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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29 11:13:41

미시마 유키오


파일:아사히 신문 로고.svg 아사히 선정 지난 1천년간 일본 최고의 문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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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사히 신문이 2000년 투표로 선정한 "지난 1천년간 일본 최고의 문인"의 리스트이다.
<rowcolor=#fff> 1위 2위 3위 4위 5위
나쓰메 소세키 무라사키 시키부 시바 료타로 미야자와 겐지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rowcolor=#fff> 6위 7위 8위 9위 10위
마츠오 바쇼 다자이 오사무 마쓰모토 세이초 가와바타 야스나리 미시마 유키오
<rowcolor=#fff> 11위 12위 13위 14위 15위
아리시마 타케오 무라카미 하루키 엔도 슈사쿠 세이 쇼나곤 요사노 아키코
<rowcolor=#fff> 16위 17위 18위 19위 20위
모리 오가이 요시카와 에이지 오에 겐자부로 무라카미 류 이시카와 다쿠보쿠
<rowcolor=#fff> 21위 22위 23위 24위 25위
다니자키 준이치로 이노우에 야스시 미우라 아야코 아베 코보 다카무라 고타로
<rowcolor=#fff> 26위 27위 28위 29위 30위
후지사와 슈헤이 시마자키 도손 나카하라 츄야 고바야시 잇사 세리자와 고지로
31위부터는 링크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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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 미시마 유키오
[ruby(三,ruby=み)][ruby(島,ruby=しま)][ruby(由,ruby=ゆ)][ruby(紀,ruby=き)][ruby(夫,ruby=を)]|Yukio Mishima
<nopad> 파일:미시마 유키오.jpg
본명 히라오카 키미타케 ([ruby(平,ruby=ひら)][ruby(岡,ruby=をか)][ruby(公,ruby=きみ)][ruby(威,ruby=たけ)])
출생 1925년 1월 14일
도쿄부 도쿄시 요츠야구 영주 시내 2번지
(現 일본 도쿄도 신주쿠구 영주 시내 2번지)
사망 1970년 11월 25일 (향년 45세)
도쿄도 신주쿠구 이치가야혼무라초
육상자위대 이치가야 주둔지
국적
[[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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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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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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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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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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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 학력 <colbgcolor=#fff,#191919>가쿠슈인 초등과 (졸업)
가쿠슈인 중등과 (졸업)[1]
가쿠슈인 고등과 (졸업)[2]
도쿄대학 법학부 (법률학과 / 학사)[3]
신장 163cm
묘소 도쿄도 타마레이엔(多磨霊園)[4]
부모 아버지 히라오카 아즈사 (1894 ~ 1976)
어머니 히라오카 시즈 (1905 ~ 1987)
형제자매 여동생 히라오카 미츠코 (1928 ~ 1945)[5]
남동생 히라오카 치유키 (1930 ~ 1996)
아내 히라오카 요코 (1937 ~ 1995, 1958년 결혼)
자녀 장녀 히라오카 노리코 (1959년생)
장남 히라오카 이이치로 (1962년생)
장르 소설
등단 담배 (1946)
활동 기간 1946년 ~ 1970년 11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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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
2.1. 유년기 및 학창 시절2.2. 도쿄제국대학 입학 이후2.3. 작가로 등단 이후2.4. 미시마 사건
3. 성향과 평가
3.1. 작가로서의 평가3.2. 극우 사상가3.3. 2명의 미시마
4. 일화
4.1. 미와 아키히로와의 관계
5. 여담6. 한국에서의 평가7. 작품 목록
7.1. 장편 소설7.2. 단편 소설7.3. 희곡7.4. 비문학
8.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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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시마 유키오(三島由紀夫)는 일본소설가 이자 극작가, 사상가로, 독특한 인생과 작품 속의 심미관, 극우파에 몸담은 역사, 그리고 기묘한 최후로 잘 알려진 인물이다.

설국』으로 1968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호평을 받고 1946년 등단했다. 가와바타는 《인간》의 편집장 기무라 도쿠조에게 미시마의 원고를 보여주며 게재결정을 내렸다.〈연초〉는 6월호부터 발표되어 이것이 미시마의 전후 문단으로의 발판이 되어주었으며, 그 이후의 가와바타와의 생애에 걸친 사제관계와 같은 강한 인연의 기초가 형성되게 되었다.미시마는 가와바타를 스승처럼 대했고 가와바타 역시 미시마를 아꼈다. 그 때문인지 1970년 미시마가 자위대를 선동하려다가 실패한 뒤 할복자살하자(미시마 사건 항목 참조), 가와바타 또한 1972년에 의문의 죽음을 맞았다.[6]

2. 생애

2.1. 유년기 및 학창 시절

파일:external/1.bp.blogspot.com/Mishima_HighSchool.gif

▲ 가쿠슈인 고등과 재학 시절

일본의 대문호들 중에선 단연코 최고 수준 집안에서 금수저를 물고 태어났다.[7] 미시마 유키오의 집안은 조상 대대로 권력이 있었다. 그의 외가 조상 중에는 홋카이도 에조 공화국의 하코다테 지사였다가 메이지 시대의 고위공무원까지 된 나가이 나오유키도 있었다. 친가와 외가 모두 고위공무원이나 귀족 집안이다. 조부 시절부터 관료 집안으로 조부인 히라오카 사다타로(平岡定太郎, 1863~1942)는 제국대학(現 도쿄대학) 법학부를 거쳐 관료가 되었다. 참고로 증조부 히라오카 타키치(平岡太吉, 1833~1896)는 에도막부 시절 히메지번에 속한 하리마국(現 효고현)의 농민이었으나 아들 둘이 메이지 유신을 거치면서 뛰어난 머리로 단숨에 상류층으로 신분상승하였다.[8] 참고로 미시마 유키오의 큰 할아버지인 히라오카 만지로(平岡萬次郞)도 변호사 겸 정치인으로 제국의회 중의원 의원 4선을 했었다.

할아버지는 내무성 관료로 후에 제17대 후쿠시마현 지사와 가라후토청(樺太廳)[9] 장관까지 지낼 정도로 고위 관료가 되었다. 또한, 부친인 히라오카 아즈사(平岡 梓, 1894 ~ 1976)도 도쿄제국대학 법학부를 거쳐 고등문관시험 수석 합격을 했는데, 그런 이들이 대개 초일류 관청인 대장성(現 재무성, 한국의 기획재정부 격)에 간 것과 달리 이류 부처인 농림성(現 농림수산성, 한국의 농림수산식품부 격)에 가긴 했으나 성내 최고위직인 수산국장까지 올라간 고위관료였다. 거기에 변호사 자격증도 가지고 있던 엘리트였다. 할머니 나가이 나쓰(永井なつ, 1876 ~ 1939)[10]는 무가 집안 출신으로 아버지는 대심원판사(大審院判事)[11], 어머니는 아나호번(宍戸藩)의 번주인 마쓰다이라 요리타카(松平賴位)의 서녀였기에 상당한 귀족집안 출신이었다.[12] 귀족적인 배경을 가진 할머니는 미시마의 어린 시절 엄격한 훈육과 과보호를 했다고 한다. 미시마의 어머니인 시즈에(1905~1987)는 한학자이자 카이세이중학교의 교장을 지낸 하시 겐조(橋 健三, 1861~1944)의 둘째 딸로 문학적인 재능이 뛰어난 여성이었다. 미시마의 아버지인 히라오카 아즈사가 카이세이중학교를 거쳐 제1고등학교(現 도쿄대학 교양학부)를 거쳐서 도쿄제국대학에 입학했던 인연으로 혼인하였다. 이 정도의 혈통과 인맥, 조부, 부친, 본인의 학력과 경력 등을 감안하면 혈통이 중요시되는 일본 사회/일본 정치 특성상 마음만 먹으면 N선 의원, 한 술 더 떠 총리도 가능할 정도로 일본의 상류층 중에서 황족 다음가는 권세와 스펙을 가졌다.[13]

미시마 유키오는 어릴 때부터 몸이 병약했는데 또래 친구들이 한창 뛰어놀 나이에도 몸이 약해서 아침조회를 하다가 살짝 어지러워 쓰러진 적도 몇번 있었다. 결국 병원에 찾아가자 의사가 직사광선을 웬만하면 피하라고 권고했다고 한다. 원래 당시에도 고위관료였던 할아버지 빨로 학교에서도 교장이나 평교사 할 것 없이 신경 쓰던 학생이 키미타케였는데, 이 의사의 진단 이후로 할머니가 학교에 직접 찾아가 교장선생에게 "몸이 약한 우리 키미타케에게 태양볕을 맞아야 되는 아침 운동장 조회 같은 것은 앞으로 절대 시키지 말라." 하고 면전에서 강하게 요구했고, 당연히 그때부터 미시마 유키오는 모든 선생님들의 보호를 받으며 운동장 조회를 공식적으로 다 빠졌다.

