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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opad> | |||
| <colbgcolor=#cf091f><colcolor=black> 왕호 | 찰스 2세 (Charles II) | ||
| 출생 | 1630년 5월 29일 | ||
| 잉글랜드 왕국 런던 세인트 제임스 궁전 | |||
| 사망 | 1685년 2월 6일 (향년 54세) | ||
| 잉글랜드 왕국 런던 화이트홀 궁전 | |||
| 재위기간 | 스코틀랜드의 왕 | ||
| 1649년 1월 30일 ~ 1651년 9월 3일 | |||
|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아일랜드의 왕 | |||
| 1660년 5월 29일 ~ 1685년 2월 6일 | |||
| 서명 |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colbgcolor=#cf091f><colcolor=#fff> 배우자 | 브라간사의 카타리나 (1662년 결혼) | |
| 자녀[1] | 제임스, 샬럿, 찰스[2] , 캐서린, 찰스[3] , 헨리[4], 샬럿, 조지[5], 찰스[6], 제임스, 찰스[7], 메리 | ||
| 아버지 | 찰스 1세 | ||
| 어머니 | 프랑스의 앙리에트 마리 | ||
| 형제 | 찰스 제임스, 메리, 제임스 2세 & 7세, 엘리자베스, 앤, 캐서린, 헨리, 헨리에타 | ||
| 장례식 | 1685년 2월 14일 | ||
| 잉글랜드 왕국 런던 웨스트민스터 사원 | |||
| 종교 | 가톨릭 | ||
| 문장 | 스코틀랜드(1649년 ~ 1651년) 스코틀랜드(1660년 ~ 1685년) Dieu et mon droit 하느님과 나의 권리 잉글랜드(1660년 ~ 1685년) Dieu et mon droit 하느님과 나의 권리 | }}}}}}}}} | |
1. 개요
잉글랜드 왕국의 왕. 1630년5월 29일 잉글랜드 국왕 찰스 1세와 프랑스 국왕 앙리 4세의 딸 프랑스의 앙리에트 마리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손위로 형이 있긴 했지만 태어난지 얼마 되지도 않아 죽었기 때문에 실질적으로는 장남이었다. 동생으로는 제임스 2세, 여동생으로 네덜란드 총독 오라녀 공 빌럼 2세의 아내가 되는 프린세스 로열 메리와 루이 14세의 동생인 오를레앙 공작 필리프 1세의 아내가 되는 헨리에타 앤이 있다. 루이 14세의 고종사촌이다. 또한 피츠로이 가의 시조이기도 하다.2. 생애
2.1. 어린 시절
찰스 2세는 태어난 직후에 콘월 공작과 로스시 공작등과 같은 왕실 작위를 받았으며, 유년기에는 도싯 백작부인의 보살핌을 받으며 자라났다. 8세가 된 해 무렵에는 웨일스 대공으로 서임되었다.1642년 잉글랜드 내전이 일어나자 10월에 동생 제임스 와 함께 참전했으나 상황이 악화되자 결국 어머니, 동생과 함께 1646년 프랑스로 망명했다. 1648년에는 네덜란드로 가서 매제인 빌럼 2세의 지원을 받아 함대를 출항시켰으나 도로 네덜란드로 돌아왔다. 1649년 아버지 찰스 1세가 의회군에 붙잡혀서 처형당하자 네덜란드 의회의 압력으로 프랑스로 옮겨갔다.
2.2. 스코틀랜드 왕위 획득과 폐위, 망명생활
1649년 2월 5일, 스코틀랜드 왕국의 언약파 의회에서 찰스 2세를 왕으로 추대했다. 그러나 스코틀랜드 의회에서는 왕위를 인정하는 조건으로 장로교회를 국교로 할것을 요구했고, 찰스 2세는 자신을 따라왔던 왕당파인 몬트로즈 남작을 보내 오크니 제도를 공격하게끔 하여 스코틀랜드를 위협하게 하려했다. 그러나 몬트로즈 남작은 군대를 이끌고 독단적으로 스코틀랜드를 침공하였다가 붙잡혀 처형당하였고, 결국 브레다에서 장로교를 인정하고 장로교적 교회 통치를 받아들이는 '성스러운 연맹과 서약(Solem League and Covenant)'를 받아들이겠다고 선언한 후 6월 스코틀랜드에 상륙했다. 이듬해인 1651년 1월 1일 스콘에서 대관식을 받고 스코틀랜드 왕위에 올랐다. 이로써 스코틀랜드에서는 인기를 얻었으나, 잉글랜드에서는 지지를 잃고 말았다. 스코틀랜드에서 궁정이 마련되었으며, 폴크랜드 궁과 퍼스에 그가 사용한 식비와 궁정 지출 내역이 남아있다.스코틀랜드군과 잉글랜드 내의 왕당파들과 함께 크롬웰의 군대와 맞서 싸웠으나 던바 전투, 우스터 전투에서 역으로 참패하였고, 찰스 2세는 가까스로 잉글랜드군의 추적을 피해 프랑스 노르망디로 망명했다. 이후 그는 크롬웰 정권이 붕괴될 때까지 프랑스에서 망명 생활을 해야 했다. 프랑스에서 찰스 2세는 프랑스 국왕이자 외사촌 루이 14세가 주는 생활 보조금 600 리브르로 살아갔다.[8] 찰스 2세는 프랑스에서 잉글랜드 왕위를 되찾으려고 노력했으나 올리버 크롬웰이 워낙 잉글랜드에서 확고하게 정권을 잡고 있다보니 그의 생전에는 불가능한 노릇이었다. 그러던중 1654년에 프랑스 왕국과 네덜란드 공화국이 잉글랜드 연방과 동맹을 맺자, 찰스 2세는 재차 망명하여 스페인 왕국으로 떠나야 했다.
