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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르만 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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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use of Normandy

1. 개요2. 역사3. 노르만의 멍에(Norman Yoke)4. 계보
언어별 명칭
영어 House of Normandy
프랑스어 Maison de Normandie

1. 개요

영국(잉글랜드 왕국)의 역대 왕조들 중 하나이며, 노르만 정복으로 앵글로색슨 민족의 웨식스 왕조를 멸망시키고, 1066년부터 1135년까지 잉글랜드를 다스렸다.

정복왕 윌리엄 1세, 윌리엄 2세, 헨리 1세까지 3대에 걸쳐 군림했으며, 헨리 1세가 프랑스 북부 노르망디 생드니앵리옹에서 병사하면서 왕가가 단절되었다. 하지만 헨리 1세의 딸인 마틸다(Matilda)가 앙주 백작이었던 조프루아 플랑타주네[1]와 재혼했고, 난세였던 무정부시대 이후 두 사람 사이의 장남인 헨리 2세가 잉글랜드의 국왕에 즉위하면서 플랜태저넷 왕조가 시작되었다. 이후의 랭커스터 왕조, 요크 왕조, 현대의 윈저 왕조 모두 노르만 왕조를 뿌리로 한다.[2]

영국에서는 이 왕조부터 왕호에 넘버링을 붙이는 문화가 시작되었다.

2. 역사

기원은 노르드계 노르웨이 바이킹이었던 모험가 흐롤프(롤로)였다. 흐롤프, 즉 롤로는 서프랑크 왕국의 단순왕 샤를 3세에게 신종하는 대가로 루앙 일대를 영지로 하사받아 '루앙 백작'이 되었다. 롤로와 그의 후손들은 노르망디 지방을 계속 장악해 나아갔고, 곧 노르망디 공작으로 승격되었다.

1066년 노르망디 공작 기욤 2세(윌리엄 1세)는 헤이스팅스 전투에서 해럴드 2세를 죽이고, 잉글랜드 왕에 즉위했다. 윌리엄 1세가 노르망디 공작 지위를 버린 것이 아니었으므로 잉글랜드 왕인 동시에, 프랑스 카페 왕조의 신하이기도 했다.[3]

당시 잉글랜드의 인구와 재산을 조사한 《둠즈데이 북》을 보면, 노르만족의 잉글랜드 정복 이전에는 2,000명이 넘는 앵글로색슨족 영주들이 있었으나 정복 이후에는 300명 내외만 남았다. 노르만 문화는 잉글랜드 곳곳에 새롭게 지어진 성당과 대륙식 성채들을 기반으로 뻗어나갔으며, 바이킹의 정복 이후 북유럽 문화권이었던 잉글랜드를 프랑스계 대륙 문화권에 편입시켰다.[4]

노르망디에 처음 정착한 롤로 이후 5대 동안 노르만인들은 프랑스 문화에 동화되었다. 궁정에서는 프랑스어를 사용했고 이를 잉글랜드 내에서도 유지했기에, 오늘날 영어에는 프랑스어의 흔적이 많이 남아 있다. 노르만족이 상류층으로 군림했으므로 특히 고급 어휘 및 상류층 어휘에 많은 족적을 남겼는데, 대표적으로 pork(프랑스어로는 porc, 돼지고기), beef(프랑스어로는 bœuf, 쇠고기), mansion(프랑스어도 철자가 동일, 집) 등이 있다.[5] 그렇다고 소수의 노르만인이 앵글로색슨인을 모두 학살한 것은 아니었으므로, 앵글로색슨의 문화와 혈통 역시 약간의 수정을 거친 채로 계속 이어질 수 있었고, 14세기 백년전쟁 시대에는 노르만족의 동화가 완료되면서 비로소 우리가 익히 아는 '잉글랜드인'(English)의 정체성이 확립되었다.[6]

헨리 1세가 아들없이 프랑스 노르망디 생드니앵리옹에서 과식으로 병사하면서 노르만 왕조의 부계는 단절되었지만, 딸 마틸다를 통해 그 뿌리가 계속해서 플랜태저넷 왕조로 이어졌다. 플랜태저넷 가문은 앙주 백작의 영지인 앙주 일대와 노르만 왕조의 노르망디 영토, 엘레오노르 다키텐과의 결혼으로 얻은 아키텐 영토 등, 잉글랜드와 프랑스의 절반을 아우르는 영역을 지배하면서 상당한 기간 동안 프랑스 내 유력한 제후로 군림했으나,(앙주 제국) 프랑스 내 영역을 실지왕 의 치세때 거의 다 날리고, 브리튼 섬으로 가문의 영토가 줄어들었다. 다만, 노르망디 공국의 영토 중 채널 제도는 프랑스에 거의 붙어있다시피 한 섬들이었지만, 잉글랜드가 그 지배력을 유지했고, 현재도 영국령이다.[7]

