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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000,#FFF> 프랑스 왕국 루이 16세의 왕비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안토니아 여대공 Erzherzogin Maria Antonia von Österreich | ||
<colbgcolor=#f5fffa,#191919> 이름 | 독일어 | 마리아 안토니아 요제파 요하나 (Maria Antonia Josepha Johanna) |
프랑스어 | 마리 앙투아네트 조제프 잔 (Marie Antoinette Josèphe Jeanne) | |
출생 | 1755년 11월 2일 | |
신성 로마 제국 오스트리아 대공국 빈 쇤브룬 궁전 | ||
사망 | 1793년 10월 16일 (향년 37세) | |
프랑스 공화국 파리 혁명 광장 | ||
장례식 | 1815년 1월 21일 | |
생 드니 대성당 | ||
신체 | 154cm[1] | |
배우자 | 루이 16세 (1770년 결혼 / 1793년 사망) | |
자녀 | 장녀 마리 테레즈, 장남 루이 조제프, 차남 루이 17세, 차녀 소피 | |
아버지 | 프란츠 1세 | |
어머니 | 마리아 테레지아 | |
형제 | 마리아 엘리자베트, 마리아 안나, 마리아 카롤리나, 요제프 2세, 마리아 크리스티나, 마리아 엘리자베트, 카를 요제프, 마리아 아말리아, 레오폴트 2세, 마리아 카롤리나, 요한나 가브리엘라, 마리아 요제파, 마리아 카롤리나, 페르디난트, 막시밀리안 프란츠 | |
종교 | 가톨릭 | |
서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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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합스부르크 제국의 공주이자, 프랑스의 국왕 루이 16세의 왕비.2. 명칭
풀네임은 마리앙투아네트 조제프 잔 도트리슈로렌(Marie-Antoinette Josephe Jeanne d'Autriche-Lorraine). 오스트리아식(독일어) 본명은 ‘마리아안토니아 요제파 요하나 폰 외스터라이히로트링겐(Maria-Antonia Josepha Johanna von Österreich-Lothringen)’. 외스터라이히 대신 ‘폰 합스부르크로트링겐(von Habsburg-Lothringen)’ 을 쓰기도 한다.‘마리 앙뚜아네뜨’, ‘마리 앙뚜아네트’, ‘마리 앙투와네트’ 등으로 많이 쓰이나, 외래어 표기법에 근거하여 표기하면 ‘마리 앙투아네트’다. 프랑스어의 ‘t’ 발음은 기식이 약하여 ‘ㄸ’로 들리나, 무성음의 기식의 유무로 뜻을 구별하는 언어가 아니면 파열음에 된소리를 쓰지 않는다는 원칙 때문에 저렇게 표기한다. 자음 뒤에 쓰인 'oi[wa]'의 표기도 분분한데, 'ㅜ아'로 쓰는 게 표준. 순수 프랑스어의 w 발음은 무조건 u 발음의 변이음이기 때문이다.
3. 작위
문장 |
-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안토니아 여대공 전하 Her Imperial and Royal Highness Archduchess Maria Antonia of Austria (1755년 11월 2일 ~ 1770년 4월 19일)
- 프랑스의 도핀 전하 Her Royal Highness The Dauphine of France (1770년 4월 19일 ~ 1774년 5월 10일)[2]
- 프랑스와 나바라의 왕비 폐하 Her Majesty The Queen of France and Navarre (1774년 5월 10일 ~ 1791년 10월 1일)[3]
- 프랑스의 왕비 폐하 Her Majesty The Queen of the France (1791년 10월 1일 ~ 1792년 9월 21일)[4]
- 마담 카페 Madame Capet (1792년 9월 21일 ~ 1793년 10월 16일)[5]
4. 생애
4.1. 오스트리아의 공주로 태어나다
1755년 11월 2일에 합스부르크 제국의 수장 마리아 테레지아와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란츠 1세의 11녀로 빈의 호프부르크에서 태어났다. 독일어 본명은 마리아안토니아 요제파 요하나(Maria-Antonia Josepha Johanna)였다.참고로 아버지 프란츠 1세의 어머니이자 마리 앙투아네트의 할머니인 로렌 공작부인 엘리자베트 샤를로트 도를레앙은 루이 14세의 동생 오를레앙 공작 필리프 1세의 딸이자 루이 14세의 조카였고, 남편 루이 16세의 외할머니인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요제파[6][7]가 어머니 마리아 테레지아의 친사촌이였다. 즉 이러한 관계를 통해 마리 앙투아네트는 루이 16세에게 외가쪽으로 7촌 이모가 되며, 프랑스 왕실 기준으로 시할아버지 루이 15세와 8촌이고 남편 루이 16세는 10촌 손자가 된다.
마리 앙투아네트가 태어났을 당시 오스트리아 궁정의 에티켓은 비교적 느슨했고 가정적인 분위기를 좋아했던 아버지 프란츠 1세의 영향으로 마리 앙투아네트는 쇤브룬 궁전에서 회화, 클라비코드, 춤, 피아노 등을 배우고 형제자매[8]들과 뛰어노는 등 당시 왕실 공주로선 상당히 자유롭고 행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4.2. 프랑스의 왕세자빈이 되다
그러다가 합스부르크 제국과 프랑스 왕국의 우호를 증진시키기 위한 동맹의 역전으로, 루이 15세의 손자 루이 16세와 결혼이 결정된다. 이후 어머니 마리아 테레지아의 지도 아래 차기 왕비로서 갖춰야 할 프랑스어와 역사, 예술 등 혹독한 교육을 배우고 14살때 오스트리아를 떠나 프랑스의 왕세자빈이 되었다. 당시 대제국인 오스트리아의 공주라는 특수한 신분에 프랑스 왕비와 왕세자빈이 부재한 상황에서 마리 앙투아네트는 제일 신분이 높은 여성이었던지라 많은 주목을 받았고 이때 시할아버지의 애첩인 뒤바리 부인과 종종 충돌했다.4.3. 프랑스의 왕비가 되다
그 후 프랑스에 시집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시할아버지 루이 15세가 천연두로 세상을 떠나자 마리 앙투아네트는 고작 10대의 나이로 프랑스의 왕비가 된다.[9] 이후 프랑스 왕비로서 마리 앙투아네트는 루이 16세와의 사이에서 2남 2녀를 얻고 여러 자선 활동과 과학, 예술 활동을 지원하는 등 여러 노력을 한다.4.4. 최악의 평판
그러나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마리 앙투아네트에 대한 가짜 뉴스는 사그라들지 않고 이후 목걸이 사기 사건으로 그녀의 평판은 완전히 박살이 난다. 설상가상으로 오랫동안 축적된 프랑스 내부의 문제와 루이 14세부터 축적된 왕실의 엄청난 빚과 미국 독립 전쟁,[10] 미시시피 거품 등 여러 실책으로 프랑스 혁명이 터져 버린다. 마리 앙투아네트가 최악의 평판을 갖게 된 것은 우선 왕비가 프랑스의 오랜 적인 오스트리아 왕실 출신인 것도 있지만 문화적 차이가 가장 컸다. 왕족의 업무만 하면 비교적 자유로운 사생활이 보장되는 합스부르크 가문의 문화와 다르게 프랑스 왕실은 루이 14세 시대부터 왕과 왕비의 모든 것은 귀족과 평민들에게 공개되었고 공개 옷 갈아입기에서 식사 등 일상 하나하나에 에티켓이 정해져 있었다. 이런 체제를 통해 왕실은 위신을 세우는 동시 귀족들을 효율적으로 통제하여 왕권을 높이고, 귀족과 평민들 또한 왕과 왕비에게 청원을 하기도 하는 등 일종의 왕실의 민원 업무를 하는 역할도 하는 어떻게 보면 서로 윈윈하는 전략이었다.그러나 전술했듯이 자유롭고 가정적인 분위기에서 자라난 마리 앙투아네트는 에티켓에 모든 것이 이뤄지고 사생활이 없다시피 한 프랑스 왕실의 분위기에 점차 지쳐 갔다. 결국 왕비 자리에 오르자마자 프랑스 왕실 내 에티켓들을 죄다 폐지, 축소시켰고 급기야는 베르사유 궁전을 떠나 프티 트리아농이라는 별장에서 자주 머물러 자신만의 시간을 즐겼다. 결국 자신들을 무시하고 혼자만의 낙원에서 틀어박혀 사는 왕비에 대해 귀족들과 평민들 모두 불만이 커져가고 이는 왕비에 대한 악성 루머가 자연스럽게 나오는 환경이 되었고, 당시 루이 16세가 정부를 두지 않은 상황[11]까지 합쳐져 마리 앙투아네트의 평판은 최악으로 떨어지고 만다. 귀족들 입장에선 외국출신 왕비가 프랑스 전통과 자신들을 무시하는 것으로 보였고 평민들 입장에서는 왕비가 백성들 삶에는 관심도 없는 것으로 보였던 것. 거기다 왕비가 자신만의 장소에서 나오지 않으니 온갖 루머가 양성되는 좋은 환경을 만들었다.
그나마 최근 연구에 의하면, 프티 트리아농에서의 생활이 프랑스에 좋은 영향도 많았다는데, 마리는 트리아농에서 가족들과 친구들과 함께 농가 생활을 즐기면서 귀족과 시골 생활이 결합하여, 소박하고 우아한 생활이 이후 프랑스 문화에 큰 영향을 주었다. 또한 프티 트리아농 옆에는 깨끗한 촌락과 오두막 등도 있었으며, 때때로 마리는 힘든 백성들이 이곳으로 와서 지낼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설상가상으로 왕비의 부족한 안목과 자신의 감정에 솔직한 면도 이런 평판을 더 가속화시켰다. 당시 마리 앙투아네트에겐 먼 타국까지 와서 왕비에 진심 어린 충언을 하는 메르시 백작과 어떤 사리사욕도 보이지 않고 순수하게 왕비를 보필했던 절친인 랑발 공작 부인, 마담 에티켓란 별명이 붙였지만 왕세자빈 시절부터 마리를 보살펴 준 시녀장 노아이유 부인[12] 같은 능력 있고 성품도 좋은 측근들이 많이 있었다. 그러나 마리는 능력 있는 측근들을 멀리하고 폴리냑 백작 부인, 게메네 공작 부인과 전속 패션 디자이너 로즈 베르탱에게 호감을 품다 못해, 왕비의 권력을 이용해 귀족들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이들에게 엄청난 특혜[13]를 배푸는 등 치명적인 실수를 저지른다.
마리의 총애를 받은 폴리냑 백작 부인과 게메네 공작 부인이 그녀의 정치적 감각을 보조해주고 귀족들과의 사이를 중재해줄 수 있는 사람들이었더라면 그래도 좀 나았겠지만, 그들은 왕비의 이런 심성을 이용해 도박과 각종 무도회, 연극 같은 왕비의 시선을 사로잡는 다양한 이벤트를 벌이는 데 열중하며 왕비의 총애를 얻고자 다투는 지경까지 이른다. 아직 어린 나이에 왕비에 오른 마리는 측근들이 벌이는 이벤트에 눈이 멀어 귀족, 평민들과 멀어지고 정치에 손을 놓게 되며 결국 정치적으로 고립된다. 당연하지만 왕당파에서도 왕비와 그 측근들에 대한 불만은 매우 높았기에 이들도 루이 16세는 적극적으로 지지할지언정 마리와 그 측근들은 변호하지 않을 정도였다. 오히려 왕당파에서도 "오스트리아 계집이 왕비가 되더니 간신들과 같이 왕의 눈귀를 막고 프랑스 왕실을 망치고 있다"식으로 마리 앙투아네트를 못마땅하게 보았다.
폴리냑 백작부인은 다만 실제 사람으로서는 두 가지 견해가 나눠지는데, 정말 마리를 이용해먹고 사욕만을 품은 악랄한 여자였는지, 아니면 사치스럽기는 해도 랑발 부인과 마찬가지로 마리를 진정한 친구로 생각한 든든한 절친인지 정확한 결론이 나지 않았다.[14]
4.5. 실패한 도주 시도
루이 16세가 왕가의 입지를 크게 악화시키는 일을 저지르는데 일명 바렌 사건이라고 한다. 1791년 6월 당시 국왕 일가는 파리에 거의 억류되다시피 한 상태였는데 혁명파와의 의견 차를 좁히는 데 실패하고 유일한 협력자라고도 할 수 있는 미라보마저 사망하면서 정치적으로 위기에 빠지게 된다. 거기에 루이 16세의 동생인 아르투아 백작 샤를이 장인 사르데냐 국왕을 등에 업고 군대를 동원하려 했고 루이 16세의 숙모 2명이 프랑스 밖으로 탈출했기 때문에 왕실에 대한 국민의 분노가 격앙되고 있었다. 그러던 중 루이 16세가 중병을 앓아 사경을 헤매게 되자 국민 의회는 섭정으로 루이 16세의 가장 큰 경쟁자이며 동생인 프로방스 백작 루이를 선출했다. 그러자 왕태자 루이 샤를의 왕위 계승마저 불가능해질지도 모르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더구나 미사에 참례하러 떠나는 왕의 마차를 성난 군중들이 둘러싸는 사태가 발생했고 국왕 호위대조차 혁명 세력 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물론 국왕 부부가 영웅적인 용기를 지녔다면 이 상황을 타개할 수 있을지도 몰랐으나 그들은 그저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결국 불안한 프랑스 정국에 앙투아네트는 남편을 설득해 친정 오스트리아로 도주를 하자고 제안을 한다. 결국 국왕 일가는 파리를 탈출하여 국경으로 향했으나 신속하게 이동하지 못한 탓에 바렌이라는 마을에서 붙잡혀 파리로 압송되었다. 최종 목적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지만 국민들에게는 오스트리아 영내로 들어가거나 국경 지역에서 오스트리아군과 조우할 계획으로 여겨졌다. 당시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이자 앙투아네트의 오빠인 레오폴트 2세는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으나 제네바를 탐내는[15] 사르데냐 왕국 국왕 비토리오 아메데오 3세의 지지를 얻으라든가, 스페인에게 나바라 지방의 이권을 양보하고 지원을 받으라든가 등 편지를 통해 앙투아네트에게 조언을 해주긴 했지만 막상 자기 자신은 아무런 행동을 하지 않았다. 정확히 앙투아네트는 알자스를 통해 스위스로 들어가 왕실에 우호적인[16] 로렌 지방의 지지를 얻으려 했다. 당시의 프랑스 국민들은 엄청난 패닉에 빠졌는데 왕이 자신들을 버렸다는 것만으로도 충격적인 일에다 루이 16세가 오스트리아에서 군대를 불러들일 경우 그들의 총구가 어디로 향할지는 불 보듯 뻔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미라보의 사망 이전까지 급진파는 소수에 불과했고 다수의 중도파를 왕당파가 포섭해 나가는 형국이었으나 미라보 사후 세를 불려나가던 자코뱅 당이 이 사건을 통해 본격적으로 득세하게 되었다. 왕가에 대한 국민의 신뢰는 그야말로 땅에 떨어져 결국 루이 16세 몰락의 단초가 되었고 왕 본인도 그것을 알고 있었다. 이 사건이 왕비 주도로 이루어졌다는 소문이 돌면서 앙투아네트의 입지도 크게 악화되었다. 안 그래도 프랑스의 원수인 오스트리아 출신이라는 점 때문에 온 국민의 반감을 사고 있었는데 남편이 오스트리아로 도주하려고 하자 앙투아네트의 주도로 알려진 것이다. 프랑스 국민들에게는 그녀에 대한 무비판적인 증오가 있었기 때문이다.[17]그녀는 1793년 1월 혁명파에 의해 남편인 루이 16세가 죽고 나서 딸 마리 테레즈, 아들 루이 17세, 시누이 엘리자베트와도 떨어져 콩시에르주리에 감금된다.
4.6. 재판과 사형 선고
그녀의 사형을 결정한 재판에서 마리 앙투아네트에게는 온갖 혐의가 걸렸다. 그녀는 혁명 정부로부터 국고 낭비, 정부의 부패, 오스트리아와의 결탁, 루이 16세를 타락시킨 혐의, 백성에 대한 기만, 프랑스를 멸망시키려는 시도, 전쟁 유발로 기소당했다.우선 국고 낭비 혐의는 당시 정부에 워낙 만연하던 것이라, 이걸로 사형을 걸면 사형당하지 않을 관료가 별로 없었지만 결국 유죄로 인정되었다. 소위 반역죄 및 국가 안보에 대한 음모 혐의는 루이 16세와 함께 유죄로 인정됐다. 판결에 비판적인 사람들은 마리 앙투아네트는 적극적으로 정치에 개입하지 않았다고 본다. 당시에는 여성이 정치에 개입하지 않는 것이 미덕이었기에, 왕이 아예 지적 장애나 중증 정신병을 갖고 있지 않으면 왕비가 나설 수 없었다. 그나마도 이런 경우 왕자나 형제에게 물려주고 말지, 여성의 개입을 허락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무엇보다 프랑스도 살리카법이 유효했기 때문에 애초에 여자들이 왕위를 물려받기는 사실상 어려웠고, 그나마 퐁파두르 부인이나 카트린 드 메디시스처럼 비선 실세로 활동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래서 마리에 대한 유죄는 잘못되었다고 주장한다.
백성에 대한 기만의 경우 그 유명한 다이아몬드 사건이 있었으나 조사 결과는 "왕비는 다이아몬드 사건과 아무 관련이 없다."였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모든 혐의에 대해 재판 끝에 무죄가 선고된 것이다. 현대 법학자들이 이 사건의 기록 문서를 찾아 다시 회의를 열었지만 앙투아네트에게 전혀 죄목을 물을 수 없을 정도로 아무런 혐의가 없었다. 다이아몬드 목걸이 사기 사건 자체도 뭔가 정치적인 목적이 개입되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심지어 아들 루이 17세와의 근친상간이라는 혐의도 제기되었다. 역사가 막스 갈로의 기록에 따르면, 루이 17세는 당시 막 성에 눈을 떠서 자위를 하기 시작했는데 이것을 감시인들에게 들키게 되자 엉겁결에 앙투아네트를 핑계대었다. 혁명 정부는 좋다고 앙투아네트를 근친상간 혐의로 기소하게 되었다. 일단은 루이 17세에게서 증언을 얻어 이를 바탕으로 혐의를 제기한 것이기는 한데, 당시 심신 미약 상태였던 루이 17세는 신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만신창이 상태에 제정신이 아니었다.[18] 그런데도 이를 가져다가 써먹었던 것. 그 시절의 동성애나 근친상간은 기본이 사형이었다. 물론 혁명 정부도 이게 사실일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을 테니 그냥 왕비에 대한 모욕과 사형에 대한 정당성 확보를 위한 사소한 첨가물이었을 것이다. 근친상간 혐의의 고발자인 에베르가 앙투아네트에게 묻자 재판 내내 왕비의 품격을 지키며 어떠한 대답도 하지 않고 침묵을 유지하던 앙투아네트는 그 순간만큼은 유일하게 입을 열어 “내가 대답하지 않은 것은 어머니에 대한 그런 비난에 대답하는 것을 자연이 거부하기 때문이다. 나는 나와 같은 처지에 있는 모든 어머니들에게 묻고자 한다.”라고 대답했다. 재판장에 있었던 모든 여성은 가혹했던 프랑스 사회를 견뎌내면서 악에 받친 시장의 아낙네였는데 사치스럽다고 알려진 앙투아네트에 대한 증오는 말할 것도 없었다. 그럼에도 앙투아네트는 뻣뻣한 태도로 침묵을 유지하여 아낙네들의 증오를 받았지만 앙투아네트가 자신의 근친상간 혐의에 대해서 처음으로 입을 열어 다른 어머니들에게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한다고 말하자 다들 태도가 돌변해서 에베르를 역으로 비난하기 시작했다. 몇몇 남성도 그녀를 옹호할 정도로 기가 막힌 고발이었기 때문. 당시 앙투아네트의 근친상간 혐의는 어설프게 급조되어 만들어졌던지라 오히려 용서할 수 없는 죄목을 갖다 붙여 앙투아네트를 죽이려는 혁명 정부에 부정적인 반응이었다. 역사가 막스 갈로는 재판정이 수치와 부끄러움에 휩싸였다고 기술했다. 로베스피에르는 이를 보고받고 접시를 깨뜨리며 "에베르 그 자식이 그녀에게 또 한 번 승리를 안겨주고 말았다"고 분통을 터뜨렸다.
결국 국고 낭비, 반역죄, 국가 안보에 대한 음모죄를 유죄로 인정하여 마리 앙투아네트에게 사형이 선고되었다. 또한 같은 혐의로 루이 16세의 여동생이자 루이 17세의 고모인 엘리자베트 필리프 마리 엘렌 공주도 사형 판결을 받고 몇 개월 후 처형당했다. 감옥으로 돌아간 앙투아네트에게 혁명 정부는 고해성사의 기회를 주었지만 앙투아네트는 혁명 정부에 서약한 사제에게 고해하는 것을 거부했다.
4.7. 시누이에게 남긴 편지
아래는 마리 앙투아네트가 목이 잘리기 전날 밤 시누이인 마담 엘리자베트(루이 16세의 여동생)에게 쓴 마지막 편지이다. 하지만 이 편지는 마담 엘리자베트에게 전해지지 못했고, 마리 앙투아네트 사후 반세기가 넘어서야 공개되었다.[19][20]사랑하는 아가씨,
이것이 당신에게 보내는 마지막 편지입니다.
나는 지금 선고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범죄자들에게 가하는 치욕적인 죽음의 선고가 아니라 당신의 오빠를 다시 만나볼 수 있는 선고입니다.
그분은 결백합니다.
나도 최후의 순간에 그분과 마찬가지로 처신하기를 바라고 있어요.
양심에 거리낄 것이 없는 사람은 모두 그렇겠지만, 나는 극히 평온합니다.
불쌍한 아이들을 남기고 가는 것이 정말이지 마음에 걸리는군요.
당신도 알다시피 나는 아이들만을 위해서 살아왔습니다.
