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nited States Congressional Gold Medal 미합중국 의회 명예 황금 훈장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1776년 | 1777년 | 1779년 | 1781년 | |
조지 워싱턴 | 소장 호레이쇼 게이츠 | 소장 앤서니 웨인 | 사령관 헨리 리 3세 | 준장 대니얼 모건 | |
1781년 | 1787년 | 1800년 | 1805년 | 1813년 | |
소장 너새니얼 그린 | 존 폴 존스 | 대령 토머스 트럭스턴 | 준장 에드워드 프레블 | 대령 아이작 헐 대령 스티븐 디케이터 대령 제이콥 존스 | |
1813년 | 1814년 | ||||
대령 윌리엄 베인브리지 | 대령 올리버 해저드 페리 대령 제시 엘리엇 | 대위 윌리엄 워드 버로스 2세 대위 에드워드 매콜 | 대령 제임스 로렌스 | 대령 토머스 맥도너 대령 로버트 헨리 대위 스티븐 카신 | |
1814년 | 1814년, 1848년 | 1814년 | |||
대령 루이스 워링턴 | 대령 존스턴 블레이클리 | 소장 제이콥 브라운 | 소장 윈필드 스콧 | 소장 피터 부엘 포터 준장 엘리저 윌락 리플리 대령 제임스 밀러 | |
1814년 | 1815년 | 1816년 | |||
소장 에드먼드 P. 게인스 | 소장 알렉산더 마콤 | 소장 앤드루 잭슨 | 대령 찰스 스튜어트 | 대령 제임스 비들 | |
1818년 | 1835년 | 1846년, 1847년, 1848년 | 1847년 | 1854년 | |
소장 윌리엄 해리슨 주지사 아이작 셸비 | 대령 조지 크로간 | 소장 재커리 테일러 | 소머스 호 장교 및 승무원 구출 | 중령 덩컨 잉그함 | |
1858년 | 1863년 | 1864년 | 1866년 | 1867년 | |
프레더릭 로즈 | 소장 율리시스 S. 그랜트 | 코닐리어스 밴더빌트 | 로버트 크레이튼 에드윈 J. 로 조지 C. 스투퍼 | 사이러스 웨스트 필드 | |
1867년 | 1871년 | 1873년 | 1874년, 1904년 | 1883년 | |
조지 피바디 | 조지 F. 로빈슨 | 대령 재러드 크랜달 그 외 | 존 혼 주니어 | 존 폭스 슬레이터 | |
1888년 | 1890년 | 1900년 | 1902년 | 1909년 | |
조셉 프랜시스 | 수석 엔지니어 조지 W. 멜빌 그 외 | 중위 프랭크 H. 뉴컴 | 중위 데이비드 H. 자비스 소위 엘스워스 P. 버트홀프 새뮤얼 J. 콜 박사 | 라이트 형제 | |
1912년 | 1914년 | 1915년 | 1928년 | ||
선장 아서 로스트론 | 폴 H. 크라이봄 그 외 | 로물로 세바스티안 나온 에두아르도 수아레스 무히카 | 찰스 린드버그 | 로알 아문센 움베르토 노빌 | |
1928년 | 1929년 | 1930년 | 1936년 | ||
토머스 에디슨 | 최초로 성공한 대서양 횡단 비행사 | 소령 월터 리드 | 준장 리처드 에벌린 버드 | 링컨 엘즈워스 | |
1936년 | 1938년 | 1939년 | 1940년 | ||
조지 M. 코핸 | 리처드 올드 리치 부인 안나 불리니 | 하워드 휴즈 | 목사 프랜시스 퀸 | 윌리엄 시넛 | |
1942년 | 1945년 | 1946년 | |||
롤런드 바우처 | 1939~1941년 미국 남극 탐험대 | 육군 원수 조지 C. 마셜 해군 원수 어니스트 킹 | 육군 원수 존 조지프 퍼싱 | 준장 빌리 미첼 | |
1949년 | 1954년 | 1955년 | 1956년 | 1958년 | |
앨번 W. 바클리 | 어빙 벌린 | 조너스 소크 박사 | 남북전쟁의 참전 용사 | 준장 하이먼 리코버 | |
1959년 | 1960년 | 1961년 | 1962년 | ||
로버트 고다드 | 로버트 프로스트 | 토머스 앤서니 둘리 3세 | 밥 호프 | 샘 레이번 | |
1962년 | 1968년 | 1969년 | 1973년 | 1977년 | |
육군 원수 더글러스 맥아더 | 월트 디즈니 | 윈스턴 처칠 | 로베르토 클레멘테 | 매리언 앤더슨 | |
1978년 | 1979년 | ||||
중장 아이라 이커 | 로버트 F. 케네디 | 존 웨인 | 벤 아브러조 맥시 앤더슨 래리 뉴먼 | 휴버트 험프리 | |
1979년 | 1980년 | 1982년 | |||
미국 적십자사 | 케네스 테일러 | 1980 미국 하계 올림픽 팀 | 베아트릭스 여왕 | 대장 하이먼 리코버 | |
1982년 | 1983년 | ||||
프레드 워링 | 조 루이스 | 루이스 라머 | 레오 라이언 | 대니 토머스 | |
1984년 | 1985년 | ||||
해리 S. 트루먼 | 레이디 버드 존슨 | 엘리 비젤 | 로이 윌킨스 | 조지 거슈윈 아이라 거슈윈 | |
1986년 | 1987년 | 1988년 | |||
네이선 샤란스키 에비탈 샤란스키 | 해리 차핀 | 에런 코플런드 | 메리 래스커 | 제시 오언스 | |
1988년 | 1990년 | 1991년 | |||
앤드루 와이어스 | 로런스 록펠러 | 대장 매튜 B. 리지웨이 | 대장 노먼 슈워츠코프 | 대장 콜린 파월 | |
1994년 | 1996년 | 1997년 | |||
랍비 메나헴 멘델 쉬니어슨 | 루스 그레이엄 빌리 그레이엄 | 프랭크 시나트라 | 마더 테레사 | 바르톨로메오스 1세 | |
1998년 | 1999년 | ||||
넬슨 만델라 | 리틀록 9인 | 제럴드 포드 베티 포드 | 로자 파크스 | 시어도어 헤스버그 | |
2000년 | |||||
존 오코너 | 찰스 M. 슐츠 |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 로널드 레이건 낸시 레이건 | 나바호족 코드 토커 | |
