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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6-20 20:45:54

너새니얼 그린

너새니얼 그린
Nathanael Greene
파일:1000140236.jpg
출생 1742년 8월 7일
13개 식민지 로드아일랜드 식민지 워릭
사망 1786년 6월 19일 (향년 43세)
미국 조지아주 서배너
복무 대륙군
최종 계급 대륙군 소장
복무 기간 1775~1783

1. 개요2. 생애3.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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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국의 군인.

2. 생애

로드아일랜드 식민지 워릭에서 퀘이커교도의 아들로 태어났다. 독학으로 수학과 법률을 익혔고 1770년부터 아버지가 경영하는 주물공장을 이어받았다. 이후 벤저민 프랭클린등과 친하게 지내 정치에 관심을 가졌다.

1774년 8월, 그린은 지역 민병대의 출범에 공헌했고, 이 부대가 10월에는 켄트 수비대로 승인되었다. 그린은 한쪽 다리를 가볍게 절고 있었기 때문에, 입대 시에 이의가 제기되었다. 그린이 군대의 전술에 관한 수많은 비싼 서적을 구입하여 병법을 독학하기 시작했다. 12월에는 민병대 법을 개정하기 위해 의회에서 임명된 위원회에 참여했다. 

미국 독립 전쟁이 시작되자 소장으로 임명되어 조지 워싱턴의 부관으로 독립전쟁 당시 뉴욕, 보스턴 등 수십 곳의 전투에서 영국군을 상대로 승리를 거둬 독립의 발판을 마련했다. 비폭력이 원칙인 퀘이커교도임에도 전장에서 활약해 ‘싸우는 퀘이커 교도(The Fighting Quaker)’라는 별칭이 붙었다.

특히 조지아, 노스, 사우스캐롤라이나가 있는 남부 전선에서 주력군 찰스 콘월러스의 공세와 열악한 아군 전투력을 정확하게 파악해 전략적 후퇴를 결정해 기민하게 후퇴한 후 다시 노스캐롤라이나 길퍼드에서 콘월러스와 전투를 벌였다. 패배했지만 콘월러스의 주력군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혔고 윌밍턴으로 철수했다가 버지니아에 돈좌시켰다.

이후 사우스캐롤라이나로 이동해 2달만에 영국군에게 피해를 입히며 후퇴시키는데 성공했다.

독립전쟁이 끝난 뒤 정부의 모든 요직을 거부하고 평범한 삶을 살다 조지아주 서배너의 농장에서 1786년 일사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3. 여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