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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01-20 08:09:33

슐리펜 계획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Schlieffen_Plan.jpg
슐리펜 계획의 개요도

1. 개요2. 내용3. 문제점
3.1. 계획 시3.2. 실행 시3.3. 오스트리아와의 불통
4. 독일 제국 해군
4.1. 그럴듯한 이론4.2. 현실은 시궁창4.3. 영국 습격은 불가능
5. 결과6. 몰트케가 망쳤는가?7. 여담8. 같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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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Kein Plan überlebt die erste Feindberührung.
적과의 첫 접촉 이후까지 살아남는 계획은 없다.[1]
헬무트 폰 몰트케

슐리펜 계획(Schlieffen-Plan)은 프로이센군 총참모장 알프레트 폰 슐리펜 원수가 1905년 12월 작성한 독일 제국의 전쟁 계획이다. 작성자인 슐리펜 원수의 이름에서 따왔다. 프랑스의 강력한 방어선을 회피하기 위해 벨기에네덜란드를 통과하여 프랑스를 침공하는 것을 골자로 한다.

본 계획은 7월 위기를 악화시켜 제1차 세계 대전으로 이끈 여러 결정적 요인들 중 하나로 꼽힌다. 몰트케 참모총장에 의해 수정된 계획이 실행되어 전쟁의 초반부 양상을 결정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더 나아간 미래 제2차 세계 대전프랑스 침공에도 상당한 영향을 준 것으로도 평가된다.

2. 내용

The Great War에서 설명한 슐리펜 계획

빌헬름 2세세계 정책으로 러시아 제국은 독일과의 동맹을 결렬하고 1892년 프랑스 공화국러불동맹을 체결했는데, 이로 인해 독일 제국은 양면전쟁의 위험에 노출되었다. 슐리펜 계획의 기본 구조는 이러한 양면전쟁을 타파하기 위해 군사력 동원이 느릴 것으로 예측되는 러시아가 군대를 동원하는 시간을 활용해 프랑스를 빠르게 제압한 뒤[2] 주력군을 재빨리 동부전선으로 돌려 러시아를 상대한다는 것이다.

당시 독일 제국군 참모본부는 러시아 제국의 전근대적인 행정체계와 부실한 철도 수송망을 고려해 예비군의 동원, 편성, 훈련, 최전선까지의 수송까지 최소 2달(6주) 이상이 걸리리라 예상했다.[3] 따라서 러시아 전선에는 최소한의 독일 병력만 배치하여 견제만을 시도하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을 끌어들여 러시아를 막기로 한다.[4]

프랑스를 치기 위해 슐리펜은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당시 격전지인 스당 등의 중부전선 지역을 회피하고 우익에 전력을 집중하여 대우회를 통해 파리를 북부에서 포위한 다음 프랑스군을 섬멸한다는 계획을 세운다. 프랑스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으로 상실한 실지인 엘자스-로트링겐의 확보를 위해 우익[5]으로 주력을 투입한다는 제17계획을 세운 상태였기 때문에 프랑스군의 헛점을 찌른, 설정만으로는 잘 짠 계획이다.

정작 슐리펜은 프랑스군이 독일 본토로 하는 공세야말로 프랑스로서는 가장 안 좋은 선택이라고 생각했기에 그럴 가능성은 적다 판단했고, 프랑스가 먼저 벨기에를 통해 공세를 취할 것이라고 판단하여 벨기에는 우방으로 삼아야 한다고 계획하였다. 프랑스가 제17계획을 만든 까닭은 그래도 독일이 차마 중립국인 벨기에를 못 침공하리라고 확신했기 때문인데, 안타깝게도 그 때 독일은 정상적이지 않았다. 더불어 당시 독일의 예비군 동원 능력은 프랑스를 훨씬 상회했으니 전쟁이 터지면 즉각적인 공격으로 평시 전력을 최대한 강력하게 써야 한다는 의견이 힘을 얻었다.

따라서 이 계획을 간략하게 간추리면,

러시아 방면에 할당된 사단들의 수가 매우 적은데, 그 이유는 상정된 상황이 벌어졌을 시 독일 제국의 육군 전력이 모든 지역에 전력을 할당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육군에서는 예산 확충을 통해 장비라도 마련하려 했으나 해군이 함대법 등 건함 경쟁에 집중하고 있어 정부 예산을 엄청나게 소모하고 있었기 때문에 한계가 있었다.

슐리펜 계획은 대전기 동안 독일의 프랑스 침략 전략에 기반을 닦고 상당한 영향을 끼친 것으로 평가된다. 물론 그 자체는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실패하였으나 이 계획에 영향을 받은 훗날 제2차 세계 대전프랑스 침공이 프랑스를 6주 만에 굴복시키는 데에 성공했다.

3. 문제점

전쟁이란 따지고 보면 대부분 불확실성의 영역에 속한다. 군사행동의 기초를 형성하는 것 중 4분의 3은 지극히 애매하고 불확실한 구름에 잠겨 있다. 전쟁은 우연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다.
카를 폰 클라우제비츠

슐리펜 계획은 근본적으로 플랜 B를 효율적으로 세울 수 없는 단기결전을 염두에 둔 매우 빡빡한 작전이었다. 위에 언급한 지도에서 볼 수 있듯 슐리펜 계획에서의 독일은 우익 5개군을 네덜란드, 벨기에, 아르덴 지역으로 대우회시키고 좌익 2개군은 전략적 후퇴를 통해 프랑스군의 주력부대를 유인하여 포위 섬멸을 해야 했다.

독일군의 예비군 동원 능력이 뛰어나다고는 하나, 예비군답게 정규군과 비교하면 훈련의 질도 떨어지고 포병과 기관총과 같은 화력 지원 체계도 부족한 상황이어서 제대로된 작전 수행이 힘들었다. 더군다나 이 계획이 기본적으로 속도에 기반함에도 불구하고 정작 그 속도의 핵심인 철도와 보급 문제에 있어서는 구멍 투성이었다. 단 한번의 중대한 실수가 계획 전체를 붕괴시킬 수 있었으며 실제로도 독일은 슐리펜 계획을 통해 양면전쟁의 수렁에서 빠져나올 수 없었다.