2002년 | 2003년 | ||||
대장 휴 셸턴 | 토니 블레어 | 재키 로빈슨 | 도러시 하이트 박사 | 조셉 디레인 해리 & 일라이자 브릭스 레비 피어슨 | |
2004년 | 2006년 | ||||
마틴 루터 킹 코레타 스콧 킹 | 터스키기 에어맨 | 달라이 라마 14세 | 바이런 넬슨 | 노먼 볼로그 박사 | |
2007년 | 2008년 | ||||
마이클 데바키 박사 | 아웅 산 수 치 | 콘스탄티노 브루미디 | 에드워드 윌리엄 브룩 3세 | 아메리카 원주민 코드 토커 | |
2009년 | 2010년 | ||||
여성 공군 군무원 조종사 | 닐 암스트롱 버즈 올드린 존 글렌 | 아널드 파머 | 무함마드 유누스 | 제100 보병대대 제442 보병연대 전투단 군사정보국 | |
2011년 | 2012년 | 2013년 | |||
몬트포드 포인트 해병전우회 | 9.11 테러 참사 사망자 | 라울 발렌베리 | 애디 메이 콜린스 데니스 맥네어 캐럴 로버트슨 신시아 웨슬리 | 제1 특수임무단 | |
2014년 | |||||
둘리틀 특공대 멤버 | 미국의 공군 에이스 | 제2차 세계 대전 민간 항공 초계 부대 멤버 | 시몬 페레스 | 모뉴먼츠 맨 | |
2014년 | 2015년 | 2016년 | |||
제65 보병연대 | 잭 니클라우스 | 셀마 몽고메리 행진 | 제2차 세계 대전 필리핀인 참전 용사 | OSS | |
2017년 | 2018년 | ||||
밥 돌 | 래리 도비 | 제2차 세계 대전 중국계 미국인 참전 용사 | USS 인디애나폴리스 승무원 | 안와르 사다트 | |
2019년 | |||||
스티브 글리슨 | 캐서린 존슨 | 크리스틴 다든 | 도로시 본 | 메리 잭슨 | |
2019년 | 2020년 | 2021년 | |||
무명의 수여자들 | 그렉 르몬드 | 미국 국회의사당 경찰 워싱턴 광역 경찰국 소속 경찰관 | 제369 보병연대 | 하미드 카르자이 국제공항에서 전사한 13명의 장병 | |
2022년 | 2023년 | ||||
미 육군 제23부대 본부 특수부대 제3133 신호 복무 중대 | 제6888 중앙우편대대 | 제2차 세계 대전 참전 상선 선원 | 에밋 틸 메이미 틸모블리 | }}}}}}}}} |
스미스소니언 선정 미국 역사상 가장 중요한 인물들 | ||
{{{#!wiki style="word-break: keep-all; margin: 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 2014년 미국 연방정부가 운영하는 국립 교육 재단 스미스소니언 재단의 잡지, 스미스소니언 매거진이 “미국사 가장 중요한 100인의 인물”을 선정했다. 미국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들을 뽑았기 때문에 미국인이 아닌 사람들도 많고 부정적인 인물들도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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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선수들 | 베이브 루스 · 무하마드 알리 · 재키 로빈슨 · 제임스 네이스미스 · 아놀드 슈워제네거 · 타이 콥 · 마이클 조던 · 헐크 호건 · 짐 도프 · 세크리테리엇 · 빌리 진 킹 | |
출처 | }}}}}}}}} |
<colbgcolor=#00001b><colcolor=#ffffff> 닐 암스트롱 Neil Armstrong | |
△ 1969년 4월 아폴로 11호 준비 당시 | |
본명 | <colbgcolor=#fff,#191919>닐 올던 암스트롱 Neil Alden Armstrong |
출생 | 1930년 8월 5일 |
오하이오 주 와파코네타 | |
사망 | 2012년 8월 25일 (향년 82세) |
오하이오 주 신시내티 | |
국적 | [[미국| ]][[틀:국기| ]][[틀:국기| ]] |
신체 | 180cm |
직업 | 우주 비행사, 군인, 항공우주공학자 |
학력 | 퍼듀 대학교 (항공우주공학 / 학사, 1955) 서던 캘리포니아 대학교 (항공우주공학과 / 석사, 1970)[1] |
경력 | 6.25 전쟁 참전 (1951~ 52) 제미니 8호 사령관 (1966) 아폴로 11호 사령관 (1969) 신시내티 대학교 항공우주공학과 교수 (1971~79) |
최종 계급 | 중위 (미국 해군) |
배우자 | 자넷 샤론(1956년 결혼 ~ 1994년 이혼)[2] 캐럴 나이트(1994년 결혼 ~ 2012년 사별) |
자녀 | 3명 (2남 1녀)[3] |
훈장 | 미국 대통령 자유 훈장 의회 명예 황금 훈장 우주 명예 훈장 대한민국 국민훈장 무궁화장 일본 문화훈장 등 |
종교 | 무종교(이신론)[4] |
서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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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년, 제미니 8호의 발사 준비 위기 상황을 극복하고 제미니 8호를 무사히 귀환시킨 덕분에 훗날 역사적인 아폴로 11호의 선장으로 발탁된다. |
퍼듀 대학교 닐 암스트롱 공학관과 USC 비터비 공과대학에 있는 암스트롱의 동상 |
2012년, 프렌드십 7호의 미국 최초 지구 궤도 비행 50주년 기념식 연설 장면 |
1. 개요
That’s one small step for a man, one giant leap for mankind.
