 단연 더 뛰어나다. 조던이 장신이란 점과 가장 미디어 노출이 많았던 시절이 30대, 결정적으로 알렌 아이버슨의 크로스오버에 당하는 장면이 너무 유명해 작고 빠른 선수들을 막기 힘들었다는 이미지가 있는데 조던은 전성기 당시 아이재아 토마스와 매치업되던 선수였다. 출처 아이재아 토마스가 어떤 선수냐면 조던보다 13cm 작은 185cm에 전광석화와 같은 스피드, 엄청난 드리블링과 돌파력을 자랑하던 선수였다. 그런 선수가 조던과 매치업되면 돌파를 거의 못하고 외곽에서만 거의 득점했다. 참고로 조던은 저 시리즈에서 피스톤즈가 조던만 노골적으로 집중수비하면서 두들겨 팼음에도 평균 29점을 기록했다. (위에도 언급되지만 조던치고 엄청나게 저조한 수치였다. 그리고 저 경기에서 조던은 18점에 그치며 공격에서 매우 부진했다) 즉, 공격을 하드캐리하면서 상대팀의 에이스를 전담마크한 것이다. 사실 농구에서 키가 크면 공격에서 유리하지만 반응속도가 느려져서 작고 재빠른 선수들을 따라가기는 한계가 있다. 이 때문에 카와이 레너드나 피펜같은 최강의 수비수들도 포인트가드들을 막기는 힘들어한다. 그런데 조던은 자기보다 훨씬 작은 선수를 아무 무리없이 막을 수 있었다. 사실 아이버슨에게 당하던 장면도 자세히 보면 크로스오버에 낚였음에도 바로 쫓아가 블럭할 뻔했다. 실제로 아이버슨도 은퇴 후 그 장면을 회상하면서 "내 최고의 무브를 먹였는데 거의 블럭당할 뻔했다"며 crazy하다고 감탄했다. 게다가 그 장면에서 조던은 만 34세였고 당연히 전성기 때보다 훨씬 느려졌다. 전성기였으면 바로 블럭당했을 확률이 높다.[96] 사실 이 때문에 초창기에는 전문가들에게 수비력이 저평가받기도 했다. 유튜브에 남아있는 초창기 경기를 보면 해설자들이 "조던은 종종 수비에서 도박하는 경우가 있다"고 해설하는 걸 들을 수 있다. 실제로 87시즌 당시 역사상 최초로 200스틸 100블럭 이상을 기록한 선수가 되었음에도 디펜시브 세컨드 팀조차 뽑히지 못했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조던이 그렇게 스틸을 노리는 수비를 해도 빈틈이 없다는 걸 곧 깨달았고, 자신들의 평가를 수정해 결국 88시즌 조던은 수비왕을 차지한다.[97] 물론 그렇다고 조던이 소위 "병장농구"를 한 건 절대 아니었다. 예를 들어 필라델피아 76ers를 상대할 때 작고 재빨라 수비부담이 큰 앨런 아이버슨을 막은 건 론 하퍼였지만, 조던이 막은 데리 스택하우스 역시 득점력이 아이버슨 못지 않았다. (이때 스택하우스는 아이버슨보다 1년 선배고 당시 팀은 아이버슨을 포인트 가드로 생각해 득점보다는 리딩을 중점적으로 시켰다.) 또한 대인방어 외에 불스의 가장 큰 장점인 팀수비에서 피펜과 더불어 가장 적극적으로 도움수비를 가는 선수였는데, 이 둘이 없었다면 아무리 데니스 로드맨이 대단해도 2미터에 불과한 로드맨, 허접하기 그지 없는 불스 센터진으로 오닐, 유잉같은 동부의 최강 센터들을 상대할 순 없었을 것이다. 일례로 코비나 르브론은 "올 디펜스 팀에 이름값 때문에 들어간게 아니냐."는 논란에 몇번 시달렸는데 만 35세까지 계속 올 디펜스 퍼스트팀에 든 조던은 이런 논란이 없었다.