무엇보다 가장 큰 문제점은 프랑스와 러시아, 그리고 벨기에를 침공함으로 영국까지 한꺼번에 상대하는[6] 엄청난 계획인데도 독일 정부 내에서 전혀 소통이 없었다는 것이다. 외무장관이나 재상과 같은 민간 정책결정자는 물론이고 해군이나 육군 내 다른 조직과의 협의도 거의 전무해 일급 비밀인 전쟁계획을 다른 부서와 공유해 문제점을 점검한다는 생각 자체가 없었다. 이 슐리펜 계획은 슐리펜이 퇴임한 1906년에 메모 형태로 만들어졌는데 전쟁부는 6년이 지난 1912년이 되어서야 슐리펜 계획의 존재를 알았다.

3.1. 계획 시

먼저 '42일'이라는 시간 안에 프랑스를 점령까지 완료해야 했고,[7] 프랑스가 러시아에 철도 차관을 제공하면서 러시아의 동원 능력이 향상되어 슐리펜 생전보다도 시간 제한이 짧아졌다. 이 때문에 계획의 유연성이 아주 떨어져 일단 발동하면 멈추거나 바꾸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는 실제 계획(소몰트케의 수정안)을 따를 때 여실하게 드러났다. 제1차 세계 대전 개전 당시 빌헬름 2세가 참모총장 소몰트케에게 계획 변경을 요청했지만, 몰트케는 수많은 시간표로 서로 이은 계획을 그렇게 단시간 안에 못 바꾼다고 답변하며 계획을 그대로 밀어붙였다.

이 때문에 전쟁이 발발한 그날 밤, 뒤늦게 황제 빌헬름 2세가 영국과 타협할 수 있으니 군대를 멈추라고 명하자 몰트케는 반쯤 넋이 나가서 "폐하, 이미 시작했습니다."라고 답했다. 해당 답변은 이미 독일 제국군의 일부 병력이 룩셈부르크의 국경을 넘었으므로 전쟁을 멈추지 못할 수준까지 왔다는 뜻이었지만 슐리펜 계획을 중단시킬 경우 벌어질 대혼란 때문이라도 도저히 작전 중단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했다.

제1차 세계 대전 개전 직전까지 군대의 병참의 주역은 철도였으며 빠른 시간 내에 대규모의 병력을 동원하고 배치하며 보급과 수송을 하려면 당대는 물론이거니와 현대의 기준에서도 과연 수작업으로 어떻게 이렇게 정교하게 만들었는지 감탄이 나올 수준의 철도 수송 및 운영 계획을 실행해야 한다. 그래서 철도 수송 및 운영 계획은 독일 내의 모든 철도역과 화차 사용, 각 부대별 이동을 분 단위까지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계획하였다.

따라서 한 군데만 건드려도 계획 전체가 마비된다. 여기에 더해서 당시 기술의 한계로 정밀시계처럼 맞춰놓은 철도사용체계를 멈추는 그 순간, 한 달 동안은 공격은 꿈도 못 꾸고 방어를 위한 열차 동원조차도 불가능해지는 큰 문제가 발생해버리는 것이었다. 이 때 영국과 프랑스가 그 타이밍에 독일로 치고 들어오면 독일로서는 얼마 안되는 기병연대들이 자력행군하는 것 외엔 손도 못쓰고 당할 수밖에 없었다. 움직이는 일의 어려움(굽시니스트의 오만잡상툰)

3.2. 실행 시

이러한 원초적 약점에 더해 소몰트케는 슐리펜이 유언으로까지 남겼던[9] 우익강화 방침을 버리고 우익:좌익의 병력비를 7:1에서 6:2로 약화시켰다.

벨기에 방면 병력의 약 1/7이 서부전선의 좌익인 알자스-로렌 방면으로 간 것이라 그렇게까지 큰 문제는 아니지만, 네덜란드의 저항을 우려해서 마스트리흐트 돌출부를 점거하지 않았으니 그나마 줄어든 우익 병력이 이동할 통로가 더 좁아짐은 당연했다.

군사적으로는 네덜란드까지 점령해야 했으나 독일 제국이 벨기에와 달리 네덜란드를 놔둔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으며 매우 중대한 사유였다. 네덜란드군은 숫자에 비해 정예로 평가받았고, 지형상의 문제로 독일 제국군 2개 군의 발이 묶일 수도 있었다. 또한 네덜란드는 중립국이었지만 이 때만 해도 프랑스보다 오히려 독일과 가까운 나라였다. 게다가 아직 철도-차도 등 교통 인프라가 2차대전 시기보다 못하던 시기인데, 네덜란드의 전통인 댐과 제방 폭파를 써버리면 당장 올스톱. 그리고 네덜란드 침공은 경제적인 측면에서 매우 곤란한 문제였다. 독일 정부는 영국 해군이 독일을 해상에서 봉쇄할 것을 예상하면서도 영국이 감히 미국 상선을 공격하지는 못하리라고 판단했고, 네덜란드 상선이 미국 국기를 달고 물자를 수송하면 이를 네덜란드를 거쳐서 구매할 수 있으리라고 기대했다. 미국이 영국의 독일 봉쇄에 동의해 실제로는 그러지 못했지만 그래도 독일 제국은 네덜란드를 통해서 많은 물품을 구입할 수 있었다.[10]

여기에 더해서 개전 전부터 독일의 장교와 부사관, 병사들까지 '초콜릿 병사'라고 부르며 우습게 여긴 벨기에군은 막상 전쟁이 시작되자 순순히 무릎을 꿇으리라는 예상을 깨고 거세게 저항하는 바람에 계획은 더 지체되었다.

