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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사키 시키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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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리태니커 대백과사전 선정 세계의 여성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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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년 브리태니커 대백과사전은 세계사에 이름을 남긴 여성들을 선정했다.
긍정적 영향을 미친 여성들뿐 아니라 '세계사에 족적을 남긴 여성들'을 뽑았기 때문에 부정적인 인물들 혹은 논란 있는 인물들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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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 무라사키 시키부
[ruby(紫,ruby=むらさき)][ruby(式部,ruby=しきぶ)]|Murasaki Shikibu
파일:Tosa_Mitsuoki_001.jpg
본명 불명[1]
출생 불명 (973년?)[2]
일본 헤이안 시대 헤이안쿄
(現 교토부 교토시)
사망 불명 (1031년?, 향년 58세 추정)[3]
일본 헤이안 시대 헤이안쿄
(現 교토부 교토시)
직업 소설가, 시인, 가인, 여관
묘소 교토부 교토시 키타구
무라사키노 니시고쇼덴쵸(紫野西御所田町)
친족 아버지 후지와라노 타메토키(藤原為時)[4]
배우자 후지와라노 노부타카(藤原宣孝)[5]
자녀 다이니노 산미
장르 모노가타리일기문학, 와카
대표작 겐지모노가타리, 무라사키 시키부 일기

1. 개요2. 생애3. 백인일수4. 여담5. 미디어믹스

[clearfix]

1. 개요

일본 헤이안시대궁녀소설가이자 시인.

세계 문학사에서 영향력 있고 중요한 작가 중 한 명이며, 주요 작품으로는 현대 문학 개념에서 소설이라고 불릴 수 있는 작품 중 가장 초기의 작품인 겐지모노가타리, 무라사키 시키부 일기가 있다.

성은 후지와라(藤原)였으며, 이름은 불명이다. 궁중에서는 '후지 시키부'라고 불렸다고 한다. '무라사키 시키부'는 필명으로, '시키부'는 그녀의 아버지의 관직이자 그녀가 일반적으로 불렸던 이름에서 따오고, '무라사키'는 겐지모노가타리의 히로인 무라사키 노우에에서 따온 것으로 후대에 붙여진 이름이다. 시키부가 무라사키 노우에를 자신의 오너캐로서 생각하고 자신의 필명을 직접 이 인물에서 따와 "무라사키"라고 지었다는 설이 있으나 전혀 근거를 확인할 수 없는 주장이며, 무라사키라는 이름 자체가 시키부 사후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보므로 신빙성이 낮다. 다만 후지와라노 미치나가의 일기 미토간파쿠기에 등장하는 여방의 이름 ‘카오루코(香子)’가 일각에서는 무라사키 시키부의 본명이 아니냐고 추측을 하고있기는 하다.

필명의 한국식 한자 발음은 ""다.

2. 생애

후지와라 북가(北家) 계열의 한학자인 후지와라노 다메토키(藤原為時)의 집안에서 태어나, 어깨 너머로 배운 것이 남동생보다 뛰어났다[6]고 한다. 하지만 여성의 학재가 뛰어나면 여자답지 못하다고 여겨진 시대적 풍조 상 내성적이고 겸손한 성격이 되었다고 한다.[7]

일기에서 동시대의 여문이자 라이벌 격인 이즈미 시키부세이 쇼나곤 등의 뒷담화를 대놓고 썼는데, 특히 세이 쇼나곤은 와카와 한시를 잘하는 것을 뽐내다가는 말년에는 비참하게 되는 법이라며 엄청 헐뜯기도 한다.[8] 같이 쇼시 중궁을 모시는 이즈미 시키부는 황족과 스캔들을 일으키고[9] 귀족 사회에서나 그녀를 딸의 여방으로 고용한 후지와라노 미치나가까지 같은 평가를 할 정도로[10] 나댄다는 말을 많이 들었던 점, 세이 쇼나곤은 쇼나곤이 출궁한 이후 시키부가 쇼시의 여방으로 들어온지라 서로 만난 적은 없어도 성격이 맞지 않는 것과 더불어 다른 황후를 모신다는 점 때문에 라이벌 구도였다.

섭관시대 최고의 권력을 누린 후지와라노 미치나가가 딸 쇼시(彰子)를 이치조 덴노의 중궁으로 보내면서 세이 쇼나곤 등 당대의 재녀들을 시녀(女房)로 모은 형 미치타카의 딸인 기존 황후 후지와라노 테이시(定子)에게 밀리지 않기 위해 쇼시의 시녀로 교양있는 여자를 모집했고 여기에 무라사키 시키부가 뽑히며 궁중 생활을 접하게 된다.

중궁 테이시의 아버지 미치타카가 죽은 뒤에 미치타카의 동생 미치나가와 미치타카의 아들 사이에서 권력투쟁이 있었고, 여기서 승리해 최고권력자가 된 미치나가는 앞서 입궁한 조카 테이시를 황후로, 딸 쇼시를 중궁으로 만들었다. 원래 중궁=황후였는데 이 때부터 황후와 중궁을 구별하기 시작했다. 미치나가는 무라사키 시키부를 쇼시의 시녀로 초빙했고, 시키부가 쇼시를 섬기면서 쓴 것이 겐지모노가타리. 겐지모노가타리가 막 쓰여졌을 무렵에는 중궁과 다른 궁녀들 앞에서 구연되었는데, 이치조 덴노도 함께 들으면서 쇼시의 처소에 뻔질나게 드나들게 되었기 때문에 오히려 그것을 의도한 것 같다.

