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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4-09 18:02:15

동프로이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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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프로이센
Ostpreußen
파일:external/www.loeser.us/east_prussia.gif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904px-Coat_of_Arms_of_East_Prussia.svg.png
주기(州旗) 주장(州章)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000px-German_Empire_-_Prussia_-_East_Prussia_%281878%29.svg.png
1772년 ~ 1945년
프로이센 왕국 (1772~1871)
독일 제국 (1871~1918)
바이마르 공화국 (1919~1933)
나치 독일 (1933~1945)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러시아 SFSR
폴란드 인민 공화국
리투아니아 SSR
행정
시간대 (UTC+1/+2)
주도(州都) 쾨니히스베르크
인문환경
면적 36,993km² (1905년 기준)
인구 2,030,174명 (1905년 기준)
인구밀도 54.9명/km²

1. 개요2. 주가(州歌)3. 역사4. 출신 인물5.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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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동프로이센(독일어: Ostpreußen)은 1945년까지 독일 동북부에 존재했던 지방이다. 주도는 쾨니히스베르크, 면적 36,992 km²에 인구는 2,488,112명(1939년)이었다. 독일어 발음을 그대로 옮긴 '오스트프로이센'으로 불리기도 하나, 동프로이센 쪽이 구글 검색에서 압도적이므로 이 표기를 사용한다.

동프로이센은 국가로서의 프로이센(프로이센 왕국)이 아닌 지역으로서의 프로이센에도 온전히 포함된다. 서프로이센 주는 진짜 서부 프로이센과 그단스크 일대의 포메렐리아 지역이 하나로 묶인 곳이고, 남프로이센은 프로이센 지역의 외부에 있다.

2. 주가(州歌)


사실상의 주가(州歌) 역할을 했던 노래로 동프로이센의 노래(Ostpreußenlied)라는 곡이 있다. 이 노래의 원제는 어두운 숲의 땅(Land der dunklen Wälder)이며, 1930년대 초반에 쾨니히스베르크의 작곡가 헤르베르트 브루스트(Herbert Brust)가 작곡했다. 1832년 작곡된 프로이센 왕국의 국가 Preußenlied 등 프로이센을 상징하는 다른 곡에 비하면 역사가 짧다.

이 노래가 유행을 탄 지 얼마 안 가서 1945년 나치 독일이 패망하며 독일이 동프로이센을 상실하기 때문에 주가 역할을 한 시간은 약 12년 정도로 길지 않으나, 전후 독일인의 추방과 도주 이후 동프로이센 출신의 독일계 실향민들에게 애창되고 있는 노래이다.
가사
독일어 한국어 번역
Land der dunklen Wälder
und kristall’nen Seen,
über weite Felder
lichte Wunder geh’n.
어둑한 숲을 가진 땅과
크리스탈처럼 투명한 호수,
드넓은 평원 사이로
생생한 경이로움이 눈에 띄네
Starke Bauern schreiten
hinter Pferd und Pflug,
über Ackerbreiten
streicht der Vogelzug.
힘센 농부들은 쟁기와
말들 사이에서 성큼성큼,
농지를 가로질러
철새 떼가 날아가네
Und die Meere rauschen
den Choral der Zeit,
Elche steh’n und lauschen
in die Ewigkeit.
그리고 바다는 포효하며
시간의 성가를 합창하고
수록들은 서서
영원토록 듣는다
Tag ist aufgegangen
über Haff und Moor,
Licht hat angefangen,
steigt im Ost empor.
석호[1]와 습지 사이로
새로운 날이 떴다
빛은 떠올랐고
동쪽으로 부상한다

3. 역사

3.1. 독일 기사단국

파일:Oldprussian.png
동프로이센은 본래 발트족이 살던 땅으로 이곳의 발트족은 '프루센' 또는 '고 프로이센인(prūsai)'으로 불렸으며, 동쪽의 리투아니아 대공국과 함께 13세기에도 기독교화가 되지 않은 유럽의 몇 안되는 지역이었다. 13세기에 이르기까지 유럽의 가톨릭 세력은 여러차례에 걸쳐 선교와 개종을 위한 시도를 벌였으나 대부분 실패하였다.

