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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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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JamesIEngland.jpg
<colbgcolor=#cf091f><colcolor=black> 왕호 잉글랜드 제임스 1세
(James I)
스코틀랜드 제임스 6세
(James VI)
출생 1566년 6월 19일
스코틀랜드 왕국 에든버러 에든버러 성
사망 1625년 3월 27일 (향년 58세)
잉글랜드 왕국 하트퍼드셔 시어볼드 하우스
재위기간 스코틀랜드의 왕
1567년 7월 24일 ~ 1625년 3월 27일
잉글랜드, 아일랜드의 왕
1603년 3월 24일 ~ 1625년 3월 27일
서명 파일:제임스 1세 서명.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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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cf091f><colcolor=#fff> 이름 제임스 찰스 스튜어트
(James Charles Stuart)
배우자 덴마크의 아나 (1589년 결혼 / 1619년 사망)
자녀 헨리, 엘리자베스[1], 마거릿, 찰스 1세, 로버트, 메리, 소피아
아버지 단리 경 헨리 스튜어트
어머니 스코틀랜드의 메리 여왕
장례식 1625년 5월 7일
웨스트민스터 사원
국적
[[스코틀랜드|]][[틀:국기|]][[틀:국기|]] |
[[잉글랜드|]][[틀:국기|]][[틀:국기|]]
종교 성공회 }}}}}}}}}

1. 개요2. 칭호3. 생애
3.1. 스코틀랜드 국왕3.2. 잉글랜드 왕위 획득3.3.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왕으로서3.4. 스코틀랜드 통치 기술
4. 평가5. 가족관계
5.1. 조상5.2. 자녀
6.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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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스코틀랜드 왕국잉글랜드 왕국(+아일랜드 왕국)의 국왕. 최초로 브리튼 제도 전체를 다스린 왕이자 최초로 잉글랜드·스코틀랜드·아일랜드·웨일스를 총괄해서 통치하게 된 영국의 국왕으로, 스스로를 그레이트 브리튼의 국왕으로 칭했다.

제임스 1세잉글랜드 왕국-스코틀랜드 왕국-아일랜드 왕국동군연합을 시작으로, 잉글랜드 왕국과 스코틀랜드 왕국이 통합된 그레이트브리튼 왕국, 여기에 아일랜드 왕국이 합병된 그레이트브리튼 아일랜드 연합왕국까지 브리튼 제도는 점차적으로 통일된다.

2. 칭호

스코틀랜드 국왕으로서는 '제임스 6세', 잉글랜드 국왕으로서는 '제임스 1세'라고 불리는데, 대체로 후자 쪽이 유명하다. 영어 위키백과에서는 본래 지금 나무위키처럼 '잉글랜드의 제임스 1세'라 되어 있었으나,[2] 이에 대해 토론 칸에서 10년에 걸쳐 지속적으로 문제가 제기되다 세 번의 이동 토론과 무수한 싸움 끝에 '제임스 6세 겸 1세(James VI and I)'로 문서가 이동되었고, 제임스 1세는 리다이렉트 문서로 바뀌었다. 그러나 동일한 논리대로라면 제임스 2세는 '제임스 7세 겸 2세', 윌리엄 3세는 '윌리엄 3세 겸 2세'로 바뀌어야 하지만 이들은 바뀌지 않고 그대로인 상태이다. 사실 저 두 왕은 제임스 1세와 경우가 다른 게 제임스 2세는 (오랜 기간 망명생활을 하긴 했지만) 잉글랜드에서 나고 자란 잉글랜드인이었고, 오라녀 공 윌리엄 3세는 외가 쪽이 잉글랜드 출신이었지만 본인은 네덜란드인이었다. 이 말은 저 두 사람은 왕위에 오를 당시에 이미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가 왕을 공유하고 있었기에 스코틀랜드 왕위를 겸직하긴 했으나, 스코틀랜드인이란 정체성은 사실상 없었단 뜻이다. 반면 제임스 1세는 스코틀랜드에서 나고 자란 스코틀랜드 왕이었으며, 엘리자베스 1세가 죽은 후 왕위를 물려받고 나서야 잉글랜드 왕이 되었다. 즉 저 둘과 달리 제임스 1세는 스코틀랜드인이란 정체성이 강했기에, 스코틀랜드 사람들 입장에선 자신들의 왕이 잉글랜드 쪽 이름으로만 알려지는게 불만이 있을 수 밖에 없다.[3]

다만 여기에 대해 반론을 하자면 우선 제임스 2세의 경우 잉글랜드에서 나고 자란 것은 사실이나 그는 엄연히 스코틀랜드 왕실의 혈통인 스튜어트 왕조의 국왕으로서 결코 스코틀랜드와 무관하다고 할 수 없는 왕이었다. 특히 제임스 2세가 명예혁명으로 인해 폐위되었을 때 크게 반발한 쪽이 스코틀랜드였고 실제로 제임스 2세 및 그의 직계를 복위시키려는 자코바이트 운동이 가장 활발하게 일어난 곳도 스코틀랜드였다.

그러나 포인트는 제임스 2세가 스코틀랜드와 무관하다는 게 아니라, 제임스 1세를 잉글랜드화 하려는 시도가 스코틀랜드인들 입장에선 더 반발이 있을 수 밖에 없단 것이다. 말하자면 제임스 2세는 스코틀랜드계 잉글랜드인이고 제임스 1세는 순수 스코틀랜드인이 잉글랜드에 가서 왕 노릇 하는 차이이다. 비유하자면 박지성은 한국인이고 미셸 위는 한국계 미국인인데, 한국인들 입장에서 이들의 업적에 대해 갖는 느낌이 다를 수 밖에 없다. 즉 위 문단은 제임스 2세가 스코틀랜드와 무관하다는 주장을 하려는게 아니라 어쨌거나 잉글랜드에서 태어나 잉글랜드 국왕으로 등극한 인물이니, 스코틀랜드인들 입장에서는 스코틀랜드에서 태어난 스코틀랜드 왕이었던 제임스 1세에 비해 동질감이 비교적 덜 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아예 외국인인 윌리엄 3세는 말할 것도 없고.

어쨌든 제임스 1세를 시작으로 해서 제임스 2세, 윌리엄 3세까지 스코틀랜드, 잉글랜드 사이 칭호의 논란이 있지만 그나마 이들 외에 영국의 다른 국왕들은 칭호의 논란이 크지 않다. 찰스 1~3세, 앤 여왕, 조지 1~6세, 빅토리아 여왕은 다행히도(?) 이들 즉위 이전에 잉글랜드에도, 스코틀랜드에도 동일한 이름을 가진 왕이 없어서 잉글랜드에서나 스코틀랜드에서나 대수가 동일하기 때문에 논란이 없고[4], 메리 2세의 경우 동군연합 이전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에 각각 메리 1세, 메리 여왕(스코틀랜드)라는 여왕이 한 명씩 재위했던 적이 있어 절묘하게 숫자가 딱 맞아떨어졌다(...) 윌리엄 4세, 에드워드 7~8세, 엘리자베스 2세의 경우 논란이 있을 수는 있지만 이들은 제임스 1세와는 달리 스코틀랜드가 잉글랜드에 완전히 합병되어 영국(연합왕국)이라는 한 나라가 된 이후에 즉위했기 때문에 그냥 잉글랜드식으로만 표기하는 것이 공식화되었다. 다만 강성 스코틀랜드 민족주의자들은 엘리자베스 2세 여왕 즉위 당시 칭호를 '엘리자베스 2세 겸 1세'라고 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고 일부는 여전히 엘리자베스 2세가 아닌 1세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다는 모양. 그나마 이번에 즉위한 찰스 3세는 스코틀랜드식으로 계산해도 대수가 '3세'이기 때문에 논란이 없는 것이 다행이라 할 수 있지만 나중에 윌리엄 왕세자가 즉위할 경우[5] 다시 스코틀랜드에서 대수 칭호 논란이 일어날 가능성도 있다.

