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독(독일민주공화국)의 위성정당에 대한 내용은 독일 민족민주당(동독) 문서
, 1917년 창당된 정당에 대한 내용은 독일 조국당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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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5f5f5><colcolor=#d79f29> 슬로건 | Die soziale Heimatpartei 사회적인 조국의 정당 |
창당일 | 1964년 11월 28일 (민족민주당) |
당명 변경일 | 2023년 6월 (조국) |
당사 주소 | |
젤렌빈더가 42, 12555 베를린 | |
당수 | 프랑크 프란츠 |
창립자 | 발데마어 쉬츠 (Waldemar Schütz) |
이념 | 네오나치즘 범게르만주의 네오파시즘 우익대중주의 인종 보수주의 독일 국수주의 푈키셔 내셔널리즘 반유대주의 에코파시즘 |
스펙트럼 | 극우 |
연방의회 | 0석 / 736석 (0.0%) |
연방상원 | 0석 / 69석 (0.0%) |
유럽의회[1] | 0석 / 96석 (0.0%) |
당 색 | 노란색 (#d79f29) |
당보 | 독일의 목소리 (Deutsche Stimme) |
청년조직 | 젊은 민족주의자 (Junge Nationalisten) |
유럽 정당 | 평화와 자유를 위한 동맹 |
유럽의회 교섭단체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공식 사이트 | 홈페이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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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독일의 극우 정당.나치즘 부활을 외치며 서독 시절 창당한 독일 사회주의국가당이 연방헌법재판소의 위헌정당심판으로 강제 해산된 이후 민족민주당(NDP)이라는 이름으로 창당하였으며, 독일 내에서 네오나치 계보를 잇는 사실상 유일한 정당이었다. 상대적으로 온건한 극우 정당 '독일을 위한 대안(AfD)'이 등장하기 이전까지 여러 주의회에 진출하고 유럽의회에도 의석을 확보하는 등 나름 위세를 떨쳤으나, AfD가 창당 후 극우 민족주의 지지층을 대거 흡수하면서 당세가 크게 위축되어 별 볼 일 없는 원외 군소정당으로 전락했다.
2023년 당명을 'Die Heimat(디 하이마트)'로 바꾸었는데, 직역하면 그냥 조국(The Homeland)이라는 뜻이다.
2. 역사
2.1. 초창기
독일 사회주의국가당이 1952년 해체되었으며, 1950년 창당된 또다른 네오나치 정당인 독일 국가당(Deutsche Reichspartei) 역시 지지율이 좋지 못하였다. 구 나치 세력이 오스트리아 자유당을 창당하며 당세를 어느정도 유지했던 오스트리아의 사례를 본 독일의 네오나치들은 1960년대 네오나치 세력의 단일 대오를 결성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판단하여, 독일 제국당을 중심으로 1933년 해체된 독일 국가인민당의 잔존 인원들, 그리고 구 나치당의 멤버들, 기타 극우파들을 모아서 1964년 민족민주당(Nationaldemokratische Partei Deutschlands)을 창당하였다. 이 때 독일당(Deutsche Partei)도 합류하였는데, 당시 독일당은 연방 의회에서 의석을 모두 잃고 브레멘 주의회에 주의원 네 명만 남아있는 상태였다. 어쨌든 민족민주당 안에 원내 세력이라곤 이 주의원 네 명 뿐이었으니, 이 가운데 한 명이 민족민주당의 초대 대표가 되었다.창당 당시에는 라인강의 기적이 슬슬 끝나가고 있을 때였고 경제 성장률이 둔화되고 있었기 때문에 장기 집권하고 있던 루트비히 에르하르트의 기민당 정부에 대하여 불만 여론이 높던 상황이었다. 게다가 동독의 방첩 기관인 슈타지가 서독의 혼란을 조장할 목적으로 민족민주당을 지원하면서, 민족민주당은 기민당의 기존 지지자들을 흡수하여 창당 직후 치러진 1965년 총선에서 2.0%를 얻으며 선전하였다.