심지가 곧고 마음씨가 좋은 아가씨,
당신을 위해서도 나는 살아왔습니다.
우리와 함께 지내려는 다정한 마음씨로 모든 것을 희생해온 당신을 남겨두고 떠나게 되다니!
재판의 변론을 통해서 나는 내 딸이 당신과 떨어져 있다는 것을 비로소 알았습니다.
아, 불쌍한 어린것!
그 아이한테는 편지를 쓰지 않으려고 합니다.
쓰더라도 전해주지 않을 테니까요.
이 편지가 당신에게 전해질지조차도 알 수가 없습니다.
그 아이들에게 나의 이 편지에 의한 축복을 전해주세요.
아이들이 자란 뒤에 당신을 만나 당신의 착한 마음씨를 접할 수 있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자기주장을 지키고 의무를 다하는 것이야말로 삶의 가장 중요한 요소라는 것, 곧은 심지를 가지고 신뢰하고 화합하면 행복해지리라는 것을 가르쳐주세요.
딸은 연상이므로 누나로서 풍부한 경험과 아름다운 마음씨로 동생에게 충고를 해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들은 누나에게 우정에서 우러나오는 염려와 봉사의 태도를 보여주기를 바랍니다.
두 아이가 어떤 처지에 놓이더라도 서로 도우면 행복하게 지낼 수 있음을 깨닫게 되기를 바랍니다.
아이들이 우리를 본보기로 삼았으면 좋겠습니다.
괴로움 가운데에도 우리들의 우정은 얼마나 많은 위로가 되었는지 모릅니다.
행복이란 친구와 함께 그것을 나누어 가질 때 배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가족 말고 어디에서 아름답고 내적인 친구를 구할 수 있겠습니까?
아들의 아버지의 마지막 말[21]을 절대로 잊지 말았으면 합니다.
훗날을 경계하기 위해서 되풀이하면, 우리들의 죽음에 복수할 생각은 절대로 하지 말기를 바란다는 것입니다.
나의 마음을 크게 아프게 하는 것을 당신에게 이야기하지 않으면 안 되겠군요.
나는 아이가 당신을 괴롭게 했음을 압니다.
그 아이를 용서해 주세요.
그 아이는 아직 어리니까요.
그리고 아이들을 강압하는 것은 아주 쉬운 일이니까요.
언젠가 그 아이가 당신의 사랑과 부드러운 마음씨의 가치를 받아들여 서로를 이해하게 되기를 나는 기도합니다
(재판 당시 루이 17세의 증언에 대한 언급).
당신에게 이제 나의 최후의 생각을 털어놓아야겠습니다.
재판이 시작될 때부터 편지를 쓰고 싶었지만 쓸 수도 없었거니와 재판이 너무나도 빨리 진행되는 통에 그럴 만한 시간도 없었습니다.
나는 가톨릭의 사도적인 신앙을 품고 죽습니다.
그것은 내가 성장해 왔고 내가 잘 아는 조상들의 신앙입니다.
이곳에서는 어떤 종교적인 위안도 기대할 수 없기 때문에 이곳에 내 종교의 사제가 계실지조차도 알 수 없습니다.
그런 분이 내가 있는 이 장소에 오신다는 것은 극히 위험한 일이지요.
나는 살아오면서 내가 범한 죄악에 대해서 하느님께 용서받고 싶습니다.
하느님께서 옛날부터 그래오신 것처럼 나의 마지막 기도를 들어주시고 동정과 사랑으로 나의 영혼을 받아들여 주시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22]
알지 못하는 사이에 내가 주었던 모든 괴로움을 용서해 주기를 나는 모든 사람, 특히 사랑하는 아가씨, 당신께 기도합니다.
나는 내게 고통을 주었던 나의 모든 적들의 죄악을 모두 용서합니다.
나는 이제 형제, 자매에게 안녕을 고하려고 합니다.
내게는 벗들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들과 영원히 헤어져야 한다는 생각과 그들의 고통에 대한 생각이야말로 내가 지금 죽으면서도 떨쳐버릴 수 없는 가장 큰 괴로움입니다. 내가 최후의 순간까지도 그들을 생각했었다는 것만이라도 그들이 알아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안녕, 다정한 아가씨.
이 편지를 받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나를 잊지 마세요.
불쌍한 아이들과 당신을 온 마음을 다해서 포옹합니다.
당신과 아이들과 영원히 헤어져야 하는 일은 끔찍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안녕히, 안녕히!
이제는 신앙적인 의무만이 남아 있습니다.
나는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자유로운 사람이 아니므로 아마 사제 한 사람을 임의로 데려오겠지요.
그러나 나는 그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을 것이고 전혀 낯선 사람처럼 행동할 것입니다.
이것이 당신에게 보내는 마지막 편지입니다.
나는 지금 선고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범죄자들에게 가하는 치욕적인 죽음의 선고가 아니라 당신의 오빠를 다시 만나볼 수 있는 선고입니다.
그분은 결백합니다.
나도 최후의 순간에 그분과 마찬가지로 처신하기를 바라고 있어요.
양심에 거리낄 것이 없는 사람은 모두 그렇겠지만, 나는 극히 평온합니다.
불쌍한 아이들을 남기고 가는 것이 정말이지 마음에 걸리는군요.
당신도 알다시피 나는 아이들만을 위해서 살아왔습니다.
심지가 곧고 마음씨가 좋은 아가씨,
당신을 위해서도 나는 살아왔습니다.
우리와 함께 지내려는 다정한 마음씨로 모든 것을 희생해온 당신을 남겨두고 떠나게 되다니!
재판의 변론을 통해서 나는 내 딸이 당신과 떨어져 있다는 것을 비로소 알았습니다.
아, 불쌍한 어린것!
그 아이한테는 편지를 쓰지 않으려고 합니다.
쓰더라도 전해주지 않을 테니까요.
이 편지가 당신에게 전해질지조차도 알 수가 없습니다.
그 아이들에게 나의 이 편지에 의한 축복을 전해주세요.
아이들이 자란 뒤에 당신을 만나 당신의 착한 마음씨를 접할 수 있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자기주장을 지키고 의무를 다하는 것이야말로 삶의 가장 중요한 요소라는 것, 곧은 심지를 가지고 신뢰하고 화합하면 행복해지리라는 것을 가르쳐주세요.
딸은 연상이므로 누나로서 풍부한 경험과 아름다운 마음씨로 동생에게 충고를 해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들은 누나에게 우정에서 우러나오는 염려와 봉사의 태도를 보여주기를 바랍니다.
두 아이가 어떤 처지에 놓이더라도 서로 도우면 행복하게 지낼 수 있음을 깨닫게 되기를 바랍니다.
아이들이 우리를 본보기로 삼았으면 좋겠습니다.
괴로움 가운데에도 우리들의 우정은 얼마나 많은 위로가 되었는지 모릅니다.
행복이란 친구와 함께 그것을 나누어 가질 때 배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가족 말고 어디에서 아름답고 내적인 친구를 구할 수 있겠습니까?
아들의 아버지의 마지막 말[21]을 절대로 잊지 말았으면 합니다.
훗날을 경계하기 위해서 되풀이하면, 우리들의 죽음에 복수할 생각은 절대로 하지 말기를 바란다는 것입니다.
나의 마음을 크게 아프게 하는 것을 당신에게 이야기하지 않으면 안 되겠군요.
나는 아이가 당신을 괴롭게 했음을 압니다.
그 아이를 용서해 주세요.
그 아이는 아직 어리니까요.
그리고 아이들을 강압하는 것은 아주 쉬운 일이니까요.
언젠가 그 아이가 당신의 사랑과 부드러운 마음씨의 가치를 받아들여 서로를 이해하게 되기를 나는 기도합니다
(재판 당시 루이 17세의 증언에 대한 언급).
당신에게 이제 나의 최후의 생각을 털어놓아야겠습니다.
재판이 시작될 때부터 편지를 쓰고 싶었지만 쓸 수도 없었거니와 재판이 너무나도 빨리 진행되는 통에 그럴 만한 시간도 없었습니다.
나는 가톨릭의 사도적인 신앙을 품고 죽습니다.
그것은 내가 성장해 왔고 내가 잘 아는 조상들의 신앙입니다.
이곳에서는 어떤 종교적인 위안도 기대할 수 없기 때문에 이곳에 내 종교의 사제가 계실지조차도 알 수 없습니다.
그런 분이 내가 있는 이 장소에 오신다는 것은 극히 위험한 일이지요.
나는 살아오면서 내가 범한 죄악에 대해서 하느님께 용서받고 싶습니다.
하느님께서 옛날부터 그래오신 것처럼 나의 마지막 기도를 들어주시고 동정과 사랑으로 나의 영혼을 받아들여 주시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22]
알지 못하는 사이에 내가 주었던 모든 괴로움을 용서해 주기를 나는 모든 사람, 특히 사랑하는 아가씨, 당신께 기도합니다.
나는 내게 고통을 주었던 나의 모든 적들의 죄악을 모두 용서합니다.
나는 이제 형제, 자매에게 안녕을 고하려고 합니다.
내게는 벗들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들과 영원히 헤어져야 한다는 생각과 그들의 고통에 대한 생각이야말로 내가 지금 죽으면서도 떨쳐버릴 수 없는 가장 큰 괴로움입니다. 내가 최후의 순간까지도 그들을 생각했었다는 것만이라도 그들이 알아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안녕, 다정한 아가씨.
이 편지를 받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나를 잊지 마세요.
불쌍한 아이들과 당신을 온 마음을 다해서 포옹합니다.
당신과 아이들과 영원히 헤어져야 하는 일은 끔찍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안녕히, 안녕히!
이제는 신앙적인 의무만이 남아 있습니다.
나는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자유로운 사람이 아니므로 아마 사제 한 사람을 임의로 데려오겠지요.
그러나 나는 그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을 것이고 전혀 낯선 사람처럼 행동할 것입니다.
4.8. 처형당하다
여기서 편지는 중간에 끊겼는데, 1793년 10월 16일 오전 마리 앙투아네트의 처형을 집행하기 위해 형리들이 그녀를 끌고 갔기 때문이다.적어도 정장을 제대로 차려입고 왕실 전용 황금 마차를 타고 육군 병력의 정중한 호위하에 단두대로 이동한 남편 루이 16세와 달리, 마지막까지도 정중한 대우를 받지 못했다. 그녀는 감옥에서 입고 있던 허름한 옷차림에[23] 단두대에서 목이 잘리기 위해 긴 머리카락을 강제로 단발로 자른 다음 두 손이 뒤로 묶인 채 사형수를 호송할 때 흔히 쓰인 가축 수송용 마차에 실려 대중들에게 욕을 먹으며 단두대로 이동했다.[24]
그럼에도 마리 앙투아네트는 단두대 앞에 설 때까지 품위와 침착함을 잃지 않았다. 참수 직전에 남긴 유언은 사형 집행자인 샤를 앙리 상송[25]의 발을 밟고서 남긴 "실례합니다, 무슈.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에요." 실제로 사형 전에 그녀가 남긴 글에는 "부끄러워할 것 없어요, 나는 죄를 지어서 죽는 게 아니니까요."라고 적혀 있었다.
물론 마리가 완전무결한 사람은 아니었기에 젊었을 때의 유흥 행각과 바렌 사건 같은 명백한 실책들이 있었다. 그러나 이는 처형당할 만한 죄는 아니었다.[26] 그래서 후대의 역사가들은 지은 잘못에 비해 너무나도 크고 무거운 벌을 받은 사람으로 평가하고 있다.
루이 18세 때 조성된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의 무덤 |
일설에 따르면 프랑스 국민들이 그녀를 어찌나 증오했던지 단두대에 엎드리게 하지 않고 바로 눕혀서[27] 사형을 집행했다는 설도 있다.[28] 하지만 당시 사형 장면을 묘사한 그림에 그런 장면은 나와 있지 않고, 무엇보다 단두대의 구조상 사람을 바로 눕히기가 쉽지 않다.[29]
5. 평가
끝나지 않는, 그녀를 둘러싼 진실과 거짓
영화 마리 앙투아네트 중
영화 마리 앙투아네트 중
프랑스 혁명 당시에는 극도로 이미지가 안 좋았지만, 최근의 연구에 의하면 당대 여론에 퍼져 있던 대부분의 평판은 부정되고 있는 편이다. 왕정 시대의 프랑스 왕국의 왕비로서는 특별히 부적절한 행동이 없었다는 평가. 하지만 시대가 왕정 시대의 왕비를 원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그녀에게 있어 비극이었다.
당시 프랑스를 비롯한 서유럽 절대 왕정 체제의 왕들은 주로 새로 부상한 제3계급인 부르주아[30][31]에 기대어 권력을 행사했다. 대혁명 당시 프랑스에서도 왕실 행정부와 사법부의 관료 중 90% 이상이 부르주아 계급 출신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상황을 두고 "이미 국가를 사실상 장악한 그들에게 남은 유일한 적대 세력, 즉 형식적인 수장(首長)인 왕을 제거하는 일은 지푸라기 허수아비 인형의 목을 베는 것만큼이나 쉬운 일이었다" 라는 식으로 이해하는 것은 잘못된 것,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시대를 한 세기 이상 착각한 이해이다. 오히려 이 시기 국왕과 부르주아 계급은 강력한 동맹 관계를 맺고 귀족(영주), 교회 등 중세 이래 서유럽 사회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던 다른 권력 구조들을 억누르려 시도하는 입장이었던 것이다. 즉, 국왕의 행정부와 사법부 대부분을 부르주아 계급 출신이 장악했다는 것은 국왕이 대귀족들을 억누르고 자신의 손에 권력을 집중시키기 위해 시민 계급 출신의 관료들을 등용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당장 루이 16세는 부르주아 계층이 주도한 혁명에 의해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지만, 정작 비슷한 시기 서유럽의 다른 절대 군주들은 부르주아 계급을 육성하여 이들을 통해 귀족들의 세력을 억누르고 절대 군주권을 강화했음을 생각해야 한다. 위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국왕이 몰락한 중세적 귀족 계층의 마지막 흔적이자 형식적 수장 비슷한 처지로 전락하는 것은 대혁명에서 한참 뒤, 근대에 진입하고도 한참 시간이 흘러 부르주아 계층과 귀족 계층의 대립이 결국 부르주아 계층의 완승으로 끝난 이후의 시기에나 어울리는 설명인 것. 하물며 프랑스 혁명 무렵의 시기라면 국왕과 부르주아의 동맹 관계에서 더 우세한 파트너는 국왕이었다.
따라서 프랑스 혁명의 원인을 '사악한 왕과 사치스러운 왕비가 벌을 받은 것'이라는 식으로 해석하는 것은 물론 부질없지만, 반대로 '이미 부르주아 계층이 모든 실권을 장악한 상태에서 국왕 부부의 저항 따위는 부질없는 것이니, 그들의 개인적인 능력 부족이나 잘못을 탓할 일이 아니다'식의 이해 역시 지나친 것이다. 루이 16세 문서 등에서도 언급하고 있는 것이지만 루이 16세(그리고 군주정의 특성상 그 국정 파트너인 왕비 앙투아네트)에게는 '자신들에게 충분히 유리하게, 또는 최소한 불리하지는 않게' 활용할 수 있는 여러 요소들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여 오히려 자신들의 목을 내리칠 칼날로 만들어버린 정치적 역량 부족 및 오판이 분명 있다. 이 문단 첫머리에서 앙투아네트를 '왕정 시대의 왕비로는 특별한 문제가 없었으나, 시대가 요구한 것은 왕정 시대의 왕비가 아니었다'고 평가한 것이 바로 이 점을 지적한 것이라 보아야 한다.
마리 앙투아네트의 발언 중 유명한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으면 되지"[32][33]는 그녀가 무개념이었음을 증명하는 발언처럼 여겨졌지만, 정작 그녀는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 원래는 장자크 루소의 ‘고백록’의 한 구절인데 마치 왕비가 한 것인 양 악의적으로 선전되었다. 이때문에 마리 앙투아네트는 굶주리는 민중의 아픔엔 눈곱만큼도 관심이 없는 비정하고 철없는 왕비가 되어 있었다. 사실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어라"라는 말은 혁명파가 지어낸 이야기이며 민중의 분노를 일으키기 위한 한 수단이였다.
프랑스 대혁명 발발 4년 전 일어난 마리 앙투아네트 이름을 내세운 희대의 다이아몬드 목걸이 사기 사건도 그녀에 대한 악의적인 루머를 양산시키는 한 계기가 되었다. 전말은 다음과 같다. 출신이 좀 수상한 라모트 백작부인은 로앙 추기경에게 왕비의 가짜 편지를 전달한다. 장관 자리를 노리고 왕비에게 접근할 기회를 찾고 있던 추기경은, 마리 앙투아네트 왕비가 자신에게 연정을 품고 있다고 착각한다. 실제로 백작 부인은 어느 날 밤 베르사유 궁전 정원에서 왕비를 닮은 한 창녀를 대역으로 삼아 추기경과 가짜 왕비의 밀회를 주선하기까지 한다. 추기경은 깜빡 속아 넘어가고, 백작 부인은 자선 사업에 쓴다고 속여 추기경으로부터 여러 차례 돈을 받아 가로채기도 한다. 그리고 마침내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사고 싶다"는 왕비의 가짜 편지를 전달한다. 추기경은 보석상에게 목걸이를 주문하고, 왕비의 친필 사인이라고 믿은 보석상은 추기경에게 목걸이를 보낸다. 만기일까지 돈이 입금되지 않자 보석상은 왕비에게 청구서를 보낸다. 목걸이는 이미 백작 부인의 남편이 가로채 영국 런던으로 빼돌려진 뒤였다. 창녀는 왕비의 대역을 자백했고, 가짜 편지를 쓴 라모트 백작 부인은 태형(笞刑)에 처해진 후 양쪽 어깨에 ‘도둑(voleuse)’의 첫 글자인 v 낙인이 찍힌 채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재판을 통해 진범이 가려졌고, 마리 앙투아네트는 아무 상관 없음이 밝혀졌지만 사람들은 공식 재판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 오히려 왕비에 대한 나쁜 소문들이 무책임하고 악의적인 신문과 팸플릿들을 통해 걷잡을 수 없이 퍼져 나갔다. 베르사유 궁전에서 매일 밤 파티만 여는 사치와 향락의 왕비가 되어 있었다. 소문은 점점 더 수위가 높아져, 당시 팸플릿에서는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를 피에 굶주린 괴물 부부로 묘사하기도 했다. 특히 왕비는 온갖 방탕한 쾌락에 몸을 내맡긴 색정광이 되어 있었다. 이성 간의 섹스는 물론이고 대공 부인들이나 사촌 자매 등, 주위의 모든 여자들과 동성애를 했다는 것이다. 왕비의 섹스 스캔들은 인류 문명의 금기인 근친상간에까지 이르렀다. 이미 어릴 때 오빠인 오스트리아 황태자 요제프 2세에게 처녀성을 잃었고, 프랑스로 시집온 후에는 시할아버지 루이 15세의 정부가 되었으며, 시동생인 아르투아 백작의 아들과도 연인 관계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결정적인 패륜(자신의 8살 난 아들과 근친상간을 했다는) 혐의까지 뒤집어썼다.
근친상간 루머는 결국 1793년 10월 12일, 국민 공회에 불려 나온 날까지 그녀의 주요 혐의 중 하나에 이르렀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흰색의 헐렁한 평민복을 입었고, 신발은 해졌으며, 흰 머리칼은 목 근처에서 덤벙덤벙 잘려져 있었다. 38세의 나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늙은 노파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몸매에는 아직 왕비로서의 품위와 우아함이 배어 있었다. 왕비는 미동도 하지 읺고 국고 탕진, 내란 음모, 적과의 내통 등 자신의 혐의 내용을 듣고 있다가 8살짜리 아들과 근친상간을 했다는 마지막 죄목이 낭독되자, 한순간 격한 감정의 동요를 보이며 청중석의 여자들을 향해 몸을 돌리며 “여러분, 이 말이 믿겨지시나요?”라고 말했다. 이 말에 청중도 술렁였다. 비록 왕비에게 적대적인 평민들이었고, 그만큼 왕비에 대한 동정조차 큰 위험을 내포하는 시대였지만, 많은 여성이 경악하여 입을 가리고 울음을 터뜨렸다. 순간 왕비의 얼굴이 편안해졌다. 모든 사람들의 돌팔매 속에서 '누군가 내 말을 수긍해 주는 사람이 이 세상에 하나라도 있다'는 것을 확인한 순간, 절망적인 사람이 느끼는 편안한 안도감이었다. 나흘 뒤 그녀는 혁명 광장[34]에서 군중의 환호 속에 목이 잘렸다.
또 허영심이 가득한 것처럼 묘사되고 있으나, 실지 그녀가 재위 중 사용한 예산은 공식적으로 책정된 왕실 예산 중 1/10에 불과했다. 다만 시기가 워낙 시기였던지라.[35] 나폴레옹의 전기를 쓴 프랭크 맥클린은 조제핀 드 보아르네가 황후 시절 사치에 쓴 돈이 마리 앙투아네트가 왕비로 있던 기간의 10배가 넘었다고 꽤 신랄하게 촌평했다.[36]
후대의 연구자인 안토니아 프레이저는 "그녀의 결점들이 명백하긴 하지만, 그 불행과 저울질해 볼 때 하찮은 것에 불과했다"라고 평했다. 다만 프레이저가 역사학자가 아닌 전기 작가이며, 영화 <앙투아네트>를 두고 "아름답다! 아름답다!"를 연발할 정도로 앙투아네트에 대해 호의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주지해야 할 것이다.
