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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4-14 01:27:33

터스키기 에어맨



1. 개요
1.1. 배경1.2. 시작1.3. 영광 : 332전투비행단 "레드 테일스(Red Tails)"1.4. 첫 실전, 그리고 시련1.5. 붉은 꼬리의 천사1.6. 그늘 : 477 비행대
1.6.1. 최초의 흑인 폭격 비행대1.6.2. 이어지는 차별1.6.3. 프리먼 비행장의 반란1.6.4. 반란 이후
1.7. 전쟁이 끝난 뒤
2. 매체에서 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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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ited States Congressional Gold Medal
미합중국 의회 명예 황금 훈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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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76년 1777년 1779년 1781년
조지 워싱턴 소장 호레이쇼 게이츠 소장 앤서니 웨인 사령관 헨리 리 3세 준장 대니얼 모건
1781년 1787년 1800년 1805년 1813년
소장 너새니얼 그린 존 폴 존스 대령 토머스 트럭스턴 준장 에드워드 프레블 대령 아이작 헐
대령 스티븐 디케이터
대령 제이콥 존스
1813년 181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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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령 제시 엘리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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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위 에드워드 매콜
대령 제임스 로렌스 대령 토머스 맥도너
대령 로버트 헨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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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4년 1814년, 1848년 1814년
대령 루이스 워링턴 대령 존스턴 블레이클리 소장 제이콥 브라운 소장 윈필드 스콧 소장 피터 부엘 포터
준장 엘리저 윌락 리플리
대령 제임스 밀러
1814년 1815년 181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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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위 엘스워스 P. 버트홀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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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년 1938년 1939년 1940년
조지 코한 리처드 올드 리치 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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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군 원수 어니스트 킹
육군 원수 존 조지프 퍼싱 준장 빌리 미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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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9년 1960년 1961년 196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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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년 1968년 1969년 1973년 197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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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8년 197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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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1980년 198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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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년 198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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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년 198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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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라 거슈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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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비탈 샤란스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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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200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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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69 보병연대 하미드 카르자이 국제공항에서 전사한 13명의 장병
2022년 202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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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133 신호 복무 중대
제6888 중앙우편대대 제2차 세계 대전
참전 상선 선원
에밋 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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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Tuskegee Airmen은 일반적으로는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흑인들로 구성된 것으로 유명한 제332전투비행단를 일컫는 단어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제332전투비행단 외에도 미 육군항공대에서 복무했던 흑인 조종사들 외에도, 흑인들로만 구성된 항공승무원 및 지상 근무요원들을 통칭하는 단어이다. 이름의 유래는 이들이 훈련받았던 기지가 위치한 미국 앨러배마주 터스키기에서 유래했다.

단편적으로 보면 21세기 시점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미국의 인종 차별 문제와 미군 내에서의 유색 인종 불신이 낳은 특이한 무용담이고, 넓게 보면 그러한 인종 차별을 없에기 위해 미군 내의 흑인들이 치열하게 투쟁해온 과정의 일부이기도 하다. 그러한 역사적 의의를 가진 부대인 만큼, 이 문서에서는 2차 대전을 전후로 한 미군내 인종 차별 철폐 과정도 간단히 언급한다.

1.1. 배경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한 당시에도 미국의 흑인들은 미국내에서 일종의 2등시민 취급을 받았고, 이로 인해 정치,사회 분야에서 숱한 차별을 받고 있었다. 군 복무도 예외는 아니어서 흑인들의 입대는 인종을 분리한 채 극히 제한적으로 이뤄졌다. 육군의 경우 흑인 장병들로만 구성된 소수의 전투부대를 백인 장교의 지휘하에 운용하였으며, 실험적, 정치적인 성격이 짙었던 육군 전투부대 이외의 경우에는 물자 수송[1]이나 부대/함정 내 잡역에 동원[2] 되는데 그쳤다.