2.2. 첫번째 전성기와 몰락
리즈 시절인 1969년 총선에서는 무려 4.3%를 얻으면서 선전했는데, 만약 0.7%만 더 받았더라도 연방 의회 진출이 가능했기 때문에 독일의 정치인들은 식겁했다. 만약 아슬아슬하게 5%를 득표했더라면 20~30석 내외의 의석을 확보하였을것이며, 현대 독일에서 네오나치들의 목소리가 더욱 컸을 것이다. 더불어 바이에른주 의회에서 15석, 헤센주 의회에서 8석, 니더작센[2]에서 10석을 확보하며 전성기를 맞는다.하지만 빌리 브란트의 과거사 청산 정책, 의석 확보 실패에 대한 당내의 분열, 위헌정당 해산을 피하기 위한 애매모호한 정책 등으로 인하여 1970년대에는 지지율이 폭락하였고 그 결과 독일 통일때까지 변변찮은 군소정당의 신세를 피하지 못하게 되었다.
2.3. 두번째 전성기
독일 민족민주당의 두번째 전성기는 독일 통일로 인한 동독의 불만으로 인해 시작되었다. 서독과 동독의 빈부격차 차이가 근본적인 문제였지만, 동독의 미적지근한 과거사 청산도 민족민주당의 지지가 동독에서 높아지는데 영향을 미쳤다. 1970년대 정부 차원에서 철저한 나치 청산과 유대인 학살 사죄를 이루어낸 서독과 달리, 동독은 국가 차원에서 민족민주당이라는 이름으로 관제(...) 네오나치 정당을 지원했던 적도 있었고, "나치는 나치이고 우리는 우리이며 근본적으로 다른 존재이기 때문에 사과할 책임이 없다"[3]는 식으로 과거사 청산에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민족민주당은 이런 배경 속에서 동독을 기반으로 세를 확장할 수 있었다.2004년 민족민주당은 작센 지역에서 전체 투표의 9.2%를 얻으며 원내에 입성했으며 이는 독일 기성 정치권에 파장을 몰고왔다.[4] 뒤이은 2005년의 총선에서 민족민주당은 1.6%의 득표를 얻었다. 높은 득표라고 할 수는 없었지만, 동독 지역에서는 모두 3%를 넘기며 선전했다. 2007년 메클렌부르크-포어포메른 주의회 선거에서는 7.3%를 득표하며 마찬가지로 주의회 원내 입성에 성공했다.
이러한 독일 민족민주당의 표세 확장은 서독과 여러 구미권 언론들에게 우려의 대상이 되었으며, 2014년 유럽의회 선거에서 민족민주당의 우도 포이그트(Udo Voigt)가 유럽 의원으로 당선되며 그런 우려는 절정에 달했다.
2.4. 근황
2016~7년을 전후해, 조금 더 온건한(...) 성향의 극우파 정당인 독일을 위한 대안이 등장하면서 민족민주당의 전성기는 끝나가는 상태이다. 2016년 주의회 선거를 마지막으로 민족민주당은 모든 의석을 잃었으며, 기존의 네오나치들도 대부분 대안당으로 당을 이적하고 있어 현재 당원은 5,000명 정도 밖에 안된다.비교적 최근에는 환경주의적인 색채를 띄고 있다.[5] 나치당이 환경 보호를 추구하였던 점을 보면 의외는 아니다.
2023년 6월 14일 당명을 '민족민주당'에서 '조국'으로 바꾸었다. #
2024년 1월 연방헌법재판소의 "정당 활동 목적이 반민주적이고 위헌적"이라는 판단에 따라 "향후 6년간 어떠한 국가 자금 지원도 받을 수 없다"는 선고를 받았다. 이에 따라 정당으로서 받는 국고보조금 지원과 세금 혜택 등의 권리를 박탈당했다. #
3. 성향
독일을 위한 대안(AfD)보다도 더욱 급진적이라고 평가받는다.당 색이 독일 제국의 국기였던 흑백적 삼색기의 색인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독일 제국의 강역 회복을 주장하며 슐레지엔, 오스트프로이센 등 제1~2차 세계 대전의 조약으로 빼앗긴 독일의 영토를 되찾는 것을 정책으로 내걸고 있다. 또한 네오나치 정당답게 오스트리아와 독일의 합병 역시 지지한다.
홀로코스트는 부정하지 않지만[6] 대신 연합군과 소련군의 학살을 홀로코스트와 동급에 놓는 물타기식 주장을 자주 한다. 아우슈비츠에서 학살된 유대인을 위한 추모의 시간은 있으면서, 드레스덴 폭격으로 사망한 민간인들을 위한 추모의 시간은 없냐며 말이다.[7] 여기서 더 나아가 영국, 미국을 대량 학살을 저지른 국가라고 주장하는 급진파 당원들도 존재한다.