5.1. 정치적 측면
일단 마리 앙투아네트의 정치성을 논할 때 절대 빼놓을 수 없는 사실로, 그녀가 오스트리아 황족 출신이라는 것을 들 수 있다. 비록 프랑스의 왕비이긴 하지만 마리 앙투아네트가 가진 합스부르크 가문의 피는 언제까지고 그녀의 주위를 맴돌았고, 그 특수한 배경을 제외하고는 그녀를 이해할 수 없다.당시 합스부르크 가문의 본령 오스트리아 대공국이 있는 신성 로마 제국은 30년 전쟁으로 황제가 북독일에 대한 영향력을 완전히 상실하면서 그 자리를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프로이센 왕국이 대체해 강국으로 부상하고 있었기 때문에 오스트리아와 프랑스는 이를 견제할 필요를 느꼈고, 그 동맹의 증표로 맺어진 것이 1770년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의 딸인 마리 앙투아네트와 루이 15세의 손자인 루이 오귀스트(루이 16세)의 혼인이었다. 한 마디로 말하자면 오스트리아-프랑스의 우호 관계를 상징하는 마스코트 같은 존재였던 것이다.[37]
하지만 오스트리아와 프랑스 사이의 관계는 그리 좋지 않았다. 새롭게 나타난 공동의 적을 맞아 손잡긴 했으나 막시밀리안 1세와 루이 11세부터 수백 년 동안 계속되어 온 갈등의 골은 그 정도로 메워질 깊이가 아니었다. 때문에 마리 앙투아네트에 대한 국민들의 여론은 그다지 우호적이지 못했다. 이 여론은 결혼 초에 후사를 보지 못하고 루이 16세와의 관계가 소원하다는 소문이 나돌며 그대로 굳어졌고, 그 후의 마리는 악의적 루머의 희생양이 되게 된다.
결국 평생 "오스트리아 스파이"나 "오스트리아 년"[38][39]이라는 빈정거림을 들었고, "루이 16세를 조종하여 프랑스보다는 친정 오스트리아의 이익을 위해 움직이게 하고 있다"는 음모론까지 돌았다. 그러나 이는 반대에 가까웠는데, 마리 앙투아네트는 계속해서 프랑스 정치에 개입하려고 했던 큰오빠 요제프 2세의 요구를 거절했다.
정치적인 측면에서 또다른 중요한 요소는 바로 루이 16세의 성격이었는데, 바로 그가 주체성이 없어 우유부단하며 타인과의 충돌을 기피하는 사람이었다는 점이다. 만일 루이 16세가 주체적인 사람이었다면 마리 앙트와네트는 내조를 하면서 시너지가 날 수도 있었겠지만, 그렇지 못하다보니 이 둘의 조합은 비선에 의한 정치개입이라는 문제를 만들어냈다. 특히 사람 사귀는 것은 좋아하는 마리 앙투아네트쪽이 이 문제에서 훨씬 심각한 편이었고 그 중 최악은 바로 폴리냑 공작 부인이었다.
폴리냑 공작부인은 몰락한 귀족의 후손으로 태어나서 역시 가난한 귀족인 폴리냑 백작과 결혼했는데 그녀의 미모에 반한 마리 앙투아네트가 엄청난 총애를 퍼부으며, 남편인 폴리냑 백작에게 공작위를 하사하고 폴리냐 공작부인은 왕실 가정교사로 임명한데다 방이 13개짜리인 대저택까지 하사했는데 이는 당시에도 엄청난 논란을 빚었다. 폴리냑 공작부인에겐 왕실 가정교사에 걸맞는 신분과 지성이나 경력이 없었던 건 말할 필요도 없고[40], 일단 능력이고 뭐고 간에 일개 가정교사에게 공작위와 대저택은 지나친 규모의 보상이었다.[41] 얼마 전까지만 해도 가난뱅이 몰락귀족이었던 폴리냑 공작부인은 곧 엄청난 사치를 부리며 악명을 쌓기 시작하는데 이것도 나름 문제였지만 더 큰 문제는 폴리냑 공작부인이 자신의 친구들을 정부와 왕실 요직에 꽂아넣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미 대중에게 미움을 받던 마리 앙투아네트는 이 폴리냑 공작부인과의 관계로 인해 이제 가장 큰 지지를 받아야 할 왕족과 귀족들조차 등을 돌리게 만들었다. 물론 폴리냑 공작부인 입장에서는 "나는 국왕 부부에 절대적으로 충성할 사람들을 소개한 것이다."라고 변명할 수는 있겠지만 당시 프랑스는 재정난이 갈수록 악화되었고, 이에 따라 국왕과 왕실 모두에게 개혁이 절실히 필요한 시점이었는데 이럴 때 국가가 아닌 국왕 부처에게만 충성하려는 사람은 득이 되기보다는 오히려 해만 끼치기 마련이다.
어쨌든 당시 프랑스와 왕실의 재정적자가 심각한 상황인 것은 분명했기에 폴리냑의 소개로 샤를 알렉상드르 드 칼롱이라는 변호사가 재무총감으로 임명되는데 그는 무능한 사람은 결코 아니어서 왕실의 재정지출을 줄이고 세금제도를 개혁하며 카톨릭 교회의 재산을 매각하고 무역을 진흥해야 한다는 올바른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드 칼롱은 이를 정식적인 방법, 즉 의회(삼부회)에 제출하는 것을 거부하고 국왕의 측근들을 통해 편법적으로 진행하려고 하다가 대중은 물론 귀족과 사제들의 분노에 찬 반발을 맞닥뜨리고 사직해야 했다.[42] 물론 진행 방법이 틀렸을 뿐 개혁 내용 자체는 맞는 방향이었기 때문에 이후 루이 16세가 소개를 받아 재무장관으로 임명한 튀르고 후작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은 개혁을 진행하려 했는데 이번엔 튀르고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마리 앙투아네트와 폴리냑 파벌과 갈등이 있었고 결국 정치적 충돌만 빚다 사임해야 했다. 마지막으로는 성공한 은행가 출신의 자크 네케르가 재무장관에 임명되었는데 이 무렵 마리 앙투아네트도 자신의 실책과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았는지 열심히 네케르와 루이 16세간의 중재에 애를 쓰지만 이번엔 루이 16세가 네케르와 반목하기 시작했고 결국 루이 16세가 왕실 재정삭감을 강하게 밀고나온 네케르를 사직시키고 마는데 이 네케르 해임이 프랑스 혁명의 방아쇠가 된 사실은 유명하다.
마리 앙투아네트를 옹호하는 사람들은 "장부를 보면 돈 몇푼 쓰지도 않았고 공식 석상에서 정치에 개입하지 않았다."라는 식으로 그녀가 무고하다고 주장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어지간한 바보가 아닌 한에는 정치, 경제적 비리를 그런 식으로 저지르지는 않는다. 마리 앙투아네트가 공식적으로 쓴 예산은 적었을 지 몰라도 그녀의 측근들에게 하사되어 낭비된 국가와 왕실의 재산은 결코 적지 않았으며 마리 앙투아네트가 직접 나서 정치적 행동을 보인 일은 드물었을지라도 그녀가 가진 인사권의 힘과 그 힘이 초래한 정치적 사건의 파장은 결코 작지 않았다. 다이아몬드 목걸이 사기 사건에 대해 당대에나 후세에나 많은 사람들이 "마리 앙투아네트가 목걸이 구입에 참여했는가 아닌가?"만을 놓고 결론을 내릴 뿐 "왜 로앙 추기경은 필사적으로 마리 앙투아네트에게 로비하려 했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데는 게으르다. 다이아몬드 목걸이 사건 그 자체로만 국한하면 마리 앙투아네트가 무고한 것이 사실이지만 애초에 그녀가 정치개입을 하지 않았다면 다이아몬드 목걸이 사건 자체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한편 1789년 7월, 혁명이 발발하고 루이가 권력을 잃으면서 아내에게 의지하기 시작하자, 정계에 더 직접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다. 짧은 기간이었기 때문에 평가를 내리기에 곤란한 감도 없지 않으나 최소한 왕당파의 구심점 역할을 했던 것은 확실하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영웅적이라기보단 다른 사람들과 비슷한 평범한 인물이었지만, 당시 왕당파들에겐 거의 성녀와도 같은 완전무결한 여성으로 여겨졌다.
왕당파였던 미라보 백작과 손을 잡고 신권과의 타협을 모색했으며 친정인 오스트리아와 연계해 군사 행동을 유발함으로써 은근히 혁명 정부에 압력을 넣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민간에서 왕실의 이미지를 우호적으로 만들고자 비싸져서 못 먹게 된 밀가루 빵 대신 값싼 감자 빵을 먹을 수 있도록 제빵 학교를 열어 지원하고, 자식들에게 빈민가를 보여주거나 빈민들을 구휼하는 일을 가르치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자선 사업을 벌였다. 후기의 마리 앙투아네트가 유행시킨 슈미즈 아 라 렌도 전성기 때의 마리 앙투아네트의 드레스와 비교하면 많이 단순해졌는데 이는 사치로 인한 비판을 덜고자 한 조치로 보인다.
20세기의 소설가인 슈테판 츠바이크는 "혁명 전에 순수했던 이미지가 혁명을 겪고서 강건해졌다"고 평가한다. 그러나 "루이 16세는 신체적·정신적 한계가 뚜렷한 바, 차라리 그녀가 혁명 전에 이렇게 성장했다면 더 나았을 것"이라는 견해가 있다. 하지만 강력한 카리스마로 사람들을 규합하고 과감성과 엄정함으로 나라를 개혁시킨 어머니, 언니들과 비교하면 이러한 선행은 도움이 될지언정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는 없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평범한 황녀이자 왕비로 성장한 마리 앙투아네트에게 있어 어머니, 언니들이 특수한 거고 이 정도가 발상의 한계인 것은 어쩔 수 없을지도 모르지만.
5.2. 개인적 능력
자신의 언니들로 비슷하게 정략결혼을 했지만 뛰어난 통치술을 보인 마리아 카롤리나와 마리아 아말리아와 다르게 고작 14세 때 프랑스로 시집와서 왕세자빈이 되었기 때문에 모국에서 지적인 교육을 받을 시간이 부족했으며 결혼 후 고작 4년 뒤에 시할아버지 루이 15세가 승하해, 10대에 즉위하였기 때문에 왕비로서 성숙할 만한 시간을 가지지 못했다.모친 마리아 테레지아는 16남매를 낳고 정치 격무에 시달리느라 아이들에게 충분히 신경을 써주지 못했고 11녀인 마리 앙투아네트가 한창 유아기일 때에는 7년 전쟁을 치르느라 특히 더 바빴다. 따라서 아이들의 교육은 교육 담당에게 맡겨두기만 하고 일정 기간마다 확인하는 것이 전부였다. 게다가 마리아 테레지아가 마리 앙투아네트를 직접 양육할 시간이 있었다 한들 제대로 했을지 의심스러운 것이 그녀는 자식들을 심하게 편애하는 어머니였고 때문에 사이가 좋은 자식들도 있었지만 거의 일평생 사이가 매우 나빴던 자식들도 적지 않았다.[43] 아버지 프란츠 1세는 그저 자식들의 응석을 받아주기만 하는 예스맨 아버지여서 교육에는 관심이 없었다. 이렇게 집안 단속에 신경 써야 할 부모가 무관심하니 서로 총애를 얻으려 싸워대는 언니 오빠들과 경쟁하기에 가장 어린 막내딸이었던 앙투아네트는 모든 면에서 방치 상태였다.
물론 마리 앙투아네트도 춤과 음악 부분에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낮은 집중력에 공부에 대한 열의가 별로 없어서 유년기의 교육은 큰 성과가 없었으며, 특히 결혼이 정해진 뒤에도 프랑스의 왕세자빈이자 차기 왕비로서 정말 필요했던 정치와 처세 부분의 교육에선 완전 0점 수준이었다는 것이 더 문제였다.[44] 결국 막내딸이 일자무식 상태임을 알고 뒷목 잡은 어머니 마리아 테레지아는 앙투아네트에 대한 교육 투자를 아끼지 않는 것은 물론 앙투아네트가 떠나기 전 수 일간 단둘이 지내면서 많은 것을 가르쳤다.[45][46] 떠나기 전에 마리에게 매일 읽어보라고 주는 지침서를 준 것은 물론 측근인 메르시 백작을 통해 마리 앙투아네트의 하루하루를 전해 듣고 자주 편지를 보내어 위로하고 교육하려 했다.[47]
문제는 마리 앙투아네트가 공부 문제도 그렇지만 너무 순진하고 사람 관계에 솔직한 성격이다 보니 궁정 내에서 행동도 현명하게 행동하지 못해 마리아 테레지아의 걱정을 더 사게 만들었다는 것. 먼저 마리 앙투아네트가 시고모 3명(루이 15세의 딸들 아델레이드, 빅투아르, 소피.)의 말을 듣고 국왕의 애첩인 뒤바리 부인을 무시하여 국왕의 화를 일으킬 뻔하자 마리아 테레지아가 어쩔 수 없이 딸을 설득했던 일화야 말할 것 없고 자신이 하는 말을 다 들어주고 늘 조용하게 있던 남편 루이 16세를 마리가 '어리석은 사람', '바보' 등으로 부르는 걸 측근으로부터 마리아 테레지아가 전해 듣고는 '왕비가 존경하지 않는 왕이 과연 백성들에게서 존경을 받을 수 있겠느냐, 너의 행동부터 고쳐라.'의 논조로 딸을 꾸짖기도 했다. 이렇듯 마리아 테레지아는 시집보낸 마리 앙투아네트의 일거수일투족에 대해 신경을 썼기 때문에, 마리 앙투아네트는 어머니를 사랑하고 그리워하면서도 매우 두려워했다. 실제로 루이 16세와 관계가 지지부진해 아이가 생기지 않는 데 대해 우리말로 치면 '이번에도 대자연이 찾아왔다'는 식의 사생활 사찰성 보고까지 마리아 테레지아에게 올라갈 정도여서 굉장히 스트레스를 받았다.
여담으로 어머니의 모습을 옆에서 지켜본데다 평소에도 막내 여동생을 아껴온 큰오빠 요제프 2세도 마리 앙투아네트에게 관심을 가졌다. 이후 전술한 마리의 편지를 어머니와 함께 읽고 그 철없는 행동에 보다 못해 직접 프랑스로 가서 여동생 부부를 만나기 까지 했다. 이때 요제프는 매제 루이 16세와 진솔한 대화를 나누고 후계자를 낳지 못하는 원인을 바로 파악해 문제를 해결해주면서, 이후 마리 앙투아네트는 첫째 마리 테레즈를 시작으로 장남 루이 조제프와 차남 루이 샤를을 연달아 낳으며 후계자 문제에서 벗어난다. 또한 요제프 2세는 프랑스 방문때 프랑스의 현실이 예상했던 이상으로 심각하다는 걸 직감하고 방문 이후로도 여동생 부부에게 "방만하게 행동하면 프랑스 내에 혁명이 일어날 수 있으니 신중하게 행동하라"라고 엄격히 충고하는 편지를 보내며 마리아 테레지아 못지않게 마리 앙투아네트에게 끊임없이 관심을 가져주며 조언과 충고를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마리 앙투아네트와 루이 16세 모두 왕의 책무보단 그저 자신들의 세상에 빠져있는 것을 선호했던 어떻게 보면 왕과 왕비로선 적합하지 않던 인물들이었기에 가족들과 충신들의 충언은 쇠귀에 경 읽기에 불과했다.
5.3. 외모
일단 얼굴은 '예쁘장하다' 라고 할 수 있는 수준의 미인이었다. 일단 젊은 시절에 절세미인으로 유명했던 어머니 마리아 테레지아의 외모를 물려받았기 때문이다. 평소 채식 위주의 식사를 하고 살 찌는 음식을 멀리했고, 자주 목욕을 했던 마리 앙투아네트는 깨끗하고 하얀 피부[48]를 가져 모두에게 찬사를 받았다. 또한 평생 소식을 했기 때문에 뚱뚱한 다른 왕족과 달리 호리호리한 몸매를 가졌다. 식사 시간에 루이 16세가 음식을 깨끗하게 비우는 동안 마리 앙투아네트는 음식을 거의 먹지 않았다. 다만 이건 출산 전까지의 이야기고, 출산 후 그녀의 초상화들을 보면 살집이 있는 편이며, 처형 당한 직후의 데스마스크를 봐도, 바렌 사건 이후 2년 이상 유폐 상태를 겪었음에도 여전히 그녀가 살집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다만 어머니와 비슷한 수준의 절세미인은 아니었고, 그녀를 엄청난 미녀로 그린 젊은 시절의 초상화나 후대의 창작들은 상당히 왜곡된 면이 있다. 현재 그 사실을 알 수 있는 있는 이유는 역사상 가장 유명한 밀랍 인형 제작자가 동시대 프랑스에서 태어났기 때문. '마담 투소'로 유명한 마리 투소가 바로 당사자인데, 마리 앙투아네트와 루이 16세 같은 프랑스 왕족은 물론, 로베스피에르, 마라 등, 혁명기 프랑스에서 사망한 유명인들의 데스마스크를 남겼다. 일단 매부리코이면서도 낮기까지 한 코를 가졌으며, 주걱턱은 아니었지만 합스부르크의 피를 완전히 피하지 못한 퉁퉁한 엉덩이턱이에, 입술도 그리 예쁘장하지는 않다. 당대의 그녀의 초상화들도 자세히 살펴보면, 비록 어느 정도 미화하기는 했지만, 이런 특징들을 완전히 지우지는 않았다는 것을 볼 수 있다. 또한 삐뚤어진 치아 때문에 시집오기 전 치아교정을 하고 컴플렉스를 부채로 가리고 다녔다.
가슴 사이즈 크기 둘레가 109cm 이상이나 되었다고 하는데 단순히 큰 것뿐만 아니라 귀부인끼리 경쟁한 '가장 섹시하고 큰 젖가슴 콘테스트'에서 당당하게 1등을 했다. 실제로 19세기경부터 프랑스에 유행했던 아래로 동그라면서도 깊이는 얕은 형태의 <쿠페>(Coupe)라는 샴페인 잔은 그녀의 젖가슴 형태를 본떠서 만든 샴페인 잔이라고 널리 알려져 있다.
5.4. 예술적 안목
다만 정치적 능력과 별개로 예술적 안목은 뛰어났으며 과장이 덧붙여졌겠지만 마리 앙투아네트는 엄청 아름다운 외모보다는 나긋나긋한 몸동작과 기품은 그녀를 만나는 사람들의 호감을 샀고, 목소리는 노래하는 것처럼 아름다웠으며 뛰어난 화술을 가진 우아하고 매력적인 모습으로 프랑스 사교계를 사로잡은 유행의 최첨단에 섰던 패션 스타이자 모두의 워너비였다.더구나 전체적인 예술, 패션 센스가 좋았고 프랑스 궁정 못지않은 문화 선진국인 오스트리아에서 자란 마리 앙투아네트는 정부들이 유행을 이끌었던 루이 14세, 루이 15세 시대와는 달리 왕비 본인이 유행을 이끌었다. 특히 유명 패션 잡지였던 "르 메르쥐르 갈량"이 새로운 스타일의 드레스와 헤어스타일을 한 마리 앙투아네트의 판화를 내놓았기에 마리 앙투아네트 이전 퐁파두르 부인이 유행시킨 스타일을 따라 했던 유럽 귀족들은 당대 패션 리더이자 문화 선진국인 프랑스의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의 패션에 관심을 가지고 그녀의 패션은 큰 유행을 끌었다.
먼저 마리는 즉위 직후 베르사유의 궁정 문화와 에티켓을 과감하게 깨고 로즈 베르탱이라는 평민 출신 개인 드레스 디자이너와 레오나드라는 개인 헤어 스타일리스트를 따로 두어 아침마다 2시간 넘게 직물 샘플과 디자인을 검토하고 새로운 헤어 스타일과 패션을 선보였다. 그중에서 마리는 깃털과 섬세한 레이스를 좋아했으며 머리를 벌집처럼 높이 틀어올리는 푸프(pouf)와 벼룩색 드레스[49], 편안하며 길이를 자유자재로 조절할 수 있는 세 갈레 퍼브의 로브 아 라 폴로네즈도 마리가 크게 유행시킨 것이다. 특히 그녀가 설계하고 인테리어를 새단장했던 개인용 별장인 프티 트리아농 궁전[50]은 섬세하고 우아한 로코코 문화의 극치로 평가되며 마리 앙투아네트의 시대에 로코코 문화는 절정을 이루었다. 이처럼 문화적인 측면에 있어서의 평가는 로코코의 여왕.
또한 마리 앙투아네트는 화려한 무도회나 연극뿐만 아니라 궁정에서 축소형 농장을 만들어 시골풍 옷을 입고 직접 젖을 짜고 농사를 짓는 등 농가 생활을 즐겼는데, 이때 마리 앙투아네트가 입은 옷이 편안하고 우아한 드레스인 슈미즈 아 라 렌(렌느, 레느)(Chemise a la Reine)(영국에서는 퀸즈 가운(Queen's Gown))이었다. 이 슈미즈 드레스는 모슬린[51]과 같은 면직물로 만들었고 네크라인은 깊고 넓게 파여 여러 층의 러프 칼라를 달았고 소매는 풍성한 허리통을 중간중간에 한두 번 오므려서 부풀린 것이 특징이다. 특히 속에 파니에를 입지 않고 스토마커, 코르셋으로 몸을 조이지 않아서 자연스럽고 편안한 분위기를 자아냈던지라 이 복식이 일반에서도 퍼져서 유행했고 프랑스 혁명 이후 엠파이어 드레스로 이어지는 등 어떻게 보면 신고전주의 복식의 시작을 열기도 했다.[52]
한편 오스트리아에서 자란 영향[53][54]으로 마리 또한 음악, 연극에 관심이 많아서 프랑스 궁정에 스스로 최신 오페라와 가장 무도회, 연극을 도입했고 어떤 날에는 자신이 직접 시나리오를 짜고 배우가 되어 출연하거나 무도회에 중심에 서서 춤을 선보이곤 했다. 당시 프랑스의 유명한 춤으로 대명사가 된 카드리유[55]도 마리 앙투아네트가 도입한 것이며 루이 15세 이전까지 다소 엄중한 분위기의 행사였던 왕정 무도회는 모두가 즐기는 경쾌한 행사로 바뀌었고 이는 대중들이 아는 무도회로의 변화에 큰 영향을 주었다. 또한 미술에도 관심을 보여 기존의 초상화 격식에서 벗어나 다양하고 자연스러운 초상화와 가족사진을 남겼다. 특히 당대 높은 인기를 구가하고 재능이 뛰어났던 동갑내기 여류 화가 엘리자베트 비제 르브룅을 궁정 화가로 발탁해 수많은 초상화를 그리게 하는데 여성의 사회 진출에 대한 벽이 높았던 당시 상황을 고려해 보면 그야말로 파격적인 발탁이었다.[56]
게다가 개인 위생을 중요시하는 마리아 테레지아의 영향으로 신성 로마 제국은 목욕이 일상화되었던지라 마리도 프랑스 왕국에서도 이 루틴대로 1주일에 3번 목욕을 했으며 당시 목욕이 크게 발달하지 않았던 프랑스에도 크게 영향[57]을 준다. 욕실은 1782년 베르사유 궁전의 왕비 구역에 만들어졌으며 욕조는 구리로 만들어졌고 온수용, 냉수용으로 각각 2개가 있었으며 1788년에는 욕실을 개조하고 나무 패널을 설치했다. 출처[58] 다만 이때의 목욕은 현대처럼 혼자서 옷을 벗고 하는 게 아닌 주변의 시녀들과 왕비를 보러 온 사람들이 있던지라 마리는 영국산 리넨 소재의 목까지 단추가 채워진 얇은 가운을 입은 상태로 욕조에 들어가고 백리향, 마조람, 굵은 소금이 포함된 허브 혼합물 또는 조향사가 직접 만든 아몬드, 잣, 습지 아욱 뿌리, 백합 구근을 담은 향주머니를 입욕제로 사용했다. 목욕을 마친 후에는 전담 시녀들이 새 시트로 마리 앙투아네트를 감싸서 몸을 말리고 새 슈미즈와 가운을 걸쳤다. 그 뒤 마리는 간단한 간식을 먹으며 휴식을 취했으며 아침에 목욕을 하기로 결정했다면 아침 식사가 욕실에서 제공되었다.
