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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제국 초대 수상 오토 폰 비스마르크 Otto von Bismarck | |||
본명 | Otto Eduard Leopold von Bismarck 오토 에두아르트 레오폴트 폰 비스마르크 | ||
출생 | 1815년 4월 1일 | ||
프로이센 왕국 작센 주 쇤하우젠[1] | |||
사망 | 1898년 7월 30일 (향년 83세) | ||
독일 제국 프리드리히스루[2] | |||
국적 | [[프로이센 왕국| ]][[틀:국기| ]][[틀:국기| ]] (1815 ~ 1898)[3] [[독일 제국| ]][[틀:국기| ]][[틀:국기| ]] (1871 ~ 1898) | ||
재임기간 | 프로이센 왕국 제28대 총리 | ||
1862년 9월 23일 ~ 1873년 1월 1일 | |||
프로이센 왕국 제23대 외무장관 | |||
1862년 11월 23일 ~ 1890년 3월 20일 | |||
북독일 연방 초대 연방수상 | |||
1867년 7월 1일 ~ 1871년 3월 21일 | |||
독일 제국 초대 수상 | |||
1871년 3월 21일 ~ 1890년 3월 20일 | |||
프로이센 왕국 제28대(2) 총리 | |||
1873년 11월 9일 ~ 1890년 3월 20일 | |||
서명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묘소 | 비스마르크 영묘 | |
부모 | 아버지 칼 빌헬름 페르디난트 폰 비스마르크 어머니 빌헬미네 루이스 멘켄 | ||
형제자매 | 형 베른하르트 여동생 말와인 | ||
배우자 | 요한나 폰 푸트카머 (1847년 결혼 7월 28일 1894년 사별) | ||
자녀 | 장녀 마리 (1847 ~ 1926) 장남 헤르베르트 (1849 ~ 1904) 차남 빌헬름 (1852 ~ 1901) | ||
학력 | 그라우엔 클로스터 김나지움 (졸업)(1830 ~ 1832) 괴팅겐 대학교 (법학)(1832 ~ 1833) 베를린 대학교 (법학)(1832 ~ 1835) 그라이프스발트 대학교 | ||
직업 | 외교관, 정치인, 변호사 | ||
신체 | 키 193cm[4] | ||
종교 | 개신교 (루터교회) | ||
작위 | 공작[5] | ||
정당 | [[무소속(정치)| 무소속 ]] | ||
경력 | 프로이센 왕국 하원의원 독일 연방 연방의회 프로이센 특사 프로이센 왕국 상원의원 러시아 제국 주재 프로이센 대사 프랑스 왕국 주재 프로이센 대사 프로이센 왕국 제28대 총리 프로이센 왕국 제23대 외무장관 북독일 연방 초대 연방수상 독일 제국 초대 수상 프로이센 왕국 제28대(2) 총리 | ||
군사경력 | |||
복무 | 프로이센 왕국군 | ||
1838년 ~ 1839년 | |||
최종계급 | 육군 준원수 상급대장(Generaloberst mit dem Range als Generalfeldmarschall)[6] | ||
수훈 | 푸르 르 메리트 민사훈장 푸르 르 메리트 군사훈장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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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Nicht durch Reden oder Majoritätsbeschlüsse werden die großen Fragen der Zeit entschieden, sondern durch Eisen und Blut. 당면한 문제들은 오로지 철과 피로만 해결될 수 있다.[직역] 제국 수상 취임 연설 中 |
절묘한 외교술로 19세기 유럽의 세력 균형을 주도했으며, 내부적으로는 현대 사회보장제도의 기반을 마련하는 등 많은 업적을 남겼다. 그러나 독단성과 부정적 이미지로 인해 점차 인기를 잃어가다 빌헬름 2세와 갈등[8]을 겪고 정계를 은퇴했다.
