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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17 20:53:20

윈스턴 처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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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1세
<rowcolor=#ffc224> 초대
로버트 월폴
조지 2세
<rowcolor=#ffc224> 초대 제2대 제3대 제4대
로버트 월폴 스펜서 컴프턴 헨리 펠럼 토머스 펠럼홀스
<rowcolor=#ffc224> 제5대 제6대
윌리엄 캐번디시 토머스 펠럼홀스
조지 3세
<rowcolor=#ffc224> 제6대 제7대 제8대 제9대
토머스 펠럼홀스 존 스튜어트 조지 그렌빌
<rowcolor=#ffc224> 제10대 제11대 제12대 제13대
대 윌리엄 피트 오거스터스 피츠로이 프레더릭 노스
<rowcolor=#ffc224> 제14대 제15대 제16대 제17대
윌리엄 페티 소 윌리엄 피트 헨리 애딩턴
<rowcolor=#ffc224> 제18대 제19대 제20대 제21대
소 윌리엄 피트 윌리엄 그렌빌 스펜서 퍼시벌
<rowcolor=#ffc224> 제22대
조지 4세
<rowcolor=#ffc224> 제22대 제23대 제24대 제25대
조지 캐닝 F. J. 로빈슨 아서 웰즐리
윌리엄 4세
<rowcolor=#ffc224> 제25대 제26대 제27대 제28대
아서 웰즐리 찰스 그레이 윌리엄 램 아서 웰즐리
<rowcolor=#ffc224> 제29대 제30대
로버트 필 윌리엄 램
빅토리아
<rowcolor=#ffc224> 제30대 제31대 제32대 제33대
윌리엄 램 로버트 필 존 러셀
<rowcolor=#ffc224> 제34대 제35대 제36대 제37대
조지 해밀턴고든 헨리 존 템플 헨리 존 템플
<rowcolor=#ffc224> 제38대 제39대 제40대 제41대
존 러셀 벤저민 디즈레일리
<rowcolor=#ffc224> 제42대 제43대 제44대 제45대
벤저민 디즈레일리
<rowcolor=#ffc224> 제46대 제47대 제48대 제49대
아치볼드 프림로즈
에드워드 7세
<rowcolor=#ffc224> 제49대 제50대 제51대 제52대
아서 밸푸어 헨리 캠벨배너먼 허버트 헨리 애스퀴스
조지 5세
<rowcolor=#ffc224> 제52대 제53대 제54대 제55대
허버트 헨리 애스퀴스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 앤드루 보너 로 스탠리 볼드윈
<rowcolor=#ffc224> 제56대 제57대 제58대 제59대
에드워드 8세
<rowcolor=#ffc224> 제59대
스탠리 볼드윈
조지 6세
<rowcolor=#ffc224> 제59대 제60대 제61대 제62대
윈스턴 처칠
<rowcolor=#ffc224> 제63대
윈스턴 처칠
엘리자베스 2세
<rowcolor=#ffc224> 제63대 제64대 제65대 제66대
윈스턴 처칠 앤서니 이든 해럴드 맥밀런 알렉 더글러스흄
<rowcolor=#ffc224> 제67대 제68대 제69대 제70대
해럴드 윌슨 해럴드 윌슨
<rowcolor=#ffc224> 제71대 제72대 제73대 제74대
마거릿 대처 존 메이저 토니 블레어 고든 브라운
<rowcolor=#ffc224> 제75대 제76대 제77대 제78대
데이비드 캐머런 테레사 메이 보리스 존슨 리즈 트러스
찰스 3세
<rowcolor=#ffc224> 제78대 제79대 제80대
리즈 트러스 리시 수낙 키어 스타머 }}}}}}}}}

윈스턴 처칠 관련 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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윈스턴 처칠의 주요 역임 지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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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fff> 초대 제2대 제3대 제4대
윌리엄 페티 토머스 타운젠드 프레더릭 노스 조지 뉴전트템플그렌빌
<rowcolor=#fff> 제5대 제6대 제7대 제8대
토머스 타운젠드 윌리엄 그렌빌 헨리 던다스 윌리엄 캐번디시벤팅크
<rowcolor=#fff> 제9대 제10대 제11대 제12대
토머스 펠럼 찰스 필립 요크 로버트 젠킨슨 조지 스펜서
<rowcolor=#fff> 제13대 제14대 제15대 제16대
로버트 젠킨슨 리처드 라이더 헨리 애딩턴 로버트 필
<rowcolor=#fff> 제17대 제18대 제19대 제20대
윌리엄 스터지스 본 헨리 페티피츠모리스 로버트 필 윌리엄 램
<rowcolor=#fff> 제21대 제22대 제23대 제24대
존 폰슨비 아서 웰즐리 헨리 골번 존 러셀
<rowcolor=#fff> 제25대 제26대 제27대 제28대
콘스탄틴 핍스 제임스 그레이엄 조지 그레이 스펜서 호레이쇼 월폴
<rowcolor=#fff> 제29대 제30대 제31대 제32대
헨리 존 템플 조지 그레이 스펜서 호레이쇼 월폴 토머스 소더론에스트코트
<rowcolor=#fff> 제33대 제34대 제35대 제36대
조지 콘월 루이스 조지 그레이 스펜서 호레이쇼 월폴 개손 개손하디
<rowcolor=#fff> 제37대 제38대 제39대 제40대
헨리 브루스 로버트 로우 R. A. 크로스 윌리엄 하코트
<rowcolor=#fff> 제41대 제42대 제43대 제44대
R. A. 크로스 휴 칠더스 헨리 매튜스 허버트 헨리 애스퀴스
<rowcolor=#fff> 제45대 제46대 제47대 제48대
매튜 화이트 리들리 찰스 리치 아레터스 아커스더글러스 허버트 글래드스턴
<rowcolor=#fff> 제49대 제50대 제51대 제52대
윈스턴 처칠 레지널드 맥케나 존 시먼 허버트 새뮤얼
<rowcolor=#fff> 제53대 제54대 제55대 제56대
조지 케이브 에드워드 쇼트 윌리엄 브리지먼 아서 헨더슨
<rowcolor=#fff> 제57대 제58대 제59대 제60대
윌리엄 조인슨힉스 존 로버트 클라인즈 허버트 새뮤얼 존 길모어
<rowcolor=#fff> 제61대 제62대 제63대 제64대
존 시먼 새뮤얼 호어 존 앤더슨 허버트 모리슨
<rowcolor=#fff> 제65대 제66대 제67대 제68대
도널드 소머벨 제임스 처터 에데 데이비드 맥스웰 파이프 그윌림 로이드 조지
<rowcolor=#fff> 제69대 제70대 제71대 제72대
랩 벌터 헨리 브루크 프랭크 소스키스 로이 젠킨스
<rowcolor=#fff> 제73대 제74대 제75대 제76대
제임스 캘러헌 레지널드 머들링 로버트 카 로이 젠킨스
<rowcolor=#fff> 제77대 제78대 제79대 제80대
멀린 리스 윌리엄 화이트로 레온 브리탠 더글러스 허드
<rowcolor=#fff> 제81대 제82대 제83대 제84대
데이비드 워딩턴 케네스 베이커 케네스 클라크 마이클 하워드
<rowcolor=#fff> 제85대 제86대 제87대 제88대
잭 스트로 데이비드 블런켓 찰스 클라크 존 리드
<rowcolor=#fff> 제89대 제90대 제91대 제92대
재키 스미스 앨런 존슨 테레사 메이 앰버 루드
<rowcolor=#fff> 제93대 제94대 제95대 제96대
사지드 자비드 프리티 파텔 수엘라 브레이버먼 그랜트 섑스
<rowcolor=#fff> 제97대 제98대 제99대
수엘라 브레이버먼 제임스 클레벌리 이벳 쿠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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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fff> 초대 제2대 제3대 제4대
존 스미스 로버트 할리 로버트 벤슨 윌리엄 윈덤
<rowcolor=#fff> 제5대 제6대 제7대 제8대
리처드 언슬로 로버트 월폴 제임스 스탠호프 존 애이슬래비
<rowcolor=#fff> 제9대 제10대 제11대 제12대
존 프래트 로버트 월폴 새뮤얼 샌디스 헨리 펠럼
<rowcolor=#fff> 제13대 제14대 제15대 제16대
윌리엄 리 헨리 빌슨리그 조지 리텔턴 헨리 빌슨리그
<rowcolor=#fff> 제17대 제18대 제19대 제20대
윌리엄 머리 헨리 빌슨리그 윌리엄 배링턴 프랜시스 데시우드
<rowcolor=#fff> 제21대 제22대 제23대 제24대
조지 그렌빌 윌리엄 도데스웰 찰스 타운젠드 프레더릭 노스
<rowcolor=#fff> 제25대 제26대 제27대 제28대
존 캐번디시 소 윌리엄 피트 존 캐번디시 소 윌리엄 피트
<rowcolor=#fff> 제29대 제30대 제31대 제32대
헨리 애딩턴 소 윌리엄 피트 에드워드 로 헨리 페티피츠모리스
<rowcolor=#fff> 제33대 제34대 제35대 제36대
스펜서 퍼시벌 니콜라스 밴시터트 F. J. 로빈슨 조지 캐닝
<rowcolor=#fff> 제37대 제38대 제39대 제40대
찰스 애버트 존 찰스 해리스 헨리 골번 존 스펜서
<rowcolor=#fff> 제41대 제42대 제43대 제44대
토머스 덴먼 로버트 필 토머스 스프링 라이스 프랜시스 베링
<rowcolor=#fff> 제45대 제46대 제47대 제48대
헨리 골번 찰스 우드 벤저민 디즈레일리 윌리엄 이워트 글래드스턴
<rowcolor=#fff> 제49대 제50대 제51대 제52대
조지 콘월 루이스 벤저민 디즈레일리 윌리엄 이워트 글래드스턴 벤저민 디즈레일리
<rowcolor=#fff> 제53대 제54대 제55대 제56대
조지 워드 헌트 로버트 로우 윌리엄 이워트 글래드스턴 스태퍼드 노스코트
<rowcolor=#fff> 제57대 제58대 제59대 제60대
윌리엄 이워트 글래드스턴 휴 칠더스 마이클 힉스 비치 윌리엄 하코트
<rowcolor=#fff> 제61대 제62대 제63대 제64대
랜돌프 처칠 조지 고셴 윌리엄 하코트 마이클 힉스 비치
<rowcolor=#fff> 제65대 제66대 제67대 제68대
찰스 리치 오스틴 체임벌린 허버트 헨리 애스퀴스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
<rowcolor=#fff> 제69대 제70대 제71대 제72대
레지널드 맥케나 앤드루 보너 로 오스틴 체임벌린 로버트 혼
<rowcolor=#fff> 제73대 제74대 제75대 제76대
스탠리 볼드윈 네빌 체임벌린 필립 스노든 윈스턴 처칠
<rowcolor=#fff> 제77대 제78대 제79대 제80대
필립 스노든 네빌 체임벌린 존 시먼 킹슬리 우드
<rowcolor=#fff> 제81대 제82대 제83대 제84대
존 앤더슨 휴 달튼 스태퍼드 크립스 휴 게이츠컬
<rowcolor=#fff> 제85대 제86대 제87대 제88대
랩 벌터 해럴드 맥밀런 피터 소니크로프트 데릭 히스코트어모리
<rowcolor=#fff> 제89대 제90대 제91대 제92대
셀윈 로이드 레지널드 모들링 제임스 캘러헌 로이 젠킨스
<rowcolor=#fff> 제93대 제94대 제95대 제96대
이언 매클라우드 앤서니 바버 데니스 힐리 제프리 하우
<rowcolor=#fff> 제97대 제98대 제99대 제100대
나이젤 로슨 존 메이저 노먼 라몬트 케네스 클라크
<rowcolor=#fff> 제101대 제102대 제103대 제104대
고든 브라운 앨리스터 달링 조지 오스번 필립 해먼드
<rowcolor=#fff> 제105대 제106대 제107대 제108대
사지드 자비드 리시 수낙 나딤 자하위 쿼지 콰텡
<rowcolor=#fff> 제109대 제110대
제러미 헌트 레이첼 리브스 }}}}}}}}}

{{{#!wiki style="margin: 0px -10px -5p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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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5px -1px -11px"
1834년 ~ 1922년
제1대 제2대 제3대
로버트 필 에드워드 스미스스탠리 벤저민 디즈레일리
공석 제4대 제5대
로버트 개스코인세실 (귀족원)
스태퍼드 노스코트 (서민원)
로버트 개스코인세실 아서 밸푸어
공석 제6대 공석
헨리 페티피츠모리스 (귀족원)
앤드루 보너 로 (서민원)
앤드루 보너 로 조지 커즌 (귀족원)
오스틴 체임벌린 (서민원)
}}}{{{#!wiki style="margin:-5px -1px -11px" 1922년 이후
제7대 제8대 제9대 제10대
앤드루 보너 로 스탠리 볼드윈 네빌 체임벌린 윈스턴 처칠
제11대 제12대 제13대 제14대
앤서니 이든 해럴드 맥밀런 알렉 더글러스흄 에드워드 히스
제15대 제16대 제17대 제18대
마거릿 대처 존 메이저 윌리엄 헤이그 이언 덩컨 스미스
제19대 제20대 제21대 제22대
마이클 하워드 데이비드 캐머런 테레사 메이 보리스 존슨
제23대 제24대 제25대
리즈 트러스 리시 수낙 케미 베이드녹
노동당 당수 · 자유민주당 당수 · 스코틀랜드 국민당 당수
토리당 당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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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fffff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5px -1px -11px"
초대