특히 베르사유에선 여러 화장법이 다양하게 개발되었는데 마리 앙투아네트는 화장은 물론 향수에도 관심이 많아 전담 조향사 장루이 파르종(Jean-Louis Fargeon)[59]를 두어 여러 종류의 향수를 애용했으며 처형 직전에는 우비강(Houbigant) 향수를 세 통이나 비웠다. 이전의 프랑스 귀족들이 체취를 가리기 위한 동물성 향수를 사용한 것에 반해 마리 앙투아네트는 은은하고 식물성 향수를 주로 사용했고 전술한 입욕 습관과 깨끗하고 하얀 피부와 우아한 메이크업으로 청결하고 선명한 이미지를 주었다.
한편으론 민생에도 관심을 가져 감자가 "악마의 음식"이라는 오명을 얻으며 보편화되지 못했을 때, 감자꽃을 모자에 꽂으면서까지 백성들의 감자에 대한 호감을 얻으려 한 적도 있었다. 프랑스 왕비로선 이례적으로 빈민 구제에도 관심을 가졌고 취미 중엔 프랑스식 농사짓기(진짜 하는 건 아니고 흉내)도 있었다. 당시 파르망티에라는 사람이 감자를 보급하여 백성을 먹여 살리기 위해 왕과 왕비에게 호소하자 마리는 아예 제빵 학교를 열어 백성이 값싼 감자 빵을 배불리 먹을 수 있게 했다. 문제는 프랑스 민중이 "감자 빵 말고 밀가루 빵을 달라!"라고 울부짖는 등, 폭등하는 밀 시세에도 불구하고 밀가루 빵만을 원하는 모습[60]을 보였기에 앙투아네트는 할 수 없이 밀가루 빵도 일부 제공했다.
5.5. 성격
근래까지는 혁명이 정당화되려면 왕실이 악의 축이 되어야 했기에 남편과 도매금으로 묶여 사악하고 사치스러운 이미지로 알려져 있었으나, 실제로는 프랑스의 역대 왕비들 중 오히려 매우 검소한 편이었으며 선량하고 동정심 많은 성격의 여인이었다.[61]사교적이었고 만나는 누구에게나 친절하고 사근사근했으며, 신분 여하를 막론하고 편견 없이 사람을 대했다. 실제로 남편 루이 16세가 사냥을 하던 중에 한 농민이 남편이 쏜 오발탄에 맞고 총상을 입자, 직접 달려가서 간호해 주고 모든 손해를 물어주었고, 맏딸인 마리 테레즈 샤를로트 공주가 어린 시절 비싼 크리스마스 선물을 달라고 어머니에게 떼를 썼을 때는, '궁전 밖에는 많은 가난하고 굶주린 사람들이 있으니 따뜻한 잠자리와 음식이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할 줄 알아야 한다'고 가르치는 등 현대까지도 인구에 회자되는, 나라를 망친 사치스러운 악녀의 이미지에 거리가 있는 성품의 왕비였다.
하지만 우아하고 소박함으로 대표되는 마리 앙투아네트의 취향과 성격은 불운하게도 베르사유 궁전과 루이 14세의 영향으로 화려하고 엄청난 사치를 부리는 동시 왕을 포함한 왕실 식구들의 일과가 모두에게 공개되고 일상 하나하나가 에티켓에 좌우되고 우러러 보는 당대 프랑스 왕실의 궁전 문화가 안 맞다 못해 180도 다른 세상이나 다름없었다.
예를 들면, 프랑스 왕궁에는 매 시간마다 왕비가 귀부인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옷을 갈아입는 일명 '투알레트'라는 의식이 있었다. 이는 오전, 오후 총 두 번 시행되었고 속옷과 겉옷은 물론 리본과 악세사리까지 하나하나 역할이 정해져 있었기에, 왕비는 30분이 넘도록 추위에 떨며 수행원들이 옷을 입혀주기를 기다려야 했다. 게다가 과정도 그냥 옷을 갈아입고 끝나는 게 아니라 담 다투르(의상계장)가 치마를 보여주고 드레스를 보여주면 담 도뇌르(시녀장)가 속옷을 골라주고, 담 도뇌르보다 서열 높은 귀족이 들어오면 그녀에게 권한이 넘어가는 등등, 온갖 까다로운 절차가 있었다. 이러한 까다로운 과정들은 귀족들을 효율적으로 통제하는 유인책인 동시에, 귀족들에게는 왕족의 눈에 들 수 있는 하나의 영광이자 특권이었고, 그러다 보니 세세하게 에티켓을 요구했던 것이었다.
하지만 호기심 어린 수백 명 앞에서 일거수일투족이 구경거리가 되는 삶은 왕족에게도 고되고 부끄러운 일이라, 루이 15세의 딸들도 이런 자리에는 꼭 참석했지만 불편해서 거의 음식을 먹지 못할 정도였다. 특히 공식 행사에서만 굉장한 에티켓을 요구했고 할 일만 잘하면 나머지 시간은 마음대로였던 오스트리아의 분위기와 프란츠 1세의 방침으로 비교적 가족적이고 소박한 유년 시절을 보내왔던 마리 앙투아네트는 사생활은 전혀 없다시피 하고 하나하나 에티켓에 따라야 하는 루이 14세 때부터 형성된 프랑스 궁정의 시시콜콜한 격식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다보니 마리 앙투아네트는 왕비 자리에 오르자마자 부르주아 출신인 의상 전문 디자이너인 로즈 베르탱을 고용했고, 투알레트를 아예 생략해 버리고 아침마다 카비네(전용 탈의실)에 불러들여 로즈 베르탱과 시녀장 등 최소 인원만 두어 옷을 골라 입었으며, 이 때문에 20명이 넘는 왕비의 수행원들이 잘려버린다. 이를 보다 못한 노와이유 백작 부인 등 여러 사람들이 충고하자, 마리 앙투아네트는 "투알레트를 하는 대신, 로즈 베르탱이 동석해야 한다"는 조건을 걸었고, 이에 귀족들이 "부르주아와 같이 있을 수 없다"고 거절하여 자연스럽게 없던 일이 되었다.
또한 루이 16세에게 프티 트리아농궁을 요양처로 받은 뒤에는 프티 트리아농궁을 자기 취향으로 꾸몄고, 공식 행사를 제외하고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기 전까지 주로 이곳에 친한 사람들만 함께 머물며 베르사유 궁정에 모습을 잘 드러내지 않았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사치스럽지는 않았지만 전원생활에 환상이 있어 프티 트리아농궁에서 오리, 닭, 소를 키우고 세브르산 고급 도자기에다 우유를 짜는 등, 목가적이고 여유로운 삶을 꿈꾸며 도교와 비슷한 삶을 살았다.
프티 트리아농궁은 마리 앙투아네트와 관련된 악의적인 소문이 떠돌던 당대 생각과는 달리 소박했다. 방이 8개 정도 되는 건물로, 현대 기준으로도 부잣집 별장 정도의 크기이며 내부도 섬세한 장식과 전원풍의 우아함을 간직한 형태이며 사치스럽기보다는 편안하고 우아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또한 마리 앙투아네트는 증축 공사도 하지 않았고, 바리 백작 부인이 남긴 가구를 물려받아 사용하는 등, 쓸데없이 건물에 돈을 쓰지도 않았다. 실내 장식에 거금을 들였다는 소문이 돌았지만, 실제로는 건설 비용이 20만 리브르로 당대 왕실에서 건물 하나 개조하는 데 사용한 돈의 일부밖에 안 썼다. 물론 당시 2개의 후작가로부터 어마어마한 유산을 상속받아 프랑스에서 한 손에 꼽히는 부자가 됐던 라파예트 후작의 뒤모티에 가문의 연 수입이 23만 리브르였다는 걸 생각하면, 적은 돈은 아니긴 하다. 현 가치로 환산하면 프티 트리아농의 리모델링 비용이 대략 285억이다. 참고로 트리아농은 트리아농 조약으로 합스부르크 가문이 보유했던 헝가리 왕국이 멸망한 곳이다.
하지만 프티 트리아농에 틀어박혀 친한 사람들끼리만 모여 연회를 열고 살아가는 왕비의 모습은 '일국의 왕비가 왕비로서 규정된 의무를 방임한 채, 그저 소수의 친한 측근들과 숨어서 놀기만 하는 게으름'으로 비춰져 "로트리시엔(오스트리아 년), 외국인이어서 저런다!"는 비난을 받았다. 한발 더 나아가 프티 트리아농에 입회하지 못하는 다른 많은 귀족들이 상대적 박탈감을 느낌으로써 "왕비가 자기와 친밀한 몇몇을 챙겨서 권력과 이권을 나눠 먹는다!"는 인식을 심어주었다. 게다가 순수하게 왕비를 걱정해 준 랑발 공비를 제외한 대부분의 왕비의 측근들은 숨도 쉴 수 없던 에티켓에 지쳐있고 타국에서 온 외로워하던 마리 앙투아네트의 마음을 교묘하게 이용해 자신의 이득을 취하려 했다. 또 그런 모습에 넘어간 왕비는 측근들에게 막대한 연금과 각종 특혜를 주고 이런 모습은 더더욱 귀족 사회의 반발을 나오게 만들었다.
정리하자면 왕비의 안일한 태도와 일부 측근들에게 보여준 총애는 당시 귀족 계층에선 왕실이 귀족들을 무시하고 외면하는 것으로 보였고, 왕비는 베르사유 궁전에서 벗어나 자기만의 인위적인 이상향에 빠져들게 됨으로써 정작 중요한 바깥 민중들의 삶과 프랑스의 현실을 보지 못하는 최악의 상황을 초래하고 말았다.[62]
당시 서양의 군주국들에서 왕비란 항상 귀족 사교계 중심에 서서 사교계 전체를 두루두루 살피고 균형을 조율해야 하는 위치인데, 마리 앙투아네트는 소수의 측근을 데리고 그 중심에서 도피해 버렸으니 이런 불만이 터져 나오는 건 당연했다. 물론 마리 앙투아네트 본인이야 단지 나이가 들수록 허례허식 심한 베르사유 본궁에서 정신없이 살아가는 것에 지쳐서 조용한 프티 트리아농궁에서 휴식하며 살고자 그런 것뿐이었겠지만, 당시 왕비의 행동은 프랑스 왕실에 대한 지지 기반과 신뢰를 잃어버리게 만들었고, 결과는 최악의 형태로 나타나고야 말았다.
어떻게 보면 혁명 이전의 마리 앙투아네트는 비정치적이며 자선적인 삶을 견지했고, 이는 현대적인 관점에서 보면 이상적인 입헌 군주의 모습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위의 내용만 봐도 알겠지만, 그녀가 왕비가 된 직후에는 엄청나게 스트레스를 받을 만한 환경이었고, 사치와 도박을 하긴 했으나 왕비가 되었으니 다른 귀족들과 사교 생활로 어울리느라 같이 한 것이었다. 궁정에서 할 일이 사치와 도박 아니면 없어서기도 했지만 임신 스트레스를 그렇게 풀다가 엄청나게 날려먹은 것도 사실이라 당대의 파티 걸 이미지에 일조했다. 정작 그 스트레스의 원인 루이 16세는 자기 때문에 욕받이가 된 아내를 위해 돈줄이 되어주었다. 그것을 전해들은 친정에서는 잔소리 편지를 통해 크게 재교육시켰고 마리가 아이를 낳고 양육에 집중하면서 이런 생활도 그만두었다. 사실 따지자면 왕족으로 태어났으니 과하지 않으면 사치는 허용되었고 그게 당연한 시대다. 당장 다른 왕족/귀족에 비하면 사치한 축에도 못 낀다. 저 때 프랑스 귀족들은 누가누가 더 부유하고 사치를 잘하는지 겨루던 시대였기도 했다.
한편으론 약간 천연적인 면도 좀 있었다. 바렌 사건 당시 목숨에 위협을 느껴 누구보다도 빠르게 남들과는 다르게, 친정으로 튀어야 했던 상황에서 마차를 눈이 잘 띄는 초록색으로 도색해 달라는 요구를 하거나, 아직 빤쓰런할까 말까 고민하는 상황에 설레발쳐서 왕실 물품이나 옷들을 미리 빼돌리거나 마차에 아이들을 위한 각종 생필품을 뭉텅이로 챙기는 눈치 없는 짓을 하여 주변인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다만 초록 마차는 기각되었고 물품을 빼돌리는 건 들키지 않았으며 장기간 망명길에서 생필품을 챙기는 건 그럴 수도 있는 일이기에 놀랍게도 각종 철없는 행동이 그리 문제 되지는 않았다.
5.6. 사치
심한 편은 아니었지만, 왕비가 되고 사치나 도박, 유흥으로 밤새도록 연극을 보거나 무도회를 즐기는 호화스러운 생활도 했었다. 도박을 좋아했지만 잘하지는 못해서 빚을 많이 지기도 했다. 단편적으로 보면 비생산적인 퇴폐 문화일 순 있지만, 이는 딱히 그녀가 방탕한 성격이어서가 아니라 당대의 귀족 문화에 어울리기 위해서 필요한 일종의 사교 활동이었다. 도박을 위해 빚을 졌다는 것 역시 현대인이 보기에는 막장 도박 중독자로 보이겠지만, 당대에는 신용카드 결제 비슷한 감각[63]으로 빚을 지는 경우도 있었고 나중에 제때 갚기만 했다면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도박에서 자주 졌다는 것도 당대의 맥락을 살피면 이해되는 부분인데, 당시에는 "귀족이라면 잃을 때 적당히 잃어주면서 놀이 자체를 즐겨야지, 돈을 따려고 정색하고 달려드는 것은 천박하다"는 인식[64]이 있었다.따라서 당대 유럽 귀족 사회에서 적당한 사치와 유흥은 원만한 사회생활을 위한 선택이었다. 물론 유럽 귀족 중에도 마치 수도승처럼 검소하게 사는 사람도 있었지만, 이런 사람들은 존경을 받거나 소위 '찐따' 취급을 당하거나 양자택일이었다. 국왕 부부 중 남편인 루이 16세는 최상류층에서 어리숙한 바보 취급 당하고 있었기에 더더욱 국왕 부부의 '적당한 사치'가 필요했다. 사실 중세~근세 유럽 사회에서 근검절약, 또는 수입에 맞춰 지출을 조절하는 것은 귀족의 미덕이 아니었다. 수입에 지출을 맞추는 것은 소시민의 미덕이었고[65], 반대로 귀족에게는 귀족 신분에 어울리는 과시적인 지출을 하는 것이 미덕으로 여겨졌다. 따라서 '귀족 중의 귀족'[66]인 국왕도 "왕답지 못하고 좀스럽게 절약"하는 것이 아니라, 충분한 사치로 왕의 권위를 세우고 이미지 관리를 하는 것이 미덕이었다.[67][68]
하지만 마리 앙투아네트의 사치는 당대, 그리고 동급의 귀족 사이에서는 심하지 않은 편에 속했다. 왕실 기록에 따르면 루이 16세 즉위 후 1789년까지의 왕실 소비 금액은 대략 2억 2천만 리브르였고, 마리 앙투아네트는 그 예산 중 자신이 쓸 수 있는 금액 한도의 10%도 쓰지 않았다.[69] 약 100만 리브르에 가까운 금액인데, 당장 왕의 동생이었던 프로방스 백작만 해도 궁전 개축에 100만 리브르가 훨씬 넘는 돈을 썼을 정도니 이 정도면 '상대적으로 검소했다'는 말이 크게 틀리지는 않는 셈이다. 프랑스 혁명의 원인 중 하나였던 미국 독립 전쟁에 투입된 군비가 10억 리브르에 달하니, 마리 앙투아네트의 100만 리브르 정도는 그렇게 과한 소비는 아니었다는 것이 역사가들 사이에서의 정설이다. 물론 100만 리브르는 당시 금 가격을 바탕으로 환산했을 때 대량 1천 2백억에 달하는 거금이니 아무리 '상대적으로 사치를 덜 했다'도 반대층 입장에서는 '아무튼 사치를 하긴 하였다'가 되어버렸다.
거기다 당시 상류층 화장으로 밀가루를 파우더로 쓰거나 밀가루 풀을 머리 장식을 고정시키는 무스로 사용했는데 연이은 흉년과 수탈로 식량 부족에 시달리던 대다수 평민들에게는 왕실과 귀족들이 식량으로 사치 부리는 것으로 보였다.
5.7. 악명
마리 앙투아네트를 죽게 만든 가장 큰 이유라 일컬어지는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으면 되지"라는 망언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본인은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 원래 장자크 루소의 <참회록>에 등장하는 말인데, 오스트리아 출신의 왕비라며 그녀를 비난하던 사람들이 여기서 따와 나쁜 소문을 퍼뜨렸고, 이것이 다시 혁명단에 의해 덧붙여지면서 '말도 안 되는 헛소리만 일삼는 멍청이'로 폄하된 것이다.[70] 사실 이와 비슷한 말을 정말로 했던 사람은 따로 있는데, 바로 서진의 2대 황제였던 진 혜제 사마충(司馬衷)[71]이다. 흉년으로 백성들이 굶주리고 있다는 말을 듣고는 "곡식이 없다면 어찌하여 고기 죽을 먹지 않는 것이냐?(何不食肉糜[72])"라고 했다고 하는데, 이는 엄연히 자치통감에 실려있는 사실이다. 다만 사마충은 백치라 판단력이 흐렸으며, 실제로 지적 장애를 앓고 있었다는 추측도 나온다는 점은 감안할 필요가 있다. 어쩌면 중국에서 나온 이 이야기가 대륙을 횡단하면서 마리 앙투아네트의 말인 것처럼 변신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73]사실 그녀를 죽음으로 몰고 가는 데 결정적으로[74] 기여한 것으로는 다이아몬드 목걸이 사기 사건이 있다. 라모트 백작 부인이 앙투아네트를 사칭해 거액의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편취한 이 사건에 앙투아네트가 관여된 것은 아니었지만[75] 대중들은 진범은 앙투아네트고 라모트 백작 부인은 이용당했을 뿐이라고만 믿었다. 라모트 백작 부인이 유죄 선고를 받자 일반 민중들의 여론은 더욱 격앙되었다. 다만 나중에 혁명 재판에서 확인해 본 결과, 무고가 맞았다.
당대 프랑스인들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성적인 모욕을 마리 앙투아네트에게 다 갖다 붙였다. 동성애, 근친상간, 하루에 수십 명을 상대한다든가 하는 등 주로 18세기 중반부터 널리 퍼지기 시작한 야설[76]에 귀족, 특히 왕과 왕비를 많이 갖다 붙였는데, 당연히 주적인 마리 앙투아네트가 수많은 악성 창작자들의 펜 끝에 능욕당했다. 루이 16세의 경쟁자였던 루이필리프 조제프 도를레앙뿐만 아니라 상속 후계자였던 두 동생인 프로방스 백작과 아르투아 백작도 그러한 소문을 부추겼으며 프랑스 왕실을 증오했던 혁명가들도 그런 식의 야설들을 마구 써내서 출간했다.
당대에는 동성애자라는 소문이 퍼져 있었지만 이는 루머에 불과하며, 연구에 의하면 본인은 동성애자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아무튼 동성애자였다는 비난을 많이 받았던 관계로, 예전에는 동성애자들에게 고귀한 희생자로 추앙받기도 했다.
오랫동안 아이를 낳지 못해서 비난을 받기도 했다. 현대인의 기준으로는 별것 아닌 것처럼 보일 수 있으나, 봉건 군주가 후사를 얻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꽤 심각한 문제였다. 전제 군주정에서 왕의 후사가 없다는 것은 곧 국가적 혼란을 야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왕과 왕비의 사이가 소원하고 왕비가 무도회장을 누비며 밤을 보낸다는 것은, 호사가들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사실 이건 루이 16세가 부부 관계를 기피하였기 때문으로, 그에게 일종의 성기능 장애가 있었다는 소문, 정확히는 자연 포경이 아니라는 얘기가 돌기도 했다. 이 문제로 루이 15세가 특별히 의사를 불러 루이를 진찰하게 했고, 나중엔 친정 오빠 요제프 2세가 매제인 루이를 설득하러 프랑스까지 출동했다. 둘만의 대화라 모르지만 요제프의 말발이 먹혔는지 결혼한 지 한참 뒤이기는 하지만, 다행히 마리는 아이들을 연달아 낳게 된다.