한편, 한국어 위키백과에서는 제임스 1세를 다루는 문서의 표제어가 제임스 1세(잉글랜드)라고만 나온다. 스코트어 위키백과는 '제임스 6세, 스코틀랜드 왕(James VI, King o Scots)'이라고만 나오고, 스코틀랜드 게일어 위키백과는 '스코틀랜드의 제임스 6세 겸 잉글랜드의 제임스 1세(Seumas VI na h-Alba is Seumas I Shasainn)'라고 그나마 잉글랜드를 챙기며, 아일랜드어 위키백과는 '스코틀랜드의 제임스 6세 겸 잉글랜드와 아일랜드의 제임스 1세(Séamas VI, Albain agus Séamas I, Sasana agus Éire)'이런 식으로 아일랜드까지 챙긴다.

3. 생애

3.1. 스코틀랜드 국왕

메리 여왕단리 경 헨리 스튜어트[6]의 유일한 아들이다.

메리 스튜어트와 헨리 스튜어트는 정략적 목적으로 결혼한 것이고, 둘의 관계는 애정도 딱히 없고 오히려 좋지 못한 편이었다. 이미 제임스 1세를 낳기 전부터 결혼 생활은 사실상 파국으로 치달았다. 특히 헨리 스튜어트는 오만한 데다 술만 들어가면 행패를 부려서 인격에 문제가 있었고, 메리 여왕도 그런 남편을 싫어하고[7] 시종이었던 이탈리아인 음악가 다비드 리치오를 가까이 해 다비드와 그렇고 그런 관계라는 의심을 샀다. 아예 제임스가 헨리 스튜어트가 아닌 리치오의 아들이라는 의혹까지 있었을 정도였다. 거기다 메리는 출산 한 달 후에 아이를 내팽개치고 놀러갈 정도로 아이에 대한 애정도 적었다.

아내의 불륜 의혹에 분노한 헨리 스튜어트는 결국 다비드 리치오를 죽였고, 분노한 메리 스튜어트는 보스웰 백작 제임스 헵번과 짜고 헨리 스튜어트를 죽인 후 그와 재혼했다. 이에 분노한 스코틀랜드 귀족들이 반란을 일으켜 메리를 폐위했기 때문에, 제임스는 1살의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스코틀랜드 왕 제임스 6세로 즉위했다. 어머니가 도망갔기에 갓난아기인데도 왕이 되었고, 아버지는 그보다 몇 개월 더 전에 어머니가 죽였기 때문에(태어난 지 8개월이 되던 1567년 2월 사망(살해)) 실제로는 4명의 섭정이 통치를 했다. 그러나 이내 섭정들 간의 다툼으로 일부 섭정이 살해당했으며,[8] 청소년기에 고리 백작의 저택을 방문하면서 백작과 그 아들이 살해당하는 사건이 생겨서 민심이 나빠졌다. 그래도 스코틀랜드인들에게는 모처럼 평온을 가져왔기 때문에 좋은 왕이라고 호평을 들었다.

나중에 엘리자베스 1세[9]가 메리 스튜어트를 처형했을 때, 제임스 6세는 이를 방관하는 모습을 보였다. 사실 제임스 6세의 어머니 메리 스튜어트는 출산 한 달 후에 애를 내팽개치고 놀러갈 정도로 제임스에게 애정이 없었던 데다가, 그 이후로 몇 번 어머니와 재회하긴 했지만 걷지도 못하는 아기 시절이었기에 어머니에 대한 기억은 거의 없었다. 게다가 메리가 아버지 단리 경을 살해한 뒤 재혼한 보스웰 백작 제임스 헵번은 자신이 왕위를 찬탈하는데 방해만 되는 제임스 6세를 암살하려 들었고, 메리 또한 여기에 협조했기 때문에 당연히 모자간의 정 따윈 존재하지 않았다.

어머니가 재판장에 세워졌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대사를 통해 어머니의 목숨만은 살려줄 것을 요청하기는 했으나, 메리 스튜어트는 계속 복위할 기회를 노리고 있었던데다 종교가 달라서 정치적 입장도 전혀 달랐고, 더욱이 엘리자베스 1세의 추정상속자인 자신이 잉글랜드 왕위를 얻는데 방해요소가 되기에 구명에 적극적이지도 않았다.[10] 실제로 어머니가 처형당한 후에 이를 빌미삼아 잉글랜드와의 분쟁을 일으키지 않았다. 어머니가 아버지의 죽음에 일조했다는 이유로 어머니가 처형당했을 때 기뻐했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이 이야기의 사실여부는 알 수 없다. 무엇보다 스코틀랜드 왕으로서 제임스 6세의 권력과 지지 기반은 바로 전 시대 자기 어머니를 필두로 한 하이랜드 친프랑스파 가톨릭 클랜들과 피비린내 나는 권력투쟁 끝에 스코틀랜드의 지배계급으로 자리잡은 로우랜드의 칼뱅파 귀족들이었기 때문에 어머니의 처형을 방관하는 게 사실 당연했다.

이 시절만 하더라도 제임스 6세는 스코틀랜드 내 정치/종교 투쟁에서 적극적인 급진 개신교파의 거두 중 하나였다. 정치적 필요에 따라 개인적인 감정이 눌려 휘둘린 게 아니라 제임스 6세가 이때는 매파의 거두였다. 두고두고 분란의 씨앗이 되는 제임스 6세의 종교정책은 장로교파와 투닥투닥거리면서 정치경험도 쌓고 잉글랜드의 국왕까지 겸하게 되면서 좀 더 포용적이고 너그러운 국교회 중심으로 바뀌게 되면서 형성된 것이다. 물론 개인적인 염증도 없지는 않았는데 장로회 거두들이 왕권보다 신권이 우월하다는 주장을 펴서 제임스 1세의 심기에 거슬린 데다가 어린시절에 개혁파의 거두 중 하나인 조지 뷰캐넌의 제자로 가르침을 받으면서 한편으로는 더러운 성격의 그한테 많이 얻어터져봤기 때문에(...) 그에 대한 반감이 없지 않기는 했다. 그래서 조지 뷰캐넌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그를 처벌하지 않고[11] 왕의 스승이라고 장관직을 주었다. 이때도 사이가 나빠 결국 그를 해임하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다른 관직을 주면서 최소한의 대접은 해주었다고 하니 사적인 감정과는 별개로 공과 사는 잘 구분했고 너그러운 성격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3.2. 잉글랜드 왕위 획득

1603년 엘리자베스 1세가 후계자 없이 사망하여 튜더 왕조가 단절되었다. 헨리 8세의 후손은 완전히 끊겼기에 헨리 7세의 후손 중에서 계승자를 찾아야 했다. 헨리 8세의 누나 마거릿 튜더는 총 세 번 결혼했는데, 첫 번째 결혼에서 낳은 제임스 5세가 메리 여왕의 아버지였으며, 두 번째 결혼에서 낳은 딸이 단리 경의 어머니 마거릿 더글라스 였기 때문에 제임스 6세는 부계와 모계 양쪽으로 튜더 왕조의 계승권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스코틀랜드 국왕 제임스 6세는 엘리자베스 1세 시절부터 다음 왕위 계승자로 추정되었고 눈치 빠른 신하들은 엘리자베스 1세가 골골할 무렵부터 이미 제임스 6세가 등극할 것에 대비하고 있었다. 잉글랜드 입장에서도 스코틀랜드는 종교개혁으로 개신교로 전향했고 청교도들이 바라는대로 개혁주의 신학에 따른 장로교가 주류였기 때문에 영국 국교회 개혁파에선 스코틀랜드 왕 제임스 6세가 잉글랜드 왕이 되는 걸 환영했으며, 제임스 6세가 튜더 혈통을 이어받은 후손 중에서도 법적으로 가장 우선권이 있었기 때문에 반대 명분도 거의 없었다. 이리하여 제임스 6세는 36살의 나이로 잉글랜드의 왕관을 얻어 잉글랜드에선 제임스 1세로 등극했으며 잉글랜드도 스튜어트 왕조가 통치하게 된다. 이로써 제임스 1세는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아일랜드 모두를 다스리는 브리튼 제도의 왕이 되었다.[12]

3.3.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왕으로서

여왕의 오랜 통치와 레임덕에 질려 있었던 잉글랜드인들은 산뜻한 기분으로 제임스 1세의 등극을 환영했다. 새로운 왕이 상당히 능력자이며, 교착된 정치·외교적 상황에 일대 전환을 가져올 것이라는 소문이 퍼졌기 때문이다. 물론 결과적으로 그렇게 되기는 했지만, 제임스 1세 자신은 잉글랜드인들 사이에서 빠르게 신망을 잃어버리고 만다. 이는 주로 개인적 면모가 컸는데, 자뻑 기질에 도취되어 있는 성격과 그에 비해 너무나 천박하고 기품 없는 언행, 낭비스러운 소비 습관과 동성애를 연상케 하는 총신들과의 관계 등 잉글랜드인들로서는 이질적으로 여길 수밖에 없는 점들이 눈에 띄었기 때문이다. 그가 통치 10년을 채웠을 무렵에는 사람들은 공공연히 (그렇게 지겨워했던) 엘리자베스 1세에 대한 향수를 토로하고 있었고, 오늘날 엘리자베스 여왕에 대한 낭만적인 기억은 여기에 큰 기반을 두고 있다.