벨기에의 방어전략은 크게 국립 요새지대(Réduit national)로 대표되는 거점을 요새로 둘러싸서 방어하고 운하와 하천 방어선을 활용하고 대전차호를 파며 최악의 경우에는 해안지대로 물러나서 최후의 방어를 하는 일련의 방어대책으로 구성된다.

그래서 중요 거점이자 교통의 요지인 안트베르펜, 리에주, 나뮈르에는 도시를 둘러싸는 요새지대를 만들어놓았으며 각각 안트베르펜 요새지대, 리에주 요새지대, 나뮈르 요새지대라고 불렀으며 모두 도시 중심가를 둘러싸는 형식으로 요새를 원형으로 배치해놓았고 병력까지 배치해놓았기 때문에 우습게 볼 문제가 아니었다.

물론 벨기에라는 국가 자체가 성립 당시부터 네덜란드, 독일, 프랑스의 영토 침공 야욕에 시달렸기 때문에 안트베르펜은 네덜란드 방면 침공, 리에주는 독일 방면 침공, 나뮈르는 프랑스 방면 침공에 대응하는 형태로 요새를 발전시켰으며 이러한 특성은 1870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서 프로이센 왕국이 승리하면서 이젠 독일의 침공에 대한 방어특화로 성격을 고쳐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그냥 관성처럼 요새의 내부 배치나 구조를 변경하지 않은 탓에 각각의 요새지대는 각각 포위공격을 당해도 버티기를 할 생각으로 만들어진 바람에 서로 연계가 잘 이루어지지 않으며 벨기에 영토 내부에 한 줄로 이어진 방어선이 만들어지지도 않았다.

따라서 제1차 세계 대전에서 독일 제국군이 쉽게 각각의 요새들을 포위해버리고 주력이 우회해서 통과하는 한편 포위군은 공성포같은 중화기를 동원해서 요새를 하나씩 무력화해버리면서 들어간 비용과 노력에 비해서는 요새 지대가 쉽게 함락된 편이긴 하다. 그러나 격전이 발생했고 희생도 많았으며 가장 중요한 시간을 독일 제국군에게서 빼앗으면서 전략적인 관점에서는 슐리펜 계획에 큰 차질이 발생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본래 프랑스군을 붙들어 두기로 했던 독일 제국군의 좌익이 예상외로 선전하자, 단익포위에서 양익포위를 위한 전선돌파를 명령하는 등 갖가지 전투지도상의 실책을 연발한다. 괜히 눈 앞의 상황에 매달리다가 이도저도 아니게 되어 버리면서 단기결전이라는 목표 달성에 실패한 것이다.

서부전선에서 일이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 상황에서 동부전선에서는 위기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예상과는 달리 러시아 제국이 동원을 일찍 끝내고 대규모의 군대를 동부전선에 투입하면서 개전 초 동프로이센이 위험해졌고, 이에 따라 슐리펜 계획을 무시하고 자신들의 영지를 지키기 위해서 가지고 있던 예비대를 지원군으로 파견했다. 하지만 이 예비대가 도착하기 직전에 타넨베르크 전투에서 독일 제국군이 승리하면서 동부전선은 안정화되었고, 서부전선의 상황이 급박해지면서 다시 열차를 타고 돌아갔다. 하지만 서부전선도 예비대가 도착하기 직전에 제1차 마른 전투에서 독일 제국군이 패배하면서 단기전의 가능성이 사라져고 참호전으로 전선이 고착화되어버렸다. 끝내 이 금쪽같은 병력은 철도에 탄채 독일 영토를 동서로 왔다갔다만 하느라 시간을 낭비하면서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한 것이다. 그리고 독일 제국군은 단기결전에 실패하고 그렇게나 두려워하던 양면전쟁, 장기전의 늪에 빠지게 된다.

전략적으로 포기하기로 한 동프로이센은 독일 제국의 시작이었고, 이 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중앙정부의 실력자들은 불안감이 심했다. 러시아가 생각보다 빨리 참전했을 때, 러시아가 동원한 군대는 70개 사단이었다. 하지만 이에 맞설 독일 제국군은 겨우 12개 사단 정도였다. 그럼에도 소몰트케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러시아 제국을 공격할 때 독일 제국군의 즉각적인 지원 의사를 표명했다. 물론 독일에겐 그럴 여력이 없었으므로 명백한 소몰트케의 거짓말.

끝내 뛰어난 전략가였던 참모 막스 호프만의 건의로 타넨베르크 전투마수리안 전투에서 독일 제국군이 대승을 거두지만, 이건 결과론에 가깝다. 슐리펜은 동부전선은 프랑스를 쓰러뜨릴 때까지 전황유지만 하면 된다고 봤기 때문에, 여차하면 동프로이센을 (일시적으로) 내주는 전략적 후퇴도 고려한다는 강경책이었지만, 동프로이센을 포함한 동부 지역을 근거로 하고 있던 독일 제국의 상층부[11]는 이를 결코 수용할 수 없었으며 이건 독일 황제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동부전선의 강화는 시간이 지날수록 너무나도 당연한 수순이었다.

본래 슐리펜 계획은 독일 제국과 러시아 제국 간의 관계가 틀어진 덕분에 단기간에 결판을 봐야 승산이 있다는 결론에서 세워진 전략이었으니, 끝내 비스마르크 시절부터 유지한 러시아 제국과의 관계를 틀어버린 빌헬름 2세가 모든 배경의 근원임을 빼면[12] 누가 더 문제라고 일컬을 수도 없었다.