[98] Whose game is it? It's Michael Jordan's game! 이라는 해설자의 극찬은 매우 유명하다.[99] 이렇게 커버할 수 있는 비결은 1차적으로 그의 민첩함이지만, 사실 그의 완벽에 가까운 기본기도 크다. 보통 운동능력이 뛰어난 선수들은 공격수가 한쪽으로 빠르게 움직이면 따라갈 수 있는 스피드가 있지만, 그쪽으로 몸을 던지기 때문에 영상의 아이버슨처럼 한쪽으로 가는 척하고 크로스오버를 먹이면 손쉽게 제껴진다. 이런 걸 자주하면 수비에서 도박을 한다고 평가받으며, 아무리 스틸이나 블럭이 잦아도 수비수로 높이 평가받기 힘들다. 농구는 공격권이 엄청 잦기 때문에 공 몇번 뺏어도 쉽게 득점을 여러 번 내주면 말짱 꽝이기 때문. (대표적인 예가 운동능력 쩔던 시절 찰스 바클리) 그런데 조던은 농구명문 노스캐롤라이나에서 기본기를 철저히 다지고 온 선수라 풋워크가 대단히 뛰어났다. 저 영상에서도 보이듯이 아이버슨의 왼쪽 돌파를 견제하면서도 두 발이 균형을 잃지 않아 바로 반대쪽으로 무게중심을 옮겨 견제할 수 있었던 것이다. 조던의 수비력의 진가를 보려면 그의 풋워크를 자세히 볼 것을 추천한다. 물론 그 외에 더블팀 들어갔다 빠지는 타이밍 등 팀수비에 대한 감각, 스크린 깨기, 스틸/블럭, 수비리바운드를 위한 박스아웃 (기껏 수비 잘하고 수비리바운드 못하면 꽝이다) 등 모든 면에서 뛰어났다.[100] 실제로 아이버슨은 오른쪽 돌파가 왼쪽 돌파보다 압도적으로 많다. 물론 조던이 당시 루키에 불과한데다 주 매치업 상대도 아니었던 아이버슨의 이런 성향까지 파악했을 가능성은 낮고, 아이버슨이 오른손잡이이고 보통 오른손잡이들은 오른쪽 돌파가 더 편하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이 자세를 유지한 것으로 보인다.또한 기본스탠스와는 달리 양손을 모두 아래쪽으로 내리고 돌파만을 견제하고 있다. 이 상황에서 아이버슨은 노골적으로 1대1을 하고 있기 때문에 패스를 견제할 필요가 없고, 슛을 노린다면 키가 훨씬 큰 조던이 블럭을 뜨는데 유리하기 때문에 처음부터 손을 올리고 있을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101] 중간에 보면 조던이 카터를 잘 막아 무리한 슛을 쏘게 만들고 수비 리바운드를 잡기 위해 카터를 잘 박스아웃했는데, 카터가 엄청난 점프력으로 조던의 등 뒤에서 날아올라 공격 리바운드를 낚아챈다. 기술적으로 보면 조던의 완승이지만 운동능력 때문에 농락당한 경우.[102] 사실 이는 현재도 크게 달라진게 없다. 21세기 들어 2018년까지 18번의 드래프트에서 1순위로 선택받은 선수들 중 빅맨이 11명, 포인트가드가 5명이고 스몰포워드는 르브론 제임스앤드류 위긴스 2명, 슈팅가드로 분류할 수 있는 선수는 단 한명도 없다.[103] 전성기가 매우 짧았지만 정말 화려하게 불타오른 선수로, 70득점을 넘긴 6명의 선수 중 하나이다. 이 리스트엔 체임벌린, 코비 브라이언트, 엘진 베일러, 데이비드 로빈슨, 데빈 부커, 그리고 톰슨이 있는데 당연히 이들 중 최단신이 톰슨. 톰슨의 73점은 후술되는 거빈과의 치열한 득점왕 경쟁에서 나온 것인데, 그날 거빈이 63점을 기록하는 바람에 간발의 차이로 득점왕을 뺏겼다.