1656년 브뤼셀에서 찰스 2세와 함께 망명한 왕당파들의 세력이 프랑스 왕국과의 전쟁에 협력하는 대가로 스페인 왕국이 왕정복고를 지원하기로 하고, 지원을 받아내는데 성공했다. 이후 망명중인 왕당파 신민들로 군대를 급조했는데, 이들은 임금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장비도 부실하였다. 한편, 올리버 크롬웰의 잉글랜드 연방은 1657년 파리 조약을 맺어 프랑스 왕국과 동맹을 맺고 스페인에 맞섰다.
1658년에 벌어진 사막의 전투(Battle of The Dunes)에서 잉글랜드 왕당파의 군대 2000여명은 프랑스군과, 잉글랜드 연방군과 부딪쳤다. 이후 왕당파의 병력은 절반이 죽어 1000여명만이 남았고, 왕정복고의 길도 막히는듯 보였다.
2.3. 왕정복고와 이후
그러던 중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1658년 올리버 크롬웰이 죽고, 아버지의 뒤를 이어 호국경이 된 아들 리처드 크롬웰이 군부를 등한시 하다가 군부 세력들이 일으킨 쿠데타로 실각한 것이다. 그 뒤 이어진 내란과 군 내부의 혼란 속에서, 스코틀랜드 총독 조지 몽크(George Monck)는 나라가 무정부 상태로 빠질 것을 우려했다. 몽크는 군대를 이끌고 런던으로 진격하여, 의회에서 축출되었던 장기 의회(Long Parliament) 의원들을 다시 복귀시켰다. 이후 의회는 스스로 해산했고, 약 20년 만에 처음으로 총선이 실시되었다. 당시 의회는 장로교도 다수가 복귀할 수 있도록 선거 자격을 정했다.하지만 왕당파 후보와 유권자에 대한 제한은 거의 무시되었고, 그 결과 새 하원은 정치적으로는 왕당파와 의회파가, 종교적으로는 성공회파와 장로교파가 비슷한 비율로 나뉘었다. 이른바 ‘협약 의회(Convention Parliament)’는 1660년 4월 25일에 소집되었으며, 곧 브레다 선언(Declaration of Breda)을 환영했다. 이 선언에서 찰스는 관용과 포용의 정치를 약속했다.그는 양심의 자유를 인정하고, 성공회 교회 정책을 지나치게 가혹하게 적용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또한 과거의 적들을 추방하거나 재산을 몰수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국왕 처형에 직접 가담한 자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에게 사면이 주어질 예정이었다. 무엇보다 찰스는 의회와 협력하여 통치하겠다고 다짐했다. 이에 잉글랜드 의회는 찰스를 국왕으로 선포하고 귀국을 요청하는 결의안을 채택했으며, 이 소식은 1660년 5월 8일 브레다에 있던 찰스에게 전해졌다. 한편 아일랜드에서는 이미 그보다 앞서 찰스를 지지하는 회의가 소집되어 있었고, 5월 14일에는 더블린에서 그가 국왕으로 선포되었다.
크롬웰 독재 정권에 질릴대로 질린 잉글랜드의 백성들은 자신의 생일에 맞춰 잉글랜드로 귀국하여 말을 타고 들어오는 찰스 2세를 보고는, 남녀노소 가릴 것없이 모두 환호했고 성당의 종까지 댕댕 쳐대며 "국왕 폐하 만세,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라고 소리치면서 그의 귀국을 환호했다.
왕위에 오른 찰스 2세는 1661년 찰스 1세 처형 12주년을 맞아 자신의 아버지를 죽인 올리버 크롬웰을 부관참시하여, 그의 머리를 참수하고 몸통을 네 조각내어 시가지에 걸어놓아 시신에게 온갖 수치를 당하게 했다. 크롬웰은 사망 당시 왕실이나 귀족 또는 명사들이 별세했을 때 쓰인 장례 예법대로 장기와 뇌를 꺼내고 약품에 절여 방부처리 되어 관에 봉안되었다고 하는데[9], 이 방부처리가 쓸데없이 잘 되어 있어 찰스 2세의 명령에 따라 시신을 효수하기 위해 머리를 자르는데 30번이나 내리쳐야 했다고 한다. 뒤이어 크롬웰의 추종자들 중 찰스 1세의 사형을 주도한 9명에게 줄줄이 교수형을 내렸다. 하지만 찰스 1세가 의회를 적으로 돌려 결국 처형됐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어 나머지에 대해서는 관용을 선택했다. 사형에 소극적이었으나 크롬웰에게 은혜를 입거나 해서 어쩔 수 없이 참여했거나 역할의 정도가 크지 않았거나 소속된 당이나 여론에 휩쓸려서 찰스 1세의 사형에 자의반 타의반으로 찬성한 정치인들의 경우 사형시키지 않고 대부분 추방 혹은 징역에서 끝났고 크롬웰파도 아니고 사형에 찬성하지 않았던 의원들은 아예 건드리지 않았다. 새 왕이 당연히 아버지의 원수들에게 복수할 것이라고 여기면서 벌벌 떨던 사람들 상당수는 숨통이 트였고, 이렇게 사형을 피해간 사람들은 모두 석방 이후에 찰스 2세의 지지자가 되었다.
사실 찰스 2세는 전제군주제를 추구하여 의회와 대립하다가 잉글랜드 내전을 초래하여 목이 날아가버린 아버지 찰스 1세와 달리, 초반 1660년대에는 귀족층과 의회와 협의를 하며 통치를 했다. 물론 당시 잉글랜드 의회의 위세가 크롬웰의 독재 정치를 겪으면서 크게 실추되어 있었기에, 신하들도 스스로 옹립한 찰스 2세에 불만은 있을 지언정 다시 불러온 왕을 쫓아 내려는 것은 부담을 느꼈기에 1670년대 후반 까지는 큰 마찰은 없었다.