3.3. 오스트리아와의 불통

러시아와 프랑스가 더욱 가까워지고 동원 가능 시간이 갈수록 촉박해짐에 따라, 독일 제국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군사적 공조 필요성은 나날이 증대되었다. 우선 독일 제국군으로서는 빡빡한 슐리펜 계획의 성공을 위해서는 동맹인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이 동부전선에서 러시아군의 전력을 늦춰주어야 했다. 오스트리아군 역시, 그들이 세운 B, R, B+R계획 중 어떤 것이든 세계 2위의 육군을 보유한 러시아 제국군을 대비하기 위해서는 독일군이 폴란드 방면에서 러시아를 반드시 견제해주어야 했다.

이렇듯 양 군대는 서로를 절대적으로 필요로 했음에도 불구하고 우선순위 자체가 달랐다. 독일은 우선 가장 위협적인 적인 프랑스를 목표로 했으므로 동부전선의 러시아군은 독일 1개 군과 오스트리아군이 전담해야 했다. 반면 남부의 세르비아, 그리고 동북부의 러시아에 포위된 형국이었던 오스트리아의 입장에서는 독일군의 주력이 프랑스가 아니라 폴란드 돌출부에 포진한 러시아를 상대해 주어야 했다. 때문에 소 몰트케회첸도르프의 참모부 간에는 합동 작전을 위한 의견 조율을 통해 양 군의 목표를 일치시키는 과정을 가지거나, 하다못해 서로의 계획이 어떤지라도 알아야 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소통이 전혀 없었다. 두 군대의 참모부는 서로의 계획에 대해 몰랐으며, 서로가 자신의 계획에 맞춰 움직이기를 당연하다는 듯이 가정하였을 뿐이었다. 7월 위기가 시작되자 오스트리아는 독일에 지원을 요청하고 독일 황제와 참모부 역시 이에 화답하였으나, 실제 각국의 전략목표나 병력 운용에 대한 정보 공유는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 불통에 대해 사학자 A.J.P. 테일러는 저서 "기차 시간표 전쟁"에서 놀라울 정도라고 표현했다. 현대 독일 연방군 군사사연구소의 연구원인 게하르트 그로스 대령 역시 저서 "독일군의 신화와 진실"에서 같은 평가를 내렸다.

결국 전쟁이 발발하자 독일의 지원 의사를 믿은 오스트리아군은 자신들의 B 계획에 따라 황태자 암살단을 도운 세르비아를 응징하러 발칸 반도로 몰려가버렸으나, 막상 독일군이 자신들의 작계에 따라 프랑스를 향해 진격하는 것에 경악했다. 마찬가지로 오스트리아의 계획을 알지 못했던 독일군은, 적인 러시아군이 예상 외로 동원계획을 빠르게 마무리짓는 반면 아군의 방어선은 그다지 강화되지 않은 모습에 당황했다.

위기감을 느낀 오스트리아는 곧 계획을 B+R계획으로 전환하였으나 이로 인해 발칸반도의 전황은 완전한 교착 상태에 빠지게 된다. 급작스러운 계획 변동으로 인해 분과 초를 다투는 철도 시간표와 동원 계획이 어긋난 것이다. 그 결과 작계가 꼬이며 세르비아 침공을 증원할 예비대인 A집단군이 갈리치아로 가버린 오스트리아의 발칸 최소집단군은 결사항전의 의지로 무장한 채 산과 강을 따라 방어선을 세운 세르비아군을 밀어내지 못했다. 반면 갈리치아에 전개되었던 B집단군과 발칸으로 향하다 다시 뒤돌아 갈리치아로 올라간 A집단군은 빠르게 동원을 완료한 러시아군의 전열 앞으로 축차투입되어 처절하게 박살났다.

마찬가지로 독일 역시 1개 군단을 서부에서 빼내어 동부전선으로 보내야만 했으며 이는 슐리펜 계획의 세밀한 운용계획을 뒤흔드는 일이었다. 독일이 해당 군단을 서부전선에서 빼내지 않았어도 슐리펜 계획은 실패했으리라는 것이 중론이지만, 이들을 빼낸 것 때문에 서부전선의 독일군 전력이 확연하게 약해졌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4. 독일 제국 해군

제1차 세계 대전 당시의 독일 제국이 과거의 프로이센 왕국이나 후대의 나치 독일과 다른 점은 당대 세계 2위의 해군 강국이었다는 사실이다. 영국의 본토함대와 정면승부가 가능할 수준으로 강력하고 거대한 대양함대를 보유하고 있었으며 프랑스 해군 따위는 상대도 되지 않았고 영국도 본토함대 기반으로 함대를 추가로 강화한 대함대를 조직해야 할 정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운을 건 작전인 슐리펜 계획에 독일 제국 해군은 거의 연관되지 않았다는 미스테리가 있다.

4.1. 그럴듯한 이론

빌헬름 2세가 국가 예산의 40%까지 동원하면서 급격하게 성장시킨 독일 제국 해군은 알프레트 폰 티르피츠 제독의 지휘하에서 빠르게 내실을 갖추기 시작했으며 건함 경쟁을 통해 영국 해군의 60% 수준까지 전투력을 갖추게 되었다.

그리고 프랑스 해군의 경우에는 프랑스 제3공화국의 정치적 혼란과 함께 청년학파의 악영향이 가시지 않아서 주력함 개발 및 건조가 크게 지연되는 바람에 제1차 세계 대전이 터질 시기에는 드레드노트급 전함쿠르베급 전함 2척만 취역상태였으며 주력함의 주종은 당통급 전함같은 전드레드노트급 전함이었고 숫자까지 부족한 상황이었다. 여기에 더해서 프랑스 해군의 대부분의 전력은 지중해에 배치된 상황이기에 독일 제국 해군의 대양함대가 도버 해협을 통해서 프랑스 북부 해안을 공격하면 대응할만한 수단이 어뢰정이나 해안포 수준이라서 크게 불리했다.

