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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03-02 16:32:20

앙주 가문

Maison de Gâtinais-Anjou
House of Anjou
파일:앙주 백작 조프루아 5세 문장.svg

1. 개요2. 기원3. 성장4. 앙주 제국(Angevin Empire)/플랜태저넷 왕조5. 역대 앙주 가문의 수장6. 전설7.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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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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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크 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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튜더 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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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름 불명의 아들 두 명이 있었음.[2] 단 풀퀴크가 로트로드의 자식인지 고츠프레드의 자식인지는 논란이 있지만 오늘날에는 보통 고츠프레드의 자식으로 본다. 앙주 가문 문서 "기원" 항목 참조.[3] 노장 백작위와 모르타뉴 백작위를 합쳐 "페르슈 백작"이란 호칭을 처음으로 사용했다.

사실 앙주 백작으로서 앙주를 차지하던 가문은 흔히 지칭되며 또 본 문서에서 다루고 있는 앙주 가문 말고도 두 가문이 먼저 앞에 있었다. 첫번째로는 로베르 왕조로, 서프랑크 왕국 초대 국왕 샤를 2세강철공 로베르에게 수여하며 시작되었다가 그의 아들 외드 대에서 끊긴다. 두번째로는 잉젤거 가문으로, 마찬가지로 샤를 2세가 소귀족이었던 산림관리관의 아들 잉젤거(Ingelger)[1]에게 자작위를 수여하고, 그의 아들 풀크 1세 당주(Foulques d'Anjou)가 카페 왕조의 창건자 위그 카페의 부친 위그 르 그랑에게 앙주 백작위를 수여받으며 이후 약 130년 간 세습했다. 이후 1060년 사망한 조프루아 2세 마르텔(Geoffroy II Martel)이 후계자 없이 사망하면서, 여동생인 에멩가르드가 샤토됭 가문의 조프루아 2세와 결혼하며 그쪽으로 앙주 백작위가 넘어갔다.

2. 기원

한편 부계로 앙주 가문이 되는 샤토됭 가문도 상당히 유서깊은 혈통의 프랑크 귀족 가문이었다. 시조 고츠프레드 1세(조프루아 1세)(Gauzfred I/Geoffroy I)는 9세기에 잠시 네우스트리아 변경백(marquess of neustria)직을, 이후로는 북프랑스 메인(maine) 백작위를 대대로 세습한 로르곤 가문(house of rorgonids)[2][3]의 방계 혈통이었다. 그는 샤르트르블루아의 백작 티보 1세(테오발트 1세) 드 블루아(Thibaud de Blois)[4]로부터 샤토됭 자작(vicomte de Châteaudun)으로 임명받았고 샤토됭 가문을 창건하였다. 샤르트르 백작령에 이 샤토됭 지방이 속해 있었고, 티보 1세의 아내의 친정과 조프루아 1세의 본가가 위에서 말한 로르곤 가문이었으므로 둘은 인척 관계였기 때문이다. 이후 샤토됭 가문은 점차 본가인 로르곤 가문의 영향력이 약화되자 독립적인 세력을 형성했으며, 블루아 가문과 혼인을 맺는 등 중북부 프랑스의 주요 귀족가문으로 떠오르게 된다. 또한 혼인을 통해 페르슈(Perche)와 가티네(Gâtinais) 지방의 방계 가문이 생겨나게 되었고, 이중 가티네 계열에서 가티네 백작 조프루아 2세가 위에서 나온 앙주 여백작 잉젤거 가의 에멩가르드와 결혼하여 앙주 백작위를 물려받게 되면서 앙주 가문(가티네-앙주(프), 앙주-샤토됭(영))이 되었다. 1217년 페르슈 계열의 가문이, 1249에는 종가 샤토됭 가문이 각각 부계가 끊겨 과거 본가였던 로르곤 가문의 외가로서 다리 건너 먼 친척이었던 프랑스 카페 왕조로 귀속되었다. 단, 부계 후손은 계속해서 영국 플랜태저넷 왕조를 통해 유지되었다. 프랑스의 가문이 단절되어버리자 사실상 플랜태저넷 왕조 = 앙주 가문이 된다.