윌리엄 이워트 글래드스턴
2대

토머스 칼라일
3대

제임스 몬크리프
남작
4대

윌리엄 스털링맥스웰
준남작
5대

에드워드 스탠리
백작
6대

스펜서 캐번디시
공작
7대

아치볼드 프림로즈
백작
8대

스태퍼드 노스컷
백작
9대

숌버그 커
후작
10대

조지 고셴
자작
11대

제임스 로버트슨
남작
12대

알렉산더 브루스
13대

프레드릭 해밀턴템플블랙우드
후작
14대

로버트 핀리
자작
15대

리처드 홀데인
자작
16대

조지 윈덤
17대

길버트 엘리엇머레이키닌먼드
백작
18대

허버트 키치너
백작
19대

데이비드 비티
백작
20대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
백작
21대

스탠리 볼드윈
백작
22대

존 길모어
준남작
23대

윈스턴 처칠
24대

이언 해밀턴
25대

에드먼드 알렌비
자작
26대

허버트 그리어슨
27대

존 도널드 폴록
28대

앤드루 커닝엄
자작
29대

앨러스터 심
30대

알렉산더 플레밍
31대

시드니 알프레드 스미스
32대

제임스 로버트슨 저스티스
33대

조 그리몬드
남작
34대

제임스 로버트슨 저스티스
35대

맬컴 머거리지
36대

케네스 올솝
37대

조너선 위트니 개리옥 윌즈
38대

고든 브라운
39대

마그누스 마그누손
40대

앤서니 로스
41대

데이비드 스틸
남작
42대

아치 맥퍼슨
43대

뮤리얼 그레이
44대

도니 먼로
45대

맬컴 매클라우드
46대

존 커훈
47대

로빈 하퍼
48대

토머스 디엘
준남작
49대

마크 밸러드
50대

이언 맥워터
51대

피터 맥콜
52대

스티브 모리스
53대

앤 헨더슨
54대

데보라 카옘베
}}}}}}}}}}}} ||

파일:연합국 명예기.svg
연합국 주요 지도자
{{{#!wiki style="margin: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파일:미국 국기(1912-1959).svg 미국 파일:프랑스 국기.svg
프랭클린 D. 루스벨트 해리 S. 트루먼 알베르 르브룅 샤를 드골
파일:영국 국기.svg 영국
조지 6세 네빌 체임벌린 윈스턴 처칠 클레멘트 애틀리
파일:소련 국기(1936-1955).svg 소련 파일:대만 국기.svg 중국
이오시프 스탈린 미하일 칼리닌 린썬 장제스 }}}}}}}}}

윈스턴 처칠의 주요 선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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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0 -10px -5px; min-height:calc(1.5em + 6p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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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5px -1px -11px"
100 Greatest Britons
※ 2002년 영국 BBC 방송이 영국인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를 바탕으로 '가장 위대한 영국인 100명'을 선정
TOP 10
<rowcolor=#ffe> 1위 2위 3위 4위 5위
윈스턴 처칠 이점바드 킹덤 브루넬 다이애나 스펜서 찰스 다윈 윌리엄 셰익스피어
<rowcolor=#ffe> 6위 7위 8위 9위 10위
아이작 뉴턴 엘리자베스 1세 존 레논 호레이쇼 넬슨 올리버 크롬웰
11위~100위
<rowcolor=#ffe> 11위 12위 13위 14위 15위
어니스트 섀클턴 제임스 쿡 로버트 베이든 파월 알프레드 대왕 아서 웰즐리
<rowcolor=#ffe> 16위 17위 18위 19위 20위
마거릿 대처 마이클 크로포드 빅토리아 여왕 폴 매카트니 알렉산더 플레밍
<rowcolor=#ffe> 21위 22위 23위 24위 25위
앨런 튜링 마이클 패러데이 오와인 글린두르 엘리자베스 2세 스티븐 호킹
<rowcolor=#ffe> 26위 27위 28위 29위 30위
윌리엄 틴들 에멀린 팽크허스트 윌리엄 윌버포스 데이비드 보위 가이 포크스
<rowcolor=#ffe> 31위 32위 33위 34위 35위
레오나르드 체셔 에릭 모어캠브 데이비드 베컴 토머스 페인 부디카
<rowcolor=#ffe> 36위 37위 38위 39위 40위
스티브 레드그레이브 토머스 모어 윌리엄 블레이크 존 해리슨 헨리 8세
<rowcolor=#ffe> 41위 42위 43위 44위 45위
찰스 디킨스 프랭크 휘틀 존 필 존 로지 베어드 어나이린 베번
<rowcolor=#ffe> 46위 47위 48위 49위 50위
보이 조지 더글러스 베이더 윌리엄 월레스 프랜시스 드레이크 존 웨슬리
<rowcolor=#ffe> 51위 52위 53위 54위 55위
아서 왕 플로렌스 나이팅게일 토머스 에드워드 로렌스 로버트 스콧 이넉 파월
<rowcolor=#ffe> 56위 57위 58위 59위 60위
클리프 리처드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 프레디 머큐리 줄리 앤드류스 에드워드 엘가
<rowcolor=#ffe> 61위 62위 63위 64위 65위
엘리자베스 보우스라이언 조지 해리슨 데이비드 애튼버러 제임스 코널리 조지 스티븐슨
<rowcolor=#ffe> 66위 67위 68위 69위 70위
찰리 채플린 토니 블레어 윌리엄 캑스턴 바비 무어 제인 오스틴
<rowcolor=#ffe> 71위 72위 73위 74위 75위
윌리엄 부스 헨리 5세 알레이스터 크로울리 로버트 1세 밥 겔도프 (아일랜드인)
<rowcolor=#ffe> 76위 77위 78위 79위 80위
무명용사 로비 윌리엄스 에드워드 제너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 찰스 배비지
<rowcolor=#ffe> 81위 82위 83위 84위 85위
제프리 초서 리처드 3세 J. K. 롤링 제임스 와트 리처드 브랜슨
<rowcolor=#ffe> 86위 87위 88위 89위 90위
보노 (아일랜드인) 존 라이든 버나드 로 몽고메리 도날드 캠벨 헨리 2세
<rowcolor=#ffe> 91위 92위 93위 94위 95위
제임스 클러크 맥스웰 J. R. R. 톨킨 월터 롤리 에드워드 1세 반스 월리스
<rowcolor=#ffe> 96위 97위 98위 99위 100위
리처드 버튼 토니 벤 데이비드 리빙스턴 팀 버너스리 마리 스톱스
출처
같이 보기: BBC 선정 최악의 영국인, 위대한 인물 시리즈 }}}}}}}}}

파일:타임지 로고 화이트.svg 선정 20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100인
{{{#!wiki style="margin: 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Time 100: The Most Important People of the Century
지도자들 & 혁명가들 부문 #
파일:external/img.timeinc.net/1101980413_400.jpg
시어도어 루스벨트 블라디미르 레닌 마거릿 생어 프랭클린 D. 루스벨트 엘리너 루스벨트
아돌프 히틀러 윈스턴 처칠 모한다스 카람찬드 간디 다비드 벤구리온 마오쩌둥
마틴 루터 킹 아야톨라 루홀라 호메이니 마거릿 대처 로널드 레이건 미하일 고르바초프
레흐 바웬사 넬슨 만델라 요한 바오로 2세 호찌민 탱크맨
같이 보기: 과학자 & 사상가 부문, 예술가 & 연예인 부문, 건설자 & 거인 부문, 영웅 & 아이콘 부문 }}}}}}}}}

{{{#!wiki style="margin: -10px -10px; word-break: keep-all"<tablebordercolor=#e90606> 파일:타임지 로고 화이트.svg 올해의 인물 (1940년대)
Time Person of the Year 1940's
}}}
{{{#!wiki style="margin:0 -10px -5px; min-height:calc(1.5em +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5px -1px -11px"
<nopad>파일:attachment/time_1940.jpg파일:attachment/time_1941.jpg파일:attachment/time_1942.jpg파일:attachment/time_1943.jpg파일:attachment/time_1944.jpg
<rowcolor=#fff> 1940년
1941년
1942년
1943년
1944년

노르망디 상륙 작전
<nopad>파일:attachment/time_1945.jpg파일:Person Of The Year 1946.jpg파일:attachment/time_1947.jpg파일:attachment/time_1948.jpg파일:attachment/time_1949.jpg
<rowcolor=#fff> 1945년

