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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글랜드 왕국 플랜태저넷 왕조 초대 국왕 헨리 2세 Henry II | ||||
<colbgcolor=#cf091f><colcolor=black> 왕호 | 헨리 2세 (Henry II) | |||
출생 | 1133년 3월 5일 | |||
프랑스 왕국 르망[1] | ||||
사망 | 1189년 7월 6일 (향년 56세) | |||
프랑스 왕국 시농[2] | ||||
재위기간 | 노르망디 공작, 앙주 · 멘 백작 | |||
1151년 ~ 1189년 | ||||
아키텐 · 가스코뉴 공작, 푸아티에 백작 | ||||
1152년 ~ 1189년 | ||||
잉글랜드의 왕, 투렌 백작 | ||||
1154년 12월 19일 ~ 1189년 7월 6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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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자 | 엘레오노르 다키텐 (1152년 결혼) | |||
자녀 | 기욤 9세, 마틸다, 청년왕 헨리, 리처드 1세, 조프루아 2세, 엘리너, 조안, 존 왕 | |||
형제 | 조프루아, 기욤 | |||
아버지 | 앙주 백작 조프루아 5세 | |||
어머니 | 잉글랜드의 마틸다 | |||
매장지 | 퐁트브로 수녀원 | |||
종교 | 가톨릭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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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잉글랜드 국왕, 노르망디 공작, 앙주·멘·투렌 백작, 아키텐·가스코뉴 공작, 푸아티에 백작, 낭트 백작, 브르타뉴 공국 상위 주군, 스코틀랜드 왕국 상위 주군, 아일랜드 영주 등을 겸임하며, 잉글랜드와 프랑스 서부에 걸친 넓은 영토를 통치했다. 또한 그로부터 플랜태저넷 왕조가 시작되었으며 잉글랜드에서 331년 동안 이어졌다.2. 생애
2.1. 초년기
1133년 3월 5일 앙주 백국의 르망에서 앙주 백작 조프루아 5세와 마틸다의 장남으로 출생했다. 형제로 조프루아[3], 기욤[4]이 있었다. 7살 때 저명한 문헌학자인 생트의 피에르의 가르침을 받았고, 1142년 후반에 당시 잉글랜드 왕국에서 스티븐 왕에 대적하던 어머니의 거점인 브리스톨로 보내져 어머니의 이복형제인 글로스터의 로버트의 양육을 받았다. 그는 브리스톨 대성당에 있는 성직자들의 수준 높은 가르침을 받았는데, 훗날 그들이 자신에게 귀중한 가르침을 베풀었다고 회상했다. 1143년 또는 1144년에 앙주로 돌아와서 노르망디-프랑스의 스콜라주의 철학자로, 세속적인 고전 문학작품을 연구하고 경험적 과학을 육성함으로써 기독교 인본주의의 범위를 확장하려 한 인물인 콩세의 기욤 밑에서 교육받았다.1147년 말, 헨리는 14세의 나이에 용병 부대를 기반으로 삼아 잉글랜드로 돌아와 군사 활동을 벌이려 했다. 그는 초기엔 윌트셔를 공격해 몇몇 마을을 점령했지만, 용병대에 급료를 제대로 지급하지 못했기에, 군사 작전을 수행하긴커녕 오도 가지도 못하는 신세로 전락했다. 이때 스티븐 왕이 급료를 대신 지급해주는 대신 헨리가 잉글랜드를 떠나도록 했다. 스티븐 왕이 평소 무척 중시하던 기사도 정신을 발휘했을 수도 있고, 내전을 평화롭게 끝내기 위해 헨리와 긍정적인 관계를 구축하는 걸 고려했을 수도 있지만, 진짜 이유는 알려지지 않았다. 1149년, 잉글랜드로 재차 원정한 헨리는 잉글랜드 북부에서 스티븐 왕과 대적하던 라눌프 드 제농과 동맹을 맺기로 했다. 이후 헨리와 라눌프는 스코틀랜드인들의 지원을 받아 요크를 공략하기로 합의했다. 그러나 이 사실을 눈치챈 스티븐 왕이 요크를 향해 빠르게 북상했고, 결국 작전은 실패로 돌아갔다.
2.2. 노르망디, 앙주, 아키텐의 영주
1150년, 조프루아 5세는 장남 헨리를 노르망디 공작으로 세웠다. 이때 그는 주권자인 프랑스 국왕 루이 7세 와의 협의를 생략했다. 이에 분개한 루이 7세는 1151년 스티븐 왕의 장남인 외스타슈 4세가 노르망디 공작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노르망디를 침공했다. 조프루아 5세는 앙주와 노르망디에서 자기에 대항하는 반란이 종종 터지는 와중에 프랑스 왕국과 대적하는 건 곤란하다고 여기고 루이 7세와 화해하기로 했다. 1151년 9월,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도의 중재 아래 조프루아 5세와 루이 7세가 평화 협약을 맺었다. 조프루아 5세는 벡생을 루이 7세에게 양도하기로 했고, 루이 7세는 조프루아 5세와 헨리 부자가 파리로 와서 자신에게 경의를 표하는 대가로 헨리가 노르망디 공작에 선임되는 걸 인정하기로 했다.1151년 9월 7일, 아버지 조프루아 5세가 숨을 거두었고, 헨리는 앙주 백국을 물려받았다. 투르의 일부 연대기에 따르면, 조프루아 5세는 장남 헨리가 잉글랜드 왕이 되면 둘째 아들 조프루아가 앙주와 멘의 백작이 되어야 한다고 규정했다. 그러면서 측근들에게 헨리가 이에 동의할 때까지 자신을 매장하지 말라고 못 박았다. 헨리는 동생에게 앙주와 멘을 넘기길 거부했고, 조프루아의 시신을 한동안 방치했다. 그러다가 측근들이 설득해 앙주에서 아버지의 장례식을 성대하게 치렀지만, 동생 조프루아에게 끝내 앙주와 멘을 넘기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학계에서는 이 이야기가 투르의 일부 연대기 외에는 교차검증할 만한 사료가 없다며 신빙성이 부족하다고 본다.
다수의 학자는 헨리가 앙주 백작이 될 무렵에 아직 루이 7세의 왕비였던 엘레오노르 다키텐과 비밀리에 접촉해 결혼을 논의했을 거라고 추정한다. 1152년 3월 11일, 루이 7세와 엘레오노르는 10촌의 근친이라는 이유로 교황청의 승인하에 결혼을 무효로 했다. 이후 아키텐 여공작으로 복귀한 엘레오노르는 푸아티에로 이동했고,[5] 8주 후인 5월 18일에 푸아티에에서 헨리와 결혼했다. 당시 헨리는 19세였고, 엘레오노르는 28세였다.
루이 7세는 이 소식을 듣고 격노했다. 프랑스 왕국 내 영지의 소유자인 엘레오노르가 자신의 동의 없이 결혼을 감행했고, 헨리와 엘레오노르는 8촌 지간이기에 역시 근친혼이었다. 그리고 헨리가 엘레오노르와 결혼하면서 아키텐 공작이 되었으니, 루이 7세와 엘레오노르 사이의 두 딸인 마리와 알릭스가 어머니의 영지를 상속받기 곤란해진 것도 루이 7세의 분노를 살 일이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헨리는 기존에 가지고 있던 노르망디 공국, 앙주 백국에 이어 아키텐 공국까지 확보하면서, 프랑스 왕실보다 훨씬 더 큰 영토를 소유하게 되었으니, 자칫했다간 프랑스 왕국의 주권이 헨리 쪽으로 넘어갈 수도 있었다.
루이 7세는 헨리를 응징하기로 마음먹고, 스티븐 왕, 스티븐 왕의 아들이자 불리뉴 백작 외스타슈 4세, 샹파뉴 백작 앙리 1세, 페르슈 백작 로베르와 연합했다. 여기에 헨리의 동생 조프루아도 가세했다. 그는 헨리가 자기에게 돌아가야 할 영지까지 독점했다고 주장하며 앙주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이후 전쟁이 발발했고, 샹파뉴의 앙리 1세와 페르슈 백작 로베르가 노르망디 국경지대의 요충지인 뇌프마르세쉬르를 접수했다. 여기에 루이 7세는 아키텐 공국으로 곧장 진군했으며, 스티븐 왕은 템스강 계곡에서 헨리에게 충성하는 주요 요새인 월링포드 성을 포위했다. 헨리는 이에 대응해 아키텐에서는 농성을 고수해 루이 7세와의 전면전을 회피하는 한편, 노르망디 국경 수비를 강화해 적군이 더 이상 침투하지 못하도록 했다. 여기에 벡생을 습격해 약탈을 자행했고, 앙주로 진군해 조프루아의 주요 성 중 하나인 몽소르를 점령했다. 이후 루이 7세가 병에 걸려 철수하자, 조프루아는 어쩔 수 없이 형과 평화 협약을 맺었다.
2.3. 잉글랜드 왕위를 차지하다
1153년 초, 헨리는 소규모 군대를 이끌고 잉글랜드 남부 해안에 상륙했다. 스티븐 왕의 핵심 지지자였지만 최근 스티븐 왕의 행보에 반감을 품고 있었던 초대 노퍽 백작 휴 비고드는 즉시 헨리에게 가담했다. 이에 스티븐 왕이 군대를 일으켜 휴가 자리 잡은 입스위치를 포위하자 곧바로 항복했고, 그에게 충성을 바치는 대가로 영지 소유를 인정받았다. 한편, 헨리는 맘스버리에 있는 스티븐 왕의 성을 포위했다. 스티븐은 휴를 굴복시킨 뒤 에이번강을 따라 진군해 헨리의 군대를 격멸하려 했지만, 헨리가 즉각 물러나면서 실패했다. 이후 겨울 추위가 심해지자, 헨리와 임시 휴전을 맺고 런던으로 돌아갔고, 헨리는 미들랜드를 거쳐 북쪽으로 진군해, 그해 5월 레스터 백작 로베르 드 보몽의 영접을 받았으며, 라눌프 드 제농의 지원도 받았다. 헨리는 이때까지 별다른 군사적 성과를 거두지 못했지만, 잉글랜드 남서부, 미들랜드 및 잉글랜드 북부의 대부분을 통제했다.한편, 스티븐 왕의 주력군은 1152년부터 마틸다와 헨리 세력의 동쪽 요충지인 월링포드를 포위해 월링포드 공방전을 벌였다. 그는 크로마시 기포드에 세웠던 공성용 성을 재건하고, 월링포드 다리를 내려다보는 또 다른 성을 건설한 뒤, 병력을 재배치해 월링포드 성내에 보급품이 전달하지 못하게 했다. 성 수비대는 어떻게든 봉쇄를 돌파하려 했지만 모조리 격퇴되었고, 이내 식량이 바닥나면서 굶주림에 시달렸다. 1153년 7월, 헨리가 구원군을 이끌고 월링포드로 진군해, 공성용 성 하나를 포위했다. 당시 옥스퍼드에 있던 스티븐 왕은 이 소식을 접하자, 군대를 이끌고 가서 헨리를 쳐부수려고 진군했다. 그 후 양측은 템즈강을 사이에 두고 대치했다. 이제 전쟁이 곧 벌어지려 했을 때, 오랫동안 이어지는 내전이 지긋지긋해진 귀족들이 협상하자고 간청했고, 성직자들도 휴전을 중재하겠다고 제안했다. 스티븐 왕과 헨리 모두 자신들을 위해 싸우길 바라지 않는 귀족들의 태도에 화가 났지만, 그들의 호응 없이는 전쟁을 이어갈 수 없기에 어쩔 수 없이 협상하기로 했다. 양자는 일단 휴전을 맺고 공방전을 중단하기로 했다.
스티븐 왕의 아들 외스타슈 4세는 휴전이 체결된 것에 분노해 전쟁을 지속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아버지를 떠나 케임브리지로 이동한 뒤 새로운 원정을 벌이기 위해 자금을 끌어모으려 했다. 그러던 1153년 8월 중순, 그는 버리 세인트 에드먼즈 인근의 교회 영지를 약탈하던 중 급사했다. 후계자로 정해뒀던 아들의 급사로 깊은 슬픔과 충격에 빠진 스티븐 왕은 평화 협상에 적극적으로 응하기로 마음먹었다. 스티븐 왕의 동생인 윈체스터 대주교 앙리 드 블루아와 캔터베리 대주교 테오볼드의 중재하에, 스티븐 왕과 헨리 왕자는 월링포드에서 다시 만나 긴 협상을 벌인 끝에 11월에 평화 협약을 체결하고 윈체스터 대성당에서 공식적으로 발표한 뒤 서로 키스했다. 협약 내용은 아래와 같다.
1. 스티븐 왕은 헨리 왕자를 후계자로 인정하며, 헨리는 스티븐 왕에게 경의를 표한다.