이것은 한 명의 인간에게는 작은 발걸음이지만, 인류에게는 위대한 도약이다.
인류 역사상 최초로 달에 발걸음을 내딛으며.[5]
이것은 한 명의 인간에게는 작은 발걸음이지만, 인류에게는 위대한 도약이다.
인류 역사상 최초로 달에 발걸음을 내딛으며.[5]
미국의 우주 비행사이자, 군인, 항공우주공학자.
인류 역사상 최초로 지구 이외의 천체에 첫 발을 디딘 주인공으로 기록된 인물이다. 때문에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업적을 남긴 인물 중 한 명으로 평가된다. 버즈 올드린, 마이클 콜린스와 함께 인류 최초로 달에 착륙한 아폴로 11호의 사령관이다.
2. 생애
2.1. 우주 비행사가 되기 전
보이스카우트 시절 | 고등학교 졸업사진 |
미국 오하이오 주 워퍼코네타에서 태어났다. 어릴 적부터는 항공우주공학자의 꿈을 꿨다. 즉, 켈리 존슨처럼 기술자로 살 수도 있었다. 하지만 비행기를 만들다보면 결국은 조종사의 시각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여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자가용 조종 면허를 취득하였다.
그가 17살이던 1947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Holloway Plan으로 미 해군에서 학비를 지원받아 MIT와 Purdue 대학에 합격하였고, 인디애나주 웨스트 라피엣의 퍼듀 대학교 항공우주공학과에 입학한다.
군복무 시절 그의 모습 |
한국전쟁 당시 편대비행중인 F9F 팬서. 뒤쪽 116번기 기체의 조종사가 바로 닐 암스트롱이다. |
그 뒤 그는 NACA[6]와 노스 아메리칸 등 여러 항공우주산업체에서 테스트 파일럿 겸 항공공학자로서 활약했다. 당시 이야기가 좀 있는데, 척 예거가 최초의 초음속 비행을 성공시킨 뒤 그 뒤를 이어 마하 2를 돌파한 테스트 파일럿 스캇 크로스필드가 X-15 프로그램이 발족하자 평소에 상업용 기체만 대량생산하던 노스 아메리칸 항공에게 이걸 맡기는 것이 영 못미덥다고 여겼다. 그리하여 NACA에서 노스 아메리칸에 파견근무를 나가려던 차에 X-15 엔지니어에게 파견근무 지원을 거절당하자 아예 리 앳우드 사장[7]의 허락을 받아 NACA에서 노스 아메리칸으로 이직[8]했고, 그렇게 NACA의 전속 테스트 파일럿 자리가 비어서 뽑힌 것이 20대 중반의 암스트롱이었다.
X-15 1기 테스트 파일럿들의 단체 사진. 앞줄 좌측부터 밀트 톰슨(Milt Thompson), 잭 매케이(Jack McKay), 빌 데이나(Bill Dana). 뒷줄 좌측부터 암스트롱, 브루스 피터슨(Bruce Peterson), 스탠리 버처트(Stanley Butchart), 조 워커(Joe Walker). 암스트롱의 얼굴은 다른 이들보다 대여섯살은 어려 보인다.[9] |
X-15의 테스트 비행을 마치고. |
또한 X-20 다이나 소어 프로그램에서 선발되기도 했으며, 이때 X-20의 탈출 절차로 RTLS라는 개념을 제시한 것도 암스트롱의 활약이 없었다면 불가능했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큰 도움을 주었다.이 시절의 공로 덕에 STS-51-L 챌린저 참사에서도 진상조사를 위해 꾸려진 로저스 위원회의 부위원장에 임명되기도 했고, 2014년에는 캘리포니아 에드워즈 공군기지에 파입된 NASA 드라이든 비행시험센터가 암스트롱의 이름으로 개칭되었다.
2.2. 우주 비행사, 닐 암스트롱
1962년에 NASA의 우주 비행사가 되어[12] 1966년에는 제미니 8호의 사령관으로서 인류 최초의 지구 궤도상 우주선 도킹에 성공했으며 그 이후 갑자기 심한 스핀에 빠지며 NASA 역사상 최초로 우주에서의 인명사고 위기에 빠졌던 제미니 우주선을 성공적으로 귀환시켰다.[13] 이후 제미니 11호의 백업 멤버가 되기도 했다. 아폴로 11호 훈련 도중 달 착륙선의 조종연습을 위해 개발된 VTOL 항공기 LLRV(Lunar Landing Research Vehicle) 1호를 조종하다 조종 불능에 빠져 목숨을 잃을 뻔했지만 기체에서 급히 사출하여 목숨을 건졌다. |
그리고 1969년, 39세의 나이에 아폴로 11호의 사령관 자격으로 동료 우주비행사인 버즈 올드린, 마이클 콜린스와 함께 달을 향한 우주선에 몸을 실었다. 그리고 대망의 1969년 7월 21일 오전 11시 56분 20초(한국 시각), 고요의 바다로 명명된 달 표면에 착륙하는 대업적을 달성했다. 이로써 그는 인류 역사상 최초로 지구 이외의 천체에 도달한 인물이라는 불멸의 기록을 세워 역사를 장식하였고, 당시 우주경쟁국이자 라이벌인 소련을 포함한 전세계의 영웅이 되었다.
달 착륙을 다룬 다큐멘터리 Rocketmen에 의하면, 달 착륙 전에 착륙 예정지에서 떨어진 곳으로 향하고 코드 1201 에러가 반복해서 일어났는데 이때 휴스턴에서는 별 문제는 없었다고 한다. 문제는 연료가 1분치밖에 안 남은 상황이었는데, 이때 닐 암스트롱이 실력[15]을 발휘, 착륙선을 수동으로 제어하여 무사히 안착한다. 그는 달에 첫 발을 내딛을 자격이 충분했다.