그러나 제임스 1세는 인기는 없을지언정 옳은 방향으로 국가 정책을 밀고 가는 동력은 있었다. 제임스 1세는 즉위하자마자 엘리자베스 1세 시절 동안 지속된 스페인과의 전쟁을 마무리지었다. 사실, 우리의 통념과는 달리 엘리자베스 1세 시절 영국의 재정 상태는 상당히 좋지 못했고, 이는 대부분의 원인이 지속된 전쟁으로 인한 것이었다. 이러한 파탄 직전의 재정을 물려받은 제임스 1세가 할 수 있는 일은 전쟁을 멈추는 것 뿐이었다. 마침 스페인 또한 지속된 전쟁에 지치던 차라, 1604년 런던 조약을 맺고 전쟁을 종결지었다. 이는 잉글랜드가 체면과 위상도 잃지 않고 실익도 실익대로 거둔 분명한 외교적 성과로서, 이로 인해 그는 상당한 인기를 얻게 된다. 또 현대 학자들의 평가 또한 상당히 긍정적이다.

스코틀랜드에서의 호평과는 달리 잉글랜드에서는 말더듬이수전증 등의 신체적 허약함 등으로 까였다...고는 하는데, 하술하듯이 이것은 급진 청교도들이 포진해 있는 문필가들의 의견으로 보아야지, 전반적인 의견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 제임스 1세는 잉글랜드 입장에서는 헨리 8세 이후 50여년 만에 처음으로 맞이하는 '장성한 남자 국왕'이었기 때문에 그 자체로 상당히 환영받았다. 엘리자베스의 장기 집권과 말년의 재정 문제로 인한 피로감도 제임스의 즉위 초 인기에 긍정적인 요인이었다.

제임스 1세는 종교정책에 있어서 청교도와 가톨릭교도를 동시에 견제하여, 잉글랜드 국교회를 분파를 초월한 왕국의 유일 신앙으로 만들고자 했다. 단순히 이렇게 말하면 무슨 다른 종교를 강요한 것 같겠지만, 국교회 내부에 가톨릭 전례와 전통을 주장하는 신도나 대륙의 칼뱅주의 개혁신학으로 무장한 청교도나 모두 명목상으로는 잉글랜드 국교회 신자였기 때문에 정확히는 자신의 종교 정책을 강요한 것이다.

여기서 가톨릭이 아니라 국교회 내부 가톨릭 성향이란 단서가 왜 붙냐면 당시 잉글랜드의 가톨릭교도들은 헨리 8세 시절 수장령과 반역법으로 완전히 정치적으론 몰락하여 세력이 극히 미약했으며, 국교회 내부에 가톨릭에 온정적인 세력, 국교회 내부의 개혁 세력이 있었고 대부분의 국교회 소속 신자들은 그다지 종교 면에서 열성적이지 않았다고 보는 게 타당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가톨릭 따로 국교회 따로 청교도 따로 노는 게 아니라 잉글랜드 국교회 내부의 가톨릭 전례와 전통 보존파 개혁세력인 청교도들이 갈등했으며 정계 외부에 가톨릭 잔존 세력이 있었으나 이미 정치적으로 영향력을 상실하고 크게 탄압받는 대상이었지 정치적 고려 대상은 아니었다.[13] 사실 스코틀랜드에서도 제임스는 장로회에서 왕의 권력은 합법성 안에 제한되며 폭군은 퇴출해야 한다는 주장에 크게 반감을 가진 게 컸다.

그러나 이런 신학적인 결정은 제임스 1세의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군왕적인 비전이라 할 수 있었다. 제임스 1세는 스코틀랜드 출신으로 칼뱅주의 교육을 받고 자랐다. 동시에 제임스 1세는 주교 - 사제 - 평신도로 이루어지는 체계적인 교회조직 자체를 가톨릭의 유산이자 악습으로 취급한 잉글랜드 청교도와 스코틀랜드 장로회, 헨리 8세 - 에드워드 6세 - 엘리자베스 치세의 탄압의 연속에도 불구하고 시절을 거치면서도 국교회 내부에 자리잡은 가톨릭 전통 용인 세력의 힘 역시 무시하지 않았다. 그랬기에 제임스 1세는 실상 가톨릭 전통과 개혁교회 세력, 그 사이의 애매한 위치에 있는 잉글랜드 국교회의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으며, 이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는 것은 바실리콘 도론(1599), 흡연 반론(1604), 그리고 무엇보다 킹 제임스 성경 등의 본인이 직접 쓰거나, 저술을 지시한 저작과 같은 여러 발언과 집필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제임스 1세는 중세와 근세의 군주들 중에서도 굉장히 고등 교육을 받았으며, 행정 실무에 정통하고, 지적으로 충만한 문필가 왕에 가까웠다. 이전에 튜더 왕조의 잉글랜드의 군주들은 종교 문제에 관하여 본인들은 정치적인 판단만 내리고 실질적인 교리적, 학문적 종교 개혁은 토마스 크랜머, 리처드 후커 등 왕실의 비호를 받는 신학자, 지식인들이 주도하였다. 반면 제임스의 경우는 본인이 스코틀랜드의 칼뱅주의 교육을 받아 실제로 시시콜콜해 보이는 신학적 논쟁 또한 주도면밀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이 와중에서 그가 청교도와 가톨릭 사이 아르미누스의 사상에 기반한 포괄적인 고교회 국교회 강화를 추진한 건, 단순한 왕권 강화라는 정치적인 문맥만에서는 불가능했던 일이다.

제임스 1세 본인은 독실한 개신교 신자였다. 그러나 당시 사람으로서는 흔치 않게도 가톨릭에 우호적이었고, 이는 급진 청교도 세력과 충돌하는 요인 중 하나였다. 그러나 당시 개신교도들은 강경파와 온건파를 불문하고 '가톨릭은 때려죽여야 하는 사탄의 자식들'이라는 관점이 팽배했기에, 본인의 이상과는 다르게 가톨릭에 대한 탄압을 하지 않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하지만 이 와중에도 이로 인한 피해는 최소화시키고자 했고, 덕분에 제임스 1세 시기동안 가톨릭 신자들의 피해는 엘리자베스 1세의 급진적인 강경 탄압책 시절에 비해 상당히 줄어들었다. 그러나, 이는 동시에 가톨릭에 대한 해방을 기대했던 가톨릭 신자들에게 있어서는 기대를 배신당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결국 급진적인 가톨릭 교도들은 왕을 암살하기 위해 상원의회 지하에 대량의 흑색화약을 매설하여 폭파시킨다는 계획을 실행 일보직전까지 갔지만 밀고로 실패하여 분노한 제임스가 보낸 군대에게 남김없이 체포되어 가이 포크스 같은 실행범과 배후세력이 줄줄히 처형당했다. 이 사건 이후로 제임스 1세는 왕실과 의회의 경비를 크게 강화하고, 국왕이 의회에 참석할 때는 사전에 근위대를 의회 의사당에 파견해서 내부를 수색하는 작업을 꼭 행하게 했다. 이 작업은 현대에도 잔존해서, 영국 국왕이 의회 개회식을 위해 참석할 때 왕실 근위대가 의사당 지하실을 수색하는 행사를 행한다. 물론 이는 전문 특수 요원들이 방호 장비 갖추고 IED 수색하는 수준은 아니고, 예복을 갖춰 입은 근위대가 형식적으로 둘러보는 의전 행사로 남아 있다.