2. 스티븐 왕은 왕으로서 모든 권력을 유지하되 헨리의 조언을 따른다.
3. 스티븐 왕의 남은 아들 기욤은 헨리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왕위에 대한 주장을 포기하는 대가로 자기가 소유한 영지의 안보를 약속받는다.
4. 헨리의 주요 왕궁은 보증인들이 보관하고, 스티븐 왕은 헨리의 성에 접근할 수 있다.
5. 수많은 외국 용병은 동원 해제되어 고향으로 돌려보낸다.
2. 스티븐 왕은 왕으로서 모든 권력을 유지하되 헨리의 조언을 따른다.
3. 스티븐 왕의 남은 아들 기욤은 헨리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왕위에 대한 주장을 포기하는 대가로 자기가 소유한 영지의 안보를 약속받는다.
4. 헨리의 주요 왕궁은 보증인들이 보관하고, 스티븐 왕은 헨리의 성에 접근할 수 있다.
5. 수많은 외국 용병은 동원 해제되어 고향으로 돌려보낸다.
스티븐 왕이 헨리를 자기 후계자로 인정하기로 하면서 내전이 일단 종식되었지만, 이것이 최종적인 해결책이 될지는 불확실했다. 스티븐 왕의 아들 기욤은 1153년 당시엔 어렸고, 왕위를 놓고 헨리에게 도전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지만, 스티븐 왕이 좀 더 오래 살면서 기욤이 충분한 나이가 된다면 스티븐 왕이 기욤을 차기 국왕으로 앉히기 위해 내전을 재개할 수도 있었다. 1154년에는 기욤이 헨리 암살을 사주했다는 소문이 잉글랜드 각지에 널리 퍼지기도 했다.
1154년 초, 스티븐 왕은 왕권 회복을 위해 잉글랜드 왕국 전역을 여행해 귀족들의 복종을 받아내고자 했다. 그는 잉글랜드 남서부에 대한 왕실 헌장을 잇달아 발행했고, 뒤이어 요크로 여행해 북부 귀족들에게 왕권이 회복되었음을 알리기 위해 대규모 의회를 소집했다. 그렇게 1154년 여름까지 바쁜 일정을 보낸 뒤, 잉글랜드 왕국을 방문한 플란데런 백작 티에리 드 알자스와 대면하고자 도버로 이동했다. 그러던 중 위장병에 걸린 그는 1154년 10월 25일에 도버의 지역 수도원에서 사망했다. 그 후 헨리는 1154년 12월 8일 잉글랜드에 상륙한 뒤 몇몇 귀족들에게 충성 서약을 받았고, 12월 19일 웨스트민스터 대성당에서 엘레오노르와 함께 대관식을 치렀다. 이때 그는 어머니 마틸다가 1125년 잉글랜드로 돌아올 때 가져온 황제의 왕관 중 좀 더 장엄한 왕관을 썼다. 1155년 4월 왕실 의회가 소집되었고, 귀족들은 그에게 충성을 서약했다. 이리하여 그는 잉글랜드 국왕 헨리 2세로 등극했다.
2.4. 외치
2.4.1. 브르타뉴, 툴루즈, 벡생에서의 원정
헨리 2세가 프랑스 내에서 소유했던 영토 |
1154년, 헨리 2세와 프랑스 국왕 루이 7세는 평화 협약을 체결했다. 헨리 2세는 이를 통해 새로 확보한 영지의 행정 체계를 확고히 다지고 반란을 진압하고자 했고, 루이 7세는 아키텐 원정 실패로 인한 후유증을 수습하면서 반격할 때를 도모하고자 했다. 루이 7세는 플란데런 백작 티에리 드 알프스를 포함한 여러 영주를 포섭했고, 헨리 2세는 루이 7세에게 등을 돌린 블루아 백작 티보 5세와 동맹을 맺었다. 이후 헨리 2세가 루이 7세에게 프랑스 내 영지에 대한 연공을 바치지 않으면서, 양자 간의 갈등은 고조되었다. 그러던 1158년, 두 사람은 파리와 몽생미셸에서 잇달아 만나서 헨리 2세의 가장 나이 많은 생존한 아들인 청년왕 헨리와 루이 7세의 딸 마르그리트를 약혼하는 데 동의했다. 결혼 계약에는 루이 7세가 마르기르트에게 양국의 분쟁 지역인 백생 백국을 양도하는 것이 포함되었다. 이리하여 헨리 2세와 루이 7세는 영구적인 평화를 맺는 듯했다.
한편, 헨리 2세는 자신의 영토와 인접하면서도 독자적인 주권을 누리고 있던 브르타뉴 공국으로 관심을 돌렸다. 이보다 앞선 1148년 9월 17일, 브르타뉴 공작 코난 3세가 사망했다. 그는 죽기 전에 모든 사람이 자신의 합법적인 아들로 여겼던 호엘 3세가 사실은 사생아라며 작위와 영지 승계를 거부하고, 딸 베르테를 브르타뉴 여공작으로 세웠으며, 베르테와 첫 남편인 리치먼드 백작 알란 르 루의 자식인 코난 4세를 유일한 상속인으로 지명했다. 이후 코난 3세가 눈을 감았지만, 호엘 3세는 베르테의 집권을 용납하지 않고 낭트 일대에서 할거하며 브르타뉴 공작을 칭했고, 1149년 생폴 드 레옹 주교와 1152년 캥페르 주교로부터 공작으로 인정받았다. <브르타뉴 연대기>에 따르면, 그는 결국 코난 4세의 섭정이며 베르테의 두 번째 남편인 포허 자작 에우돈 2세에게 굴복해 브르타뉴 공작에서 사임했다고 한다. 하지만 1153년부터 다시 공작을 칭하고 브르타뉴 공작으로서 헌장을 발표했다.
1154년, 코난 4세는 성년이 된 자기에게 권력을 돌려주지 않는 계부이자 포허 자작인 에우돈 2세에게 반기를 들었다. 그는 호엘 3세와 손잡고 에우돈 2세와 전쟁을 벌였지만 패배해 리치먼드 백국으로 피신했다. 하지만 이내 세력을 재정비해 브르타뉴로 돌아와서 1154년 12월 16일 레제 인근에서 에우돈 2세를 물리치고 브르타뉴 외곽으로 쫓아냈다. 1156년, 호엘 3세는 낭트 사람들에 의해 추방되었고, 낭트 시민들은 앙주와 멘 백작인 앙리 2세의 남동생인 조프루아 6세를 낭트 백작으로 추대했다. 1158년 7월 조프루아 6세가 사망하자, 코난 4세는 즉시 낭트를 장악했다. 이러한 상황을 가만히 지켜보던 헨리 2세가 리치먼드 백작령을 일시적으로 압수하고 브르타뉴로 진격하려 하자, 코난 4세는 1158년 9월에 아브랑슈로 달려가서 헨리 2세에게 경의를 표하고 낭트 백국을 넘기는 대가로 리치먼드 백작령을 돌려받았다.
헨리 2세는 전통적으로 아키텐 공국의 가신이었지만 당시엔 아키텐으로부터 사실상 독립했던 툴루즈 백작령도 복속하려 했다. 헨리는 먼저 툴루즈 백작 레몽 5세의 정적인 바르셀로나 백작 라몬 베렝게르 4세와 동맹을 맺었고, 1159년에는 툴루즈 백작을 폐위하기 위해 침략하겠다고 위협했다. 루이 7세는 헨리 2세가 남프랑스 전역을 석권하는 걸 절대로 바라지 않았기에, 여동생 콩스탕스를 레몽 5세와 결혼시켰다. 이후 헨리 2세가 툴루즈를 침공했지만, 루이 7세가 툴루즈를 방문했다는 소식을 접하자, 자신의 주권자인 루이 7세와 직접 교전하기엔 시기상조라고 여겼기에 주변 마을들을 약탈하고 케르시 지방을 점거하는 것으로 만족하며 철수했다.
이후 툴루즈를 둘러싸고 헨리 2세와 루이 7세간의 갈등이 고조되었다가, 군사적으로 열세한 루이 7세가 1160년 헨리 2세에게 먼저 사절을 보내 평화 협약을 맺자고 제안했다. 이 조약은 청년왕 헨리와 마르그리트의 약혼과 벡생 백작령 거래를 재확인했으며, 청년 왕 헨리가 루이 7세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것이 포함되었다. 그 후 두 번째 아내 콩스탕스가 사망하자, 루이 7세는 블루아와 샹파뉴 백작의 자매인 아델과 세 번째로 결혼했다. 여기에 엘레오노르의 딸들을 아델의 형제인 블루아 백작 티보 5세와 샹파뉴 백작 앙리 1세와 약혼시켰다. 그는 이를 통해 헨리 2세와 동맹을 맺었던 블루아 백국과 샹파뉴 백국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일 계획이었다. 이에 분노한 헨리 2세는 1160년 11월 청년왕 헨리와 마르그리트가 각각 5살과 3살밖에 안 되었음에도 교황 특사들을 협박해 그들을 즉시 결혼시키고 벡생 백작령을 압수했다.
이제 양자 간의 전쟁이 재개되었고, 티보 5세는 투렌과의 국경 지대에 군대를 배치했다. 헨리 2세는 이 소식을 듣자마자 블루아의 쇼몽 성을 기습 공격해 함락했다. 1161년 양자 간의 소규모 접전이 벌어졌지만, 양자 모두 대규모 전쟁을 벌이길 꺼려 그해 가을 프레트발에서 휴전 협약을 맺었고, 1162년 교황 알렉산데르 3세의 중재 하에 평화 협약을 맺었다. 하지만 프랑스 왕실은 이 일을 계기로 헨리 2세를 어떻게든 약화해야 자기들의 입지를 지킬 수 있으리라 확신했다.
2.4.2. 루이 7세와의 갈등과 타협
1163년, 플란데런 백국의 새로운 백작 필리프 1세가 헨리 2세의 위세가 강해지는 걸 우려해 공개적으로 프랑스 국왕 루이 7세와 동맹을 맺었다. 1165년 루이 7세의 왕비 아델이 필리프 2세를 낳으면서 확실한 후계자가 생긴 루이 7세는 헨리 2세에 대한 정치 및 군사적 공세를 준비했다. 한편, 헨리 2세는 브르타뉴에서 간접 통치 정책을 좀 더 직접적인 통제 정책으로 전환하기로 마음먹었다. 1160년대, 코난 4세는 삼촌인 트레고르 백작 앙리와 갈등을 벌인 끝에 갱강을 몰수했고, 이곳을 거점으로 삼았다. 그러나 돌콤부르(Dol-Combourg) 영주 장 2세, 푸제르 남작 라울 2세, 레옹 자작 기요마르크 4세는 그의 권위에 불복하고 포허 자작 에우돈 2세와 함께 음모를 지속적으로 꾸몄다. 1166년, 포허 자작 에우돈 2세가 여러 귀족과 함께 반란을 일으켜 브르타뉴 대부분을 석권했다. 이에 코난 4세는 앙제로 이동한 뒤 1166년 7월 31일 헨리 2세와 접견해, 자기 딸이자 후계자인 콩스탕스를 헨리 2세의 넷째 아들인 제프리와 약혼시키고, 두 사람에게 브르타뉴 행정부를 맡기고 퇴위했다. 당시 코난 4세에게는 기욤이라는 아들이 있었지만, 헨리 2세의 압력으로 공작위 계승권이 배제된 뒤 성직자가 되었다.그렇게 코난 4세가 헨리 2세의 압력으로 퇴위하고 그의 딸 콩스탕스가 브르타뉴여공작이 되었지만, 실질적인 통치자는 잉글랜드 국왕 헨리 2세였다. 헨리 2세는 잉글랜드 왕국, 노르망디 공국, 앙주 백국, 푸아투, 멘, 아키텐 공국에 이어 브르타뉴 공국까지 실질적으로 통치해, 프랑스 왕국 국토의 서쪽 절반 이상을 온전히 자기 영향권으로 삼았다. 1171년 봄, 헨리 2세는 자기에게 반기를 든 브르타뉴 반군을 토벌하기 위한 원정에 착수했다. 그해 5월 16일, 반군은 퐁토르송에서 항복하고 성을 넘겨줬다. 코난 4세가 사망한 이듬해인 1172년, 헨리 2세는 코난 4세가 마지막까지 간직했던 갱강 백국과 리치먼드 백국을 회수했다. 포허 자작 에우돈 2세가 다시 반기를 들려 했지만, 헨리 2세의 용병들에게 패배했다.