아폴로 계획 항목에 자세히 적혀져 있지만, 아폴로 11호는 지금 우리가 잡고 있는 컴퓨터는 커녕 1세대 iPhone보다 성능이 떨어지는 컴퓨터와 계산기를 갖고 우주공간을 며칠이나 돌아서 결국 달 착륙에 성공하였다. 1969년 당시에는 그 정도 기술조차 미국이란 나라가 국가 예산의 몇 %를 때려박아가며, 전국에서 최고의 영재들을 투자해야만[16] 우주선 1대의 공간 안에 겨우 들어갈 수 있었다.
그의 달 착륙 장면은 지금처럼 인터넷 같은 것이 막 보급된 것도 아님에도 불구하고 전 세계 5억 명 이상이 지켜본 것으로 알려졌으며, 중미 국가인 온두라스와 엘살바도르가 벌이던 전쟁도 이 장면을 보기 위해 잠시 휴전을 맺고 전투를 중단할 정도였다. 아폴로 11호의 달 착륙은 이전까지 소련에 뒤처져 있던 미국의 우주개척 분야에서 자존심을 회복한 역사적인 사건으로 기록되었다. 더욱 자세한 설명은 아폴로 계획 문서의 '아폴로 11호' 문단으로.
2.3. 우주복을 벗은 이후
달 착륙 이후 닐 암스트롱은 미국 신시내티대학에서 공학 교수로 재직하는 등 꾸준히 우주개발 분야에서 활동한 바 있다. 한편 달 착륙에 성공한 뒤인 1969년 11월에 당시 비행을 같이한 두 우주비행사들과 함께 대한민국에 방문하였으며, 이어 1971년에는 미국 평화봉사단 자문위원으로 다시 한국을 방문하기도 했다. 하지만 대중에게 영웅 대접을 받는 것에 큰 압박감을 느끼고 대학 교수로서 사실상 은둔생활을 해야 했다. 1970년 소련의 즈뵤즈드니 고로도크에 있는 유리 가가린 우주인 훈련센터 방문. 암스트롱에게 훈장을 달아주는 여성은 발렌티나 테레시코바이다. 뒷배경 사진 속 인물이 바로 고인이 된 유리 가가린. |
암스트롱은 1986년 우주왕복선 챌린저 호 폭발 참사에 대한 조사위원회에도 참가했다. 다만 이때는 NASA가 내세운 얼굴마담 역할이 좀 있었다.[17]
암스트롱은 2011년~2012년 사이에 버락 오바마 행정부가 경제위기 등의 이유로 우주왕복선 프로그램을 폐지하고 우주개발 관련 예산을 축소했던 것과 관련해 버락 오바마 행정부를 비판하는 등 미국 정부와 다소 껄끄러운 관계를 유지해 왔다.
2.4. 사망
2012년 8월 25일에 오하이오 주 신시내티에서 82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외신에 따르면 닐 암스트롱은 관상동맥 협착 증세가 발견돼 수술했지만, 노환으로 인해 몸이 버티지 못하여 합병증으로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고 한다. 아폴로 3인방 중 가장 먼저 별들 사이로 여행을 떠났다.영결식 영상. |
장례식은 9월 13일 워싱턴 국립 대성당(성공회 성당)[18]에서 치러졌다. 워싱턴 알링턴 국립묘지에 봉분을 만들어 매장될 자격이 충분했지만, 생전 고인의 뜻에 따라 화장하여 미국 해군에 의해서 대서양 바다에 유골이 뿌려졌다. 산골은 타이콘데로가급 순양함 '필리핀 시'함이 담당하였다. 한국 전쟁에 참전하여 수십차례 소티를 기록했던 참전용사이기도 했기에 대한민국 국가보훈처 역시 유족에게 성조기를 보내며 조의를 표했다. 2010년 한국 전쟁 발발 60주기에 맞춰 한국에 초청할 계획도 있었지만 건강 문제로 무산되었다.
인류 최초로 달에 다녀온 사람 중 한명이라서 그의 영결식에서도 Fly Me to the Moon이 조곡으로 나왔다.
3. 기타
- 닐 암스트롱의 모습이라며 떠돌고 있는 달에 서 있는 우주인은 사실 닐 암스트롱 다음으로 달에 내린 버즈 올드린이다. 그 사진을 찍어준 사람이 암스트롱이라는 것에 주의할 것. 버즈 올드린은 이걸 가지고 코난 쇼에서 직접 장난을 치기도 했다. 해당 문서로.
- 인류 최초로 달에 착륙한 사람이다 보니 대표적인 반미국가인 북한에서도 그를 존중하여, 조선대백과사전에도 꼭 수록하며 부정적인 평가도 일체 싣지 않는다.[19][20] 이와 비슷하게 대한민국에서도 반공 감정이 강하던 60~80년대에 출판된 인명사전에는 소련 인물은 되도록이면 싣지 않거나 싣더라도 레닌이나 스탈린처럼 부정적으로 묘사하는 경우가 잦았으나, 인류 최초의 우주인인 유리 가가린만큼은 빠짐없이 싣고는 긍정적으로 묘사했다.
- 음모론자들은 달 착륙을 부정하고 있지만 이러한 음모론은 이미 수없는 검증을 통해, 그리고 아폴로 11호 우주비행사였던 본인들의 증언을 통해 논파된 지 오래다. 암스트롱은 달 착륙 이후 43년을 더 살았으며, 동료 마이클 콜린스는 52년을 더 살았고, 버즈 올드린은 아직까지 아주 멀쩡히 살아있다. 사실 음모론자들은 "닐 암스트롱과 아폴로 11호가 달에 가지 않았다!"고 주장하면 끝나는 줄 아는데, 아폴로 11호부터 17호까지 아폴로 13호를 제외하고는 총 12명의 우주비행사가 달을 밟았다는 사실은 알지 못한다. 심지어 버즈 올드린은 계속 쫓아다니고 욕을 퍼부으면서 자기 바로 앞에서 이 음모론을 주장하는 바트 시브렐에게 폭력을 행사하고 정당방위로 무죄 판결을 받았다.