1206년, 시토 수도회의 '올리바의 크리스티안'이 선교 활동을 벌여 어느 정도의 성과를 얻었다. 1215년, 크리스티안은 신생 프로이센 주교구의 초대 주교로 서임되었으나 원주민의 대대적인 적대행위에 직면하였다. 리보니아 검우 기사단의 잔학 행위에 분노한 원주민은 폴란드 왕국의 헤움노, 마조프셰, 포메른 등지를 공격하였다. 1217년, 교황 호노리우스 3세십자군 조직을 허락, 폴란드 귀족들의 지원을 얻어 프로이센인의 침공을 일시적으로 막아낸다. 그러나 1223년, 대부분의 십자군이 철수[2]한 후 프로이센인들은 헤움노, 마조프셰를 또다시 침공하였고 마조프셰 공작은 남쪽의 프워츠크까지 도망쳐야 했다. 이러한 사태에 마조프셰 공작 콘라트 1세는 튜튼 기사단[3]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1226년, 튜튼 기사단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2세로부터 '리미니의 금인칙서'를 통해 앞으로 기사단이 정복한 영토를 영지로 하사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이어서 교황과 콘라트 1세의 지지와 약속까지 얻어낸 기사단은 1230년부터 본격적인 프로이센 정복을 시작, 기독교화하기 시작하였다.

험난한 지형과 악천후, 변덕스러운 날씨로 인해 프로이센 십자군은 대규모 회전보다는 소규모 기동대의 정찰, 기습, 약탈, 철수 등의 유격전 위주로 벌어졌다. 십자군이 원주민 마을을 불태우고 주요 요충지를 점령하면 요새를 건축하여 그곳을 거점으로 삼아 원정을 계속하였다. 1241년까지 '포메사니아인(Pomesanians)', '포게사니아인(Pogesanians)', '바르미아인(Warmians)', '나탕기아인(Natangians)', '바르티아인(Bartians)'이 십자군에 정복되었다. 프로이센인들은 1242년 ~ 1249년의 봉기(1차 프로이센 봉기), 1260년 ~ 1274년의 봉기(대 프로이센 봉기)를 일으키며 저항하였으나 대부분 실패하였다. 프로이센 십자군은 1274년 '나드루비아인(Nadruvians)'을 정복하였으며, 결국 십자군의 승리로 끝이 났다. 이로써 동프로이센은 튜튼 기사단의 영지가 되었다.

기사단에 정복된 원주민들은 독일인으로 동화되어 자취를 감추었고, 17세기 ~ 18세기에 그들의 언어인 '고 프로이센어'도 사멸하였다.

3.2. 튜튼 기사단국프로이센 공국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552px-Teutonic_Order_1466.png
14세기, 튜튼 기사단국은 그 영토가 남쪽으로는 포메른과 동프로이센, 북쪽으로는 고틀란트 섬과 에스토니아에 이르러 북유럽의 최강자의 자리에 올랐다. 그러나 기사단국은 1410년 타넨베르크 전투에서 폴란드 왕국-리투아니아 대공국 연합군에게 대패하며 몰락의 길을 걸었다. 1453년, 폴란드와의 '13년 전쟁'이 발발하였고 이 전쟁에서 기사단국은 무역의 황금알 단치히서프로이센 일대를 상실하였다. 1466년, 13년 전쟁을 끝낸 '2차 토룬 조약'의 결과 튜튼 기사단국은 폴란드에 복속되었다. 튜튼 기사단국의 국체는 유지되었으나 기사단의 호흐마이스터(기사단장)가 폴란드 국왕의 봉신이었으므로 기사단국은 사실상 폴란드의 속국으로 전락했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Acprussiamap2.gif
1525년, 튜튼 기사단의 37대 기사단장 알브레히트 폰 호엔촐레른마르틴 루터와의 만남 후 그의 사상에 감명받아 루터교회로 개종하였다. 알브레히트는 튜튼 기사단령 프로이센의 세속화, 튜튼 기사단의 해산을 선언하였다. 몇몇 기사단원은 이 결정을 반대하여 프로이센을 떠나 신성 로마 제국으로 향했다. 폴란드 국왕 지그문트 1세는 가톨릭 국가였음에도 이 결정을 환영하며 루터교도인 알브레히트와 조약을 체결, 프로이센 공국의 건국을 승인하였다.[4]