1661년에는 <도시자치 법(Corporation Act)>로 지방의 행정관들이 국왕에게 충성을 맹세하도록 했고, 1662년의 <예식 통일법(Act of Uniformity)>는 공통 기도서의 사용을 의무화했다.
또한 1664년에는 <비밀집회령(Conventicle Act)>로 성공회 소속이 아닌 성직자들의 집회를 금지하였고 1665년에는 비국교도 성직자들이 자신이 추방된 교구로부터 5마일 이내에 접근하는것을 금지하는법을 통과시켰다.
이는 찰스 2세의 동생이였던 요크 공작 제임스의 사위이자 총신이였던 제1대 클라렌던 백작 에드워드 하이드의 작위명을 따와 클라렌던 법으로 불린다.
왕정복고 이후엔 사회적으로도 크게 변화했는데, 크롬웰 시대의 엄격한 종교적 금욕 분위기가 줄어들고 폐쇄 되었던 극장들이 다시 문을 열었다. 왕정복고 이후엔 '복고 코미디'가 새로운 장르로 자리 잡았으며, 찰스 2세는 여성의 역할 여성 배우가 맡아야한다고 조건을 달았다.
1665년에는 흑사병이 발생해 7월에 찰스 2세와 왕실은 솔즈베리로 이주하였고, 의회는 옥스포드에서 개회되었다. 이 흑사병은 9월에만 28000여명이 사망할 정도로 큰피해를 입혔다. 이후 겨울에 역병이 급격히 줄어들자 1666년 런던으로 복귀했다. 그러나, 그해 9월 2일 런던 대화재가 발생해버렸다. 이 화재로 인해 런던 중심부의 4/5가 전소되고, 13200여채의 주택과 87채의 교회가 전소되었다.
2.4. 포르투갈과의 결혼 동맹을 추진하다
1640년 포르투갈 독립 전쟁이 발발한 이래 포르투갈 왕국은 프랑스 왕국의 지원을 받았으나 1659년피레네 조약으로 프랑스와 스페인이 화해하자 포르투갈이 불리해졌다.이에 포르투갈의 섭정이였던 루이사 왕비가 선왕 찰스 1세 시기부터 논의되던 영국과의 결혼 동맹을 추진했고, 1661년 6월 23일 찰스 2세는 브라간사의 캐서린을 왕비로 맞게된다.
이 조약으로 영국은 포르투갈로부터 탕헤르, 인도 뭄바이의 7개의 섬, 무역 특권과 잉글랜드인의 포르투갈 내 종교의 자유등을 받게된다. 이에 영국에서는 포르투갈을 위한 군사지원과 왕비의 종교적 자유를 보장했다.
한편 스페인의 필리페 4세는 브라간사 왕가를 적대시하며, 카타리나가 유럽의 강력한 군주와 혼인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래서 그는 찰스 2세의 배우자로 오라녜 가문의 마리아를 제안하며, 찰스가 이 혼인을 받아들인다면 스페인이 지참금을 지급하겠다고 제안했다.
그러나 찰스는 이 제안을 거부하고, 캐서린을 선택했다.
카타리나는 1662년 5월 13~14일 포르투갈을 떠나 포츠머스에 도착했지만, 찰스가 직접 찾아간 것은 5월 20일이었다. 다음날 두 사람은 비밀리에 기톨릭 예식으로 결혼하고, 이어 성공회 예식으로 정식적으로 결혼했다.
2.5. 이후의 통치
재위 중 두 차례의 영란전쟁을 벌였으나 기습한 2차와 프랑스의 루이 14세와 밀약을 맺었던 3차까지 모두 패배했다. 첫번째로 벌인 제2차 영란전쟁에서는 상당히 선전했으나 결국 브레다 조약을 맺어 종전하였고, 이후 페전의 책임을 물어 제1대 클라렌던 백작 에드워드 하이드가 해임되고 실권을 잡은 각 귀족의 앞머리를 따 카발(Cabal)이라 불리는 귀족들이 실권을 잡게된다.[10]1668년에 찰스 2세는 네덜란드, 스웨덴과 삼국동맹을 맺어 프랑스를 견제하였다. 그러나 1670년, 루이 14세와 비밀 조약을 체결하게 되는데 이는 프랑스로부터 매년 16만 파운드를 받는 대신 군사지원을 하며, 가톨릭으로 개종하는 조건또한 포함되었다. 그러나 그가 실제로 가톨릭으로 개종하려는 의도가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한편, 찰스는 왕실 헌장을 통해 동인도 회사에 자치 정부 조직, 화폐 주조권, 군대 운영권, 동맹 체결과 전쟁•평화권, 그리고 식민지 내 민사•형사 재판권등을 포함한 폭넓은 자치를 부여했다. 그러나 1684년, 탕헤르는 유지 비용이 너무 컸기에 다시 포르투갈에 반환되었다.
1670년에는 허드슨 베이 회사에 허드슨만 유역의 통치권을 부여하고, 자신의 사촌인 라인란트의 루퍼트 공을 총재로 임명했다.
그러나 1670년대에 들어서 의회는 종교적 문제로 인해 친가톨릭 성향의 찰스 2세와 자주 맞부딪혔다. 1672년 찰스는 왕의 관용(Royal declaration of Indulgence)을 발표해, 가톨릭 신자들과 다른 비국교도들에 대한 모든 형벌법의 효력을 일시 정지한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의회는 국왕이 의회가 제정한 법률을 임의로 중단할 권리가 없다며 헌법적 근거로 반대했다. 결국 찰스는 관용 선언을 철회하고, 대신 테스트법(Test Act) 제정에 동의했다. 이 법은 모든 공직자에게 국교회 양식의 성찬 참여를 의무화 했으며, 이후에는 가톨릭의 성체변질과 미사를 “미신적이고 우상숭배적인 행위”라고 공개적으로 부정하도록 강요했다.