그런데 앙주 가문의 방계인 잉글랜드의 플랜태저넷 왕조는 초대 샤토됭 자작으로서 샤토됭 가문의 창건자인 고츠프레드/조프루아 1세가 아니라 그의 사위인 훌퀴크/퓔쿠아(Fulcuich/Fulcois de Perche)[5]라는 자의 막내아들인 페르슈의 위그 2세, 즉 고츠프레드/조프루아 1세의 외손자를 가문의 시조로 삼고 있다. 따라서 이 훌퀴크라는 인물은 사실은 전통적인 족보상 샤토됭/앙주 가문 혈통이 아닌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는 나중에는 모르타뉴의 백작이 되는 귀족인데, 페르슈 백작 로트로드/로트루(Rothrod/Rotrou)의 아들이라고 전해진다. 로트로드는 블루아샤르트르의 백작 테오발트/티보 1세 휘하의 높은 장군 출신으로[6], 티보와 노르망디 공작 리처드 1세 사이 벌어진 전쟁에서 공을 세워 백작위를 수여받은 인물이다.[7] 즉, 샤토됭/앙주 가문과는 혈연적으로 관계가 없던 훌퀴크가 조프루아 1세의 딸 멜리장드[8]와 결혼하면서 그의 아들을 시작으로 그의 집안이 샤토됭 자작위를 세습했다는, 쉽게 말해 사위가 가문을 꿀떡삼켰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전통적인 시각을 따르면 도저히 이해가 안 가는 지점이 두 곳 존재한다. 첫번째로, 초대 자작 조프루아 1세에게는 자식으로 딸 멜리장드를 제외하고 샤토됭 자작으로 있었던 아들 위그 1세와 아달라우드(Adalaud)가 있었다. 위그 1세는 989년부터 1003년까지 샤토됭 자작으로 있다가 1003년에 투르 대주교 자리에 오르게 되었는데, 이때 원래 갖고 있던 샤토됭 자작위를 멀쩡히 살아있는 남동생 아달라우드를 냅두고 여동생의 아들인 조프루아 1세 드 페르슈에게 줬다는 것이다. 심지어 아달라우드는 아들도 둘이나 있었다. 이는 부계 상속을 중시했던 게르만족의 상속 원리와는 너무나도 상반된다. 두번째로, 훌퀴크가 다스렸던 모르타뉴 지역은 원래 초대 자작 조프루아 1세의 아내 힐데가르드 드 모르타뉴[9]의 집안에 속해있던 것이었다. 그렇다면 이것 또한 멀쩡히 살아있는 위그 1세와 아달라우드 및 그의 아들들을 냅두고 사위인 훌퀴크에게 상속이 되었다는 것인데, 납득이 매우 어려운 상황인 것이다. 따라서 이를 토대로 사실은 멜리장드가 조프루아 1세 및 힐데가르드의 자녀가 아니라, 훌퀴크가 그들의 자녀이고 멜리장드는 로트로드의 딸인데, 기록이 잘못 뒤바뀌었다는 주장이 현대에 들어 제기되었고 많은 지지를 받고 있다. 만약 그렇다면 상기한 두 중대한 모순점들이 모두 해결되기 때문이다.