원폭 투하종전
1946년
1947년
1948년
1949년
파일:Time_Inc_white.png
}}}}}}}}} ||

윈스턴 처칠의 주요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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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ited States Congressional Gold Medal
미합중국 의회 명예 황금 훈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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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76년 1777년 1779년 1781년
조지 워싱턴 소장 호레이쇼 게이츠 소장 앤서니 웨인 사령관 헨리 리 3세 준장 대니얼 모건
1781년 1787년 1800년 1805년 1813년
소장 너새니얼 그린 존 폴 존스 대령 토머스 트럭스턴 준장 에드워드 프레블 대령 아이작 헐
대령 스티븐 디케이터
대령 제이콥 존스
1813년 1814년
대령 윌리엄 베인브리지 대령 올리버 해저드 페리
대령 제시 엘리엇
대위 윌리엄 워드 버로스 2세
대위 에드워드 매콜
대령 제임스 로렌스 대령 토머스 맥도너
대령 로버트 헨리
대위 스티븐 카신
1814년 1814년, 1848년 1814년
대령 루이스 워링턴 대령 존스턴 블레이클리 소장 제이콥 브라운 소장 윈필드 스콧 소장 피터 부엘 포터
준장 엘리저 윌락 리플리
대령 제임스 밀러
1814년 1815년 1816년
소장 에드먼드 P. 게인스 소장 알렉산더 마콤 소장 앤드루 잭슨 대령 찰스 스튜어트 대령 제임스 비들
1818년 1835년 1846년, 1847년, 1848년 1847년 1854년
소장 윌리엄 해리슨
주지사 아이작 셸비
대령 조지 크로간 소장 재커리 테일러 소머스 호
장교 및 승무원 구출
중령 덩컨 잉그함
1858년 1863년 1864년 1866년 1867년
프레더릭 로즈 소장 율리시스 S. 그랜트 코닐리어스 밴더빌트 로버트 크레이튼
에드윈 J. 로
조지 C. 스투퍼
사이러스 웨스트 필드
1867년 1871년 1873년 1874년, 1904년 1883년
조지 피바디 조지 F. 로빈슨 대령 재러드 크랜달 그 외 존 혼 주니어 존 폭스 슬레이터
1888년 1890년 1900년 1902년 1909년
조셉 프랜시스 수석 엔지니어 조지 W. 멜빌 그 외 중위 프랭크 H. 뉴컴 중위 데이비드 H. 자비스
소위 엘스워스 P. 버트홀프
새뮤얼 J. 콜 박사
라이트 형제
1912년 1914년 1915년 1928년
선장 아서 로스트론 폴 H. 크라이봄 그 외 로물로 세바스티안 나온
에두아르도 수아레스 무히카
찰스 린드버그 로알 아문센
움베르토 노빌
1928년 1929년 1930년 1936년
토머스 에디슨 최초로 성공한 대서양 횡단 비행사 소령 월터 리드 준장 리처드 에벌린 버드 링컨 엘즈워스
1936년 1938년 1939년 1940년
조지 M. 코핸 리처드 올드 리치 부인
안나 불리니
하워드 휴즈 목사 프랜시스 퀸 윌리엄 시넛
1942년 1945년 1946년
롤런드 바우처 1939~1941년 미국 남극 탐험대 육군 원수 조지 C. 마셜
해군 원수 어니스트 킹
육군 원수 존 조지프 퍼싱 준장 빌리 미첼
1949년 1954년 1955년 1956년 1958년
앨번 W. 바클리 어빙 벌린 조너스 소크 박사 남북 전쟁의 참전 용사 준장 하이먼 리코버
1959년 1960년 1961년 1962년
로버트 고다드 로버트 프로스트 토머스 앤서니 둘리 3세 밥 호프 샘 레이번
1962년 1968년 1969년 1973년 1977년
육군 원수 더글러스 맥아더 월트 디즈니 윈스턴 처칠 로베르토 클레멘테 매리언 앤더슨
1978년 1979년
중장 아이라 이커 로버트 F. 케네디 존 웨인 벤 아브러조
맥시 앤더슨
래리 뉴먼
휴버트 험프리
1979년 1980년 1982년
미국 적십자 케네스 테일러 1980 미국 하계 올림픽 팀 베아트릭스 여왕 대장 하이먼 리코버
1982년 1983년
프레드 워링 조 루이스 루이스 라머 레오 라이언 대니 토머스
1984년 1985년
해리 S. 트루먼 레이디 버드 존슨 엘리 비젤 로이 윌킨스 조지 거슈윈
아이라 거슈윈
1986년 1987년 1988년
네이선 샤란스키
에비탈 샤란스키
해리 차핀 에런 코플런드 메리 래스커 제시 오언스
1988년 1990년 1991년
앤드루 와이어스 로런스 록펠러 대장 매튜 B. 리지웨이 대장 노먼 슈워츠코프 대장 콜린 파월
1994년 1996년 1997년
랍비 메나헴 멘델 쉬니어슨 루스 그레이엄
빌리 그레이엄
프랭크 시나트라 마더 테레사 바르톨로메오스 1세
1998년 1999년
넬슨 만델라 리틀록 9인 제럴드 포드
베티 포드
로자 파크스 시어도어 헤스버그
2000년
존 오코너 찰스 M. 슐츠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로널드 레이건
낸시 레이건
나바호족 코드 토커
2002년 2003년
대장 휴 셸턴 토니 블레어 재키 로빈슨 도러시 하이트 박사 조셉 디레인
해리 & 일라이자 브릭스
레비 피어슨
2004년 2006년
마틴 루터 킹
코레타 스콧 킹
터스키기 에어맨 달라이 라마 14세 바이런 넬슨 노먼 볼로그 박사
2007년 2008년
마이클 데바키 박사 아웅 산 수 치 콘스탄티노 브루미디 에드워드 윌리엄 브룩 3세 아메리카 원주민 코드 토커
2009년 2010년
여성 공군 군무원 조종사 닐 암스트롱
버즈 올드린
존 글렌
아널드 파머 무함마드 유누스 제100 보병대대
제442 보병연대 전투단
군사정보국
2011년 2012년 2013년
몬트포드 포인트 해병전우회 9.11 테러 참사 사망자 라울 발렌베리 애디 메이 콜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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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럴 로버트슨
신시아 웨슬리
제1 특수임무단
2014년
둘리틀 특공대 멤버 미국의 공군 에이스 제2차 세계 대전
민간 항공 초계 부대 멤버
시몬 페레스 모뉴먼츠 맨
2014년 2015년 2016년
제65 보병연대 잭 니클라우스 셀마 몽고메리 행진 제2차 세계 대전 필리핀인 참전 용사 OSS
2017년 201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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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계 미국인 참전 용사
USS 인디애나폴리스 승무원 안와르 사다트
201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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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명의 수여자들 그렉 르몬드 미국 국회의사당 경찰
워싱턴 광역 경찰국 소속 경찰관
제369 보병연대 하미드 카르자이 국제공항에서 전사한 13명의 장병
2022년 2023년
미 육군 제23부대 본부 특수부대
제3133 신호 복무 중대
제6888 중앙우편대대 제2차 세계 대전
참전 상선 선원
에밋 틸
메이미 틸모블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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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cd9f51> 1901 1902 1903 1904
파일:프랑스 국기(1794-1815, 1830-1958).svg 파일:독일 제국 국기.svg 파일:노르웨이 국기.svg 파일:프랑스 국기(1794-1815, 1830-1958).svg
쉴리 프뤼돔 테오도르 몸젠 비에른스티에르네 비외른손 프레데리크 미스트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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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세 에체가라이 헨리크 시엔키에비치 조수에 카르두치 러디어드 키플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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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돌프 오이켄 셀마 라겔뢰프 파울 폰 하이제 모리스 마테를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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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르하르트 하웁트만 라빈드라나트 타고르 로맹 롤랑 베르네르 폰 헤이덴스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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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를 기엘레루프 헨리크 폰토피단 카를 슈피텔러 크누트 함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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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톨 프랑스 하신토 베나벤테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 브와디스와프 레이몬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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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버나드 쇼 그라치아 델레다 앙리 베르그송 시그리드 운세트
<rowcolor=#cd9f51> 1929 1930 1931 1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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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 만 싱클레어 루이스 에릭 악셀 카를펠트 존 골즈워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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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반 부닌 루이지 피란델로 유진 오닐 로제 마르탱 뒤 가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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펄 벅 프란스 에밀 실란패 요하네스 빌헬름 옌센 가브리엘라 미스트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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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만 헤세 앙드레 지드 토머스 스턴스 엘리엇 윌리엄 포크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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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트런드 러셀 페르 라게르크비스트 프랑수아 모리아크 윈스턴 처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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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니스트 헤밍웨이 할도르 락스네스 후안 라몬 히메네스 알베르 카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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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리스 파스테르나크 살바토레 콰시모토 생존 페르스 이보 안드리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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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스타인벡 요르기우스 세페리스 장폴 사르트르(거부) 미하일 숄로호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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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무엘 요세프 아그논 넬리 작스 미겔 앙헬 아스투리아스 가와바타 야스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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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뮈엘 베케트 알렉산드르 솔제니친 파블로 네루다 하인리히 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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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트릭 화이트 에위빈드 욘손 하뤼 마르틴손 에우제니오 몬탈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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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 벨로 비센테 알레익산드레 아이작 바셰비스 싱어 오디세우스 엘리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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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스와프 미워시 엘리아스 카네티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윌리엄 골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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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기브 마푸즈 카밀로 호세 셀라 옥타비오 파스 나딘 고디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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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릭 월컷 토니 모리슨 오에 겐자부로 셰이머스 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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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스와바 심보르스카 다리오 포 주제 사라마구 귄터 그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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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1013A><colcolor=#ffc224>
영국 제61·63대 총리
윈스턴 처칠 경
Rt Hon. Sir Winston Churchill
KG OM[1] CH[2] TD DL FRS DWT RA
파일:external/lh3.googleusercontent.com/Winston%2BChurchill.%2B1941.jpg
본명 윈스턴 레너드 스펜서처칠[3]
(Winston Leonard Spencer-Churchill)
출생 1874년 11월 30일
그레이트브리튼 아일랜드 연합왕국 옥스퍼드셔 주 우드스톡 블레넘 궁전
(現 영국 잉글랜드 옥스퍼드셔 주 우드스톡)
사망 1965년 1월 24일 (향년 90세)
영국 잉글랜드 런던 켄싱턴-첼시 왕립구
국적
[[영국|]][[틀:국기|]][[틀:국기|]]

[[미국|]][[틀:국기|]][[틀:국기|]][명예시민권]
재임기간 제61대 총리
1940년 5월 10일 ~ 1945년 7월 26일
제63대 총리
1951년 10월 26일 ~ 1955년 4월 7일
서명
파일:윈스턴 처칠 서명.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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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1013A><colcolor=#ffc224> 작위 가터 기사 (Order of the Garter)[5][6]
부모 아버지 랜돌프 처칠
어머니 제니 제롬 스펜서처칠
배우자 클레멘타인 처칠(1908년 결혼)
자녀 1남 4녀
학력 해로우 스쿨 (졸업)
영국육군사관학교 (학사)
당적
신체 168cm, 62kg[7], O형[8]
종교 개신교 (성공회)무종교 (불가지론) → 불명[9]
복무 QOOH 근위척탄병 제2대대 소령
제6대대 QOOH 왕립 스코틀랜드 소총병연대 임시중령
제615 RAF 비행중대 공군 명예준장
여왕 소유 옥스퍼드셔 기병 명예대령
제4 여왕 소속 기병대령
최종계급 대령 (영국 육군)
명예계급 준장 (영국 공군)
약력 상무장관 (1908~1910)
내무장관 (1910~1911)
제1해군경 (1911~1915)
랭커스터 공작령 대법관 (1915)
군수장관 (1917~1919)
육군장관 (1919~1921)
항공장관 (1919~1921)
식민장관 (1921~1922)
제2대장경 겸 재무장관 (1924~1929)
제1해군경 (1939~1940)
국방장관 (1940~1945)
보수당 당수 (1940~1955)
국방장관 (1951~1952)
}}}}}}}}}

1. 개요2. 생애3. 평가4. 소속 정당5. 어록6. 선거 이력7. 여담8. 대중매체에서
8.1. 영화8.2. 드라마8.3. 소설8.4. 만화8.5. 게임
9. 관련 링크10.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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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군인 출신 제61대·63대 영국 총리. 제2차 세계 대전 당시의 영국 총리이자 엘리자베스 2세 시대의 초대 총리이다.

세계적으로 가장 인지도가 높은 영국 총리 중 한 명으로[10],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나치 독일아돌프 히틀러와 맞서 치열하게 싸웠다. 이때 열세인 전황에도 불구하고 뛰어난 리더십과 선견지명을 발휘해 전세를 뒤집어 연합국의 승리를 이끌어냈다. 이로 인해 현재까지도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다. 전후 질서를 구축하는 과정에서 철의 장막이라는 유명한 용어를 언급하며 냉전을 예언했다.

동시에 한편으로는 갈리폴리 전투에서 보인 추태와 인종차별적인 이면[11] 및 영국의 식민지 수탈을 옹호하는 거만한 제국주의자라는 어두운 부분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적잖은 비판을 받기도 한다. 제2차 세계 대전의 승전 또한 미국소련의 활약에 비해 과대평가되었다는 평도 받는다.

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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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하십시오.

3.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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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소속 정당