찰스 2세 시대 카발 정권의 주요 귀족중 하나였던 클리퍼드 남작은 가톨릭을 지지했기에 이 법에 반발하여 사임했고, 곧 자살로 추정되는 죽음을 맞았다. 후에 이어진 제3차 영란전쟁에서 영국은 아무런 소득도 얻지 못했고, 이로써 카발 세력은 약화 되었다.
본격적으로 브라간사의 캐서린의 유산으로 인한 후계자 공백으로 적법한 상속자가 가톨릭 교도인 찰스 2세의 친동생 요크공이 유력해지자 의회내 개신교도들은 찰스 2세 압력을 행사했다. 그러던 중인 1678년, 가톨릭 교도 음모 날조 사건도 있었다. 전직 예수회 사제였던 타이터스 오츠(Titus Oates, 1649~1705)는 가톨릭 교도들이 찰스 2세를 암살한 뒤 동생 요크 공작 제임스를 즉위시키고 이후 장로파 등 개신교 신자들을 학살한다는 음모를 알아냈다고 주장했다. 이를 당시에는 '교황의 음모(Popish Plot)'라고 불렀다. 이 때문에 매카시즘 수준의 광풍이 불어서 곳곳에서 가톨릭 교도에 대한 린치가 발생했고, 제임스 본인도 3년간 스코틀랜드로 쫒겨나다시피 떠나야 했다.[11] 찰스는 이를 믿지 않았으나, 댄비 경에게 조사를 맡겼다.
그러나 의회와 국민들은 이런 거짓 정보를 맹신했고, 가톨릭에 대한 혐오는 전국적으로 퍼져나갔다. 수많은 지역 법정에서 '가톨릭의 국왕 암살을 위한 음모'란 명목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회부되었고, 심지어 무고한 사람들도 처형당하기도 하였다.
이렇듯 영국의 국민들 사이에서 반(反)가톨릭 정서가 심화되고, 프랑스 왕국의 내전에 참여해 갸신교를 지원하고자 했다. 그러나 찰스는 비밀리에 루이 14세와 협상해 영국이 프랑스에 돈을 지불 받는 대가로 중립을 지키기로 하는 방안을 추진했다. 이에 의회는 이 정책을 같이 추진한 댄비 경을 탄핵하려 하였으나, 찰스 1세는 댄비 경을 보호하기 위해 1679년 1월 의회를 해산했다.
다만 1679년 3월에 열린 의회는 자유에 관한 중요한 법안인 '인신 보호 영장'을 통과시켰다. 한국어로 번역되기 전 원제는 Habeas Corpus Act이며, '몸을 가지다'라는 의미의 라틴어에서 따온 것. 판사가 고소당했음을 명시하기 전에 죄수들이 영장을 구할 수 있도록 하고 재판이 있기 전에는 죄수를 무기한으로 억류할 수 없게 하는 법안이었는데, 이로 인해 잉글랜드의 군주들은 단순히 자신에게 반대한다는 이유로 사람을 간단히 감옥에 넣거나 사형시키는 등의 처벌을 할 수 없게 되었다. 이 법안에 찰스 2세는 반발했으나 힘으로 할 경우엔 부왕의 전철을 밟을까봐 마지못해서 법안을 승인한다. 물론 찰스 2세도 가만 있지 않았고 자신에게 호의적이며 충성하는 사람들을 판사로 임명하여 자신에게 반대하는 사람들을 처벌할 때 자신에게 유리하게 판결하도록 하는 등 법을 흔드는 걸 잊지 않았다.
그러나 의회는 여전히 국왕인 찰스 2세에게 적대적이였고, 많은 의원들이 상비군을 동원해 반대파를 탄압하고 가톨릭을 강요할것을 경계했다. 그러자 결국 찰스 2세는 예산 부족으로 군대를 점차 해산해야했다. 댄비 경은 재무대신 자리에서 사임했고 찰스 2세는 댄비를 사면했으나, 하원은 의회 해산으로도 탄핵은 중단되지 않는다고 주장하며 사면을 무효로 만들었다. 상원은 댄비 경을 유배할것을 제안 했지만, 하원은 이조차도 관대하다며 거부했고, 결국 댄비 경은 5년간 런던 탑에 구금되었다.
하지만 이후 오츠의 주장은 날조되었음이 밝혀졌다. 이 난리를 일으킨 장본인 오츠는 내란 선동 및 허위사실유포죄로 길거리에서 묶여진 채로, 사람들에게 욕설과 침과 달걀 세례를 당하고 채찍으로 맞는 등 온갖 모욕을 당한 뒤 거액의 벌금과 종신형을 받았다. 그나마 찰스 2세의 사후 명예혁명이 일어나면서 석방되었고 연금도 받았지만, 남은 평생을 거짓말쟁이 오츠라는 비웃음과 놀림을 당하며 숨어살아야 했다.
또한 1679년, 의회는 가톨릭교도였던 요크 공 제임스를 왕위 후계자의 자리에서 제외하기 위해 배제 법안을 발의했으나, 이에 찰스 2세는 의회를 해산 시켰다. 이 배제법안을 반대했던 자들은 휘그당의 시초인 휘그가 되었고, 법안을 찬성했던 자들은 토리당의 시초인 토리라는 세력을 이루게 되었다. 전자는 영국 자유민주당의, 후자는 영국 보수당의 조상 격 되는 당파들이다. 이후 의회를 재소집했으나 다시 배제법안이 발안되자 찰스 2세는 다시 의회를 해산시켰고, 1681년에 소집한 의회에서도 배제 법안을 발의하자 또다시 의회를 해산시켰다. 이후 찰스 2세는 죽을때까지 의회를 소집하지 않았다.
다만 찰스 2세는 가톨릭을 국교로 재도입하는 것과 같은 비현실적인 정책에는 일절 관심이 없었으며, 몰래 가톨릭 신앙을 유지하던 사람들을 잡아죽이는 짓을 안 하는 수준이었다.
