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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기(州旗) | 주장(州章) |
포젠의 위치 | |
국가 | 프로이센 왕국/독일 제국 → 폴란드 제2공화국 |
주도(州都) | 포젠 |
1. 개요
Posen.[1] 1918년까지 프로이센 왕국과 독일 제국의 동부 지방에 자리잡은 지역. 폴란드 분할 이전 중세 ~ 근세 시기에는 폴란드-리투아니아의 영토였기 때문에 독일과 폴란드 두 국가의 역사가 겹치는 지역이며, 이에 따른 양국간의 분쟁도 거세서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원인의 하나이기도 했다.[2] 오늘날에는 전역이 폴란드 영토이다. 이 지역이 역사적으로 독일, 폴란드 양국의 세력이 교차하는 지역 중 하나인건 맞지만 중세부터 신성 로마 제국의 영향권으로 편입된 포메른, 슐레지엔 및 독일계 튜튼기사단에 의해 개척된 동프로이센, 그리고 오랫동안 독일계와 폴란드계 주민들이 영유권을 놓고 팽팽하게 맞선 서프로이센과 달리 포젠(포즈난)은 분할 후 프로이센 통치기, 이후 나치 점령기를 제외하곤 온전히 정치적, 인구 구성 면에서 폴란드 영향권이었으며 단 한 순간도 독일계가 다수를 차지하지 못했다.[3]참고로 폴란드 제2공화국이 1931년 시행한 인구조사에 따르면, 과거 프로이센의 포젠 주 중 제1차 세계 대전 후 폴란드에 귀속된 지역에 설치된 포즈난 주(Województwo Poznańskie)의 인구 비율은 폴란드인이 91%, 독일인이 7%였다. 역사적으로 폴란드 영토였던 만큼 폴란드인이 절대다수를 차지하고 있었다.
2. 역사
9~10세기 무렵 오늘날 폴란드인의 조상뻘인 슬라브족의 일원인 폴란인이 이 곳에 터전을 잡으면서 포젠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12세기 이후로 동방식민운동에 의해 많은 독일인이 이 지역으로 건너오기도 했지만, 주민중 절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던 것은 여전히 폴란드인이었다. 폴란드-리투아니아의 초창기였던 16세기가 이 지역의 전성기로, 이 일대에 자리잡은 도시들이 한자동맹에 가입했으며 리투아니아 대공국과 서유럽을 잇는 교통의 요지에 위치했다는 점을 이용한 중개무역[4]을 통해 많은 부를 쌓을 수 있었다.하지만 17세기 이후로 잇따른 전쟁, 특히나 대홍수와 대북방전쟁으로 인하여 이 지역의 운명은 폴란드-리투아니아와 궤를 같이 하여 완전히 나락으로 떨어졌다. 결국 1772년과 1793년의 폴란드 분할을 통하여 이 지역은 프로이센 왕국의 영토로 들어갔다. 나폴레옹 전쟁 시기에는 프로이센이 나폴레옹에게 제대로 깨지는 바람에 일시적으로 바르샤바 공국의 영토로 편입되기도 했지만 나폴레옹이 몰락하고 빈 체제가 수립되면서 원상태로 회귀. 초창기 프로이센은 이 일대에 포젠 대공국을 세워 상당한 자치를 허용했지만 1830년 폴란드 입헌왕국의 폴란드인이 러시아 제국에 대항해 대대적으로 일으킨 11월 봉기에 깜짝 놀라 본격적으로 감시와 함께 강제 동화 정책을 실시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고집 하나로는 유럽 최강이라고 명성이 높은 폴란드인은 탄압에 굴하지 않고 1848년 3월 혁명으로 프로이센이 어수선한 틈을 타서 다시 독립투쟁을 강행하니 이것이 바로 1848년 대폴란드 봉기.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마저 민중의 요구에 굴복해 자유주의적 통치를 약속한 만큼 이번에는 정말 독립이 이루어지나 했는데 아시발꿈. 프랑크푸르트암마인에서 소집된 독일 의회는 폴란드의 자치 요구를 상큼하게 무시하고는 포젠을 독일 연방에 편입시켜 버렸다.[5] 그리고 혁명을 진압하고 프랑크푸르트 독일 의회를 해산시켜버린 프로이센 왕국 역시 독일 의회의 결정과 별반 다르지 않아 1848년 12월 포젠 대공국을 폐지하고 포젠을 프로이센 왕국의 일개 주로 편입시켰다.
그리고 1871년 독일 제국이 수립된 이후로 프로이센 당국은 더더욱 폴란드인들을 가혹하게 탄압했다.[6] 흔히 문화투쟁(Kulturkampf)이라고 잘 알려진 비스마르크의 가톨릭 탄압 역시 폴란드인 사이에서 민족적 구심점으로 작용하고 있던 가톨릭을 와해시키기 위한 목적이 컸으며, 그 외에도 독일인 이주 장려, 산업성장 방해[7] 등을 통해 폴란드인을 독일인에게 영구적으로 예속시키고자 시도했다.[8]
제1차 세계 대전 중 포젠은 동프로이센과 함께 러시아가 차지하려는 목표지가 되었다. 그러나 1918년 제1차 세계 대전에서 독일 제국 뿐만이 아니라 러시아 제국 또한 몰락하자 민족자결주의와 1918년 대폴란드 봉기에 의거하여 이 지역은 얄짤없이 폴란드 제2공화국의 영토로 넘어갔다.[9] 모든 지역이 다 넘어간 건 아니고 포젠 최서단 지역의 독일인이 상대적으로 많이 거주했던 몇몇 국소적인 구역은 바이마르 공화국에 존속했다.