이 가설을 토대로 한다면, 자작위가 초대 조프루아 1세(940~985)-2대 조프루아의 아내 힐데가르드 드 모르타뉴(985~989)[10]-3대 조프루아와 힐데가르드의 아들 위그 1세(989~1003)-4대 위그 1세의 동생인 훌퀴크와 그의 아내 멜리장드의 아들 조프루아 드 페르슈(1004~1040)로 이어진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전통적인 계보가 맞다고 하더라도 로트로드와 그의 아들 풀퀴크가 듣보잡 평민 출신이었던 것도 아니고, 위 각주에 써놨듯이 이름만 봐도[11] 프랑크족 집권층 출신에 실제로 로트로드는 고위 군지휘관 직책에 있었던 사람이었으므로 어떤 설을 따르든 플랜태저넷 왕조/앙주 가문이 뼈대 있는 높은 집안의 후예인 점은 변함이 없다. 샤토됭가야 말할 것도 없고. 어쨌건 훌퀴크의 장남인 조프루아 1세 드 페르슈[12]에게 샤토됭이 상속되었고, 막내아들 위그는 페르슈를 상속받았으며, 그의 아들 조프루아는 결혼으로 가티네를 얻었다. 참고로 페르슈는 전통적인 계보학에 따르면 훌퀴크의 아버지이고 신규 가설에 의하면 장인인 로트로드로부터 상속된 것이다.

막내아들 페르슈의 위그 2세(Hugues II de Perche)는 마콩(Mâcon) 백작 오브리 2세의 딸인 베아트리스 드 마콩(Béatrice de Mâcon)과 결혼했는데 당시 베아트리체는 조프루아 1세 드 가티네(Geoffroy de Gâtinais)의 아내였지만 남편이 사망하자 위그 2세와 재혼을 했다. 베아트리체는 이미 전 남편과의 슬하에 가티네를 상속받은 오브리 3세가 있었다. 위그 2세와 베아트리스 사이에서 조프루아가 태어났다. 그런데 가티네를 상속받은 오브리 3세가 후손없이 요절하여, 가티네 백작령(comte de Gâtinais)은 이부동생인 조프루아에게 넘어가게 되었으며, 가티네의 조프루아 2세가 되었다.

가티네의 조프루아 2세는 1035년 훗날 잉젤거 가문의 마지막 적통 후손이 되는 에멩가르드 당주(Ermengarde d' Anjou)와 결혼하여 모계 꼬냑틱(Cognatic, 동족)의 관계를 맺었다. 그녀와의 사이에서 힐데가르드, 조프루아, 풀크를 낳고 1046년 4월 운명했다.[13] 당시 어렸던 3명의 자식은 외삼촌인 앙주 백작 조프루아 2세의 궁정에서 성장했다. 시간이 흘러 장남 조프루아 3세는 모친 에멩가르드의 오빠인 앙주의 조프루아 2세가 후계자없이 1060년에 수도원에 서원하면서 은퇴를 하자, 아버지 가티네의 조프루아 2세의 모계 결혼을 통한 어머니의 상속권으로 인하여 앙주 백작령(comte de Anjou)을 차지하게 되었다.

3. 성장

그렇게 앙주 백작령을 물려받은 샤토됭 가문의 방계인 페르슈-가티네의 조프루아 3세는 앙주 가문의 가장이 되었다. 아버지 조프루아 2세 드 가티네가 모계 결혼을 통해 에멩가르드 당주와의 사이에서 자신을 낳았기 때문에 조프루아 3세는 앙주 가문을 본적으로 두게 되었다. 이후 앙주 가문에는 대를 이은 장남과 차남 사이의 분쟁의 역사가 시작되었다.[14] 조프루아 3세는 외삼촌인 앙주의 조프루아 2세보다 전투감각이 없었다. 1063년 멘 지방을 상실했고, 1064년에도 북쪽 지역을 잉글랜드에게 빼았겼다. 1067년 조프루아 3세의 동생 풀크는 앙주 가문의 지배력이 점점 쇠락하고, 자신의 상속분마저 날라갈 위기에 처하자 무능력한 형을 대신하기 위해 반란을 일으켰고, 결국 형 조프루아 3세를 굴복시켰다. 조프루아 3세는 외부의 침략에 대항하여 급한 불을 끈 동생 풀크가 자신보다 위상이 높아지자 만회할 목적으로 동생에 반하여 군사를 일으켰으나, 결론은 동생 풀크의 승리였다. 동생은 형 조프루아 3세를 무려 28년동안 감금상태로 유배시켰다. 그 이후 조프루아 3세는 '수염이 덮수룩한 조프루아 3세'라는 별명을 가지게 되었고 그림을 그리면서 노후를 보내게 되었다. 결국 1096년 교황 우르바노 2세의 개입으로 마침내 해방이 되었지만 곧 사망했다.