유럽연합과 나토에도 부정적이며 유럽연합은 사실상 소비에트식 사회주의 연합이라며 맹렬히 비난한다. 반유대주의 성향도 있다.
또한 극우 파시즘 정당답게 성소수자, 페미니즘, 낙태 등에서 당연히 매우 부정적이다.
4. 강제 해산 가능성
현재 독일 정치권에서 사실상 유일하게 네오나치 노선을 표방하는 정당이라, 독일 사회에서 원내 정당 '독일을 위한 대안'과 함께 위헌정당해산심판으로 강제 해산될 가능성이 제기되는 정당이다. 실제로 당이 위헌정당으로 판정되어 강제 해산될 뻔한 적은 여러 번 있었다.민족민주당 시절이던 2001년 독일 연방헌법수호청의 해산 청원에 많은 시민이 동참하면서 강제 해산해야 한다는 여론이 결집되며 위기를 맞이했지만, 2003년 독일 연방헌법재판소가 "체제 자체의 전복을 추구하는 정당은 아니다"라며 청원 건을 기각하면서 구사일생했다. 당시 연방헌재의 판결 요지는 "네오나치즘을 표방하는 정당은 맞지만, 어디까지나 법의 테두리 안에서 활동하고 있으며 이 테두리 자체를 깨거나 뒤집으려는 폭력적인 시도나 과격한 주장까지는 하고 있지 않기에 강제 해산 조치는 부적절하다"는 것.
2009년 주의회 의원 몇 명이 이 당의 위헌 행위를 다룬 보고서를 작성했고 이에 따라 또다시 강제 해산 가능성을 점치는 여론이 일었지만, 연방헌재까지 가지 못하고 그저 떡밥에 그쳤다.
2011년 당 관계자가 살인 사건에 연루되며 해산 청원이 제기되면서 다시 위기를 맞이했으나 기각되면서 생환했다. 이듬해인 2012년 12월 다시 강제 해산 시도가 있었고 연방을 구성하는 16개 주 정부의 내무장관들이 모두 동의하면서 높은 확률로 해산될 것이라는 분석이 나왔으나 당시 집권 중이던 앙겔라 메르켈 총리가 해산 청원을 추진하지 않겠다고 선언하면서 일단락되었다.
2016년 또다시 해산 청원이 연방헌재에 제출되었다. 그러나 헌재는 "이 당을 강제로 해산하든 그대로 두든 중앙 정계에 유의미한 영향력을 발휘할 가능성이 없다"며 해당 청원을 다시 기각했다. 이전에는 "그래도 법은 지키고 있다"는 게 근거였다면, 이번 기각 사유는 "냅둬도 존재감 없다"는 것.
개정 기본법에 근거해 국고 지원 대상에서 배제될 위기에 처했으나, 좌파당의 반대로 의회에서 해당 안건이 큰 진척을 보이지 못하다 2019년 연방정부 및 연방 상·하원의 청구가 2024년 헌재에서 인용되면서 국고보조금 지원 및 세금 혜택 수혜 대상에서 공식적으로 배제되었다.
5. 역대 선거 결과
5.1. 연방하원 선거
득표수와 득표율은 비례대표를 기준으로 한다.- 1965년 664,193표 (2.0%)
- 1969년 1,422,010표 (4.3%)
- 1972년 207,465표 (0.6%)
- 1976년 122,661표 (0.3%)
- 1980년 68,096표 (0.2%)
- 1983년 91,095표 (0.2%)
- 1987년 227,054표 (0.6%)
- 1990년 145,776표 (0.3%)
- 1994년 145,776표 (0.3%)
- 1998년 126,571표 (0.3%)
- 2002년 215,232표 (0.4%)
- 2005년 748,568표 (1.6%)
- 2009년 635,525표 (1.5%)
- 2013년 560,828표 (1.3%)
- 2017년 176,715표 (0.4%)
- 2021년 64,608표 (0.1%)
5.2. 유럽의회 선거
6. 역대 당수
7. 여담
- 아돌프 히틀러가 21세기 현대 독일로 타임슬립한다는 가상의 설정을 다룬 소설 '그가 돌아왔다'의 영화판에서, 2014년[8]의 독일에 떨어진 히틀러의 말빨에 탈탈 털리는 정당으로 등장한다. 당시 당명은 '민족민주당'이었기에 이 명칭으로 독일의 주요 정당들과 함께 언급된다.[9] 허름한 당사의 모습을 보고 "내가 맥주홀 폭동을 일으켰을 때의 맥주홀보다도 초라하다."라고 까며, 이후 민족민주당 당수와의 일대일 대담에서 "민족'민주'당이 뭐냐? 민족사회주의는 애초에 민주주의에 반대하는 이념인데?", "겨우 독일 안에서 구하기 어렵다는 이유만으로[10] 나의 투쟁도 안 읽어보고 민족사회주의 타령을 하는 건 뭐냐?"라는 식으로 네오나치들을 완전히 털어버린다. 이 일로 아돌프 히틀러는 네오나치들의 적이 되어, 네오나치들에게 집단 린치를 당한다. 이후 히틀러는 민주주의의 수호자 취급을 받으면서 독일 부총리 지그마어 가브리엘[11]에게 축하 편지까지 받는다.