소속 기간 비고

1900 - 1904 정계 입문

1904 - 1924 입당

1924 - 1964 복당

5. 어록

탁월한 연설 능력으로 유명했던 만큼 수많은 어록을 남겼다.
누군가 그러더군요. 짖는 개를 볼 때마다 멈춰서서 돌을 던지면 절대 원하는 곳에 가지 못한다고요.
As someone said. You will never reach your destination if you stop and throw stones at every dog that barks.
1923년 12월 3일, 런던의 Shepherd's Bush Empire Theatre에서 있었던 연설 중[12][13]
절대로 포기하지 마시오. 절대로 포기하지 마시오. 절대, 절대, 절대, 절대로! 엄청난 일이건 작은 일이건, 크건 하찮건 상관 말고, 명예로움과 분별에 대한 강한 확신이 있는 경우들이 아니라면, 절대 포기하지 마시오.
Never give in. Never give in. Never, never, never, never! — in nothing, great or small, large or petty — never give in, except to convictions of honour and good sense.
1941년 영국 해로우 고등학교 졸업식 연설 전문[14][15]
나는 지금 이 자리에서, 이미 정부 관료들에게 말하였듯이, 의원 여러분께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제가 여러분께 드릴 수 있는 것은 와, 수고와, 눈물, 그리고 뿐이라고.(I have nothing to offer but blood, toil, tears and sweat.)[16]
우리의 앞에는 가장 고통스러운 시험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의 앞에는 투쟁과 고통으로 점철될 수많은 세월들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의 정책이 무엇이냐고 물으신다면, 이와 같이 답변하겠습니다 : 육, 해, 공을 가리지 않고, 하느님께서 주신 모든 힘을 가지고, 이제껏 인류가 저질러 온 수많은 범죄 목록 속에서도 유례없었던 극악무도한 폭정에 맞서 싸우는 것이라고. 그것이 우리의 정책입니다. 우리의 목적이 무엇이냐고 물으신다면, 한 단어로 대답하겠습니다. 그것은 승리입니다.[17]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승리. 어떠한 공포가 닥쳐와도, 승리. 갈 길이 아무리 멀고 험해도, 승리. 승리 없이는 생존도 없기 때문입니다.(It is victory, victory at all costs, victory in spite of all terror, victory, however long and hard the road may be; for without victory, there is no survival.)
1940년 5월 13일, 수상 취임 직후 첫 하원 연설 중[18]
영화 다키스트 아워 영화 덩케르크
영국은 약해지거나 실패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끝까지 싸울 것입니다. 우리는 프랑스에서 싸울 것입니다. 우리는 바다와 대양에서 싸울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감과 힘을 길러 하늘에서 싸울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영국을 지켜 낼 것입니다. 우리는 해변에서 싸울 것입니다. 우리는 상륙지점에서 싸울 것입니다. 우리는 들판과 거리에서 싸울 것입니다. 우리는 언덕에서 싸울 것입니다. 우리는 절대로 항복하지 않을 것입니다![19]
We shall not flag or fail. We shall go on to the end. We shall fight in France, we shall fight on the seas and oceans, we shall fight with growing confidence and growing strength in the air, we shall defend our island, whatever the cost may be. We shall fight on the beaches, we shall fight on the landing grounds, we shall fight in the fields and in the streets, we shall fight in the hills, we shall never surrender!
1940년 6월 4일에 있었던 하원의원 연설[20]
자본주의의 고질적 결함은 풍요의 불평등한 분배고, 사회주의의 태생적 미덕은 고통의 평등한 나눔이다.
The inherent vice of capitalism is the unequal sharing of blessings. The inherent virtue of Socialism is the equal sharing of miseries.
1945년 10월 22일에 있었던 하원의원 연설 중[21]
(중략) 그러니 우리, 각자 의무를 다할 준비를 합시다. 그리고 각자 각오를 다집시다. 대영제국과 그 연방이 천년을 더 계속된다고 할지라도 사람들이 지금을 돌아보며 '이때야말로 가장 찬란한 순간이었노라(This was their finest hour.)'고 말할 수 있도록!#
Let us therefore brace ourselves to our duties, and so bear ourselves that, if the British Empire and its Commonwealth last for a thousand years, men will still say, 'This was their finest hour.'
1940년 6월 18일, 하원 회의에서 영국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연설 중[22][23]
이 전쟁은 독일과의 전쟁(War with Germany)이 아니라, 독일에 맞선 전쟁(War against Germany)이다!
"War with Germany"라고 표현한 의원을 논박하며
성공은 영원하지 않고, 실패는 끝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굴복하지 않고 계속해나가는 용기이다.
Success is not final. Failure is not fatal. It is the courage to continue that counts.
[24]
인류의 분쟁의 영역에서 이토록 많은 사람들이 이토록 적은 사람들에게 이토록 큰 도움을 받은 적이 없다.
Never in the field of human conflict was so much owed by so many to so few.
1940년 8월 20일 영국 본토 항공전 승리 이후 영국 왕립공군 조종사들의 노고를 치하하며[25][26]
그럼 우리가 이겼군.
1941년 미국의 참전 소식을 듣고[27]
불쌍한 네빌 체임벌린은 히틀러를 신용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틀렸습니다. 하지만 제가 스탈린을 잘못 알았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얄타 회담 후 각료들에게[28]
이것은 끝이 아닙니다. 끝의 시작조차도 아닙니다. 하지만 이것은, 아마, 시작의 끝일 것입니다.
Now this is not the end. It is not even the beginning of the end. But it is, perhaps, the end of the beginning.
1942년 11월 10일 엘 알라메인 전투 승리 연설 중[29]
발트해슈체친에서 아드리아해트리에스테까지 대륙에 걸쳐 철의 장막이 내려졌습니다.
From Stettin in the Baltic to Trieste in the Adriatic, an iron curtain has descended across the Continent.
1946년 5월 3일 미국 미주리주에서 냉전공산주의에 관하여[30][31]
전쟁에는 결단. 패배에는 투혼. 승리에는 아량. 평화에는 선의가 필요하다.
In War: Resolution. In Defeat: Defiance. In Victory: Magnanimity. In Peace: Good Will.[32]
한 국가의 앞날을 위해 할 수 있는 가장 안전한 투자는 어린이들에게 우유를 먹이는 일이다.
There is no finer investment for any community than putting milk into babies.
1943년 3월 21일 라디오 연설 중[33]
비관론자는 모든 기회에서 어려움을 찾아내고, 낙관론자는 모든 어려움에서 기회를 찾아낸다.
A pessimist sees the difficulty in every opportunity; an optimist sees the opportunity in every difficulty
남극과 북극은 지구의 반대쪽에 있다. 그러나 만일 당신이 어느 한쪽 극에서 내일 잠에서 깬다면 당신은 어느 쪽 극인지 알 수 없을 것이다. 아마도 한쪽엔 펭귄이 좀더 많고, 다른 한쪽엔 곰들이 좀더 많겠지만 결국 주변엔 온통 얼음과 눈, 그리고 매섭게 부는 바람만 있을 것이다.
파시즘공산주의를 동시에 비판하며
연설은 여자의 치마처럼 짧되 충분히 커버할 만큼은 되어야 한다.[34]
A good speech should be like a woman's skirt; long enough to cover the subject and short enough to create interest.
정치라는 것은 전쟁 못지않게 사람을 흥분시키는 것이며, 똑같이 위험하기도 한 것이다. 전쟁에서는 단 한 번 죽으면 되지만, 정치에서는 여러 번 희생당해야 하는 것이 다를 뿐이다.
Politics is almost as exciting as war, and quite as dangerous. In war you can only be killed once, but in politics many times.[35]
만약 히틀러지옥을 침공한다면 나는 서민원에서 악마에 대한 지지 연설이라도 할 수 있다.
If Hitler invaded Hell, I would make at least a favourable reference to the devil in the House of Commons.
바르바로사 작전이 개시되었을 때 보좌관 존 콜빌(John Colville)에게[36][37]
적이 나를 노리고 쏜 총알이 맞지 않는 것만큼 재미있는 일은 없다.갈리폴리의 포탄들도 처칠을 맞추지 못했다[38]
수상이 되는 것보다 경마 더비 대상경주에서 우승하는 말의 마주가 되고 싶다.[39]
평화는 강자의 특권이다. 약자에게는 평화를 누릴 자격이 없다.
민주주의는 최악의 정치체제다. 예전에 써본 다른 체제들을 제외하면.
Indeed, it has been said that democracy is the worst form of government except all those other forms that have been tried from time to time.[40][41][42]
배가 없으면 우리는 살 수 없다.
Without ships, we cannot live.
2차 세계대전 당시 대서양의 제해권 장악의 중요성을 역설하며
난 이제 창조주를 만날 준비가 됐다. 창조주께서 날 만날 마음의 준비가 되셨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I am ready to meet my Maker. Whether my Maker is prepared for the ordeal of meeting me is another matter.
75세 생일 기념 축사이자 자신의 묘비에 적힌 글귀 중 일부. 그리고 처칠은 이 말을 한 후로도 15년을 더 살았다.
승리의 순간에 샴페인은 당연하다. 그건 패배의 순간에도 마찬가지이다.[43]
나는 돼지를 좋아한다네. 개는 우리를 우러러보고 고양이는 우리를 얕잡아보지만, 돼지는 우리를 자기와 똑같이 취급하지.
I am fond of pigs. Dogs look up to us. Cats look down on us. Pigs treat us as equals.
1946년 11월, 사위 크리스토퍼 솜스와 함께 런던 근교 차트웰의 별장 안에 있는 축사를 둘러보며 했다고 알려진 말[44][45][46][47]
만약 지옥을 통과하는 중이라면, 멈추지 말고 계속 가라.
If you're going through hell, keep going.
영미권에도 널리 알려져 있는 처칠의 명언이지만, Finest Hour라는 전기에 따르면 출처 불명이라고 한다.
만약 내가 죽는다면 독일군은 내 시체를 집무실의 의자에서 끌어내려야 할 것이다.
영국 본토 항공전이 있었을 당시에, 캐나다로 피난할 것을 거부하고 런던 집무실과 지하벙커에 남아서 공무를 수행하면서 했던 발언이다. 그리고, 영국 국민들에게 전시상황에도 절대로 동요하지 말것을 부탁하면서 그 유명한 "국민 여러분. 진정하시고 평상시처럼 하던 일을 하십시오." 슬로건을 발표한다.
영국과 프랑스는 불명예와 전쟁 사이에서 선택해야 했다. 그들은 불명예를 선택했다. 그리고 그들은 전쟁을 겪을 것이다.
뮌헨 협정 당시 평화를 가져왔다는 네빌 체임벌린의 발언을 듣고 한 말. 이 말은 6개월 이후 현실이 된다.
째뜬우이가하여고하은거시아
Underidoderidoderiododeriodoo[48]
원어민조차 번역이 필요할 정도로 알아듣기 힘든 발음으로 악명높은 윈스턴 처칠의 대표적인 밈이다. 직접 들어보자.

6. 선거 이력

<rowcolor=#ffc224> 연도 선거 종류 선거구 소속 정당 득표수 (득표율) 당선 여부 비고
1899 영국 하원의원 보궐선거 올덤
11,477 (23.6%) 낙선 (3위) -
1900 영국 하원의원 선거 11,931 (25.3%) 당선 (2위) 초선
1906 맨체스터 노스 웨스트
5,639 (56.2%) 당선 (1위) 재선
1908 영국 하원의원 보궐선거 4,988 (46.7%) 낙선 (2위) -
던디 7,079 (43.9%) 당선 (1위) 3선
1910.01 영국 하원의원 선거 10,747 (34.1%) 4선
1910.12 9,240 (30.1%) 5선
1917 영국 하원의원 보궐선거 7,302 (78.2%) 6선
1918 영국 하원의원 선거 25,788 (37.5%) 7선
1922 [[국가자유당|
국가자유당
]]
20,466 (27.3%) 낙선 (4위) -
1923 레스터 웨스트
9,236 (30.2%) 낙선 (2위)
1924 영국 하원의원 보궐선거 웨스트민스터 [[입헌당|
입헌당
]]
8,144 (35.8%)
1924 영국 하원의원 선거 에핑 19,843 (58.9%) 당선 (1위) 8선
1929
23,972 (48.5%) 9선
1931 35,956 (63.8%) 10선
1935 34,849 (59.0%) 11선
1945 우드퍼드 27,688 (72.5%) 12선
1950 37,239 (59.6%) 13선
1951 40,938 (63.0%) 14선
1955 25,069 (73.0%) 15선
1959 24,815 (71.2%) 16선

7.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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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필 이런 험상궂은 표정으로 찍힌 것에는 재미있는 사연이 얽혀있는데, 사진작가유서프 카쉬[54]는 이 사진을 찍으면서 전쟁을 치르며 영국을 이끄는 그의 카리스마를 담아내려 했는데, 처칠이 도무지 입에서 시가를 놓지를 않자 참다 못해 처칠의 입에 문 시가를 손으로 쏙 잡아빼 버렸다고 한다. 이에 열받은 처칠은 얼굴을 잔뜩 찌푸렸는데, 바로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셔터에 담아낸 것이 바로 위의 사진이다.
파일:external/acurator.com/Karsh_Churchill_Smile.jpg}}}||
처칠은 사진을 찍은 후 잠깐 침묵하다가 굳은 표정을 풀면서 한 장 더 찍으라고 했고, 그렇게 웃으면서 찍은 사진이 바로 위의 사진이다.

그리고는 촬영 뒤 카쉬에게 악수를 청하며 "당신은 으르렁거리는 사자도 가만히 사진 찍게 할 수 있군." 이라고 했다고.[55] 이 때문에 이 사진은 사진사에서 굉장히 중요하게 다뤄지는 사진이 되었다. 처칠도 이 사진을 보고는 마음에 들어했다. 기분이 풀어졌는지 윗 사진과는 달리 후덕한 표정이다. 이중 첫 번째 사진은 2016년 9월부터 발행되어 현행권으로 유통 중인 영국 5파운드 폴리머 신권 뒷면의 처칠 경 사진으로 사용되었다. 영란은행 사이트 인증. 3D 지폐 이미지 드래그를 통해 뒷면을 확인할 수 있다.

2022년 8월 23일 캐나다 오타와의 페어몬트 샤토 로리에(Fairmont Château Laurier) 호텔에서 보관 중이던 위 사진이 도난(바꿔치기)당한 것이 발견되어 수사중이다.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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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Nancy Astor and Waldorf Astor.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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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Nancy_Astor_Viscountess_Astor.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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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시절의 낸시 애스터 1935년의 남편과 함께 1949년의 낸시 애스터

* 어느 날 여왕 엘리자베스 2세 앞에서 파티가 열렸는데 술을 많이 마신 처칠은 취해 있었다. 이 파티엔 영국 노동당의 베시 브래드록(Bessie Braddock)이라는 여성 국회의원도 참석했었다. 베시 브래드록은 영국 노동당 하원의원이자 여성, 어린이, 복지, 청소년 범죄 같은 사회적 문제에 대한 맹렬한 운동가로 "투쟁하는 베시"라는 별명을 갖고 있었다. 이 브래드록이 처칠을 망신 주려고 처칠에게 다가가서 모두에게 들리도록 "윈스턴, 당신은 완전히 술에 취하셨군요! 게다가 한술 더해, 당신은 역겹도록 취했어요"(Winston, you are drunk, and what's more you are disgustingly drunk.)라고 외쳤다. 그녀를 빤히 바라보던 처칠은 "베시 부인, 당신은 못생겼어요. 게다가 한술 더해, 당신은 역겹도록 못생겼지요. 그래도 난 내일 아침이 되면 술이 깨겠지만, 당신은 여전히 역겹도록 못생긴 그 얼굴 그대로일 거요("Bessie, my dear, you are ugly, and what's more, you are disgustingly ugly. But tomorrow I shall be sober and you will still be disgustingly ugly.")"라고 대꾸했다고 한다.[65]

* 팔불출이었는지 자기 사위를 굉장히 맘에 안 들어했다.[66] 이 때문에 사위는 장인어른에게 호감도를 올리려고 처칠을 '파파'라고 부르며 애교를 많이 부렸다.[67] 어느날 사위가 묻기를,
사위: 파파는 어느 정치인을 가장 존경하죠?
처칠: 무솔리니.
사위: 그 사람 파시스트잖아요?
처칠: 근데 지 사위도 총살시킨 놈이었거든.[68]

* 사후 그가 2차대전 당시 연설 때 사용하던 틀니가 경매에 나왔는데 한화 약 2,800만원에 달하는 가격에 낙찰됐다. 세계를 구한 이(齒)[69]

* 시가 같이 매우 좋아하던 기호품들에는 아주 환장을 해서, 2차대전 중에 처칠에게 보내는 물품에 대해 '독살 위험을 피하기 위한 최소한의 독검출 과정은 무시해도 좋으니 빨리 시가를 내 앞에 내놓으라!'고 했다. 그래서 당시 처칠의 식품담당 검사원은 많이 고생했다. 오죽하면 영국 본토 항공전 당시 그 급박한 상황에도, 단골 가게의 주인이 폭격 후에 "수상 각하께서 항상 즐기시는 물건은 안전합니다."라고 연락해줄 지경.

* 전람회에 작품을 냈다가 낙선한 화가가 어느 날 윈스턴 처칠을 만나 불평했다. 심사위원들이 작품을 제대로 볼 줄 모른다는 불평이었다. 화가는 "그림 한 장 그려본 적 없는 사람이 심사위원을 하고 있는 것 같다"고 했다. 처칠이 대답했다. "나는 이 나이가 되도록 달걀을 낳아본 적이 없네. 그래도 달걀이 싱싱한 것인지 상한 것인지 가려낼 능력은 있네. 평생 그림 한 장 그려본 적 없어도 심사위원을 하는 게 이상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아." 말을 먼저 꺼낸 화가는 난감한 표정이 되었다. 처칠이 덧붙였다. "어떤 심사위원이 보더라도 뽑힐 수 있는 그림을 그리도록 노력해보게나"라고. 사실 처칠은 전문 화가 수준의 풍경화를 그릴 정도로 뛰어난 그림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아돌프 히틀러의 그림도 경매에서 비싸게 팔리긴 하지만, 이건 예술성이 있어서라기보다 유명한 (악명높은) 사람이 그린 것이라 그런 것인 반면 처칠의 그림은 예술적으로도 높은 평가를 받는다. 피카소에게 "평생 그림으로도 충분히 먹고 살 만하다"는 평가를 받았으면 말 다했지 않은가.[70] 그래서 처칠의 그림은 여전히 경매에서 히틀러의 그림보다 더 비싸게 팔린다. 2021년에는 안젤리나 졸리가 소장하고 있던 윈스턴 처칠의 그림이 109억원에 낙찰되어 화제가 되기도 했다. # 1943년 카사블랑카 회담 직후 모로코마라케시를 그린 풍경화인데,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에게 생일 선물로 준 것이라고.