2020년대 나사는 그동안 미공개였던 달에서 암스트롱이 장난을 치는 모습이 담긴 영상을 공개했다. 장난기가 너무 심해 공개하지 않았던 것. #1(1번은 아폴로 14~17호의 영상이 짜깁기되어있다는 이야기가 있다.17호에 가져간 월면차,14호의 망치질 등) #2
- 닐 암스트롱의 진짜 마지막 인터뷰가 있다. 그가 사망한 해인 2012년에 영국 일간지 더 가디언과 한 인터뷰가 그것이다.닐 암스트롱의 마지막 인터뷰 그의 성장과정, 한국전쟁 참전, 달에 가기 위해 노력했던 나날들에 대한 진솔한 고백과 회상이 이어지고, 그리고 마지막 질문은 음모론에 관한 것이었다.
인터뷰어: "달 착륙은 가짜입니까?
닐 암스트롱: "사람들은 음모론을 좋아하죠. 그것들은 정말 매력적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음모론은 나에게 결코 걱정거리가 되지는 않습니다. 왜냐면, 언젠가 누군가가 그곳(달)으로 다시 날아가, 내가 두고 온 카메라를 집어들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원문)
"Was the moon landing faked?"
"People love conspiracy theories," he replied. "I mean, they are very attractive. But it was never a concern to me because I know one day, somebody is going to go fly back up there and pick up that camera I left."
닐 암스트롱: "사람들은 음모론을 좋아하죠. 그것들은 정말 매력적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음모론은 나에게 결코 걱정거리가 되지는 않습니다. 왜냐면, 언젠가 누군가가 그곳(달)으로 다시 날아가, 내가 두고 온 카메라를 집어들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원문)
"Was the moon landing faked?"
"People love conspiracy theories," he replied. "I mean, they are very attractive. But it was never a concern to me because I know one day, somebody is going to go fly back up there and pick up that camera I left."
- 달에 외계인의 기지가 있다는 음모론을 믿는 사람들이나, 영화 등을 제작하는 사람들에게는 '만약...'이란 가정을 하게 하는 사람이다. 달 뒷면에 외계인이 산다는 음모론을 미는 사람들의 경우 아폴로 11호를 타고 달에 도착한 암스트롱과 그 동료 일행이 착륙 직후 달을 탐사하다가 달에 거주하는 외계인과 마주쳤으며 그 외계인이 "여기는 우리 구역이고, 인간들이 이젠 우리 영역을 침범할 정도로 많이 큰 모양이지만 어림도 없으니 조용히 달에서 나가라" 이런 식의 협박을 하고 UFO와 수정 구조물 등 외계인들의 문명을 일부 보게 되어 겁을 먹어서 허둥지둥 급하게 지구로 귀환했으며 암스트롱 본인도 그 충격 때문에 이후 죽을 때까지 달에 갔다온 건 얘기해도 그 다음에 달에서 있었던 자세한 얘기는 꺼린다는 식으로 말한다. 당연하지만, 일단 달이 여러 묘사나 지구와의 비교 때문에 작아보여도 둘레가 11,000km나 되는 대형 위성이며 최고속도가 약 13km/h정도인 월면차를 타고 달에 착륙한 사이에 달의 뒷면에 갔다 오는 건 불가능하다. 영화 트랜스포머 3에서는 그와 버즈 올드린이 사실 불시착한 오토봇의 잔해를 찾으러 달에 간 것이라는 가상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 광수생각 1권의 첫편을 보면 알 수 있듯, 달에 갔다가 거기 사는 달토끼와 조우한 뒤 달토끼가 닐 암스트롱으로 둔갑해 지구로 내려왔고 진짜 닐 암스트롱은 달에 살고 있다는 유머도 있다.
- 죽기 전에 '달 착륙은 거짓이었다'라고 고백했다는 얘기가 있다. 물론 거짓말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음모론은 닐 암스트롱이 생존중일 때부터 돌아다녔다.
- 그는 중년 무렵 1980년대에 챌린저호 참사가 터지자 미국 최초의 여성 우주인 샐리 라이드와 함께 NASA를 대표하여 진상조사위원회에 포함되어 활동하기도 했다. 영화 <The Challenger Disaster>에서는 역시 최고의 물리학자
와 최고의 장난질로 이름을 날리던 리처드 필립스 파인만이 택시 기사에게 듣보잡 취급을 받으면서 택시 기사가 암스트롱의 사인을 받아달라고 하며, 파인만은 그런 사소한 부탁을 기억해서는 사인을 받고[21] 택시 기사를 끝끝내 찾아내서 사인을 전해준다.
- 미 해군은 차기 해양관측선 시리즈의 이름을 닐 암스트롱급(Neil Armstrong-class oceanographic research ship)으로 이름지어 1번함 R/V Neil Armstrong을 진수했다.[22]
- 닐 암스트롱이 독실한 기독교도였다는 말이 있는데, 그는 이신론자였다. 독실한 기독교도 기믹은 오히려 올드린에 해당되는 편. 오히려 이슬람권에서는 암스트롱이 무슬림으로 개종했다는 사실과 다른 설이 불거진 적이 있었는데 미 국무부가 공식 부인하기도 했다.