2.1. 후신(?) : 포젠-서프로이센 변경주
독일인이 많이 거주해 바이마르 공화국에 잔류했던 포젠 주 일부 지역들(슈나이데뮐 시, 네체 지구, 봄스트, 프라우슈타트, 슈베린, 메제리츠)은 마찬가지로 독일에 잔류한 서프로이센 지역 일부를 합쳐, 1922년 7월 1일에 '포젠-서프로이센 변경주(Grenzmark Posen-Westpreußen)'가 출범했다. 주청 소재지는 슈나이데뮐(Schneidemühl).[10]포젠-서프로이센 변경주의 영역. 남쪽 덩어리 전부, 그리고 북쪽 덩어리 가운데 남쪽 끝 네체 지구와 주도 슈나이데뮐이 구 프로이센 왕국령 포젠 주였던 지역이다. 그러나 나치가 집권하면서 1938년, 이 변경주를 포메른과 브란덴부르크, 슐레지엔에 분할 합병시켰다.
2.2. 역사 속으로 사라지다
제2차 세계 대전 시기 잠깐 나치 독일의 영토로 편입되었지만 독일의 패전 이후 오데르-나이세 선에 근거하여 이 일대는 다시 폴란드에게 돌아왔다. 분쟁의 불씨를 없애기 위해 소련과 폴란드 인민 공화국이 포젠-서프로이센 변경주에 거주하는 독일인과, 기존 폴란드 제2공화국의 영토인 포즈난 주, 포모줴 주에 거주하던 독일계 주민들[11]을 모두 독일 본토로 추방했다.현재 지역과 도시의 이름은 폴란드어 지명인 비엘코폴스키에하고 포즈난이다.
[1] 독일어에서는 지역 이름과 주도(州都) 이름을 모두 Posen이라 했지만, 폴란드어로 도시는 포즈난(Poznań), 지역은 비엘코폴스카(Wielkopolska, 대(大)폴란드)라고 구분해 부른다.[2] 다만 동프로이센과 독일 본토를 이어주는 단치히와 서프로이센, 고도로 발달한 공업지대인 오버슐레지엔과 비교했을 때 중요도는 크지 않았다. 폴란드에게 반환을 요구하는 우선순위에서도 앞의 세 지역에 비해 크게 떨어져서 독일 입장에서는 수도 베를린과 핵심 지역 브란덴부르크를 보호할 수 있는 완충지대로서 있으면 좋고, 없어도 그만이었던 지역이었다. 반면 폴란드 입장에서는 중세 폴란드 왕국의 시작이자 첫 수도 그니에즈노가 있던 지역이니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지역이었다.[3] 다만 이는 외교적 선택의 실수가 원인이다. 독일, 즉 프로이센 왕국은 포젠을 획득한 후 이미 이전부터 꾸준히 증가하던 독일인 이주를 더욱 장려하면서 개척해나갔고 독일 제국 건국 이후에도 그러했다. 하지만 정책적, 외교적 선택의 실수로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고 패전하여 베르사유 조약에 의해 포젠 지역을 완전히 독일화하기 이전에 상실하고 말았다.[4] 특히나 모직 무역이 말 그대로 황금알을 낳는 거위였다.[5] 사실 프랑크푸르트 의회 안에서 '포젠을 둘로 갈라서 독일인이 많이 사는 곳은 독일 연방에 포함시키고 폴란드인이 많이 사는 곳은 자치권을 준 다음 독일 연방에서 빼버리자'라는 의견이 꽤 나왔지만 격렬한 논쟁 끝에 결국 무산되었다.[6] 그 전인 1861년 4월 14일 비스마르크는 여동생에게 "우리가 존속하려면 폴란드인은 뿌리채 뽑아버려야만 한다"고 언급한 바 있다.[7] 그래도 독일 영토라고 러시아 제국령 폴란드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령 폴란드보다는 부유하긴 했다. 러시아령은 상대적으로 공업화가 잘 된 편이었지만 생활 수준은 독일령만 못했고, 오스트리아령 폴란드에 세워진 갈리치아-로도메리아 왕국은 카르파티아산맥 때문에 제국 본토와 단절되어 있다는 문제로 인해 산업화와 경제 발전이 원활하지 않아 공업은 물론, 생활수준도 매년 아사자가 수두룩하게 발생할 정도로 낮았다. 대신 합스부르크 제국 특유의 느슨하면서도 관대한 슐람페라이적 관행 때문에 문화적인 자유는 물론 방임에 가까운 자치를 받아 살기에는 가장 편했던 것으로 보인다. 오늘날에도 폴란드 서부와 폴란드 동부는 경제 수준이나 정치 성향의 차이가 크지만, 이것은 2차대전 후 폴란드가 상대적으로 선진적인 독일의 동부 영토를 대거 접수했기 때문이다.[8] 언어사용을 기준으로 삼을 경우, 독일 제국 내 폴란드인 인구 비율은 대략 5~6% 정도로 본다. 1900년 실시된 인구 조사에서는 독일 제국 전체 인구 중 5.48%에 해당하는 3,086,489명이 폴란드어를 제1언어로 사용한다고 응답하였다. 다만 상술한 동화정책을 감안하면 종족적으로 폴란드인에 속하거나 독일어를 사용하지만 폴란드인 정체성을 가진 사람의 비중은 더 늘어날 수도 있다.[9] 폴란드 제2공화국은 독일에서 넘겨받은 과거 프로이센령 포젠 주에 포즈난 주를 설치했다. 서프로이센 주에는 포모줴 주가 설치되었다.[10] 현 폴란드 피와(Piła)[11] 이들처럼 타국에 살고 있는 독일계 주민들을 일컬어서 민족독일인(Volksdeutsche)이라고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