- 네오나치 정당이라서 그런지는 몰라도, 중앙당사가 구글 스트리트맵에서 통째로 블러 처리 되어있다. 이곳은 그가 돌아왔다에서도 나온 당사이다.
[1] 96석은 유럽의회에서 제공되는 독일 의석에 한정된다. 유럽의회 총 의석은 총 705석.[2] 이 주는 특히 전통적인 좌파 세력의 텃밭이었기에 충격을 몰고왔다.[3] 사실 부분적으로 맞는 말이긴 하다. 동독의 초대 지도자인 발터 울브리히트는 동독 건국 이전부터 파울 요제프 괴벨스의 단골 토론 상대였으며 나치 독일 시대에 수많은 공산당원들이 학살당했다.[4] 작센은 이후 독일을 위한 대안의 표밭이 되면서 독일 극우파의 수도로서의 입지를 공고히한 상태이다. 이 때문에 네오나치나 극우에는 시큰둥한 서독 시민들은 작센 주를 나치의 본고장 취급하는 지역드립을 하기도 한다.[5]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68혁명 이전까지 독일 내 환경운동의 주도권은 네오나치들이 가지고 있었다. 그러다가 1968년을 전후하여 신좌파들이 환경운동의 주도권을 잡았고 1980년대 독일 녹색당의 창당으로 완전히 자리잡았다.[6] 독일에서는 홀로코스트 부정을 위헌으로 하여 법적으로 처벌할 수 있다. 그리고 위헌정당해산의 근거가 될 수도 있다.[7] 어느정도 맞는 말이긴 한게 연합국은 드레스덴 폭격을 비롯하여 소련군 및 연합군의 독일인 강간 및 학살, 전후 독일인 강제추방 등에 대해서는 한차례도 사과하지 않았다. 해당 사건의 피해자들은 나치와는 무관한 무고한 희생자였다. 국제사회의 모순이 드러나는 사례라 볼 수 있다.[8] 영화에서는 2014년이지만 원작인 소설 '그가 돌아왔다'의 시간적 배경은 2011년이다.[9] 독일 기독교민주연합(CDU), 바이에른 기독교사회연합(CSU), 독일 사회민주당(SPD), 동맹 90/녹색당(Bündnis 90/Die Grünen), 민족민주당.[10] 영화 촬영 중이었던 2014년에는 아직 나의 투쟁이 독일에서 발간되기 전이었다. 2015년에 히틀러의 사후 70년이 지나 저작권법에 따라 퍼블릭 도메인이 되어 나의 투쟁이 겨우 독일 내에서 출판된다.[11] 이 사람은 실존 인물이며, 과거 히틀러에게 가장 강경하게 반대하던 독일 사회민주당의 2014년 당시 당수였다. 당연히 노린 것이다. 참고로 영화 초반부에서 히틀러는 이 사람을 "과거 사민당의 용맹한 모습은 온데간데 없어보이는 추악한 푸딩놈"이라고 깐 바 있다.[12] 딱히 이상할 건 없는 것이, 북한은 그 특유의 극단적인 전체주의, 군국주의, 순혈주의로 인해 의외로 적잖은 서양 극우 세력들이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집단이기도 하다. 실제로 북한은 소련보다는 나치 독일, 일본 제국과 더 가깝다는 의견도 많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