[104] 다만 이 애매함과 별개로 여러 스포츠 매체에서 슈팅가드 역대 랭킹을 내면 이 두 선수는 거의 슈팅가드로 분류된다.[105] 이 리스트에서 클라이드 드렉슬러는 빼야할 것이다. 거빈형의 발전형으로, 후술한 "조던형"에 가까운 드렉슬러는 조던보다 1년 선배였지만 루키시즌 그는 17.2분만 출전하며 7.7점을 기록하는 지극히 평범한 선수였다. 위에 언급된 짐 팩슨이 포틀랜드의 주전 슈팅가드로 굳건히 있었기 때문. 드렉슬러는 88년에서야 첫 올스타, 92년에 첫 퍼스트팀에 오르는 등 1년 빠른 데뷔와 한살 많은 나이에도 스타덤에 오른 시점이 조던보다 늦었다.[106] 또한 첨언하면 같은 유형으로 묶였다고 해서 이들의 플레이스타일이 비슷하다는건 당연히 아니다. 애초에 3점슛을 주요 무기로 장착했던 엘리스나 에인지와 현재로선 롱2 정도 슛도 장거리로 분류됐던 시절의 샘 존스나 빌 샤먼의 플레이스타일은 같을 수가 없다. 다만 이해를 돕기 위해 공격옵션 중 무엇을 중시하느냐에 따라 분류한 것이다.[107] 그와 대비를 이루는 것이 "장신선수들의 다재다능화"를 촉발한 케빈 가넷이다. 가넷은 빅맨의 사이즈를 지닌 선수가 가드처럼 드리블, 패스하고 뛴다는 혁신적인 선수였지만, 이후 그 못지 않은, 심지어 그를 능가하는 재능을 가진 선수들의 출몰로 이런 유행이 이어지고 있다.[108] 해당 경기에는 앨런 아이버슨도 있었으며 그는 경기 종료 후 영원히 조던을 그리워할 것이라고 인터뷰했다.[109] 그리고 코비 브라이언트의 은퇴경기 때 안 좋은 의미로 비교되었다(...).[110] 여담이지만 당시 게임이라는 한계상 선수들의 기량을 100% 정확히 반영하진 못하기 때문에 비슷하게 외곽슛이 없고 운동능력이 좋으며 스틸/블럭 능력도 비슷한게 덩치가 약간 좋은 피펜이 전체적인 능력치가 더 높은 로스터 플레이어보다 활용도가 더 좋았다. 사실 90년대에 나온 농구게임엔 조던이 안 나오는데 불스 왕조가 워낙 인기가 좋은지라 2인자인 피펜이 거의 깡패급으로 능력이 좋게 나온 것도 많았다. 대표적으로 피펜이 (말그대로) 끝판왕이었던 NBA Hangtime. 파울이 없고 만화적인 덩크가 넘치는 이 게임에서 끝판왕은 불스의 피펜과 로드맨이었는데, 빅맨과 스윙맨의 파워차이가 그다지 크지 않은데다 거의 전 능력치가 만빵에 가까운 (심지어 외곽슛조차 5점만점의 4점으로 스티브 커와 똑같다. 실제 능력 생각하면 말도 안되는 수치) 피펜은 거의 악마급의 위용이었다.[111] 본인이 출연한 그 영화의 게임 버전.[112] 스페이스 잼 게임에는 각 캐릭터마다 필살기가 존재했는데 조던은 외곽지역에서 팔이 쑥 길어지면서 덩크하는 모션이 필살기였다...[113] 실사 디지타이징을 사용한 그래픽은 뛰어났지만, 너무 과하게 시뮬레이션을 추구했다는 평을 받아 흥행은 별로 좋지 않았다[114] 콰미랑은 좀 다른 것이, 콰미는 정말 포텐봤다 망한 거지만, 애덤 모리슨은 지병이 있다는 리스크를 감수하고 뽑은 것이다. 물론 이런 애를 3픽으로 뽑은 것 자체가 뻘짓이란 건 다를 바 없지만, 최소한 애덤 모리슨은 대학 무대를 주름잡았던 선수였다. 그리고 사실 콰미는 하필 워싱턴이 1픽으로 뽑아서 그렇지, 당시 스카우팅 리포트와 워크아웃 결과에 따르면 리틀 가넷이나 크리스 웨버에 비견되었다(...) 