그러나 이런 찰스 2세의 배제법에 대한 반대는 가톨릭을 옹호하는것으로 해석되어 일부 국교회교도들의 분노를 샀다. 결국 이들은 찰스 2세와 동생 요크 공 제임스를 뉴 마켓 경마 대회에서 수도로 돌아오는 길에 암살하려는 라이하우스 음모(Rye house plot)을 꾸몄다. 그러나, 찰스 2세의 숙소에서 큰 화제가 일어나 두 사람은 일정을 앞당겨 먼저 떠났기에 암살을 피할 수 있었고, 곧 이 암살 계획이 발각되어 암살 계획을 주도했던 에섹스 백작과, 앨저넌 시드니, 먼머스 공작등이 체포되었다. 에섹스 백작은 런던 탑에서 자결하였고, 앨저넌 시드니는 처형되었으며 먼머스 공작은 네덜란드로 망명하였다. 이후 런던 탑에 갇혔던 댄비 남작은 석방되었다.
찰스는 마지막 치세에 접어들며 반대파 인사들의 재산을 몰수하거나 판사와 보안관을 마음대로 교체하며 배심원들을 매수하는등 반대파들을 탄압했다. 1682년에는 많은 휘그파의 인원이 재산을 몰수당했고, 1683년엔 런던 시 헌장이 몰수당했다.
이후 휘그파 사상가들은 이러한 사법 제도를 정치적으로 악용한 사건을 근거로, 왕권과 사법을 분리하는 권력분립 사상을 발전 시켰다.
1685년 2월 2일, 찰스 2세는 뇌졸중으로 쓰러졌으며 결국 4일 후인 2월 6일, 화이트홀 궁전에서 사망하였다. 죽기 직전에 가톨릭 사제[12]에게 고해성사를 하고 죽기를 원해서 몰래 사제가 궁정에 들어와서 임종을 지켰다. 당시 비밀이었던 왕의 진짜 신앙을 알고 있었던 프랑스 출신의 애첩[13]이 동생 제임스 2세를 통해 중개했다고 한다.
3. 가족관계
3.1. 조상
| 본인 | 부모 | 조부모 | 증조부모 |
| 찰스 2세 (Charles II) | <colbgcolor=#fff3e4,#331c00> 찰스 1세 (Charles I) | <colbgcolor=#ffffe4,#323300> 제임스 6세 & 1세 (James VI and I) | |
| 단리 경 헨리 스튜어트 (Henry Stuart, Lord Darnley) | |||
| 스코트랜드의 여왕 메리 (Mary, Queen of Scots) | |||
| 덴마크의 아나 (Anna af Danmark) | |||
| 프레데리크 2세 (Frederik II) | |||
| 메클렌부르크귀스트로의 조피 (Sophie von Mecklenburg) | |||
| 프랑스의 앙리에트 마리 (Henriette Marie de France) | |||
| 앙리 4세 (Henri IV) | |||
| 방돔 공작 앙투안 (Antoine, duc de Vendôme) | |||
| 호아나 3세 (Joana III) | |||
| 마리아 데 메디치 (Maria de' Medici) | |||
| 프란체스코 1세 데 메디치 (Francesco I de' Medici) | |||
| 오스트리아의 요하나 (Johanna von Österreich) |
3.2. 자녀
| ※ 왕비인 브라간사의 카타리나과의 사이에서는 자식이 없었고, 찰스 2세의 자녀들은 모두 사생아들이었다.[14] 회색칸에 쓰여진 여성들은 왕의 정부인 로얄 미스트리스. |
| 자녀 | 이름 | 출생 | 사망 | 배우자/자녀 |
| 루시 월터 (Lucy Walter) | ||||
| 1남 | 1대 몬머스 공작 제임스 스콧 (James Scott, 1st Duke of Monmouth)[15] | 1649년 | 1685년 | 1대 버클루 여공작 앤 스콧 슬하 4남 2녀[A] |
| 섀넌 자작 부인 엘리자베스 (Elizabeth Killigrew, Viscountess Shannon) | ||||
| 1녀 | 야머스 백작부인 샬럿 (Charlotte Paston, Countess of Yarmouth) | 1650년 | 1684년 | 제임스 하워드 (1669년 사망) 슬하 1녀 |
| 2대 야머스 백작 윌리엄 패스턴 (1672년 재혼) 슬하 2남 2녀 | ||||
| 캐서린 페기 (Catherine Pegge) | ||||
| 2남 | 1대 플리머스 백작 찰스 피츠찰스 (Charles FitzCharles, 1st Earl of Plymouth) | 1657년 | 1680년[17] | 브리짓 오스본 |
| 2녀 | 캐서린 피츠찰스 (Catherine FitzCharles) | 1658년 | 미상 | |
| 클리블랜드 여공작 바바라 팔머 (Barbara Palmer, 1st Duchess of Cleveland) | ||||
| 3녀 | 서식스 백작부인 앤 (Anne Lennard, Countess of Sussex) [18] | 1661년 | 1721년 | 1대 서식스 백작 토마스 레너드 슬하 2남 2녀 |
| 3남 | 2대 클리브랜드 공작 찰스 피츠로이 (Charles FitzRoy, 2nd Duke of Cleveland) | 1662년 | 1730년 | 메리 우드 (1679년 사망) |
| 앤 풀티니 (1694년 재혼) 슬하 3남 3녀 | ||||
| 4남 | 1대 그래프턴 공작 헨리 피츠로이 (Henry FitzRoy, 1st Duke of Grafton)[19] | 1663년 | 1690년 | 이사벨라 베넷[20] 슬하 1남[A] |
| 4녀 | 리치필드 백작부인 샬럿 (Charlotte Lee, Countess of Lichfield) | 1664년 | 1718년 | 1대 리치필드 백작 에드워드 리 슬하 13남 5녀 |
| 5남 | 1대 노섬벌랜드 공작 조지 피츠로이 (George FitzRoy, 1st Duke of Northumberland) | 1665년 | 1716년 | 캐서린 휘틀리 (1714년 사망) |
| 메리 더턴 (1714년 재혼) | ||||
| 넬 그윈 (Nell Gwyn) | ||||
| 6남 | 1대 세인트올번스 공작 찰스 뷰클러[22] (Charles Beauclerk, 1st Duke of St Albans) | 1670년 | 1726년 | 다이애나 드비어[23] 슬하 9남 3녀[A] |
| 7남 | 제임스 (James, Lord Beauclerk) | 1671년 | 1680년 | |
| 포츠머스 여공작 루이즈 드 케루알 (Louise de Kérouaille, Duchess of Portsmouth) | ||||
| 8남 | 리치먼드 공작 찰스 레녹스 (Charles Lennox, 1st Duke of Richmond) | 1672년 | 1723년 | 앤 브루데넬 슬하 1남 2녀[A] |
| 메리 데이비스 (Mary Davis) | ||||
| 5녀 | 더웬트워터 백작부인 메리 (Lady Mary Tudor, Countess of Derwentwater) | 1673년 | 1726년 | 더웬트워터 백작 에드워드 래드클리프 슬하 3남 1녀 [26] |
※ 이 외에 바바라 팔머가 낳았지만, 찰스 2세 본인이 인정하지 않은 딸이 있다.