노르만 왕조 이후로 잉글랜드에서는 프랑스어의 유입으로 인해 순수 영어 이름은 거의 쓰이지 않게 되었다. 앵글로색슨 사회에서는 애설레드애설스탠 등등 '고귀하다'는 뜻을 가진 'Æðele'과[8] 다른 명사를 결합해 만드는 인명들이 상당히 인기가 있었고, 지배층 및 피지배층을 가리지 않고 널리 쓰였다. 그래서 왕의 이름으로써 굉장히 많이 쓰였지만,[9] 노르만 정복 이후 새로운 지배층이 된 노르만족을 따라 앵글로색슨족들이 프랑스에서 건너온 이름들을 자신의 자식들에게 붙여주기 시작했다. 이때 잉글랜드로 들어온 남자 이름으로는 헨리(Henry, 앙리), 리처드(Richard, 리샤르), 윌리엄(William, 기욤), 로버트(Robert, 로베르) 등이 있었고,[10] 여자 이름으로는 앨리스(Alice), 마틸다(Matilda) 등이 있었는데 이런 이름들은 현재까지도 영미권에서 흔한 이름들로 쓰이고 있다. 노르만 정복 이후에도 쓰이던 앵글로색슨족 이름으로는 에드워드(Edward)[11]가 있는데 사실 이 이름도 노르만 왕조가 들어선 이후 잊혀졌다가 후에 참회왕 에드워드를 존경했던 헨리 3세가 자신의 아들[12]에게 이 이름을 붙이면서 왕실과 지배층 사이에서도 다시 유행하여 부활했다고 한다.[13]

3. 노르만의 멍에(Norman Yoke)

중세 이후 잉글랜드 내에서 근대적인 내셔널리즘이 싹트면서 노르만 왕조에 대해 부정적인 평가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그 시작은 17세기 철학자인 데이비드 흄이 출간한 역사서 <영국의 역사>에서 시작된 것으로, 이후 18세기부터 20세기 후반까지 유행한 휘그 사관(Whig Historiography)[14]은 흄의 견해를 이어받아 중세의 앵글로색슨족 사회는 비교적 수평적이었고, 자유민들의 권리를 보장하는 등 비교적 평등했던데 비해, 대륙에서 봉건제를 들여온 노르만족 지배자들은 권위적인 압제자들로 그렸다. 특히 잉글랜드 왕 헨리 8세의 종교개혁 이후 반가톨릭주의가 잉글랜드의 국가 정체성으로 이어지자 개신교를 믿는 잉글랜드인들은 윌리엄 1세가 잉글랜드를 침공하기 이전 로마 교황의 후원을 받았다는 것을 증거로 삼아 노르만 왕조가 들어선 이후 잉글랜드가 더욱 가톨릭의 영향력에 들어서게 되었다고 생각하기 시작했고, 이는 노르만 정복을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다.

노르망디 공국을 비롯한 노르만족의 프랑스 내 영지가 건재할 당시에는 잉글랜드 왕국의 위상이 시궁창이었다. 군주의 칭호만 왕일 뿐 다스리는 영토는 노르망디, 아키텐, 브르타뉴 등의 프랑스 영지와 비교하면 정말 비루하기 짝이 없어서, 노르만 왕조의 역대 왕들은 일단 잉글랜드 왕위가 안정된 후에는 프랑스 내에서의 알력 다툼과 그곳의 통치에만 관심을 뒀고, 잉글랜드는 그냥 양모 및 소고기 공장쯤으로(...) 생각했다. 왕실을 따라온 노르만족 기사들에게는 잉글랜드가 기회의 땅이었지만, 원래도 기득권층이었던 왕실에게는 프랑스 왕과 대등한 타이틀을 주는, 이른바 '타이틀 셔틀'일 뿐이었다.

이러한 경향이 뒤집어진 건 존 왕 때로, 그는 영국 역사상 최악의 왕으로 꼽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잉글랜드의 지배층이 노르만 정체성을 점차 버리고 잉글랜드에 동화되게 만들어버린, 업적 아닌 업적(?)을 가지고 있다. 존은 카페 왕조를 부흥시킨 존엄왕 필리프 2세의 온갖 모략질에 두 눈 뜨고 전부 당해주면서 노르만-플랜태저넷 왕조가 가진 프랑스 영지를 죄다 빼앗겼고, 결국 프랑스에서의 입지를 잃어버린 노르만족 지배층들은 이제 프랑스의 마수가 뻗치지 않은 청정구역인 잉글랜드에 집중해야만 했다.