가뜩이나 왜소한 데다가 건강도 안 좋은데 의무적으로 햇빛도 자주 피하고 살다보니 얼굴색이 항상 새하얗다 못해 창백하기로 유명해서, 미시마를 안 좋아하던 아이들 사이에서 별명이 "창백"이었다고 하는데, 그러나 명문가 집안의 가오를 잃지 않겠다는 신념이 있었는지, 당시 유키오의 동창들이 훗날 증언한 바로는 못된 아이들과 시비가 붙어도[14] 기세에 밀린 적은 없었다고 전해진다. 초등학교 6학년 때 덩치 크고 짓궂은 반 애가 방과 후 집에 가려고 하던 미시마 유키오에게 "야, 창백이, 넌 불알도 창백하지?"라고 놀렸다고 한다. 그러자 화가 난 유키오는 기세 좋게 바지 단추를 풀어 그것들을 꺼내 "봐라! 봐!"라고 하면서 당당히 공개했다고 한다. 그래서 당황한 그 아이가 뻘쭘해져서 말도 제대로 못하고 어버버하다가 집에 갔다고 한다.[15]

2.2. 도쿄제국대학 입학 이후

앞에서도 상술했지만 조부때부터 3대가 누구나 선망하는 최고학부인 도쿄제국대학 법학부고등문관시험에 합격한 엘리트 출신이었다. 우리로 치면 서울법대를 졸업하고 사법시험+행정고시에 합격한 셈이다.[16] 미시마 유키오 역시 조부와 부친처럼 어릴 때부터 공부 잘하는 걸로 유명해서[17] 고등학교를 전교 1등으로 졸업하고[18] 도쿄제국대학 법학부에 들어갔다. 참고로 아직 대학생일때 일본이 패망해서 제국 칭호를 쓰지 않게 되었기에 도쿄제국대학으로 입학해서 도쿄대학으로 졸업했다.[19]

그러나 그는 이후 문학에 더욱 심취하여, 아들이 관료가 되기를 원한 아버지와 마찰을 빚게 되었다.[20] 그러나 미시마는 아버지와의 갈등 속에서도 여러 잡지에 단편 소설을 출판하고 문학인들과 어울리며 문학도의 길을 착실히 걸어나간다. 그러나, 고위관료였던 할아버지는 비리 사건에 연루되어 장관직에서 잘리고[21]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망하면서[22] 집안 사정이 나빠졌다. 이에 따라 미시마 역시 취업을 준비하게 되어 대학을 졸업하던 해인 1947년 여름에 유명한 은행 두 곳의 시험을 봤으나 탈락했다.[23]

결국 미시마는 아버지처럼 고등문관시험에 응시하여 졸업 직후인 겨울에 합격한 뒤 대장성[24]에 입성해 관료가 된다. 그러나 문학에 대한 열정을 포기하지 않고 공무원 생활 중에도 계속 글을 써 보내고 잡지사 등에서 출판하는 것을 병행했고 이런 겸업 체제가 길어지다 보니 원래 선천적으로 약했던 건강이 더 나빠지기까지 했다. 여기에 글쟁이들이 고위 공무원으로 잘 살 수 있는 자기 아들을 계속 배고픈 길로 부추긴다는 생각에 성질이 난 아버지는 1948년에 그전부터 아들의 글을 실어주고 있던 출판사 가마쿠라 문고[25]를 찾아가, 출판사 편집자에게 "아니 지금 당신들, 이제 24살(만23세) 된 어린 내 아들 키미타케(미시마 유키오)가 남들보다 글 조금 더 능숙하게 쓴다고 게이샤처럼 너무 오구오구해 주는 거 아니오? 뭐 걔가 나중에 시이나 린조(椎名麟三, 1911 ~ 1973)[26]라도 될 거 같소?"라고 항의했다.실제로 그리 됐다. 이에 편집자 기무라 토쿠조(木村德三, 1911~2005)[27]가 "아사히 신문에 소설 연재할 실력은 될 겁니다.[28] 화려한 (스타) 작가가 되고 말고 하는 거야 자기 운에 달린 거긴 합니다만, 최소한 일류작가가 될 역량은 충분합니다."라고 하자 못마땅한 얼굴을 한 채 집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2.3. 작가로 등단 이후

그 후에도 미시마는 계속 문학 활동과 공무원 생활을 병행하며 몸이 약해졌는데, 하루는 출근길에 기차역에서 과로로 쓰러져 플랫폼 밑으로 굴러 떨어지는 바람에 죽을 뻔했고[29], 이 일에 충격을 받은 아버지[30]는 미시마가 공무원을 그만두는 것을 허락했다. 그리하여 1948년 9월, 열 달 만에 공무원 생활을 그만두고, 본격적인 작가의 길에 들어가 1949년 가면의 고백으로 화려한 데뷔를 하였다.

이후 과거 그의 작품 활동을 지원한 기무라 토쿠조의 "일류 작가가 될 역량은 충분히 가지고 있다"는 그 말대로 엄청난 판매량을 기록하며 일류작가 겸 최고 스타작가가 되었다. 그는 전후문학의 총아로 왕성하게 활동, 소설과 극본 외에도 방송이나 잡지, 영화 등에도 자주 출연하고 대중적 주목을 받게 된다.

한국 드라마 중 괜찮아, 사랑이야시카고 타자기 같은 작품을 보면 유명한 젊은 작가가 거의 연예인 스타처럼 나오기에, 한국에는 그런 스타일의 작가가 없는데[31] 그렇게 표현하는 건 현실성이 떨어진다는 비판이 있었지만, 당시 미시마 유키오는 고작 20대부터 정말 그 드라마의 주인공들처럼 쓰는 작품마다 히트시키고 여러 문학상 수상으로 문학성의 인정까지 모두 받으며, 온 언론과 방송의 주목으로 진짜 연예인 스타 같은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32] 어쨌건 정말 어렵다는 대중성과 문학성 둘다 확실히 거머쥔, 찰스 디킨스를 비롯한 대중적 스타작가의 계보를 잇는 아이콘.[33]

그는 30대의 젊은 나이에 노벨문학상 후보에 올라 해외에서도 큰 주목을 받는다.[34] 미시마는 노벨문학상 후보자로 입에 오르내리던 1960년대에 오에 겐자부로를 가리켜 "내가 상을 받은 다음에 노벨문학상을 받을 사람은 오에뿐이다"라고 주장했다. 정작 본인은 1970년 자살한 탓에 수상하지 못했지만, 오에가 1994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함으로써 예언은 절반 정도 들어맞았다.

정치적으로는 극단적인 천황주의자여서 좌파 학생운동의 전성기에도 언론을 통해 학생들을 마구 질타하기도 했으며, 기존의 우익 정치세력에도 가차없는 비판을 퍼부었다.[35] 1960년대 중반부터 일본에서 국군의 필요성을 제기하며 자위대의 젊은 장교단, 정부 신진관료들과도 어울렸고, 자위대에 체험입대하여 공수부대 훈련을 받거나, F-104 전투기를 타는 따위 기행을 벌였다. 한국에도 수차례 비공식적으로 와서 휴전선을 시찰하거나 무장간첩들의 침투 루트 등을 탐방했고, 68년 울진-삼척 무장공비 침투사건 중엔 예비군공비 수색 작전을 참관하기도 했다고 한다.[출처불명] 그러한 경위로 나중에는 그와 뜻을 같이 둔 젊은이들로 이루어진 사설부대를 만들기도 했다. 이름은 다테노카이(楯の會, 방패회). 천황의 방패란 의미다. 참고로 이웃나라 한국의 5.16 군사정변을 모델로 한 정변을 계획한 적도 있지만 무산되었다.

파일:external/www.chosun.com/200603310896_01.jpg

1969년 도쿄대학 야스다 강당을 점거한 전공투들과 만나 청중 1천여 명 앞에서 2시간 반가량 대담을 진행했다. 전공투 학생 수백 명을 상대로 혼자 설전을 펼쳤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사실이 아니다. 실제로 대담에 참여한 것은 전공투 측의 패널 3-4명과 청중 중에서 발언한 몇 명 정도로, 대담집에 실린 전공투 측 발언자는 도합 8명이었다.# 그는 "천황만 인정하면 너희와도 함께하겠다." 라고 자신의 입장에서는 나름의 넓은 배포를 보여주기도 했지만 전공투들이 그것을 받아들일 리가 있나. 그는 전공투가 지향했던 사회주의의 계급 타파에 대해 "당신들 속에 있는 절대적인 것에 '덴노'라는 이름을 붙여도 되잖아?" 라고 말하며 천황제 인정을 양보로서 제안했다.[37] 그리고 설전에서 전공투 학생들은 동의하지 못하면서 미시마에게 '그건 궤변이다'를 반복해서 외쳤다.