또한 아이를 가지지 못한 것에는 마리 앙투아네트의 문제도 한몫했었다. 왕세자비 시절 파리 방문을 계기로 파리의 밤문화를 알게된 밤마다 앙투아네트는 측근들, 시동생 아르투아 백작과 함께 파리로 가서 가면 무도회나 연극, 오페라 등 각종 유흥을 즐기고 동트기 전에 베르사유로 돌아가는 일정을 반복했다. 문제는 마리는 파티에서 춤추고 노는 동안 루이는 궁궐에서 잠을 자고 있었고, 밤새도록 논 마리는 진이 빠져서 아침이 되면 거의 기절해 잠들었고, 아내가 자는 동안 루이는 눈뜨자마자 사냥이나 대장간으로 출근했다. 이러다보니 둘 다 서로 이야기 나눌 틈도 없고 힘도 서로 다른 데에 쓰고 있으니 7년 동안 아무 소식도 없었던 것이다.
어쨌든 여론은 루이의 성적 능력에 대한 의심과 앙투아네트의 (조작된) 퇴폐적인 사교 생활에 대한 관심으로 들끓었고, 이때 형성된 여론은 두고두고 족쇄처럼 그녀를 따라다니게 된다. 보다 못한 마리아 테레지아가 서신을 통해 왕비로서의 몸가짐을 갖출 것을 타이를 정도로 당시 앙투아네트를 둘러싼 여론은 좋지 않았다. 어느 정도 나이가 들고 아이를 낳고 나서는 철이 들어서 유흥도 그만두었고, 왕비로서의 위치를 자각하여 왕실에 대한 지지를 회복하려고 노력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여론과 달리 마리 앙투아네트의 소비는 그녀 이전 역대 프랑스 왕비들보다 적었으며, 전체 프랑스 재정 상황에 비추어 보면 새 발의 피였다.
그녀가 이렇게 심한 악명과 루머에 시달렸던 이유에 대해서는 몇 가지 분석이 있다. 일단 결론부터 말하자면 왕실 일원 중 가장 비방하기 좋은 위치인 오스트리아 출신의 외부인인지라 국민들에게 처음부터 인기가 없었고, 부르주아 계급에게는 행실과 딱히 상관없이 원래 적 취급을 받았으며, 몇 가지 성격적 특징이 당시 프랑스 궁정 생활과 역효과를 일으켜 자기 편이어야 할 귀족들 사이에서도 고립되었기 때문이다.
1번째로 그녀는 프랑스와 사이가 나빴던 오스트리아 사람이었다. 그리고 당시 프랑스인들은 마리 앙투아네트가 오스트리아의 간첩이라고 거의 확신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프랑스 혁명 시기에 베르사유 궁전, 특히 마리 앙투아네트의 방은 모조리 뒤집어 엎어졌고, 그중에는 당연히 어머니인 마리아 테레지아나 오빠 요제프 2세, 레오폴트 2세, 그리고 자매들 및 친족들과 교환한 편지도 있었다.[77] 정치 외교학과와 사학과에서 동맹의 역전이라 불릴 정도로 프랑스와 오스트리아 간의 외교 관계가 급반전+급진전된 18세기 중후반의 국제 정세를 감안하면 아이러니 그 자체였다.
2번째로 왕비를 그저 애 낳는 기계 정도로만 취급하여 뒷방에 처박아 놓고는 공식적으로 정부(情婦)를 임명하여 궁정의 꽃으로 삼았던 루이 14세, 루이 15세와는 달리 루이 16세는 앙리 4세 이래 전통적으로 호색한이었던 부르봉 왕가의 왕임에도 불구하고 여색을 별로 밝히지 않고 마리 앙투아네트 이외의 여자에게 시선을 기울이지 않았다. 현대 기준으로는 '왕비에 대한 사랑이 지극하였던 국왕' 정도의 취급이었겠지만, 당대의 기준에서 이런 행동은 어이없게도 루이 16세에게 "성적으로 무능하다"는 이미지를 심어주었고[78], 반대로 마리 앙투아네트는 "남편 기를 죽이는 몹쓸 여자" 같은 이미지를 가지게 되었다.[79][80]
3번째로 당시까지 프랑스 여론은 도덕적으로 타락한 왕의 정부를 씹어대는 것이 취미였고, 스트레스 풀이용 범국민 스포츠였다. 그런데 루이 16세에게는 정부가 없었으므로 이런 이유로는 비난할 수가 없었는데 그러자 프랑스 국민들은 없는 정부 대신 왕비를 씹어댔다.
4번째로 마리 앙투아네트는 이전까지의 프랑스 왕비들과 비교하면 매우 활동적이었고, 궁정의 중심적인 위치에 있었다.[81] 이것은 "전통적인 프랑스 왕비상"에 어긋나는 모습이 되어 궁정의 보수파들에게 눈총을 받는 요인이 되었다. 또한 그녀는 근엄한 고위 귀족들을 고리타분한 인물들이라고 여겨 가까이 하지 않은 대신, 자신의 나이 또래의 인물들과 주로 어울렸기 때문에 베르사유의 고위 귀족들에게도 좋지 못한 평가를 받았다.
5번째로, 마리 앙투아네트의 인사 행정 문제였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왕비에 오르자마자 시녀, 측근들을 새로 뽑았는데 문제는 뽑은 시녀들이 프랑스 사교계를 지배했던 대귀족들이 아닌 랑발 공비[82][83]와 욜랑드 드폴리냐크 백작 부인 등 신진 세력들이었다. 특히 폴리냐크 백작 부인은 원래 작위밖에 없는 가난한 여성이었으나, 비슷한 나이의 왕비와 곧 친구 사이가 되어 마리 테레즈 샤를로트의 가정교사로 임명되었다. 고위 귀족이 맡는 것이 관례였던 왕손의 가정교사 자리에 '겨우' 백작 부인을 임명하는 파격적인 처분을 내린 것은, 귀족들에게 또 한 번 큰 반감을 사는 요인이 되었다.
6번째로, 측근들에 대한 마리 앙투아네트의 지나친 총애였다. 전술한 신분과 시누이와 시아버지의 도움으로 유복했던 랑발 공비와 다르게 폴리냐크 백작 부인은 베르사유에 출입할 만큼의 유복한 귀족이 아니다 보니 마리 앙투아네트는 연간 50~100만 프랑의 연금을 지급했다. 설상가상으로 사욕이 없던 랑발 공비[84]과 다르게 폴리냐크 백작 부인은 매우 약삭빠른 여자여서 연금과 대저택, 각종 선물 따위를 가능한 한 우려내려 들었다. 먼저의 조치로 고위 귀족들에게 반감을 산 데 이어 이러한 처분은 대중들의 평판을 나쁘게 하는 요인이 되었다.[85]
마지막으로 결정타를 먹인 언론 싸움. 당시 프랑스인들은 언론의 힘을 깨달아 가고 있었는데, 그 발전 과정에 있어 초기 상태였던지라 언론의 힘은 긍정적인 측면보다는 부정적인 측면의 파괴력에서 더욱 강력했다. 이미 루이 15세 때부터 프랑스의 부르주아지들은 정적을 제거하는 방법으로 정적을 소재로 한 음란물과 비방 서적을 출판해 댔고,[86] 이 와중에 짭짤한 수입도 챙길 수 있었다.
이 야설들은 기본적으로 인격 모욕이 주목적이기 때문에 수간, 윤간, 혼음, 강간은 기본으로 묘사되는 막장물이었고, 여기서 여주인공으로 당첨된 것이, 주는 것 없이 미운 마리 앙투아네트. 남주인공은 로앙 추기경[87]이나 훗날 부르봉 왕조 마지막 왕이 되는 아르투아 백작(샤를 10세), 그리고 그 외 수많은 남자들이 있었다. 다만 루이 16세는 한때 고자 소문이 돌 정도로 이쪽과 거리가 멀었기 때문에 제외되고, 주로 네토라레 당하는 역할로만 나왔다.[88]
즉 마리 앙투아네트가 당대 프랑스에서 이런저런 악성 루머에 시달릴 만한 이유가 있었던 것은 맞지만, 그와 별개로 그런 악성 루머들이 꽤나 오랜 세월 동안 사실(史實)로 둔갑했던 것은 장폴 마라나 자크 르네 에베르 등의 과격파가 자신들의 혁명에 대한 정당성을 주장하기 위하여 과장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다만 오늘날까지 그녀에게 붙은 악명의 상당수가 사실이 아니라는 것이지, 그렇다고 그녀가 무고하게 처형되었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재판에서 다루어진 그녀의 혐의는 세가지로, 첫째는 프랑스의 국고를 낭비한 것, 둘째는 프랑스의 안보에 해가 되는 행동을 한 것, 셋째는 프랑스의 적과 내통하여 그들에게 이로운 행동을 한 것인데, 일단 첫째 이유는 위에 언급되었다시피 억울한 누명이라고 볼 수 있고, 둘째 역시 부분적 그리고 도의적으로는 책임이 있을 수 있지만 그녀가 고의적으로 행동한 것은 아니라는 변명이 가능하다. 하지만 셋째에 대해서는 명백하게 유죄이며, 당시의 법률로써 이는 사형에 해당하는 것이 맞다. 물론 그녀의 입장에서는 찰스 1세가 주장한 것처럼 혁명 정부가 반역이고 나는 왕정에 충실했을 뿐이라고 주장할 수는 있겠지만, 사실상 공식적으로 혁명정부를 인정한 댓가로 목숨을 부지한 루이 16세가 선전포고한 상태인 신성로마제국으로 도피하는 것은 정부 입장에서는 분명 반역이고, 그녀가 이에 대해 주도적인 역할에 참여한 것도 사실이다.[89] 다만 하필이면 그 당시 시대상 여성이자 왕비인 마리 앙투아네트에게 3번째 죄목을 제대로 적용하지 못하여 그녀 입장에서보나 법적인 입장에서보나 말도 안되는 근친상간이 어거지로 적용되어 처형당한건 분명 억울할 만한 일이고, 당시에도 문제가 되었다는 점이 참작된 것이다.
요약하자면 마리 앙투아네트는 인간적으로 특별히 악인은 아니었으나 분명 격동기의 왕비로서 현명하지 못해 잘못과 실책을 저지른 것이 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잘못한 것은 과하게 비난받고 잘못하지 않은 일에도 비난받은 점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를 동정할지 비판할지는 이 두 면모 중 어느 쪽에 집중하느냐에 따라 다를 것이다.
6. 가족관계
6.1. 조상
본인 | 부모 | 조부모 | 증조부모 |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안토니아 여대공 (Archduchess Maria Antonia of Austria) | <colbgcolor=#fff3e4,#331c00> 프란츠 1세 (Francis I) | <colbgcolor=#ffffe4,#323300> 로렌 공작 레오폴드 (Leopold, Duke of Lorraine) | |
로렌 공작 샤를 5세 (Charles V, Duke of Lorraine) | |||
오스트리아의 엘레오노레 (Eleonore of Austria) | |||
오를레앙의 엘리자베트 샤를로트 (Élisabeth Charlotte of Orléans) | |||
오를레앙 공작 필리프 1세 (Philippe I, Duke of Orléans) | |||
팔츠의 엘리자베트 샤를로테 (Elisabeth Charlotte of the Palatinate) | |||
마리아 테레지아 (Maria Theresa) | |||
카를 6세 (Charles VI) | |||
레오폴트 1세 (Leopold I) | |||
노이부르크의 엘레오노레 막달레네 (Eleonore Magdalene of Neuburg) | |||
브라운슈바이크의 엘리자베트 크리스티네 (Elisabeth Christine of Brunswick) | |||
브라운슈바이크볼펜뷔텔 공작 루트비히 루돌프 (Ludwig Rudolf, Duke of Brunswick-Wolfenbüttel) | |||
외팅겐외팅겐의 크리스티네 루이제 (Christine Louise of Oettingen-Oettingen) |
6.2. 자녀
<rowcolor=#373a3c,#ddd> 자녀 | 이름 | 출생 | 사망 | 배우자 / 자녀 |
1녀 | 앙굴렘 공작 부인 마리테레즈 (Marie-Thérèse, Duchess of Angoulême) | 1778년 12월 19일 | 1851년 10월 19일 | 앙굴렘 공작 루이 앙투안 |
1남 | 프랑스의 도팽 루이 조제프 (Louis Joseph, Dauphin of France) | 1781년 10월 22일 | 1789년 6월 4일 | |
2남 | 루이 17세 (Louis XVII) | 1785년 3월 27일 | 1795년 6월 8일 | |
2녀 | 소피 공주 (Princess Sophie) | 1786년 7월 9일 | 1787년 6월 19일 |
- 장녀 마리 테레즈 샤를로트
1778년 ~ 1851년. 마담 루아얄이라는 칭호가 있었다. 프랑스 왕실은 왕비의 출산 시에 아무나 공공연하게 입회하도록 하는 관행이 있었는데[90] 이때 창문을 모조리 닫아서 환기도 안 되는 방에 너무 많은 구경꾼이 몰려들어 마리 앙투아네트는 거의 질식해서 죽을 뻔했다. 루이 16세는 안전을 고려하여 이후의 출산은 허가받은 소수만 참관할 수 있도록 관행을 바꾸었다. 어머니 마리 앙투아네트는 아이의 성별을 듣고 처음 아이를 안았을 때 울음을 터뜨렸지만, 훗날 그녀의 시녀 마담 쵸팡의 회고록에 쓰일 감동적인 말을 남겼다."불쌍한 어린것, 너는 그들이 바라던 아이는 아니야. 거짓말을 일삼는다 할지라도 현실을 속일 수는 없어. 특히 눈 모양을 보기만 해도 단번에 들통이 나지. 그렇다고 우리에게 소중하지 않다는 것은 아니야. 아들이었다면 국가의 아들이 되었겠지만, 너는 나의 것이야. 너는 내 모든 보살핌을 받게 될 거고, 내게 기쁨을 주고 슬픔을 나누게 될 거야."
의사가 산후 처리를 잘못하는 바람에 마리 앙투아네트는 많은 출혈을 했고, 그래서 딸을 낳은 후 기절했다. 그리고 2주 만에 육아를 포기하고 유모에게 보내야 했다. 이후 마리 앙투아네트는 첫 출산을 한 지 1년 만에 임신을 하나, 임신 초기에 마차 문을 닫다가 문을 배에 부딪히는 바람에 유산한다. 루이 16세는 마리 앙투아네트를 배려해 이 일을 함구했다고 전해진다. 이 내용들은 기록이 있어서 그런지 마리 앙투아네트의 생애와 관련된 매체에서는 매우 자주 묘사된다.
- 장남 루이 조제프 자비에 프랑수아
1781년 ~ 1789년. 왕위 계승권자로 도팽에 책봉됐다. 그러나 어린 나이에 척추 결핵(척추 카리에스)으로 죽었다. 위의 그림에서는 건강히 서 있는 모습으로 나오지만, 사실 저 그림을 그릴 때는 이미 제대로 일어서지도 못할 정도로 병세가 심했다.
그 외에 남편과 함께 아이를 4명 입양했다. 이 아이들은 입양된 순서대로 다음과 같다.
- 아르망(Armand) 혹은 자크(Jacques)라 불린 고아 프랑수아미셸 가녜(Francois-Michel Gagné)(1771~1792, 1776년 입양): 루이 16세 부부가 아이를 갖지 못할 때 입양했다. 이 인연으로 그의 형제자매들도 경제적인 지원과 교육 기회를 얻어, 형 드니는 궁정 첼리스트가 되며, 누이 2명도 꽤 많은 돈을 얻었다. 그러나 루이 16세가 수술을 통해 생식 기능을 회복한 뒤로는 자녀들이 태어나면서 찬밥 신세가 되었고, 이후 프랑스 혁명이 터지면서 공화주의의 지지자가 되어 양부모를 맹비난하면서 돌이킬 수 없는 관계가 되어 버렸다. 1792년 벨기에의 주마프 전투에서 전사했다.
- 세네갈인 장 아밀카르(Jean Amilcar)(1781~1796, 1787년 입양): 세네갈 총독 슈발리에 드부플레르(Chevalier de Boufflers)[91]에 의해 국왕 부부에게 바쳐져 세례 성사를 받아 이름을 얻었다. 궁전에서 도망친 국왕 부부에 의해 생 클로드의 기숙 학교에 맡겨져 거기서 경제적 지원을 얻었지만, 그 뒤로는 행방을 알 수가 없다. 루이 16세 부부가 처형된 후 물주가 사라지면서 금전적 지원을 받지 못하게 되자 시설에서 내보내졌으며 부랑아가 되어 거리에서 굶어 죽었다는 설도 있고, 11살부터 그를 돌보던 기숙 학교 선생 중 하나인 켕탱 벨동(Quentin Beldon)의 보살핌을 받아 그 선생의 탄원으로 혁명 정부의 후원을 받아 새로 리앙쿠르 미술 학교에 들어가 공부하다가 1796년 병사했다는 설도 있다.
- 궁전 하녀의 딸 에르네스틴 랑브리케(Ernestine Lambriquet)(1778~1813, 1788년 입양): 파리에서 평범하게 살다가 나폴레옹 시대에 사망했다.
- 엄마를 잃은 시종의 딸 조에(Zoë)(1790년 입양): 본명은 잔 루이즈 빅투아르. 위로는 수녀원에 입회한 두 언니가 있었고, 본인도 혁명 중에 수녀원에 입회하여 수녀로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
7. 대중매체에서
프랑스의 왕비에서 비운의 결말을 맡은 드라마틱한 생애와 당대 악녀라는 오명과 다르게 사실은 온화하고 착한 왕비라는 등 여러 재조명이 되는 인물이란 점에서 여러 매체에서 끊임없이 다뤄진다.7.1. 소설
- 단두대에서 살아남기: '오스트리아와 내통한 인물'이란 인식 때문에 작중 인물들의 평은 좋지 않다. 이런 인식이 틀린 게 아닌지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인 자신의 오빠에게 도움을 요청해 전쟁 위기를 불러일으킨다. 실제 역사에서 루이 17세와의 근친상간 혐의로 사형당한 것과는 달리 여기서는 아들 루이 17세가 왕이 되면서 남편과 함께 비극적인 죽음은 피했다. 현대에서는 각 매체의 영향으로 억울하게 처형당했다는 인식이 있지만, 사실 혁명 시기부터 강력한 정치력을 발휘하며 남편을 도와서 혁명 정부와 대립한 인물이다. 그녀의 선악과는 별개로 정말로 왕비란 자리 하나 탓에 최후를 맞은 건 아니란 소리. 본작에서도 유약해진 남편 루이보다 적극적으로 움직이나, 로베스피에르의 평가로는 행동력에 비해 지식과 경험이 부족해 도리어 제 목을 죄고 있다. 결국 자신의 딸이 주인공인 로베스피에르의 정부가 되기 위해 전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남자와 위장결혼을 하려는 꼴을 보고 프랑스의 상식에 적응하지 못한 외국인 출신 왕비로서 뒷목을 잡게 된다.
- 마리 앙투아네트 - 어느 평범한 여자의 초상(베르사유의 장미): 오스트리아의 작가인 슈테판 츠바이크가 1932년에 쓴 평전 및 역사 소설로 주인공으로 등장한다.이 책은 철저한 연구를 통해 기존의 전기들에 실려 있던 위조된 편지나 후대에 센세이션을 노려 만들어진 조잡한 에피소드 등을 배제하고, 정치적 희생물로서의 마리 앙투아네트라는 인간을 묘사하는 데 성공했다는 평가를 받는 작품이다. 이 평전 이후에 1934년 마담 뒤바리를 시작으로, 1938년에 할리우드에서 마리 앙투아네트 영화를 만들었으며, 이케다 리요코도 이 평전을 보고 만화 베르사유의 장미를 만들었다.
- 명군이 되어보세!: 4부에서 언급된다. 여기서는 언니 마리아 카롤리나가 프랑스로 시집가게 되면서 여동생 마리의 운명을 가져갔고, 마리 앙투아네트 본인은 러시아로 시집을 가게 되면서 러시아의 황후 마리야 표도로브나가 된다. 남편인 차르의 이른 사망으로 팔자에도 없던 섭정을 맡게 되지만 원 역사처럼 정치에 무지한 건 동일해 나폴레옹 전쟁이 한창 진행될동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오랫동안 방치해버렸다. 결국 참다못한 아들에 의해 강제 은퇴당하여 별궁에서 조용히 살다가 78세의 나이로 자연사한다. 그래도 원 역사에서 혁명세력에 의해 악녀로 매도되어 단두대에 처형당한 걸 생각하면 수명이 40여년이나 길어지고 편안하게 죽음을 맞이한 뒤바뀐 역사의 수혜자로 남게 되었다.
- 아르센 뤼팽 시리즈 - 기암성: 한 번 등장. 감옥에 갇혀서야 기암성의 비밀을 알았지만 이미 손쓸 방법이 없어서 후회했다는 내용.
-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 엔도 슈사쿠가 앙투아네트와 이니셜이 M.A.로 동일한 가상의 인물 마그리드 아르노의 대립과 프랑스 혁명을 다룬 이 소설을 썼다. 한국에서는 1990년대 왜색 논란으로 인해 민예사에서 '앙드레 까스뗄로'라는 정체불명의 작가가 쓴 <소설 프랑스 대혁명>이라는 이름으로 출간되었다. 그런데 이게 아무리 봐도 해적판으로 출간한 듯 보인다. 비슷한 경우로 만화 베르사유의 장미는 마리 스테반드바이트라는 정체불명의 여류 작가의 이름으로 출판되었고, 유리가면도 넬 베르디라는 국적 불명의 작가가 쓴 소설로 마개조당했다. 후술할 뮤지컬 마리 앙투아네트(토호판, EMK판)의 원작이 되었다.