풀크는 형을 축출한 후 앙주의 풀크 4세가 되었다. 그는 결혼을 세 번했는데 자식으로 에멩가르드와 조프루아, 그리고 세 번째 아내와의 사이에서 풀크를 낳았다. 풀크 4세는 형제 간의 분쟁에 만족하지 않고 더하여 아내와 부자 간의 불화도 연달아 일으켰다. 마지막 아내였던 베르트라드 드 몽포르(Bertrade de Montfort)는 남편 풀크 4세가 멀쩡히 살아있음에도 불구하고, 프랑스 국왕 필리프 1세와 결혼하기 위해 1092년 야밤 도주를 했다. 중세스럽게도 필리프 1세 역시 세 아이를 낳아준 왕비 네덜란드의 베르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를 버리고 베르트라드와 결혼, 정확히 말하자면 중혼을 했다. 풀크 4세는 격노하여 교황에게 왕의 중혼을 고발하면서 제소하기에 이르렀고, 그 필리프 1세와 베르트라드는 파문까지 당했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이후 풀크 4세는 형이 상실한 영지를 되찾기 위해 국왕, 노르망디 공작, 브르타뉴 세력 등과 끊임없이 싸웠다. 이런 개판인 상황 와중에 풀크 4세는 아들 풀크를 편애했다. 장남 조프루아보다 막내아들 풀크에게 자신의 영지를 물려주려 했고, 프랑스 왕 필리프 1세와 딴 살림을 차린 풀크 4세의 아내 베르트라드도 자신의 아들인 풀크가 앙주를 물려받길 원했다. 장남 조프루아는 아버지 풀크 4세와 계모 베르트라드의 공공연한 이복 동생 풀크에 대한 편애가 강한 위협으로 느껴졌으나 이미 성인이었던 그가 신하들의 지지를 받고 있었기에 1103년에 후계자로 지목받은 것은 작은 불씨를 남겼을지언정 누구도 막지 못했다. 1106년 앙주의 조프루아 4세는 아버지 풀크 4세의 정책에 반발하여 칸데(Candé) 지역이 반란을 일으키자 아버지의 명령으로 칸데를 포위하여 공성전을 준비하는 와중에 화살을 맞고 암살당했다. 이 암살은 그를 못마땅했던 부모의 잔혹한 계략이라는 설이 있다. 1109년 풀크 4세가 죽자, 하나 남은 막내아들 풀크가 상속받으니 그가 앙주의 풀크 5세이며, '예루살렘 왕국의 부왕 풀크'이기도 하다.

4. 앙주 제국(Angevin Empire)/플랜태저넷 왕조

풀크는 20세가 채 안된 시점인 1109년 아버지인 풀크 4세의 사망으로 앙주 백작의 지위를 계승했고, 당시 프랑스 영토 중 상당 부분이 잉글랜드 왕의 봉지이기도 했기 때문에 그는 두 왕 사이에서 정치적으로 처신을 잘 해야 했다. 이후 풀크 5세는 에멩가르드 드 멘(Ermengarde de Maine)과 결혼하여 그녀의 영지인 멘까지 자신의 통제 아래 두었다. 결혼을 통해 전쟁없이 영토를 합병한 것은 좋았으나 그것은 단지 시작에 불과했다. 결혼을 재테크 수단으로 삼던 풀크 5세와 그에게서 교육을 받은 유럽에 남아있던 후손들이 광범위한 땅을 전쟁없이 수중에 넣게 되었다.[15] 당시 풀크 5세는 프랑스 카페 왕조의 제5대 왕 루이 6세를 도와 잉글랜드 노르만 왕조의 제3대 왕 헨리 1세에 맞서는 위치에 있었다. 그런데 풀크 5세의 장남인 앙주의 조프루아 5세(Geoffrey V de Anjou) '플랑타주네'가 헨리 1세의 왕녀이자 추정상속인인 마틸다(Matilda de Normandy)와 1127년에 혼인을 하는 변수가 발생하였다.