당시 전공투들과 벌인 대담은 일본의 극좌 vs 극우를 비교하는 자료로 등장할 때가 잦다. 특이한 건 서로가 일본의 현체제를 부정한다는 데에 견해를 같이 하면서 묘한 공감대를 보인다는 것. 미시마 본인도 이 대담이 매우 즐거웠다고 대담 후기에서 언급했고, 패널로 참가했던 전공투도 같은 이야기를 하는 걸 보면 뭔가 본인 구미에 맞는 만족감을 얻고 간 모양이다. 이 대담은 이후 TBS 테레비에서 방영되었고 책으로도 출판되었다.(TBS 요약본: #1, #2, #3, #4, #5) 전공투의 증언으로는 대담집 출판은 미시마가 혼자 결정하고 진행한 일이라고 한다. 한국에서도 <미시마 유키오 對 전공투 1969-2000>라는 책으로 번역되어 나왔다. 전공투해당 문단을 참고할 것.

이런 인간이면서도, 군대는 안 갔다. 2차대전 때 징병 소집장을 받고 신체검사를 받았으나, 젊은 군의관이 청진을 할 때 폐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서 결핵으로 오진하고 군 입대에 부적합 판정을 내렸다. 문제는 오진인 줄 알고서도 끝까지 그 결과대로 묵인했다는 것이다.[38] 병역비리치킨 호크의 대표적인 예이다.[39] 역시 집안 빽이#

2.4. 미시마 사건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미시마 사건 문서
번 문단을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파일:external/2.bp.blogspot.com/200px-ScarlettJohanssonFeb07.jpg

1970년 11월 25일, 미시마 유키오는 자신을 따르는 방패회(다테노카이) 멤버들 중 4명과 함께 육상자위대 총감실을 습격하여 총감을 인질로 잡고 발코니에 올라 일본의 정치적 궐기를 촉구한 후 방패회 멤버들 중 모리타 마사카쓰와 같이 할복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향년 45세.

3. 성향과 평가

3.1. 작가로서의 평가

문학적 능력은 뛰어나 일본문학사에서 손에 꼽는 천재 작가로서 작품들 역시 굉장한 가치를 보여주고 있다.

그의 유명한 작품들은 병약했던 시절에 썼던 탐미주의적인 작품들이다. 가장 유명한 게 금각사이다.[40] 그 외에도 '가면의 고백'과 '파도소리', '우국'이 있는데 가면의 고백은 등단작인 동시에 작가로서의 명성을 안겨준 작품이며 우국은 자기가 직접 영화로도 만들었다. 우국의 배경은 일본 2.26 쿠데타이다.

그는 일본 문학사에서 매우 중요하게 다뤄질 정도로 유명한, 일본에서 한 손에 꼽을 정도의 대문호이며 일본뿐만이 아니라 한국을 포함한 해외 문학계에서도 많이 언급될 만큼 주목받는 엄청난 작품들을 쓴 사람이다. 그가 정치적 성향을 통해 대중들에게 알려지고 영향을 줬던 것도 그의 작품들이 워낙 유명해서 그것을 바탕으로 정치활동을 한 것이지, 원래 정치활동으로 유명해진 작가가 아니다. 단순히 정치활동으로 책 팔아먹는 사람이었다면 노벨문학상 후보에 감히 이름을 올리는 것조차 불가능하며, 심지어 한 번도 아닌, 도합 다섯 차례나[41] 노벨문학상 후보에 올랐던 인물이다.# 언어, 민족을 초월하여 미시마만큼 인간의 오묘하고 세세한 감성을 혼란스레 표현하지 않고 담백하면서도 흐리지 않게 제대로 표현한 작가가 드물다는 평가를 받을 만큼 탐미주의 문학에서 독보적으로 천재적인 재능을 보여주며 50~60년대의 일본문학을 대표하였던 작가이다.

과격한 정치적 행보와는 달리 '파도소리'처럼 연애소설도 있다. 한국에서도 일본 문학을 전공한 사람들 및 일본 문학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은 그의 작품은 좋아하고 높은 평가를 내리는 경우가 많다. 사실 평범한 독자 입장에서도 동시대의 오에 겐자부로와 비교하면 미시마의 책이 더 쉽게 읽힌다. 갓 스물을 넘긴 작가가 묘사하는 중년 여성, 노년 남성의 심리와 그 심리를 상징하는 온갖 은유들을 읽으면, 문학에 천재가 있긴 있구나 싶은 생각이 들 정도.

이 때문에 할복 자살만 아니었다면 아마 노벨문학상을 탈 수 있었을지 않았을까?[42] 하는 반응이 있을 정도로 명필이다.

한국에서는 일종의 밈처럼 보이는 이미지로 인해서 우스꽝스러운 이미지지만, 실제로 그를 이런 이미지가 아닌 소설로 먼저 접한 이들은 대부분 이런 저런 논란은 제쳐두고 글만 봤을 때는 틀림 없는 천재이며, 다시 나오기 힘든 문장가라고 생각한다. 특히나 그의 소설들이 번역돼서 나온 시기에 접한 이들은 미시마 유키오의 탐미주의 세계에 빠져있었다.

3.2. 극우 사상가

미시마 유키오에게 천황이란 결국 자기 작품에 지나지 않는단 말이야!
ー1969년 5월 13일 도쿄대, 미시마 유키오와의 토론 도중 한 전공투의 발언.

미시마 유키오의 사상은 기본적으로 극도의 탐미주의에 기초한다. 즉, 미(美)의 중심을 정하고 이를 위하여 무엇이든 희생하고 행할 수 있는 사회를 우선적으로 여기는 초기 파시즘과 유사한 형태다.

미시마 유키오의 독특한 정치철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미시마라는 인물의 내면에 대해 살펴봐야 할 필요가 있다. 미시마는 전쟁 당시에도 천황을 위해 죽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으나 하지 못한 것에 대해 후회하는 감정을 평생 가지고 있었고, 이것이 그의 죽음을 앞당기는 데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미시마가 보기에 전쟁이 끝난 뒤 고속성장 시기에 접어든 일본은 과거의 전통적인 가치보다는 소시민적 행복을 중요시하는 분위기가 팽배해 있었으나, 미시마는 전쟁 당시의 상황을 아름답게 추억하고 있었으며 또 하가쿠레 같은 옛 사무라이의 규범을 미덕으로 여겼기 때문에 그러한 분위기에 대해 불만을 품고 천황을 위해 명예롭게 죽을 수 있던 일본을 부활시켜야 한다는 생각을 가졌던 것 같다.[43] 미시마가 꿈꾸던 일본은 천황이 군대의 통수권을 지니고 공화제와 비슷한 정치제도와 언론의 자유가 보장되는 사회라고 한다. 그러나 천황이 절대권력을 가진 것과 진정한 공화제, 언론의 자유는 양립하기 어렵다는 점에서[44] 미시마의 세계관은 모순을 가지고 있었다.[45]

미시마는 '무사도'의 관점에서 군국주의를 비판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무사도란 '개개인이 대등한 관계에서 죽음의 위험을 무릅쓰고 일대일로 대결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런 그의 관점에서 파시즘은 그렇지 못한 것으로 보였기 때문에 비판을 했다.[46]

해외에서는 와패니즈의 영향으로 꽤 호감도가 높다. 유명 유튜버인 PewDiePie[47]가 가장 존경하는 인물을 미시마로 뽑았을 만큼 미시마가 이상향으로 그리던 죽음의 대한 철학과 신념을 행동으로 보인 결의에 존경을 표하는 평가가 주를 이룬다. 다만 미시마의 극우 민족주의적 성격 때문에 이런 반응에 대해 일본에서도 거부반응이 있는 편이다. 무라카미 하루키뉴욕 타임즈와의 인터뷰에서 인터뷰어가 미시마 유키오를 언급하는 것을 두고 불쾌함을 비추며 단호하게 선을 긋는 답변을 한적 있다.
질문자: 일본의 전통적인 소설 양식인 사소설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합니까?
하: 오에 겐자부로 씨의 소설은 비교적 열심히 읽었습니다. 그 외에는 별로 읽은 게 없군요. 작가로서는 아베 코보를 좋아합니다. 사소설은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킬 만큼 싫어합니다. 내가 가장 싫어하는 분야의 소설이에요. 일본의 문단에서 가장 많은 영향력을 행사하는 작가는 아베 고보, 미시마 유키오, 오에 겐자부로 인데, 그들 가운데 나는 아베가 최고이고 미시마가 최악이라고 생각합니다.

3.3. 2명의 미시마

미시마 유키오의 인생은 2가지로 양분할 수 있다. 50년대 중반부터 웨이트 트레이닝 같은 헬스로 근육질이 된 30대부터의 미시마와, 헬스를 하기 전 병약했던 젊은 히라오카 키미타케가 그것이다.

20대 중반의 등단 초기에는 그야말로 작품 집필에 미친듯이 몰입하였고, 히트소설이 연달아 많이 나오자 TV와 신문에 자주 나오는 등 20대 후반~30대 초반부터는 문학계 원톱급 인기스타가 되었다. 그리고 이때부터 본인의 왜소한 외모[48]에 신경을 많이 쓰게 되어 운동을 결심한 것이다. 픽픽 쓰러지던 병약 체질을 지속적이고 열정적인 관리로 몸을 단련해서 근육질 몸매를 만들었다.