항공분야의 경우, 1930년대 후반에 미 정부의 민간 조종사 양성 정책에 편승하여 흑인 조종사들이 생겨났지만 전체 조종사 수에 비하면 그 비중은 초라한 것이었다. 흑인을 비롯한 유색인종에 대한 군문의 차별을 없애려는 시민운동가들의 노력 덕에 1930년대 말에 흑인들도 육군의 조종사가 될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기 시작했고, 1941년 9월에 최초의 흑인 전투비행대가 창설되었다.

1.2. 시작

최초의 흑인 전투비행대인 제99전투비행중대는 이들은 최초의 흑인 항공 요원으로서 훈련에 매진했다. 그러나 위에서 언급한 인종 분리 정책이 이들의 발목을 또 다시 잡았다. 항공부대의 운용은 조종사와 항공기, 정비사만으로 이뤄지는게 아니라 전문적인 항공 의무관을 포함한 각종 지원 인력들이 있어야 하는데 이들 조종사들을 지원할 흑인 인력이 없었던 것이다. 때문에 조종사, 정비사 양성과 함께 지상 지원인력의 양성도 같이 이뤄졌다. 더 큰 시련은 미 육군 항공대 지휘부의 편견이었다. 원래 계획한 규모 이상의 흑인 병력들을 터스키기에 떠넘기고 원래 목적 이외의 명령도 더해지면서 기지 운용 및 항공 요원 양성에 어려움이 더해졌다. 때문에 항공장교로 양성된 흑인 장교들은 오랫동안 백인 장교들의 지휘하에 있어야만 했다.

1.3. 영광 : 332전투비행단 "레드 테일스(Red Tails)"

그러던 중 1939년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이 미 의회 의원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흑인들로 구성된 비행단을 만들라는 명령을 내렸고 이리하여 앨라배마에 위치한 터스키기에 제99추적비행대라는 이름으로 창설되게 된다.

그러나 많은 백인들은 이 시도가 실패할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으며 심지어 훈련이라조차 하지않고 실험이라고 부르는 등 99추적비행대 조종사를 노골적으로 차별했다. 당시 대놓고 하던 모욕으로 "진화가 덜 된 흑인은 전투에 어울리지 않는다", "차별이 아닌 차이를 인정해야 한다" 같은 발언이 일상이었다. 이런 차별속에서도 흑인 조종사들은 실전 투입을 기다리면서 후원자들의 지원 아래 꿋꿋이 훈련을 받았다. 이들의 가장 큰 후원자는 바로 루즈벨트 대통령의 영부인 엘리노어 루즈벨트였다. 흑인 및 소수 인권에 관심이 많았던 그녀는 실제로 1939년 4월 19일 터스키기에 방문해 모두의 반대를 무릅쓰고 훈련생 찰스 맨더슨이 조종하는 훈련기에 탑승해 30분간 비행하기도 했다.

1.4. 첫 실전, 그리고 시련

그리고 마침내 1941년 봄 13명의 조종사가 차출되었고 1943년 99전투비행대는 윌리엄 W. 모이어가 지휘하는 제33전투비행단 휘하로 배치되어 시칠리아 침공 작전에 투입되었다. 그해 7월 대지공격임무에 투입되어 흑인 조종사 최초의 공대공 격추기록까지 세웠다. 이때의 공적으로 부대 표창까지 받았다.

그러나 모이어의 인종차별적 편견 때문에 비행대 해체 위기에 내몰리고 말았다. 모이어는 신설된 99비행대에게 대지 공격임무만 배정시켰으며, 비행대 주둔지마저 분리시켜 버리는 등 제33전투비행단 내에서 고립시켰다. 99비행대는 부대 내에서 고립되고 사실상 베테랑의 지도도 받지 못한 상태에서 임무를 수행해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99비행대는 부대표장을 받을 정도로 우수한 능력을 발휘했다. 정작 모이어는 99비행대의 전공은 무시한 채 그들을 폄하했다. 급기야는 북아프리카 전역 사령부를 거쳐 육군항공대 총 지휘부에 '99비행대는 전투에 효과적이지도 않고 비겁하고 무능하다.'는 내용의 보고서를 올렸으며 이 일은 타임지에까지 실리게 되었다.