4. 여담
- 사적으로는 대단한 호색한이어서 보통은 한두 명 두는 로얄 미스트리스[27]를 14명이나 둬서 궁중에서 정부들끼리 신경전이 벌어지게 만들기도 했다. 수많은 사생아를 두어, 국부로서가 아닌 정말 생물학적인 의미에서 국민의 아버지 역할을 톡톡히 했다(...)는 말까지 나왔을 정도였다. 정말 농담이 아니라 찰스 2세의 사생아를 조상으로 둔 영국의 귀족과 상류층들은 현재까지 대를 이어 가문을 유지하고 있다.[28] 그렇지만 크롬웰이 펼친 청교도적인 엄숙함에 짓눌려 있던 당시 잉글랜드 국민들은 오히려 이러한 호색적인 행각을 한편으로는 반겼다고 한다. 찰스 2세 본인도 자기 할아버지처럼 꽤 유쾌한 성격에 근본적으로는 선량한 성격이라 인기는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국정운영 방식은 할아버지 제임스 1세와 비슷했다. 유연성과 의회간의 협력적인 통치방식, 재위기간도 무난하게 보냈다는 점에서 특히 비슷하다. 아이러니하게도 찰스의 동생이자 후임 국왕인 제임스 2세는 여러모로 아버지 찰스 1세와 비슷한데, 능력과 인품은 출중했지만 독선적인 국정운영방식 때문에 의회와 대립하여 의회의 쿠데타로 축출당했다는 점이다.
- 찰스 2세의 정부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이 클리블랜드 여공작 바바라 팔머인데 다른 남자와 정사를 벌이는 현장을 왕에게 몇 번이나 들키고도 무사했다. 심지어 그 와중에 태어난 아이를 왕이 자식으로 인정하기를 거부하자 화이트 홀에서 아이의 머리를 박살내 죽이겠다고 협박해 찰스 2세의 인정과 사과를 받아내기도 했다. 이렇게 총애를 받으면서도 돈을 받고 몸을 팔겠다고 나서는 등[29] 제멋대로라 신하들은 품위 있는 마담 케루알 쪽을 더 선호했다고 한다. 다만 마담 케루알은 프랑스 귀족 출신이라 국민들에게는 나라 팔아먹는 거 아니냐는 의혹을 사기도 했고 가톨릭 신자였기 때문에 일반 국민들에게는 별로 인기가 없었다. 국민들은 서민 출신에 성격이 솔직하고 화통한 넬 그윈을 더 좋아했다고 한다.
- 포르투갈 왕국 브라간사 왕조의 공주 카타리나와[30] 결혼하여 왕비로 맞이했으나 왕비와의 사이에서는 자식이 없었고,[31] 모두 사생아였다.[32] 사생아 아들들 중 6명은 공작위를 받았고 그 중 4명의 가문은 현재까지도 이어져 공작위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자식들은 모두 서자인터라 잉글랜드 왕실의 엄격한 왕위 계승의 법칙으로 인해 결코 왕세자가 될 수 없었다. 결국 유언에 따른 후계자는 찰스 2세의 동생 제임스였고 찰스 2세 사후 제임스 2세로 왕위를 물려받는다. 그러나 찰스 2세의 사생아 중 장남인 몬머스 공작 제임스 스콧은 이에 불만을 품고는 왕위를 요구해 반란을 일으켰다가 진압당하고 처형되기도 했다.
한편 카타리나가 잉글랜드에 올 때 시동생되는 제임스 2세가 맞이하러 나갔는데 이때 그녀가 "차 한 잔 주시겠어요?"라는 말을 건넸다. 당시 포르투갈은 해외 식민지의 부로 왕실이 부유했고 사치품인 차를 넉넉하게 마실 수 있었던 것을 보여준 사례. 한편 당시 잉글랜드는 차 문화가 널리 퍼지기 전이었고 또 값비싼 사치품이었다.
- 과학기술에 관심이 많아 왕립학회를 왕명으로 공인하였으며, 이후에도 계속 후원했다. 연금술에 관심이 많아 이 때문에 사망했다는 이야기있는데, 일설에 의하면 수은중독으로 사망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사실 아이작 뉴턴과 동시대 사람이다.
- 취미가 설계였다고 한다. 하루는 그가 설계한 함선의 진수식이 있어서 참석한 와중에 옆에 있던 시종장에게 "어떠하냐? 짐은 함선 설계자로서도 손색이 없지 않느냐?"로 물으니 옆의 시종장이 대답하기를 "본업보다 훌륭하십니다."라고
목숨을 건드립을 쳤다.