병약한 몸으로 금각사를 쓸 때만 해도 정치적인 성향은커녕 인간의 내면 자체에만 관심을 두었고, 권력이나 집단은 인간의 섬세한 가치를 단순화, 사물화하여 훼손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한다. 이랬던 사람이, 극도로 자기 신념에 몰입하고 정치적으로 변해버렸으니...미시마의 표변이 어찌나 심했던지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도대체 어떤 게 미시마의 진짜 모습인지 몹시 혼란스러워했다.

건강해진 뒤에는 헬스 운동의 효과를 찬양했는데, 1958년에는 검도에 입문하여 일본 무도에 크게 심취했고, 이후 거합도공수도에도 발을 담갔다. 최종적으로는 검도 5단, 거합도 2단, 공수도 1단.[49] 미시마가 자살할 때 쓴 세키노 마고로쿠라고 불리는 칼은 미시마와 검도로 친분을 쌓았던 제2차 세계 대전 참전자 후나사카 히로시에게서 받은 것으로, 미시마 사건 3년 뒤인 1973년 후나사카는 『세키노 마고로쿠-미시마 유키오, 그 죽음의 비밀』(関ノ孫六―三島由紀夫、その死の秘密)이라는 책을 저술하여 순박했던 시절 미시마 유키오와의 추억을 회고하며 미시마가 어떻게 그러한 인간이 되었는가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4. 일화

4.1. 미와 아키히로와의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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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와 아키히로가 애인이라는 설이 퍼져있지만 실제로 연인관계는 아니었고, 서로 친밀하게 교류하던 사이였던 것은 맞다. 미시마 사후 미와 아키히로의 회고에 따르면 거의 우정에 가까운 관계로 보는 것이 적절해 보인다. 16살때 바에서 노래하던 미와를 미시마가 불러내면서 만남이 시작되었는데, 미시마가 “별로 귀엽지 않네”라고 하자 “귀엽지 않아도 괜찮아요“라고 받아쳤다고 한다. 이 당돌함에 흥미를 느껴 계속 만남을 이어갔다고. 참고로 미시마 유키오는 일명 미시마 사건으로 극우 소설가로 유명했던 인물인데, 미와 아키히로는 극우를 넘어 정치적인 행보를 보인 적은 없다[57]. 여러 일화를 볼 때, 미시마는 미와의 연인이 아니고 미와와 친분을 나누고 후원을 해주는 후견인 역할이었던듯.

미와와 관련된 일화에는 재밌는 것이 많은데, 미시마가 "마루야마(미와 아키히로의 본명)군. 당신에게는 한 가지 결점이 있다. 그것은 나에게 반하지 않는 것이다."라고 말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미시마는 후카사쿠 킨지 감독의 영화 《검은 도마뱀》에 출연한 적도 있는데, 출연 동기가 '검은 도마뱀' 역으로 출연한 미와 아키히로와 키스하고 싶어서라는 이야기도 있다.

더불어 미시마는 육체와 관련된 콤플렉스가 많았기 때문에 미와 아키히로가 이를 놀릴 때마다 화를 냈었는데, 미와와 무도장에서 춤을 추다가 미와가 미시마의 어깨, 팔뚝을 만지며 "어머나, 패드, 패드밖에 없네, 미시마 씨 어디 있나요??"라고 웃으며 농담을 던지자 미시마는 버락 소리치며 "파트너 교체다, 나는 가겠다." 하곤 뒤도 안 돌아보고 떠난 후 헬스클럽에서 육체미 운동을 시작했다고 한다. 링크

1998년 3월 17일자 조선일보 기사에 의하면, 미시마 유키오는 작가인 후쿠시마 지로(福島次郞)와 1951년에 처음 만나, 동성애 관계를 맺었다고 한다. 2009년 9월 25일자 동아일보에도 보도되었다. # 후쿠시마 지로는 문예지인 문예춘추에 실명 소설 <미시마 유키오―검(劍)과 한홍(寒紅)>를 발표해서, 자신이 미시마와 주고 받은 편지와 동성애에 탐닉했던 일을 고백했다. 이때에 후쿠시마 지로는 미시마가 자신에게 보냈던 연서의 내용을 공개하기도 했다. 그 가운데에서도 1964년 2월, 미시마가 후쿠시마 지로에게 보낸 편지에서 "좌익에는 남자의 매력이 없다"라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58]

5. 여담

2000년 아사히 신문에서 '지난 1천년간 일본 최고의 문인은 누군가?'라는 설문조사에서 10위를 기록했다. 1위는 나쓰메 소세키였다. 2위는 무라사키 시키부, 3위 시바 료타로, 4위 미야자와 겐지, 5위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7위 다자이 오사무, 8위 마쓰모토 세이초, 9위 가와바타 야스나리였다.#

미시마 유키오는 일본인으로는 드물게 영어 실력이 좋기로도 유명했는데, 그 때문에 외신기자들과 여러 차례 영어로 인터뷰를 하기도 했다. 당시 영어공부를 위한 매체가 부족했던 시절인지라, 그는 매일 어학 LP판을 들으며 독학으로 회화실력을 쌓았다고 한다. 지금까지 남은 인터뷰를 들어보면, 윈스턴 처칠같은 당대의 상류층 영국인과 비교하면 완벽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20세기 초중반 보수적 용인발음에 가까운 억양을 아시아인임을 감안했을 때 현대 기준으로도 꽤나 훌륭하고 자연스럽게 구사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영어 인터뷰 영상 하지만, 1958년에 스스로 "저는 영어회화를 잘하느냐 못하느냐는 인간의 가치와는 무관한 일이라고 항상 역설하고 있습니다."라고 밝히기도 했다. 그는 영어 이외에도 중국어독일어, 프랑스어도 구사할 수 있었다.

그는 몸을 헬스를 통해 근육질로 만든 후 사진집까지 만들었다. 그것도 대부분 훈도시를 입고 일본도를 들거나 나무에 매달려 화살을 맞는 사진이 대부분이다. 화살을 맞으며 하늘을 바라보는 포즈를 취하는 사진은 서양에서 수없이 변주된 성 세바스찬 성화의 오마주다. 그런데 성 세바스찬은 일종의 BDSM 게이 클리셰로 쓰이는지라, 많은 이들이 그가 게이임을 주장한다. 게이바를 실제로 드나들었는데다가 자신이 연인이었다는 일본 중견 소설가의 증언도 있었다. 그의 자전적인 소설이라 여겨지는 가면의 고백에서도 성 세바스티아누스의 성화를 보고 정신, 육체적인 최초의 사정을 경험한 걸로 묘사된다. 결혼한 것을 들어 양성애자가 아니냐는 의견도 있으나 사회적 압박[59] 등의 이유로 결혼하는 성소수자도 있으므로 그것만으로는 단정하기 힘들다. 가면의 고백이 그의 동성애적 정체성을 고백한 소설이라는 의견도 있다.
파일:external/farm2.static.flickr.com/526504064_c23cc435ea.jpg 파일:external/24.media.tumblr.com/tumblr_llewfysA5I1qh6tkco1_500.jpg

대영박물관에도 일부 사진이 있다고 한다.

그러나 당대 미시마 유키오의 신체에 대한 평가는 그리 좋은 편이 아니었다. 163cm 밖에 안 되는 단신에다가[60] 본격적으로 헬스를 하기 전까지는 깡마르고 병약한 허약체질이었다. 언젠가 일본 여성들에게 인기 설문조사를 한 적 있었는데, 그 결과가 굉장히 나빴다고 한다. 게다가 운동신경도 몹시 안 좋은 편이라서 아무리 운동을 잘 해보려고 열심히 노력해도 여전히 뻣뻣하고 어색했다고 한다. 늘 건강미를 동경했던 그에겐 이런 사실이 큰 컴플렉스로 작용했다고 한다.

그는 거합도를 오랫동안 수련했는데, #1은 미시마의 거합도 시범 영상이고 #2는 평범한 거합도 1단의 시범이다. 검술에 지식이 없는 사람이 봐도, 미시마가 휘두르는 검의 무게를 제대로 지탱하지 못하며 검으로 베는 동작과 검을 정리하는 동작을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절도가 없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오래 수련한 거합도 시범에조차 닭 한마리 잡지 못할 정도로 힘 없고 어설픈 모습이 드러나니 누구나 쉽게 컴플렉스의 근원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영화배우로도 활동해서, 도쿄대 법학부 선배였던 마스무라 야스조가 연출한 《카라카제 야로》에서는 찌질이 야쿠자 역으로 출연하여 화제가 되기도 했고, 자신의 소설 《우국》을 영화화 할 때에는 본인이 출연은 물론 직접 연출, 각본, 제작까지 했다. 이 영화는 독립영화 제작사로 유명한 아트 시어터 길드에서 배급됐다. 1969년작. 《히토키리》라는 사무라이 영화에서는 이시하라 유지로와 함께 출연했다.