이 사건으로 미 하원 군사위원회는 흑인 비행대를 존속시켜야 하는지에 대해 청문회를 열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한 청문위원은 텍사스 대학에서 '흑인은 지능이 낮고 복잡한 상황을 다룰 수 없다.'는 내용으로 작성된 보고서를 제출하기도 하면서 이 사건은 미국내에서 인종차별문제로 비화되었다.

99비행대의 지휘관이었던 벤자민 O. 데이비스 주니어는 모이어의 주장을 반박하는 기자회견을 열었고 하원 군사위원회에 99비행대의 해체 반대의견을 전달했다. 데이비스 및 몇몇의 노력으로 비행대 해체는 면했고, 대신 미육군 총사령관인 마셜장군의 지시로 99비행대를 포함한 이탈리아 전역의 전투비행대들에 대한 전투수행능력 조사가 이뤄졌다. 99비행대는 보란듯이 안치오 상륙 작전에서 교두보에 고립된 연합군을 독일군으로부터 방어하는 임무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12기의 적기 격추하는 등 뛰어난 공적을 세움으로서 자신들의 능력을 입증했다.

1.5. 붉은 꼬리의 천사

1944년 2월 벤자민 O. 데이비스 주니어가 지휘하는 제332전투비행단이 편성되어 이탈리아 전선을 담당하는 제 15공군에 배치되었다. 그해 5월 99비행대는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참전하기 위해 북유럽 전선에 재배치 되었다. 이들은 폭격기 호위임무와 지상군 지원에 투입되었으며, 이때부터 꼬리날개에 붉은 색을 칠하면서 이른바 '레드 테일스(Red Tails)'로 이름을 알리게 된다.

전쟁 기간중 99비행대를 비롯한 332비행단은 1578회의 임무를 수행했다. 그 과정에서 15,000소티 이상 출격하여 독일군 항공기 상대로는 112대의 공중격추 및 298대의 지상 파괴 전과를 거두었으며, 600량 이상의 열차를 포함한 950대 가량의 차량 격파, 구축함 1척을 포함한 선박 40여척을 격침 또는 파괴하는 전과를 거두었다.

특히 폭격기 호위 임무에서 두각을 보였는데, 이들이 수행한 179회의 폭격기 호위 임무 중 7회의 임무에서 자신들이 호위하던 폭격기들은 27대만 잃는데 그쳤다. 과장되게 알려진 신의 방패급 방어율은 아니지만 이 기록은 전쟁 기간 중 제15공군 내 여타 P-51 머스탱 비행단들이 보인 평균 실적[3]과 비교해서 월등히 낮은 수치이다. 이중 단연 백미는 1945년 3월 24일 베를린 폭격 호위임무 때의 전과이다. 세계 최초의 제트 전투기인 Me 262와 맞붙어서 3대의 손실을 압으면서도 자신들이 호위하던 비행단의 폭격기는 2대 격추에만 그치는 전공을 거두었다. 그날 독일 공군은 총 4대의 Me 262를 잃었으며 그중 3대가 332비행단에게 피격당한 것이었다.

이러한 활약 때문에 332전투비행단은 폭격기 승무원들로부터 크게 신임을 얻었으며, 역으로 독일 공군 사이에서는 '검은 비행사'라는 악명을 떨치게 되었다. 전쟁기간 중 터스키기 에어맨들은 68명 전사, 훈련 중 사고로 12명 사망, 포로로 12명이 잡히는 희생을 치뤘다. 이러한 공훈과 희생으로 부대표창 3회, 은성무공훈장 1개, 동성무공훈장 3개, 수훈 비행 십자장 96개, 항공메달 744개 그리고 퍼플 하트 8개가 수여되었다.