사실 헨리 1세에게는 어린 아들도 있었지만 불의의 사고로 요절했고, 부계로 따졌을 때 마틸다가 정복왕 윌리엄 1세의 마지막 혈통이었다. 조프루아 5세는 당시 유럽에서 소문난 미남자에 검술 능력도 뛰어나 유럽 기사의 대표격이었고, 전투에 나갈 때마다 금작화 가지를 투구에 꽂아 '플랜태저넷'(Plantagenet, 플랑타주네)이라는 별칭을 얻었다. 이 별칭이 훗날 그의 가문명이 되었다. 이 결혼은 결국 앙주 가문이 프랑스 카페 왕조에 위협이 될 정도로 성장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헨리 1세의 사후 마틸다가 왕좌를 차지하려 하자 모계의 스테판 블루아가 반대하여 무정부시대로 칭해지는 긴 내전이 발생했다. 종래에는 풀크 5세의 손자이자 조프루아 5세와 마틸다의 아들인 헨리 2세(Henry II of Plantagenet)가 잉글랜드 왕위에 오르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300년 플랜태저넷 왕조의 역사가 시작된 것이다. 헨리 2세 역시 조부 풀크 5세와 부친 조프루아 5세의 선례를 답습하여 삼아 유럽에서 가장 부유한 여자였던 엘레노오르 드 아키텐(Eleanor de Aquitaine)과 결혼하여 프랑스 남서부 전역을 예물로 가져가는 파문을 일으켰다.
파일:Henry_II,_Plantagenet_Empire.png
1189년 헨리 2세의 영토

이렇게 잉글랜드 전역과 아일랜드 섬, 그리고 프랑스를 양분해서 서쪽을 풀크 5세의 손자인 헨리 2세가 차지하게 되었다. 현대에는 헨리 2세가 다스린 영토와 이후 풀크 5세가 다스린 예루살렘 왕국을 포함해 앙주 제국(Angevin Empire)으로 부르고 있다.

이러한 동군연합의 선봉에는 풀크 5세가 있었고, 그가 행했던 여러 가지의 권모술수는 도덕적이지는 않았지만 유럽 대륙에서는 대단한 효과를 발휘했다. 풀크 5세가 결혼으로 상당한 영토를 얻자 루이 6세는 그 폐해를 뼈저리게 느꼈다. 때마침 예루살렘 왕국의 사절단이 사윗감을 찾으러 도착하자 그 혼맥을 미끼로 소개시켜 줌으로써 프랑스의 재앙이었던 풀크 5세를 예루살렘으로 보내 버리려 했다. 그로 인해 풀크 5세는 장남인 조프루아 5세 '플랑타주네'에게 영지를 맡기고 지중해를 건너 레반트 지역으로 가게 되었다.