에도가와 란포의 '검은 도마뱀'을 각본화하고, 박제로 출연한다.(1968년)

한동안 일본에서는 언급조차 하면 안 되는 위험한 인물이다. 앞서 쓴 것과 같이 정부 관료, 자위대 간부들과의 관계와 그의 주장 탓에 한동안 자위대내 쿠데타설이 불거질때마다 그의 이름이 언급되었고 그때마다 일본 정치인들은 가슴을 쓸어 내려야 했다.

하지만 2005년경, 즉 그의 탄생 80주년이자 사망 35주기부터 그를 동경하는 극우파들의 테러 가능성이 우려되어 다시 주목받았으나, 결국 별 탈 없이 넘어갔다.

그는 다자이 오사무가 살아있을때부터 비판하는 수준을 넘어 혐오했는데, 다자이 오사무를 비판하는 글을 쓰면서 우선 그의 외모부터가 마음에 안든다고 할 정도였다. 그리고 다자이 오사무가 자살하자 신나게 조롱하며 깠다. 그는 다자이를 향해 그의 우울증은 매일 라디오 체조만 해도 낫는 병이라고 비웃었다. 그런데 정작 자기도 할복.[61] 다자이 사후 그의 제자가 따라 자살했는데 미시마의 사후에는 그의 스승이 자살(추정)했다는 것도 묘한 대조를 이룬다.[62] 물론 그 의도와 차원이 다르게 할복이었기에 세계적으로 엄청난 뉴스가 되었다. 미시마가 생전에 다자이를 그렇게 깐 이유는 공교롭게도 그의 내면이 다자이의 내면과 비슷해 동족혐오가 들었기에 더 깐 것이라고 둘 사이의 지인들이 분석했다.

특히 그들의 소설 《인간실격》과 《우국》은 각자의 자살의 동기에 대한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는데, 자전적인 소설 《인간실격》이 다자이의 자살동기, 즉 스스로의 삶에 대한 부끄러움을 그대로 드러내보이고 있는 데 반해, 《우국》은 미시마의 컴플렉스, 즉 젊은 시절의 병역기피와 동성애성향을 극복하는 (그의 생각에는) 이상적인 죽음, 주인공인 젊은 장교는 사랑하는 아내와 검열삭제한 후 할복자살하는 내용을 그리고 있다.

해외에서는 노벨문학상에 가장 가까운 자리에 있다고 하던 젊은 문인이 정치적 이유로 할복자살한다는 게 상당한 문화충격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래서 나중에 폴 슈레이더 감독이 미국 자본과 함께 "미시마 - 그의 인생"이(1985년작)라는 그의 전기 영화도 만들기도 했다.[63] 폴 슈레이더의 최고작으로 평가받고 있으며, 걸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로저 이버트, 레너드 말틴이 극찬하기도 했다.

그의 작품 대부분이 주요 외국어로 번역되었고 그의 드라마틱하고 쇼킹한 생애와는 별개로 그의 작품들은 해외(주로 영국, 프랑스, 독일등의 유럽국가)에서 꾸준히 읽히며 좋은 평가를 얻어 오고 있다.

생전에 미국의 SF 및 판타지 소설가인 A. E. 밴보트를 상당히 좋아했다고 한다. 밴보트가 '전미 과학소설 및 판타지 작가 협회'로부터 <거장 상>을 받을 당시에 후배 SF 작가 리처드 체딕이 지은 헌정시에도 미시마 유키오가 언급되고 있다.[64] 이 시는 황금가지에서 2004년에 출판한 <오늘의 SF 걸작선>에 실려있다.

디시인사이드 독서 마이너 갤러리에서 '갤주'로 추앙받으며 컬트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존재이다. 미시마 유키오의 알몸 사진만 올리면 곧바로 념글로 직행할 정도.

대체역사소설인 《비명을 찾아서》에서는 환갑까지 살아 1986년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철권 시리즈미시마 가문의 성은 여기서 따왔으며, 특히 미시마 카즈야는 좀 더 직접적으로 미시마 유키오를 모티브로 했다.

고두익의 "숲속수학" 시리즈에서는 마신 같은 존재로 등장한다. 5편에서는 선생님이 미시마의 날을 맞아 축구선수를 꿈꾸는 철수를 제물로 바치는 이야기가 나오고, 8편에서는 두통을 겪던 태훈이의 대가리를 쪼개 경주빵을 꺼냈더니 태훈이가 미시마가 되었다. 부활한 미시마는 집단자위권에 기뻐하며 다시 배를 갈랐다. 그 외, 고두익의 작품 중 KATANA(감상주의)중촌 산악회에서도 등장했다.

스페인의 미니어쳐게임인 인피니티에서 유징 제국이 일본을 세계 2차 대전 수준으로 비참하게 만든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이 양반의 사상을 받아들인 극우 테러 조직들이 유징 제국에 대항한 테러를 일으켜서였다. 그 결과 유징 제국은 현재의 중국과 다를 게 없거나 더 심한 수준의 경찰 국가로 변했다. 그리고 어찌어찌 독립은 했으나 유징 제국은 이에 인정을 안 하고 있고, 사회상은 영락없는 중세 잽랜드다.

쓰레기와 안경과 문학소녀(가짜)라는 만화에서도 언급되었는 오리카와가 동성애에 관한 소설을 찾는다면서 모리야가 가면의 고백을 추천해줬다.

2019년 12월 부임한 주한 일본대사 도미타 고지의 장인이다.

거스 밴 샌트 감독이 2000년도에 만든 영화 파인딩 포레스터 도입부에 주인공 자말 월러스가 책상 위에 엎드려 자다가 깨는 장면이 나오는데 책상 위에 미시마의 책들이 놓여 있다. 향연이 끝난 후, 파도 소리, 새벽의 사원, 오후의 예향[65] 4권이다.

6. 한국에서의 평가

대한민국에서는 그의 극우적 사상과 충격적 최후로 인하여 부정적 인식이 매우 강하다.

김지하는 그의 죽음에 대한 시 '아주까리 신풍-미시마 유키오에 대하여'를 다음과 같이 쓰며 평가절하 하였다.
별것 아니여
조선놈 피 먹고 피는 국화꽃이여
빼앗아 간 쇠그릇 녹여 벼린 일본도란 말이여
뭐가 대단해 너 몰랐더냐
비장처절하고 아암 처절하고말고 처절비장하고
처절한 신풍(가미카제)도 별것 아니여
조선놈 아주까리 미친 듯이 퍼먹고 미쳐버린
바람이지, 미쳐버린
네 죽음은 식민지에
주리고 병들고 묶인 채 외치며 불타는 식민지의
죽음들 위에 내리는 비여
역사의 죽음 부르는
옛 군가여 별것 아니여
벌거벗은 여군이 벌거벗은 갈보들 틈에 우뚝서
제멋대로 불러대는 미친 미친 군가여.
토지의 저자 박경리는 미시마 유키오를 예를 삼아 얄팍한 로맨티시즘이 한계에 도달하면 결국 죽을 수밖에 없는 일본적 미학의 얄팍함의 표상이라며 비난한 적 있다.

현 시점에서도 그는 극우 사상을 설파하고 할복하는 충격적인 최후를 맞은 탓에 대한민국 내에서는 미치광이 극우라는 이미지가 더 강하며 작품도 그리 대중적으로 읽히지 않는다.

당연하지만 그의 작품을 높이 평가하는 사람들이 전부 우익사상에 찬동하는 건 아니다. 실제로 ‘금각사’의 주인공이 마지막에 자살을 택하지 않은 행동과 그의 최후가 위반되는 만큼 청년시절의 미시마와 흑화한 내셔널리즘의 중년 미시마는 다른 사람이라는 문학적 분석이 많다. 오히려 찬양받던 청년시절의 그가 쓴 ‘금각사’의 주인공과 반대되는 활동을 한 것이다. 기득권 세력과 결탁한 기존의 우익 세력에 정면으로 반기를 들고 좌익 학생들과 단신으로 토론을 벌이는 등의 기개나 논리의 치밀함에 대해서는 대체적으로 인정하는 분위기다.