1.6. 그늘 : 477 비행대

1.6.1. 최초의 흑인 폭격 비행대

1943년 5월 흑인들로 구성된 최초의 중대규모 폭격 비행대가 창설되었다. 이 비행대는 B-25폭격기를 운용하였으며, 이후 제477폭격비행대 휘하에 총 4개 비행중대 규모로 확장되었다. 최초 구상은 총 7개 비행중대를 배치하는 것이었으며 당시 폭격비행대 구성과 이후 실전배치까지의 기간은 약 4개월 정도 걸렸다. 고등교육이 상대적으로 부족했던 첫 흑인 폭격 비행대라는 걸 감안해도 1944년 11월에는 실전배치가 가능하리라 보았다. 그러나 당시 미군 내에 만연한 인종차별은 이들이 날아오르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1.6.2. 이어지는 차별

루즈벨트 대통령과 인권단체들의 압력으로 흑인비행대를 구성했지만, 기존의 백인 장교진들은 대부분 이들을 자신들과 같은 군인으로서 대해줄 의사가 없었다. 부대내 각종시설은 흑인용과 백인용으로 구분하였고, 공공 이용 공간은 줄을 그어서 그 너머로의 이동을 제한하였다. 흑인 장교들의 장교클럽 사용은 엄격히 제한(사실상 금지)되었고 그조차도 백인 지휘관들이 흑인 장교들을 교육생 신분으로 묶어버리면서 완전히 금지시켜 버렸다. 최초 창설 이후 2년간 부대 이동만 하면서 시설은 점점 열악해졌다. 1945년 3월 켄터키주 프리먼 비행장으로 이전하게 되는데 여기는 B-25를 운영하기엔 열악한 환경이었다. 거기에다 고속 승진하는 백인 장교들과 달리 교육생 신분으로 묶인 흑인 장교들은 진급조차 막힌채 허송세월을 보내면서 흑인 부대원들의 사기는 떨어지고, 불만은 고조되었다.

1.6.3. 프리먼 비행장의 반란

1945년 4월 교육생 신분의 흑인 장교들을 초급 장교로 전환하라는 명령이 떨어졌고, 이에 흑인 장교들은 백인들에게만 허용된 장교클럽의 이용을 시도했다. 그러나 백인 지휘관들은 이들을 저지하고 몇몇을 체포했다. 이에 흑인 장교들이 반발하면서 이른바 '프리먼 비행장의 반란'이라는 시위사태로 비화되었다. 최종적으로 104명의 흑인 장교들이 체포 및 기소되었다가 인권단체와 정부의 압력으로 흑인 장교 3명만 재판에 회부되고 그 중 1명만 유죄 평결 및 불명예 제대를 하게 되었다.

1.6.4. 반란 이후

프리먼 비행장의 반란 이후 부대는 사정이 좀 나은 다른 기지로 다시 이전하였으나 2개 비행중대가 해체되었다. 대신 벤자민 O. 데이비드 주니어가 최초의 흑인 전투비행대인 제99전투비행중대를 이끌고 날아와서 477비행대에 배속시켰다. 데이비드 자신은 혼성비행대로 변경된 477비행대의 지휘관에 임명된다. 477혼성비행대의 고위 지휘관들이 모두 흑인들로 물갈이되면서 어수선한 부대 내 기강이 수습되었다. 477비행대는 대 일본전 투입을 목표로 다시 훈련에 들어갔지만 이들이 전장에 나설 기회는 없었다.

1.7. 전쟁이 끝난 뒤

477비행대 반란 같은 불상사도 벌어졌지만 백인 이외의 인종이 전투에서 열등하다는 편견은 당연히 목숨 걸고 싸우던, 이들과 함께 싸웠던 백인 장병들 사이에서는 크게 사라졌다. 그러나 미국 본토에서는 백인 병사들과 전우애를 나누던 흑인 병사들은 전역 후 린치에 시달리고 여전히 인종차별을 받았다.