- 얘 사전에 불가능은 없다!: 여기서는 금고형이 선고되어 단두대에서 사형을 면하게 되었으며, 주인공이 마리 루이즈 샤를로트 공주와 결혼하면서 그의 장모가 되었다. 주인공이 그녀를 직접 본 소감은 '선량한 사람이지만 속에 뭘 감추고 있는지 모르는 능구렁이 같은 사람'이었다. 실제로 총재 정부의 무능함이 드러나자 은근슬쩍 부르봉 왕조의 복귀를 위한 밑작업을 진행 중이었으며, 결국 이를 눈치챈 주인공에 의해 생도맹그로 가게 된다. 물론 주인공도 같이 가는 거고, 총재 정부의 감시가 약한 곳에서 세력을 키울 수 있게 되어, 생도맹그로 가게 된 것을 나쁘게 생각하지는 않고 있다.
- 임꺽정은 살아있다: 대체역사물로 마리아 테레지아가 영국 왕실에 시집을 갔기 때문에 '메리 안토니아(Mary Antonia)'라는 이름으로 태어나서 영국 여왕으로 즉위한다. 루이와 결혼한 건 원역사와 똑같지만, 로베스피에르가 프랑스의 독재자가 되고 나서 영국으로 망명 온 신세이기에 루이는 실제 역사보다 더 추락한 신세. 그나마 다루기 쉬운 남자라는 이유로 결혼했다고.
- 티어문 제국 이야기 ~단두대에서 시작하는 황녀님의 전생 역전 스토리~: 미아 루나 티어문은 혁명의 본보기로서 단두대에서 처형당했다는 것과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으면 되지라는 말을 한 것으로 보아 마리 앙투아네트를 모델로 한 것으로 보인다.
- 파워 앙투아네트: 근육 덕후[92]에 인간흉기로 나온다. 처형을 앞두고 덤덤히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이려고 했지만, 시민들의 말 한마디[93]에 빡이 돌더니, 단두대 앞에 서자, 자신의 팔에 묶인 로프를 힘으로 끊어버린다. 그리고는, 내려오는 단두대 칼날을 손으로 잡아내더니[94], 순식간에 키 180의 근육질 체형으로 벌크업해 버린다. 그리고는 궁정 격투술로 주변의 장병들을 상대로 무쌍을 찍어버린다. 체형 변화는 샤를 앙리 상송이 혈을 찔러준 덕분에 가능했다. 다만, 이는 일시적인 현상이며, 시간이 지나면 원래 체형으로 돌아온다.
- 프랑스 왕가의 천재가 되었다: 히로인으로 등장한다. 여기서는 루이 16세가 아닌 원역사에서는 존재하지 않았던 인물이자[95] 주인공이 빙의한 인물인 루이 크리스티앙 왕자의 아내가 되었다. 원역사와 달리 자신이 원하던 진정으로 행복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 마리 앙투아네트 본인 및 그녀의 팬들에게는 그야말로 가장 이상적인 작품.
7.2. 영화
- 1934년 <마담 뒤바리>에서는 아니타 루이즈가 맡았다.
- 1938년 할리우드 영화 <마리 앙투아네트>에서는 노마 시어러가 맡았다. 본 영화는 흑백영화임에도 화려한 복식 재현과 영상미로 유명하며, 색상 영화로 상영되지 못해 아쉬움을 표하는 사람들도 많다. 대부분 마리가 입는 드레스는 실제 역사속 초상화를 모티브로 재현시킨 뛰어난 퀄리티를 자랑한다.
- 1956년 <Marie-Antoinette reine de France>에서는 미셸 모르간이 맡았다.
- 1957년 <The Story of Mankind>에서는 머리 윌슨이 마리 앙투아네트를 맡았다.
- 1979년 <베르사이유의 장미> 영화판에서는 크리스티네 뵘이 맡았다.
- 1989년 프랑스 혁명 200주년 기념 영화 <프랑스 대혁명, 원제 La Révolution française>에서는 제인 시모어가 마리 앙투아네트 역을 맡아 호연을 펼쳤다.
- 1990년 <L'autrichienne>에서는 우테 렘퍼가 맡았다.
- 2001년 <어페어 오브 더 넥클리스>에서는 조엘리 리차드슨이 맡았다. 영화 내용은 참혹하기 그지없지만, 초상화와 높은 싱크로율과 여왕같이 품위있는 연기력으로 주목을 받았다. 마지막 장면의 마리 앙투아네트의 최후는, 실제와는 달리 루이 16세가 그랬듯이 엄숙한 분위기로 나온다.[96]
- 2006년 <마리 앙투아네트>는 소피아 코폴라가 감독하고, 커스틴 던스트가 마리 앙투아네트 역할을 맡았다. 현재까지 마리 앙투아네트를 매우 잘 묘사한 영화로도 유명하며, 복식 재현도 뛰어난 점에서 극찬받는 작품이다.
- 2006년 영화 <Marie-Antoinette, la véritable histoire>에서는 카린 바나스가 맡았다.
- 2012년 프랑스, 벨기에 합작 영화 <페어웰, 마이퀸>에서는 마리 앙투아네트와 폴리냐크가 동성애 관계로 그려진다. 담당 배우는 다이앤 크루거. 레아 세두는 책을 읽어주는 시녀 시도니로 나왔다. 평가는 호불호가 극명히 갈리는데, 폴리냑 백작부인과 동성애 관계로 묘사된 점에서 마리 앙투아네트의 전문가들과 팬들이 크게 악평을 내렸다.
- 2018년 영화 <원 네이션>에서는 마엘리아 장티(Maëlia Gentil)가 맡았고, 현대의 재평가 반영 및 왕에게 분노하는 프랑스 국민을 주인공으로 한 덕분에 모든 어그로가 루이 16세로 끌려서 이 영화에서는 참수당하는 장면조차 나오지 않는다. 무도회를 즐기는 신도 없다.
- 2023년 영화 나폴레옹에서는 리들리 스콧의 전작 하우스 오브 구찌에 등장했던 아일랜드 배우 캐서린 워커가 마리 앙투아네트로 분했다. 스위스 근위대원들과 함께 두 자녀[97]들을 데리고 다급하게 도망치는 모습으로 첫 등장 하며[98] 단두대에서 처형당하고[99] 그 목이 들어 올려지는 모습으로 출연 종료.
7.3. 드라마
- 2022년 프랑스-영국 합작으로 제작된 드라마 <마리 앙투아네트>에서는 독일 여배우 에밀리아 슐레가 연기했다. 실존 인물 자체가 오스트리아 출신이었던 만큼, 바로 옆 나라이지만 사실상 같은 문화권 출신 여배우를 캐스팅함으로써 이런 현실 반영을 한 듯하다. 이전에 카날 플뤼에서 제작한 드라마 베르사유의 후속작[100]이라 봐도 무방할 정도로, 배경은 프랑스지만 극 중 인물들이 쓰는 언어는 영어로 제작되었다. 이전작처럼 해외 수출을 염두에 두고 제작한 듯. 게다가 이전작처럼 똑같이 실제 베르사유 궁전에서 촬영·진행했다. 한국인 입장에서 봤을 땐 실제 문화재인 곳에서 드라마나 영화 촬영을 하는 게 이상해 보일 수는 있지만 원래 베르사유 궁전은 관광객이 모이지 않는 매주 화요일 날 촬영 허가를 굉장히 잘 내주는 곳으로 유명하다.
7.4. 뮤지컬
- 베르사이유의 장미를 원작으로 한 뮤지컬들
- 토호판 마리앙투아네트: 2006년 엘리자벳, 레베카의 제작진 명콤비 실베스터 르베이와 미하엘 쿤체가 위의 소설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를 원작으로 일본 토호에서 제작한 뮤지컬.
7.5. 만화
- 경국의 재봉사 로즈 베르탱: 세컨드 주인공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비중 있게 등장하며 베르사유의 장미처럼 놀기 좋아하고 감정에 솔직하며 남을 너무 잘 믿는 순수한 소녀로 나온다. 왕세자빈 시절부터 로즈 배르탱의 패션에 조금씩 관심을 가지다가 왕비 즉위 후 그녀를 전속 패션 디자이너로 임명한다. 이후 베르탱의 도움으로 왕비의 위엄도 살리는 동시 프랑스 패션의 선구 주자가 되었지만 후계자 문제[101]와 각종 외설 루머로 힘들어 하는 등 승승장구하는 베르텡과 대조적인 모습을 보였다. 결국 왕비의 총애를 노린 게메네 부인의 꼬임으로 도박에 빠지고 그녀의 추천을 받은 폴리냑 부인에게 매료되어 여러 특혜를 주고, 왕비로서 의무를 방관하고 측근들과 무도회나 경마같은 각종 유희에 몰두하는 등 여러 실책을 저지른다.
- 신 데빌맨: 아키라와 료가 만나는 과거 인물 중 하나. 외로움으로 인해 생긴 마음의 틈을 노리고 데몬이 그녀를 조종하고 있었다는 설정.
- 심도쿄: 얼굴 위쪽을 가면으로 가리고 있는 여성으로 나온다. 하반신에는 촉수가 숨겨져 있으며, 그 촉수로 죄인들을 잡아먹는다. 미소년들은 바로 죽이지 않고 납치해서 '페르센'이라고 부르지만 조금이라도 이상한 낌새가 보이면 하반신의 촉수로 잡아먹는다.
- 악역 영애로 전생했을 텐데 마리 앙투아네트였습니다: 여주가 마리 앙투아네트로 환생하게 되는데, 문제는 주인공이 역사 지식이 없는 데다가 처음에는 이세계 전생물이나 악역 영애물의 세계에 빠진 줄 알고 착각했지만, 나중에 프랑스로 시집가게 되면서 어머니의 이름이 '마리아 테레지아'라는 것과 간단한 프랑스어 문장인 "나의 이름은 마리 앙투아네트입니다(Je m'appelle Marie-Antoinette)"을 통해 자신이 마리 앙투아네트로 환생했다는 충격적인 사실을 깨달았다. 그 전까지 주인공의 이름은 원래 모국인 오스트리아의 독일어 이름인 마리아 안토니아로 불렸다.
- 이노센트: 주인공이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 부부를 직접 처형한 장본인이기 때문에 출연이 불가피하니 등장했다. 주로 주인공 샤를 앙리 상송의 여동생인 마리 조셉 상송과 마리 앙투아네트의 대비되는 연출로 등장한다. 18세기임에도 여성이기를 거부하고 상송 가의 운명을 짊어지기를 기꺼이 원하는 마리와, 지극히 여성스럽게 자라는 마리 앙투아네트가 서로 대비되어 등장한다. 다만 마리 앙투아네트도 태어날 때부터 행복한 삶은 아니었고 오스트리아의 공주였던 어린 시절, 어머니 마리아 테레지아에게 엄격한 교육을 받았고 프랑스에 시집온 후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권력 다툼에 시달리면서 사치에 빠지는 여성으로 나온다. 루이 16세의 처형 이후로 탑에 갇힌 후로도 품위있고 우아한 모습을 유지하며, 마리 조세프가 "센강의 물을 마시고 평민으로 다시 태어난다면 도망갈 수 있게 도와주겠다" 라고 제안하지만, "나는 당당한 왕족이다"라고 거부하고, 자신의 처형 소식에도 마지막까지 의연한 모습을 유지하며, 처형대에 올라가서 마리 조세프의 발을 일부러 밟아서 도발한다. 결국 그토록 각별한 사이였던 마리 조세프의 손에 직접 처형당한다.
- 베르사유의 장미: 마리 앙투아네트 하면 대표적으로 가장 먼저 떠오르는 만화. 실제로 작중 마리 앙투아네트의 상냥함과 순수한 마음을 정확히 묘사하면서도, 실제 그녀의 실책과 왕비로서의 부족함 등을 전부 재현해 내어 극찬을 받았다. 자세한 건 마리 앙투아네트(베르사이유의 장미) 참고.
7.6. 애니메이션
- 걸즈 앤 판처 최종장: 그녀를 모티브로 한 '마리'라는 캐릭터가 등장한다. 자세한 건 BC자유 학원 참고.
- 라 세느의 별(세느강의 별): 어느 정도 이미지가 혼재된 모습으로 나온다. 사치스럽고 제멋대로인 면모도 있지만 가족에 충실하고 아버지가 원나잇으로 만든 배다른 동생인 시몬느를 찾기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다. 다만 그로 인해 귀족에게도 민중에게도 상당한 원한을 샀으며 라 세느의 별인 시몬느의 정체를 모르고 자신의 심복인 근위대장을 죽인 범인으로 알고 있어 처형하려 했으나 검은 튤립에 의해 진실을 알게되고 풀어주게 된다. 이후 루이 16세의 도움으로 가족으로서 시몬느와 만나게 되며 프랑스 혁명 후 시몬느의 도움으로 루이 17세와 다른 자식들을 국외로 빼돌리는 데 성공한다. 시몬느가 처형 직전에 자신의 자식들을 구해 빼돌려 망명하자 그것을 다행스럽게 생각하며 사망한다.
- 오다 시나몬 노부나가: 전생 후 이름은 '마리 릴리 앙투아네트'라는 닥스훈트로 등장한다.
- 클래시컬로이드: 그녀를 모티브로 한 '미하라 마리'라는 캐릭터가 2기 8화에서 등장하는데 이 아이가 등장한 에피소드는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가 마리 앙투아네트에게 프러포즈를 했다는 일화에서 따온 에피소드이다. 모츠는 마리에게 훗날 다시 만날 것을 약속하며 패드 군은 "미하라 마리는 마리 앙투아네트가 아니기에 행복한 삶을 살 것"이라고 말해준다.
- 토이 스토리: 목이 잘린 여자 인형 둘[102]과 티타임을 한 버즈가 그녀를 마리 앙투아네트와 여동생이라 부른다.
7.7. 게임
- Fate/Grand Order - 마리 앙투아네트(Fate 시리즈): 라이더로 참전했다.
- 대항해시대 시리즈
- 대항해시대 5: 항해사들 중 한 명으로 나온다. SR급 마리, UR급 마리 모두 교역 관련 능력을 가진 항해사이며, 일본에서는 UR급 마리 앙투아네트와의 계약 퀘스트가 있지만 한국에서는 뽑기로만 고용이 가능하다. 원래 세계의 마리는 어린 외모에 밝고 명랑한 성격으로 보이지만, 평형 세계의 UR 마리 앙투아네트는 좀 더 나이 든 외모에 좀 더 냉철하고 이지적인 성격으로 보인다.
- 대항해시대 오리진: S급 교역 항해사이며 주 스탯은 협상 전략. 김만덕 연대기를 통해 얻을 수 있다. 대항해시대 5 때와는 다르게 성숙하고 여유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특이하게 프랑스의 왕비이면서 뜬금없이 북아메리카 지역의 도시인 코하셋에서 고용/회식이 가능하다.
- 모두의 마블 for kakao - 앙투아네트(모두의마블)
- 성녀전기: 주요 인물로 등장. 성녀의 힘을 지니고 있어 처형을 피하게 되었고, 이후 혁명파와 협상을 통해 프랑스를 입헌 군주제로 바꾸는 데 동의하게 된다. 그녀가 추진한 성녀 발굴 정책으로 인해 주인공인 폴린 보나파르트가 실제 역사와 달리 사관 학교에 들어가 장교가 된다. 그러나 작중 흑막의 농간으로 인해 아슬아슬하던 정국이 불안해진다. 결국엔 바렌 사건의 진실이 폭로되어 루이 16세는 단두대에서 목숨을 잃고, 자식들도 실종된다. 이후 복수심에 흑막과 손을 잡고 쿠데타를 일으키고 푸른 다이아몬드의 힘으로 폴린 일행을 혼란스럽게 하나, 폴린이 새로운 능력에 각성하면서 힘이 무효화된다. 결국 폴린과 결투를 벌이고, 푸른 다이아몬드의 힘을 너무 쓴 부작용으로 사망. 자신은 몰랐지만 딸인 마리 테레즈는 폴린 일행에 의탁해 정체를 숨기고 생존했고, 아들인 루이 17세는 정체를 숨기고 샤를이란 이름으로 살고 있다는 암시가 나온다. 마리의 유품은 폴린을 통해 루이 17세에게 전달된다.
- 에빌리오스 시리즈: 릴리안느 루시펜 도트리슈의 모티브가 된 인물이다. 그래서인지 릴리안느의 풀 네임에 도트리슈가 들어 있다. 소설판 삽화를 그린 이치카는 마리 앙투아네트 인형의 드레스를 생각하며 릴리안느의 드레스를 디자인했다. 또한 오만의 악마의 이름 마리 아네트의 모티브이기도 하다.
- 영웅전희 GOLD: EU(유럽 대륙)의 영웅 중 하나로 나온다. 오만방자하고 유아독존인 성격에 막강한 재물 운 덕에 돈 쓰기에 별 신경 쓰지 않는 등 프랑스 대혁명 때의 편견과 악의적인 선전에 맞춘 듯한 모습이 나오지만, 예법에 가장 충실한 모습을 보면 또 예의 바른 실제 모습도 조금 반영된 듯하다. 게임이 지역 제압 시뮬레이션이라 전투 유닛으로 운용 가능하지만 1선급 강캐는 아니라 대개는 이벤트만 보고 창고 요원이 된다.
- 장미에 숨겨진 베리테: 조연으로 등장. 주인공 리제가 오스트리아에서부터 섬긴 주인으로, 프랑스로 시집갈 때 만약의 사태에 대비한 보험으로 따라간다. 국경에 도착했을 때 앙투아네트가 고열로 쓰러진 것을 시작으로, 신비한 약을 마시고 마리 앙투아네트 행세를 한다. 나름 리제를 아끼기는 하는데, 자존심이 강한지라 불가피한 상황이라고는 해도 한낱 시녀인 리제가 자신의 대역을 맡았다는 사실 자체를 달갑지 않게 여긴다. 답답한 생활을 싫어하고 자유를 원하고 있으며, 초중반부는 다소 철없게 묘사된다. 리제가 마리 앙투아네트와 엇갈리면서도 끝까지 그녀를 포기하지 못하기 때문에 비중이 상당히 크며, 일각에서는 "진히어로는 앙투아네트"라는 우스갯소리까지 있다. 안타깝게도 루트가 없기 때문에 어떤 루트로 가던지 죽는다. 주인공은 리제이고 그녀의 남편인 루이 16세 역시 공략캐이기 때문에, 루이 16세와는 서로 정말 1도 감정이 없다. 역사상으로 실존하는 자식들도 생략됐다.
- 제5인격: 플레이 가능한 감시자로 등장한다.
- 타임 프린세스: 마리 앙투아네트의 일생을 기반 삼은 스토리 '마리 왕비'의 주인공이자 메인 주인공이 빙의하는 책 속의 등장인물 중 하나로 나온다. 여기에서는 주인공이 선택지를 통해 마리 앙투아네트의 비극적인 최후를 막아 역사를 바꾸어주려고 한다. 다만 이 작품의 빙의 전 마리 앙투아네트는 허영심 많은 악녀로 나온다.
8. 기타
- 도박 중독자였고 자주 돈을 잃기도 했으나, 아이를 출산한 후에 도박을 그만두었다.
- 그녀의 비극을 미리 예견이라도 하듯이 결혼식 과정에서 불길한 일이 연속으로 벌어졌다. 먼저 프랑스와 오스트리아의 인도 과정을 거치는 건물에 불길한 결혼의 대명사로 불리는 '왕녀 메데이아'의 내용을 담은 태피스트리[103]가 걸려있었다. 이후 결혼 문서를 작성할 때 마리 앙투아네트 이름에 검은 얼룩이 번지는 일이 벌어졌고 심지어 결혼식을 올릴 때 날씨마저 폭풍우가 몰아쳤다. 설상가상으로 결혼식 후 루이 16세와 파리 방문을 했는데 기묘하게도 니콜라이 2세 대관식처럼 사람들이 몰려서 대형 압사 사고가 나 방문 행사가 취소되는 일까지 벌어졌다.
- 콩시에르주리로 이송된 이후에 그녀를 탈출시키기 위해 왕당파 귀족인 레니에 드자르제 백작이 비밀리에 방문한 적이 있다. 참고로 자르제 백작은 유명한 만화 베르사유의 장미에서 오스칼 프랑소와 드 자르제의 아버지로 나오는 인물이기도 하다. 만화에서는 충성스러운 자르제가 어떻게든 왕비를 탈출시키려고 했으나, 왕비가 "아이들을 남기고 혼자 탈출할 수 없다"며 거절하는 것으로 나온다. 하지만 실제로는 자르제가 너무 겁이 많아서 탈출 계획을 세워놓고 결국은 실행시키지 못하고 국외로 도주해 버렸다.
- 독립 직후의 미국에서는 미국 독립 전쟁 중에 프랑스의 루이 16세가 지원을 많이 해준 것 때문에 친불 감정으로 인해[104] 마리 앙투아네트에 대한 동정론이 있었다. 애인으로는 스웨덴의 귀족 한스 악셀 폰 페르센이 있었다. 두 사람 사이에 육체관계가 있었는지는 모호하지만, 적어도 서로 간의 플라토닉한 관계가 있었음은 여러 가지 증거가 남아 있다. 그는 마리 앙투아네트의 처형 이후 혼자 남은 그녀의 딸 마리 테레즈 샤를로트를 도와주려 애쓰기도 했다. 공교롭게도 한스 악셀 폰 페르센 역시 마리 앙투아네트처럼 평민에게 살해당했다.
- 충격적이게도, 저주받은 다이아몬드 4개를 모두 소유했던 인물로 유명하다. 이게 저주만으로 생긴건 아니지만, 왕세자비로 온 시점부터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고, 아무리 도움을 주려해도 그 누구도 인정해주지 않는 등 극심한 우울증과 불운을 받았으니, 최악의 저주를 받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심지어 그 다이아몬드 중 블루 호프를 같이 나눠쓰던 절친인 랑발 부인까지 끔찍한 운명을 맞이하고 만다.
- 단두대에 오르기 전날 밤 머리가 하얗게 세었다고 하며, 이런 현상(증상)을 마리 앙투아네트 증후군이라 부른다.