프로이센 공작은 과거의 튜튼 기사단장과 마찬가지로 폴란드 국왕의 봉신이었으므로 프로이센 공국은 여전히 명목상으로는 폴란드의 속국이었다. 그러나 이곳을 노렸던 호엔촐레른 가문 본가의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요아힘 2세 헥토어는 처남인 지그문트 2세 아우구스트와 한 쪽의 대가 끊기게 되면 다른 한 쪽이 상속받는다는 내용의 협약을 체결했고 이후 수 차례에 걸쳐 프로이센 공국 분가와 근친혼을 맺었다. 1618년,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요한 지기스문트가 후사 없이 사망한 2대 프로이센 공작 알브레히트 프리드리히를 이어 프로이센 공작이 되었고 이로써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 동군연합이 성립되었다. 원래대로라면 종주국인 폴란드 국왕이 대가 끊긴 공국의 영지를 회수해야 했으나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가 프로이센 공작의 신분으로서 공국은 앞으로도 폴란드 국왕의 봉신국으로 남는다는 조건으로 동군연합에 대해 지그문트 3세의 승인을 받았다.[5]

3.3. 프로이센 왕국독일 제국

프로이센 공국이 완전한 독립국이 된 것은 1657년으로, 당시 브란덴부르크 선제후이자 프로이센 공국을 상속받았던 요한 지기스문트의 손자 프리드리히 빌헬름대홍수스웨덴, 루스 차르국과 전쟁하고 있는 폴란드-리투아니아가 정신이 없는 틈을 타 브롬베르크-벨라우 조약을 체결하여 프로이센 공국에서 폴란드 국왕이 갖는 권리를 완전히 청산했다. 1701년,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겸 프로이센 공작 프리드리히 3세는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에서 오스트리아에게 원군을 제공한 대가로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레오폴트 1세의 허락을 받아 프로이센 왕국을 선언하였고, 프로이센 국왕 프리드리히 1세로 쾨니히스베르크에서 대관식을 치렀다. 그러나 프로이센 왕국의 수도는 본토라 할 수 있는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의 수도 베를린이 되었고, 기존의 프로이센 공국은 신생 프로이센 왕국의 동쪽 영토[6]를 구성하게 되었다. 대북방전쟁 당시에는 전염병으로 인해 전체 인구의 3분의 1인 25만 명이 사망하는 대참사가 벌어졌으나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의 노력으로 복구할 수 있었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1222px-German_Empire_-_Prussia_%281871%29.svg.png
1772년의 1차 폴란드 분할 이후 서프로이센을 획득하여 월경지에서 벗어나 왕국 서쪽과 영토가 이어졌다. 예나-아우어슈테트 전투에서 프로이센군이 괴멸당한 이후 쾨니히스베르크가 왕국의 임시수도가 되었고, 동프로이센은 잠시나마 왕국의 중심지로 기능하였으나 얼마 안가 베를린으로 환도했다. 1829년부터 1878년까지는 서프로이센과 함께 프로이센 주로 같은 행정 구역에 묶였으나, 이후 분리되었다.

독일 제국이 선포된 후에도 동프로이센은 여전히 프로이센 왕국에 속하였고, 프로이센 왕국 형성의 계기가 되었다는 역사적 상징성을 가지고 있었다.[7] 그러나 19세기 후반부터 바이에른, 라인란트, 베스트팔렌과 같은 타 지역에게 발전에서 뒤쳐졌는데, 그 이유는 바로 이 지역은 보수성향의 귀족 출신의 지주 융커들이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 이들은 상공업을 천시하고 매우 검소하게 생활하였으며 영지 경영에서 적극적인 이윤을 추구하였다. 응? 앞뒤가 다른데?[8]

제1차 세계 대전에서는 포젠이랑 더불어 러시아 제국의 합병 목표로써 초기 동부전선의 주요 전장이 되는데, 파울 폰 힌덴부르크가 전국적 영웅으로 떠오르는 타넨베르크 전투가 이 곳에서 벌어졌다.[9] 타넨베르크의 참패 이후 러시아 제국군은 동프로이센에서 쫓겨나 방어에 급급했기 때문에 전쟁으로 인한 별다른 피해는 입지 않았다.[10]

3.4. 바이마르 공화국나치 독일 그리고 동프로이센의 해체

파일:AfterWW2germansterritory.png
전쟁은 독일의 패배로 끝났고, 신생 바이마르 공화국베르사유 조약에 따라 폴란드에게 1773년 1차 폴란드 분할 이전의 폴란드의 영토였던 지역을 양도했다. 폴란드 회랑이라고 불리는 이 지역을 넘겨준 결과 동프로이센은 독일 본토와 분리된 월경지가 되었다. 이 때 동프로이센 일대는 약간의 영토 변화를 겪었는데, 메멜 지역을 리투아니아 제1공화국에 넘겨준 대신, 해체된 서프로이센 지역 중 독일에 잔존한 일부분[11]을 흡수했다.[12]