1948년 해리 트루먼 미 대통령은 미군 내에서 인종, 피부색, 종교, 국적에 따른 차별을 폐지하는 행정 명령 9981에 서명하면서 특정 인종만으로 구성된 부대들은 모두 해체되었다. 물론 여기에는 역전의 제332비행대와 상처만 남은 477비행대도 포함되었다.[4]

최초의 흑인 비행대를 이끌었던 벤자민 O. 데이비스 주니어[5]는 미군의 4번째 흑인 육군 장교이자 최초의 흑인 공군 장교로 이름을 남겼으며, 한국전쟁 때는 F-86을 타고 참전했다. 1998년 인종차별이 만연했던 당시 미군 사정을 훌륭한 인품으로 극복하고 전공까지 세운 공을 기려서 명예 4성 장군이 되었으며, 2002년 향년 89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

데이비드 외에도 다수의 터스키기 출신 대원들 전후 미 공군 및 우주항공분야에서 큰 족적을 남겼다. 물론 데이비드 처럼 한국전쟁에 참전한 인물들도 많았다. "대니얼 제임스 주니어"의 경우 1975년 미국 흑인으로는 처음으로 대장으로 진급했다.

프리먼 비행장의 반란에 연루된 477비행대의 흑인 장교들은 50년이나 지난 1995년 모두 사면 복권되었고 시위 관련 기록도 삭제되었다.

최초의 흑인 전투비행대였던 제99중대는 1988년 미 공군 항공교육훈련사령부 예하 훈련비행대로 재창설되었다. 현 99중대는 2차 세계대전 떄의 전통을 이어받는다는 의미에서 여전히 항공기 꼬리날개 끝부분을 붉은색으로 칠하고 있다.

제332전투비행대는 종전 이후 477비행대와 합쳐지면서 제332전투비행단으로 승격되었다가 행정 명령 9981의 발효로 해산되었다. 그러다 2002년 중동지역을 관할하는 제332원정항공단으로 부활하였는데, 재창설식에 2차대전중 332비행대 소속이었던 터스키지 에어맨들이 참석해 축하하기도 했다. 477비행대 역시 1948년 해산하였지만 60년만에 F-22를 운용하는 전투비행대로 부활하였다.

2006년 2차 세계대전과 그 이후로도 이어진 터스키기 에어맨들의 공적을 기려서 그들 모두에게 의회 명예 황금 훈장이 수여되었다.

2009년 미국 최초 흑인 대통령인 버락 오바마 취임식에 생존자들 일부가 초대되어 참석했다.

2. 매체에서 등장

파일:attachment/The_Tuskegee_Airmen.jpg

1995년 작으로 『매트릭스』의 모피어스 역으로 유명한 로런스 피시번과 아카데미 조연상을 수상했던 쿠바 구딩 주니어가 출연했다.[6]

스토리면에서는 나름대로 교훈적이고 인간적인 면에서 볼 것도 있지만[7], 대체적으로 혹평을 받다고 한다. 또 TV 영화라서 매우 저예산이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폭파 씬은 실제 2차대전 당시의 기록 필름을 사용했다.


[1] 물자 수송임무에서 제일 유명한 사례는 '레드볼 익스프레스'로 알려진 서부전선 미군 보급부대의 트럭 운전수들이 있다.[2] 진주만 공습 당시의 모범적인 전투행위로 해군 십자장을 받은 도리스 밀러 조리 하사가 대표적인 예이다. 진주만 공습을 영상화할 때 등장하는 대공 기관총을 잡은 흑인 수병이 바로 이 사람이다.[3] 각 비행단 평균 폭격기 손실은 46대였다.[4] 이후로도 미군 내에서 차별을 없애려는 시도는 계속 이어져서 21세기 시점에서는 적어도 제도적으로는 미군 내의 차별은 없다. 그러나 인종, 종교, 국적 등으로 인한 트러블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5] 그의 아버지 벤자민 오 데이비스 시니어는 최초의 흑인 육군 장군이었다.[6] 참고로 로렌스 피시번과 쿠바 구딩 주니어는 존 싱글톤 감독의 대표작인 보이즈 인 더 후드에서 부자관계를 연기했지만 이 영화에선 친구관계로 등장한다.[7] 실전최강 전투기 대전 같은 다큐멘터리에서 실제 참전용사들의 증언을 들어보면 전쟁 중에도 그 이후에도 그렇게 재밌는 친구들은 다신 못만났다고 실실 웃으며 회상하는데, 그런 점이 반영됐는지 이 영화에서도 주연들의 센스있고 재밌는 대화 장면이 꽤 많이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