당시 1~4픽 안에 고졸 루키인 타이슨 챈들러, 에디 커리가 싹 다 포함되었다는 사실을 볼 때 콰미는 어차피 최소 3픽안에는 뽑힐 것이었다. 뭐 레전설이 된거야 어쩔 수 없지만.[115] 어쩌면 본인이 정신력과 노력, 기술 등 비신체적인 부분에서 만렙이었기에, "피지컬이 되는데 정신력과 의지가 약하고 노력이 부족해 실패하는 것" 자체를 이해 못할 수도 있다. 실제로 콰미는 약간 작은 손을 제외하면 좋은 신장, 긴 팔, 좋은 운동능력 등 원석으로서는 매우 뛰어났고 농구에 대한 감각도 뛰어났다. 여기에 본인의 노력만 기울인다면 레전드 선수로 성장하기 충분했다. 실제로 이렇게 신체적으론 원석에 가까웠으나 본인이 갈궈서 성장시킨 선수들이 바로 스카티 피펜과 호러스 그랜트이다. 둘다 드래프트 당시엔 평범한 유망주에 가까웠으나 피펜은 레전드, 그랜트 역시 올스타급으로 성장했다. 문제는 누구나 다 압박한다고 성장하는 건 아니란 점. 사실 조던은 본인의 성격 자체가 너무나도 불같고 참을성이 없는데다가 기준이 높아서 지도자로서 좋은 인물은 아니다. 본인도 이걸 알고 있어 감독직은 고려도 하지 않고 있지만.[116] 대중들의 시선을 인식하는 NBA에서는 선수들이 라커룸에서 음주, 흡연하는 사진을 잘 공개하지 않는데 (시카고 선수들이 끝나고 맥주 한두캔씩 했다거나 알콜 중독이 좀 있는 제이슨 키드가 맥주가 가득찬 간이냉장고를 비웠다거나 하는 얘기가 있지만 썰이지 사진이나 영상은 없다) 예외가 바로 우승 축하할때 시가와 샴페인. 샴페인 터뜨리는거야 서양에서 유례가 깊은 축하 풍습이니 넘어가고, 시가의 경우 보스턴 셀틱스의 전설적인 명감독 레드 아워벡이 시작한 전통인데, 과거 무려 8연패를 이끈 레드는 승리를 확정지었다 싶으면 거만하게 시가를 피워물곤 했다. 그런데 그 모습이 워낙 간지폭풍이고 레드가 위대한 인물인지라 NBA에서 유행이 되어 우승후 시가를 피우는 전통이 생겨난것. 또한 이제는 농구 뿐 아니라 다른 스포츠에서도 우승한 다음에 시가를 피운다. 아예 light a victory cigar란 속어가 생길 정도. 실제로 최근에 우승한 르브론 제임스나 스테픈 커리도 우승기념 모자와 셔츠를 입고 시가를 라커룸이나 코트에서 피우는 사진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1996년 당시카고 우승에 대한 다큐멘터리 비디오 Unstoppabulls를 보면 우승하고 라커룸에서 선수들이 각 1병씩 샴페인을 따 토나 쿠코치가 미친듯이 뿌리고 제임스 에드워즈가 론 하퍼 머리에 끼얹어주고 병나발을 부는가 하면 조던이 시가를 피우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물론 에이스 조던의 모습이 찍혔을 뿐 다 (강제는 아니지만) 기념으로 피운다. 즉, 라커룸에서 샴페인과 시가를 할 정도로 심한 골초가 아니고, 그건 그냥 우승 축하 세러모니인 것. 물론 이와 별개로 시가를 즐기는 애연가인 것은 맞다.[117] 플레이보이 1992년 5월호 인터뷰 중.[118] 물론 그럴 가능성은 현재로는 사실상 없다. 