다만 인물화는 그리지 않았는데, 인물화도 그려보라는 주변의 권유에 "나무는 '나는 이렇게 생기지 않았다'고 불평하지 않는다"고 답했다고 한다.[71]

* 비슷하게 자동차 경연대회에 심사위원장으로 위촉된 적이 있다. 그런데 정말 멋지고 화려한 고급차가 아니고 평범한 승용차를 최우수 자동차로 뽑았다. 이에 한 고급차 소유주가 와서 "내 차가 더 멋지지 않으냐"고 따지자 "부인, 부인의 차 보닛을 열어보니 저 차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더럽더군요. 하지만 저 차는 엔진 구석구석까지 다 청소가 되어 있었습니다. 어느 차가 더 멋지겠습니까?"라고 답했다. 당연하지만 그 어떤 고급차라도 청소같은 기본적인 관리가 안 되어 있으면 똥차나 다름없다. 처칠은 그것을 제대로 지적한 것.

* 종군기자 시절 대한제국의 한성에 방문해 손탁호텔에 머무른 적이 있다는 도시전설이 있지만, 손탁호텔은 1902년 만들어졌고 처칠은 1900년에 이미 하원의원이었다.

* 그는 W.C를 매우 싫어했다. 화장실(water closet)을 싫어하는 게 아니라 자신의 머릿글자가 W.C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적들이 이걸 가지고 비아냥거린 게 많았다.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추축국들도 이 머릿글자를 가지고 각종 프로파간다 선전물을 만들기도 했다. 아래는 그 예시인 일본 제국의 선전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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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이렌 수트(Siren suit)를 개조하여 만든 '처칠 롬퍼(Churchill Romper)'라는 옷을 유행시킨 바 있다. 자세한 것은 롬퍼 참조.

* 2차대전 직후 등장한 영국 노동당애틀리 내각이 대기업의 국유화를 추진하자 처칠과 보수당은 여기에 반대하면서 의회에서는 격론이 벌어졌다. 그러다 휴식시간이 되자 의원들은 화장실로 몰렸는데, 애틀리 총리의 옆 변기에 자리가 있는데도 처칠은 굳이 다른 줄을 서서 볼일을 보았다. 그러자 애틀리가 처칠에게 물었다.
애틀리: "제 옆자리가 비었는데도 다른 줄을 서셨는데, 제 옆에 있기도 싫을 정도로 제가 싫으신 겁니까?"
처칠: "아니요. 그런 건 아닙니다."
에틀리: "그럼 왜 빈 자리를 두고 굳이 줄을 서신 거죠?"
처칠: "그야 총리께선 뭐든 큰 거만 보면 국유화하자고 달려들지 않소."
애틀리와 처칠의 관계는 정치적으로는 대립관계였지만, 사적으로는 서로의 장단점을 인정해주며 그럭저럭 괜찮았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게, 당장 전임 총리를 사퇴시키고 다음 총리로 처칠이 지명되기 좋은 환경을 조성해준게 애틀리였고, 처칠이 첫 전시내각을 꾸릴 때 함께 내각에 참여하기도 했으며 바로 이어서 총리를 한 것도 애틀리였다. 게다가 애틀리 본인도 행정업무에 대한 실력있는 능력자였고.

* 애주가로서 여러 이야기가 전한다.
* 위스키, 코냑, 샴페인 등 다양한 술을 즐겼다.
* "나는 알코올이 나에게서 가져간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알코올로부터 얻었다"(I have taken more from alcohol than it has taken from me)는 말을 남겼다.
* 위스키 애호가로서 특히 저가형 위스키를 좋아했다고 한다. 조니 워커 레드, 블랙, 발렌타인 파이니스트, 벨즈 등을 즐겼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조니워커 블랙라벨은 정물화의 소재로 삼은 적도 있다. 샴페인이나 시가는 비싼 것을 즐겼던 것을 보면, 서민 코스프레라기보다 저숙성 위스키의 맛을 선호했던 듯.
* 하이볼도 즐겼다. 당시에는 '위스키소다'라는 표현을 사용했으며, 기내식 메뉴판에 직접 위스키소다를 적어넣기도 했다. 비서에게는 도수를 매우 약하게 하라고 지시했는데, 위스키는 잔 바닥을 덮을 정도로만 넣고 나머지는 물을 채운 것이었다.[72] 처칠은 1896년 22살 때 수질이 좋지 못한 인도-아프간에 파견되었는데, 이때 위스키를 넣은 물을 배급받는 경험을 했다고. 반면 브랜디에는 물을 타지 않았다고 한다.
* 영국 전체가 물자 부족으로 식량을 배급해야 했던 2차 대전 전시 상황으로 인해 스카치 위스키 증류소들이 속속 문을 닫자, 스카치 위스키 생산을 위한 곡물을 공급하도록 농림부 장관에게 지시했다. 위스키는 숙성에 수년이 소요되며 귀중한 수출품이라는 이유에서였다. #
* 얄타 회담을 원활하게 진행하기 위해 스탈린은 자신이 좋아하는 아르메니안 브랜디 아라라트를 만찬석상에 가져갔는데, 처칠이 그 맛을 무척 마음에 들어하자 스탈린이 매일 마시라며 365병을 선물해준 일화가 있다. 스탈린이 주영 소련 대사관에 지시하여, 2차 대전이 끝나고 냉전 시대가 되어서도 처칠의 저택에 매달 아라라트 1상자(12병)가 배달되었다.[73] 처칠의 딸 사라에 따르면 처칠 사후에도 몇 년이나 계속 배달되었는데 그러다 드디어 누군가 그 업무를 재검토했는지 배달이 끊겼다고. # 야사에 따르면, 어느 해는 처칠이 '쓰레기 같은 술을 보내주었다'고 불평하여 스탈린이 확인해보니 아르메니아 농장의 기술자가 숙청되어 시베리아 광산에 유배되어 있었기에 이를 되돌렸다고도 한다.
* 그의 이름을 딴 '처칠 마티니' 칵테일도 있다. 칵테일 글라스에 드라이 진을 가득 따르고, 따지 않은 베르무트병(혹은 베르무트를 만든 프랑스 방향을 본다는 버전도 있다)을 쳐다보면서 마신다(말이 칵테일이지 그냥 진을 니트로 마시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이것은 유머에 가깝고 실제로는 처칠은 이나 마티니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Richard Langworth의 연구에 따르면, 처칠의 주류 목록에 진 자체가 없었고, 마티니 애호가인 루즈벨트의 백악관 행사에서 처칠이 마티니를 몰래 화분에 버리는 것이 목격된 적이 있다고.(...)
* 2차 대전 중에 처칠이 이라크 대사를 만났는데, 그때 그는 대사에게 술을 권했다고 한다. 이에 대사가 "저는 이슬람교를 믿으므로 술을 마실 수 없습니다"라고 하자 "세상에 이럴 수가. 오 하느님, 예수님, 아니 알라여!"라고 부르짖었다고 한다.

* 처칠이 연설 문제로 택시를 타려고 했더니 택시 기사가 승차를 거부했다. 불쾌해진 처칠이 이유를 묻자, 기사는 "이제 곧 처칠 총리의 라디오 연설이 있어서요. 그걸 들으려고 하거든요."라고 답했다. 처칠은 기분이 좋아져서 1파운드를 그냥 건네줬는데, 기사가 힘껏 소리쳤다. "손님, 그냥 타세요. 처칠인지 뭔 놈인지 몰라도 역시 돈이 먼저네요." 이미 준 돈을 돌려달라고 할 수도 없고, 그 꼴로 우거지상이 된 처칠은 그 택시를 타고 의회에서 내리면서 택시 기사에게 "라디오만 듣지 말고 처칠 얼굴이나 좀 알아두시오!"라고 불쾌하게 소리쳤다고 한다.[74]

* 세계적인 극작가였던 조지 버나드 쇼가 처칠에게 연극표 2장을 건네며 "제 연극에 초대합니다. 혹시라도 동행하실 친구 분이 계시다면 함께 오십시오."라고 말했다. 이에 처칠은 "첫날은 바쁜 사정으로 어려우니 다음 날 가지요. 연극이 하루만에 끝나지 않는다면 말입니다." 라고 응수했다. 해석하자면, 쇼는 처칠에게 '당신은 동행할 친구조차 하나 없는 외톨이 아닙니까?' 라고 비꼰 것이고, 처칠은 '그러는 당신은 첫 공연 올리자마자 망할 형편없는 글쟁이 아니오?' 라고 받아친 것[75]. 다만 조지 버나드 쇼 문서에 따르면, 이 일화가 처음 알려졌을 때 주인공들은 버나드 쇼와 처칠이 아니라, 처칠의 아들인 랜돌프 처칠과 노엘 카워드(Noel Coward)였다고 하니 실화인지는 불분명하다.

* 2차대전 말기, 독일이 패전 직전까지 내몰리며 대서양 전투가 끝나가고 해군력에 여유가 생기자, 처칠은 일본에 아시아 함대가 탈탈 털리고 홍콩싱가포르를 손쉽게 내주며 무너진 대영제국의 자존심을 찾기 위해 태평양에 해군 함대를 보내려고 했다. 그러나 4년 내내 홀로 일본과 싸운 미 해군 태평양 함대 입장에선 다 된 밥에 숟가락만 얹으려는 꼴이라 눈총을 받았고 어니스트 킹을 중심으로 극렬한 반대를 받았다.[76] 그러던 어느 날, 연합군 수뇌부가 모여 앞으로의 전쟁 수행계획을 논의할 때 이 문제가 거론되었다. 킹 제독은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며 영국 함대의 파견을 거부하고 있었는데, 처칠이 갑자기 다짜고짜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에게 "대통령 각하! 영국 함대를 태평양으로 보내고자 하는데 찬성하시지요?"라고 몰아붙였고, 루스벨트가 그 자리에서 OK! 해버림으로서 영국 해군은 태평양에 파견될 수 있었다.

* 처칠은 노벨문학상을 받은 것에서 짐작할 수 있는 것처럼, 글에 상당히 민감했다. 본래 종군기자 출신이었던 처칠은 문법규칙에 까다로웠고,[77] 자기 글에 편집자들이 손대는 꼴을 못 봤다. 앞에서 언급된 명언들은 대부분 연설문에 포함되어 있는데, 처칠은 이 연설문을 완성하기 위해서 몇 주나 투자하면서 교정을 봤다. 그래서 어느 편집자가 처칠의 문장에서 전치사로 끝나는 부분을 발견하고는 바꿔놓은 적이 있었다. 이에 대해서 처칠은 그 즉시 'This is the kind of impertinence up with which I shall not put.'이라는 항의서한을 보내 질책했다고 한다. 가끔 치사(preposition)의 의미를 과잉해석하여 전치사로 문장을 끝내면 안 된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는데[78], 이것을 희화화하는 문장을 답신으로 보냈다. 설명하자면 원래 문장은 '(생략) impertinence which I shall not put up with.'(참을 수 없는 무례)인데 여기서 억지로 전치사 2개(up with)를 통째로 which 앞로 보내서 '~ up with which ~' 를 만들었다. 전치사 2개를 통째로 관계대명사 앞으로 보내는 일은 거의 없기 때문에, 영어권 화자에게는 상당히 어색하게 들린다. 이는 내용상으로 편집자를 디스하는 동시에, 문장 구조적으로 무조건 문장 말미의 전치사를 제거하는 게 능사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 그리고 이와 관련해서 전쟁 중에 정보국장이 단어 하나 잘못 사용했다고 해서 지적한 사례가 존재하는데, 사실 이건 지적할 만한 사례였다. 왜냐하면 문제의 단어가 'intense'를 사용할 자리에 'intensive'를 사용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intense는 원래 크거나 강대하고 혹독하다는 의미이고, intensive는 작정해서 끌어모아서 세졌다는 의미이다. 어느 지역의 적 부대가 intense하면 강병이 배치되어 있다는 거고, intensive하면 적이 병력을 집중시켰다는 의미가 되어서 전시 기준으로는 의미가 천양지차이다. 군 정보국장이 이런 식으로 단어 섞어쓰면 까이는 게 당연하다. 이와 비슷한 사례를 들자면 발라클라바 전투가 있겠다.

* 처칠은 죽을 때까지 자신이 노벨평화상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인지 1953년 노벨상을 수상하게 되었다는 말에 기뻐하면서 "노벨평화상이겠지?" 말했다가 측근들이 "아뇨, 노벨문학상을 받게 되었습니다"라고 대답한 말에 엄청 실망한 얼굴을 하고 말 없이 담배를 피웠다고 한다.[79] #

* 고양이를 무척 좋아했기에 처칠과 고양이에 대한 이야기도 많다. 오래 살았고 집도 부유한 편이라서 여러 마리를 키웠는데 넬슨,[80] (이 고양인 이름을 안 지어줘서 그냥 캣으로 부름), 벤저민, 스튜어트 같은 이름을 지어주면서 모두 아꼈다. 늘그막에도 조크라는 고양이를 아꼈는데 죽기 얼마 전 찍은 사진에 같이 나온 고양이가 바로 조크이다. 조크는 처칠이 죽은 뒤에 처칠 유족들이 키우면서 1974년까지 살았는데, 지금도 조크의 후손들이 조크 2, 3, 4세로 불리면서 계속 처칠의 집에서 대를 이어 살고 있다고 한다.