- 평생 우주에서의 경험이나 자신이 인류에 끼친 영향에 대해 일부러 이야기하기를 꺼렸던 암스트롱이지만, 베트남 전쟁기에 미군 포로들이 북베트남군의 회유와 구타, 세뇌를 견뎌낸 것이 자신 덕분이라는 일화를 듣고 눈시울을 붉혔다고 한다. 사연인즉슨, 미국으로 오고가는 월남전 미군 포로와 가족의 서신 중 북베트남군이 미군 포로들에게 전해준 것은 당연히 '미국은 포로들을 버렸고 오히려 학살자로 취급한다', '미국은 끝내 패배할 것이다' 등의 내용으로 조작 내지 검열된 내용들이었다. 그런데 무심코 검열에서 발각되지 않고 전해진 아폴로 11호 달 착륙 우표가 포로들에게 전해지자 미처 문 레이스의 결말을 보지 못하고 잡혔던 포로들이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는 이야기. 이 때문에 달에 갔다온 아폴로 우주비행사들은 대통령이나 국무부의 특사로 활동하며 자주 베트남에 파견되어 포로 교환에도 큰 수고를 했다. 물론 비행사들이 포로를 직접 만날 수는 없었지만, 달에 갔다온 우주인들이 온다는 소식은 달 탐사 경쟁의 결말을 알기도 전에 세상으로부터 단절되었던 포로들에게도 여러 경로로 전해지며 큰 희망을 주었다.
- 전자 악기인 테레민을 아주 좋아 했다. 국내에는 연주할 줄 아는 사람도 드물지만 암스트롱은 취미로 연주를 했다고 한다. 심지어 아폴로 11호에 테레민 연주곡 테이프를 갖고 가 달 탐사 여정 동안에 들었다. 이를 반영해 영화 퍼스트맨에서 테레민 음악이 사용되었다.
- 그와 관련된 도시전설로 " Good Luck, Mr. Gorsky" 이야기가 있다. 내용인 즉슨닐 암스트롱이 아폴로 11호를 타고 최초로 달에 발을 내디뎠을 때 그가 "행운을 빕니다, 고르스키 씨(Good Luck, Mr. Gorsky)"라는 말을 남겼다. 사람들은 닐이 왜 이러한 말을 남겼는가 궁금해했고 몇 가지 해석을 내놓았는데 그가 문득 러시아 우주 비행사들이 떠올라 농담을 했다고 여겼으나 러시아 우주 비행사들 중에 고르스키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은 없었다. 닐은 해당 발언에 대한 해석을 오랫동안 내놓지 않았으나 26년이나 지난[24] 1995년 7월 5일 플로리다 템파베이에서 기자들과의 인터뷰에서 이제는 고르스키 씨가 세상에 없을 테니 말할 수 있겠다며 답을 내놓았다고 한다. 그가 어릴 적에 동생과 고르스키 씨네 뒷마당에서 야구를 하다 그만 공이 앞마당까지 날아가버렸고 공을 주우러 가다가 고르스키 부부가 다투는 소리를 들었다. 고르스키 부인이 말하길 "입으로 해달라고? 옆집 꼬마발이 달에 닿으면 그때 가서 해주지!"(“Oral sex? Oral sex you want? You'll get oral sex when the kid next door walks on the moon!”)라는 얘기이다. 보다시피 세세하게도 정확한 날짜까지 있고 실제로 닐에게는 형제[25]가 있기 때문에 꽤 신빙성 있게 다가온다. 물론 이는 실화가 아니다. 당사자인 닐은 1995년 11월에야 이 처음으로 소식을 들었다고 한다. 그리고 당연하겠지만 NASA는 인류 최초 달착륙 같은 세기의 기록을 낱낱이 녹음했으나 역시 Mr. Gorsky같은 발언은 없다. 그럼에도 이러한 유머가 탄생한 것은 많은 여성들이 오랄 섹스를 꺼리고 고르스키라는 이름이 유대인스럽고 "Oral sex you want?"같은 말 역시 지극히 유대인스러운 어휘로서 유대인과 섹스를 한 번에 엮는 농담인 셈이다. 상당히 유명한 유머이기에 미국 대중문화에서 달 착륙을 묘사할 때 간혹 등장한다. 왓치멘 인트로에 등장하는 Mr, Gorsky 드립
- 20세기에 들어 한때 그가 실은 외계인이 아니냐라는 의혹이 있었다. 밈 형태로 퍼졌는데, 그의 이름 'Neil Alden Armstrong'에서 첫번째 A 이후로 모두 지워서 'Neil A'으로 만들고 철자순서를 뒤집으면 'Alien'이 되기 때문이다. 나사 극비로 감추되 단서로서 이름을 저렇게 했다는 내용이 주요 주장의 골자다.
- 키가 180cm로 우주비행사 치고는 상당한 장신이다.
4. 대중매체에서
- 영화 아폴로 13에서도 살짝 단역 캐릭터가 등장한다. 아폴로 13호의 급박한 상황이 세계에 알려지며 핫이슈가 되자 올드린과 함께 짐 러블의 치매 투병 중인 노모를 찾아가 힘이 되어드리는 역할. 며느리가 "이쪽은 암스트롱 씨고 이쪽은 올드린 씨에요. 짐의 직장동료에요." 하는데 러블의 어머니는 이들이 누군지 못 알아보고 "댁들도 우주 다녀왔수?" 하고 암스트롱은 급 당황한다.
- 커맨드 앤 컨커 레드얼럿2 유리의 복수에서 그의 명대사를 소련의 서기장님께서 다시 발언하였다.
- Fate/EXTRA에서 마토 신지가 '서번트 암스트롱을 소환한 마스터를 봤다'고 언급한다. 그런데 EXTRA의 세계관에서는 인류가 물리적으로 달에 도달하지 못했기 때문에 정황상 아폴로 계획은 취소되거나 실패했을 가능성이 큰데 어떻게 소환했을 지는 불명. 만약 평행세계의 암스트롱이 소환되었다 가정한다면 신지가 알아볼 수 없다. 이후 애니판 라스트 앙코르에서 우주복을 입은 서번트가 신지에 의해 쓰러지는 모습이 나왔는데 정황상 닐 암스트롱으로 추정된다. 이후 Fate/Requiem에도 언급됨.