예루살렘 왕국에 정착한 풀크 5세는 1120년 십자군 원정에 참여하여 무훈을 세웠다. 당시 예루살렘 왕국의 군주였던 보두앵 2세는 아들이 없었기에 자연스럽게 장녀인 멜리장드가 왕위 계승자로 부상했다. 당시 보두앵 2세는 멜리장드와 그녀의 후손이 예루살렘을 안정적으로 통치하기 위해 강력한 귀족과 결혼하기를 원했고, 그때 프랑스의 루이 6세는 앙주의 풀크 5세를 추천했다. 이러한 군주들의 이해관계가 맞아 풀크 5세는 멜리장드와 1129년에 결혼했다. 1130년 풀크 5세는 멜리장드와의 사이에서 장남 보두앵을 낳았고, 1131년 장인인 보두앵 2세의 사망 후 멜리장드와 함께 왕국의 공동 통치자가 되었다. 예루살렘의 왕이 된 풀크(앙주의 풀크 5세)의 장남 보두앵은 보두앵 3세로 즉위했으나 젊은 나이에 요절했다. 그 후 동생인 아모리 1세가 즉위하여 보두앵 4세시빌라, 이사벨라를 낳았다. 이 3명의 자녀들은 모두 예루살렘 왕국의 군주로 군림했다.[16]

5. 역대 앙주 가문의 수장

House of Châteaudun House of Anjou
조프루아 1세 드 샤토됭 (Geoffroy I de Châteaudun)풀크 1세 당주 (Foulques I d'Anjou)[17]
위그 1세 드 샤토됭 (Hugues I de Châteaudun)풀크 2세 당주 (Foulques II d'Anjou)
풀쿠아 드 샤토됭-페르슈 (Fulcois de Châteaudun-Perche)조프루아 1세 당주 (Geoffroy I d'Anjou)
위그 2세 드 페르슈 (Hugues II de Perche)[18] 풀크 3세 당주 (Foulques III d'Anjou)
조프루아 2세 드 페르슈-가티네 (Geoffrey II de Perche-Gâtinais) 조프루아 2세 당주 (Geoffroy II d'Anjou)
조프루아 3세 당주 (Geoffrey III d'Anjou)
풀크 4세 당주 (Foulques IV d'Anjou)
풀크 5세 당주 (Foulques V d'Anjou)
보두앵 3세 당주 (Baudouin III d'Anjou)
아모리 1세 당주 (Amaury I d'Anjou)
보두앵 4세 당주 (Baudouin IV d'Anjou)
시빌 당주 (Sibylle d'Anjou)
이자벨 당주 (Isabelle d'Anjou)

6. 전설

앙주 백작가에는 악마의 자손이라는 전설이 있었다.

12세기 무렵에 떠돌던 전설에 따르면 앙주 백작들 중 한 명(조프루아 2세 또는 풀크 3세로 추정)이 먼 여행에서 돌아오면서 멜뤼진이란 여인을 데려왔고, 그녀에게서 4명의 자식들을 보게 되었지만 항상 아내가 미사가 진행되는 와중에 밖으로 나가버리는 것 때문에 곤혹스러웠다.

이 때문에 백작은 비밀리에 기사 네 명에게 미사가 진행되는 동안 아내의 외투 자락을 밟고 있으라고 명령했고, 명령을 받은 기사들은 충실하게 명령을 수행했다. 이에 신부가 멜뤼진에게 성체를 갖다댄 순간 뒤에 서있는 기사들을 밀쳐내며 아직 어린 두 아이를 안고 창문 밖으로 날아갔다. 멜뤼진의 정체는 악마의 딸로 이 때문에 그리스도의 성체를 바라 볼 수 없었기 때문에 미사 때 밖으로 나가려했다는 것으로 끝난다. 이때 손이 두 개밖에 없었기에 셋째 아이는 데려가지 못했고, 남겨진 아들이 앙주 백작이 되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조프루아 2세와 풀크 3세의 아내들의 가계는 매우 명확하게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전설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통설이다. 당시 이런 추문이 나돌았다면 무사했을 리가 없다. 조프루아 2세 당주의 아들인 풀크 3세에게는 손자가 없었기에 외손자인 조프루아 3세와 풀크 4세가 영지를 차례로 물려받았다.