영국 해군의 경우에도 본토함대의 주력은 스캐퍼플로 (Scapa Flow) 항구에 위치했는데 해당 항구는 영국 본토인 그레이트브리튼섬 북동부의 오크니 제도에 있으며 지리적으로도 북해의 북쪽을 막는 위치라서 남쪽의 도버 해협영국 해협 방면의 방어는 별도의 소수의 분견대급 함대와 해안포나 어뢰정으로 실시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큰 일이 발생하면 본토함대가 스캐퍼플로에서 도버 해협까지 이동할 때까지 시간이 좀 걸린다.

따라서 개전과 동시에 독일 제국의 대양함대가 수송선에 보급품과 독일 제국 육군 병력을 탑승시킨 다음에 같이 동행하면서 프랑스의 칼레나 벨기에의 베스트플란데런주 같은 곳에 상륙 작전을 진행하고 거점을 확보한 후 보급품을 양륙하고 병력을 상륙시킨다면 슐리펜 계획으로 벨기에를 돌파하느라고 지치고 물자부족에 시달리던 독일 제국 육군에게 보급품과 보충병력을 제공하면서 슐리펜 계획의 성공확률을 크게 올릴 수 있었을 것이다.

여기에 더해서 대양함대가 상륙 작전을 실행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칼레 같은 곳이 공격을 당할 경우 독일 제국 육군을 상대중이던 프랑스군, 벨기에군, 영국군이 파리 수비와 해안선 방어를 위해 병력을 분산하고 지원군을 공격을 받는 항구 방면으로 보내면서 독일 제국 육군을 가로막던 병력이 분산되고 숫자가 줄어들기 때문에 독일군이 전선을 돌파하기 더 쉽게 되고 진격속도도 올라갈 가능성이 높다.

종합하자면 양동 작전 겸 우회 작전 겸 보급 작전을 겸하며 효과도 충분할 것으로 예상된다.

4.2. 현실은 시궁창

상륙 작전이라는 개념은 제1차 세계 대전 초기에는 영국 해군 정도만 초기적인 개념 수준으로 생각하고 준비를 하는 수준이었으며 다른 국가의 해군은 그냥 군함의 수병제식 소총을 휴대하는 수준으로 무장한 후에 보트를 타고 상륙하는 수준 정도가 가능했고 상륙 작전이라는 개념도 없다시피 했다.

그리고 수송선이 물자와 병력을 하역하려면 항구가 필요한데 당시의 유럽 지역 항구중 쓸만한 곳에는 해안포 요새가 있고 기뢰가 촘촘하게 부설되어 있으며 수비병력도 배치되었기 때문에 수병이 보트 타고 상륙하는 수준의 공격은 충분히 막아낼 수 있다. 항구가 아닌 해안선에 병력과 물자를 상륙시키면, 수송선이나 호위함이 해안선에 좌초하는 희생을 수반하므로 불가능했다.

따라서 항구를 점령하고 싶다면 기뢰와 해안포에 전드레드노트급 전함 몇 척 정도는 소모품처럼 순식간에 날려먹을 각오를 하고 항구에 군함과 수송선을 동시에 강습시켜서 부두에 배를 강제로 접안한 후에 병력을 쏟아붓는 식의 희생이 많고 성공확률이 낮으며 수비병력이 항구시설을 파괴할 가능성이 높은 위험한 작전을 해야 한다. 그런데 상륙 작전의 개념 자체가 없는 독일 제국 해군이 이 정도의 유연성을 보일 수준이 아니었다.

천신만고 끝에 적당한 항구를 점령했다고 하더라도 상륙한 병력을 지원하고 독일 제국 육군이 도착할 때까지 해당 항구와 주변을 독일 제국 해군이 수비해야 하는데 시간을 지체할수록 대양함대를 포함한 독일 제국 해군의 주력이 위기에 빠진다.

그 이유는 영국 해군이 함대결전을 걸어올 것이기 때문이다. 영국 해군의 입장에서는 초기의 혼란에서 벗어나자마자 독일 제국의 대양함대가 영국 코 앞까지 바짝 전진했으니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함대결전을 걸어서 모두 때려잡자고 환호하면서 본토함대를 비롯한 가용 가능한 해군 전력을 모조리 투입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영국 해군이 함대결전을 손쉽게 생각할 수 있는 이유도 있었다. 도버 해협이나 영국 해협에는 협상국의 해안포, 어뢰정, 기뢰가 깔려 있고 해협의 물살, 해협의 폭 등 여러가지 면에서 독일 제국 해군에 너무나 불리했으므로 가급적 빨리 빌헬름스하펜같은 본거지로 귀환해야 한다.

그런데 대양함대가 본거지로 후퇴할 경우 점령한 항구에는 고작 전드레드노트급 전함 몇 척을 주력으로 한 호위함대 정도만 현지에 남게 된다. 이렇게 될 경우에는 순식간에 영국 함대에게 함대와 항구와 보급품과 상륙병력이 대타격을 입게 된다. 실제로 개전 당시에서 얼마 지나지도 않은 1914년 8월 28일에 독일 제국 해군의 근거지 근처에서 일어난 헬리골란트-바이트 해전에서의 독일 제국 해군은 졸전을 벌였다. 이를 고려할 때 슐리펜 계획으로 접근중인 독일 제국 육군을 지원하기도 전에 순식간에 일망타진 당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인해 대양함대를 비롯한 독일 제국 해군의 주력이 불리한 곳에서 함대결전까지 하면서 버티기 겸 대규모 희생을 감수해서라도 슐리펜 계획의 성공 확률을 끌어올려야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하지만 이렇게 중대한 결심을 독일 제국 해군이 하려면 그 전에 독일 제국 육군과 충분히 협의를 해야 하고 황제인 빌헬름 2세도 순식간에 그 동안 키워온 해군을 모조리 한방에 날릴 각오를 해야 하며 해군 내부에서도 중대한 결심을 해야 하는 등 난관이 많다. 현대 시점에서도 곤란한 일 투성이인데 당대에는 육군은 육군이 알아서 작전하고 해군은 해군이 알아서 작전하며 합동군 개념이 없었다.