이후 헨리 3세참회왕 에드워드를 기리며 자식에게 그 이름을 물려주었는데, 그가 바로 에드워드 1세이다. 그는 스스로를 잉글랜드인으로 여기며 영어도 유창하게 구사했고, 고관대작들에게도 영어를 사용할 것을 권장했다. 이후 시대가 흘러 에드워드 3세백년전쟁이 발발하여, 1453년 최종적으로 패배함에 따라 프랑스 내의 잉글랜드 세력이 축출[15]되고 프랑스와는 완전히 결별하게 되었으며, 마침내 잉글랜드를 옥죄어온 앵글로-노르만족의 정체성도 사라지게 되었다.

4. 계보

윌리엄 1세 아델라 스티븐 왕
윌리엄 2세
헨리 1세 마틸다 헨리 2세
(플랜태저넷 왕조)

[1] Geoffroy Plantagenêt, 영어식으로는 '제프리 플랜태저넷'(Geoffrey Plantagenet)[2] 물론 모계로 따지고 보면 미약하게나마 웨식스 왕조와도 이어진다.[3] 중세 유럽에서는 영지 상속에 따른 복수국적(동군연합)이 빈번했다. 이러한 양상은 중앙집권적 관료제 행정조직과 민족주의의 출현으로 근대적인 국가 개념이 출범하면서 사라지게 되었다.[4] 노르만족은 정착한지 오랜 시간이 지나 혈통도 문화도 완전히 프랑스에 동화 된 상황이었기 때문에 바이킹에게 정복 당했다기보단 바이킹계 프랑스 영주와 기사들에게 정복되었다는게 더 정확하다.[5] 흥미롭게도 《영어 사전》과 《프랑스어 사전》을 놓고, 각각 '돼지', '소', '돼지고기', '소고기'를 찾아보면, 프랑스어에서는 가축을 가리키던 단어에 "~의 고기" 꼴로 덧붙여 조어하는 반면, 영어에서는 프랑스어 단어를 고기로서 받아들이고, 가축 그 자체는 여전히 앵글로색슨 시대의 단어를 사용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고기를 먹는 것은 지배층인 노르만인이지만, 그것을 손질했을 피지배층은 앵글로색슨인이었음을 보여주는 현상이기도 하다.[6] 백년전쟁 당시 대중에게 제시한 명분 중 하나가 '프랑스 놈들이 영어를 금지하려 한다! 등이었다.[7] 정확히는 왕실령으로서 건지(guernsey) bailiff의 관할지역이다. 왕실령은 중세적 영역 개념의 잔재로, 연합왕국의 일부이기는 해도 잉글랜드의 일부는 아니다.[8] '귀족' 혹은 '고귀한 태생'을 의미하는 독일어 'Edel'과 어원이 같다. 인명 외에도 앵글로색슨어에서 '왕족'을 뜻하는 'Æðeling' 등의 어휘로 파생되었다.[9] 웨식스 왕조의 역대 왕들만 따져봐도 애설허드, 애설울프, 애설스탠, 애설버트, 애설레드 1세, 애설볼드, 애설레드 2세 등 총 7명이나 된다. 또 그외에도 아예 브리튼어가 확실한 캐드왈라나 혹은 논란이 있지만 체르디치킨리치처럼 브리튼어로 추정되는 인명들도 쓰였다.[10] 이 중에서 Henry, William, Robert는 토착 단어인 Henric(헨릭), Willelm(윌렐름), Hreodbeorht(흐레오드베오르흐트)를 대체해버렸다. 앞의 2개는 라틴식으로 변형된 프랑스어 인명보다 독일어나 북유럽쪽 인명에 더 가까운 것이 눈에 띈다. 그나마 Robert의 경우에는 영어의 발음 변화 법칙에 적용해봤을때 노르만 정복이 아니었어도 후에 같은 발음으로 바뀌었을 확률이 높다. 아니면 한자 동맹의 영향을 받아 저지 독일어에서 수입해올 가능성도 있었다.[11] 대표적으로 참회왕 에드워드[12] 이때문인지는 몰라도 에드워드 1세는 윌리엄 1세의 잉글랜드 정복 이후 처음으로 프랑스인이 아닌 잉글랜드인으로서의 정체성이 더 강했던 왕으로 여겨진다. 이 시기부터 잉글랜드의 왕족과 귀족들이 프랑스어가 아닌 영어를 쓰기 시작했고, 에드워드 1세 본인도 프랑스어보다 영어를 더 유창하게 했다고 전해진다.[13] 이후 영국에는 에드워드라는 이름을 가진 군주가 (현재까지) 8명이나 있다.[14] 이 사관에 따르면 영국의 역사는 전제 군주와 이에 맞서 개인의 자유를 주장하는 의회간의 정치적 투쟁의 연속으로, 이러한 과거의 사건들(예들 들어 영국 내전)은 최종적으로 의회민주주의와 입헌군주제로 가기 위한 불가피한 과정이었다. 이러한 진보의 원동력을 영국이 개신교 국가가 된 것에서 찾고 있다.[15] 칼레는 남아있었지만, 보다시피 '세력'이라고 부를 만한 크기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