이같은 전설이 나올 정도로 포악하고 호전적이며, 폭력적인 행동과 끝을 보고 마는 성미를 조상 대대로 이어 내려왔고, 1154년 헌팅던의 헨리는
'앙주 혈통이 다혈질이고, 호전적인 통치자 아래 번성했으며, 사람들을 공포로 다스렸다는 것은 세상이 다 아는 일이고, 그 힘으로 주변국들을 파괴하며 영토를 복속시켜 온 것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고 기록했다.

이런 평가는 앙주 가문의 후손들도 인정했는지 앙주 가문의 피가 가장 진했다는 제프리 2세는 누군가 그에게 앙주 가문의 특징을 물으면 이렇게 답했다.
"우리 가족은 형제가 형제를, 아들이 아비를 대적하고, 서로 해코지하기 위해 죽을 힘을 다하도록 태어났다네."

이런 앙주 가문 말고도 그 통치하의 앙주 주민들도 이웃의 노르망디 주민들로부터 교회를 모독하고, 사제 살해와 역겨운 식사예절을 가졌다는 이유로 야만인 취급을 받았다. 풀크 2세처럼 성인에 가까운 평화주의자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가계 구성원들은 잔인했고, 풀크 5세처럼 다섯 번이나 결혼하는 엉망인 결혼생활, 방탕, 집안 불화들이 꼬리표로 따라다녔다.

한편 당시 중세 유럽의 기준으로서는 지적이고 교양있는 영주들도 많았다. 앞서 언급한 풀크 2세의 경우, 그 자신도 대단한 학식이 있었던 인물로 자신의 주군인 프랑스 국왕 루이 6세를 '글도 읽지 못하는 왕관을 쓴 당나귀'라며 대놓고 조롱까지 했으며, 이외에도 미남들이 많은 편으로 큰 키와 다부진 체격, 황금빛 붉은 머리카락이 특징적이었다. 물론 헨리 2세처럼 머리카락 색을 제외하고 전혀 상반된 특징을 가진 가진 인물들도 많았다.

7. 여담

앙주(Anjou)의 어원에는 두 가지 가설이 있다.