이렇듯 브르타뉴를 확고히 장악하는 한편, 헨리 2세는 프랑스 국왕의 분노를 무릅쓰고 오베르뉴를 장악하려 시도했지만 실패했고, 1164년 툴루즈 백작 레몽 5세에게 압력을 가하고자 동맹인 아라곤 국왕 알리폰소 2세와 보르도 대주교에게 레몽 5세를 치도록 부추겼다. 이로 인한 헨리 2세와 루이 7세 사이의 갈등 고조는 1167년 십자군 국가에 지급할 돈을 어떻게 징수할 것인가에 대한 논쟁에서 비롯된 전면전으로 이어졌다. 루이 7세는 웨일스, 스코틀랜드, 브르타뉴 내 반(反) 헨리 성향 귀족들과 동맹을 맺고 노르망디를 침공했고, 헨리 2세는 이에 맞서 루이 7세가 무기 창고로 쓰던 쇼몽쉬르렙트를 공격해 초토화했다. 루이 7세는 헨리 2세와 휴전 협약을 맺고 물러나는 수밖에 없었고, 헨리 2세는 1168년 군대를 이끌고 브르타뉴로 진군해 조슬랭을 접수한 뒤 에우돈 2세의 영지인 포허를 약탈했고, 에우돈 2세와 추종자들은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헨리 2세에게 복종했다.
그 후 헨리 2세는 후계 문제로 관심을 돌렸다. 그는 죽은 후에 청년왕 헨리가 잉글랜드 왕국과 노르망디 공국을 받고, 리처드 1세에게 아키텐 공국을 주고, 조프루아 2세에게 브르타뉴 공국을 넘기기로 했다. 여기에는 루이 7세의 동의가 필요했기에, 두 사람은 1169년 몽미라일에서 새로운 평화 회담을 열었다. 그 결과, 헨리 2세의 아들들이 프랑스에서 받을 미래의 영지에 대해 루이 7세에게 경의를 표하기로 했으며, 리처드 1세는 루이 7세의 2살된 딸 아델과 약혼했다. 그러나 이 약혼은 서로 간의 입장차로 인해 나중에 흐지부지되었다. 일설에 따르면, 아델은 잉글랜드에서 살다가 헨리 2세의 정부가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현대 학자들은 프랑스 연대기에는 이 이야기가 없는 점을 들어 이 이야기의 신빙성이 부족하다고 본다.
이렇게 루이 7세와 타협한 뒤, 헨리 2세는 프랑스 남부를 지속적으로 공략했다. 그는 아들 존과 사보이아 백작 움베르토 3세의 딸 알리시아를 약혼시킴으로써 사보이아 백국과 동맹을 맺었고, 딸 엘리노어를 1170년 카스티야 연합 왕국의 국왕 알폰소 8세와 결혼시켰다. 이후 헨리 2세 및 그의 동맹 세력의 압력에 직면한 툴루즈 백작 레몽 5세는 마침내 1173년 2월 헨리 2세와 그의 상속인들에게 충성을 맹세한다고 공개적으로 선언했다. 이때가 헨리 2세 치세의 절정기였다.
2.4.3. 아일랜드 진출
12세기 중반, 아일랜드는 지역 왕들의 통치를 받았으며, 아일랜드를 대표하는 군주인 아르드리는 제한된 권한을 가졌다. 1160년대, 렌스터의 왕 디어마르마이트 막 무르차다는 아르드리 루아이드리 우아 콘코바이르가 결성한 강력한 연합군에게 패배하고 왕위에서 쫓겨났다. 그는 1167년 헨리 2세에게 구원을 요청했고, 헨리 2세는 그가 자신의 영지 내에서 용병을 모집하는 걸 허용했다. 디어마르마이트는 제2대 펨브로크 백작 리처드 드 클레어를 포섭했고, 웨일스-잉글랜드 변경 지대에서 모집한 앵글로-노르만 기사단과 플란데런 용병 부대를 모았다. 그 후 아일랜드로 돌아와서 렌스터를 탈환했지만, 1171년에 급사했다. 리처드 드 클레어는 이 기회를 틈타 렌스터를 접수했다.헨리 2세는 이 기회를 이용해 아일랜드를 정복하기로 마음먹었다. 교황 하드리아노 4세의 승인을 받아낸 뒤, 헨리 2세는 1171년 10월 펨브로크에서 대규모 병력을 이끌고 아일랜드로 항해했다. 헨리 2세의 개입은 성공적이었고, 아일랜드 남부와 동부의 아일랜드인과 앵글로-노르만인들은 모두 그의 통치를 받아들였다. 리처드 드 클레어 역시 헨리 2세에게 경의를 표하고 렌스터의 주권을 승인받았다. 그는 새롭게 확보한 영토를 보호하기 위해 성채를 대거 건설했다. 1175년, 아일랜드의 아르드리인 루아이드리 우아 콘코바이르는 헨리 2세와 윈저 조약을 체결했다. 그는 이 조약에서 아일랜드의 아이드리로 인정받는 대신에 헨리 2세를 주권자로 받들고 경의를 표하며, 매년 공물을 바쳐야 했다. 다만 먼스터 등 잉글랜드에서 멀리 떨어진 아일랜드 지역은 루아이드리에게 복종하지 않았고, 아일랜드 토착 세력의 잉글랜드 영주들에 대한 공세가 끊임없이 이어졌다.
이에 헨리 2세는 아일랜드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로 마음먹고, 1177년 5월 옥스퍼드에서 회의를 열었다. 그는 당시 10살이었던 존을 아일랜드의 영주로 선언하고, 그가 성인이 되면 아일랜드 전역의 왕이 되도록 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그리하여 앵글로-노르만족이 차지한 영토는 아일랜드 영주령으로 알려졌고, 앙주 제국으로 일컬어진 헨리 1세의 영지 일부를 형성했다. 또한 헨리 2세는 앵글로-노르만 영주들이 더 많은 영토를 정복하도록 격려했다. 그는 아일랜드의 토착 왕국인 토몬드 왕국을 필립 드 브라오즈에게, 데스몬드를 로버트 피츠스티븐과 마일스 드 코건에게 주었다. 그 후 앵글로-노르만 영주들은 몇 달 동안 데스먼드, 토먼드, 코노트 왕국을 침략했고, 존 드 쿠르는 동부 얼스터 정복을 지속적으로 벌였다.
2.5. 내치
2.5.1. 잉글랜드 왕국 재건
잉글랜드 왕국은 무정부시대 동안 엄청난 고통을 겪었다. 앵글로색슨 연대기는 "소동과 사악함과 강도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고 기록했다. 잉글랜드 남서부, 템스강 계곡, 동앵글리아 등 여러 지역은 전쟁과 약탈로 인해 심각한 파괴가 발생했다. 이전에 중앙 집권적이었던 왕실 주화 체계는 분열되어 스티븐 왕, 마틸다, 지방 영주 모두 자체 주화를 주조했으며, 왕의 주화 통제는 잉글랜드 남동부와 동앵글리아를 제외하고는 제한적으로 유지되었다. 왕립 산림법은 대부분 지역에서 무시되어 나무들이 무단으로 벌채되었다. 다만 일부 지역은 내전의 영향을 그렇게 심하게 겪지 않았다. 예를 들어 켄트주 등 스티븐에게 속한 잉글랜드 남동부와 글로스터와 브리스톨 주변 지역은 약탈자들이 미치지 않았고, 스코틀랜드 국왕 다비드 1세는 잉글랜드 북부를 효과적으로 통치했다. 왕의 영지에서 나오는 수입은 무정부시대 기간에 심각하게 감소했다.헨리 2세는 잉글랜드 국왕으로 집권한 후 자신을 헨리 1세의 합법적 상속인으로 내세웠고, 그의 이미지로 왕국을 재건하기 시작했다. 그는 스티븐 왕의 통치 19년을 혼란스럽고 곤경에 처한 기간으로 규정하면서, 이 모든 문제는 스티븐이 왕위를 찬탈한 데서 비롯되었다고 주장했다. 그 후 그는 왕실 재정 체계를 재건하고자 노력했다. 런던의 중앙 왕실 재무부는 주요 성채의 재무부로 지원되었으며, 의회는 왕의 여행을 따라가 필요에 따라 돈을 쓰고 그 과정에서 수입을 징수했다. 여기에 스티븐 왕 치세 말기인 1153년에 발행된 은 페니를 전국적으로 유통해 이전에 유통되던 통화를 대체하도록 해 물가를 안정했다.
헨리 2세는 유능한 재무관 리처드 피츠닐의 도움을 받아 1158년 통화를 개혁했다. 잉글랜드 동전에 처음으로 자신의 이름을 올렸고, 동전을 생산할 수 있는 허가를 받은 주화 제작자의 수를 크게 줄였다. 1160년대엔 추가 조치가 단행되었다. 새로운 세금을 잇달아 도입되었고, 기존 회계가 재감사 되었으며, 법률 시스템의 개혁으로 벌금과 수당으로부터 새로운 자금 흐름이 유입되었다. 1180년에 주화의 대대적인 개혁이 단행되었고, 왕실 관리들이 조폐국을 직접 통제하고 수익을 직접 재무부에 넘겼다. 또한 쇼트 크로스라고 불리는 새로운 페니가 도입되었고, 전국의 조폐국 수가 10개로 크게 줄었다. 이러한 개혁의 영향으로 왕실 수입이 상당히 증가했다. 집권 초기 헨리 2세의 평균 재정 수입은 18,000파운드에 불과했지만, 1166년 이후에는 22,000파운드로 늘어났다. 헨리 2세는 이외에도 남아 있는 외국 용병을 추방하고 허가받지 않은 성을 철거하거나 버려둠으로써 지방 영주들을 통제했다.
헨리 2세는 무정부시대 시기 잉글랜드 왕국의 영역을 갉아먹은 스코틀랜드 왕국과 웨일스 토착 세력에 압박을 가했다. 1157년, 스코틀랜드 국왕 말 콜룸 4세는 헨리 2세의 군사적 위협에 굴복하여 내전 중에 빼앗았던 잉글랜드 북부를 반환했고, 헨리 2세는 즉시 북부 국경을 요새화했다. 또한 1157년과 1158년에 노스 웨일스와 사우스 웨일스를 상대로 2차례 원정을 치른 끝에 귀네드 왕국의 국왕 오웨인 압 그루퍼드와 데허바르스 왕국의 국왕 라이스 압 그리피드를 복종시키는 데 성공했다.
2.5.2. 행정 체계
헨리 1세 치세에 결성된 '앙주 제국'은 일관된 구조나 중앙 통제 대신 느슨하고 유연한 가족 관계와 영지 체계로 구성되었다. 헨리 2세의 각 영토 내에서는 서로 다른 지역 관습이 적용되었지만, 일부 지역적 차이는 공통 원칙에 기반을 두었다. 헨리 2세는 제국 전역을 끊임없이 여행했다. 그는 여행하는 동안 지역 정부 개혁 및 기타 지방 행정 업무를 수행했고, 그가 파견한 첩보원들은 그가 가는 곳마다 새로운 정보를 가져왔다. 그가 부재한 지역은 세네샬과 순회 재판관에 의해 통치되었고, 각 지역의 지방 관리들이 정부 업무를 수행했다. 다만 정부의 많은 기능은 헨리 2세 본인에게 집중되었으며, 그는 종종 결정이나 호의를 요청하는 청원자들에게 둘러싸이곤 했다.헨리 2세는 종종 대평의회를 열어 조언을 구하곤 했으며, 입법할 때 궁정과 협의했다. 대평의회에 참석한 이들은 초기엔 아버지 조프루아 5세의 전 고문들과 헨리 1세의 남은 관리 일부로 구성되었고, 1153년 무정부시대가 막을 내린 뒤엔 스티븐 왕의 고위 귀족 일부가 합류했다. 이후 부와 땅이 없는 하급 귀족들이 헨리 1세에게 발탁되어 행정가를 맡다가, 1180년대에는 이 새로운 행정가 계층이 잉글랜드에서 우세했으며 헨리 2세의 사생아 가문의 지원을 받았다. 헨리 2세는 노르망디에서도 노르만 주교 계급에서 가까운 고문을 뽑았고, 노르만 행정가로 많은 '새로운 사람들'을 모집했다. 노르망디의 대영주 중 왕의 후원으로 이익을 얻은 이는 거의 없었다.
그는 잉글랜드의 국왕이자 노르망디 공작의 권위로 노르만 귀족들의 중매결혼이나 상속 재산 처리에 지속적으로 개입했다. 그는 강력한 군주로서 신하들에게 귀중한 후원을 제공하거나 파괴적인 해악을 끼칠 수 있었다. 이는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교회 내에서의 왕실 후원은 헨리 치하에서 승진을 위한 효과적인 경로를 제공했고, 그가 선호하는 성직자 대부분은 주교와 대주교로 발탁되었다. 이와 대조적으로, 잉글랜드의 백작령 수는 상당히 줄어들었고, 이 때문에 많은 남작들이 백작으로 승격할 가능성이 박탈되었다. 다만 아키텐 등 다른 지역에 대한 헨리 2세의 통제는 지극히 제한적이었고, 아내 엘레오노르 다키텐과 아들 리처드 1세가 그를 대신해 통제했다.