한편 무라사키 시키부의 일기에서 후지와라노 미치나가가 집적거렸음을 암시하는 내용이 여러가지 있는데[11] 본인은 절대 아니라고 강하게 부정하지만, 이 둘 사이에 모종의 관계가 있었을 것이라는 추측이 많다.[12]

덧붙여 후지와라노 긴토도 그녀에게 들이댔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후지와라노 긴토는 겐지모노가타리 팬이기도 했으며 아츠히라 친왕의 출생 50일 기념 축하연에서 시키부가 보이지 않자 궁녀들이 있는 휘장을 들추며 "어린 무라사키노우에가 여기 있는가"라고 시키부를 애타게 찾아 돌아다녔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정작 시키부는 긴토에게 전혀 마음이 없었는지 휘장 뒤에 숨어서 대답도 않고 "자기가 히카루 겐지도 아닌 것이 왜 들이대고 앉았지?" 하며 일기에서 깠다. 이 축하연이 11월 1일이었는데 긴토가 여방들이 있는 휘장을 들추며 시키부를 찾던 이 날로부터 천년 후인 2008년 11월 1일, 일본은 겐지모노가타리가 지어진 지 천년이 되는 이 날을 겐지의 날로 지정하여 문화행사를 가졌다. 정확히는 겐지모노가타리가 처음 언급된 날짜라는 데 의의를 두는 듯. 물론 마음에 둔 여자한테 까인 후지와라노 긴토에게 있어서는 두고두고 본인의 흑역사가 박제된 셈이다.

3. 백인일수

百人一首
백인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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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7번 무라사키 시키부(紫式部)
めぐりあひて [ruby(見,ruby=み)]しやそれとも わかぬまに [ruby(雲,ruby=くも)]がくれにし [ruby(夜半,ruby=よは)]の[ruby(月,ruby=つき)]かな
메구리아히테 미시야소레토모 와카누마니 쿠모가 쿠레니시 요하노 츠키카나
우연히 만나[13] 보았는가 아닌가 모르는 새에 떠나버렸네 구름 뒤로 숨어버린 한 밤의 달과 같이

4.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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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시마 타케오 무라카미 하루키 엔도 슈사쿠 세이 쇼나곤 요사노 아키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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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위부터는 링크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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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아사히신문에서 '지난 1천년간 일본 최고의 문인은 누군가?'라는 설문조사에서 2위를 기록했다. 1위가 나쓰메 소세키였다. 3위는 시바 료타로, 4위 미야자와 겐지, 5위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6위 마츠오 바쇼, 7위 다자이 오사무, 8위 마츠모토 세이초, 9위 가와바타 야스나리, 10위 미시마 유키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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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시적으로 발행했던 2000엔권 지폐의 뒷면(우측 하단)에 그려진 인물이기도 하다.

5. 미디어믹스



[1] 성은 후지와라(藤原)였으며, 이름은 불명이다.[2] 텐로쿠 원년(970년)에서 텐겐 원년(978년) 사이에 태어났다.[3] 칸닌 원년(1019년) 이후 사망.[4] 텐랴쿠 3년(949년) 출생, 쵸겐 2년(1029년) 사망으로 추정.[5] 출생불명, 쵸호 3년 4월 25일(1001년 5월 20일) 사망.[6] 한문가나 문장 양쪽을 다 쓸 수 있었다[7] 후지와라노 쇼시 중궁의 여방으로 궁중에 출사했지만 초기에는 궁중(단체) 생활에 적응하지 못해, 잠깐 본가로 돌아가기도 해서 동료 여방들은 시키부에게 중역출근(높으신 분처럼 출근하고 싶을 때 출근하는 것)이란 별명을 붙였다.[8] 시키부의 일기에 이렇게 써져있어서 세이 쇼나곤의 말년이 비참했다는 설화도 있지만 시키부의 헐뜯음과 달리 쇼나곤은 궁을 나간 이후 후지와라노 무네요와 재혼하고 그가 수령으로 취임한 셋쓰 지방으로 함께 건너가 무네요의 딸 코마노 묘부도 낳으며 편안한 말년을 보냈다.[9] 그것도 남편이 있는 상황에서 레이제이 덴노의 3황자 타메타카 친왕(爲尊親王)과 스캔들을 터트렸고, 타메타카의 사후 그의 친동생 아츠미치 친왕(敦道親王)의 구애를 받아 아들까지 낳는 지경에 이르렀다.[10] 일명 "나대는 계집(浮かれ女)"이라고 평가했다고.[11] 시를 읊으라고 하거나, 시끄러운 거 싫다고 방에 가 있더니 불러내거나, 밤에 찾아오는 등[12] 훨씬 후대이긴 하지만 이 둘이 모종의 관계였다는 추측은 무로마치 시대때부터 종종 있어왔는지 무로마치 시대때 발간된 역대 황.공가 귀족들의 가계도인 존비분파(尊卑分脈)에는 아예 대놓고 무라사키 시키부는 후지와라노 미치나가의 첩실이라고 기록이 되어있다. 다만 무라사키 시키부와 후지와라노 미치나가 살아생전에 발간된 사서는 아니기때문에 카더라에 불과할 수도 있다.[13] 巡り会う. 서로의 운명이 돌다가 만난다는 뜻인데, 한국어에는 이 뜻을 간결하면서도 온전히 전달할 수 있는 단어나 표현이 없다.[14] 먼저 언급되어 있듯, 무라사키 시키부도 귀족인 후지와라 가문의 자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