- 1685년 찰스 2세가 사망한 이후 국왕의 이름으로서 찰스라는 이름은 거의 3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쓰이지 않다가, 2022년에 찰스 3세가 즉위하면서 다시 재조명되기 시작했다.
- 1672년 러시아에서 만들어진, Tsarsky titulyarnik에서 외국 국가원수 초상화에서 그가 나온다.
4.1. 과학 기술의 발전에 대한 찰스 2세의 후원
찰스의 어린시절 교육은 제1대 뉴캐슬 공작 윌리엄 캐번디시와 브라이언 더파가 맡았다. 두 사람은 국왕이 될 인물에게 과학에 대한 연구는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했고, 특히 캐번디시는 찰스 왕세자에게 "어떤 학문이든 너무 깊게 연구하지 말라."라고 조언했다. 그러나, 이후 그가 자라서 새로 부임한 교사로 혈액순환 이론으로 유명한 외과의사 윌리엄 하비(William harvey)가 부임하며 상황이 달라졌다. 하비는 1642년 엣지힐 전투 당시 왕과 동행하며 찰스 왕세자와 요크 공 제임스를 돌보았으며, 그의 연구는 훗날 찰스 2세가 과학을 대하는 태도에 큰 영향을 주었다.이후 망명 시기에도 찰스 2세는 물리학, 화학, 수학을 비롯한 학문에 열중했다. 망명 시기 교사중에는 유명한 성직자 존 얼(John Earle)도 있었는데, 그는 라틴어와 그리스어를 가르쳤으며 토마스 홉스 또한 찰스 2세의 스승이였다. 찰스 2세는 프랑스에서 버킹엄 백작과 화학 및 연금술 시험을 하기도 했다. 이후 잉글랜드로 돌아올 무렵엔 상당한 수준의 과학 지식을 가지게 되었다. 그는 조선학에도 능통해서 사무엘 피프스, 존 이블린등과 함께 함선 기술에 대한 토론도 할 수 있을 정도였다.
이렇게 그는 과학적 발견과 사상에 매료되었으며, 화학이나 물리학 뿐만 아니라 의학, 식물학, 원예학 같은 생물학에도 큰 관심을 가졌다. 한 프랑스 여행자는 찰스 2세의 과학적 지식에 놀랐다고 기록되어있다.
1660년 10월에는 런던의 그레샴 대학을 방문해 천문학자 폴 닐(Paul neile)경이 제작한 망원경을 보고 큰 감명을 받았고, 즉시 36피트 짜리 망원경을 주문 제작해 개인 정원에 설치했다. 찰스 2세는 자신의 친구들을 불러 천체를 관측하는것을 즐겼고, 1661년 5월에는 토성의 고리를 관측했다고 한다. 1662년에는 과학의 학문적 연구와 발전을 장려하기 위해 왕립 헌장을 발급했다. 이는 1660년 학자들과 과학자들의 머임을 공식적으로 인정한 것으로, 물리학과 수학의 실험을 체계적으로 수행하기 위한 학문적 기관을 목표로 했다.
찰스 2세의 신하였던 로버트 머레이(Robert Moray)가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그는 새로 창설된 왕립 학회의 초대회장이 되었다. 이후 머레이는 국왕과 왕립학회를 이어주는 중개자로 활동했고, 왕의 신임을 받아 왕실 실험실에서 직접 실험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기도 했다.
찰스 2세는 직접 왕립학회에 참석하진 않았지만, 꾸준히 학회 회원들과의 대화를 통해 학회의 활동을 보고받았다. 그는 로버트 보일의 보일•후크의 공기 펌프 실험을 직접 시연 받기도 했다. 그러나 찰스는 즉각적이고 실용적인 실험에만 흥미를 보였고, 보일의 법칙, 후크의 법칙, 기압과 같은 당대 물리학의 기초 개념들의 중요성은 이해하지 못했다.
이후 그는 왕립학회의 활동엔 점차 관심을 잃었지만, 과학 기술과 상업의 진흥에는 큰 관심을 주어 지속적으로 후원했다.
1675년에는 프랑스의 천문학 기술 발전에 자극받아 그리니치 천문대를 창설했다. 또한 개인적으로 화학에도 큰 관심을 유지해 자신의 실험실을 자주 찾았다. 그곳에서는 때때로 해부 실험도 이루어졌으며, 국왕이 직접 참관하기도 했다.