현재 현역 중 커리어 평균 득점이 가장 높은 선수는 27.16점인 르브론, 27.02인 듀란트인데, 24.35점인 하든인데, 제임스의 경우 지금까지 단 한번도 조던의 커리어 전체평균보다 높은 득점을 한 시즌도 없다. 듀란트 역시 30점을 넘긴 시즌이 두번 (30.1점, 32점) 밖에 없으며 하든도 마찬가지로 두번 30점을 넘겼지만 그 중 한번은 36.1점이란 미친 페이스였다. 세 선수가 커리어 통틀어 22시즌을 뛰고 지금부터 은퇴할때까지 매 시즌 80경기씩 뛴다고 사실상 불가능한 가정을 해보자. 그렇게 한다고 쳐도 조던의 평균득점과 타이를 이루려면 르브론은 은퇴할때까지 37.49점을, 듀란트는 33.41점을, 그리고 하든은 34.7점을 매경기 넣어야 한다. 애초에 이 가정은 르브론와 듀란트의 경우 만40세까지, 하든의 경우 만 42세까지 동일한 기량과 내구도를 유지해야 한다는 말도 안되는 가정인데도, 조던한테까지 평득을 끌어올리려면 저런 미친 점수를 저렇게 오랫동안 계속 올려야 한다는 얘기다. 세 선수가 현재 르브론은 만 34세, 하든과 듀란트는 30세란 걸 생각하면 오히려 현재보다 커리어 평균득점이 떨어질 가능성이 농후하다. 르브론은 몰라도 다른 둘은 한동안 고득점을 올릴테지만, 말년에 크게 깎아먹을 걸 고려해야 하기 때문이다.[119] 물론 그뿐만이 아니라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지가 조던으로 인해 엄청난 판매부수를 기록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비단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 뿐만 아니라 조던 시대에 스포츠 미디어는 웬만하면 흥했다.[120] 대표적으로 스카티 피펜의 공헌도가 과소평가된다.[121] 사실 피펜은 첫 우승 당시 1991년에는 올스타에 선정되지도 못했고, 첫 3연패까지만 해도 "슈퍼스타"라기보다는 "떠오르는 스타"의 위치였고(피펜이 본격적으로 리그에서 손꼽히는 스타로 인정받기 시작한 건 조던이 은퇴하고 올NBA퍼스트팀에 처음 뽑힌 1994년부터다) 수비력도 조던이 확실히 더 뛰어났기 때문에 스탯에 드러나지 않는 수비력까지 반영하는 방법이 어찌 생긴다고 해도 조던의 비중이 커지면 커졌지, 줄어들지는 않을 것이다.[122] 최정상급의 수비와 공격을 동시에 보여주는 선수는 드물다. 재능의 문제도 있고, 체력적 문제도 있기 때문. 코비같이 근접한 선수들은 있지만, 코비도 조던처럼 수비왕급 수비력을 보여준 적은 없다.[123] 사실 유튜브에 래리 조던 덩크를 쳐서 나오는 영상을 보면 알겠지만 "꽤"가 아니라 괴물 수준으로 뛰어나다. 덩크도 그냥 덩크가 아니라 리버스 덩크나 백보드를 한 손으로 치고 덩크를 하는 등 1980년대 당시 기준으로 덩크콘테스트급 덩크를 선보인다. 조던이 키가 래리보다 훨씬 커지기 전까지 그를 한번도 못 이겼다는 걸 생각해보자. 위의 영상을 보면 조던이 장난스럽게 "형이 에어조던 1호에요. 전 2호고요"하고 한다.[124] 출처[125] 출처[126] 레지 밀러같은 샤프 슈터들은 중요한 공격권 직전에 타임아웃에서 잔뜩 바르고 나오기도 한다.[127] 이 GIF 사진에서 보듯이 조던의 테러?