이 밖에도 폴란드는 동프로이센 남부에 폴란드계가 다수라는 이유로 주민투표를 통해 이 지방의 귀속을 결정해야 한다고 주장하여 주민투표를 시행하였으나 정작 투표 결과는 폴란드의 보이콧으로 절대 다수가 독일 잔류에 투표하여 독일 잔류가 그대로 확정되었다.[13]

제2차 세계 대전 시기에 나치 독일의 패배가 자명해지자 소련군의 보복을 피해 많은 수의 민간인들이 소련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독일 중서부로 탈출했다. 1945년 독일의 패전 후 연합국은 전쟁의 직접적 원인(폴란드 회랑단치히 자유시 문제)이자[14] 독일 군국주의의 사상적 기원[15]으로 여겨진 프로이센 지역, 즉 동프로이센을 해체하여 지도에서 아예 없애버리기로 합의했다.

소련은 본래 동프로이센 전토를 소련이 합병하거나 혹은 동프로이센 북부 3분의 2를 합병하려는 방안도 고려했으나 관대하게(?) 폴란드에 동프로이센 남부 3분의 2를 넘겨주었다.[16] 동프로이센 북부 끝자락의 메멜란트리투아니아에 넘어갔다. 이 지역에 대한 독일의 영유권 주장을 완전히 제거하기 위해 당연히 거주하던 독일 주민들도 모두 추방.[17][18]

서독은 분단 시절 이들 지역에 대한 폴란드와 소련의 영유권을 인정하지 않았으나 동방정책을 외교 정책으로 채택한 이후 외교 노선에 변화를 주어 실질적으로 이 지역을 포기했으며, 공식적으로는 1990년의 통일 과정에서 영구히 이 지역에 대한 권리를 포기할 것을 선언했다.

폴란드가 획득한 동프로이센 남부 지역은 몇 차례 행정구역 변화를 거쳐, 1998년 이후 바르미아마주리 주를 이룬다.

3.5. 현재의 동프로이센

1991년, 소련의 붕괴 이후 러시아의 월경지로 전락한 칼리닌그라드(구 동프로이센의 북부 1/3) 일대에서는 독일로의 재합병 움직임이나 분리주의 여론이 일기도 했지만 정작 독일로의 재합병은 독일 정부에서 공식적으로 1990년대 초반에 제2차 세계대전 패전으로 상실한 구 동방영토들에 대한 영유권 포기 선언을 했기에 거부하고 있다. 이제 칼리닌그라드 주민 대부분은 2차대전 이후 들어온 러시아인이고, 설령 진지하게 독일 편입 여론이 생긴다 하더라도 러시아 정부가 칼리닌그라드 이탈을 묵과할 리가 없는데다가 이미 독일이 동독과의 통일에 따른 호된 경험을 해봤던 터라 그렇다. 독일 당국은 이 지역 인구 중 이젠 전체의 1%도 채 되지 않는[19] 몇천 명 독일계 주민들에게 그냥 독일 국적을 부여하는 정도로 넘어가는 편이다. 한편 볼가 강 일대에 거주 중이던 독일계 러시아인들도 요새 이 곳으로 많이들 이주하는 추세이다. 다만 2차 대전 이후 폴란드에 합병되었고 폴란드 본토와 육상으로 연결되어 있는 올슈틴엘블라크, 므롱고보, 바르토시체 등 동프로이센 남부 지역의 경우 러시아로 편입된 칼리닌그라드 등 동프로이센 북부 지역에 비하면 이렇다 할 현지 내부의 분리주의 여론은 아예 없는 편이며 비교적 정치적으로 안정되어 있다.

독일 재편입과 관련하여 동프로이센의 앞으로의 전망에 대해서는 2차 대전 때 설립된 기존 국제 질서가 무너지지 않는 한 구 동프로이센 지역이 다시 독일령이 될 가능성은 없다. 게다가 이미 유럽 연합폴란드리투아니아가 가입되어 있고 독일 역시 동독 흡수의 후유증을 심각하게 앓았으며 유럽 국가 간 상호 이동이 자유롭기 때문에, 독일이 굳이 무리수를 던질 이유가 없다. 무엇보다 프리드리히 대왕이 브란덴부르크와 달리 동프로이센은 수틀리면 버리라는 말을 남겨서 단, 동프로이센의 핵심인 쾨니히스베르크가 우방인 폴란드, 리투아니아가 아닌 비EU 적성국 러시아에 편입되었다는 점이 독일 입장에서 아쉬운 부분이다.