2.5.3. 헨리 2세의 궁정
헨리 2세는 광대한 영토와 풍요로운 자원을 토대로 한 막대한 부를 발판 삼아 유럽에서 가장 큰 궁정을 유지했다. 그의 궁정은 일반적으로 기사, 가정부, 매춘부, 사무원, 말, 사냥개와 함께 주요 귀족과 주교 등으로 구성되었다. 궁정 내부에는 왕의 관리들(ministeriales). 친구들(amici), 그리고 심복과 신뢰할 수 있는 하인들(familiares regis)로 구성된 내부 조직이 있었다. 사냥을 무척 좋아한 헨리 2세는 자기 영지 전역에 왕실 사냥 오두막을 세웠으며, 왕의 권력과 명예의 상징인 왕궁에 많은 투자를 했다. 반면에 마상창시합 개최를 가급적 하지 않으려 했는데, 평시에 무장한 기사들이 모였다간 문제가 터질 걸 우려했기 때문으로 추정된다.헨리 2세는 집권 초기 어머니 마틸다에게 의지했다. 마틸다는 노르망디에서 여생을 보내면서 종종 헨리 2세의 대리인으로 활동했고, 노르망디 공국 정부를 주재했다. 마틸다와 그녀의 아들은 전쟁 중에 발생한 다양한 토지 청구를 처리하면서 공동명의로 영국과 노르망디에서 헌장을 발행했다. 헨리 2세는 정책 문제에 대한 조언을 구하기 위해 종종 그녀에게 사람을 보내기도 했다. 1155년 헨리 2세가 아일랜드를 정복한 뒤 막냇동생 기욤에게 그곳을 영지로 주자고 제안했을 때, 그녀는 비현실적이라는 이유로 반대했다. 그 대신, 기욤은 잉글랜드에서 많은 영지를 수여받았다.
또한 마틸다는 여러 외교적 위기를 처리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1세가 마틸다가 지난날 가져간 성 야고보의 손을 돌려달라고 요청하자, 마틸다는 헨리와 함께 이 손이 레딩 수도원에 남아 있어야 한다고 고집했다. 그 대신, 프리드리히 1세는 잉글랜드에서 보내온 값비싼 선물들을 받았는데, 그중에는 거대하고 호화로운 텐트가 포함되었다. 프리드리히 1세는 이에 만족하고 물러났다. 또한 그녀는 1164년 프랑스 국왕 루이 7세에게 접근해 십자군 자금 처리에 대한 잉글랜드와 프랑스 간의 외교적 갈등을 해결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헨리 2세와 왕비 엘레오노르 다키텐과의 관계는 복잡했다. 헨리 2세는 1154년 이후 수년간 엘레오노르가 자기 대신 잉글랜드를 잘 관리한 것에 호평했고, 이후엔 아키텐에서도 통치를 잘하는 걸 만족스러워했다. 그러나 헨리 2세가 여러 정부를 들여서 사생아를 여럿 낳고, 아키텐에 대한 간섭을 지속적으로 벌이고, 툴루즈 백작 레몽 5세의 충성 서약을 엘레오노르가 아닌 자신이 받는 등의 행보를 보이자, 엘레오노르는 헨리 2세에게 깊은 반감을 품고 자식들을 부추겨서 헨리 2세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키도록 부추겼다.
2.5.4. 법률
헨리 2세가 막 집권했을 때, 잉글랜드에서는 무정부시대 동안의 혼란으로 토지와 관련된 수많은 법적 소송이 제기되었다. 많은 수도원이 내전 중에 토지를 잃었고, 토지 소유주와 상속인이 지역 영주에게 토지를 빼앗겼고, 그 토지는 이후 매각되거나 새로운 소유주에게 주어지곤 했다. 헨리 2세는 이 소송을 처리하기 위해 영주 법원과 같은 전통적인 지방 법원에 의존했고, 소수의 소송만 직접 심리했다. 이 과정은 완벽과는 거리가 멀었고 많은 경우 청구인이 소송을 효과적으로 추진할 수 없었다. 그는 다른 정치적 문제에 골몰하느라 소송에 신경 쓰지 못하기 일쑤였고, 심지어 심리를 위해 국왕을 찾아가기 위해 영국해협을 건너가서 그의 순회 궁정을 찾아가야 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그렇지만 그는 기존 절차를 개선하려는 조치를 할 준비가 되어 있었으며, 잘못 처리되었다고 생각되는 사건에 개입하고 교회 및 민사 법원 절차를 개선하기 위한 법률을 제정했다.한편, 헨리 2세는 노르망디에서 공국 전역의 관리들이 운영하는 법원을 통해 정의를 내렸고, 가끔 이러한 사건이 왕에게 직접 전달되었다. 또한 왕실 수입과 관련된 사건을 직접 심리하고 공국 전역을 여행하는 순회 판사를 유지하는 캉의 재무 법원을 운영했다. 헨리 2세는 1159년과 1163년 사이에, 노르망디에서 왕실 및 교회 법원의 개혁을 실시하는 데 힘을 기울였으며, 나중에 잉글랜드에 도입된 일부 조치는 노르망디에서 이미 실시한 것이었다.
1163년, 헨리 2세는 왕립 법원의 역할을 개혁하고자 잉글랜드로 돌아왔다. 그는 범죄를 단속하고 도둑과 도망자의 소지품을 압수했으며, 순회 판사를 잉글랜드 북부와 미들랜드로 파견했다. 이전에는 왕립 수입과 관련된 사건만 다루었던 웨스트민스터의 재무 법원은 1166년 이후 왕을 대신해 더욱 광범위한 민사 소송을 다뤘다. 1176년에는 왕이나 왕의 대리자인 순회판사가 가신의 영지를 방문하고 검사할 수 있는 권리인 에어(eyre)를 전국에 도입했다. 이제 왕의 대리인으로 지명된 순회 판사들은 잉글랜드의 모든 카운티를 방문해 민사 및 형사 소송을 모두 다뤘다. 또한 배심원 제도를 이전보다 훨씬 광범위하게 활용해 재판의 공정성을 고취하고자 노력했다.
헨리 2세는 잉글랜드에서 더욱 일관된 법률 체계를 조직하고자 노력했다. 당시 잉글랜드의 법률은 노르망디의 법률과 잉글랜드 고유의 관습법이 어지럽게 뒤섞여 있어서 자체적으로 모순된 면이 많았다. 일부는 수용할 수 있는 수준으로 작동했지만, 많은 부분이 번거롭고 비효율적이며 지역 영주의 반대에 취약했다. 헨리 2세는 왕의 법정을 영국 전역의 일반 법정으로 만들어 관할권과 교회, 영주, 보안관의 관할권을 신중하게 정의했으며, 왕을 모든 사람을 균일하게 보호하면서 평화를 지키는 수호자로 간주했다. 헨리 2세의 치세 말기인 1187 ~ 1189년, 수석 재판관 라눌프 드 그랜빌이 <Tractatus de Legibus et consuetudinibus regni Anglie>(잉글랜드 왕국의 법률 및 관습에 대한 법령집)을 발간했다. 이 법령집은 헨리 2세의 노력의 정점이자 그의 목표를 이행하는 수단으로, 이후 수 세기 동안 잉글랜드 왕국의 기본법으로 간주하였다.
2.6. 토머스 베켓과의 분쟁
1161년, 캔터베리 대주교 테오발드가 사망했다. 헨리 2세는 이를 잉글랜드 교회를 왕권에 완벽하게 복속시킬 절호의 기회로 여기고, 1162년 잉글랜드 총리이며 자신의 오랜 친구인 토머스 베켓을 캔터베리 대주교로 세웠다. 그러나 이 임명은 역효과를 야기했다. 본래 방탕한 생활을 일삼았던 토머스 베켓은 캔터베리 대주교가 된 뒤 엄격하고 검소한 생활을 시작했으며, 잉글랜드 교회의 자립을 이루기 위해 노력했다. 이때 베켓은 대주교구에 속한 토지를 도로 회수하고자 왕과 영주들에게 토지를 돌려달라고 강력히 요구했고, 왕과 영주들은 그의 고압적인 태도에 불만을 품었다. 1163년 헨리가 보안관의 지원을 모으려고 시도하자, 베켓은 보안관이 자발적으로 제공해야지 왕이 강요할 수는 없다고 주장했다.또한 베켓은 헨리 2세가 새로운 세금을 지속적으로 도입하는 것에 대해 백성들의 재산을 도둑질해서는 안 된다고 비판했으며, 교회 서기를 직접 임명하려다가 왕실 관료가 "왕에게 임명권이 있다"라고 주장하자 파문해 왕실의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특히 세속적 범죄를 저지른 성직자에 대한 처우 문제를 놓고 양자가 상당한 갈등을 벌였다, 헨리 2세는 잉글랜드의 관습법에 따라 왕이 범법 행위를 저지른 성직자를 처벌해야 한다고 여겼지만, 토머스 베켓은 교회 법원 만이 이들을 심판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1163년 10월, 헨리 2세는 잉글랜드 교회의 불만을 청취하기 위해 웨스트민스터 대성당에 공의회를 소집했다. 처음에 주교들은 베켓을 확고히 지지했고, 교회법과 충돌하는 잉글랜드의 관습법을 따를 수 없다고 못 박았다. 공의회는 하루만 열렸고, 헨리 2세는 다음날 베켓에게 주었던 모든 명예를 몰수했다. 이후 헨리 2세는 많은 주교를 회유하는 데 성공했다. 베켓은 이에 맞서 프랑스 국왕 루이 7세와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1세에게 자신을 지지해달라고 청원하는 사절을 보냈다. 또한 양측은 교황청에 사절을 보내 교황의 지지를 호소했다. 교황 알렉산데르 3세는 편을 들기를 거부하고 양측에 자제하고 서로 타협하라고 권고했다.
1164년 1월, 잉글랜드 대법원장 로베르 드 보몽의 조언에 따라 솔즈베리 근처 클라렌던 궁전에서 클라렌던 헌법(Clarendon Constitutions)을 공표했다. 이 헌법은 총 16개 조항으로 구성되었는데, 잉글랜드 성직자의 특권을 제한하고, 교회의 관할권을 축소하며, 교황의 권위를 축소하기 위한 목적으로 실시되었다. 이 법에 따라 교회에 세금이 부과되었고, 영적 재판은 성직자들만 심판할 수 있었으며, 성직자에 대한 형사 사건은 세속 법원에서 심리되었고, 왕의 동의 없이 로마 교황에게 호소하는 것이 금지되었다. 토머스 베켓은 강력한 압력에 못 이겨 이 법을 받아들였지만, 곧 대주교로서 교회를 배신할 수는 없다며 클라렌던 헌법을 따르길 거부했다.
1164년 8월, 베켓은 왕의 허가 없이 프랑스로 가려 했다가 체포되었다. 그 후 10월 6일에 귀족 존 마셜이 베켓을 정식으로 고발했고, 왕실 의회에서 그에 관한 재판이 열렸다. 의회에 출석한 베켓은 궁정 소환을 무시한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았고, 국왕의 뜻에 따라 모든 비토지 재산 몰수 판결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존 마셜의 토지에 대한 원래 분쟁은 대주교에게 유리하게 결정되었다. 그러자 국왕은 추가 고소를 제기했고, 대주교가 총리로 있는 동안 베켓의 지출에 대한 회계를 요구했다. 또 다른 고소는 헌법을 준수하겠다는 선서를 이행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베켓은 그 고소에 답변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고 답했고 결국 두 가지 모두 유죄 판결을 받았다.
베켓은 유죄 판결에 불복하기로 마음먹고, 1164년 11월 2일에 배를 타고 유럽 대륙으로 피신한 뒤 프랑스 왕국의 상스에 임시로 거주했다가 퐁티니로 망명했다. 헨리 2세는 베켓에게 사절을 보내 복귀하라고 권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자, 그와 함께 망명한 서기들의 모든 성직을 몰수했고, 베켓의 가족과 하인들을 추방하라고 명령했다. 베켓은 망명 중에 많은 영국 귀족과 런던 주교 길버트 폴리엇 등 주교들에게 편지를 보내 자기의 입장을 호소했으며, 교황 알렉산데르 3세에게 자신을 지지해달라고 요청했다. 헨리 2세는 잉글랜드 교회의 일상 업무 대부분을 길버트 폴리엇에게 위임했다. 1166년 늦은 봄, 베켓은 헨리 2세에게 입장을 바꾸지 않으면 파문 등 교회의 처벌을 내리겠다고 위협했다. 헨리 2세는 이를 무시했지만, 1166년 5월 2일 교황청이 베켓에게 잉글랜드 교황 특사 지위를 수여하자 당황했다. 베켓은 1166년 성령강림절에 옥스퍼드의 존, 일체스터의 리처드, 릐처드 드 루시, 조슬린 드 발리올 등을 포함한 헨리의 여러 고문과 성직자들을 파문했으며, 솔즈베리 주교인 조슬린 드 보훈 주교도 파문했다.