제임스 1세는 이 상황을 타개하고 안정적이고 외부세력에게 휘둘리지 않는 독립적인 국가적 종교적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해 국교회의 근본적인 개혁을 추구했고, 이 개혁의 방향이 곧 지금 현대 성공회의 모습, 즉 신학적으로는 개신교의 것을 따르되 가톨릭 같은 교회조직은 유지하는 것이었다. 킹 제임스 성경의 발간만 하더라도 이러한 정치적인 맥락이 뚜렷이 있었으며, 제임스 1세의 치세만 하더라도 이게 그렇게 큰 반발을 사지 않았다. 스튜어트 왕가의 종교적 삽질이 의회와 귀족들의 분노를 사게 되는 건 제임스 1세의 아들 찰스 1세가 똑같은 국교회 개혁안을 여유없이 이리저리 휘둘러댄 탓이었는데, 이를 뒤집어 말하면 똑같은 일을 추진하면서도 제임스 1세는 자기 나름의 정치적인 수완과 리더십, 소통력이 있어서 큰 반발없이 일을 추진할 수 있었다는 얘기다. 결론적으로, 제임스 1세 시기 영국의 종교 문제는 나름 평온한 편이었다. 하지만 이 평온이 실제로는 극단적인 갈등과 배척 위에 구성된 평화였다는 것이 문제였고, 결국 찰스 1세때 가서 제대로 터지게 된다.

왕권신수설을 주장하여 왕권은 신에게서 수여된 만큼 누구도 의문을 제기할 수 없는 불가침의 영역이며 신민들에게 잘못을 범할 수 없고, 따라서 신민들에게 정치적 책임을 질 수 없다는 이론을 내세웠는데 자신을 법보다 높은 존재로 여겼으므로 세속권력은 주님의 법 아래 있으며 합법성 안에서 제한된다는 의회 다수의 젠트리청교도, 그리고 본고장 스코틀랜드의 하이랜드 클랜 대귀족과 장로교 지식인들의 주장과 대립했다.[14]고 알려져 있으나 이 역시 잘못된 것으로, 당시 사회에서 왕권이 신에게 부여된 것이라는 관념은 일종의 상식이었고, 이는 의회파도 마찬가지였다. 제임스 1세가 왕권신수설을 주장한 것은, 왕권이 약해도 너무 약했던 스코틀랜드에서의 경험으로 인해 체계적, 이론적 기반을 통해 중앙집권화를 이루고자 한 노력의 포석이지 제임스 1세가 독재적 전제군주라서 그런 것이 아니다. 다만, 이러한 제임스 1세의 주장이 하느님의 법, 즉 성경을 가장 큰 권위로 놓는 급진 청교도 세력과의 마찰을 부른 것은 사실이다.

위의 국교회 개혁 의지 또한 저렇게만 보면 종교적 관용 따위는 쌈싸먹은 암군 같이 보이지만, 사실은 15세기 말 이사벨 1세페란도 2세 아래 이루었던 스페인의 가톨릭 교회 개혁이나 그 당시 프랑스에서 앙리 4세가 진행 중이었던 '국가 권력에 대한 종교의 종속화'를 잉글랜드 왕국에서도 재현하겠다는 맥락에서 볼 수 있다. 때문에 의회는 온갖 파란을 일으켰으며, 제임스 1세가 재위한 22년 동안 4번밖에 열리지 않았다. 또한, 의회가 열렸어도 심하게 대립했고 형편이 곤란해지면 일방적으로 의회를 해산시켰다. 이건 나중에 찰스 1세가 그대로 하다가 분노한 의회에게 참수당한 간접적인 원인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래도 왕권이라도 강하니까 의회를 신나게 해산시킬 수 있었던 것이고, 이렇게 해산해도 의회는 왕에게 반란만은 일으키지 못했다. 제임스 1세는 어느정도 부족한 면이 있었다 쳐도, 아들 찰스 1세도 세간의 까임과 달리 과거의 왕들에 비해 더 못나지도 않은 왕이었다. 특히 당시의 영국 의회는 지금처럼 보통선거제도의 선출자가 아니라 대지주 출신 젠트리가 대다수였기에[15] 단순히 이 시기의 왕을 "독재자"로 이해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도리어 엘리자베스 1세 때까지 조용히 성장한 젠트리 세력이 더욱 성장했는데 외국 출신에다 기반이 약한 제임스가 출현하자 그동안 절대왕정 치하의 무소불위 과세권에 반발하며 간섭하면서 일어난 사건이었다고 볼 수도 있다. 제임스 1세가 특별히 명군도 아니었지만, 세간의 인식처럼 심각하게 암군이거나 무능한 왕도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 정도였다면 스코틀랜드 왕도 못 해먹었을 것이다.

정복왕 윌리엄 시절부터 강력한 중앙 집권을 추구했던 잉글랜드 왕실과 달리 스코틀랜드의 경우 제임스 6세가 200년 만에 처음으로 왕관이나 나라를 전쟁과 내란에 상실하지 않고, 전투에서 전사하지도 않고 무난히 통치하다가 자기 침대에서 곱게 죽은 왕이다. 특히 스코틀랜드는 제임스 본인의 치세에도 1596년 장로회 소속 청교도 매파의 기습적인 봉기로 수도의 통제권을 상실하고 제임스가 일시적으로 인근의 린리스고(Linlithgow)로 피신해야 할 만큼 잉글랜드에서 왕 해먹는 게 커피라면 스코틀랜드에서 해먹는 건 TOP이라 해도 좋을 만큼 다스리기 힘든 곳이었는데 제임스는 당시 장로회 엘리트들과 근본적인 사상과 국정 방향은 충돌하면서도 적어도 본인의 치세 중에는 큰 문제 없이 다스릴 수 있었다. 특히 제임스는 기본적으로 머리도 좋았을 뿐만 아니라 어려서부터 워낙 권력 다툼으로 고생하면서 자랐기에 로우랜드의 개신교 성직자, 하이랜드의 거대 클랜, 왕실 직할 도시 자치정부 모두에게 골고루 연줄이 있어서 한 세력이 왕권에 도전하며 개기면 다른 세력을 불러와 찍어 누른 다음, 그 뒤에도 지나치게 가혹하게 처벌하지 않고 적당히 봐주는 식의 단호하면서도 유연한 통치, 즉 밀당의 대가였다.

이렇게 제임스 1세가 어린 시절부터 고생하며 쌓은 역량과 인맥으로 그나마 안정적으로 나라를 굴린 것까지는 좋았다. 반면 아들 찰스 1세는 스코틀랜드 입장에서 보면 아예 선대인 메리 여왕급으로 말만 스코틀랜드 출신이지 실질적인 성장, 가치관, 성향 모두 외국인이었다. 이러한 심리적 괴리감과 국왕으로서의 무능함 때문에 찰스 1세는 국정을 말아먹다가 결국 1638년 언약도 혁명으로 스코틀랜드에서 권력을 상실하고, 또 이걸 찍어 누르겠답시고 대립하던 잉글랜드 의회와 또 싸움질하다 무거운 과세를 물려 민심을 크게 잃고 아예 청교도 혁명으로까지 쌍으로 번져 참수형으로 목까지 잘려버렸다. 달리 말하면 제임스 치세의 치명적인 결함을 굳이 하나 꼽자면 이렇게 본인의 능력으로만 유지할 수 있을 정도로 첨예한 판도를 다스릴 능력이 제임스의 후계자에게는 부족했다는 점이라 할 수 있다.