말년의 찰스 2세는 통풍이 심해져 예전처럼 매일 산책을 할 수가 없게 되었고, 그의 열정은 자신의 실험실로 향했다. 그는 자신의 실험실에서 매일 몇시간씩 실험에 몰두했고, 왕립학회의 학회장인 머레이가 그를 돕기도 했다. 그는 특히 연금술에 심취했는데, 그는 수은을 증류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개방된 냄비에서 수은을 가열하면 독성이 강한 증기가 발생하는데, 이것이 말년의 건강 악화에 영향을 준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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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수당 당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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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모두 사생아다.[2] 플리머스 백작.[3] 클레벌랜드 공작.[4] 1대 그래프톤 공작.[5] 노섬벌랜드 공작.[6] 1대 세인트알번스 공작.[7] 1대 리치몬드 공작.[8] 이는 찰스 2세의 어머니가 프랑스의 공주 출신이었기에 가능했다.[9] 실제로는 프랑스와 오스트리아 등지에서 많이 행해진 장례법이라 한다.[10] 클리퍼드 남작, 아링턴 백작, 버킹엄 공작, 애슐리 남작, 로더데일 공작.[11] 이때 존 처칠도 제임스를 따라 스코틀랜드로 갔다. 이후 잉글랜드로 돌아온 뒤 제임스를 보필한 공을 인정받아 남작 칭호를 받았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후 존 처칠은 명예 혁명 때 윌리엄 3세 & 메리를 지지하였다.[12] 존 허들스턴(John Huddleston, 1608~1698)이라는 신부로 우스터 전투(1651)의 패배 이후 의회파에게 쫓기던 찰스 2세를 도와주었다.[13] 포츠머스 여공작 루이즈 드 케루알. 이 사람의 아들인 찰스 레녹스는 초대 리치먼드 공작이다.[14] 때문에 찰스 2세의 사후 영국의 왕위는 동생인 제임스 2세가 이었다.[15] 글로스터 공작부인 앨리스 왕자비, 사라 퍼거슨의 먼 선조이기도 하다.[A] 가문은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다.[17] 이질로 사망[18] 로저 팔머의 자식일수도 있지만, 찰스 2세가 자식으로 받아들였다. 훗날 찰스 2세의 다른 정부인 오르탕스 만치니와의 염문설이 돌았다.[19] 조지아나 스펜서, 다이애나 스펜서의 집안인 스펜서 가문의 선조이기도 하다.[20] 1대 알링턴 백작 헨리 베넷의 외동딸[A] 가문은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다.[22] 처음에는 버포드 백작이었다가 세인트올번스 공작으로 승작. 여담으로 백작위를 받게 된 계기가 황당한데, 찰스는 이복형제들이 다들 작위를 하나씩 받아가는 와중에 혼자서만 어머니 넬의 신분이 한미하단 이유로 여섯 살이 되도록 아무 작위도 못 받고 있었다. 이에 분통이 터진 넬이, 어느 날 찰스 2세가 있는 자리에서 일부러 아들 찰스를 부르며 "이리 오렴, 이 사생아 새끼야, 아버지께 인사해야지. (Come here, you little bastard, and say hello to your father.)"라고 말했다. 당연하게도 찰스 2세가 왜 애를 그 따위로 부르냐고 질색을 하자, 넬은 "이것 말고 따로 부를 이름을 안 주셨잖아요?"라고 응수했다. 실제로 아들 찰스는 그냥 아버지 이름이 찰스라서 그 이름을 그대로 갖다 썼을 뿐이고[33] 아무런 작위도 없다 보니 정말로 '사생아 새끼'에 불과했던 셈. 결국 찰스 2세는 아들 찰스를 곧바로 버포드 백작에 임명했다가 8년 후, 제임스 2세의 시종이자 앙리에트 마리의 총신인 세인트올번스 백작 헨리 저민이 후손 없이 죽자, 그의 영토를 이용해 세인트올번스 공작으로 승격하였다.[23] 20대 옥스퍼드 백작의 딸[A] 가문은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다.[A] 가문은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다.[26] 1700년 이혼했으며 두 번의 결혼을 더했다.[27] 표현이 조금 이상하긴 하지만 당시 유럽 국가들의 궁정 사회에서는 왕이 공식적으로 인정받는 애첩 한두 명은 거느리는 것이 관례였다. 가부장적인 전근대 사회에서는 남성은 호색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고 그러지 않는 남성은 성적 능력이 떨어진다고 폄하되는 경우가 많았다. 유럽에서도 애첩 하나 없는 왕은 체면이 깎인다고 생각해서 설령 애정이 없어도 억지로라도 한 명은 두는 경우가 많았다. 루이 16세 같은 경우 애첩을 두지않고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에게만 충실했는데, 도리어 성불구라는 악성 루머가 퍼지기도 했다. 마리 앙투아네트도 본인이 애첩을 두느라 왕이 애첩을 두지 않은 원인이라 하여 비난을 받았다.[28] 아래에도 후술하지만 전 왕세자비 다이애나 스펜서도 조상 중에 찰스 2세의 사생아가 있다. 또한 조지 5세의 셋째 며느리였던 앨리스 왕자비의 가문인 버클루 공작 가문도 4대 버클루 여백작이였던 앤 스콧이 찰스 2세의 사생아인 제임스 스콧과 결혼하면서 공작으로 승격되어 창시된 가문이다.[29] 실제로는 하녀를 보냈다고 한다. 그렇게 뜯어낸 하룻밤 화대가 1만 파운드였는데 그 돈으로 존 처칠을 후원해 줬다고. 그리고는 정말로 자기랑 자고 싶으면 한 번 더 1만 파운드를 내라는 말에 이번에는 상대가 거절했다고 한다.[30] 주앙 4세의 딸로 결혼하면서 잉글랜드가 포르투갈에 무역 혜택을 주는 조건으로 주앙 4세가 결혼을 승낙했다.[31] 아이를 유산한 이후에 몸이 크게 상해서 더이상 임신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잉글랜드의 신하들이 찰스 2세에게 카타리나와 이혼하고 새 왕비를 맞이하라고 간언하기도 했다. 하지만 찰스 2세는 왕비를 신뢰하는터라 신하들의 요구를 모두 거부했고, 카타리나는 찰스 2세가 죽을 때까지 왕비 자리를 유지할 수 있었다.[32] 대표적으로 바바라 팔머와의 사이에서 낳은 그래프턴 공작 헨리 피츠로이(헨리 8세의 서자와 동명이인)가 있는데 그의 후손으로는 다이애나 스펜서가 있다. 다이애나 스펜서의 장남이자 현 영국 왕세손인 웨일스 공 윌리엄이 왕위에 오르면 이후로는 영국 왕실이 찰스 2세의 혈통도 이어받게 되겠지만, 애초에 영국을 포함한 유럽의 왕실(왕위 요구자 가문 포함)들은 귀천상혼제나 살리카법은 포기할지언정 사생아에게 왕위 계승권이 없는 것만큼은 계속 이어져오고 있기 때문에, 윌리엄 아서 필립 루이 이후의 영국 국왕들에겐 찰스 2세의 혈통을 이어받은 것 자체가 결코 자랑할 만한 일이 아니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