를 우산으로 막거나, 마스크로 막거나, 아예 방독면을 쓰고 나온 적도 있다. http://national.suntimes.com/nba/7/72/838668/michael-jordan-lebron-james-chalk-toss/[128] 의미 자체가 다르다. 조니 레드 커는 단순한 해설자가 아니라 해설자로서 (선수나 감독으로서가 아니다) 영구결번될 정도로 시카고 불스 팬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던 인물이다. 다소 짖궂은 성격의 조던의 악의없는 장난, 이를 유머스럽게 받아주는 푸근한 인상 영감님 커는 항상 불스 팬들의 마음을 따뜻하게 해주는 광경이었다. 커는 조던의 데뷔 시즌부터 시카고에서 은퇴할때까지 단 한경기도 빼놓지 않고 해설을 한 인물로, 그와 조던의 오랜 우정과 상호간의 깊은 존중을 상징하는 장면이 바로 이 파우더 뿌리기였던 것이다. 실제로 이 때문에 커가 타계한 이후 시카고 트리뷴에서도 이 세러모니를 그에 대한 헌정 기사에서 언급했다.출처 케빈 가넷은 조던에 대한 존경심에서 이를 따라하곤 했고 (실제로 가장 유명한 가넷 경기 중 하나인 2004년 서부 컨퍼런스 준결승 7차전에서 해설을 맡은 케빈 할런이 "가넷이 조던에 대한 경의(tribute)를 표하고 있군요"라고 언급한다) 어린 나이에도 당돌했던 그 역시 훨씬 나이 많은 해설자들에게 친근하게 파우더를 뿌리곤 했다. 실제로 그에게 "Big Ticket"이란 별명을 지어준 유명 해설자 케빈 할란 역시 팀버울브스 전속 해설자 시절 파우더 테러를 맞곤 했으며, 둘은 지금도 만나면 친근하게 투닥투닥 장난 치는 사이다. 이런 훈훈하고 소소한 세러모니인데, 르브론이 하는 것은 해설자고 뭐고 그냥 하늘에다 냅다 뿌리면서 포즈를 잡는 것 뿐이다. 거기에는 조던과 커, 가넷과 할란 사이의 일화나 우정도 없다.[129] 제프리는 2018년 7월 기준으로 만 29세, 마커스는 만 27세다. 둘 다 농구를 은퇴하고 마커스는 사업을, 제프리는 2013년에 나이키의 경영자 훈련 프로그램에 참가한 것이 마지막 소식인데, 현재 회사생활을 하고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130] 블로거들을 불러 구경시켜줬는데, 이 영상에서 나오는 차고만 여섯개 있는 저택은 게스트하우스다! 조던 본인과 가족이 쓰던 시설들은 나오지도 않은 것. 해당 영상[131] 출처[132] 사실 이런 집은 골치아픈게 한화 150억 원 이상을 집에 쓸 수 있는 사람이면 이미 상당한 부호다. 높은 확률로 이미 사회적으로 성공한 유명인사일 것이다. 근데 그런 사람이 허구헌날 구경꾼들이 찾아와 귀찮게 하고, 집 구석구석에 남의 흔적이 있는 집을 굳이 거액을 주고 살 필요가 있을까? 설령 조던 광팬이라고 해도 천오백만불은 "덕질"에 쓰기는 부담스러운 액수다. 차라리 1~2백만불 정도 적당한 액수였다면 기념품 사는 셈치고 살 수도 있겠지만. 또한 집 자체에 예술적 가치가 있다면 저런 돈을 주고 살 수도 있지만, 이건 그런 것도 아니고 그냥 조던이 자기 취향대로 기념품과 조형물로 떡칠해놓은 집이다. 사실상 조던덕질 외에는 굳이 살 가치가 없다. 