- 워 썬더 에 닐 암스트롱의 F9F 탑승기 스킨이 있으나, 희소성이 굉장히 높다.
- 웹툰 백귀야행지 220화에서 나오는데 정확히는 우주비행사가 달에서 일하다가 무언가를 찾아내는데, 그건 바로 닐 암스트롱의 시체였다.(!) 이에 그 비행사는 이 시체가 닐 암스트롱이라면 지구로 귀환한 닐 암스트롱은 대체 누구냐며 충격에 빠지는걸로 끝난다.
- 인디아나 존스: 운명의 다이얼 초반부 뉴욕 추격전에서 나오는데 동료들과 같이 퍼레이드 카를 타면서 시민들에게 환호의 손 인사를 하다가 인디아나 존스가 기마 경찰의 말을 탄 채로 옆에 지나가자 당황한 표정으로 지켜본다.
5. 둘러보기
{{{#!wiki style="margin: 0 -11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5px 0 -15px 0" | ※ 2005년 AOL과 디스커버리 채널에서 미국인들을 대상으로 투표한 ‘가장 위대한 미국인’ 명단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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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위 | 12위 | 13위 | 14위 | 15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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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위 | 17위 | 18위 | 19위 | 20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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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위 | 22위 | 23위 | 24위 | 25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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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9 제헌국회의원 154명 | 1969 조동식 교육인 | 1970 김수환 추기경 | 1970 백낙준 교육인 | 1970 이상백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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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 김병관 언론인 | 1994 김호길 교육인 | 1995 곽윤직 법학자 | 1996 장기려 의사 | 1996 윤덕선 의사, 교육인 | |
1996 정범모 교육인 | 1998 고흥문 국회의원 | 1998 주영하 교육인 | 2000 이건희 기업인 | 2002 김재준 종교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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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 권영우 교육인 | 2007 장훈 체육인 | 2008 박관용 국회의장 | 2008 진창현 바이올린 제작자 | 2009 김정수 정치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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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노회찬 정치인 | 2018 박재갑 의사 | 2018 이석태 법조인 | 2018 조규광 법조인, 헌법재판소장 | 2018 한승헌 법조인, 감사원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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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문희상 국회의장 | 2021 최종태 기업인 | 2022 박병석 국회의장 | 2023 송창근 기업인 | 2023 김박 기업인 | |
2023 자승 종교인 | 2024 이임성 법조인 | 2024 윤대원 의사, 교육인 | }}}}}}}}} |
[1] USC 졸업논문 주제가 무려 달 착륙 테크닉[2] 대학에서 가정경제학 전공생이던 샤론은 학교 재단에서 주최한 파티에서 닐 암스트롱을 만났는데, 그 후 둘은 뜨거운 연애 없이 결혼했다고 한다.[3] 둘째 자녀였던 1959년생의 딸 캐런 암스트롱은 만 2살에 뇌종양과 합병증으로 닐 암스트롱-자넷 샤론 부부의 결혼 6주년이 되는 날 세상을 떴다. 첫째인 1957년생 에릭 암스트롱은 해양학자였다가 훗날 소프트웨어 전문가로 활동 후 은퇴하였고, 1963년생 마크 암스트롱은 스탠포드대에서 물리학을 공부했지만 전공을 바꿔 형과 유사하게 컴퓨터 엔지니어링 분야의 여러 기업에서 종사했다. 두 아들은 부친의 업적을 기리는 다큐멘터리나 기념 프로그램에 함께 헌신하고 있다.[4] "... Although Neil was a deist and not a doctrinally religious man," / James R. Hansen, "First Man: The Life of Neil A. Armstrong" (2018), 382쪽, #[5] 한때 이 말에서 'a'가 들리지 않는다고 하여 논란이 있었다. 그러나 음성을 면밀히 분석한 결과 약하게나마 'a'가 발음된 것을 발견하게 되면서 논란은 종지부를 찍었다. 이 한 단어가 뭐가 그리 중요하냐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 영어 문법상으로는 인간인가, 한 남자인가 하는 중요한 의미상 차이점이 발생하므로 명확히 밝혀낼 필요가 있다. a가 없이 그냥 man이었다면 뒤의 mankind와 사실상 같은 의미가 되기 때문. 