1166년 6월 24일, 헨리 2세와 길버트 폴리엇은 런던에서 공의회를 소집했다. 런던 공의회는 교황과 베켓에게 모두 편지를 보내 파문에 항소했다. 헨리 2세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시토회 총회에서 퐁티니, 세르캄프, 리그니의 시퇴회 수도원들이 베켓을 지원한 것에 항의하며, 이런 식으로 나오면 시토회를 자기 영지에서 추방하겠다고 위협했다. 이에 시토회 대9표단은 베켓을 찾아가서 그를 내쫓고 싶지는 않지만, 베켓도 시토회에 해를 끼치고 싶지 않을 거라 믿는다고 밝혔다. 이에 베켓은 프랑스 국왕 루이 7세에게 청원했고, 루이 7세는 상스에서 성직자 활동을 할 수 있도록 해줬다.
1166년 12월, 교황 알렉산데르 3세가 잉글랜드 주교들에게 교황 특사를 잉글랜드로 보내 다양한 사건을 심리하겠다는 서신을 보냈다. 그러면서 헨리 2세와 베켓에게 각각 한 통씩 서신을 별도로 보냈다. 교황은 헨리 2세에게 보낸 서신에서, 특사가 문제를 결정할 때까지 대주교가 분쟁을 확대하는 것을 금지했으며, 특사는 잉글랜드에 도착한 뒤 파문당한 사람을 사면할 것이라고 밝혔다. 또한 베켓에게 보낸 서신에서는 자신이 왕에게 캔터베리로 복귀시켜달라고 청원할 테니 더 이상 왕에게 적대적인 움직임을 벌이지 말라고 조언했다. 한편, 옥스퍼드의 존은 로마에서 임무를 마치고 잉글랜드로 돌아온 뒤 특사가 베켓을 폐위할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이를 확인하는 교황의 서신을 길버트 폴리엇에게 보여줬다. 교황은 교황 특사에게 편지를 써서 옥스퍼드의 존의 행동이 교황의 명예를 훼손했다고 불평했지만, 옥스퍼드의 존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주장하지는 않았다.
1167년 11월, 폴리엇은 헨리 2세가 통치하던 노르망디로 소환되어 교황 특사와 왕을 만났다. 약간의 논의와 논쟁 끝에, 헨리 2세는 베켓에 대한 왕의 사건과 주교의 사건을 모두 판결할 수 있다는 데 동의했다. 헨리 2세는 여기에 더해 클라렌던 헌법에 대한 타협안을 제시했고, 특사는 수락했다. 그러나 특사가 11월 18일에 베켓을 만났을 때, 베켓은 왕과의 협상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고 특사를 자신에게 불리한 두 사건의 판사로 받아들이지 않겠다고 밝혔다. 특사는 베켓이 자신들을 판사로 받아들이도록 강요할 권한이 없었기 때문에 협상은 실패로 돌아갔다.
1169년 4월 13일, 베켓은 초대 노퍽 백작 휴 비고드, 솔즈베리의 조셀린, 7명의 왕실 관리, 그리고 런던 주교 길버트 폴리엇을 파문했다.[6] 또한 베켓은 다른 많은 사람들에게 그에게 배상하지 않으면 5월 29일 예수의 승천절에 그들도 파문당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폴리엇은 이에 대응해 교황에게 항소하기로 마음먹고, 6월 말 또는 7월 초에 노르망디로 향했다. 그는 그곳에서 왕을 만났지만, 교황청이 다시 한번 협상을 통해 합의를 확보하려고 시도했기 때문에 로마로의 여정을 멈췄다. 이후 왕과 대주교 사이에서 8월 말과 9월 초에 재차 협상이 시도되었지만, 양자 모두 자기 입장을 고집하면서 결렬되었다.
폴리엇은 다시 로마로 가기로 했지만, 밀라노에서 교황 사절이 루앙 대주교인 로트루에게 사면을 받을 권리를 수여했다는 소식을 듣고 루앙으로 가서 1170년 4월 5일에 사면받고 5월 1일 자신의 교구에 복귀했다. 이 사면의 유일한 요구 사항은 폴리엇이 교황이 부과하는 고행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로트루는 폴리엇의 사면은 그가 사전에 경고받지 않았으므로 애당초 파문의 조건이 성립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베켓과 추종자들은 경고 없이 파문할 수 있는 상황이 있다고 지적했지만, 폴리엇은 자신의 상황은 이에 해당하지 않다고 반박했다. 그러면서 그는 베켓이 "먼저 비난하고 나중에 판단하는 나쁜 습관이 있다"라고 규탄했다.
1170년 6월 14일, 헨리 2세의 아들 청년왕 헨리가 요크 대주교에 의해 잉글랜드의 공동 왕으로서 대관식을 거행했다. 이는 캔터베리 대주교가 잉글랜드 군주를 대관할 권리를 침해한 것이었다. 이에 분개한 교황청은 베켓이 잉글랜드에 파문을 내리는 걸 허용했고, 베켓은 이 사실을 왕에게 알렸다. 이에 헨리 2세는 1170년 7월 베켓과 협상했고, 7월 22일에 합의를 맺고 베켓이 12월 초에 잉글랜드로 돌아가는 걸 허용했다. 그러나 그는 잉글랜드에 도착하기 직전에 요크의 로저, 솔즈베리의 조셀린, 그리고 길버트 폴리엇을 또다시 파문했다. 그러면서 조셀린과 폴리엇은 사면할 수도 있지만, 로저는 대주교이므로 교황만이 로저를 사면할 수 있다고 밝혔다.
베켓에게 파문당한 세 사람이 당시 노르망디에 있던 왕을 찾아가 이 사실을 알리며 도와달라고 청했다. 헨리 2세는 베켓이 자신에게 아무런 언질도 주지 않고 파문을 무작정 감행한 것에 몹시 분노해 이를 갈며 중얼거렸다.
"내가 이 궁정에서 그렇게 먹여주고 승진시켜 줬건만, 저 비천한 성직자에게 멸시를 당하는 주군을 보면서도 구출할 생각도 안 하는 비참한 밥벌레와 배신자밖에 없구나! 저 말썽쟁이 성직자를 내게서 없애줄 사람은 없단 말인가?"
이에 자극받은 기사 4명이 캔터베리로 향했고, 1170년 12월 29일 그곳에 나타난 베켓을 체포하려 했다. 베켓이 교회 성소 내에서 체포되는 걸 거부하자, 그들은 베켓을 도끼로 쳐 죽였다. 이 일은 기독교가 지배하는 유럽 사회에 엄청난 충격을 안겼다. 베켓은 생전에 비타협적인 태도로 일관했기에 인기가 없었지만, 사후에 지역 수도자들에 의해 순교자로 선언되었다. 루이 7세는 이 일을 빌미 삼아 프랑스 교회를 설득해 헨리의 영지에 성무 금지령을 내리도록 했다. 베켓이 막판에 파문한 세 사람은 교회 직위 정지가 확정되었는데, 그 중 폴리엇은 1171년 8월 1일에 사면된 뒤 자신이 베켓의 살인에 연루되지 않았다는 걸 입증한 후에야 1172년 5월 1일에 복귀했다.
1172년 5월, 헨리 2세는 국제적인 비난과 교황청의 파문 압력에 견디지 못하고 아브랑슈 타협안을 제안했다. 그는 이 제안에서 십자군에 직접 나갈 용의가 있으며, 성직자들이 로마 교황청에 호소하는 걸 허용하겠으며, 교회가 반대하는 모든 관습법을 없애겠다고 약속했다. 교황청은 이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고, 이듬해에 발발한 대반란 때 헨리 2세를 지지했다.
2.7. 아들들과의 전쟁
2.7.1. 대반란
1173년, 헨리 2세는 프랑스 왕국, 스코틀랜드 왕국, 플란데런 백국의 지원을 받은 아들들의 반란에 직면했다. 반란의 배경에는 여러 원인이 있었다. 청년왕 헨리는 공동 왕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실질적인 권력이 없으며, 부하들에게 급료를 지급할 돈을 제대로 확보하지 못하는 현실에 강한 반감을 품었다. 또한 전직 가정교사인 토머스 베켓의 죽음에 아버지의 책임이 크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아버지의 후원으로 브르타뉴 공작이 될 예정인 조프루아 2세도 1171년 브르타뉴 공작 코난 4세가 사망했지만 아직 코난 4세의 딸 콩스탕스와의 결혼이 거행되지 않아서 영지가 없어서 재정적으로 어려움이 많았다. 여기에 헨리 2세에게 강한 불만을 품은 엘레오노르 다키텐이 아들들을 부추겼다.1173년 헨리 2세가 막내 아들 존에게 청년왕 헨리의 소유인 주요 요새 3개를 주기로 결정하자, 청년왕 헨리는 이에 항의하다가 파리로 망명했고, 형제 리처드와 조프루아도 뒤따랐다. 엘레오노르도 이들과 합류하려 했지만 4월에 헨리 2세의 군대에 붙잡혔다. 이후 세 아들은 루이 7세의 후원을 받아 반란을 일으켰고, 스코틀랜드 국왕 일리엄 1세, 불로뉴, 플란데런, 블루아 백작들이 여기에 가세했으며, 포허 자작 에우돈 2세와 푸제르 남작 라울 2세도 반군에 가담했다. 잉글랜드, 브르타뉴, 멘, 푸아투, 앙굴렘에서는 주요 귀족들이 반란을 일으켰고, 노르망디에서는 일부 변경 영주들이 봉기했다. 이렇듯 규모가 엄청난 반란이었지만, 대부분의 잉글랜드와 노르망디 귀족들, 그리고 앙주 전역은 헨리 2세를 여전히 따랐으며, 주요 도시와 요새도 헨리 2세를 따랐다.
1173년 5월, 루이 7세와 청년왕 헨리는 노르망디 수도 루앙으로 가는 주요 경로인 벡생을 침공했다. 여기에 플란데런과 블루아 백작들이 출격해 노르망디를 침공했고, 브르타뉴의 반군은 서쪽에서 진군했다. 이에 헨리 2세는 군대를 조직한 뒤 노르망디에서 반란을 일으킨 자들을 모조리 학살하고 생존자들을 노르망디 국경 너머로 밀어냈다. 이후 브르타뉴 공국으로 쳐들어가서 돌(Dol)을 장악하고 돌 마을 인근에서 브르타뉴 반란군을 궤멸했다. 이후 헨리 2세의 용병들은 루제와 라 게르슈 성을 황폐화하는 등 브르타뉴 각지를 휩쓸었다. 헨리 2세는 아들들에게 평화 협약을 제안했고, 지조르에서 협상이 이뤄지기도 했지만, 곧 결렬되었다.
1174년 1월, 청년왕 헨리와 루이 7세의 군대가 다시 공격하여 노르망디 중부로 진격하려 했다. 그러나 공격은 강력한 국경 요새에 가로막혀 지지부진하다가 겨울 날씨가 찾아오면서 중단되었다. 1174년 초, 헨리의 적들은 그를 잉글랜드로 유인한 뒤 노르망디를 장악하려고 시도했다. 스코틀랜드 국왕 일리엄 1세가 잉글랜드 북부 반군의 지원을 받아 잉글랜드 북부를 침공했고, 반군 귀족들이 순조롭게 영역을 장악하던 미들랜드에 스코틀랜드 분견대를 파견했다. 그러나 헨리 2세는 잉글랜드로 가기를 거부하고, 대신 프랑스 남서부에서 반군을 분쇄하는 데 주력했다. 일리엄 1세의 원정은 헨리의 사생아인 제프리에게 격퇴되면서 중단되었다.
플란데런 백작 필리프 1세는 잉글랜드를 침공하겠다는 의사를 밝히고 동앵글리아에 선발대를 파견했다. 그러자 헨리 2세는 7월 초에 잉글랜드로 돌아갔다. 드디어 그가 미끼를 물자, 루이 7세와 필리프 1세는 육로를 통해 노르망디 동부로 침공하여 루앙을 포위했다. 이에 헨리 2세는 1174년 7월 12일 캔터베리에서 공개적으로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폴리엇을 포함한 모든 주교가 자신에게 막대기로 다섯 대를 때리도록 했으며, 캔터베리 대성당의 수도자 80명이 각각 왕에게 세 대를 때리도록 한 다음, 베켓의 성지에 선물을 바치고 베켓의 무덤에서 밤샘 기도를 올렸다. 그는 이를 통해 성직자들의 지지를 확보했고, 흔들리던 왕권을 회복했다.