게다가 조던의 흔적이 싫다고 이런걸 싸그리 치우고 리모델링을 하려면 애초에 굳이 이런 집을 살 이유가 없다. 즉, 어떻게 봐도 구매자가 나오기 힘든 구조다.[133] 사실 요즘 팬들의 경우 탈모하면 르브론 제임스가 가장 유명하겠지만, 조던은 20대 중반부터 정수리 부분까지 훤히 벗겨지는 등 르브론보다도 심했다. 이 때문에 88,89년 정도 조던을 보면 머리 때문에 유독 더 나이들어 보인다. 다만 얼굴 자체는 젊고 상당한 미남이기 때문에 머리를 아예 밀어버리자 오히려 젊어보이는 효과를 가져왔다. 실제로 머리를 민 90년대 초반과 2000년대 초반의 워싱턴 시절까지 사진을 비교해보면 차이가 크게 없다. 다만 은퇴한 이후 급격하게 살이 찌기 시작해 급노화하기 시작했다.[134] 시카고 불스는 조던 이전 9시즌 동안 2시즌 밖에 플레이오프를 못 간 약체팀이었는데 조던은 드래프트에서 불스에 뽑히면서 "내가 이 팀에 가는 이상 반드시 플레이오프에 진출시키겠다라고 선언했고 정말로 그 약속을 지켰다(!)[135] 여담이지만 조던은 단 한번도 자신의 팀보다 시드가 뒤떨어지는 팀에 패배한 적이 없다. 즉, 전력이 떨어지는 팀에게 당하는 "업셋"을 당한 적이 없다. 그가 패배했을때는 매번 객관적인 전력에서 상대팀이 월등히 앞섰을 때 뿐이었으며, 패했을 때조차 시리즈 최고 활약을 펼친 선수는 조던이었다. 모두가 기억하는 86 1라운드에서 그는 래리 버드조차 묻어버리는 역대급활약을 펼쳤으며, 87년도에도 1라운드 광탈했지만 35.7점 7리바운드 6어시스트 2스틸 2.3블럭이란 활약을 했다. (상대팀 에이스인 버드는 26점 10리바운드 9어시스트 1.3스틸 0.3블럭) 스탯을 종합해서 공헌도를 계산한 Game Score 기준으로 보면 말이 나오지 않을 정도인데 그는 데뷔했을 때부터 은퇴할 때까지 참가한 모든 플레이오프 시리즈에서 단 한번만 빼고 매번 양팀 통털어 시리즈 최고점수를 기록했다. 상대가 래리 버드매직 존슨이건 칼 말론존 스탁턴 듀오건 상관없이 그는 압도적인 활약을 했었다. 그가 게임스코어에서 밀렸던 단 한번은 극도로 부진했던 1996년 파이널로 그는 18.5를 기록했지만 숀 켐프는 18.9를 기록했다. 물론 불스 내에선 압도적인 1위였고 불스가 우승을 했지만.[136] 조던과 불스는 이 3번의 패배동안 하나씩 패배 횟수를 줄여가더니 끝내는 디트로이트를 꺾어버렸다.[137] 한 예로 토니 파커와 에바 롱고리아가 사귈때, 파커는 올스타급 선수고 롱고리아는 나름 인기가 많지만 연예계에서 정상급 스타는 아니었음에도 주목도는 롱고리아가 훨씬 높았다.[138] MJ는 그녀의 오빠인 마이클 잭슨의 이니셜과도 같다. 당연하지만 자넷이 조던을 잭슨으로 착각하고(...) 전화한 건 아니다. 매직 존슨, 마이클 잭슨 등 이니셜이 MJ였던 유명인사들은 많았지만 90년대 당시 MJ라고 하면 절대다수가 조던을 지칭했으며 (매직 본인도 조던에게 "헤이 MJ"라고 불렀다) 무엇보다 조던은 실제로 자넷이나 마이클 잭슨같은 사람들과 교류하던 톱 셀리브리티였으니...[139] 여담이지만 이 일화를 전한 백업센터 존 샐리(과거 배드보이즈 시절 피스톤즈의 주요 롤플레이어로 활약)는 "우리와 마이클이 차원이 다르다는 걸 실감한 순간이었다"고 전했다.