블라디미르 푸틴 정부의 사실상 국제 외교 이론가 역할을 하는 유라시아주의자들 중 일부는 독일과 핀란드의 유라시아 패권으로의 회유를 통한 편입을 위해서 칼리닌그라드와 레닌그라드 주 일부 및 카렐리야 공화국을 각각 독일과 핀란드에 반환하자는 의견을 가진 사람들도 있긴 하지만 현실화될 가능성은 매우 떨어진다.

4. 출신 인물

○표시는 서프로이센 주였다가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동프로이센 주로 이관된 지역 출신

5. 관련 문서


[1] 쿠로니아 석호와 비스툴라 석호를 의미한다.[2] 십자군은 대부분 '성지순례 왔습니다' or '이만큼 하느님을 위해 봉사했으니 됐다' 며 십자군 원정이 끝난 후 고향으로 돌아가 버렸다.[3] 원래 예루살렘 왕국에서 활동하던 독일계 기사단으로 예루살렘이 살라딘에게 넘어간 이후 유럽으로 돌아와 헝가리 국왕 언드라시 2세의 의뢰를 받아 트란실바니아 지역의 방어 및 개척을 담당하다 헝가리 왕국과 갈등을 빚자 교황의 지원을 받아 독립을 시도했다가 도리어 헝가리에서 쫓겨났다.[4] 알브레히트 폰 호엔촐레른은 지그문트 1세의 외조카였다.[5] 지그문트 3세는 당시 루스 차르국혼란 시대에 개입하여 숙부 칼 9세에게 빼앗긴 스웨덴 왕위를 되찾는데 혈안이 되있어 발트해 연안에서 벌어지는 일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6] 브란덴부르크 기준으로는 동쪽 월경지.[7] 동프로이센 자체로는 중요성이 조금 떨어지는데 그 이유는 프로이센 왕국의 중심지이자 본체는 동프로이센이 아니라 호엔촐레른 왕가의 기반인 브란덴부르크이기 때문이다. 프리드리히 대왕브란덴부르크, 마그데부르크, 할버슈타트, 슐레지엔만 있으면 충분하고 동프로이센은 전쟁 나면 버리라는 유언을 남겼으며, 이후의 빌헬름 1세, 오토 폰 비스마르크, 빌헬름 2세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으로 이어지는 정체성을 더 중요하게 여겼지 프로이센 공국에서 이어지는 동프로이센은 안중에도 두지 않았다.[8] 공업 발전이 안되니, 이 지역의 젊은이들은 일자리를 찾아 다른 공업지역으로 떠나고 일손이 모자라서 농업이 흔들리는 악순환이 19세기 후반부터 나치 독일 때까지 계속 이어졌다. 얼핏 모순적인 것 같은 서술을 자세히 설명하자면 이렇다. 프로이센의 융커 지주들은 상공업을 천시하고 토지 기반의 농업에 집중하였으며 그 결과로 서부 독일의 상공업 기반 신흥 부르주아에 비해 상대적으로 경제력이 뒤쳐지게 되었다. 지주 계급인 융커의 이익은 상공업이 아니라 토지에서 발생하는 지세에 기반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는 러시아 제국이 서구 열강들에 비해 낙후된 이유이기도 하였다. 토지 생산력에 기반한 전통적인 귀족과 지주들의 영향력이 서유럽보다 훨씬 강력했던 것이다. 동시대의 오스트리아령 갈리치아 역시 오스트리아가 자치권을 부여하며 갈리치아 지역의 폴란드인 귀족, 지주들과 타협했기 때문에 산업화가 늦어지고 낙후된 지역이 되었다.[9] 타넨베르크 전투는 1410년에도 벌어졌는데, 이때의 전투는 독일 기사단국이 폴란드-리투아니아에 패배하였다. 자세한 것은 그룬발트 전투 참조.[10] 다만 러시아가 독일의 예상보다 훨씬 빠르게 동원을 마치고 동프로이센을 침공해서 슐리펜 계획이 다 틀어졌다. 전략적으로만 따지면 동프로이센을 잠시 포기했다가 프랑스를 먼저 깨고 난 뒤, 러시아에게 전력을 집중해서 탈환하는 것도 한가지 방법이었지만 동프로이센은 발트해와 폴란드 방면을 동시에 견제할 수 있는 중요한 요충지였고, 또한 독일 제국 상층부를 장악한 융커들은 본거지인 브란덴부르크와 포메른이 위협받지 않기 위해서 동프로이센 방면을 우선적으로 지키려고 했기 때문에 수많은 예비병력들이 할당되어 동프로이센을 방어하는데 배치되었다.