위에서 말한 스페인과의 평화 정책에 이어 그는 유럽의 평화를 유지하는 질서의 중재자 역할을 자임했다. 그러나 사위인 프리드리히팔츠 선제후로 즉위하며 30년 전쟁이 발발, 유럽이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가 캐삭빵을 뜨는 국면으로 접어들자, 사위의 도움 요청을 받고도 소극적인 태도를 취해 이 당시 갈수록 친 네덜란드 성향의 급진적으로 변하던 청교도 세력의 불만을 샀다.[16][17] 사실 이는 제임스 1세 시대에 의회 해산이 잦았던 가장 큰 이유 중의 하나이기도 하다. 하지만 의용병들이 팔츠 선제후를 도와서 참전한 것을 막지는 않았으며, 오히려 외교적 협상으로 사위의 권리를 지키려고 하였다.[18]

엘리자베스 1세 말기 벌리 경, 월싱엄, 레스터 백작의 비호로 성장하여 이 당시 하원을 석권하고 있었던 급진 청교도 세력은 이러한 제임스 1세의 온건책에 격분하였는데, 엘리자베스 1세 시절 치른 대 스페인 전쟁으로 인하여 전쟁 자체는 비교적 성공적으로 이끌었음에도 불구하고 잉글랜드 재정이 파탄나고 백성들이 엘리자베스 1세를 원망했던 걸 생각하면,[19] 아직 유럽 대륙에 본격적으로 힘을 쓸 만한 열강이라 하기에는 국력이 부족했던 잉글랜드 입장에서는 현대의 평가로는 옳은 선택이라고 보는 시각이 주류이다.[20]

3.4. 스코틀랜드 통치 기술

잉글랜드로 옮겨서 통치했으나 자신이 본래 왕위에 올랐던 스코틀랜드를 결코 소홀하게 대하지 않고 스코틀랜드를 여러 번 방문하였다. 실제로 에든버러의 홀리루드 궁전을 방문했을 때 스코틀랜드 대신들과 만나 자연스럽게 격의없이 대화를 나누면서 "사람의 본성이란 연어와 같이 고향에 자꾸 돌아오게 되더라."는 식으로 농담을 나누기도 했다. 이때 스코틀랜드의 대신들이 "왜 잉글랜드에만 박혀서 스코틀랜드에는 자주 안 오시냐"며 자주 와 달라고 섭섭함을 표하자 제임스는 "나도 마음만 같아선 북적거리고 시끄러운 잉글랜드 일 다 때려치우고 고향에 돌아와 너그들이랑 옛날처럼 하하호호 하면서 살고 싶다"고 대답하며 이들의 원성을 달랬다.

하지만 이런 화기애애한 담화를 나누었던 스코틀랜드의 대신들은 사실 제임스 1세에겐 '친근한 고향 사람들'이 아니라 웬수라고 할 만한 놈들이었다. 어머니 메리가 쫒겨나서 잉글랜드 감방에 갇혀 있을 때, 어린 제임스 본인을 정치 투쟁의 장기말로 써먹던 작자들이었기 때문이다. 즉 제임스 1세의 "하하호호 했던 추억"은 사실 천날만날 귀족들 간 파벌 싸움에 따라 납치와 협박, 감금을 당하던 어린 시절의 악몽이라고 할 만한 시절이었다. 그래서 제임스가 어른이 된 뒤에 보복할 법도 한데 오히려 이걸 옛날 추억으로 미화하며 장단을 맞춰서 좋은 분위기와 친분을 유지하는 걸 보면 인내력과 포용력, 정치력만큼은 결코 부족하지 않았다.

심지어 장로교 매파들과 싸울 때도 에든버러의 한 서점 주인이 "(성공회 식으로) 예법과 교리를 변경시키시면 안 된다." 하면서 사사건건 딴죽 걸며 곱게 본인이 도입한 전례법에 따라 예배 보는 걸 거부하니 왕이 직접 청문회에 불러서 "야 이 튀르크 놈들이나 유대인보다도 악질인 새끼들아! 네놈 에든버러 시민놈들 처 개기는 것도 질려서 못 해먹겠다! 악마한테 몸도 영혼도 다 뜯겨 먹히고 지옥에서 썩을 새끼들아, 니 놈하고 너희 구닥다리 장로교회 새끼들 모두 엿이나 처먹어라!"고 욕짓거리를 거하게 퍼부었는데, 그 소리를 들은 스코틀랜드인들은 "역시 잉글랜드에 내려가셨어도 마음은 우리나라 임금님이시다!" 라며 오히려 더 호응한 기록도 있다.[21] 국왕이 동네 서점 주인이랑 이러고 있으면 웃긴 거 같지만, 인쇄술이 발명된 지 100년 조금 넘었고 의무교육이 시행되지 않아 문맹률이 높았던 이 시절에 서점 주인, 그것도 에든버러 같은 한 나라의 수도 시내의 서점 주인이라면 그 일대 지식인 사회의 거두 중 하나라는 소리다. 현대로 비유하면 그냥 동네 책방 수준이 아니라 교보문고와 같은 대형 도서 판매기업이나 출판사 정도로 비유해야 더 적당하다.

행정적인 기록을 봐도 몸은 비록 잉글랜드로 가 있지만 대리 자문회(Privy Council)을 통해 지속적으로 스코틀랜드에 관심을 가지는 것 뿐만 아니라 정책 결정을 비롯한 통치도 비록 서면으로지만 적극적으로 했고, 현지 상황도 전화도 이메일도 없었던 당시 시대적 한계를 고려하면 비교적 주도면밀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4. 평가

제임스 1세의 치세에는 의회의 입김이 늘어났고, 제임스 1세 자신조차 전국에 성공회를 강요하는 등 여러 마찰을 빚었다. 때문에 암살당하지 않았느냐는 의혹도 있다. 그러나 제임스 1세는 헨리 8세, 메리 1세, 엘리자베스 1세 시절과 달리 대외 전쟁에 시달리며 국고가 파탄나는 일만은 피했고 개인의 성격도 상당히 너그러웠기 때문에 오히려 백성들에게는 사랑받았던 왕이다. 또한 처음으로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통합 왕국을 다스리면서도 본인의 치세에는 큰 혼란없이 나라를 유지하였다는 치적도 있다.

역사적으로 엘리자베스 1세의 후광에 짓눌려 암군의 평가를 받았으나 최근에 와서는, 어느 정도 무난하게 나라를 다스렸으며 뛰어난 명군은 아니지만 암군이라고도 할 수 없는 재평가를 받고 있다. 특히 잉글랜드만 다스렸던 엘리자베스 1세와 달리 스코틀랜드의 군주까지 겸임해야 했기 때문에, 통치의 난이도도 높았던 제임스 1세 입장에서 엘리자베스 1세와 직접 비교하는 건 굉장히 억울할 것이다. 실제로 잉글랜드 중심의 보편적인 영국사에서 스코틀랜드가 독자적으로 가지고 있던 비중과, 그 역사가 제대로 조명받게 된 건 역사학계 내에서도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그 이전에는 잉글랜드의 국왕이 되기 이전 스코틀랜드에서의 시절은 그냥 악세사리 취급하다가, 최근에 와서야 제대로 스코틀랜드 역사와 그 안에서 제임스 1세의 비중이 부각되었다. 그 내부를 뜯어보면 이러나 저러나 정복왕 윌리엄 이후 전통적으로 왕권이 강력했던 잉글랜드[22]와 달리, 스코틀랜드는 군주 노릇 해먹기에 지극히 힘들었던 곳이라는 점을 고려하여 평가가 점점 올라가고 있다.[23]

또 그가 지시하여 번역한 성경인 킹 제임스 성경은 현대 영어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제임스 1세의 대표적인 업적이다.