한편 한국의 작가 이문열이 자신이 좋아하는 단편소설들을 몇몇 주제로 묶어 '세계 명작산책'이라는 이름으로 단편집을 내놓았었는데, 그 중 죽음을 주제로 한 소설집, '죽음의 미학'에 미시마 유키오의 '우국'을 포함시키기도 했었지만 2020년에 나온 개정판에는 '우국'이 빠졌다

소설가 신경숙이 '우국'을 표절했다는 논란이 있다. 이 표절논란이 크게 문제가 되는 이유 중의 하나는, 일본의 극우작가인 미시마 유키오의 글을 표절(적어도 신경숙 본인은 아니라고 하지만)함으로써 그의 사상을 그대로 배껴왔다는 점에 있다. 또한, 문학계는 이 논란에 적절한 비판이나 제재를 가하지 않고 제 식구 감싸기에만 혈안이 되어있다는 비판을 받았다. 신경숙이 현대 한국 문단에서 차지하던 위치는 그렇다고 치더라도 문학계 내부에서 일어난 논란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함으로써 문학계의 위상을 크게 실추시켰다. 더군다나 한국 문단에서는 예나 지금이나 사회 문제에 많은 비판을 가하는데, 자신의 문제는 등한시하며 어찌 사회에 제대로 된 비판을 가할 수 있느냐는 의견도 있다. 자세한 내용은 신경숙 문서 참조.

한국어 번역본 중에서 가장 탁월하다고 평가받는 것은 신경숙이 표절한 시인 김후란의 역본이다. 시인 특유의 격조 있는 문장이 원문이 가진 힘을 생생하게 전달하고 있는 탁월한 번역이어서 굉장히 높은 평가를 받는다. 문제는 이 역본이 80년대 후반에 학원사의 세계문학전집에 포함되어 출간된게 마지막으로 이후 재간이 이뤄지지 않아 가격이 어마어마하게 높다. 어느 사이트, 어느 판매자건 기본 30만원부터 시작한다.[66]

국회도서관에 절판도서 검색 후 제본 신청하면 4만원 조금 안 되는 가격으로 배송받아 읽을 수 있다. 참조

7. 작품 목록

미시마는 일문학에서도 손꼽히는 다작 작가로, 45세에 생을 마감할 때까지 단편소설 156편, 장편소설 36편, 희곡 및 시나리오 73편 및 기타 에세이와 비평, 대담 등을 400편 이상 남겼다. 그 외에 영화 출연, 작사, 사진집, 강연 등 다방면에서 활동했기에, 이를 전부 적는 것은 불가능하며, 장편소설을 제외한 나머지는 일부 작품만 기재한다.

7.1. 장편 소설

주요 작품은 볼드체로 표기 / 한국어 번역본 존재 시[한] 이라고 표기
<rowcolor=#fff> 제목 발간 연도 비고
도적
盗賊
1948년 [68]
가면의 고백[한]
仮面の告白
1949년
순백의 밤
純白の夜
1950년
사랑의 갈증[한]
愛の渇き
푸른 시절
青の時代
나쓰코의 모험[한]
夏子の冒険
1951년
일본제
につぽん製
1953년
금색[한]
禁色
파도 소리[한]
潮騒
1954년 [74]
사랑의 수도
恋の都
여신
女神
1955년
가라앉는 폭포
沈める滝
행복호 출범
幸福号出帆
금각사[한]
金閣寺
1956년 [76]
너무 길었던 봄
永すぎた春
비틀거리는 여인[한]
美徳のよろめき
1957년
교코의 집
鏡子の家
1959년
연회가 끝나고[한]
宴のあと
1960년 [79]
아가씨
お嬢さん
짐승들의 유희[한]
獣の戯れ
1961년
아름다운 별
美しい星
1962년
사랑의 질주
愛の疾走
오후의 예항[한]
午後の曳航
1963년
육체의 학교
肉体の学校
비단과 명찰
絹と明察
1964년 [82]
음악
音楽
복잡한 그
複雑な彼
1966년
미시마 유키오 레터 교실[한]
三島由紀夫レター教室
1967년
야회복
夜会服
목숨을 팝니다[한]
命売ります
1968년
풍요의 바다 연작[85]
豊饒の海
봄눈[한]
春の雪
1967년
달리는 말[한]
奔馬
1968년
새벽의 사원
暁の寺
1970년 [88]
천인오쇠
天人五衰
1971년