- 마리아 테레지아의 성인이 된 이후 살아남은 자녀들 중에서, 유일하게 40살을 못 채우고 사망했다. 마리아 테레지아의 자녀들 중에서 마리 앙투아네트보다 어린 나이에 죽은 자녀들은, 진짜로 어린 나이에 죽어서 어른이 되어보지 못한 사람들뿐이다.
- 프랑스의 초콜릿 회사인 드보브에갈레의 기원이 마리 앙투아네트가 약을 먹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자신이 복용하던 약의 불쾌한 맛에 대해 불평했는데 약사였던 쉴피스 드보브가 약에 코코아와 설탕 등을 조합하여 동전 형태 초콜릿을 만들어 바치자 기뻐하며 초콜릿의 이름을 피스톨이라 짓고 드보브는 1800년에 초콜릿 가게를 열어 드보브에갈레를 창업한다.
- 공교롭게도 마리 앙투아네트의 이름을 딴 과자가 존재한다. 다시금 강조하지만 이름을 딴 케이크가 있었다는 거지, 그녀가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으면 되지"라는 말을 한 것은 아니니 오해는 말자. 당시 귀족 사회에는 왕족을 비롯해 귀족의 부인이나 정부들까지도 각각 자신의 이름을 딴 케이크(혹은 디저트)를 가지고 있었다. 호화로운 만찬이 끝날 무렵 그것을 손님들에게 제공하는 것이 사교계에서의 위엄이었으며 그녀들의 긍지 높은 자기표현이었다. 특히나 왕비의 이름이 붙은 과자는 왕비 본인이자 프랑스라는 국가의 위신의 상징이었다. 왕비의 이름을 가진 과자들은 '비스켓 글라스 앙투아네트', '샤를로트 마리 앙투아네트'가 있다.[출처][106]
- 시계 기술자이자 브레게의 창시자인 아브라함 루이 브레게를 후원하고 시간이 들어도 좋으니 최고의 시계를 만들어 달라는 주문을 넣었다. 안타깝게도 마리 앙투아네트는 프랑스 혁명으로 살아생전 브레게의 시계를 받지 못했지만 브레게의 노력으로 마리 앙투아네트의 이름을 받은 no.160은 완성되고 이후 고고학자와 기술자들이 복원하였다.
- 프랑스의 크리스마스 빵으로 유명한 구겔호프도 마리 앙투아네트에 의해 전해졌다고 한다. 원래 구겔호프는 독일 알자스-로렌 지방의 케이크 였으나 로렌 공국 출신이자 마리 앙투아네트의 아버지 프란츠 1세에 의해 오스트리아 왕궁로 전해진다. 당시 고향의 맛이 그리웠던 마리 앙투아네트는 구겔 호프를 자주 먹었고 이로 인해 프랑스로 널리 펴졌던 것이다.
- 2018년 8월 1일 수요일 JTBC 뉴스룸 9시 앵커브리핑에서 손석희가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으면 되지' 루머를 사실인 양 거론하여 이 루머의 생명력 연장에 일조했다.
- 2020년에 마리 앙투아네트의 구두가 경매에서 43,750유로(약 5,760만 원)에 낙찰됐다. 이 구두는 마리 앙투아네트의 시녀의 친구가 보관하게 된 이후 대대손손 가보로 전해져 내려오다가 경매에 나온 것이다.
- 2021년, 한스 악셀 폰 페르센에게 보낸 서신의 덧칠된 부분들이 식별되었고, 이 부분은 2021년 11월 7일 자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 다뤄졌다. 기사
- 2024년 1월에 당시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이자 현재 한동훈계의 원외 핵심인 김경율이 김건희를 마리 앙투아네트에 비유한 발언을 해 논란이 일어났다. 이때 뮤지컬 마리 앙투아네트도 애꿎은 피해를 입은 적이 있으나 이 뮤지컬은 그 사건이 일어나기 전부터 있던 것이라 넘어갔다.
- 2024 파리 올림픽의 개회식 때 콩시에르주리[107] 앞에서 목이 잘린 채로(!) 자신의 목을 들고 있는 마리 앙투아네트와 밴드 고지라의 익스트림 메탈까지 보여주는 아방가르드하고 섬뜩하면서도 기묘한 모습이 소소하게 화제가 되었다. 영상,[주의] 이미지[주의] 한편으로는, 마리 앙투아네트에 깊은 열정을 가진 사람들은 물론 역사 전문가들은 지나치게 가혹한 결말을 맞은 비운의 여인을 이런 식으로 표현하는 모습에[110] 크게 분노하며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 폭식이 일종의 미덕 수준이었던 역대 프랑스 군주들과 달리, 그녀는 오스트리아 궁정의 소박한 생활에 좀 더 익숙했기 때문에 생각외로 많이 먹지는 않았다. 다만 프랑스 궁정에서 생활하면서 받은 스트레스 때문인지 충치가 걱정될 정도로 단 음식을 좋아했고, 이 간식 값만으로도 큰 돈이 나갔다는 기록들이 존재한다.
[1] 남편인 루이 16세의 키는 193cm로 키가 39cm나 차이가 난다.[2] 루이 16세(당시엔 프랑스의 도팽 루이 오귀스트 왕자)와 혼인한 이후의 칭호.[3] 루이 16세가 국왕으로 즉위한 후의 칭호.[4] 루이 16세와 함께 나바라의 국왕과 왕비에서 폐위된 이후의 칭호.[5] 카페 부인이란 의미로 왕비직에서 폐위된 이후의 칭호. 남편 루이 16세도 국왕에서 폐위된 이후 처형될 때까지 거추장스러운 칭호 다 빼고 루이 카페란 본명으로 불렸다.[6] 요제프 1세의 딸로 요제프 1세의 동생 카를 6세의 딸이 바로 마리아 테레지아. 마리아 요제파가 작센 선제후 겸 폴란드 국왕인 아우구스트 3세와 결혼하여 낳은 딸이 루이 16세의 어머니 작센의 마리아 요제파이다.[7] 덧붙여서 마리아 요제파의 동생인 알베르트 카지미어는 마리아 테레지아의 딸이자 마리 앙투아네트의 언니인 마리아 크리스티나와 결혼한다. 즉 루이 16세에게 마리아 크리스티나는 처형이자 외숙모이고, 마리 앙투아네트에게 알베르트 카지미어는 시외숙이자 형부인샘.[8] 특히 언니 마리아 카롤리나와 마리아 아말리아와 제일 친하게 지냈으며 이 둘과는 프랑스 혁명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연락을 주고 받았다. 또한 14살이나 많은 첫째 오빠 요제프 2세도 막내 여동생인 마리 앙투아네트를 매우 아끼고 시집간 여동생을 걱정해 직접 프랑스로 갔다.[9] 이때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는 즉위 소식을 듣자 기뻐하는 주변 사람들과 반대로 두 사람은 불안해하며 하느님에게 자신들을 지켜달라고 기도를 했다.[10] 미국 입장에서는 영국의 식민지배에서 독립,해방되고, 새 국가를 건국했으니까 득을 보았지만 프랑스 입장에서는 개삽질이나 다름없는 게 참전부터가 '영국 좆 돼봐라' 하는 마인드로 참전했기 때문이다.[11] 루이 16세 자신은 여색을 밝혔던 선대 왕들과 달리 가정에 충실해서 그런 것이었지만, 결과적으로 이는 역효과를 낳았다. 보통 정부를 두면 왕실 비용이 많이 나가도 '이게 다 사치스러운 왕의 여자 탓이다'라고 욕 먹을 대상을 돌릴 수 있지만, 루이 16세는 정부를 두지 않았으므로 입지도 약한 외국인 왕비였던 마리 앙투아네트가 이를 다 뒤집어쓴 것이다.[12] 이 3명은 혁명 발생 후 외국으로 도피한 폴리냑과 달리 끝까지 마리 앙투아네트 곁을 지켰기에 이들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좋다.[13] 당시 폴리냑 백작가는 어떤 공적도 세우지 못한 그저 몰락한 귀족 가문에 불과했지만 왕비의 도움으로 왕실로부터 엄청난 연금은 물론 베르사유 궁전에 사는 특권을 얻는다. 더구나 당시 신분제 사회인 프랑스에서 평민 출신의 상인은 왕실에 출입이 제한되어 있지만 로즈 베르탱은 왕비의 총애로 전속 모드상이란 신분으로 왕궁을 제집처럼 드나들었다.[14] 2006년 마리 앙투아네트 영화에서는 후자의 해석을 따랐으며, 베르사유를 떠날 때도 마리와 우정의 포옹을 나누며 슬픈 마음으로 떠나는 등, 말 그대로 사치만 빼면 다 좋은 친구로 묘사된다.[15] 제네바는 사보이아 백국 시절 사보이아 가문의 영토였기 때문에 사보이아 가문은 카를로 에마누엘레 1세가 제네바에서 대판 깨진 이후에도 대대로 이곳을 노렸다.[16] 앙투아네트는 결혼 전 로렌 공국의 공작이었던 프란츠 1세의 딸이기도 했다.[17] 루이 16세의 주도로 이루어진 일이지 앙투아네트가 주도한 일이 아니기 때문에 루이 16세가 반역죄로 처형된 반면 왕비는 무죄 판결을 받았다.[18] 슈테판 츠바이크는 근친상간 혐의에 대해서 길게 서술했는데 왕실의 억압된 삶에서 벗어나 새롭고 낯선 환경에서 사람들과 사귀는 장난기 어린 나이의 병약한 아이가 어른들이 이야기하는 말을 믿고 재밌게 반복한다는 장난기 어린 증언으로 평가한다.[19] 실제 편지 사진이 남아있는데 앙투아네트가 쓰면서 눈물을 흘렸는지 편지에 눈물 자국이 남아있다.[20] 일부는 이 편지가 거짓이라며 앙투아네트는 독일어만 쓸 수 있고 프랑스어라고는 결혼 시 배운 몇 마디가 전부라고 주장하지만, 14세에 시집와서 23년을 프랑스 왕비로 살았는데 프랑스어를 못 쓴다는 게 더 말이 안 된다. 게다가 합스부르크 가문은 외국어를 먼저 가르치고 모국어에 해당하는 독일어를 제일 마지막에 가르쳤으며 당시 프랑스어는 지금의 영어와 같은 국제 공용어였다. 더구나 아버지 프란츠 1세가 로렌 지방에 왔고 할머니 또한 프랑스 사람이었기에 오히려 앙투아네트는 독일어보다 프랑스어가 익숙했고, 프랑스에 시집오자마자 그나마 쓰던 독일어도 전부 까먹었다.[21] '짐은 그대들을 용서한다. 이후로 아무도 피를 흘리지 않았으면 한다.' 또는 '짐의 피가 프랑스 백성의 행복을 강화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였다고도 한다. 루이 16세가 자식들에게 마지막으로 한 말이라는 "내가 죽더라도 복수는 생각도 하지 마라" 를 가리킨 것일 수도 있다.[22] 당시 혁명 정부에 충성을 서약하지 않은 사제는 활동이 금지되었기 때문에, 마리 앙투아네트는 혁명 정부에 충성하는 신부를 인정하지 않았다.[23] 원래는 남편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 검은 상복만을 입고 있었는데, 혁명 정부가 "대중을 흥분시킨다"라며 금지했기에 하얀색 옷을 입었다. 실제로는 가벼운 흰 드레스와 가장 좋은 구두를 신었기에 그렇게 허름한 옷차림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왕족의 최후에 어울리는 화려한 옷이나 마지막이 아니었다는 점에서 천대받았다는 사실은 틀림없다.[24] 당시 화가인 다비드는 처형대로 끌려가는 마리 앙투아네트의 초라한 모습을 크로키로 남겼다.[25] 18세기의 유명한 망나니로 젊은 시절 바리 백작 부인과 만난 적도 있으나 나중에 그녀를 처형한다.[26] 바렌 사건은 큰 죄가 맞고 오스트리아로 도망친 것도 마리 앙투아네트의 영향이 있었던 것도 맞지만 이조차도 현대 기준은 물론 당시 기준으로도 참작이 가능한 배경이 있었다. 무엇보다 마리 앙투아네트가 사형을 선고받게된 결정적 혐의는 바렌 사건이 아니라 명백한 누명인 아들과의 근친상간이었기 때문에 마리 앙투아네트 입장에서 매우 억울한 게 당연하다.[27] 그러니까 단두대의 칼날과, 그것이 내려오는 모습이 보이도록 했다.[28] 휴거를 다룬 모 영화에서 이 장면이 재현된다.[29] 다만 후대 나치 독일 시절 나치는 실제로 이렇게 사형을 집행했다. 팔바일이라는 독일식으로 소형화된 단두대는 사형수를 수술대 내지 들것처럼 생긴 틀에 벨트로 묶은 후 틀째로 뉘어서 목을 잘랐다. 나치의 잔인성이 드러나는 부분 중 하나. 단두대 항목 참조.[30] 오늘날 부르주아라는 말은 부(富)와 사치의 이미지가 덧붙여진 상류층을 뜻하지만, 그 어원은 중세 작은 도시(bourg)에 거주하며 상업과 수공업에 종사하던 평민, 즉 사제와 귀족 다음의 제3신분이었다. 중세까지 이들 계급이 역사에 등장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다만 10세기경 유럽에 자유 도시가 생겨나면서 ‘부르주아’라는 말이 이런저런 기록에 얼핏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을 뿐이다. 역사적으로 유럽은 도시와 농촌의 대결이라는 긴장 관계 속에서 발전했는데, 결국 도시가 최종적 승리를 거두었다. 그것은 도시가 가진 부와 행정 능력, 도덕성, 특정한 삶의 방식, 혁신적 사고와 행동 덕분이었다. 결국 국가를 구성하는 모든 기능이 도시의 손에서 생겨나고 도시의 손을 거쳐 갔다. 자연스럽게 도시의 주민인 부르주아 계급은 차근차근 부와 지식과 교양을 쌓아가며 계급의 사다리를 오르는 상승 계급이 되었다. 돈과 교양과 여가를 갖고 있던 부르주아 계급은 18세기에 이르러 모든 문학과 학문, 사상을 장악했다. 계몽주의 사상가인 볼테르, 몽테스키외, 장자크 루소, 드니 디드로 등이 모두 부르주아 계급이다. 한 번도 역사의 주인공인 적이 없었으므로 그들의 사상이 반(反)역사적이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31] 다른 말로 설명하자면, 부르주아 계층이란 현대적인 표현으로 "시민(市民)계층"이다. '기도하는 자'와 '싸우는 자', '일하는 자'의 세 계급으로 구성된 중세 유럽의 사회상은 기본적으로 농촌을 기반으로 한 것이었다. 기본적으로 기사, 군인이었던 이들이 제 2계급인 귀족으로 영지를 다스리는 실질 권력을 행사하고, 지식과 문화 권력을 가진 사제들이 제1계급을 담당하였으며 주로 농민과 같이 실질적인 생산을 담당하는 이들이 제3계급인 평민으로 이들의 지배 아래 있는 구조였던 것이다. 그런데 막대한 부와 인구, 생산성이 집중된 도시라는 특수한 공간이 나타나 발전하면서 전통적인 1~2계급이 아닌 평민이지만 도시에 집중된 역량을 기반으로 부와 지식을 갖춘 새로운 계층이 나타나 발전하게 되었고, 이들이 바로 성 안에 사는 사람, 즉 부르주아라 불리게 된 것. 그리고 중세 이래 전통적으로 유럽의 권력을 가지고 있던 귀족층은 이들 부르주아를 "그래봤자 너희는 평민, 우리의 신하일 뿐이다"라는 관점에서 보았지만 반대로 신흥 부르주아들은 "이제 우리도 너희에게 뒤지지 않는 역량을 갖추었는데, 너희에게 고개 숙일 이유가 없다"고 기존의 질서에 불만을 가지고 저항하기 시작했던 것. 이것이 근세 수백 년간 유럽을 긴장시킨 기나긴 대립의 단초였고, 결국 여기서 도시와 부르주아가 최종적인 승리를 거둠으로써 '부르주아'는 부와 권력을 가진 상류층의 대명사가 되고, 시민(市民/citizen)은 단순히 도시 거주자가 아닌 정치적 주권을 가진 정치체의 구성원이라는 의미까지 가지게 된 것이다.[32] 프랑스어 원문은 브리오슈[33]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반(反)이민 행정 명령으로 수백 명의 무슬림이 공항에서 억류당했을 때, 그들 일가의 초호화 생활이 비난받았는데, 이때 이 말이 인용되면서 SNS에서 #letthemeatcake 운동이 불었다.국내 기사[34] 오늘날 프랑스 파리의 콩코르드 광장[35] 비난 여론뿐만이 아니라 당시 프랑스의 경제 상황은 상당히 좋지 않았다. 그 이유는 7년 전쟁으로 인한 경제적 피해를 복구하기도 전에 미국이 독립 전쟁을 일으키면서 프랑스가 뭐든 가리지 않고 지원해 줬기 때문. 자세한 것은 미국 독립 전쟁 참조. 게다가 프랑스는 이미 루이 14세 때부터 9년 전쟁,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과 같은 계속된 전쟁 인한 재정난에 시달리고 있었다.[36] 물론 이는 마리 앙투아네트와 루이 16세는 부르주아로부터 돈을 긁어낼 능력이 없었던 반면 나폴레옹과 조세핀은 그 반대라서 그랬을 가능성이 높았다. 즉, 정말로 마리 앙투아네트가 돈을 펑펑 썼더라도 돈줄이 있었으면 문제가 아니었을 텐데 문제는 그런 게 없었다는 말.[37] 마리 앙투아네트의 형제 자매들은 어머니 마리아 테레지아에 의해 대부분이 부르봉 가문과 정략결혼했다. 그러나 형제자매들의 결혼 대상은 스페인이나 이탈리아 반도의 파르마 공국, 나폴리-시칠리아 왕국 등 부르봉 방계이고 부르봉 가문의 본국인 프랑스 왕국으로 시집(장가)간 건 마리 앙투아네트가 유일했다. 게다가 루이 오귀스트(루이 16세)는 프랑스의 왕위 계승자였으니, 가히 마스코트라 할 만하다.[38] L'Autrichienne(로트리시엔)이라는 멸칭으로 불렸는데, 사실 이 단어 자체는 그냥 평범하게 '오스트리아 여자'라는 뜻이다. 하지만 'chienne'이란 단어가 '개(여성형)' 뜻이어서 사람들이 그 부분을 강조해 부르곤 했다고. 대충 '오스트리아 개년' 정도의 뉘앙스가 된다.[39] 서브컬쳐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이라면 눈치챘겠지만, Fate 시리즈의 등장인물인 플랫 에스카르도스가 스빈 글라슈에이트를 부르는 명칭이 '르 시엥'(멍멍이)이다.[40] 절대 왕정시대에서 왕자녀들과 가장 가깝게 지낼 수 있는 그들의 가정교사는 그 지위에 따른 권세와 혜택 때문에 대부분 왕실과 연이 있는 대귀족 중에서 뽑는 게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폴리냑 공작부인 그 어떤 기준에도 해당되지 않은 인물이었다.[41] 이때문에 마리 앙투아네트가 폴리냑 공작부인과 레즈비언 관계라는 소문이 널리 퍼지게 된다.[42] 드 칼롱은 이후 프랑스 혁명이 발생하자 프랑스 왕가가 오스트리아 황실과 내통을 하는 과정에서 역할을 수행하기도 한다.[43] 이는 결국 마리아 테레지아 사후 남매간의 관계가 뒤틀리는 결과를 낳는다.[44] 실제로 빈에서 앙투아네트를 가르치던 가정교사는 "뛰어난 자질을 가지고 있으나 열의가 부족하다"고 탄식했고, 이후 교육을 맡게 된 프랑스의 베르몽 대주교도 "모친과 같은 놀라운 지성과 이해력과 기품을 가졌지만 집중력이 부족하다"며 호평과 혹평을 동시에 했다.[45] 마리아 테레지아는 이전까지 막내딸에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던 점과 나라를 위해 결정한 정략결혼이 막내딸에게 해가 될지도 모른다는 큰 죄책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정략결혼을 한 다른 딸들보다 마리 앙투아네트의 결혼을 유독 불안해하다 결국 마리 앙투아네트를 떠나보내는 날에는 바닥에 쓰러지며 통곡했다.[46] 또 하나 주목해야 할 점은 부르봉 왕조와의 혼인동맹을 최우선 외교과제의 하나로 삼았던 마리아 테레지아의 외교적 대계에서 원래 마리 앙투아네트는 부르봉 왕조의 본가인 프랑스의 왕세자빈이 될 예정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처음에 프랑스로 시집갈 예정이던 것은 마리아 카롤리나였는데 마리아 요제파의 이른 사망으로 딸들의 결혼 순번이 한 칸씩 위로 밀리면서 앙투아네트가 프랑스로 시집가게 된 것. 마리아 테레지아는 친자식들도 차별할 정도로 편애 성향이 있었고 앙투아네트가 유아기일 때 7년 전쟁으로 정신없었다고는 하지만, 자신의 대계에서 핵심 중의 핵심인 프랑스 부르봉 왕조와 혼인할 딸의 교육일 줄 알았으면 아무리 바빠도 직접 챙겼을 가능성이 높다. 당장 원래 프랑스로 시집갈 예정이었던 카롤리나만 해도 정치에 무관심하고 무능했던 남편 대신 나폴리 왕국의 통치자로 군림했을 정도의 역량과 담력이 있던 인물이니 마리아 테레지아로써는 앙투아네트보다는 카롤리나의 교육에 좀 더 신경썼을 가능성도 있다. 그런데 요제파의 요절로 계획에 차질이 생겨 제대로 신경써서 가르치지 못한 막내딸에게 대계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맡겨야 할 상황이 되었으니 딸에 대한 걱정 뿐 아니라 나라 걱정과 자기 계획에 차질이 생긴 억울함 때문에라도 쓰러져 통곡하다 못해 기절할 지경이 되는 것이 당연해보인다.