제임스 1세의 근본적인 국정의 방향은 동시대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양국의 파워 엘리트와 충돌해도, 그걸 충분히 무마할 개인적 매력과 소통력으로 이끈 것으로 그럭저럭 재위기간을 무사히 보낼 수 있었다. 하지만 제임스 1세의 아들 찰스 1세는 철학만 물려받았지 매력과 능력, 수완, 연줄은 하나도 없이 독단적으로 일을 추진하다가 일을 망쳐도 크게 망쳤다. 실제로 영국 내전의 직접적인 발단도 국교회 강요에 의해 스코틀랜드에서 터진 반란이었는데, 이 반란 또한 찰스 1세 본인도 뿌리는 스코틀랜드였던 주제에 재위한 지 9년이나 지나서야 스코틀랜드를 처음 방문했고, 또 왕이라는 작자가 이제야 와서 한다는 말이 스코틀랜드가 얼마나 촌동네인지 불평불만만 하며 주변에는 잉글랜드 출신 측근들만 끌고 다니는 등 종교 문제를 떠나서 인간적으로 스코틀랜드인들의 원성을 들을 수 밖에 없었다.[24] 찰스는 당장 즉위하자마자 스코틀랜드에 대해서는 하나도 관심을 안 가지다가 처음으로 한 개입이란 게, 당시 영국 전체로 봐도 가장 막강한 귀족 가문 중 하나였던 클랜 캠벨[25] 좀 마음에 안 든다고 캠벨 가와 같이 하이랜드를 양분하며 아일랜드에서도 영향력이 강했고, 무엇보다 가톨릭이었던 클랜 맥도널드더러 "야 캠벨 가 저 놈들 마음에 안 드니 니들이 아일랜드에서 사병 좀 끌고 와 조질래?" 하며 전혀 알지도 못하던 정치판에 개입한 것이었다.[26] 역사적으로 스코틀랜드 왕실의 권력이 거의 미치지 않는 지대였던 하이랜드에서 그나마 왕실의 앞잡이를 자처하며 세력을 키우다가 거하게 통수 맞은 캠벨 가는 이러한 찰스 1세의 행보에 대해 장로교 매파의 언약도 혁명이 터지자마자 가문의 종자, 분가, 휘하 소가문 다 끌고 언약파에 가맹하여 왕권을 뒤엎어 주는 걸로 회답했다.[27] 어린 몸으로 스코틀랜드의 치열한 권력 투쟁 사이에 자라며 현지 사정에 훤했던 제임스라면 결코 저지르지 않았을 실수였다.

실제로 제임스 1세는 사적으로는 고소공포증, 독살공포증, 도검공포증 등 온갖 미신적 두려움에 둘러싸여[28] 편집증적인 삶을 살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임스 1세는 이러한 심리적 공포증을 극복하고 적극적으로 신하들과 소통을 하고 친구들을 많이 만들었으며, 심지어 일반 대중과도 잦은 행차와 행사를 통해 친근함을 과시하려고 했던 나름 인간적인 매력과 인망이 풍부했던 왕이었다. 또한 제임스 1세 본인도 이런 성품을 정치적 자산으로 삼았다. 아들인 찰스 1세가 즉위 초기부터 일단 이념적, 종교적 차이를 넘어 인간적인 레벨에서 항상 '냉정하고 차가운 사람'이란 평가를 받으며 가신들과 측근들을 냉담하게 대하고, '자기 사람'을 별로 만들지 못했던 모습을 보인 것과는 대조적이다. 사실 제임스 1세의 입장에서는 이렇게 스코틀랜드에서 혹독한 어린 시절을 보낸 이후 훨씬 더 부유하며 물질적으로 풍성하고 왕 노릇을 하기 편한 잉글랜드로 이주했으면, 스코틀랜드에 있던 옛날의 정적들을 조지려고 하지나 않으면 양반이고 아예 고향을 등한시할 법도 했다. 그러나 제임스 1세는 분명 법적으로 별개 국가였던 당시 브리튼 섬의 여러 나라들의 각각 다른 정치적 이해 집단들과의 관계에 걸쳐 놓여져 있는 자신의 권력의 현실을 영민하게 인지하고, 이에 따라 정치적으로 스코틀랜드인들의 소외감을 방지하며 현명한 통치를 했다. 그 와중에도 근본적인 종교적인 문제로 결국 타협이 불가능한 매파 장로교는 나머지 귀족과 대중 전반에게서 성공적으로 분리해 놓았으니, 이것만으로도 스코틀랜드 왕 제임스 6세는 굉장히 유능하고 성공적인 군주였다 할 수 있다. 제임스 1세의 유능함은 그가 어린 시절 직접 깨지고 박살나는 경험을 통해 배운 밀당 능력이 없었던 아들 찰스 1세가 왕이 되자, 장로교 매파가 저 귀족과 도시민들 사이의 영향력을 재빠르게 회복한 것만 봐도 대번에 알 수 있다.

제임스 1세 시절 통치의 가장 큰 실책은 바로 재정개혁에는 끝내 실패했다는 것이다. 잉글랜드의 재정이 파탄난 것은 지나친 전쟁과 재정개혁 포기, 왕 본인과 측근들의 부패와 탈세를 묵인하고 심지어 장려하기까지 한 엘리자베스 1세에게 전적인 책임이 있는데, 문제는 당시 사람들은 잉글랜드의 재정이 얼마나 심각한 상태인지 알지 못했다. 그런데다가 근대 초기의 관습에 따라 제임스 1세는 왕으로서의 위엄을 보여주고 지지를 얻기 위해 돈과 작위를 흩뿌리고 연회를 열어야 했다. 덕분에 지지는 얻는데 성공했지만, 재정 상태는 더 나빠지고 말았다. 이렇게 되니, 사람들은 상황 때문이었지만 굉장히 긴축하고 절약했던 엘리자베스 1세를 떠올리며 왕이 쓸데없이 낭비를 한다고 생각했다. 1614년의 제임스 1세 치하 궁정 비용은 155,000파운드로, 1601년 엘리자베스 여왕 말기의 궁정 비용(27,000파운드)의 대략 6배에 이르러 있었으므로 비교가 되는 건 자명한 사실이었다.

결국 특단의 조치를 취해야겠다고 결심한 제임스 1세는 1608년 무려 50년만에 행해진 관세개혁을 통해 재정상태 회복을 시도하지만 별 효과가 없자, 의회를 소집해 재정개혁의 필요성을 역설한다. 이에 의회에서 재정개혁안을 제출하는데, 이는 제임스 1세가 비상징발권 등 몇몇 권리들을 포기하는 대신, 의회는 매년 20만 파운드를 왕에게 국고로 지급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안이 통과되기 직전, 갑자기 의회 의원들은 이 개혁이 왕의 힘만 늘려주는 것이 아닌지 걱정하기 시작했고[29], 제임스 1세도 제임스 1세대로 인플레이션이 지속되는 당시 시대상 시간이 지나면 20만 파운드의 가치가 하락해 권리만 내주고 실익은 얻지 못하는 것은 아닌지 걱정하기 시작했다. 결국, 재정개혁을 할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무산되었다. 그리고 이는 두고두고 발목을 잡아 아들이 정치적으로 몰락하는 데까지 영향을 끼친다.

5. 가족관계

5.1. 조상

본인 부모 조부모 증조부모
제임스 6세 & 1세
(James VI & I)
<colbgcolor=#fff3e4,#331c00> 단리 경 헨리 스튜어트
(Henry Stuart, Lord Darnley)
<colbgcolor=#ffffe4,#323300> 제4대 레녹스 백작 매튜 스튜어트
(Matthew Stewart, 4th Earl of Lennox)
제3대 레녹스 백작 존 스튜어트
(John Stewart, 3rd Earl of Lennox)
엘리자베스 스튜어트
(Elizabeth Stewart)
레이디 마거릿 더글라스
(Lady Margaret Douglas)
제6대 앵거스 백작 아치발드 더글라스
(Archibald Douglas, 6th Earl of Angus)
잉글랜드의 마거릿[A]
(Margaret of England)
메리 여왕
(Mary I)
제임스 5세
(James V)
제임스 4세
(James IV)
잉글랜드의 마거릿[A]
(Margaret of England)
기즈의 마리
(Mary of Guise)
기즈 공작 클로드
(Claude, Duke of Guise)
앙투아네트 드 부르봉
(Antointte de Bourbon)

5.2. 자녀

자녀 이름 출생 사망 배우자/자녀
1남 웨일스 공 헨리 프레더릭
(Henry Frederick, Prince of Wales)
1594년 2월 19일 1612년 11월 6일
1녀 보헤미아의 왕비 알주베타
(Elizabeth, Queen of Bohemia)
1596년 8월 19일 1662년 2월 13일 팔츠의 선제후
프리드리히 5세