7.2. 단편 소설

7.3. 희곡

7.4. 비문학

8.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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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구제중학교이다.[2] 현재의 중등교육기관의 고등학교가 아닌 구제고등학교이다. 패전 이후 가쿠슈인 대학과랑 통합하여 가쿠슈인대학이 설립이 되었다.[3] 재학 중에 본토 제국대학들의 교명에서 '제국'이 전면 삭제되어 졸업은 '도쿄대학'이라는 이름으로 했다. 대학 동기였던 아베 신타로도 같은 케이스다.[4] 묘는 본성인 히라오카 가족묘(平岡家之墓)에 안장되어 있다[5] 장티푸스로 불과 만 17세에 요절했다.[6] 사인은 가스중독으로 미시마 사건으로 받은 정신적 충격 때문에 자살했다는 설이 대중적으로 잘 알려졌고 또한 유력한 견해이다. 다만 다른 이유로 자살했다는 의견도 있고 과실로 인한 사고사라는 주장 역시 계속해서 제기되고 있어 가와바타의 죽음은 여전히 미스터리로 남아있다.[7] 물론 다른 대문호들 중에도 부모가 대지주나 사업 성공을 한 부유층 자녀는 꽤 있었지만, 미시마 쪽은 부, 명예, 권력 셋 다 가진 완벽한 상류층이라 그네들과는 수준이 달랐다. 오죽 최고 수준의 금수저였으면 어릴 때부터 교사들뿐 아니라 교장까지도 학생인 그의 눈치를 봤을 정도다. 다자이 오사무 정도가 그나마 금수저로서 미시마와 견줄 만하지만 그래도 미시마 쪽이 명예적인 부분이나 종합적인 면에서 더 우위에 있다고 할 수 있다.[8] 단 신분이 상류층이 된 것이지 이 사람은 넓은 땅과 많은 돈을 가진 부농이었다. 또한 고리대금업으로도 큰 돈을 벌었기도 하다. 신분은 농민이었어도 돈은 많았으니 자식 둘을 공부에 전념시킬 수 있었던 것.[9] 일본이 러일전쟁에서 승리하여 가져온, 북위 50도 이남 남사할린 지역을 다스리던 관청이다.[10] 홋카이도 에조공화국 설립에 참여한 나가이 나오유키의 직계 증손녀라고 한다. 나가이 나쓰가 어렸을 때 증조할아버지는 무려 에도막부 후반기와 메이지 유신 초반기의 권력자 중 하나였다. 막상 나오유키는 에조 공화국 때 망하면서 항복하게 생기자 할복자살을 하려다가 포기했다고 한다. 사실 에조 공화국 설립은 엄연히 심각한 쿠데타라서 그들이 항복한 뒤에 법대로 다 죽였어야 했지만, 그들이 항복하자 희한하게도 메이지 덴노는 공화국 설립자들의 능력을 높이 사서 용서만 한 게 아니라 중요한 관직을 주었고 권력자로 만들어 주었다. 단, 나가이 나오유키 자체는 하급 영주의 서자이자 중급사무라이인 하타모토 계급의 양자였기에 어떤 귀족 적통 집안 같은건 아니다.[11] 대심원은 근대 일본의 최고 사법기관으로 전후 일본의 최고재판소로 이어진다. 한국의 대법관쯤 되는 높은 자리에 있었던 셈이다.[12] 이런 집안 배경 때문에 남편 사다타로를 은근히 무시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남편 역시 귀족만 아니지 결코 꿀리는 집안이 아니었음에도.[13] 실제로 그의 친구였던 이시하라 신타로는 스타 소설가로서의 이력 덕에 자민당 8선 의원과 4선 도쿄도지사를 역임했다.[14] 물론 권세 있는 가문의 아이를 폭행했을 리는 없으니, 물리적 충돌은 없었던 것이고 그저 기싸움 개념으로 말로만 시비를 자주 걸었던 모양이다. 그와 관련된 많은 기록에 초등학생 시절에 주먹다짐을 했다는 기록은 없다.[15] 미시마 유키오의 어릴 때부터 친구이자 화가인 미타니 마코토가 훗날 미시마 유키오에 대해 쓴 회고록인 "급우(친구), 미시마 유키오"에 나오는 내용이다. 미타니 마코토가 당시 옆에서 그 사건을 보면서 느꼈던 회고의 글은 "남색 교복 배경에 튀어나온 그것이 체격에 비해 생각보다 커서 놀랐다."[16] 과거 일본의 고등문관시험은 이 정도의 지위를 보장하는 시험이었다. 조선인 고등문관시험 합격자들은 해방 후에 행정부 관료, 판검사, 변호사가 될 수 있었고, 심지어 선택과목으로 법을 공부하지도 않았는데 변호사 자격이 주어진 경우도 있었다.[17] 초등학교 때 같은 반에 별로 친하지 않던 친구가, 반에 새로 부임한 교사가 왔을 때 "히라오카 상(미시마 유키오)은 태어날 때 일도 기억해요!"라고 말한 적도 있을 정도로 머리가 좋은 걸로 전교에 유명했다고 한다. 한 일화로 미시마 유키오의 자서전격 소설로 유명한 가면의 고백에 주인공의 언급으로, 자신이 아기였을 때 머리를 씻기려고 물을 담아놓은 대야에 머리가 닿는 느낌이 들었다고 써 있다. 물론 자서전격 소설이 완전한 자서전은 아니니 진짜인지 알 수야 없지만.[18] 이에 대한 증거가 미시마 유키오가 졸업식 연사를 했던 사진인데 당시 일본은 전교 1등이 졸업식 연사를 했기 때문에 이 사진이 미시마가 전교 1등이라는 증거가 된다. 또한 덴노로부터 금시계도 받았다고.[19] 도쿄제국대학이 도쿄대학으로 개칭된게 1947년 9월이었는데 미시마 유키오는 대학 이름이 개칭되고 2개월이 지난 1947년 11월 28일에 법학부 법률학과를 졸업했기 때문에 개칭된 이름으로 졸업학력이 남게 되었다.[20] 미시마의 아버지는 미시마 유키오의 방에 들어가 써놓은 원고를 찢어버릴 정도로 아들이 문학의 길을 걷는 걸 탐탁지 않아했다. 그런 상황 속에서 어머니인 시즈에가 미시마를 위로해 주면서 미시마가 계속 문학의 길을 걸을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21] 후에 증거 불충분으로 무죄가 나왔다.[22] 당시 일본 내부경제는 전쟁자금 부족으로 2차대전 말기에 공무원 월급도 밀리거나 안 주고, 멀쩡한 회사 공장을 군부가 빼앗아서 군수물자 공장으로 바꾸는 등 엉망진창 개판이었고 종전 후에도 수습하느라 나라가 거지꼴이었다. 거기다 고위관료들도 공직에서 추방되고 재벌도 해체되며 군인들도 일본군이 자신들이 해체한 대한제국군마냥 해체되면서 전부 다 실업자가 되는 등(물론 나중에 자위대가 형성되며 그곳으로 흡수된 이들도 많다) 일본의 엘리트 계층들이 죄다 나가리가 되는 상황이었다. 상류층도 이런데 서민들의 상황이 어땠을지는 두말할 필요도 없다.[23] 필기시험은 다 합격했으나 최종면접에서 떨어졌다고 한다. 이는 전후의 처참한 경제상황 속에서 도쿄대 법학부 출신이라도 일자리를 구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24] 이미 문학활동을 병행하던 관계로 합격자 중에서 성적은 좋지 않았다고 한다. 합격자 167명 중 138등으로 합격했다. 물론 졸업 직후 바로 합격을 했다는 것, 게다가 계속 글을 써서 출판하는 것과 고등문관시험 공부를 병행했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그렇게 겸업을 하면서도 국가 고시에 합격한 것 자체가 이미 대단한 거다.[25] 태평양 전쟁 말기에 출판계 사정도 갈수록 악화되는 가운데 '전쟁으로 황폐화된 민심을 어떻게 밝게 비추어 줄 오락거리를 제공하자'는 취지로 당시 가마쿠라에 거주하던 문인들이 자신들의 장서를 각출해 세운 책 대여점에서 시작해 패전 뒤에 출판사로 발족했다. 유키오는 여기에 1945년부터 글을 기고하였다. 엔도 슈사쿠도 1948년에 이곳에서 잠시 촉탁으로 근무하며 <20세기 외국 문학 사전> 편찬을 도왔다. 1949년에 도산했다.[26] 일본의 소설가. 참고로 일본에서 몇 안 되는 기독교 신자였다. 한국에는 <내가 아는 그리스도>만이 유일하게 번역되어 있다.[27] 패전 뒤인 1946년 1월에 가와바타 야스나리와 함께 당시 가마쿠라 문고의 문예지 <인간>을 창간하고 편집장을 맡았다. 오다 사쿠노스케가 이 사람의 고등학교 후배다.[28] '아사히 신문에 연재 소설은 쓸 수 있겠네'라는 말은 단순한 덕담이 아니었다. 당대 아사히 신문 정도의 메이저급 언론에 소설이 연재된다는 것은 당시 작가들이 선망하는 소설가로써의 최고의 영예이기도 했다. 그 나츠메 소세키가 아사히 신문에 소설을 연재하면서 작가로써 이름을 떨쳤다.[29] 다행히 기차가 올 시간보다 한참 전에 쓰러진 거라 기차에 치일 일은 없었고, 역무원과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놀라 잡아주면서 기어 올라와서 살았다고 한다. 이후 병원에 옮겨져 입원을 했었다.[30] 입원한 미시마 유키오의 손을 붙잡고 "소설이 너한테 대체 뭐길래 그러냐"며 울었다고 한다. 엘리트 집안에서 무난히 기대한 대로 엘리트로 성장한 아들한테 엘리트 공무원으로 가족의 위상을 다시 살릴 거라는 기대가 워낙 컸던 집안이기에 충격이 더 컸었다.[31] 일단 문학성과 대중성이 둘다 압도적인 젊은 문학가가 전혀 없고, 그걸 이루는 문학가들은 거의 중년 이후에나 유명해지고 나서야 비문학적인 사회활동을 병행한다. 그나마 공지영 정도가 30대 초반부터 대중성을 크게 잡았고 문학성도 인정은 받았으나, 작품마다 히트를 치지는 못했고 문학성에서도 온전히 최고로 인정받지는 못했다. 그래도 그나마 한국에서는 저 드라마 주인공 스타일에 제일 가깝다[32] 게다가 당시가 TV라는게 나온지 얼마 안 되어 TV용 연예인(영화 배우나 무대용 연예인들의 부업 같은 느낌)이라는 직업 장르가 정확히 잡히지 않아, 연예인이 아닌 다른 분야 유명인들이 TV로 더 인지도를 치고나갈 여지가 현대보다 훨씬 크게 있던 것도 사실이다.[33] 본래 19세기 대중소설의 개념이 등장하는 시대에 등장한 여러 대중소설작가들은 낭독회를 바탕으로 어마어마한 인기를 누렸다. 한국도 1980년대까지는 유명한 소설가는 연예인급 인기를 모았다. 일제시대 이광수의 인기는 말할 것도 없고, 1970년대 최인호의 인기는 어마어마 해서 거의 아이돌에 가까웠다. 이문열 역시 1980년대 연예인급 소설가로 명성이 높았다.