[11] 엘빙, 마리엔베르더, 마리엔베르크, 슈툼, 로젠베르크[12] 기본적으로는 폴란드 분할 이전 폴란드가 가지고 있던 옛 영토가 반환의 기준점이 됐지만, 이미 독일화가 많이 진행된 지역의 경우 독일계 주민이 다수를 점하고 있었기에 주민투표를 거쳐서 몇몇 지역은 독일 잔류를 선택했다.[13] 딱 두 곳을 제외한 모든 선거구에서 독일 잔류 측의 득표율이 90%를 넘겼다. 특히 올레츠코 선거구의 경우 독일 잔류가 28,625표가 나올 동안 폴란드 귀속은 단 2표. 득표율 99.99%. 반올림해서 100%. 유일하게 동프로이센 남부에 위치한 졸다우(Soldau, 폴란드어로는 자우도보(Działdowo)는 투표 결과와 관계없이 폴란드로 넘겨졌다. 졸다우는 전간기 동프로이센 지역 중 유일하게 폴란드령으로 귀속된 곳이었다.[14] 물론 이는 독일의 개전 명분 중 하나로, 실제로는 전쟁 발발에 수많은 원인이 있었다. 자세한 것은 제2차 세계 대전/원인 참조.[15] 대체로 러시아와 영국, 미국, 프랑스, 네덜란드, 노르웨이, 덴마크, 체코, 폴란드, 그리스 같은 다른 유럽 및 서방권 국가들에서는 동프로이센이 브란덴부르크와 더불어 근대 프로이센 왕국의 양대 본향이었던 만큼 독일의 군국주의제국주의의 발원지 겸 상징으로 간주하고 있지만, 정작 독일에서는 독일 군국주의의 기원을 튜튼 기사단프로이센 공국이 아닌, 월경지가 많았던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의 영토를 지키기 위한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프리드리히 빌헬름이 펼친 정책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고 있다.[16] 그러나 소련은 주도인 쾨니히스베르크와 부동항인 필라우 등 요충지 항구도시를 모두 차지했으며 비아위스토크를 제외한 커즌 선 동부의 구 폴란드 영토를 반환하지 않았다. 하지만 폴란드도 융커의 기반 지역 중 하나였던 동프로이센 남부 곡창지대와 폴란드도 오데르-나이세 선 이동의 독일 영토를 합병하면서 소련에게 잃은 영토 손실을 벌충하긴 했다. 사실 민족 감정을 차치하고 산업적, 농업적 가치만 놓고 보면 얻은 영토가 더 높기 때문에 폴란드에 마냥 손해는 아니었다. 물론 그렇다고 폴란드 입장에서도 상실한 폴란드령을 쉽게 포기할 수야 없었지만 그러면 마찬가지로 새로 획득한 독일 동부 지역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17] 오데르-나이세 선 이동의 구 독일 영토에 살던 독일계 주민은 피난민과 추방민을 합쳐서 대략 800만 명 정도로 당시 독일 인구의 10% 정도였다. 체코, 헝가리 등 중부유럽 일대에 거주하고 있다 추방당한 독일계 주민들까지 포함하면 1500만 명에 달했다. 이들 중 서독을 정착지로 택한 난민들 중 다수가 종전 후 '추방민협회'라는 이익단체를 조직해서 1970년대까지 서독 정국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했다.[18] 폴란드와 소련 당국에 의한 추방 과정은 꽤나 잔혹해서 수십만 명 가량이 도중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물론 이게 결국 다 나치의 업보로 인한 자업자득인 측면이 있는지라 독일도 이 일을 함부로 거론하지 못하고 있다. 여담으로 폴란드는 오늘날에도 이를 두고 '이주'라는 표현을 쓸 뿐, '추방'이라는 단어에 엄청난 거부감을 보인다. 물론 커즌 선 이동의 폴란드령 주민들도 소련에 의해 추방당했고 대다수의 폴란드 실향민들이 새로 자국에 편입된 구 독일령 지역에 정착했다.[19] 80% 이상이 러시아계이고 그 외에 우크라이나계, 벨라루스계, 리투아니아계 등 구소련권 국가 계열 출신 주민들이 더 많다. 현재 칼리닌그라드 지역의 독일계 주민들은 소련 편입 당시 죽어도 태어나고 자란 고향 땅 못 떠나겠다며 뻗댄 끝에 그대로 남은 사람들과 그 후손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