* 윈스턴 처칠 총리가 전용차를 타고 영국 국회의사당을 향해 가고 있었다. 교통은 막히고 회의시간은 임박했다. 처칠은 마음이 조급해져서 운전사를 재촉했다. "여보게, 회의에 늦겠는데, 좀 더 빨리 달릴 수 없겠나?" "예. 저도 지금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요." 운전사도 마음이 급해졌다. 순간 교통경찰이 처칠이 탄 차를 정지시켰다. 다급한 나머지 운전사가 신호를 위반하고 달렸기 때문이다. 교통경찰이 딱지를 떼려 하자 운전사가 "지금 이 차에는 총리 각하가 타고 계시다네. 회의시간이 임박해서 그러니, 어서 보내주게나!"라고 말했다. 그러자 교통경찰은 "총리와 비슷하기는 하지만, 법을 지키지 않는 것으로 봐서는 총리와 비슷하지는 않군요. 거짓말하지 마십시오! 이 나라의 법질서를 책임지고 있는 총리의 차가 교통신호를 어겼을 리가 없습니다. 게다가 총리의 이름을 함부로 들먹이다니, 당신에게는 위증죄까지 추가해야겠군요. 그리고 아무리 총리가 타고 있는 차라고 해도, 교통신호를 위반했다면 당연히 딱지를 떼어야 합니다. 그 누구도 예외는 있을 수 없습니다. 어서 면허증을 내놓고, 내일 당장 경찰서로 출두하시오!" 그렇게 운전사는 교통신호 위반딱지를 떼였으나, 처칠은 기분이 너무도 좋았다. 저런 꿋꿋한 경찰관이 영국의 민주주의를 지켜주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회의가 끝나자마자 처칠은 런던 광역경찰청장에게 유쾌한 목소리로 전화를 걸었다. "광역경찰청장인가? 나 처칠인데, 오늘 이러저러한 일이 있었으니, 그 모범적인 교통경찰을 1계급 특진시켜 주게나!" 수화기를 통해 전해들은 런던 광역경찰청장의 대답은 "죄송합니다, 총리 각하. 런던광역경찰청의 내규에는 '교통법규를 위반한 사람에게 딱지를 뗀 교통경찰을 1계급 특진시켜 주라'는 조항은 없습니다"라는 것이었다. 처칠은 그날 런던의 경찰들에게 2번 당했지만, 자신이 영국 총리임이 한없이 자랑스러웠다. 이 내용은 처칠 말고 다른 사람으로 나오는 버전도 많다.

* 당시 있는 집 사람들은 아이를 유모에게 맡겨 기르게 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 때문에 자식들은 친부모보다 유모를 더 가깝게 느끼는 경우가 종종 발생했다. 처칠 역시 물리적인 거리가 매우 멀었던 친어머니보다는 20대 시절까지 곁에 지내면서 자신을 보필해준 유모 엘리자베스 에버레스트(Elizabeth Everest)를 어머니처럼 사랑하며 따랐다. 그래서 친어머니의 죽음보다 유모의 죽음에 더 큰 충격을 받았으며, 이후 오랫동안 사비를 털어 유모의 무덤을 관리했다고 전해진다. 엘리자베스는 처칠의 남동생 잭도 돌봤다.

* 전후 "2차대전 승리의 원인에 어떤 것이 있냐"는 질문에 앨런 튜링을 지목하기도 했다. 영화 이미테이션 게임에도 나오는 일화지만, 당시 암호병학교에서 이니그마 해독방식의 견해가 달라 동료들과 융합되지 못하던 앨런 튜링에게 편지를 받은 뒤, 그를 팀장으로 지목해 해독연구를 지원해주었다. 근데 네이버 캐스트에 의하면 자서전엔 튜링에 대해서 언급도 안 했다고 한다. 말년 불우했던 앨런 튜링의 행적 때문인 듯하다. 자세한 사항은 문서 참고.

* 노르망디 상륙 작전 때 처칠은 상륙부대와 함께 작전에 참가하려 했다. 주위 사람들이 "일국의 총리가 전선에 뛰어드는 것은 말도 안 된다"며 만류하려 했지만, 처칠은 고집을 꺾으려 들지 않았다. 결국 처칠의 고집을 꺾은 사람이 나타났는데 국왕인 조지 6세였다. 그런데 고집을 꺾은 방법이란 게 기상천외하다. "처칠 총리가 상륙전에 참가하겠다는데, 대신 짐이 국왕으로서 상륙하겠소. 공격 당일 가장 먼저 상륙하는 부대의 장병들과 짐이 함께할 것이오."라고 말해버렸다. 처칠이 말도 안 된다며 만류하자 "짐이 전사하면 다른 사람이 대신할 수 있지만, 처칠 총리는 그렇지 못하오."라고 말한다. 결국 처칠은 상륙전 참가를 없던 일로 했다는 이야기다.

*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만들어진 파웰과 프레스버거블림프 대령의 삶과 죽음라는 영화를 싫어했다. 원래 이 영화는 처칠 세대의 군인들을 희화화하고 있는 만화를 원작으로 삼고 있어서 처칠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는데[81], 영화판 내용도 단순한 선전 영화가 아니어서 '자랑스러운 영국군을 희화화하고 독일군을 미화하는 영화'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결국 처칠은 부하를 시켜서 영화 제작을 중단시키려고 했지만 실패하고[82] 개봉 연기하는 것으로 마무리지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영화는 훗날 영화 평론가들에게 최고의 영국 영화로 꼽힌다.

* 미국에 갔을 때 교통사고를 당한 적이 있다. 도로를 건너야 되어서 습관대로 오른쪽에서 차가 오지 않는 것을 확인하고 건넜지만 안타깝게도 미국은 우측통행 국가였다. 크게 다친 처칠은 미국에서 몇 개월 입원해야 됐는데 당시 미국은 금주법을 시행하던 시절이라 그의 필수품인 술을 마실 수가 없었다. 하지만 금주법조차도 애주가인 그의 의지를 꺾지 못했던지라, 의료용으로 사용하는 위스키를 처방받는 편법으로 술을 마셨다고 한다. 위에 언급된 대체역사물 설정집 만약에에 첨부된 설정 중 이 교통사고로 처칠이 죽는 바람에 후일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영국이 패한다는 설정이 있다.

* 처칠의 자서전 '폭풍의 한가운데'에도 수록된 일화가 있다.
1911년, 시내 한복판에서 시드니가 총격사건이 벌어졌다. 당시는 아직 1차 세계대전도 일어나기 전이라 이런 총격사건은 매우 드문 일이었고, 이에 많은 사람들이 구경하러 주변에서 서성거렸다. 사건 자체도 군 병력이 대포를 가지고 출동하기도 하는등 상당히 규모가 컸다. 당시 내무대신이었던 처칠도 일행과 함께 사건 구경을 했는데, 당시 출동 인력들에게 지시를 하는 등 직접 참견도 했다. 이때 경찰들 무리 사이에서 구경하는 장면이 사진으로 찍혔다. 이로 인해 사건 이후 많은 비난을 받았다. 책에도 적혀있지만, 가장 인상깊게 남은 비난은 '사진기자가 거기 있는 건 알겠는데, 거기에 내무대신은 왜 있냐?'는 것이었다.

* 상술했다시피 영국의 전시지도자로서 불후의 명언들을 다수 남긴 바 있지만, 정작 그 명언들을 말할 때의 발음은 많이 좋지 못했고 상당히 굴려서 말하는 편이었다. 2021년 하반기 들어서는 윗 문단의 “그거이패하에정부으겨리.(IwbnfouevcmsiehwvudbqvGovernment.) ”[해석]같은 주옥같은 명언들이 발굴되어 으로 유행할 정도.

* 자신의 경호원인 톰슨 경위와 다우닝가 10번지로 걸어가는데 앞에서 가던 신문팔이 소년이 휘파람을 불자 평소 휘파람에 대해 굉장한 불쾌감을 가지고 있던 처칠은[84] 소년과 가까워지자 대뜸 "휘파람 불지 말라"고 호통을 쳤다. 이에 소년이 왜냐고 묻자 "내가 싫어하니까"라고 당당하게 이야기했다고. 하지만 이에 쫄지 않은 소년이 "그럼 귀를 막으면 되잖아요?"라고 받아친 후 사라지자 처칠의 얼굴은 금세 분노로 빨개졌지만 곧 소년이 한 말을 따라하며 크게 웃어제꼈다고 한다.

* 어린 시절에 몸이 굉장히 허약했으며 그 후에도 지병으로 고생한데다 시가 없이는 못 견디는 굉장한 애연가였음에도 90대까지 살았다. 21세기에도 남자의 평균 수명이 80세를 넘을까말까인 판에 그 당시로써는 굉장히 오래 산 것으로, 관리만 잘 했으면 그 옛날에 100세 가까이 살았을지도 모를 굉장한 장수인이다. 그 때문에 담배회사들에게는 본의 아니게 힘이 되었다고 한다.

* 주식투자에 도전한 적이 있다. 처칠이 주식판에 뛰어든 시기는 그가 재무장관 임기를 막 끝내고 난 뒤 월가에 방문한 직후였던 1929년이었다. 그러나 하필 그때는 전세계적으로 대공황이 터지기 직전이었고, 당연히 처칠은 월가에서 받았던 강연료 2만 달러는 물론 그 외의 많은 돈을 전부 잃고 말았다.

* 올리버 크롬웰을 꽤 존경했다고 한다.

* 드라큘라의 작가 브램 스토커인터뷰한 적이 있다.

* 처칠은 자신의 우울증검은 개(black dog)라 불렀으며 (영국의 락 밴드 레드 제플린이 이 제목으로 곡을 썼다.), 이 우울증을 완화하기 위해서 그림을 시작했다. "천국에 가서 첫 백만 년 동안은 그림만 그리고 싶다."고 했을 정도로 그림은 그의 우울증을 덜어주는 데 기여했지만, 그럼에도 죽을 때까지 우울증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다. 이게 어느 정도의 중증이었냐면 처칠은 평생 발코니나 기차역의 철로 가까이에 가지 않았다. 자기도 모르게 뛰어내릴까 봐. 또한 매 순간 강렬하게 느껴지는 좌절감과 죽고 싶은 충동을 자신의 이성만으로 이겨내야 했다고 한다. 여하튼 양극성 장애인지라, 조울증도 있었다. 그의 조증 때 벌어지는 삽화들[85]로 인해 당시 사람들은 그 어두운 시간을 견뎌내야 했다. 대부분의 정신질환은 유전되기도 한다는 사실 때문인지, 그의 네 자식들 중 두 명도 알코올 의존증으로 죽거나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86]

* 역덕들에게는 판도학을 모르는 테러범 취급을 받는데, 이유는 이 양반이 제시한 독일 분할안 계획 때문이다. 그냥 직접 보자.
파일:처칠 계획.png
(사진의 인물은 처칠의 외손자인 귀족원 의원 니콜라스 솜스 경Sir Nicholas Soames이다. # 유전자 어디 안 간다)[91]

8. 대중매체에서

8.1.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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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 드라마

8.3. 소설

8.4. 만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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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 게임

9. 관련 링크

처칠과 관련된 문서는 너무 많으므로, 나무위키의 여백이 부족해서 기재할 수가 없다. 20세기 초중반의 역사는 처칠을 빼놓고 설명할 수 없다. 요르단의 국경이 이상하게 삐뚤어진 게 처칠이 국경선을 긋다가 딸꾹질을 해버리는 통에 구부러진 거라는 농담도 있을 정도다. 그래서 저 국경선에 붙은 별명이 '윈스턴의 딸꾹질(Winston's hiccup)'.

잘 모르는 사람들이 많지만, 대한민국의 전 대통령 김영삼과 유사한 점들이 매우 많다. 우선 자연인으로서의 프로필만 보더라도, 두 사람 다 유복한 집안 출신이며, 키가 168cm에, 체중 또한 62kg이랑 63kg으로 거의 비슷하다. 둘다 각각 보어 전쟁6.25 전쟁에 참전한 참전용사들이며, 결혼했을 당시 아내의 나이도 23살, 22살로 거의 비슷하며, 아내와 총 5명의 자식을 낳았다는 점에도 동일하다. 성격적으로 보더라도 둘 다 배포와 통이 크고, 한량아적 인배와 유머 감각, 다혈질이라는 점도 매우 유사하다. 정치인으로서 볼 경우, 두 사람 모두 보수주의 정당 소속으로 정계에 입문하여, 자유주의 정당으로 옮겨가서 활동했다가, 다시 보수주의 성향의 여당으로 돌아와서 만 66세에 정부수반의 자리에 오른다. 자유주의 정당에서 활동한 이력 때문인지, 두 사람 모두 보수정당 내 온건파라고 할 수 있는 자유보수주의, 보수자유주의 성향이라는 것도 유사하다. 또 소속 정당 내 소수파로서, 각각 당 내 다수파인 화독파, 민정계와 대립했다. 심지어 처칠과 김영삼이 대립했던 당 내 다수파인 화독파와 민정계 또한 각각 국가주의, 군국주의성향을 띠는 정치세력집권한 나라에 유화적인 정치세력, 그리고 본인들부터가 국가주의, 군국주의적 성향을 가진 정치세력이라는 점에서 연계되는 부분이 있다. 또 극우의 입김이 강한 이웃 나라에 대해 매우 강경했다는 것도 유사하다. 정부수반으로서의 첫[101] 임기가 5년 정도였다는 것도 동일하고, 심지어 정부수반으로 취임하고 5년 후에 치러진 정부수반 선출 선거에서 승리한 제1야당이 처음으로 집권에 성공했다는 점도 동일하다. 또 사후에는 자국 경제를 살린 강경보수 성향의 지도자와 함께 자국 보수 우파 진영의 양대 어른으로 존경받고 있다는 점도 동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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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같이 보기: BBC 선정 최악의 영국인, 위대한 인물 시리즈 }}}}}}}}}