2. 생애
2.1. 초기 활동
프로이센 왕국 작센 주[9] 쇤하우젠(Schönhausen) 출신 융커 귀족 집안에서 태어났다. 비스마르크 가문은 15세기 호엔촐레른 가문이 브란덴부르크 선제후로 봉해지기 전부터 브란덴부르크에 거주하던 가문으로[10] 프리드리히 대왕 치세에 비스마르크의 큰아버지인 에른스트, 프리드리히가 군공을 세워 장성으로 진급하는 등 일약 출세했다. 그러나 오토의 아버지인 카를은 체면치레로 예비역 장교 지위만 획득한 흔한 지주였고, 전사한 에른스트와 자식이 없던 프리드리히의 토지가 가문의 상속법[11]에 의해 듣도 보도 못한 친척에게 상속되는 등[12] 오토가 장성한 시점에는 별 볼 일 없는 가문이었다.반면 외가인 멩켄 가문은 베를린에 거주하는 부르주아 지식인 집안으로 외증조부는 법학 교수, 외조부는 대사를 역임했으며[13] 비스마르크의 어머니 빌헬미나 루이스 멩켄은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 빌헬름 1세와 소꿉친구였었다. 원래 빌헬미나는 오토의 큰아버지 중 하나와 결혼하기로 했으나, 나이 차이가 너무 많이 난다는 외삼촌의 반대로 오토의 아버지와 결혼했다. 그렇게 결혼한 부부의 사이는 원만하지 못했다. 아버지는 가정적이었으나 우유부단해 아내에게 눌려 지냈고[14], 어머니는 화려하고 강단 있으며 사교적인 성격이었으나 가정에 무심하고 가족과 관계가 좋지 못했다. 그 와중에 태어난 베른하르트, 오토, 말츠위나 남매는 어린 나이에 기숙사 달린 학교로 보내져[15] 명절에도 집에 돌아오지 못했다. 이때 오토는 학업에 별다른 재능이나 흥미를 보이지 않고, 언어와 고전에 심취하여 시간을 보냈다.[16]
장성한 오토는 괴팅겐 대학교로 진학했다.[17] 그렇게 진학한 대학에서는 매일을 술, 총, 주먹과 함께 보내며[18] 걸핏하면 결투하자고 난동을 부려 주변에 악명이 자자했고 총 25번이나 결투를 했다. 그리고 이때 '부르셴샤프트(Burschenschaft)'라는 자유주의자 모임에 잠깐 가입했다 탈퇴하기도 했고[19], 나중에는 각종 도박과 사치에 눈이 돌아 빚이 쌓이자 자퇴하고 베를린 대학교로 편입해 들어갔다.
베를린에서는 별다른 문제를 일으키지 않았으나, 공부에 대한 열정을 잃어 성적은 중간 이하로 떨어졌다. 그러나 어린 시절부터 다닌 기숙사에서 배운 유럽 각국의 언어와 고전, 라틴어 덕에 어떻게든 졸업할 만한 성적이 나와 간신히 졸업했다. 비스마르크는 언어능력이 탁월해서 그리스어와 라틴어로 의사소통 및 서신교환이 가능할 정도였고, 모국어는 물론 영어와 프랑스어, 러시아어, 이탈리아어, 스페인어로 자유로운 의사소통을 할 수 있었다. 이 언어능력은 비스마르크가 성인이 된 후 외교관으로서 당시의 각국 여론과 국제정세를 파악하는 데 상당한 도움이 되었다.
이렇듯 오토에게 대학 시절은 혼란 그 자체였으나, 후일 외교관으로 활동할 때 유용했던 인맥을 쌓고, 조금이나마 자유주의 물을 먹어 사고의 융통성이 생겼으며 이후 오토는 법관이 되기 위해 시험을 쳐서[20] 법원 서기가 되었으나[21], 1년 정도 다니고서는 적성에 맞지 않는다 생각해 그만두었다. 그리고는 외조부의 직업인 외교관에 흥미를 보여 외교관 시험[22]을 보고 합격해 외교관이 되었으나, 듣보 집안 출신이었기에 외국이 아닌 국내 프랑크푸르트의 독일 연방 외교관으로 발령받았다.
그러나 이는 결과적으로 경력에 도움이 되었다. 외교관 시험에 합격하며 수습기간은 아헨에서 보냈는데, 어떤 여성과 약혼까지 했지만 빚을 지고 몇 주동안 결근했다가 면직처벌을 받았지만, 외교관시험 동기[23]에게 도움을 받아 복귀에 성공했다. 여기에다 또 17살짜리 영국 귀족 처녀 꽁무니를 쫓아 다니며 스위스까지 무단 결근하고 넉 달동안 여행을 떠났고 당연히 짤렸다. 그럼에도 이번에도 역시나 운 좋게도 별 다른 징계 없이 넘어가기도 했다. 그후에도 도박 빚을 많이 지는 바람에 아헨에서의 생활은 어려워졌고 25세 무렵 나이에 도피성으로 육군에 입대했다.