암스트롱은 처음에 a를 말했다고 주장했지만, 막상 녹음된 것을 듣고 본인도 '안 말한 건가?'라며 갸웃거렸다고 한다.[6] National Advisory Committee for Aeronautics, 스푸트니크 쇼크 이전 NASA의 전신[7] 이 사람은 훗날 아폴로 1호 화재 참사로 큰 곤욕을 치르게 된다.[8] 노스 아메리칸은 이 시절부터 초고고도, 초음속 항공기 개발 노하우를 쌓아가며 XB-70을 만들고 아폴로 사령선, 새턴 2단 로켓, 그리고 우주비행기의 상징이 된 우주왕복선 오비터 제작사로 역사에 이름을 남긴다.[9] 다른 이들은 전부 이 시기에 30대의 나이였으며 이후 NASA가 우주비행사를 뽑을 때도 너무 나이가 많다고 지원이 반려되었다.[10] 미군이 테스트 파일럿을 많이 양성하고 써먹는다고는 하지만 정기적으로 전투비행대에 순환배치되는 원칙이 상존하기 때문에 전업 테스트 파일럿만큼의 기량과 경력을 쌓기엔 힘들다. 오늘날에는 민간 산업체에서도 공군 경력 꽤 있는 베테랑을 선호하기 때문에 좀 덜하다고는 하지만 이 시절에는 암스트롱처럼 큰 전쟁의 참전 경력으로 검증된 경우 군생활을 그만두고 일찍 전업 테스트 파일럿이 되어도 능력에 따라 얼마든지 출세할 수 있었다.[11] F-4의 개발과정에서 크게 활약했던 존 영과 짐 러블 역시 제미니를 앞두고 함께 선발된 9인 중에서도 특히 암스트롱이 최고라고 여겼을 정도이다.[12] 유리 가가린이 우주비행을 하기도 전인 1958년에 조직된 MISS의 멤버들 중 유일하게 NASA의 35세 이하라는 우주 비행사 지원 자격을 만족하였다. MISS에서 함께 활약했던 동료들은 암스트롱보다 최소 6살은 많은 이들이었던지라 암스트롱을 제외한 이들은 1961년 머큐리 계획이 발표될 적에 이미 35세가 지났다. 이들은 테스트 파일럿으로 계속 활약하다 XB-70 사진 촬영 후 허무하게 사망한 조셉 워커처럼 젊은 나이에 창공에서 세상을 떠나기도 했고, 우주에 나가지 못한 채 연구에 전념하다 은퇴한 뒤 세간의 관심에서 멀어진 채로 사망하였다. 결국 2010년 사망한 로버트 화이트에 이어 마지막 생존자였던 암스트롱마저 2012년 타계하며 MISS의 멤버들은 더 이상 남지 않게 되었다.[13] 이 임무 직전에 제미니 9호 승무원 엘리엇 시와 찰스 배셋이 T-38 사고로 순직하여 여론이 뒤집어졌던 것을 생각하면 암스트롱은 자신과 데이비드 스콧의 목숨을 구한 것뿐만 아니라 미국의 우주계획 전체가 좌초될 위기에서 NASA를 구해냈다.[14] 우주에 올라간 기록으로는 MISS 시절의 동료 조셉 워커가 앞선다. 소련의 민간인 여성 발렌티나 테레시코바(후일 소련 공군 장성이 되긴 하지만 당시에는 민간인 신분이었다.)의 우주 비행 한 달 후에 X-15의 플라이트 90, 플라이트 91에서 고도 100km를 돌파하며 미국에서 인정하는 '우주 비행사'의 자격을 만족하였다. 사실 살짝 만족한 것이긴 하나, 어쨌든 우주 비행을 여러 번 다녀온 최초의 인물로 기록되기도 했다. MISS의 멤버들 중 암스트롱을 제외하면 우주를 실제로 경험한 유일한 인물.[15] 암스트롱은 그간 여러 차례 있었던 임무 도중의 급박한 위기 극복 능력을 인정받았기 때문에, 돌발 사태로 인해 실패할 가능성이 매우 높았던 아폴로 11호의 사령관이 될 수 있었다고 한다.[16] 당시의 컴퓨터와 코딩 작업이다. 코딩 부분 영상은 자기 코어 메모리에 프로그램을 이식하는 장면이다. 자기 코어 메모리는 1960년대 당시 내구성과 집적도가 가장 우수했지만 프로그램의 1비트마다 전자석의 극성을 맞추고(극성을 반대로 맞추면 비트가 반전되어 오작동을 일으킨다) 전선으로 꿰는 노가다를 통해서 제작되었다. 반도체 기반의 SRAM은 아직 개발되지 않은 시기였다.[17] 최초의 여성 우주비행사였던 샐리 라이드도 이러한 케이스로 조사위원회에 참가했다.[18] 암스트롱은 아폴로 11호 달 착륙 5주년에 맞춰 워싱턴 국립 대성당에 월석을 기증하였고, 그 월석이 중앙에 놓인 남쪽 방향 스테인드 글라스는 스페이스 윈도우로 불리고 있다.[19] 심지어 암스트롱이 6.25 전쟁에 미국 해군 소속으로 참전한 인물이었음에도 말이다![20] 다만 달 착륙 당시에는 이 사실을 북한 매체에서 전혀 보도하지 않았고, 암스트롱이 처음 언급된 것은 2001년 출판된 조선대백과사전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BBC가 김정일 사망 직후인 2011년 12월 19일 쓴 기사에 따르면 북한 주민들 대다수가 인간이 달에 발을 디딘 적이 있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매우 적었다고 한다.[21] 조사위원들은 파인만이 딸에게 전해주려는 거라고 생각하며 허허허 웃기만 했다.[22] 미군은 병참선이나 관측선 같은 비전투 함정들에는 역사적/영웅적 탐험가나 선지자, 개척자들의 이름을 따오고 있다. 예를들어 루이스 앤 클락급 병참선의 루이스와 클락은 아메리카 서부를 처음 탐험했던 이들이며 해당 클래스의 2번함은 여성 아메리카 원주민으로서 이들의 가이드를 맡았던 사카자위아다. 3번함은 미국 최초의 우주인 앨런 셰퍼드이고, 7번함은 미 해군 최초의 흑인 심해잠수사로서 영화 맨 오브 오너의 실제 주인공인 칼 브래시어 원사의 이름을 땄으며, 9번함은 제국주의 시대 일본 에도 막부의 개항을 이끌어낸 매튜 페리 제독의 이름을 땄다. 심지어 5번함에는 로버트 피어리까지 있다. 그리고, 닐 암스트롱급 해양 관측선 2번함은 당연히 샐리 라이드.[23] 사실 암스트롱에겐 이런 종류의 일화가 엄청 많다. 달에 다녀온 이후 유명인사가 되었기에 볼리비아, 아르헨티나 파타고니아 등 세계각지에 초청받아 관광도 하고 강연도 했기 때문이다.[24] 아폴로 11호의 달착륙이 1969년의 일이다.[25] 닐이 장남이고 여동생 준과 남동생 딘 암스트롱이 있다.[26] HBO 제작, 아폴로 13의 주연 배우인 톰 행크스가 아예 아폴로 계획 전체를 다루는 미니시리즈를 제작해보자고 의기투합하여 만든 12부작 미니시리즈 드라마이다.[27] 한 독자가 동료가 될 것이라는 장난식 예언을 한 적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