[1] 1946년 메리트 훈장 수훈[2] 1922년 컴패니언 오브 아너 수훈[3] 국립국어원의 외래어 표기 용례상 붙임표로 이어진 인명 등의 경우, 여러 요소가 하나의 단어를 이루는 복합어로 보고, 한글로 표기할 때에는 붙여 적는 것어야 한다.[명예시민권] 1963년 4월 9일, 존 F. 케네디 당시 미국 대통령이 명예 미국 시민권을 부여했다. #[5] 가터 기사에 서훈되었기 때문에 'Sir'이 붙어서 한국에서는 끝에 '경'을 붙인다. 사실 Lord와 Sir은 같은 "경"으로 번역되어도 격이 다르긴 하지만. 영국 귀족임에도 '로드'가 아닌 '서'가 붙은 이유는 당시 윈스턴 처칠은 말버러 공작의 직계와는 좀 떨어져 있었기 때문. 사촌형이 공작 작위를 계승했다. 그의 아버지 랜돌프 처칠은 말버러 공작의 셋째 아들이라서 기사 작위를 받았을 때 Lord가 붙었다. 실제로 둘째 형은 요절했기 때문에 실질적인 둘째였다.[6] 조지 6세가 도버 공작, 엘리자베스 2세가 런던 공작 작위를 수여하려 했으나 모두 사양했다.[7] 출처[8] 출처[9] 처칠은 본래 성공회 신자였고, 어렸을 적 저교회적 성향을 갖고 있던 유모의 영향을 크게 받았었다. 그러나 청년기에 접어들면서 처칠은 불가지론자로 변하게 된다. 다만 중년기 및 총리 시절의 처칠이 기독교적인 발언을 남긴 적이 있기 때문에, 말년에도 그가 불가지론자였는지는 장담할 수 없다. 기독교적인 종교관과 불가지론적인 사상을 복합적으로 지닌 채로 생애 전반을 보낸 것으로 추정된다.[10] 처칠의 대중적 인지도에 버금가는 역사적 영국 총리는 그나마 마거릿 대처토니 블레어 정도이다.[11] 평생 동안 백인이 아닌 민족들에 대해 수많은 인종차별적 발언을 일삼은 기록들이 현재까지 남아있으며, 이는 처칠의 평가를 상당히 깎아먹는 요인이 되고 있다. 그는 사석에서 인도 제국 장관 레오 아메리에게 "인도인들이 토끼처럼 번식한다"는 말을 한 적도 있었다고 한다.[12] 한국을 포함해 해외에서도 '짖는 개를 볼때마다 멈추면 원하는 곳에 가지 못한다'고 알려진 명언이나 원문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명백히 잘못된 표현이다. 처칠은 분명히 앞에 "누군가 그러더군요(As someone said)"라는 말을 덧붙였다. 즉 영국에선 관용구처럼 쓰이는 말일 확률이 높다.[13] 출처 : Richard M. Langworth, <Churchill by Himself: In His Own Words>, RosettaBook, 2013, p.579[14] 제2차 세계 대전이 한창이던 1941년, 당시 수상이었던 처칠은 이튼과 함께 영국의 2대 명문 고등학교이자 자신의 모교인 해로우 고등학교 졸업식 연설을 하기로 되어 있어 연설문을 준비해 왔다. 그런데 전시인 상황이다 보니 갑자기 급한 사정이 생겨 금방 가야 하는 상황에 처해 연설할 시간이 없다는 보좌관들의 전언이 오자, 처칠은 연단에 올라 이 말만을 남기고 떠났다. 이는 후일 사람들에게 처칠 자신이 2차 세계 대전의 승리를 절대 포기하지 않겠다는 의지로 비춰지기도 한다. 학생들은 처음에는 어리둥절했으나 이내 처칠의 뜻을 이해한 청중들의 박수갈채와 함성이 쏟아지기 시작했고, 처칠이 떠난 뒤에도 그 소리가 멈추지 않았다고 한다. 인생에 꼭 필요한 교훈이 반드시 길 필요는 없다는 것을 잘 보여주는 절대적인 명언.[15] 대한민국 육군 제7보병사단이 한때 당시 사단장이 이 구호에 심취하여 "절대 절대 포기하지 말자!"는 슬로건을 두르고 다닌 시기가 있다.[16] 후술한 영국 5파운드 지폐에 적혀 있는 글귀다.[17] 연설문 사이트에는 "그것은 승리입니다(It is victory)"라고 적혀있지만 실제 녹음된 연설에서는 단 한 마디, "승리(Victory)."라고만 말한다.[18] 연설 원문전문 번역현재 비공개 처리됨[19] 전장의 무대를 프랑스, 바다, 하늘, 해변, 상륙지점, 들판과 거리, 언덕으로 옮겨가며 설령 영국이 계속 패배해서 독일군이 영국본토에 상륙하더라도 항복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드러내고 있다. 여기서는 생략되었으나, 뒤에 자신은 그럴 가능성은 믿지 않으나, 만에 하나 영국본토가 점령되더라도, 대영제국의 식민지에서 함대와 함께 계속해서 항전할 것이라고 말한다. 그 비장미로 인해서 굉장히 많이 회자되는 연설이다.[20] 처칠의 가장 유명한 연설 중 하나로, "We shall fight on the beaches"가 특히 유명하며 보통 이 부분으로 연설 전체를 지칭한다. 절대로 항복하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명이자 섬나라라는 영국의 정체성을 극명하게 드러내는 문장이어서 서양의 각종 매체나 방송 등에서 엄청나게 많이 패러디되었다. 예를 들어 그룹 아이언 메이든의 곡 'Aces High'의 앞부분에도 나오며 영화 《로빈 후드》의 해변전투 장면은 대놓고 이 연설에서 가져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21] 연설 전문 Demobilisation[22] 연설문 출처[23] 영국 본토 항공전을 다룬 게임의 제목 their finest hour, 콜 오브 듀티 1기반의 콘솔 스핀오프 콜 오브 듀티: 파이네스트 아워, Hearts of Iron III의 DLC인 their finest hour가 여기서 유래한다. 또한 문명 5의 평등 계열 사회 제도에서 도시의 방어력을 올려주는 사회 제도와 엑스컴: 롱 워의 공중전에 보너스를 주는 영국 스타팅 보너스가 여기서 이름을 땄다.[24] 그를 다룬 영화 다키스트 아워의 마지막 스크롤에도 인용됐다.[25] 연설문 출처[26] 참고로 이 연설을 들은 조종사들의 반응은 "드디어 우리 월급이 올라가는구나! 올려주실 셈이군"였다고 한다.[27] "좋았어! 이 전쟁은 이겼다!"라고 말했다는 야사도 있다.[28] 얄타 회담 후, 스탈린에게 양보했다는 비난을 받자 1945년 2월 23일에 각료들 앞에서 한 말이 원본이다.[29] 연설문 출처[30] 현재는 모든 분야에서 관용구처럼 쓰이는 'ㅇㅇ의 장막'이라는 말이 여기서 비롯되었다. 처칠이 이 표현을 대중화 시킨 셈이다. 역시 영문법과 전치사의 마술사[31] 연설문 출처[32] 출처 : Winston Curchill, <The Second World War, Volume I : The Gathering Storm>[33] 베버리지 보고서를 기준으로 평소 복지국가 수립을 강하게 주장하던 처칠의 생각을 함축시킨 연설로 유명하다. 이는 후일 영국의 복지에 척도가 되기도 하는데, 처칠의 먼 후임인 마거릿 대처 수상이 교육장관 시절 영국의 무상 우유 배식을 폐지하려하자 '우유도둑'이라고 비판받은 바 있다. 그래서 마가렛 대처도 "우유 배식 중단은 하지 말았어야 했다" 라면서 후회했다고 한다.[34] 말 자체는 이전부터 많은 명사들에 의해 언급되었던 것.[35] 출처 : Harold Begbie와의 대화에서, Master Workers, Begbie, Methuen & Co. (1906), p. 177[36] 스탈린은 테헤란에서 처칠을 만났을 때 "하느님이 당신의 편이라고? 그가 보수당원인가? 악마는 나의 편이지. 그는 훌륭한 공산주의자야."라고 말한 바 있다.[37] Andrew Nagorski in The Greatest Battle (2007), Simon & Schuster[38] 처칠은 젊은 시절 인도에서 군 생활을 할 때 전투에 참여한 적이 있는데, 그때 적군이 처칠 한 명을 노리고 집중사격을 했지만 한 발도 안 맞고 빠져나온 적이 있다.[39] 영국의 더비 스테이크스(엡섬 더비)는 전세계 경마계의 대상경주 중에서 가장 권위있는 대회이며, 각 경주마 한마리당 평생 단 한번의 기회만 주어지기 때문에 다시 참가하려면 새로운 말을 육성해야 해서 웬만한 귀족이나 왕족조차도 자신의 말로 우승하지 못하는 경우가 부지기수였다. 2022년 9월 8일에 서거한 엘리자베스 2세 여왕조차도 반세기가 넘도록 자신의 소유마로 더비에 도전했지만 끝내 우승하지 못했다.[40] 1947년 11월 11일 하원 연설에서 한 말로 알려져 있으나 정확히 알려진 바 없다. 처칠이 했다는 기록도 없을 뿐더러 그나마 가장 근접한 발언조차 인용문이다. 즉, 처칠도 다른 곳에서 본 문장을 그대로 인용한 것이며 그 문장이 처칠의 말로 잘못 알려진것이다.[41] 현재 남아있는 가장 유사한 기록은 다음과 같다. "(중략) 익히 알려진 것처럼 민주주의는 기존에 시도되었던 다른 모든 정치 체제들을 제외한 나머지 중 가장 최악의 정치체제이다." "Many forms of Government have been tried, and will be tried in this world of sin and woe. No one pretends that democracy is perfect or all-wise. 'Indeed it has been said' that democracy is the worst form of Government except for all those other forms that have been tried from time to time." 민주주의도 훌륭한 정치체제라고는 할 수 없지만 적어도 그 이전의 정치체제보다는 나으니까 채용한다는 의미.[42] 출처 : Richard M. Langworth, <Churchill by Himself: In His Own Words>, RosettaBook, 2013, p.574[43] 처칠은 1908년 우연한 기회에 폴 로저 샴페인을 마신 후 샴페인 신봉자가 되었고, 9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로메오 이 훌리에타 시가와 폴 로저 샴페인은 처칠의 곁을 함께 지킨 것으로 유명하다.[44] 실제로 처칠은 동물을 무척 좋아해 개, 고양이, 돼지, 거위, 말들을 모두 키웠다.[45] 처칠이 이 말을 했다는 공식적인 기록은 없고 사위가 1981년 4월 28일에 열린 귀족 사교 모임인 <The Reform Club>에서 처칠을 회고하며 인용했던 말이다.[46] Martin Gilbert, <Winston S. Churchil l: Never Despair, 1945–1965>, 1988, p.304[47] 문명 6/과학 기술 중 목축업 업그레이드 완료 인용문으로 나오기도 한다.[48] # 번역 : At any rate, that is what we are going to try to do.(어쨌든, 그것은 우리가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49] 사실 영국인들은 저런 식의 괴악한 패러디를 상당히 즐긴다. 처칠의 얼굴을 불독에 합성한 전시 포스터까지 정부의 지하벙커에 붙여 놓을 정도였다. 심지어 영국 시민들은 불독처럼 매우 듬직하다는 이유로 그 포스터를 엄청 좋아했다는 말까지 있다.[50] 한편으로 이 선전은 오히려 괴벨스가 영국을 자만하고 방심하게 만들어서 국가 방어에 집중하지 못게 하려는 목적의 선전이었다는 평도 있는데 만약 이게 사실이라면 괴벨스는 영국의 애국심을 역이용해 허를 찌르려 했던 셈이다. 괴벨스는 이 사건을 비롯한 여러 선동 사건으로 영국에서의 인식이 크게 나빠져 몇몇 건에서는 그의 앙숙이었던 요아힘 폰 리벤트로프가 대영 선전을 대신하기도 했다.[51] 슈트레제만, 아인슈타인등 특히 영미와 독일에서 인기가 많았다. 조합이 블랙타이처럼 국룰(...)이 따로 있어서 미국에서는 스트롤러, 독일에서는 자주입고 다니던 위의 인물의 이름에서 따와 슈트레제만이라 부른다. 셋은 대동소이 하나 스트롤러는 밝은색 조끼를 주로 매칭했고 슈트레제만은 바지의 줄무늬 종류가 지정되어있다. 모닝코트과 동일하게 조끼에 슬립이라고하는 탈착식 백색 장식테두리를 한다.[52] 사실 동시대 사람들 중 진짜로 일부러 이미지 형성과 관리에 신경쓴 사람은 처칠보다는 차라리 제2차 세계 대전 당시의 연합군 사령관인 더글러스 맥아더다. 본래 맥아더도 명문가 출신이어서 고급 파이프를 주로 썼는데 어느 날 예비용으로 쓰던 옥수수 파이프를 피는 사진이 유명해지자 기자들 앞에서는 옥수수 쩐내를 참고 옥수수 파이프만 썼다.