슐리펜 계획을 실행할 시기는 그 동안 국가 예산을 대폭 투입해가면서 키워온 독일 제국 해군이 자신의 임무를 톡톡히 할 기회였다. 하지만 합동군의 개념이 없고 육군과 해군이 서로 독자적인 작전목표를 가지고 서로 신경쓰지 않고 각자의 일만 하는 당대의 지휘 구조와, 상륙 작전이라는 개념 확립되지 않았던 한계점, 과연 해군을 한번에 날려먹는 희생을 각오하면서까지 슐리펜 계획의 성공확률을 끌어올릴 것인지에 대해 빌헬름 2세가 결단할 것인가라는 문제로 인해 결국 슐리펜 계획에서 독일 제국 해군은 강력한 전력을 보유했음에도 불구하고 방관자가 되고 만다.

4.3. 영국 습격은 불가능

발상의 전환으로 양동 작전의 특성을 더 강화해서 영국 본토 어딘가에 기습적인 상륙 작전 및 함포 사격을 하면 효과가 더 좋을 것이라는 생각을 할 수도 있다.

하지만 후대에 나치 독일이 생각했던 바다사자 작전에서 보이는 각종 난관이 발생하는데다가 상륙한 병력의 철수가 매우 힘들어지며 애초부터 구원군이 도달할 수 없다고 생각할 독일 제국 육군이 쓸데없는 병력 손실이라고 거부할 것이기에 계획 수립의 가능성도 없다시피하다.

애초에 위에 언급한 상륙 작전도 당대의 독일 제국 해군의 한계를 참고하여 중립국인 네덜란드 영해를 살짝 우회하는 것을 제외하면 북해의 남해안에 바짝 붙어서 항해하며 아무리 멀리 가봤자 도버 해협의 입구인 칼레쯤에서 진격이 마무리되며 실제 역사상에서 독일 제국이 대부분 점령한 베스트플란데런의 오스텐트(Oostende) 처럼 독일 제국 육군의 최전선에서 매우 가까운 곳에 상륙한다는 것을 가정한 것이다. 따라서 상륙 병력도 해군이 설령 후퇴하더라도 얼마 지나지도 않아서 독일 제국 육군의 본대와 합류하거나 적어도 육로로 돌파 및 탈출시도를 할 수 있으므로 계획 수립 및 실행 가능성이 높은 경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술한 문제점이 가득하여 실행이 곤란한데 문제점이 더 많은 수준인 영국 본토에 상륙하는 작전을 시행할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리고 상륙 작전 없이 대양함대의 고속군함들을 동원해서 영국 본토의 해안 도시나 마을을 함포로 포격하고 도주하는 습격은 이미 제1차 세계 대전 당시에 실행되었으며 곧 도거 뱅크 해전이 벌어지면서 사실상 차단된다. 덤으로 공격 성과도 빈약해서 전선의 동요나 후방의 혼란이 거의 발생하지 않았기에 결론적으로는 실패하였다. 따라서 영국 본토 습격작전은 불가능하다고 볼 수 있다.

5. 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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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회중시계제1차 세계 대전 중에 빌헬름 2세
오토 폰 보겐호프(Otto von Bogenhoff) 장군에게 수여한 IWC 회중시계다.
시계 케이스에 적혀있는 독일어
'FELDZUG GEG FRANKREICH RUSSLAND ENGLAND usw'로
FELDZUG는 전역이란 뜻이고,
GEG는 ~에 대하여란 뜻이며,
FRANKREICH RUSSLAND ENGLAND는 각각 프랑스, 러시아, 영국.
usw[13]는 라틴어의 etc. 와 같은 뜻으로, 기타 등등이라는 의미다.
다시 말해 프랑스, 러시아, 영국, 기타 등등 전역이란 얘기인데,
당시 독일은 말 그대로 사방이 적으로 둘러싸인 상태였다.

계획을 세우는 데 가장 큰 적은 완벽한 계획을 꿈꾸는 것이라는 카를 폰 클라우제비츠의 금언을 무시한 결과 슐리펜 계획은 1차 목표조차 달성하지 못하고 무너진다.
초반기에는 슐리펜이 프랑스의 가장 하책이라고 여긴 알자스 진공을 프랑스군이 기꺼이 해서 장밋빛 미래가 보였으나, 벨기에의 저항으로 이레 가까이 전선이 벨기에 방면에 묶였고, 센 강을 방어선으로 삼아 버텨보려는 프랑스군 총사령관 조제프 조프르의 작전[14]을 프랑스군 소장파와 노장 조제프 갈리에니가 마른 전투에서 성공적으로 수행해내어 독일 제국의 전략적 목표 좌절이라는 역사적인 결과를 냈다.

끝내 이 싸움에서 측면을 찔린 독일 제국군이 안정적인 고지대를 선점하러 전선을 조금 물리면서, 서부 전선은 북해 연안에서 스위스 국경지대까지 참호가 형성됐다. 그리고 피로 피를 씻는 4년 간의 참호전이 열렸다.

그리고 이 참호전 속에서 굴렀던 아돌프 히틀러는 극도로 공산주의를 혐오했지만, 1939년 전격적으로 독소 불가침조약을 성사시키면서 전선을 서쪽으로 한정하고 파리를 점령하는 데 성공한다. 어떤 뜻에서 보자면 제2차 세계 대전 초기 소련과 불가침조약을 맺고 서쪽으로만 급속 진군한 독일 국방군의 모습이야말로 슐리펜 계획의 진정한 형태였다.