슬하 8남 5녀[32]
2녀 마거릿 공주
(Princess Magaret)
1598년 12월 24일 1600년 3월
2남 찰스 1세
(Charles I)
1600년 11월 19일 1649년 1월 30일 프랑스의 앙리에트 마리
슬히 3남 4녀[33]
3남 킨타이어와 론 공작 로버트 왕자
(Prince Robert, Duke of Kintyre and Lorne)
1602년 1월 18일 1602년 5월 29일
3녀 메리 공주
(Princess Mary)
1605년 4월 8일 1607년 12월 16일
4녀 소피아 공주
(Princess Sophia)
1606년 6월 22일 1606년 6월 23일

6. 기타

- 《광해군일기》 정초본 179권, 광해 14년 7월 19일 계축 1번째 기사 ||


[1] 엘리자베스 스튜어트의 외손자가 스튜어트 왕조의 바로 다음 왕조인 하노버 왕조의 시조 조지 1세다.[2] 나무위키에는 스코틀랜드, 잉글랜드의 제임스 1세만 있지만, 영어 위키백과는 이 둘 외에도 스페인 쪽의 '하이메', 프랑스 쪽의 '자크' 등이 다 '제임스'라 훨씬 많다.[3] 스코틀랜드는 지금도 영국에서 독립을 추진할 정도로 잉글랜드와 별개의 독립적인 민족성을 갖고 있다.[4] 특히 조지라는 왕호는 원래 영국에서는 왕의 이름으로 쓰이지 않았고 물 건너 독일하노버 왕국과 동군연합이 이루어졌을 때 하노버 왕국에서 쓰던 게오르크라는 왕호가 넘어온 것이다.[5] 잉글랜드 대수로 계산하면 윌리엄 5세가 되지만 스코틀랜드 대수로 계산하면 윌리엄 4세가 된다.[6] 당시 스튜어트 왕조의 분가였던 단리 스튜어트 가문(Stewart of Darnley) 출신. 그래서 보통은 단리 경이라고 불린다. 둘은 사촌 관계였으며 메리 쪽이 연상이었다.[7] 특히 헨리 스튜어트는 메리에게 자신을 스코틀랜드의 공동왕으로 만들어 줄 것을 요구했으나 메리는 끝까지 들어주지 않아 남편과의 관계가 더욱 나빠졌다.[8] 그 중에는 그의 할아버지인 레녹스 백작 메튜 스튜어트와 외삼촌인 모레이 경도 있었다. 할아버지가 살해된 여파로 레녹스 백작 작위는 제임스가 계승하면서 잠시 왕위와 합병되었다.[9] 정확히는 엘리자베스 1세가 메리를 처형시키는 것에 주저하자 측근들이 여왕에게 알리지도 않고 처형을 시킨 것이었다. 이후 뒤늦게 이 사실을 안 엘리자베스 1세는 격노하며 처형을 집행한 측근들의 직위를 박탈했지만 나중엔 다시 복권시켜줬다고 한다.(이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메리 스튜어트 문서 참조).[10] 메리 스튜어트는 스코틀랜드에서 이미 폐위된 데다가, 가톨릭 교도에 반역까지 저질러서 잉글랜드 왕위 계승권은 기대하기 어려웠다. 가톨릭 교도 왕위 승계가 법적으로 제한된 것은 아니지만 엘리자베스 치세에 이미 국교회(성공회) 우위가 두드러져서 가톨릭은 정치적으로 소수파였다.[11] 뷰캐넌이 왕을 때린 행위는 귀족들조차 감싸줄 수 없고 극형에 처해질 수 있는 중죄다. 애초에 왕을 때린 것 자체가 반역죄다.[12] 웨일스 공국은 헨리 8세 시대에 완전히 잉글랜드 왕국에 흡수되었다.[13] 당시 잉글랜드 국교회(Church of England)는 현대 성공회와는 매우 다르다. 성공회잉글랜드를 포함하여 미국한국 등의 성공회들을 포함하는 명칭이고, 전세계로 퍼진 잉글랜드 국교회 출신 세계 교회들을 통합하는 명칭으로써 성공회로 19세기 중반에 개칭하는 것이지 성공회라는 교회가 따로 국교회 따로 청교도 따로 교회를 설립한 것이 아니다.[14] 영국의 귀족 제도는 극히 제한된 수십 명의 현직 귀족들만이 있기 때문에 젠트리라고 보는 게 합당하다. 튜더 왕조 말기에조차 끄트머리 작위인 남작 30여 개 집안을 포함해도 귀족 가문은 50여 개에 불과했다. 그리고 얼마 안 되는 귀족들은 그나마 국왕 편을 들었고 실제로 영국 내전 당시에도 귀족들은 거의 왕당파였다. 물론 하이랜드 내 개신교 매파이자 단일 최대 세력인 클랜 캠벨 vs 반 캠벨 세력의 구도로 전개된 스코틀랜드의 상황은 전혀 다르다. 이쪽은 정직하게 캠벨 가문 분가, 휘하 시종 가문, 급진 장로교 같으면 싸그리 반국왕 언약파, 반대로 캠벨 가한테 16세기 내내 땅과 특권을 뺏기고 다녔던 고든, 맥도널드 같은 클랜들은 싸그리 친왕파. 스코틀랜드는 애당초 잉글랜드와는 전혀 다른 맥락에서 놀다 보니 사실 근왕/반왕의 기치조차 어제는 반왕파였던 몬트로즈 백작이 순식간에 근왕파로 돌아서고 반대로 잉글랜드보다 3년 일찍 국왕 권력을 축출한 언약파 혁명 정부가 또 판도가 불리하니 순식간에 근왕파로 돌아서는 등 그때 그때 핑계에 불과했다.[15] 당시 영국에서 상원은 귀족원이었고 평민인 하원조차 대대로 토지를 물려받고 재산이 많아 귀족과 크게 다를 바 없는 젠트리들의 독무대였다. 젠트리도 사회 내 상위 몇 %냐를 생각해보면 조선시대 양반이나 중국 명청시대 향신(신사)층과 다름없는 지배계급이었다. 19세기에도 일정 납세액 이상의 남성만 투표권이 있었다. 일반인들에게 투표권이 주어진 것은 19세기의 일이고 남성 보통선거가 정착된 것은 1885년이며 여성투표권이 도입된 것은 1918년도로 여기서도 20대 여성들은 투표권에서 소외되었다가 1928년에 가서야 투표권이 주어졌다. 즉, 완전한 보통선거가 이루어진 것은 1928년의 일이라는 것이다.[16] 하지만 프리드리히 5세가 가뜩이나 어수선한 신성 로마 제국의 내정에서 프라하 투척 사건으로 알려진 일종의 쿠데타로 페르디난트 2세를 몰아낸 보헤미아인들의 추대로 보헤미아의 왕위에 올랐기 때문에 지원하지 않은 것이다. 비단 제임스뿐만 아니라 주변에 있는 프리드리히 5세의 친인척 모두가 보헤미아 왕위 즉위를 반대했다. 그럼에도 프리드리히 5세는 잉글랜드 국왕이던 장인 빽을 믿고 기어이 보헤미아 국왕으로 즉위했고, 즉위하러 가는 도중 페르디난트 2세의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선출이 확정되면서 졸지에 반역자로 몰리게 된다(...).[17] 사실상 30년 전쟁의 시작이 이 사건이었던 만큼 제임스 1세가 소극적으로 행동한 것을 나쁘다고만 할 수는 없는 노릇.[18] 처남인 덴마크-노르웨이 크리스티안 4세를 금전상으로 포섭하여 신교측에 가담시키려고도 했으나 이 때는 잉글랜드 의회에서 지원금 지급을 거부하여 무산되었다. 물론 이는 제임스 1세 본인이 자기 필요할 때만 의회를 열고 기분 나쁘면 마구 닫아버리던 것 때문이기도 하다.[19] 심지어 엘리자베스 1세는 의회에 빌미를 잡히기 싫어해 자신의 부동산을 처분하는 식으로 자금을 충당하여 비교적 백성들의 부담이 적었다.[20] 지금까지 전해져 내려오는 당시의 기록이 대부분 지식인이든 정치인이든 사회의 엘리트들이 남긴 글이고, 다시 말하지만 이 시절 잉글랜드의 지식인과 엘리트들은 급진 개신교의 영향을 짙게 받았던 점을 기억하자. 대부분의 백성들이 문맹이었던 이 시절 그나마 국왕에 대한 진정한 의미로서 대중적인 지지도를 보여주는 즉위와 붕어 당시 백성들의 반응, 유행했던 민요 등은 제임스 1세에게 되려 호의적이었던 편이다. 