[53] 당시에 저격수는 얍삽하게 뒤에서 치는 비겁자라는 인식이 있었다. 되레 영국 국민들은 저 사진을 보고 했던 말이 '간지난다(cool!)'였다.[54] 처칠과 사진을 찍을 당시에 처칠은 "자네는 사람을 괴롭히는 데에 소질이 있군. 그럼 욕 먹고 오래 못 살 거야." 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런데 카쉬는 보다시피 (한 세대 차이는 있지만) 향년 94세로 처칠보다 더 오래 살았다. 욕 먹어서 오래 산거다[55] 참고로 위의 정색하고 있는 사진의 제목은 '으르렁거리는 사자(Roaring Lion)'다.[56] 대표적인 예가 샌드허스트 사관학교 재학 시절 사진인데 딱 봐도 상당히 미남인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탈모가 너무 빨리 오는 바람에 얼마 안 되어 머리가 빠지기 시작해서 미남이었던 때는 순식간에 지나가버렸다.[57] 처칠과 비슷하게 입에 시가를 달고 다닌 동시대 유명인으로 정신분석학의 창시자 지그문트 프로이트가 있다. 프로이트는 하루에 20개 이상의 시가를 피웠고, 그로 인한 구강암 진단을 받았음에도 아랑곳않고 피워댔다. 결국 30차례가 넘는 수술을 받았으나 더 이상의 치료가 의미가 없다고 여겨 주치의인 슈어 박사에게 안락사를 부탁했다. 슈어 박사는 그것에 동의해 프로이트에게 다량의 아편을 주사했고, 프로이트는 그렇게 세상을 떠났다. 다만 프로이트도 처칠만큼은 아니지만 그렇게 시가를 피우고도 83세라는 나이에 세상을 떠났는데 그 당시의 평균 수명을 고려하면 충분히 오래 산 편이다. 시가 애호가로 소문 난 사람 중에 장수한 인물들이 꽤 되는데, 시가의 해로움을 이겨내고(...) 오래오래 살며 무진장 피워대는 사람들이 깊은 인상을 남기기 때문이지 시가가 건강에 해롭지 않은 건 아니다.[58] HMS 애진코트, HMS 에린[59] 맥심 기관총이 맹위를 떨쳐 일방적인 학살이 일어난 것으로 회자되는 1898년 옴두르만 전투에서 있었던 일이다. 당시 처칠은 21창기병 연대 소속 중위이자 종군기자, 요즘으로 치면 특파원으로서 참전했다. 21창기병 연대는 언덕 위에 있는 소규모 부대를 발견하고 공격했다가 그 뒤에서 대기하던 부대에 포위당해 연대원 약 400명 가운데 20여 명이 전사하고 50여 명이 부상당했으며 말은 100필이 넘게 손실되었다고 한다.[60] 1926년 영국 총파업일 확률이 높다.[61] 이런 복잡한 조건이 붙은 이유는, 낸시보다 앞서서 아일랜드 출신의 최초의 여성 의원인 콘스탄스 마르키에비츠가 있기 때문이다. 콘스탄스는 1918년 12월 신 페인 소속으로 하원 의원에 당선되었다. 그러나 콘스탄스는 의회 출석을 거부하고 아일랜드 현지에서 독립운동에 참여했기 때문에 실질적으론 낸시 애스터가 최초의 여성 의원으로 꼽힌다.[62] 미국의 유명한 부호 가문인 애스터 가문의 후손으로 타이타닉에 탑승했다가 사망한 존 제이콥 애스터와는 사촌지간이다.[63] 출처: 세계사 산책.[64] 하지만 부정적인 면모도 많았는데 나치에 동조하는 발언을 여럿 남겼고 인종차별주의 신념을 가지고 있었으며, 나치 독일과 적으로 맞붙은 2차 세계 대전 당시 이탈리아 전선 장병들을 공분에 빠트린 D-Day 기피자 발언의 주인공이기도 하다.[65] 굳이 따지자면 여왕 앞에서 취한 처칠이나, 하원의원으로서 총리를 그냥 이름으로 '윈스턴'이라고 부른 브래드록이나 둘 다 무례하게 행동한 상황이었다. 어쩌면 이 상황의 최대 피해자는 파티 잘 하고 있었는데 총리랑 하원의원이 서로 예의를 상실한 채 굴고 있어서 당황스러웠을 법한 엘리자베스 2세였을지도.[66] 이 일화에 언급되는 사위가 처칠의 둘째딸 사라 처칠의 첫번째 남편인 빅 올리버다. 배우에 서커스 단원이어서 그랬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이는 왜곡된 내용으로, 빅 올리버는 오스트리아 귀족(남작)의 아들로 원래 의학을 공부하다 클래식 음악가가 된 상류층 사람이었다. 그는 동시에 코미디언이기도 했는데, 국내에는 흔하지 않지만 해외에서는 자주 볼 수 있는, 연주 중간중간에 농담이나 장난을 쳐 사람들을 웃기는 유형으로, BBC 라디오 등에도 자주 출연했던 유명인이었다. 다만 집안이 유대인 혈통이라 나치가 오스트리아를 접수하자 바로 해외로 망명했다. 그는 나치의 블랙북에 올려져 있을 정도로 나름 거물 인사였는데, 영국에 와서는 브렌트포드 FC의 열렬한 서포터가 되었고, 나중에 이 팀의 회장까지 된다.[67] 상술한 첫 번째 남편이라는 이야기처럼 빅 올리버는 사라 처칠과 1945년에 이혼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혼할 때는 미운정 고운정이 다 들었는지 처칠이 꽤 슬퍼했다고.[68] 무솔리니의 사위인 갈레아초 치아노 백작은 무솔리니가 실각할 때 가담했다가, 나치의 지원으로 복귀한 무솔리니에게 총살당했다.[69] 참고로 한국에서 틀니 사용에 드는 비용은 약값까지 감안하여 약 400만원 정도를 고려해야 한다. 그나마 의료보험이 적용되면 120만원 정도로 내려간다.[70] 제 1차 세계대전 당시 갈리폴리 전역의 실패로 실각한 이후 우울증 치료차 어머니가 선물로 준 물감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여 제 2차 세계대전 발발로 전쟁기간동안 그리는 것을 잠시 멈추기 전까지 500여점을 그렸다.[71] 미드 더 크라운 시즌1에서도 이 대사는 언급이 된다.[72] 그의 비서 Jock Colville은 이를 '스카치맛 구강청결제'로 묘사했다.[73] 금수조치로 인해 교역이 없던 시절이었으므로 영국의 일반 대중은 접할 길이 없는 술이었다.[74] 도편추방제 문서에도 비슷한 일화가 있는데, 한 문맹 시민이 자신의 도편에 아리스티데스의 이름을 대신 써줄 수 있냐고 아리스티데스 본인에게 물어봤다. 근데 이때는 사진은커녕 회화도 그리 발달하지 않았을 때였던 반면, 처칠의 시대는 사진은 물론이고 뉴스영화까지 쉽게 접할 수 있었던 시대였으니 불쾌할만 했을 것이다.[75] 이 일화를 이야기할 때는 보통 본문 내용처럼 일일이 풀어서 설명하지 않고, "제 연극에 초대합니다. 친구분과 함께 오시지요. 만약 있다면요." 라는 비아냥에 "첫 날 공연은 바쁜 사정으로 어려우니 다음날 공연에 가지요. 만약 있다면요." 라고 응수했다는 식으로 이야기한다.[76] 미군이 사실상 혼자 싸웠던 문제도 있지만, 급한 상황에서 항모 좀 빌려달랬더니 영국이 거부했던 전적도 한 몫 했다. 결국 어떻게든 빌려주기는 하는데, 이미 한 숨 돌린 상황이었기 때문에 얼마 안 있어 그냥 돌려주게 된다. 물론 당시 영국도 쉬운 상황은 아니었고, 전쟁 초장부터 말레이 해전 등에서 처참하게 깨지면서 인도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에 젖어있었다는 변명은 있다.[77] 학창 시절의 영향도 무시 못했는데, 성적이 좋은 당시 상류층 동급생들은 영어는 적당히 배우고 그리스어라틴어를 배웠지만, 처칠은 늘 영어만 배웠다고 한다. 이러다보니 문법규칙에 숙달됐다.[78] 일례로 Where are you from?을 From where are you?로 바꾼다든지.[79] 처칠이 원했던 노벨평화상은 조지 C. 마셜이 받았다.[80] 이 고양이는 처칠 1차 집권기의 총리관저 수석수렵보좌관이기도 했다.[81]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20px-Colonel_Blimp_cartoon.png 딱 우스꽝스러운 포즈로 '내가 젊었을 땐 말이야' 하는 꼰대 군인들을 풍자하는 내용이었다.[82] 덕분에 영화 촬영이 꽤 힘겨웠다고 한다.[해석] 그것은 폐하의 정부(영국정부)의 결의이다(That is a resolve of his majesty's government).[84] 히틀러와 자신의 공통점이 휘파람을 싫어하는 것이라고 했을 정도.[85] 팽창된 자존심 또는 심하게 과장된 자신감, 주의 산만, 목표 지향적 활동의 증가 등.[86] 어려서 병으로 요절한 삼녀 메리골드를 제외한 나머지 4남매 중에 천수를 누린 건 막내 딸인 메리(항년 91세)밖에 없다.[87] 편의상 《제2차 세계대전사》로 칭해진다. 한국에서는 1970년 5월 25일 '처어칠 회고록'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8권 전집을 박문사에서 발간하였다.[88] 에이드리언 모링 의원의 사망으로 열린 1940년 프레스턴 지역구 보궐 선거에 보수당 후보로 출마해 무투표 당선되었다. 이 당시는 2차 대전으로 인해 전시 내각이 운영되고 있던 상황으로, 해당 거국 내각에 참여했던 정당들은 대연정 참여 정당 소속 의원의 궐위로 인해 보궐선거가 실시될 경우 해당 지역구의 전임자의 정당 외에는 그 지역구에 무공천하기로 합의했고, 랜돌프도 그 합의의 수혜를 받아서 무투표 당선이나마 서민원에 입성할 수 있었던 것이다.[89] 1500년 세인트 브라이드 성당 부근에 런던의 첫 인쇄소가 들어서면서 출판과 인면을 맺었으며 지금도 이 성당은 '기자들의 교회'로 불리고 있다. 1702년 '데일리 커런트(Courant)' 언론사가 들어선 것을 시작으로 이 거리를 중심으로 영국의 수많은 일간지, 잡지사, 출판사들이 집중됐다. 그러나 1986년 국제적 언론재벌 루퍼트 머독이 노조의 반대를 무릅쓰고 '더 타임스'와 '더 선','선데이 타임스' 등을 런던 동쪽 와핑 지구의 신식 건물로 옮긴 것을 시작으로 이제는 대부분의 언론사가 다른 곳으로 옮겨간 채 투자은행과 법률사무소들이 들어서 있다.[90] 영국의 펀치지에서도 1920년대에 이런 소재로 처칠을 조롱하는 만화를 그린 적이 있다. 처칠이 '감히' 율리우스 카이사르에게 "나도 당신도 역사를 만들고 역사를 썼으니, 를 바꿔쓰자"고 말하는 내용인데, 2차 대전이 끝난 이후에는 '감히'가 '당연히'로 바뀌었다.[91] 처칠의 막내딸의 아들로, 1948년 생이라 어린시절에 생전의 처칠에게 사랑받는 손자였다. 1970년부터 1972년까지 찰스 3세의 시종무관이었으며, 1983년부터 2019년까지 하원의원을 지냈고, 존 메이저 내각 때는 국방차관을 지냈다. 보리스 존슨과 대립하여 2019년 공천권을 박탈당하며 출당되었으나, 찰스 3세 즉위 후 귀족원에 입성했다.[92] 유진킴에 비해 공적이 별로인 몽고메리를 후원한 것도 미국에 밀리지 않으려는 속마음 때문이다.[93] 독일에게 더 이상 핵무기가 없다는 거나, 프랑스를 미리 지원해야 한다는 등.[94] 독일이 핵무기가 더있든없든 이미 영국 국민들 사기는 꺾였고, 독일은 핵무기가 더 있는 것처럼 꾸밀수 있었다. 그리고 프랑스를 너무 지원한 덕에 정작 영국 방어가 힘들어진다.[95] 높은 확률로 나치 포병대장이었던 발터 폰 자이틀리츠-쿠르츠바흐 기반의 초상화가 나오며, 이건 양반이고 흑인 초상화 등 아예 인종적으로 동떨어진 얼굴이 나올 가능성도 없진 않다.[96] 자유당, 사회민주당은 당선자가 연설하다 총맞아 죽고 처칠은 연설도 못하고 머리에 총맞아 죽는다. 그나마 노동당 나렌드라는 총맞지 않고 끝난다.[97] 게임 시작 전에 이미 가스질을 해댔던지라 비하르 통일 중점에서 마지막에 처칠이 자신이 변하고 있다 말하지만 비하르 외교관이 죽은 사람이 되살아오지 않는다고 조소하는 것을 보면 이제 와서 자비를 베풀어봐야 소용없다는 걸 대놓고 알려주고 있다.[98] 원래는 영국이 하던 대로 인도인들을 민족, 종교 갈등을 일으켜 분열시키려고 했지만 들켜서(...) 되려 인도인들이 단합해 전국에서 시위가 일어난다. 이때 나오는 문구는 "안 통하잖아! 아, 씨발!"(...). 정작 처칠은 이걸 보고 인도인들은 미개인이라는 확신을 가지며 노동수용소를 세우고 공개처형을 자행하며 시위대에게 화학 가스를 살포하는 등 더더욱 돌아버린다.[99] 원 역사의 아파르트헤이트하던 남아프리카 공화국도 외교적으로 고립되었는데 처칠은 그것보다 더했다.[100] 사실 확률에 따라 그냥 마드라스 주재구를 넘겨주고 여기서 끝나는 경우도 있긴 있다.[101] 김영삼은 단임제 국가인 대한민국의 대통령인만큼 당연히 첫 임기밖에 없지만, 처칠은 두번째 임기도 재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