그 후 헨리 2세는 스코틀랜드 국왕 일리엄 1세가 노섬벌랜드의 알닉에서 지방군에게 패배하고 생포되었으며, 북부의 반란이 진압되었다는 소식을 접하자, 8월에 노르망디로 돌아왔다. 루이 7세와 필리프 1세는 그때까지 루앙을 공략하지 못하고 있었고, 헨리 2세는 프랑스군이 루앙에 대한 마지막 공격을 시작하기 직전에 급습을 가했다. 루이 7세는 막심한 타격을 입고 파리로 퇴각한 뒤, 헨리 2세를 당해낼 수 없다고 여기고 평화 협약을 제시했고, 헨리 2세는 이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헨리 2세는 몽루이에서 협상을 열고 전쟁 전의 현상 유지를 기반으로 관대한 평화를 제안했다. 헨리 2세와 청년왕 헨리는 서로의 추종자들에게 복수하지 않기로 맹세했다. 청년왕 헨리는 3개의 요새를 존에게 양도하는 데 동의했고, 헨리 2세는 그 대가로 아들 헨리에게 노르망디에 있는 2개 성과 15,000 앙주 파운드를 주기로 했다. 리처드 1세와 조프루아 2세는 각각 아키텐과 브르타뉴에서 얻는 수입의 절반을 받았다. 반면에 반란의 주동자인 엘레오노르는 올드 새럼 성에 감금되었다. 반란군 영주들은 잠시 감옥에 갇혔고 어떤 경우에는 벌금을 물었고 그 후 토지로 반환되었다. 잉글랜드와 아키텐에 있는 반란군의 성은 파괴되었다. 스코틀랜드 국왕 일리엄 1세는 1174년 12월까지 연금되었다가 팔레즈 조약에 동의하고 나서야 풀려났다. 이에 따르면, 그는 헨리 2세에게 공개적으로 충성을 맹세하고 헨리의 부하들에게 스코틀랜드의 주요 요새 5개를 넘겨줘야 했다. 필리프 1세는 헨리 2세에 대적하는 동맹에 가담하지 않겠다고 맹세했고, 그 대가로 헨리 2세로부터 정기적인 재정 지원을 받기로 했다.
아들들의 대반란을 진압하고 프랑스 왕국과 플란데런 백국, 스코틀랜드 왕국 등의 침공을 물리치자, 동시대인들은 헨리 2세를 무적의 군주라고 여겼으며, 스페인과 독일의 영주들은 그에게 분쟁을 중재해달라고 요청하거나 동맹을 맺자고 제안했다. 헨리 2세는 자신의 권위를 재확인하기 위해 영국에서 왕의 정의를 확대하기 시작했고, 귀족들 사이에서 지지를 모으기 위해 노르망디에서 시간을 보냈다. 또한 베켓 숭배가 갈수록 확산하는 걸 이용해 자신의 명성을 높였는데, 특히 일리엄 1세가 생포된 건 베켓의 영혼이 잉글랜드에 축복을 내렸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2.7.2. 헨리 2세의 위세와 지속되는 불화
1174년 평화 협정은 헨리 2세와 루이 7세 사이의 오랜 갈등을 해결하지 못했고, 두 사람은 1176년 베리의 지배권을 놓고 경쟁했다. 헨리 2세는 베리 서부에 대한 일부 권리를 가지고 있었지만, 1176년에 아들 리처드 1세가 루이 7세의 어린 딸 아델과 1169년에 약혼하면서 베리 전체가 지참금으로서 자신에게 주어지기로 합의했다고 주장했다. 루이 7세가 그런 사실이 없다고 부인하자, 헨리 2세는 추가적인 압력을 가하기 위해 전쟁을 일으켰다. 이에 교황청이 개입해 전쟁을 뜯어말렸고, 두 왕은 교황청의 중재에 따라 1177년 9월에 불가침 조약을 맺고 공동으로 십자군을 수행하겠다고 약속했다. 오베르뉴와 베리 일부 지역의 소유권은 중재 법원에 회부되었는데, 법원은 헨리에게 유리한 보고를 했다. 헨리 2세는 이 성공에 힘입어 라 마르슈를 그곳의 백작으로부터 매입했다.한편, 리처드 1세는 아버지의 강력한 요구에 따라 아키텐에서 아직도 저항하는 반란군을 잔혹하게 섬멸한 뒤 1179년 아버지에 의해 아키텐 공작으로 인정받았다. 1181년, 조프루아 2세는 마침내 브르타뉴의 콩스탕스와 결혼하여 브르타뉴 공작이 되었다. 존은 대반란 기간에 아버지와 함께 여행했고, 신하들은 헨리 2세가 존을 제일 사랑한다고 확신했다. 헨리 2세는 존에게 점점 더 많은 영지를 하사하다가 1177년에 그를 아일랜드 영주로 삼았다. 한편, 청년왕 헨리는 유럽을 여행하면서 토너먼트에 참가했으며 정부나 헨리와 리처드의 군사 작전에서 단지 잠깐의 역할만 했다. 그러면서 자신의 지위와 권력 부족에 점점 더 강한 불만을 품었다.
청년왕 헨리는 아버지에게 노르망디 공국을 수여해서 자신과 가족을 품위 있게 부양할 수 있게 해달라고 청했다. 헨리 2세는 거부했지만, 아들의 수당을 늘리는 건 동의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청년왕 헨리를 달래기에 충분하지 않았다. 헨리 2세는 리처드와 조프루아가 청년왕 헨리에게 그들의 땅에 대한 충성을 바치도록 해, 또 다른 내전을 막으려 했다. 그러나 리처드는 청년왕 헨리가 아키텐에 대한 권리가 없다고 여기고 거부했다. 이에 분개한 청년왕 헨리는 리처드의 통치에 불만이 있는 아키텐의 일부 불만스러운 영주들과 동맹을 맺었고, 조프루아 2세는 청년왕 헨리 편을 들어 브르타뉴에서 용병 군대를 일으켜 푸아투를 위협했다. 급기야 1183년, 청년왕 헨리가 반란을 일으키기 위해 추종자들을 대거 끌어들였고, 이 소식을 접한 헨리 2세는 리처드 편을 들어 청년왕 헨리를 응징하려 했다.
그러던 1183년 6월, 청년왕 헨리는 이질에 걸려 사망했다. 전승에 따르면, 청년왕 헨리는 죽기 전에 아버지와 화해하고 싶었고, 아버지에게 임종 전에 자신을 만나달라고 부탁했다. 하지만 함정일 것을 우려한 헨리 2세는 헨리의 진중으로 가는 대신 용서의 의미로 자신의 반지를 보내주었다고 한다. 헨리는 그 반지를 꼭 쥔 채로 사망했고 아들의 부고를 들은 헨리 2세는 이렇게 절규했다고 한다.
"그 아이는 나를 아주 괴롭게 했지만, 나를 더 괴롭혀도 좋으니, 그가 살아났으면 좋겠다!"
그렇게 청년왕 헨리가 사망한 뒤, 헨리 2세는 왕위 계승 계획을 재정비했다. 그는 리처드 1세를 잉글랜드 왕으로 세우기로 하면서도, 자기가 죽을 때까지는 실질적인 권력을 갖지 못하게 했다. 조프루아 2세는 브르타뉴 공국을 계속 유지했고, 헨리 2세의 총애를 받는 존은 리처드 대신 아키텐 공작에 선임되었다. 그러나 리처드는 아키텐 공국에 깊은 애착을 가졌으며, 잉글랜드의 공동왕이라는 무의미한 역할과 바꾸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는 "아키텐 공국은 어머니의 영지인데, 왜 아버지가 멋대로 공작을 정하는가?"라고 격렬하게 항의했다. 이에 분노한 헨리 2세는 존과 조프루아 2세에게 아키텐으로 진군해 리처드를 물리치라고 명령했다. 이렇게 벌어진 짧은 전쟁은 1184년 말에 웨스트민스터에서 양자 간의 휴전 협정으로 끝났다. 헨리 2세는 1185년 초 엘레오노르를 노르망디로 데려와서 리처드에게 아버지의 명령에 복종하라고 지시했고, 만약 이를 따르지 않으면 노르망디와 잉글랜드를 조프루아에게 넘길 수도 있다고 위협했다. 이에 리처드는 아키텐에 있는 공작의 성을 헨리 2세에게 넘기기로 했다.
2.7.3. 리처드 1세의 반란과 최후
1185년, 존은 아일랜드 원정에 착수했다. 그러나 그는 아일랜드 지역 통치자들의 반감을 샀고, 앵글로-노르만 정착민들과 동맹을 맺지 못했으며, 아일랜드에 대한 군사적 영향력이 약화하는 걸 수습하지 못한 채 잉글랜드로 돌아갔다. 1186년, 헨리 2세는 존에게 좀 더 많은 군대를 맡겨서 아일랜드로 보내려 했다. 그러던 중 조프루아 2세가 파리에서 열린 마상창시합에 참여했다가 어린 자녀 2명을 남기고 사망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그 후 프랑스 국왕 필리프 2세가 브르타뉴 공국과 조프루아 아이들의 양육권을 요구했고, 리처드가 툴루즈에 파견한 군대를 철수하라고 요구하라고 권고했다. 그러면서 만약 자기 뜻을 따르지 않는다면, 노르망디 공국을 침공하겠다고 위협했다. 여기에 더해, 오랫동안 지지부진하던 리처드 1세와 아델 간의 결혼을 완료하거나 청년왕 마르그리트의 사망으로 과부가 된 마르그리트의 지참금인 벡생 백국을 돌려달라고 요구했다. 헨리 2세가 무응답으로 일관하자, 필리프 2세는 군대를 일으켜 베리를 침공했고, 헨리 2세는 교황의 개입으로 휴전이 이루어지기 전에 샤토루에서 프랑스와 맞선 대규모 군대를 동원했다 이후 양자 간의 협상이 이어지던 중, 필리프 2세는 리처드 1세에게 헨리 2세에 대항하여 동맹을 맺자고 제안했고, 리처드 1세는 이를 진지하게 고민했다.1187년, 예루살렘이 살라흐 앗 딘 유수프에게 공략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이에 새로운 십자군을 일으켜 예루살렘을 탈환해야 한다는 여론이 전 유럽을 휩쓸었다. 리처드 1세는 이에 열광해 십자군에 가담하겠다는 의사를 밝혔고, 헨리 2세와 필리프 2세는 1188년 초에 비슷한 의도를 밝혔다. 군자금 조성을 위한 특별세가 전국에 부과되었고, 물자와 수송에 대한 계획이 세워졌다. 리처드 1세는 십자군을 조성하는 한편, 1188년 아키텐에서 자신의 정적들을 물리친 뒤 다시 툴루즈 백작을 공격했다. 이는 헨리 2세와 필리프 2세 사이의 휴전 협약을 훼손했고, 양측은 전쟁이 다시 벌어질 것을 예상해 대규모 병력을 동원했다. 필리프 2세가 단기 휴전 제안을 했지만, 헨리 2세는 거부했다. 이 소식을 접한 리처드 1세는 아버지가 자기가 십자군으로 떠나는 걸 저지하려고 일부러 휴전을 맺기를 거부하고 있다고 여기고 강한 반감을 품었다.
1188년 11월, 필리프 2세는 평화 회담을 열고 헨리 2세에게 평화 협정을 공개적으로 제안했다. 그는 리처드 1세와 아델의 결혼을 거행하고, 리처드를 후계자로 공식 지명한다면, 자기가 내건 영토 요구를 철회하겠다고 제안했다. 헨리 2세가 이 제안을 거부하자, 리처드 본인이 아버지에게 자신을 후계자로 인정해달라고 요구했다. 헨리 2세는 침묵했고, 리처드 1세는 공개적으로 편을 바꿔서 모인 귀족들 앞에서 필리프 2세에게 경의를 표했다. 이때 교황청이 개입해 기독교인끼리 싸울 때가 아니라고 호소했고, 1189년 라 페르테 베르나르에서 새로운 회의가 열렸다. 이번 회담에서, 헨리 2세는 리처드가 아닌 존이 아델과 결혼하면 어떻겠냐고 제안했지만 거부당했다.
아버지가 자기가 아닌 존을 후계자로 세우려는 뜻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사랑하는 어머니 엘레오노르를 여전히 감금해 두는 것에 강한 반감을 품은 리처드 1세는 마침내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르망에 있던 아버지를 기습 공격했다. 헨리 2세는 가까스로 탈출한 뒤 알랑송으로 피신했다. 이후 리처드 1세가 프랑스군과 힘을 합쳐 노르망디를 압박하자, 헨리 2세는 적의 추격에 이리저리 쫓기다가 관리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남쪽의 앙주로 방향을 돌렸다. 당시 출혈성 궤양을 앓던 헨리 2세는 극도로 더운 날씨로 인해 병세가 악화했다. 그러다가 적군과 마주칠 위기에 몰리자 쉬농 성으로 피신했다. 이후 리처드 1세와 필리프 2세가 협상을 제안하자, 헨리 2세는 동의했다.