실제로 제임스 1세가 죽었을 때 런던의 시민들은 좋은 왕이 죽었다며 크게 슬퍼했을 정도였다.[21] 스코틀랜드 왕실 자문회 기록 (Register of Privy Council)에 나온 원문은 "Ye are worse than Turks and Jews! I can never get an order of this people of Edinburgh . . . The devil rive their souls and bodies all in collapse and cast them into hell . . . Farts on you and the session of your kirk both." 1619년, 즉 잉글랜드 왕으로 즉위하고 난 뒤에 있었던 일이다.[22] 잉글랜드 국왕 역시 프랑스 등 타국의 군주에 비해선 왕권이 약했다는 의견이 있는데, 당시 유럽 왕실들 중에서 프랑스보다 왕권이 더 강한 나라는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오히려 프랑스가 무려 12세기의 존엄왕 필리프 2세부터 지방 귀족권력을 때려잡으며 유럽에서 독보적으로 가장 일찍, 그리고 가장 강력하게 중앙집권화된 절대왕권을 이룩한 편이다. 심지어 이렇게 절대왕권을 이룩했는데도 귀족들을 완벽하게 제압하는데 실패하여 귀족들이 틈만 나면 왕에게 반항했고 아예 반란까지 일으켰다. 이만큼은 아니라도 잉글랜드 또한 정복왕 윌리엄 시절부터 왕권이 강한 편이었고, 특히 제임스 1세의 전 왕조인 튜더 왕조 때가 그 강력한 왕권의 절정기였다.[23] 당장에 제임스 1세의 선대 스튜어트 왕조의 군주들은 스코틀랜드만 다스렸을 뿐인데도 제임스 1세처럼 편히 죽은 왕이 드물다.[24] 사실 어쩔 수도 없던 게 제임스 1세가 잉글랜드로 갈 때 찰스는 겨우 세 살이었다. 제임스 1세에게야 37년이나 살았으니 스코틀랜드가 '미우나 고우나 내 고향' 이라고 느껴질 수 있겠지만 찰스에게는 어릴 때 떠난 생각도 안 나는 고향에 지나지 않는다. 당연히 현지인에 대한 정서적 공감의 차이도 클 수 밖에 없다. 한 마디로 이민자와 이민자 2세의 차이다.[25] 전체적인 국력은 17세기쯤 들어가면 잉글랜드가 스코틀랜드를 아득하게 추월한지 오래지만 잉글랜드는 15~16세기 내내 장미전쟁부터 튜더 왕조 시절의 각종 계승권 분쟁, 노섬벌랜드 공작 중심의 가톨릭 귀족들이 일으킨 북방의 반란 등을 진압하며 지방 귀족의 권력을 신나게 두들겨 패던 시절이었다. 반면 스코틀랜드의 16세기는 딱 반대로 로버트 브루스 시절 잉글랜드에게서 완전 독립을 성취한 이후 수백년간 대립해온 왕권과 귀족들 사이 장로교라는 종교적 매개체로 신흥 지식인, 도시 자치민, 개신교 클랜의 삼각 동맹이 메리 여왕과의 내전 끝에 왕권 확장을 결정적으로 저지함으로써 왕권 확장의 관짝에 못을 박았던 시대였다. 17세기 중반쯤 되었을 때 캠벨, 맥도널드 같이 휘하 분가나 시종 클랜까지 부르면 스코틀랜드, 아일랜드 양쪽으로 자체적인 사병 천 단위 정도는 우습게 부르는 수준의 독립 귀족 세력은 잉글랜드에 남아 있지 않았다.[26] 동군연합이었다 한들 이 시기 기본적으로 브리튼은 지정학적인 명칭일 뿐이고, 제도적, 감정적, 문화적, 사법적, 모든 측면에서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는 분명한 외국이었다. 그나마 개신교 중심 문필가, 지식인 몇몇이 "야 두 나라 이제 종교도 비슷한데 통합하면 국력도 커지니 좀 짱일 듯" 수준으로 구상이나 하는 정도였고, 당연히 대부분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기득권은 허접한 동군연합으로도 서로 권력이 약해질까봐 문자 그대로 동군연합 이상의 제도적 통합 시도를 맹렬하게 거부했다. 그리고 스코틀랜드 내부에서도 에딘버러 - 글래스고 - 애버딘 삼각지 안에서 스코트어를 쓰던 로우랜드 지방을 떠나 하이랜드로 들어가면 아예 언어도 게일어를 쓰고, 형식적으로만 왕실에게 충성하지 실질적인 통치는 반유목, 목축 중심의 클랜들이 다스리던 외국이나 마찬가지였던 지방이었다.[27] 이 때문에 캠벨 가와 맥도널드 가는 지금까지도 사이가 좋지 않아서 맥도널드 가에서 운영하는 여관에서 캠벨 가 사람을 출입금지 시킬 정도이다. 거기가 어딘데?? 스코틀랜드 편에서 맥도널드 가 여관을 방문했을 때 현관에 'No Campbell'이라는 현판이 걸려있는 것을 볼 수 있다.[28] 저런 위험하고 폭력적인 환상들이 스코틀랜드의 왕위 투쟁을 둘러싸고 펼쳐지는 멕베스의 줄거리가 체제에 대한 비난이든, 옹호이든 제임스 1세의 치세를 어느 정도 염두에 둔 작품이라는 건 이미 비평계의 광범위한 지지를 받고 있는 해석이다.[29] 이런 걱정을 한 이유는 무엇보다도 상술했듯 그들이 잉글랜드의 재정 상태가 얼마나 심각한지를 알지 못했기 때문이었다[A] 헨리 7세의 장녀이다.[A] 헨리 8세의 장녀이다.[32] 카를 1세 루트비히, 하노버의 선제후비 조피[33] 찰스 2세, 오라녀 공비 마리아, 제임스 2세, 오를레앙 공작부인 앙리에트[34] 로어노크 식민지는 오늘날의 노스캐롤라이나 주에 소재하고 있으나, 당시 세워진 버지니아 식민지는 오늘날의 버지니아 주보다 훨씬 경계가 넓었고, 나중에야 이 버지니아 식민지에서 여러 주가 분화해나왔다. 참고로 오늘날 버지니아 주에 존재하는 도시인 로어노크는 역사적으로나 위치적으로나 로어노크 식민지와 관련이 없다. 이쪽은 단순히 근방에 로어노크 강이 흐르기에 붙은 이름이다.[35] 삼총사의 바로 그 버킹엄 공작이다.[36] 이를 반영해 조지 빌리어스를 주인공으로 하는 미드 《Mary & George》에서 남색을 매우 밝히는 호색한 왕으로 나온다. 서머셋 백작을 공식 애인으로 두다가 뉴페이스 조지에게 빠져 그를 애첩처럼 데리고 다닌다.[37] 참고로 로버트 카는 웨식스 백작부인이었던 프랜시스 하워드와 내연관계가 되어 그녀가 전남편과 혼인무효화한 뒤 결혼했지만, 프랜시스가 친우였던 토머스 오버베리를 독살하고 자신은 그 사실을 은폐하려한 혐의로 런던탑에 수감되어 아내와 함께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제임스 1세의 사면으로 풀려나 감옥에서 낳은 외동딸 앤을 키우며 조용히 살다가 생을 마감했다. 로버트 카의 실각을 기점으로 조지 빌리어스가 제임스 1세의 총애를 독차지하기 시작한다.[38] 당시 유럽에서 군함이나 상선으로 자주 이용되었던 갤리온이라고 추정된다.[39] 사실 엘리자베스 1세의 치세에도 프랜시스 드레이크의 사략함대로 추정되는 잉글랜드 해적들이 조선을 공격한 사례가 있기는 하지만, 이 시기까지만해도 드레이크의 세력은 왕실의 영향력 밖에 있었으므로, 한국사와 연관된 최초의 영국 군주는 제임스 1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