[47] 당시 마리아 테레지아도 장남 요제프 2세처럼 프랑스의 현실이 불안했던 걸 직감했는지 루이 15세의 서거 소식을 듣자마자 메르시 백작에게 마리 앙투아네트를 잘 지켜 달라고 부탁함과 동시에 딸이 행복했던 나날은 이제 끝났을지도 모른다며 내내 불안감을 감추지 못했다.[48] 완전히 결점 없는 피부는 아니었고 뺨에 희미한 곰보 자국이 있었지만 당시 이 정도의 흠은 흠이라고 말할 수 없었다.[49] 피를 빤 후의 벼룩의 색에서 유래했다는 것과 1775년 마리 앙투아네트의 새 드레스색을 본 루이 16세가 벼룩 같다고 말한 것에서 유래했다는 등 여러 유래가 있다. 현대에선 짙은 붉은색 또는 자주색과 갈색이 합해진 것, 회색이 섞인 자주색이나 분홍색, 적갈색 등을 넓게 통틀어서 부른다.[50] 마리 앙투아네트가 장녀 마리 테레즈 샤를로트를 낳았을 때, 루이 16세는 난산으로 고생한 마리 앙투아네트를 위해 선물한 궁전이다. 흔히 떠돈 소문과 달리 이 궁은 궁전치고는 제법 작은 편이고, 정원을 중심으로 하는 편안하고 수수한 곳이었고 마담 뒤 바리에게 받은 가구들을 비롯해 왕실에서는 적은 지출로 마련한 곳이었다. 마리는 여기에 자기 취향대로 궁전과 정원을 아기자기하게 꾸몄다.[51] 사실 마리는 프랑스 비단보다 영국 모슬린(면) 드레스를 좋아했는데, 당연히 프랑스 귀족들은 라이벌 국가인 영국산인 모슬린을 애호하는 왕비를 좋지 않게 봤다. 더 웃지 못할 사실은 나폴레옹의 아내 조제핀 드 보아르네도 모슬린을 좋아했고 영국과 무역 전쟁 중이던 나폴레옹이 뭐라 말하건 무시했다.[52] 당시 마리는 이 드레스에 무지 자신감을 가졌는지 손에 장미 1송이를 들고 밀짚모자와 흰 모슬린으로 만든 슈미즈 아 라 렌을 입은 왕비의 초상화를 야심차게 선보였다. 다만 이당시 슈미즈는 속옷 내지는 잠옷에 불과했고 옷의 재료인 모슬린이 문제였던지라 욕을 엄청 먹었고 할 수 없이 마리는 이 그림을 비공개 처리 하고 프랑스산 실크로 만든 드레스에 그림을 같은 구도로 재현한 위에 나오는 사진으로 대체되었다.[53] 실제로 마리 앙투아네트가 작곡한 것으로 추정되는 소품이 하나 있긴 하다. 음악은 오스트리아 대공국에 있던 시절 크리스토프 빌리발트 글루크에게 배웠으며 그 덕택에 글루크는 프랑스에서 활동할 때 마리 앙투아네트에게 후원을 받았다.[54] 당시 오스트리아는 합스부르크 가문의 적극적인 후원으로 요제프 하이든,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 등 여러 음악가들이 활동하였으며 이때 마리 앙투아네트도 어린 시절 연주 여행을 다니던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를 직접 만났는데 당시 7살의 모차르트가 어른이 되면 동년배인 마리와 결혼하겠다고 말했으나 어린애가 한 얘기라서 왕실 사람들은 모두 웃어 넘겼다는 설이 있다. 슈테판 츠바이크는 마리 앙투아네트 - 어느 평범한 여자의 초상에서 이 설을 후대에 센세이션을 노려 만들어진 조잡한 에피소드로 보나 나름 드라마틱한 이야기여서인지 만화 베르사유의 장미와 클래시컬로이드에서도 나온다.[55] 당시 마리는 로즈 베르탱에게 부탁해 무도회 용 드레스를 부탁했는데 발목을 보여 각선미를 강조하고 동양적인 분위기를 강조한 로브 아 라 시르카시엔느 드레스를 선보였다.[56] 비제 르브룅은 이후 아카데미 회원 자격도 얻게 되는데, 이를 두고 앙투아네트의 입김이 작용했다는 비판도 있었지만 앙투아네트가 손을 썼다고 해도, 그것은 비난받을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앙투아네트 왕비의 뛰어난 식견을 대변하는 조치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57] 당시 대부분의 유럽 국가들은 물 보급 문제나 물이 병을 유발시킨다는 미신 때문에 목욕을 무지 꺼렸다. 프랑스에서 향수 문화가 발달된 것도 바로 이런 이유. 게다가 당시 프랑스에서는 목욕을 격주로 하는 게 상식이었기 때문에 마리 앙투아네트가 1주일에 3번 목욕을 한다는 게 너무 사치스럽고 외국스럽다는 이유로 사람들에게 비판받았는데 나중에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기 직전에는 마리가 욕조에서 알몸으로 남자 손님을 받은 적이 있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58] 욕실은 1830년대에 해체되었으며, 1984년부터 복원이 시작되었다. 서양에서는 이 욕실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해서 집 욕실 디자인으로 꾸미는 사람들이 있고, 그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욕실 디자인을 적용한 프랑스의 한 호텔도 있다.[59] 장루이 파르종은 앙투아네트 이외에도 여러 왕실 및 귀족 인사들을 주요 고객으로 두었다. 특히 마리 앙투아네트가 트리아농 정원을 그대로 옮겼다고 평가한 '르 트리아농'은 현대에도 꾸준히 재해석된다. 실제로 베르사유 궁전에서는 천연 향료만을 이용해 18세기의 향수 제조법으로 만든 향수에 M.A. 시야주 드 라 렌(M.A. Sillage de la Reine)이라는 이름을 붙여 25ml에 350유로(고급형 8000유로)로 주문 판매 했다. BBC 기사, 한글 기사[60] 왜냐하면 당시의 감자는 오늘날의 것과 달리 맛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냥 토란 같은 식물 뿌리를 먹는 기분이라, 프로이센 왕국에서도 프리드리히 대왕이 자신의 식사에 감자를 올리는 모범을 몸소 보이고 나서야 백성들이 먹기 시작했다.[61] 만화 베르사유의 장미에서 주변의 소문만 듣고 마리 앙투아네트를 싫어한 로잘리도 직접 왕궁에서 만난 후 성모 같은 다정하고 아름다운 분이라고 평하는 씬이 나올 정도다.[62] 만화 베르사유의 장미와 이노센트 루즈에서 마리가 다이아몬드 목걸이 사기 사건과 프랑스 혁명을 겪고 민중들의 비참함과 분노를 알게 되어 충격 먹는 모습과 프티 트리아농에 초대받지 못한 귀족들과 민원조차 받지 않는 왕비에 대해 평민들이 대놓고 불평하는 장면이 나온다.[63] 카드 결제도 빚을 지고 물건을 샀다가 나중에 갚는 외상 거래 행위의 일종이지만, 카드값이 밀리거나 하지만 않으면 특별히 문제 있는 행위로 보이지는 않는 것과 같은 이치다. 요즘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큰 현금을 가지고 다니는 것은 귀찮은 일이었기 때문에 사회적 지위와 신용이 있는 인물이라면 외상 빚을 일단 달아뒀다가 나중에 정산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다.[64] 도박으로 돈을 따 가며 생활을 유지하는 건 몰락 귀족이나 방탕한 파락호, 즉 돈은 없지만 직접 일하기에는 사회적 지위가 다소 높은 사람들이나 하는 짓이었다. 심지어 귀족 출신의 군인들도 봉급만으로는 먹고살 수가 없어서 이런 도박사 노릇으로 생계를 유지하기도 했다. (뒤마의 삼총사나 포레스터의 혼블로워에서 이런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래서 귀족들이 "돈 있는 우리가 도박 놀이 하면서 아득바득 돈 따 가면 쟤들은 뭐 먹고 살라는 거냐?"는 의미에서 더욱 돈에 연연하지 않고 도박을 즐기기도 했다.[65] 이 소시민의 미덕이 도시 시민 계층의 미덕으로 이어지고 또 부르주아지의 미덕으로 이어져 근현대 사회의 미덕으로 자리 잡았다.[66] 이것이 중근세 시절 동양과 서양의 왕권의 본질적 차이이다. 유럽 군주는 귀족 중의 귀족이었던 반면, 동양의 군주는 귀족과는 차원이 다른 불가침의 존재에 가까웠다. 따라서 동양의 군주는 근검절약을 한다고 해서 왕의 카리스마가 실추되지 않는다. 오히려 백성을 배려하는 유교적 왕도 정치의 모범으로서 권위가 상승한다.[67] 루이 14세나 마리아 테레지아 등 절대 군주들이 베르사유 궁전이나 쇤브룬 같은 어마어마한 건축물을 과시하듯이 지은 것도 군주의 권위를 세우는 상징물 건설 → 왕권 강화 → 세금 더 뽑아내기 → 건축 무한 반복… 이런 식이었다.[68] 물론 유럽 사회의 왕실 분위기가 다 이와 같았던 것은 아니다. 루이 14세의 동생 오를레앙 공 필리프의 아내 팔츠의 엘리자베트 샤를로테는 루이 14세와 오를레앙 공을 비롯한 프랑스 왕실 인사들의 지나친 식탐과 과시적 사치를 에둘러 비판하며 "내 생각에 왕이라면 모름지기 자우어크라우트와 소시지, 맥주 수프와 같은 영양가 있지만 검소한 식단으로 사람들의 모범이 되어야 할 것 같은데 말이지…."라는 편지를 쓰기도 했다. 즉, 프랑스에 비하면 비교적 소국이었던 신성 로마 제국 팔츠 선제후국의 정서와 서유럽 최대의 대국이던 프랑스의 정서는 달랐다.[69] 오히려 소박한 이미지인 남편 루이 16세가 돈을 훨씬 많이 썼다. 루이 16세의 열쇠와 시계 만들기 취미는 당시 기술을 감안한다면 스위스에서 명품 부품 조달해서 고급 기계식 시계 만든다고 하는 것과 비슷한 수준이었다. 단지 개인적인 취미 활동이어서 티가 안 났을 뿐이다.[70] 한국의 모 학습 만화에선 "만화 베르사유의 장미에 나오는 착한 앙투아네트는 구라임"이라고 역으로 구라를 쳐버렸다. 이 대사는 루이 14세의 왕비였던 스페인의 마리아 테레사가 했다는 설이 있다. 그것도 세상 물정을 몰라서 한 말이라기보다는, 굶주린 백성들을 동정해서 '빵이 없다고? 그럼 어디서 케이크라도 구할 수 없을까?'라는 식으로 대책을 논의하는 말투였다. 마리아 테레사는 가문의 고질적 근친혼 후유증 탓에 그리 영리한 사람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성품은 선량한 왕비였다는 의견이 사학계에서는 대세이다. 또는 루이 14세의 서출 딸이 한 말이라고 주장하는 쪽도 있다. 어찌 되었든 간에, 일단 앙투아네트는 이 말을 한 적이 없으며 정작 이 말을 했다는 원조로 추정되는 여러 일화들도 "바보야,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으면 되잖아?"라는 투라기보다는 "빵이 없다고? 그럼 케이크(를 포함한 모든 부류)라도 먹게 할 수 없을까?"라는 투에 가깝다.[71] 증조할아버지가 사마의이다. 대체 중달의 피는 어디로?[72] '하불식육미'라고 읽는다. 직역하면 '왜 고기 죽을 먹지 않는가'[73] 아예 불가능한 얘기는 아니다. 이미 프랑스 혁명 전에 진 혜제의 일화가 기록된 자치통감강목이 프랑스어로 번역 출간 되었기 때문이다. 일단 당시 프랑스인들이 진혜제의 일화를 접하는 것이 완전히 불가능하지는 않은 상태였다.[74] 물론 진짜로 죽음으로 몰고 간 건 그녀의 잘못인 바렌 사건이 있다.[75] 정작 앙투아네트는 "다이아몬드가 갖고 싶으면 사주겠다"는 루이 16세의 말에 "지금 우리 왕국은 다이아몬드보다 군함 1척이 더 필요하다"고 개념 넘치는 답변을 했다.[76] 현대로 치면 RPF이다.[77] 다만 친정이 오스트리아라는 점을 고려하면, 친정 가족과 편지를 교환했다는 이유로 스파이라고 보기에는 현대 학자들도 어이없다는 반응이다. 당시 마리 앙투아네트처럼 외국에서 시집간 왕비들도 친정 가족들과 편지를 교환하고 지냈다. 이국의 땅에 와서 가족이 그리운 것은 남녀 불문하고 당연지사이고 거기다 사적인 내용을 담은 거지, 정치적인 내용이라든가 프랑스에게 위협이 되는 내용은 아무것도 없었다. "프랑스가 이렇게 되어가니까 조금 불안하다"는 내용 정도는 있었겠지만 이를 가지고 정치적 스파이라고 여기기는 어렵다.[78] 심지어 이미지만 그런 게 아니라서, 결혼 초반에는 진짜로 그랬다.[79] 사실 비슷한 시기 조선도 남자가 첩이 없으면 애처가 이미지가 아닌 공처가 이미지가 붙어버렸다. 그래서 양반 부인들은 적당한 여자를 첩으로 골라주어야 했고 청나라 황실에선 한술 더 떠서 정실인 적복진을 맞이하기 전에 첩인 측복진부터 들여야 했다. 일단 좁게는 남편과 자신의 체면과 명예가 걸린 문제고, 넓게 보면 자신의 친정까지도 가정 교육의 부실함을 빌미로 삼아 얼마든지 공격당할 가능성도 있었기 때문이다.[80] 그래서인지 누르하치의 적복진 소생인 도르곤은 측복진 출생인 이복형 홍타이지보다 나이가 어렸고 순치제 역시 측복진 출신인 이복형 호오거보다 나이가 적었으며 심지어 호오거는 도르곤보다도 연상이었다.[81] 사실 이건 어찌 보면 당연한 게, 바로 직전의 왕비였던 마리 레슈친스카는 폴란드-리투아니아 공주 출신인데 폴란드-리투아니아는 선거 군주정이었던지라 일반 귀족 가문 출신에다가 친정아버지 스타니스와프 레슈친스키는 폐위당한 상황이어서 부르봉 왕가의 종가인 프랑스 왕비로는 다소 처지는 가문 출신이었고, 그 전 왕비였던 마리아 테레사는 스페인 합스부르크 가문의 누적된 근친결혼의 영향으로 인해 지능에 다소 문제가 있었다.[82] 사보이아 가문의 방계 귀족이며 루이필리프 1세의 외삼촌이자 부르봉 가문 서자 출신인 랑발 공 루이 알렉상드르(20세에 죽음)의 아내. 참고로 랑발 공가는 이 사람과 당주인 루이 드부르봉이 죽어 1793년 남계가 단절되고, 나머지 재산은 1821년 루이필리프에게 간다. 이후 루이필리프의 아들인 샤를 도를레앙이 랑발 공-팡티에브르 공작 작위를 받지만 8살의 나이로 죽는다.[83] 아이러니하게도 루이필리프의 어머니는 이 사람과 반대로 부르봉 적자 가문인 오를레앙 왕가에 시집갔는데(이 가문이 상당히 유산이 많아 오를레앙 쪽에서 이를 노렸다.) 남편인 루이필리프 2세에게 좋은 대접은 받지 못했다. 뭐, 이 사람의 성욕도 한몫했고. 오죽하면 그 루이 15세까지 이 결혼에 대해 "저놈은 방탕한 놈이야. 그 결혼 다시 고려해 봐."라고 루이필리프 1세의 외조부에게(랑발 공비의 시아버지)에게 충고했다.[84] 혁명 후에도 마리 앙투아네트를 지킨 유일한 충신이었으나 안타깝게도 마리 앙투아네트의 가장 절친한 친구였다는 이유만으로 베르사유 습격 당시 납치되어 처참하게 살해당하고 그 머리는 마리 앙투아네트의 방 창문에 던져지는 신세가 되었다.[85] 폴리냐크 백작 부인은 프랑스 혁명 당시 마리 앙투아네트의 도움으로 국외로 피신하였으나, 마리 앙투아네트가 사형당한 후 곧 암으로 사망했다.[86] 심지어 이때 볼테르는 잔 다르크를 대상으로 한 적도 있다. 당연히 금서가 되기도 했지만, 실제로는 대중들이 몰래 구입해 읽어서 베스트셀러였다.[87] 근데 마리 앙투아네트는 이 사람을 좋게 보지 않았다. 라모트 백작부인 항목의 1.2 참고.[88] 사실 당대의 음란물 산업에서 절대 군주와 그 가족들은 거의 예외 없는 희생양이 되었다. 러시아 제국에서 예멜리얀 푸가초프의 반란을 잔인하게 진압한 예카테리나 2세가 가루가 되도록 까이는 이유도 비슷한 것이었으며, 유명한 예카테리나는 말과 함께 수간을 하다가 줄이 끊어져 깔려 죽었다는 서술 역시, 마리 앙투아네트 근친상간설과 같은 맥락에서 나왔다.[89] 공교롭게도 이 부분 역시 찰스 1세의 행적과 비슷하다.[90] 이는 아이를 바꿔치기하는 것을 막기 위한 조치이기도 했다. 물론 왕족의 출산인 만큼 완전히 '아무나'는 아니고 왕실의 계서제에 따라 입회 권한이 정해져 있었다. 옷을 입을 때도 이러한 계서제에 따라 하녀는 왕비에게 옷을 바로 줄 수 없었고 의전을 맡은 백작 부인에게 건넨 뒤 왕비에게 가야 했다. 도중에 그 백작 부인보다 더 높은 사람이 들어오면 다시 또 옷을 건네는 식이다. 이렇게 옷이 건네지는 동안 속옷 차림으로 있어야 했기 때문에 앙투아네트는 이를 무척 괴로워했다.[91] 참고로 성씨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당시 클로드 루이 엑토르 드빌라르와 방돔의 선배 장군인 루이 드부플레르 장군(1644-1711)과 같은 가문이다. 여담이지만 이 장군은 빌라르와 방돔에 가려진 능력자로 릴 공성전에서 패했지만 동맹군의 피해를 최대화해서 오죽하면 동맹군 앞에서 항복 조건을 직접 말했고 말플라케 전투에서는 65세의 고령에도 자기보다 어린 빌라르에게 지휘권을 넘기고 빌라르의 부상 이후 기병대를 지휘했다.[92] 처형 직전까지 덤벨로 근육 단련을 하며, 식사로 프로틴을 섭취한다.[93] 네년의 자식들도 갈기갈기 찢어서 길거리에 전시해 주마.[94] 본인 말로는 벤치 프레스의 바벨보다 못하다고 했으며 이후 이 단두대 칼날은 로즈 베르탱의 손을 거쳐 마리 전용 무기가 된다.[95] 루이 15세의 아들이자 왕태자였던 루이 페르디낭의 사생아라는 설정이다.[96] 이 순간에서는 마리는 베르사이유의 장미 애니메이션처럼, 싸늘한 피해자로 묘사된다.[97] 마리 테레즈 드 프랑스, 루이 17세[98] 정황상 튈르리궁에서 벌어진 1792년 8월 10일 봉기를 묘사한 듯하다.[99] 단두대로 걸어갈 때는 왕비로서의 기품을 잃지 않으나 단두대에 목이 고정될 때는 표정이 굳으며 두려운 기색을 보인다.[100] 아예 공식 홍보 SNS 계정을 재활용하기까지 했다.[101] 전술했듯이 시집온 지 7년이 넘도록 후계자를 낳지 못했었고 불운하게도 루이 16세 즉위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시동생인 아르투아 백작 샤를이 장남 앙투안 백작을 가지게 되었다.[102] 1편의 빌런 격인 시드 필립스가 한 짓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103] 독일의 유명 문학가인 요한 볼프강 폰 괴테도 마침 이 인도식이 있던 해에 학생으로 있었다가 이 광경을 보며 자서전인 '시와 진실'에 '신성한 결혼식에 끔찍한 행동이다'라고 기록할 정도였다.[104] 물론 꼭 그렇지 않은 게 부르봉 왕조에 대한 동정심이 강했으며, 마리 앙투아네트와 그 가족의 망명을 요청해서 그들이 살 집까지 마련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프랑스 대혁명 기간 중 친불 정권이 들어선 건 나폴레옹 집권 이후이다.[출처] 요모타 이누히코. 라블레의 아이들: 천재들의 식탁. 씨네21(주). 2009. p145-154[106] 현대에도 이 시절의 흔적이 남아 있다. 영국의 엘리자베스 2세는 조모인 테크의 메리 대왕대비의 친조모, 즉 본인의 고조모인 '클라우디아 레데이 폰 키스레데 여백작'을 통해 헝가리 혈통을 물려받았고, 이에 대해 긍지를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니콜라에 차우셰스쿠는 루마니아가 헝가리와 사이가 안 좋다는 이유로, 방영(訪英) 당시에 어전에서 헝가리 비하 발언을 일삼았다. 이에 분노한 여왕은 만찬 자리에서 고조모 클라우디아의 이름을 딴 요리를 차우셰스쿠에게 대접하는 것으로 응수하였는데, 차우셰스쿠는 무식해서 이 행동의 의미를 몰랐다.[107] 프랑스 최초의 형무소로 마리 앙투아네트가 처형 전 투옥된 장소이다.[주의] 공식적인 올림픽 행사임에도 불구하고 굉장히 고어한 연출이었다. 단면이 보이기 때문에 보는 사람에 따라 다소 섬뜩하게 느껴질 수도 있으니 링크를 열 때 주의. 물론 마네킹 조형물 아래에 사람이 머리를 내민 것이긴 하다.[주의] [110] 거기다 보통은 참수된 마리로 분장하는 경우, 기본적으로는 생전 그녀가 그랬듯이 우아하고 기품있는 치장을 하고 목 부분은 잘린 상처만 가볍게 그려서 묘사하는 등 대체로 잔인하기보다는 우아하고 예쁘게 분장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렇게 대놓고 머리 자른 걸 연출하는 건 실로 충격적이다는 반응이 대다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