독일에서 프랑스로 진격할 때 알자스-로렌 방면은 라인 강과 보주[15] 산맥 및 고지대를 지나야만 하니, 신속하게 프랑스와의 전쟁을 끝내려면 저지대 지역인 베네룩스 3국을 강행통과해야 한다. 프랑스도 마찬가지여서, 신속하게 독일 제국과의 전쟁을 마무리하려면 역시 베네룩스 3국을 강행통과해야 하며, 실제로 1913년의 프랑스군 참모총장은 독일 제국과의 전쟁 시 벨기에를 통과해서 독일 영토로 진격하자는 제안을 총리에게 했다. 슐리펜 계획에서 설정한 돌파경로는 보편타당한 셈. 그러나 이건 프랑스 입장에서나 그럴 듯한 이야기지 예정에도 없는 양면전쟁을 벌여서 시간에 쫓기는 독일 제국에게는 울며 겨자먹는 도박일 뿐이었다.

1차대전과 슐리펜 계획은 전쟁에서의 철도의 역할을 보여줬지만 그 한계 또한 같이 드러냈다. 협상군과 동맹군은 철도를 이용해 엄청난 수의 병력을 동원하는데 성공했고, 그 부대를 유지할 엄청난 양의 보급품을 철도로 수송했다. 하지만 철도 종단점은 전투부대를 따라가기엔 너무 경직되었으며, 독일 제국은 벨기에의 철도가 조직적으로나(후퇴하는 벨기에군의 파괴공작) 비조직적으로나(사보타주) 파괴될 것을 예견하여, 철도를 신속히 복구하기 위한 인원, 장비 등을 보유한 철도중대를 가지고 있었으나, 철도의 복구 속도가 파괴 속도를 따라잡을 수 없었다. 따라서 대부분의 전투부대는 철도 종단점과 한참 떨어져서 행동해야 했다.

게다가 철도 종단점과 전투부대 사이를 이어줄 수송부대는 전쟁 초기의 병력동원 시점에서부터 전투부대와 떨어져버렸다. 이는 최대한 빠른 병력소집을 위해, 병력동원 시기에서의 철도사용 최우선권을 전투부대에 주었기 때문이다. 결국 철도역에는 피복과 탄약이 굴러다니고 전투식량이 썩어가고 있었지만, 전선에 도달하는 양은 일부에 불과했다.

그 당시에도 구데리안이 화물차를 전투용으로 개조하고 싶다고 말했던 일화가 있던 만큼 화물차가 있긴 있었지만 일반 차량조차도 최신문물로 취급받을 정도로 대중화된 지 얼마 안 되는 시점이었고 현가장치도 기술적 개념 제시는 몰라도 실용화는 저조한 상태였다. 그리고 구데리안의 말을 들은 군수장교의 대답이 일품이다. "그럼 밀가루는 누가 옮겨?" 애초에 2차대전 당시에도 모자란 화물차가 1차대전때 풍부할리가 없었고 기존의 화물차는 이미 보급품 운송에도 모자란 실정이었다.

이렇기 때문에 보급전의 역사로 유명한 마르틴 반 크레펠트는 이를 넘어서 슐리펜 작전 원안은 보급계획이 관념적 수준이었으며 오히려 사실성 있게 재편한 것이 소몰트케의 조정안이었다고 주장하였으며, 이를 넘어서 테렌스 쥐베르는 슐리펜 계획은 그저 독일의 전쟁계획이 1차대전을 일으켰다고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독일의 정신승리라고 원색적인 비난을 일삼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주장은 테렌스 홈즈나 로버트 홀리같은 학자들에게 반박당하기도 했다.

세계대전사로 유명한 존 키건은 슐리펜 계획은 현실적이고 수학적, 지리적 현실을 반영한 작전이나, 프랑스와 벨기에의 인프라를 이용하기까지 비포장도로 수백 km를 자력으로 이동해야 하고, 독일군이 프랑스와 벨기에의 변경에 설치된 인프라를 확보한다 하더라도 해당지역의 빈약한 인프라로는 파리 점령에 필요한 병력을 착실히 전개시키지는 못했을 것이라며 가망이 없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결정적으로, 설령 파리를 점령했다고 한들 제2차 세계 대전처럼 염전 사상이 퍼지지 않았으며 좌우갈등은 심했지만 독일 제국에 대한 복수심에 불타는 것은 좌우를 가리지 않던 상태의 프랑스가 곧바로 항복을 했을 가능성은 미지수였다. 게다가 독일 제국군은 전쟁을 끝낼 전략적 목표가 없었으니 계획의 성공이 독일의 승리를 불렀을 가능성도 적다.

6. 몰트케가 망쳤는가?

슐리펜 계획이 실패한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위에서 설명한 것과 같은 예비군의 작전 수행 능력 부족과 철도 보급 수송 능력의 약화 및 그로 인해 계획의 핵심인 빠른 진격 속도를 전개할 수 없었던 것이 결정적인 요인이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이러한 슐리펜 계획의 실패 원인이 헬무트 요하네스 루트비히 폰 몰트케가 완벽했던 계획을 무리하게 수정한 탓이라는 주장을 하기도 하였는데 이는 결론적으로 한계가 있는 시각이라 평가된다.

이러한 주장은 제1차 세계 대전 종전 이후 독일 사학자들이 슐리펜 계획은 승리의 청사진과도 같은 완벽한 계획이었으나 몰트케가 심각하게 훼손했다는 의견을 자평한 것에 기반한다. 이러한 조류를 이끈 것은 독일군 고급장교들로, 이들이 전후에 작성한 회고록으로 인해 속전속결로 끝났어야 할 슐리펜 계획이 4년간의 소모전으로 변질된 것은 순전히 몰트케의 잘못이지, 독일의 전략적 계산이 절대 잘못된 것이 아니라는 일종의 '서사'같은 이야기가 성립되었다.