먼저 로마 제국켈트족 간의 갈리아 전쟁 이후 로마의 통치에 복종한 안데카비(Andecavi) 부족의 이름을 따왔다는 것인데, 로마의 통치하에 안데카비의 정착촌이 요새화되어 현재의 앙제(Angers)의 기반이 되었다는 가설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의 가설은 Anjou와 Ange가 동음이의어로 발음이 같다는 것이다. Ange는 '천사'를 뜻하는 프랑스어로, 어원은 영어의 '엔젤'(Angel)과 마찬가지로 그리스어 단어인 '앙겔로스'(Angelos)였다. 즉 '천사'라는 뜻의 '앙제'가 지역명인 '앙주'로 변형했다라는 설이다. 가문명이 '천사'인데 전설은 악마의 후손이란 전설이 돌고 예루살렘 왕국의 왕가가 되었으니 아이러니하다.[19]
[1] 여담으로 이 잉젤거 가문과 그 시조인 잉젤거 역시 밑에 나오는 샤토됭 가문처럼 로르공 가문의 방계 후손이라는 설이 있다. 로르공-샤토됭 가문에서 집중적으로 나오는 '풀크'와 '조프루아'라는 이름이 잉젤거 가문에서도 엄청나게 튀어나오기 때문이다. 또한 잉젤거의 모친은 무려 부르고뉴 공작의 친척이었다. 따라서 잉젤거 가문도 본가에서 좀 멀어져서 작위가 없을 뿐이지 뿌리는 상당히 뼈대있는 가문이었을 것으로 유추해볼 수 있다.[2] 로르곤이라는 단어와 "Gauzbert", "Gauzfred" 등 가문 구성원들이 사용한 인명으로 따져보았을 때 전통적인 프랑크계 귀족 계층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인명을 토대로 이 가문을 로베르 왕조의 분파로 추측하기도 한다. 흥미로운 점은 만약 로르곤 가문이 로베르 왕조의 분파가 맞다면, 로베르 왕조는 후손 대에 앙주 백작 작위를 다시 되돌려받은 셈이 된다. 본문에 써놨듯 잉젤거의 아들 풀크 1세가 앙주 백작위를 차지하기 전에는 외드 등 로베르 왕조가 앙주 백작위를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3] 참고로 이 로르곤 가문은 시조 로르곤 1세의 어머니를 통해 모계로 피핀 2세의 손자인 고데프리드에게 닿으니, 비록 아주 까마득하게 먼 방계이지만 어쨋던 카롤루스 왕조가 자신들의 시조라고 할 수 있었다.[4] 훗날 잉글랜드에서 무정부시대를 개막할 스티븐 왕이 속한 그 블루아 가문이 맞다.[5] 이름 "Fulcuich"는 고대 고지 독일어에서 민족, 사람의 뜻으로 사용되던 Folc/Fulc와 통치자를 뜻하는 -rich와 강한 형태적인 연관을 보이고 있다. 의미상 "사람들의 통치자" 정도가 될 것이다. "Folquin", "Fulquin" 같은 이름들도 이미 당시 프랑크족 고위층에서 널리 쓰이는 이름이었다.[6] 이름인 Rothrod부터가 고대 게르만어로 "붉다"를 의미하는 "Roth", "명성, 영광"을 의미하는 "Rod/Hrod"의 결합으로, 군인임이 강하게 암시된다.[7] 재밌게도 상술했듯 사돈인 초대 샤토됭 자작 조프루아 1세도 티보에게 작위를 받았다.[8] 영문 위키를 보면 멜리장드가 여자작이라고 나오는데, 불어 위키를 참고하면 이는 잘못된 정보다. 멜리장드는 자작위에 오른 적도 없다. 그의 오빠인 위그 1세가 자작위를 그녀의 아들인 조프루아 1세에게 물려주었기 때문이다. 애초에 영문 위키에 따르면 그녀가 1026년부터 1030년까지 자작위에 있었다고 하는데, 그녀의 아들 조프루아 드 페르슈의 통치 기간이 1004년부터 1040년이다.(...)[9] 샤토됭/앙주 가문이나 그들의 본가 로르곤 가문처럼 중북부 프랑스에서 세력을 떨치던 프랑크계 가문인 휘곤 가문(Hugonides)의 후예이다.[10] 남편 사후 잠깐 통치했다.[11] 당시 프랑크어(고지 독일어)로 각각 "붉은 명예", "사람들의 지도자"[12] 할아버지랑 이름이 똑같다.[13] 에멩가르드는 프랑스 카페 왕조 제2대 국왕 로베르 2세의 아들인 부르고뉴 공작 로베르 1세와 재혼했다.[14] 이런 분쟁들은 훗날 앙주 가문의 결혼 재테크의 예행연습이라고도 볼 수 있다.[15] 이후에 이어진 프랑스 왕국과 잉글랜드 왕국의 대립과 백년전쟁도 풀크 5세의 영토 확장이 단초를 제공했다.[16] 여담으로 리들리 스콧의 영화 킹덤 오브 헤븐이 이 세 남매 중 보두앵과 시빌라의 이야기를 다룬다.[17] 잉젤거(Ingelger)의 아들[18] 플랜테저넷-앙주 가문의 시조[19] 비슷하게 프랑스의 리옹의 도시 이름의 유래는 갈리아족의 신 '루구스'(Lugus)에서 유래된 라틴어 지명 '루그두눔'(Lugdunum, "루구스의 언덕/요새")이었다. 뒷 부분의 자음이 점점 약화되면서 '리옹'이 된 듯하다. 현재 'Lyon'이라는 단어는 프랑스어로 "사자"를 뜻하는 'lion'와 동음이의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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