이제 병세가 완연하여 죽음을 눈앞에 둔 헨리 2세는 말에 간신히 앉은 채 발랑에서 두 사람을 만났다. 그는 필리프 2세에게 경의를 표하고, 아델을 보호자에게 넘기고, 그녀가 십자군이 끝난 뒤 리처드와 결혼하는 것에 동의했으며, 리처드를 자신의 상속인으로 인정했다. 또한 필리프 2세에게 보상을 지불하고 주요 성을 보증으로 주기로 했다. 헨리는 들것에 실려 쉬농 으로 돌아갔는데, 그곳에서 존이 내전 도중에 기사들과 함께 리처드 편을 들었다는 소식을 접했다. 자신이 가장 사랑하고 아꼈던 막내아들 존마저 휘하의 부하 기사들과 함께 리처드의 편에 섰다는 사실에 크게 상심한 헨리 2세는 열병과 궤양에 화병 증세까지 겹쳐 쉬농에서 더 이상 운신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일설에 따르면, 그는 죽기 직전에 주변 사람들이 하느님께 기도할 것을 권하자라며 버럭 화를 내기까지 했다고 한다. 하지만 공식 기록에 따르면, 그는 몇 분간 의식을 회복하고 성찬 고백을 했다고 한다. 1189년 7월 6일 56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죽어가는 헨리 2세의 곁을 끝까지 지킨 사람은 서자인 제프리[7]와 충성스러운 심복 윌리엄 마셜뿐이었다.[8] 전설에 의하면 리처드 1세가 아버지의 시신을 보기 위해 방안에 들어서자, 갑자기 헨리 2세의 시신의 코에서 피가 흘러나왔다고 한다. 이는 그만큼 헨리 2세가 리처드를 저주하며 죽어갔다는 뜻이기도 하다.
헨리 2세는 생전에 리무쟁에 있는 그랑몽 수도원에 안장되기를 원했지만, 더운 날씨 때문에 시신을 운반하는 것이 불가능해서 인근의 퐁트브로 수도원에 안장되었다. 이렇게 헨리 2세가 사망한 후 리처드 1세가 아버지의 영지를 성공적으로 차지했고, 그때까지 연금 중이었던 엘레오노르는 풀려난 뒤 아키텐을 되찾고 제3차 십자군 원정을 떠난 아들을 대신해 통치했다.
3. 자식들
자식들이 하나 같이 웬수들이었다. 다만 이는 아들들이고, 딸들과는 관계가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이건 헨리 2세 자신이 자초한 면도 컸다. 국정을 열심히 하고 워낙 바쁘게 돌아다닌데다 아내와 자식들이 있는 잉글랜드에 자주 오지를 않았기 때문에[9], 자식들 대부분은 성장기에 아버지 얼굴 한번 보기가 힘들었다. 보다못한 캔터베리 대주교가"아무리 비정한 부모라도 폐하보다는 나을 겁니다."
라면서 자식들 좀 자주 보라고 권할 정도였다. 이러니 장성한 아들들이 아버지에게 별 애정이 없고, 자주 보던 어머니와 친했던 것은 당연한 노릇이었다. 게다가 가정에 무심하고 바람기로 인해 아내와 사이가 나쁜데도 화해하지 않고, 반란 이후 아내를 감옥에 가두고는 풀어줄 생각을 하지 않으니 아들들이 아버지를 좋게 볼 수 없었다. 특히 권력에 대한 집착이 강해서 아들들에게 직책만 주었지 권한을 주지 않았기에 이는 아들들을 힘들게 만들었고, 아들들의 영지 분배도 독단적으로 하여 이는 아들들과의 불화를 커지게 만들었다. 청년왕 헨리에게는 노르망디, 리처드에게는 아키텐, 제프리에게는 브르타뉴, 막내 존에게는 아일랜드의 통치권을 약간씩 주고, 처리하기 힘든 안건을 도와주는 식으로 후계자 수업을 시켰다면 아들들의 불만은 훨씬 줄었을 것이다.프랑스의 왕 루이 7세나 필리프 2세가 정치적인 이유로 부자들 사이를 갈라놓으려 했다는 말도 있지만 어쨌든 막내아들인 존 왕과 딸들을 빼고는 사이가 안 좋았다고 한다.[10] 다만 막내 존왕은 아버지를 배신했을 뿐만 아니라 헨리 1세부터 부지런히 모은 프랑스 쪽의 영토를 날린 일등 공신이었다. 리처드 1세의 공격을 받은 헨리 2세의 주변에 남은 아들은 오로지 서자 제프리 뿐이었다고 한다. 헨리 2세는 제프리에게
"그놈들은 후레자식들이고 너만이 내 진정한 자식이다!"
라고 말하기도 했다고 한다.그래도 차남이었던 청년왕 헨리를 많이 사랑하여 그가 반란하다 급사했을 때
"나를 많이 괴롭게 만들었지만, 나를 더 괴롭혀도 좋으니 그가 살아있기만 하면 좋겠다."
라고 절규했다고 한다. 하지만 4남 제프리 2세의 급사 소식을 들었을 때 웨일스의 제럴드는 헨리 2세가 슬퍼한 이유가 차남인 청년왕 헨리의 죽음을 다시 떠올렸기 때문이라고 했으며, 호버든의 로저는 막내 존만 찾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연회를 신나게 즐겼다고 증언했다.4. 사적인 면
- 전술처럼 그야말로 '영웅호색을 실감케 했던 자'로서 생전 공공연한 간부로 불렸다. 개중에서 유명한 정부는 잉글랜드 출신인 미녀 '클리포드의 로자문드'로, 아내인 아키텐의 엘레오노르를 연금했을 때, 대놓고 염문을 뿌리고 다녔다.
머리색은 아주 훌륭한 붉은색이었고, 나이가 든 탓에 머리가 다소 희끗했다. 키는 중간이고 작은 사람들 사이에서 아주 크게 보이지 않았고 그렇다고 큰 사람들 사이에서 작게 보이지도 않았다. 그의 머리는 둥글다. (중략) 평화로울 때의 눈빛은 완전하고 정직하고 비둘기 같았으며 분노했을 때는 불길로 번들거렸다. 기수의 휜 다리, 넓은 가슴, 복서의 팔은 모두 그가 강하고 재빠르고 용맹한 사내임을 증명했다. 대머리의 조짐은 없었지만 머리를 짧게 깎았다. 얼굴은 크고 네모지고 사자를 연상시켰다.
블루아의 피터
블루아의 피터
1,000번이라도 돌아와 다시 보고 싶었다. 중간을 약간 넘은 키에 훌륭한 팔다리와 잘생긴 얼굴로 축복받았다. 신체 능력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다른 자들은 못하는 묘기를 언제나 성공했다.
월터 맵
월터 맵
안색이 붉고 거무스름한 데에다 주근깨투성이고, 머리가 크며 둥글다. 눈은 회색이고 충혈되었으며 분노로 번들거렸다. 표정이 강렬했다. 목소리가 약간 떨렸고 목은 짧고 앞으로 툭 튀어나왔다. 하지만 가슴이 드넓고 팔은 근육질이었다. 살집이 좋은 체구였는데 배가 거대하게 튀어나왔다.
웨일스의 제럴드
웨일스의 제럴드
- 아버지 앙주 백작 조프루아 5세는 미남 백작으로 불릴 만큼 미남으로 유명했고, 헨리 2세 본인도 앙주 가문 특유의 붉은 머리를 물려받았다. 생애 내내 온갖 식이요법과 운동으로 다이어트에 열중했고, 그만큼 엄청난 운동량을 자랑했는데 살을 빼기 위해서라고 말했다고 한다.
5. 필리프 2세를 향한 호의
헨리 2세의 부친이었던 앙주 백작 조프루아 5세는 아키텐의 엘레오노르가 프랑스 왕 루이 7세와의 결혼 생활에서 낳았던 장녀 마리를 헨리와 결혼시켜 프랑스 왕으로 옹립하려 했었지만 루이 7세가 이를 거절했다.이후 헨리 2세는 루이 7세와 이혼한 엘레오노르와 결혼해서 여러 자식을 얻었고, 그중의 차남인 청년왕 헨리를 (여전히 아들이 없던) 루이 7세와 카스티야 공주 콩스탕스 사이의 장녀 마르가리트와 결혼시켜 다시금 프랑스 왕위 획득에 도전하였다. 비록 여성의 왕위 상속을 금하는《살리카법》이 상황에 따라 프랑스 왕국에 잔존하고 있었으나, 여성의 왕위 상속을 금한 것이지 모계 상속, 즉 그 여성이 나은 자식 또는 그 남편을 통한 간접적 모계 계승까지 막은 것은 아니기에 프랑스 왕위를 획득할 만한 자격이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그의 계획은 끝내 수포로 돌아갔으니, 루이 7세가 샹파뉴의 썩은 백합[12] 아델과의 사이에서 기어이 아들 필리프 2세를 얻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었다.
그가 태어났을 때 가장 유명한 사건이 있었는데 "파리 전체가 불바다에 휩쓸린 것처럼 보였고, 파리 신민들은 온 성당의 종을 울리며 거리로 뛰어나와 횃불을 켜고, 주먹을 휘두르며 '이 아이가 잉글랜드 국왕의 망치가 될 것'이라고 소리쳤다." 헨리 2세도 사악한 징조로 받아들였다. 필리프 2세의 생년월인 1165년 8월(아우구스투스)에 2개의 혜성이 잉글랜드 서부와 북부 지역에서 각각 관측되었고, 잉글랜드의 왕실 점술가들이 일제히 예언하길 헨리 2세의 파멸과 앙주 제국의 패망을 뜻하는 것이었다.
보통 알려진 것과 반대로 필리프 2세의 치세 초반부터 1188년 초까지 헨리 2세는 그의 오만방자한 언행을 참아 주고 각별히 보호했다고 여겨지며, 그런 헨리 2세의 이 ‘새로운 태도’는 노망이 의심스럽다는 우스갯소리가 나올 수준으로 당시 대륙과 잉글랜드를 놀라게 했다고 한다. 필리프 2세를 데리고 다니며 봉신들 앞에서 연장자의 능숙함을 보여주었고, 심지어 평생 터득한 지혜와 정치적 비책들을 전수 해 주었으며, 소년은 이 연장자의 가르침에 자신을 온전히 복종시켰다. 웨일스의 제럴드는 헨리 2세가 루이 7세와 엘레오노르의 이혼 이전부터 상위 주군의 아내를 빼앗을 속셈을 품었다고 비난하면서도 필리프 2세가 플랑드르를 중추로 한 북프랑스 반란을 종식할 수 있었던 이유는 헨리 2세의 지속적인 원조와 보호가 상당한 것이었음을 짤막하게 인정했다.
차남 청년왕 헨리가 인생의 낙이었던 마상창시합을 제쳐두고 필리프 2세의 보호에 열중했을 때 잠시 떼어놓기도 했지만 반란에 관한 의심 탓이 아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아들이 재반란을 일으키기 직전까지 허구한 날 들락날락한 곳이 필리프 2세의 거처였을 뿐만 아니라 정황도 다분했음에도 헨리 2세의 보복의 칼날은 필리프 2세에게 향하지 않았다. 프랑스 신부에 의하면 헨리 2세가 아들이 반란을 일으켰던 같은 해에 필리프 2세의 영지에 사냥터 마련을 돕겠다는 명목으로 선물 공세를 아낌없이 퍼부었다고 한다.[13] 두 번이나 반란을 일으켰던 4남 제프리 2세가 3남 리처드를 제치고 필리프 2세와 끈끈한 동맹을 맺었다는 소문이 자자했던 판국에도 병에 시달리게 되자 필리프 2세를 자신의 거처에 며칠 묵게 하고는 위로를 받고자 하여 그의 분노를 사기도 했다.
필리프 2세가 헨리 2세와 아들들 사이를 이간한 것을 논할 때 필리프 2세와 헨리의 아들들 중심으로 서술하고 그 결과의 양상이 필리프의 공적으로 주로 흡수되는 경향에 따라 헨리 2세가 베풀었던 이유 모를 수수께끼 같은 행적은 상대적으로 적잖이 논외가 되곤 한다.