[140] 1990년대초 까지는 매직 존슨이 더 인기가 높았기 때문에 절대 장담할 수 없다. 존슨이 1991년 에이즈로 은퇴하고 조던이 스리핏을 차지하면서 확실히 역전되었지만 말이다. 매직이 조던보다 더 인기가 많았다고 볼 근거는 없다. 조던은 1987년도부터 1차 은퇴하기 전인 1993년도까지 연속으로 NBA올스타 투표 1위를 차지했다. 심지어 이때 기간을 보면 조던은 줄리어스 어빙, 아이재아 토마스가 경쟁상대였지만, 이 때 매직이 경쟁한 가드 상대는 인기가 훨씬 떨어지는 케빈 존슨, 알빈 로버트슨, 팻 레버 등이었다. (클라이드 드렉슬러는 매직이 뛰는 동안 한번도 올스타에 팬투표로 선발못됐을 정도로 인기가 훨씬 떨어졌다) 물론 올스타 투표가 인기의 절대적인 척도는 아니지만, 참고자료 정도는 되는데 (중국인들의 몰표를 받은 야오밍같은 케이스가 있지만 당시엔 온라인 투표가 없던 시대니...) 여기서 조던이 훨씬 앞선 것이다. 매직이 조던보다 투표에서 앞섰던 건 조던의 루키시즌은 1985시즌, 부상으로 거의 못 뛴 1986시즌 뿐이었다. 게다가 매직은 1993년 설문에서 순위권에도 못 들었다. 반면 조던의 경우 1993~2003 사이에 두번 은퇴했는데도 한번도 전종목 1위를 놓치지 않았고 2003년에 최종 은퇴한 후에 2004,05년에도 1위였다. 농구선수들 사이에서는 2009년까지 1위였다. 냉정히 말해 매직의 인기도 대단하지만 조던과는 비교대상이 아니다. 사실 매직은 조던의 등장 전까지 가장 인기많은 선수긴 했지만 래리 버드나 어빙처럼 비슷한 수준으로 인기많은 선수들이 있긴 했다. 그러나 조던의 경우 인기 측면에서는 경쟁자조차 존재하지 않았다. 유일하게 그랜트 힐이 1996년에 딱 한번 근소한 차이로 올스타 1위를 뺏긴 했지만 바로 그 다음시즌부터 다시 1위를 달렸다. 한 마디로 조던의 인기는 같은 운동선수들과 비교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매직은 물론이고 조던보다도 더 미디어 노출이 잦은 후대의 선수들조차 전성기 조던의 인기, 그리고 광고수입에는 근접하지 못하고 있다.[141] 이 두 선수는 조던 이후 가장 높은 인기를 누린 선수인데 커리어를 통틀어 이 리스트에서 조던보다 높은 순위를 차지한게 각각 한번씩 뿐이다. 르브론은 아직 커리어가 남았으니 그렇다고 쳐도 코비는 2010년 1위 이후 계속 순위가 하락세인데다, 2015년 12월 현재 은퇴를 선언함으로써 더 올라가긴 힘들어졌다.[142] 미국에서 공식문서를 쓸때 제외하면 미들네임을 쓰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친한 친구 사이에서도 미들네임을 서로 모르는 경우도 많을 정도.[143] 90년대 후반~2010년대 중반 선수들 중에서 가장 우승기록이 많은 코비 브라이언트와 팀 던컨조차 이 기록을 못 넘었다.[144] 농구는 슈퍼스타 한 명이 경기를 뒤집어 놓을 수 있는 종목이기 때문에 야구, 미식축구, 아이스하키와 비교하면 감독이 선수들에게 꼼짝 못하는 정도가 강하다. 르브론 제임스의 감독 어깨빵 사건 등등 지금도 마찬가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