하지만 1956년 게르하르트 리터의 슐리펜 계획 미신 비판(Der Schlieffenplan: Kritik eines Mythos)이라는 이름의 책이 출판되면서 슐리펜 계획이 승리를 위한 청사진이었다라는 관점은 재평가된다. 승리의 청사진 따위가 존재한다는 생각은 대 몰트케 이래로 정립된 군사 작전이 선천적으로 예측 불가능하다는 프로이센의 전쟁계획 전통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기동 계획이나 배치 계획 정도는 만들어질 수 있으나, 전역 계획 따위는 아무 짝에도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1970년대부터는 다양한 학자들이 벨기에를 통한 프랑스 침공작전의 실용적 측면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이들에 따르면 애당초 독일 - 벨기에 - 프랑스 철도망과 벨기에 - 북프랑스 도로교통망은 물리적 한계로 인하여 충분한 수의 병력을 충분히 빠르게 이동시킬 수 없었다. 슐리펜 계획의 가장 중요한 부분 중 하나인 속도에 커다란 구멍이 뚫려있던 셈이다.

몰트케가 모든 것을 망쳐버렸다는 이러한 서사같은 이야기가 퍼진 이유는 1914년 이전에 독일 참모들이 작성한 관련 기록들이 대부분 기밀이었고 문서들이 1945년 4월 포츠담 폭격으로 프로이센 육군기록보관소가 파괴될 때 모두 소실되었기 때문이다. 폭격에서 살아남은 소수의 기록들마저도 냉전이 시작되자 동독 측이 가져가 버려 독일 재통일 이후에야 접할 수 있게 되었으며[16] 이 자료들로 인해 최초로 독일의 전쟁계획에 대한 윤곽을 그릴 수 있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1918년 1차대전 종전 이후에 나온 몰트케의 슐리펜 계획 수정안과 같은 분석들은 대부분 틀린 것으로 규명되었다.

7.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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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프레트 폰 슐리펜

슐리펜 계획의 작성자인 알프레트 폰 슐리펜 장군은 사진에서 풍기는 인상처럼 전형적인 독일 장군이었던 듯하다. 새벽녘에 부관과 같이 바깥 순찰을 돌다가 부관이 아침 햇볕에 빛나는 동프로이센을 흐르는 프레겔 강의 경치를 보며 감탄하자, 흘끗 쳐다보고는 "사소한 장애물일 뿐!"이라 일축하고는 제 갈 길을 갔다고 한다. 거기다가 시계마냥 철저하게 시간표대로 생활했다고.

2013년에는 다큐전문 채널인 히스토리 채널에서 제작한 1913년 - 1917년기의 제1차 세계 대전 때 화성인이 쳐들어와 웰즈의 우주전쟁과 같은 일이 벌어진다는《The Great Martian War》라는 페이크 다큐멘터리에서는 프랑스를 공격하는 게 아니라, 화성인 군대를 피해 모든 독일 제국군 및 독일 민간인들을 프랑스로 대피시키는 작전으로 나온다.

8. 같이보기


[1] 흔히 "아무리 훌륭한 전투 계획이라도 첫 포성이 울리는 순간 휴지 조각이 되어 버린다."로 알려져 있다.[2] 프랑스를 39일 만에 박살내고 42일차에 점령을 끝내는 것을 목표로 했다.프랑스를 6주동안 제압한다라...[3] 러시아는 워낙 광대한 영토와 라스푸티차 탓에 장거리 도로 수송은 힘들다. 지금도 인력과 물자 수송은 절대적으로 철도에 기댄다.[4] 전쟁이 터지자 이 부분이 엇나갔는데,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이탈리아러시아는 물론 열강 반열에 끼지도 못한 세르비아조차 이기지 못하고 고전했다.[5] 독일 입장에서는 좌익.[6] 전통적으로 영국은 자국의 해안선의 맞은 편인 네덜란드, 벨기에로 이루어진 저지대의 독립을 자국 방어의 생명선으로 생각했다. 아울러 벨기에의 독립과 중립은 영국이 보장해준 것이기 때문에 중립국 벨기에에 대한 침공을 그대로 놔두면 영국은 큰 외교적 손실을 감수해야 한다.[7] 교통과 기술이 훨씬 발달한 2차 세계대전 당시에도 나치 독일이 프랑스를 무너뜨리는 데는 46일이 걸렸다. 연합군이 어마어마한 삽질을 벌이고 소련이 동부로 쳐들어오지 않았는데도 그렇다.[8] 이 문제는 2차 대전 초반부 나치 독일프랑스 침공을 준비할 때도 심각한 문제로 대두되었다.[9] 슐리펜은 죽기 직전까지 머릿속에서나마 계획의 업데이트를 하고 있었고 '사단 몇 개만 더 있었더라면...' 이라고 혼잣말을 내뱉던 일도 있었다. 그만큼 이 계획은 그에겐 국가에 대한 마지막 충성이었으며 동시의 그 자신의 혼신의 역작이었다.[10] 사족이지만 독일 제국이 1차대전에서 승전하면 네덜란드가 독일 제국에 합병 내지 종속화될 거라 생각하고 네덜란드어를 열심히 공부한 사람들이 꽤 있었다고 한다. 그 중 한 명이 바로 요제프 괴벨스.[11] 에리히 루덴도르프파울 폰 힌덴부르크부터가 포젠 출신이다.[12] 독러관계는 비스마르크 시절부터 이미 천천히 망가져 갔지만 그렇다고 빌헬름 2세에게 면죄부가 나오지는 않는다.[13] Und so weiter의 준말. '운트 조 바이터' 정도로 발음한다.[14] 이미 프랑스 정부는 보르도로 이전. 제2차 세계 대전 때도 똑같이 해보려다가 끝내 길을 멈추고 비시에서 나치 독일에 항복하기로 결정했다.[15] 독일어로는 Vogesen(포게젠).[16] 1930년대 독일에서 1차대전 이전 독일 참모본부의 전쟁계획을 연구하는 데 쓰인 문서 RH61/v.96 같은 경우 2000년대 들어서야 동독 지역에서 발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