6. 평가
국왕으로서의 능력이 뛰어나고 통치는 잘하긴 했다. 그의 치세 아래서 스티븐과 마틸다의 내전 이래로 피폐해진 왕국의 체제가 복구되었고 부유해졌으며, 국왕을 정점으로 하는 통치 시스템이 완성되었기 때문에 평이 좋은 편이다. 그러나 그의 왕권 확대 정책은 아직 수면 위로 올라오지는 않았으나, 서서히 귀족들과 교회의 불만을 사기 시작했고, 이는 후대에《마그나 카르타》사건으로 정점을 찍는다.또한 그는 가족들에게 너무나 무신경했다. 수많은 정부들과 바람을 피워 엘레오노르와 그 소생의 자식들과 관계가 멀어졌고, 여러 아들들 가운데서도 막내아들 존만을 편애했다. 이 때문에 아내 엘레오노르와 존을 제외한 다른 아들들, 특히 리처드 1세와 제대로 척을 졌다. 그와 아들들의 불화는 끝을 모르고 커지다가 급기야 폭발하여 골육상쟁의 내전으로 번지고 말았다. 이로 인해 다른 많은 업적들에도 불구하고 헨리 2세를 좋게만 평가하기는 어렵다. 특히 그 지경까지 가 놓고서도 신을 원망하고 운명을 한탄할 뿐, 정작 자기가 한 짓은 반성하지 않고 끝까지 본인은 잘못이 없다고만 했으니, 아버지로서나 남편으로서는 결코 좋은 사람이었다고 말할 수 없다. 한마디로, 치국은 잘 해 놓고도 수신제가를 전혀 못 해서 파멸에 이른 왕이라 하겠다.
7. 가족 관계
7.1. 조상
본인 | 부모 | 조부모 | 증조부모 |
헨리 2세 (Henry II) | <colbgcolor=#fff3e4,#331c00> 앙주 백작 조프루아 5세 (Geoffrey V, Count of Anjou) | <colbgcolor=#ffffe4,#323300> 앙주 백작 풀크 5세 (Fulk V, Count of Anjou) | |
앙주 백작 풀크 4세 (Fulk IV, Count of Anjou) | |||
베르트라드 드 몽포르 (Bertrade de Montfort) | |||
아렝뷔르가 드 라 플레슈 (Erembourg de la Flèche) | |||
멘 백작 엘리아 1세 (Elias I, Count of Maine) | |||
샤토-뒤-루아르의 마틸드 (Mathilda of Château-du-Loire) | |||
잉글랜드의 마틸다 (Matilda of England) | |||
헨리 1세 (Henry I of England) | |||
윌리엄 1세 (William I of England) | |||
플랑드르의 마틸다 (Martilda of Flanders) | |||
스코틀랜드의 마틸다 (Matilda of Scotland) | |||
말 콜룸 3세 (Malcolm III of Scotland) | |||
웨식스의 마거릿[14] (Margaret of Wessex) |
7.2. 자녀
자녀 | 이름 | 출생 | 사망 | 배우자/자녀 |
1남 | 푸아티에 백작 기욤 9세 (William IX, Count of Poitiers) | 1153년 8월 17일 | 1156년 | |
2남 | 청년왕 헨리 (Henry the Young King) | 1155년 2월 28일 | 1183년 6월 11일 | 프랑스의 마르그리트 슬하 1남 |
1녀 | 작센 공작부인 마틸데 (Matilda, Duchess of Saxony) | 1156년 6월 | 1189년 6월 또는 7월 | 하인리히 사자공 슬하 3남 1녀[15] |
3남 | 리처드 1세 (Richard I) | 1157년 9월 8일 | 1199년 4월 6일 | 나바라의 베렝겔라 |
4남 | 브르타뉴 공작 조프루아 2세 (Geoffrey II, Duke of Brittany) | 1158년 9월 23일 | 1186년 8월 9일 | 브르타뉴 여공작 콩스탕스 슬하 1남 1녀[16] |
2녀 | 카스티야의 왕비 레오노르 (Eleanor, Queen of Castile) | 1161년 | 1214년 10월 31일 | 알폰소 8세 슬하 1남 4녀[17] |
3녀 | 시칠리아의 왕비 조반나 (Joan, Queen of Sicily) | 1165년 10월 | 1199년 9월 4일 | 구기에르무 2세 |
툴루즈 백작 레이몽 6세 슬하 2남 1녀 | ||||
4남 | 존 왕 (John) | 1166년 12월 24일 | 1216년 10월 19일 | 글로스터 여백작 이사벨라 |
앙굴렘 여백작 이자벨 슬하 2남 3녀[18] |
7.3. 사생아
- 제프리(1152 ~ 1212): 요크 대주교.
- 윌리엄 롱게스피(1167 ~ 1226): 제3대 솔즈베리 백작.
8. 여담
- 34년 재위 중에 그가 잉글랜드에 체류한 건 14년 정도였다. 어찌 보자면 아들 리처드 1세와 비슷한 기록. 마틸다가 헨리 1세의 임종 당시 잉글랜드 국내에 없었던 탓에 잉글랜드 최초의 여왕 자리를 강탈당한 것처럼, 잉글랜드의 왕이 가지고 있는 프랑스 영지는 프랑스 왕의 신하라는 미묘한 위치[19] 때문에 프랑스에 있었던 시간이 길어 실질적으로는 프랑스 쪽에 더 가까웠던 듯하다.[20]
- 앨프레드 대왕의 후손이기도 하다. 헨리 2세 때부터 영국 왕실에 다시 고대 웨식스 앵글로색슨 왕들의 피가 흐르게 되었다. 다만 윌리엄 1세의 왕비인 마틸다 역시도 알프레드 대왕의 후손이어서 노르만 왕가도 앵글로색슨 왕가의 피가 전혀 섞이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다.
- 아버지 조프루아 5세를 통해선 앙주 백작이자 예루살렘 왕국의 공동 국왕인 풀크[22]의 친손자다. 이런 가족관계로 풀크가 예루살렘 여왕 멜리장드와 재혼하여 낳은 아모리 1세[23]의 아들 보두앵 4세와는 나이차가 많이 나는 친사촌이었다.
9. 대중매체에서의 등장
- 《겨울의 사자(The Lion in Winter)》라는 희곡 / 영화는 헨리 2세와 아내, 자식들의 갈등을 다루고 있다. 명작이라고 하니 관심있는 사람들은 한 번씩 보는 것도 좋다. 영화로도 2차례 만들어졌는데, 1968년판과는 달리 2003년판은 텔레비전용 영화이다. 두 작품 모두 캐스팅이 화려하다. 주인공인 헨리 2세부터 당대의 명배우인 피터 오툴[24]과 패트릭 스튜어트가 각각 맡았으며, 히로인인 아키텐의 엘레오노르 또한 당대의 명배우인 캐서린 헵번과 글렌 클로즈가 열연했다. 1968년판에서는 안소니 홉킨스가 헨리 2세의 차남 리처드 1세로, 티모시 달튼이 프랑스 왕 필리프 2세로 출연했다. #
- 《대지의 기둥》에도 나오는데, 여기서는 그의 어머니 마틸다가 모드라는 이름으로 나온다. 헨리가 태어난 후, 모드는 헨리를 데리고 스티븐을 피해 프랑스로 도피한다. 잠깐 모드가 우세를 점해 잉글랜드로 돌아오기도 했지만 다시 프랑스로 도망갔다가 장성하여 역공을 걸어 스티븐의 아들인 유스타스를 죽여버리고 왕위에 앉는다.
- 《먼나라 이웃나라》 영국 편에서 앙주 제국의 수립을 다룰때 등장하며, 말년에 존에게 배신당한 충격으로 쓰러져 숨을 거둔다.
- 《크루세이더 킹즈 시리즈》에서는 크루세이더 킹즈 2은 연도를 조정하면 플레이할 수 있으며, 크루세이더 킹즈 3은 1178년 시나리오에서 바로 플레이 가능하다.
- 《김태권의 십자군 이야기》에서는 한마 유지로로 패러디되어 권왕님이 되어버린 아들과 대립한다.[25] 그의 2남인 헨리, 4남 조프리, 5남 존 등은 각기, 토키, 켄시로, 쟈기로 패러디되었다. 엄창난 포스를 풍기며 아들과 막상막하의 대결을 펼쳤으나, 실제 역사대로 점차 수세에 몰리다가 누구보다도 믿었던 막내아들에게 배신당한 충격으로 쓰러져 세상을 떠난다.
- 19세기 미국의 소설가로 로빈 후드 민담을 정리한 '하워드 파일'의《로빈 후드의 유쾌한 모험》에서 잉글랜드의 왕으로 등장한다. 궁술 대회를 열어 자신이 총애하는 기사들에게 상금을 주려 했으나 엘레오노르 왕비가 데려온 로빈 후드 일행이 상금을 싹쓸이하자 로빈 후드를 죽이려 한다. 그러나 왕비의 간곡한 설득에 마음을 돌리고 로빈을 살려 준다.
- 대체소설 십자군의 왕이 되었다에선 잉글랜드 에피소드의 빌런 역할로 나왔고 결국 아들 헨리와 리처드가 화해하고 자신의 패배가 확정되자 신을 모독하는 저주를 내뱉다가 결국 자신이 자진해 십자군에 참전, 전사한다.
[1] 당시 앙주 백작령에 속해 있었음.[2] 당시 투렌 백작령에 속해 있었으며, 헨리 2세가 전략적으로 크게 성장시킨 곳이다.[3] 11343 ~ 1158, 낭트 백작[4] 1136 ~ 1164, 디에프 자작[5] 헨리의 동생 조프루아가 도중에 그녀와 결혼하려고 납치를 시도했지만, 사전에 경고받은 엘레오노르가 다른 길로 돌아가면서 실패했다.[6] 이때 베켓은 폴리엇을 "양의 탈을 쓴 늑대"라고 규탄했다.[7] 적4남 조프루아 2세가 아니다. 저 당시 제프리 2세는 이미 죽은 뒤였다. 당시 성직자였지만 전쟁터에 참전하며 전투 경험이 있었기에 아버지의 편에 서서 국왕군의 기사로 활약했다.[8] 유일하게 믿었던 존에게 배신당한 충격으로 절망에 빠져있었던 헨리 2세는 끝까지 자신의 곁을 지키고 간호하던 서자 제프리를 보고는 "너야말로 나의 진정한 아들이구나!"라며 감격했다고 한다. 특히 헨리 2세는 죽기 전에 제프리에게 소원을 물었을 때 제프리가 요크 대주교가 되고 싶다고 하자 자신의 인장으로 직접 그를 요크 대주교에 임명한다고 하여 칙서까지 작성해 주었다. 헨리 2세 사후 리처드 1세도 이를 보고는 그대로 허락해 주면서, 제프리는 요크 대주교가 되었다.[9] 헨리 2세의 재위기간은 34년인데 잉글랜드에서 있었던 시간은 14년이었다. 한마디로 재위의 대부분을 프랑스에서 보낸 것이다.[10] "아들 리처드 1세의 약혼녀를 중간에서 가로챘다."는 의혹도 있다. 이 설을 따르면 본인도 잘못이 크다고 할 수 있다.[11] 헨리 2세의 문서의 프로필 그림은 웨일스의 제럴드가 묘사했다.[12] 그 용모는 성모 마리아의 상징인 백합처럼 대단히 아름다웠으나, 그 행실은 자신의 미모만 믿고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오만하였기에 붙은 별명이라고 한다.[13] 앙주 제국 곳곳을 휘젓고 다니며 온갖 짐승들을 사로잡게 하고 짐승들을 위한 전용 우리와 먹이까지 넘치도록 주었다고 한다.[14] 망명자 에드워드의 딸.[15] 오토 4세 등[16] 아르튀르 1세 드 브르타뉴 등[17] 베렝겔라, 포르투갈의 왕비 우라카, 프랑스의 왕비 블랑슈, 아라곤의 왕비 레오노르, 엔리케 1세[18] 헨리 3세 등[19] 잉글랜드 왕위는 프랑스 왕의 신하에 해당되지 않았다.[20] 이건 윌리엄 1세가 잉글랜드의 왕이 되면서 시작된 것이었다. 그러나 친숙했든 어쨌든 저런 입장 때문에 정치적으로는 계속 충돌했다.[21] 아서 왕처럼 그도 자식의 배신으로 인해 비참한 최후를 맞은 걸 생각하면 묘한 대목이다.[22] 앙주 백작으로는 풀크 5세 당주(Foulques V d'Anjou)로 불린다.[23] 헨리 2세에겐 아버지 조프루아 5세의 이복동생으로 이복숙부가 된다.[24] 피터 오툴은 1964년작 영화 베켓에서도 헨리 2세를 연기했다. 토마스 베켓 역으로는 리처드 버튼이 열연.[25] 여기서 나온 드립이 바로 "십자군은 기사의 의무다무다무다무다" vs "네놈이나 실컷 다녀오라오라오라오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