[34] 노벨상 후보에 오른 것은 사실이지만, 이는 미시마 사후에야 공개된 사실이다. 노벨 재단은 당대에는 수상 후보자를 공개하지 않으므로 당시 노벨상을 받을 만한 인물로 세간에서 거론될 만큼 인정받는 작가였다는 의미 정도로 생각하는 게 맞다.[35] 좌파 성향 학생들이 그들과 대립했음에도 그에게 관대했던 이유이기도 하다.[출처불명] [37] 사실 이게 정말로 천황제 중심의 군주국가를 지지하는게 아니라는 것은 쉽게 알 수 있다. 미시마는 보수 우익과 아무 관련이 없는 일종의 극우 혁명가였는데, 전공투들의 '경제적 목적'을 인정할테니 다른 부분과 손잡자는건 좌-우익의 혼합사상, 즉 제3의 위치이다. 나치즘과는 상관없는 대중주의 파시즘, 혹은 민족 볼셰비즘인 셈이다. 기타 잇키가 덴노를 절대적인 존재로 세우는 대신, 덴노의 말과 행동을 민주적으로 선출된 인사들이 통제하게 해 대중들의 뜻이 '신적인 권위'를 가지게 하는 전체주의 국가를 구상한 것을 생각해보자.[38] 미시마의 자전적 소설인 가면의 고백에 따르면, 신체검사에서 불합격 판정을 받을 때는 아쉬웠으나 신검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면서는 날아갈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고 한다(...).[39] 허나 단순 치킨호크라기엔 애매한 것이 직접 군부대 체험도 하고 할복까지 단행한것을 보면 당췌 종잡을수가 없는 인물이다.[40] 말더듬이인 데다 외모도 추한 절집 소년이 가진 기묘한 심미안과 이상심리, 그리고 그의 눈에 비친 비틀린 세상을 아름다우면서도 논리적인 문장으로 묘파해 낸 탁월한 소설이다. 물론 읽기는 좀 힘들다.[41] 1963년, 1964년, 1965년, 1967년, 1968년[42] 노벨상은 살아있는 사람만 받을 수 있다.[43] 아베 신조와 미시마 유키오를 비교하며 미시마를 아베의 '정신적 스승' 운운하는 게 말이 안 되는 게 바로 이것 때문이다. 아베는 고속성장 시기의 일본을 '아름다운 나라'로 그렸지만 미시마는 이와는 정 반대로 '퇴폐와 개인주의로 얼룩진 나라'로 본 것이다. 아베와 미시마 모두 우익 민족주의자이지만 아베는 전후 형성된 보수 빅텐트 정당인 자민당의 정치인으로써 민족주의 못지않게 유산 계급의 경제적 이득도 대표한다. 그러나 미시마는 바로 그 자민당도 유약하다고 비난하고 직접 자민당 체제를 뒤집으려 했다. 그가 가문의 힘으로 군대도 빼먹은 데다 그의 이상향인 사무라이 정신이 지배하던 전근대 일본 사회가 실제로는 사무라이의 규범대로 전혀 돌아가지 않고 사무라이 정신과는 별개의 막부 내부의 명분이나 실리를 통해 돌아갔다는 점에서 그의 우익 사상은 위의 전공투의 말처럼 매우 비현실적이고 그가 갖고 있던 미학적 세계관의 일부에 불과하다. 애초에 그가 끌고 온 병력만으로도 일본 정부는 물론이고 자위대 총감부조차 제대로 마비시키지 못했다. 애초에 총감 한 명이 죽는다고 모든 행정이 마비되는 시스템도 아니고 말이다.[44] 강력한 독재자를 세우면서 정치참여를 권장하고 아래로부터의 지지를 중시하는 사상이 있긴 하다. 바로 파시즘. 정확히는, 일제에서 보였던 천황제 기반의 군국주의 군사독재가 아니라, 잠깐 모습을 드러냈던 황도파의 '아래로부터의', 즉 대중주의 파시즘이다. 일제의 아래로부터의 파시즘은 2.26 사건으로 분쇄되었다.[45] 다만 이 생각을 한 사람이 '없는' 것은 아니다. 미노베 다쓰키치기타 잇키 참고. 전술한 대로 특히 기타의 사상과는 매우 유사하다. 천황을 주권의 상징(일종의 토템)으로 삼고 대중정치를 실현한다는 개념은 일본에선 생각보다 오래되었고, 일본국 헌법에도 그 영향이 보인다.[46] 정작 사무라이들, 특히 센고쿠 시대의 사무라이들은 미시마의 낭만적인 부시도나 30년대 군국주의자들의 파시즘과 전혀 상관없는 합리적인 행동을 우선시했다. 다만 맥락상 미시마가 비판한 것은 일제의 '위로부터의' 유사 파시즘에 가까울 것이다.[47] 다만 이 유튜버는 일본으로 거주지를 옮길정도로 일본에 대해 긍정적인 시각을 가진편이긴하다.[48] 그전에도 자기가 왜소한 걸 당연히 모른건 아니지만, 가정환경과의 충돌도 극복하면서까지 집필에 광적으로 빠져 있었으므로, 운동이나 식이요법 같은 외모관리를 시간들여 할 수가 없었다. 20대 작가 치고는 놀랍게도 퀄리티 높은 작품을 상당히 많이 써서 어느정도 스타작가로 정점에 서서 가족들도 인정할만큼 사회적으로 여유가 생기니 가능했던 것.[49] 다만 현행 검도 체계는 아닌 듯 하다. 66년 4단을 따고 68년에 5단을 땄는데 현행 체제에서는 4단을 따고 4년이 지나야 5단 시험에 응시할 수 있다.[50] 실제로는 미수에 그쳤다. 진짜 죽은 사람은 오카다 총리의 매부(여동생의 남편)였다. 매부가 오카다로 오인돼 대신 살해당한 것. 그래서 오카다의 생존이 확인될 때까지 고토 후미오 내무대신이 잠시 총리 권한대행을 맡기도 했다. 이 사건은 전직 총리들이었던 사이토 마코토 내대신(내무대신과 무관한 궁중 직책.)과 다카하시 고레키요 대장대신까지 함께 암살당할 정도로 대형 사건이었고 이 와중에 현직 총리까지 실종되어버리니 세간에서는 총리가 죽었다고 생각하기에도 무리가 없었을 것이다.[51] 일설에는 게의 실물이 아니라 게를 의미하는 '蟹'라는 글자를 두려워했다고도 한다.[52] 딸 노리코(1959년생, [age(1959-01-01)]세)와 아들 이이치로(1962년생, [age(1962-01-01)]세)가 태어남.[53] 참고로 딸 노리코의 가쿠슈인 유치원/초등과 동기 중 한 명이 미시마 유키오가 젊은 시절 맞선을 봤던 쇼다 미치코의 장남이었다고 한다. 그렇다. 이 장남은 훗날...[54] 다만 딸 노리코는 외교관인 남편을 따라 외국에 갔기에, 결혼 후에는 활동을 거의 하지 못했다고 한다.[55] 사실 맥아더 본인의 말 역시 그런 뉘앙스다. '독일은 성인 지능범이지만, 일본은 소년범이니 처벌 수위를 같게 하면 안 된다'라는 투. 사실 맥아더 본인은 자신의 정치적 이득을 계산했기에 그런 발언을 했던 것이다. 그걸 그런 식으로 받아들이고 해석한 미시마 유키오도 대단하기는 대단하다.[56] 출처: Mishima’s Sword: Travels in Search of a Samurai Legend, by Christopher Ross(2007)[57] 다만, 미와 아키히로 본인이 게이였던 만큼, 진보 성향이 강하긴 했다. 극심한 사회적 차별에 시달리는 성소수자들의 특성 상, 자신들의 인권 향상을 중요한 가치로 여기는 진보주의에 대한 관심이 많을 수밖에 없다.[58] 이것 때문에 후쿠시마 지로는 미시마의 장녀 도미타 노리코(富田紀子·40) 등 유가족에 의해 "미시마의 편지를 공개한 것은 저작권 침해"라며 2008년 4월에 고발당했다. 일본 도쿄지법은 2009년 2월 18일 판결에서 문예춘추와 후쿠시마 지로에게 서적 출판을 중지하고 유족에게 500만 엔을 지급하라고 판결을 내렸다. #[59] 특히 미시마 유키오의 집안은 (2차 대전 후 가세가 기울기는 했으나) 일본내에서 엘리트 상류층 집안이었고 그의 부모와 조부모는 어릴때부터 그를 철저히 관리했었다. 커서 작가가 되는 (그의 부모와 어른들 입장에서) 일탈은 있었으나 엄연히 그의 천재성으로 인한 성공 가능성을 본 부모의 허락을 얻어낸 뒤에 한 것이고, 성공만 한다면 작가라는 직업 자체가 상류층에서 그렇게 크게 무시당할 직업은 아니었다. 유년기부터 청년기까지는 항상 부모의 관리 하에 있던 사람이었기에, 결혼의 압박이 없었을 리 없다.[60] 출처 : 영국 BBC에서 방영한 다큐멘터리 'Strange case of Mishima(미시마 괴사건)'. 원문은 5피트 1인치.[61] 하지만 우울증으로 인해 비관자살한 다자이와는 달리, 그는 자신의 정치적 신념을 관철시키기 위해 할복한 것이므로 결이 다르다고 볼 수 있다.[62] 그리고, 미시마가 다자이의 자살을 비웃은 것과 비슷한 수준으로 미시마의 자살을 비웃은 사람이 또 나왔으니...시오노 나나미다.[63] 그 해 칸 영화제 최우수 예술공로상을 수상하기도 한 이 영화에서 미시마 유키오의 동성애 의혹은 특히 강하게 제시되고 있는데 때문에 유족들의 강력한 반대로 지금도 일본내 상영 금지, DVD/비디오 출시 금지로 묶여있다. 다만 게이 바 장면을 자른 버전이 TV에서 몇 차례 방영 됐다고 한다. 개봉이 예정됐을 당시 '미시마 11월 25일, 쾌청'라고 번역제가 붙었다.[64] 밴보트는 이 상을 받은 직후인 2000년에 알츠하이머 병으로 사망하였다. 사실 상 자체가 밴보트가 알츠하이머병에 걸렸다는 게 알려진 후에 부랴부랴 수여한 것이다.[65] 영문 번역본 제목인 The Sailor Who Fell from Grace with the Sea으로 나온다.[66] 다만 신경숙 항목에서 처럼 김후란의 번역본이 격이 다르다느니 웅진 번역본을 생각하면 안된다느니 하는,중고책의 값을 부풀리려고 나온 소문들은 걸러듣는편이 좋다. 김후란역 금각사 번역본 비교,후기 #/#[한] [68] 장편 데뷔작. 도쿄대 재학 시절과 공무원 시절에 걸쳐 집필했다.[한] [한] [한] [한] [한] [74] 제1회 신쵸사 문학상 수상[한] [76] 제8회 요미우리 문학상 수상[한] [한] [79] 1983년 출간된 김후란 역 금각사에 수록[한] [한] [82] 제6회 마이니치 예술상 문학 부문 수상[한] [한] [85] 총 4부작으로 이루어진 미시마 유키오의 마지막 작품이다. 19세기 이래의 서구 장편소설과는 다른 '세계를 해석하는 궁극의 소설'을 목표로 집필하였다. 천인오쇠의 마지막 원고를 편집자에게 넘긴 당일, 미시마 사건을 일으킨다.[한] [한] [88] 2025년 1월 한국어 번역본 출간 예정[한] [한] [91] 신경숙 표절 사건에 언급되었으며, 미시마 본인이 감독으로 영화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