육군 장교 군복을 입고 나온 초상화가 많아서 군인 출신 정치인으로 착각하는 경우가 있긴 하지만, 비스마르크는 다른 귀족 출신 자제와는 달리 군대를 싫어했고[24] 대학 시절 결투 시에 입은 오른팔 부상을 근거로 병역 면제를 신청했다가 퇴짜를 맞을 정도였다. 병역은 외교관서 짤린 시기 예비역 육군 소위로 임관해서 소집기간 1년을 채워야 되는데, 귀찮아서 몇 달 다니다가 대충 땡땡이를 쳤는데도 전시도 아니고 관대한 지휘관을 만나 별 문제 없이 넘어갔다고 한다. 훗날 독일 통일 후에 땡땡이나 치던 이 예비역 소위는 육군 원수 계급을 수여받았다.
1839년 어쩔 수 없이 프로이센 왕국군에 입대하였는데, 프로이센 왕실의 거처 포츠담 부근의 근위 연대였다. 당연히 높으신 분들 자제들이 몰린 땡보직이었다. 이마저도 1년을 못 채우고 땡땡이쳤는데, 뒤늦게 농사를 배우려고 농업 학교에 다녀서였다. 농업에 깊이 관심을 보이면서,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포메른 농장과 가까운 곳으로 가서 농사에 몰두했다. 이때 그는 정말로 농사에 깊이 빠져서 농부들과 격의 없이 사투리로 대화할 정도였고, 농업학교에서 배운 지식을 이용하여 당시 최신기술로 만든 비료를 도입하고, 사탕수수 재배와 공장까지 만들면서 수완 좋게 농장을 경영하여 대학생 시절과 외교관 시절에 진 도박 빚을 다 갚았다.
성공한 지주가 되자 본격적으로 정치에 뛰어 들었는데, 마침 고향 근처에 수재가 나자 제방 감독관을 탄핵하고 스스로 해 보겠다며 그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이 무렵 막 수립된 의회에서 마침 보궐선거 자리가 나자 본격적으로 공직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공직 생활 초기에는 튀어 보이려는 성향이 매우 강했는데 1848년 혁명 당시엔 강경 진압을 주장하면서 자기 영지의 농민 40명을 무장시켜 베를린으로 가서 군중폭동을 진압하려 했다.[25] 이후 베를린으로 잠입해서 왕실인사들 사이를 왔다 갔다 하며 역쿠데타의 주역이 되려고 했는데, 이때 빌헬름 왕자의 부인이었던 아우구스타에게 역적 아니냐는 오해를 샀다. 이런 불편한 관계는 수십 년간 비스마르크를 괴롭혔고, 혁명 진압 이후 국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는 부르주아들과 자유주의자들의 요구를 일부 받아 들여 납세액에 비례한 제한 선거를 허용해서 기득권층의 극심한 반발을 불러왔다. 이들은 '의회 같은 건 필요 없다'며 자신들의 의회마저 없애달라고 주장했는데, 비스마르크는 이때 국왕의 뜻에 따라야 된다고 답했다.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는 이 시기 전후로 비스마르크를 매우 눈여겨 보았는데, 혁명 후 비스마르크가 결혼을 하고 베네치아로 신혼여행을 하자, 마침 우연히 그곳에 체류 중이던 국왕이 직접 비스마르크를 불러 독대하고[26] 베를린으로 돌아오자 듣보잡 비스마르크를 일약 독일 연방 의회의 프로이센 대사로 임명했다.
이런 벼락 출세 때문에 사방에서 비난이 쏟아졌다. 그의 예전 행적을 들어 '술고래 대학생, 타락한 융커, 포메른의 돼지치기'는 안 된다는 여론의 반발이 있었고 왕세제 빌헬름 왕자조차 "한낯 예비역 기병 소위에게 그런 중차대한 임무를 맡기면 곤란하다."라며 부정적인 반응이었다. 어쨌든 이런 해프닝 이후 1851년부터 외교관으로 복귀하여 프랑크푸르트 독일 연방 의회 외교관으로 활약하게 되는데 오스트리아의 주도권에 맞서서 북독일의 프로이센 위주의 복수주도권을 주장했다.
연방 회의에서의 주목할 만한 또 하나의 일화로 소위 '위신 투쟁'이라 불리는 사건도 있다. 당시 연방 회의 의장국이자 실질적인 맹주였던 오스트리아 제국 대표만이 회의석상에서 담배를 피울 수 있었는데, 비스마르크가 '왜 담배를 피우면 안 되는가?'라며 의장에게 직접 불을 청해 담배를 피운 것이다. 고작 담배 한 개비였지만 이 행동은 꽤 큰 파장을 불러온 초유의 사태였다. 당황한 각국 대표들은 본국에 이를 보고하며 '담배를 피워도 되겠는가'를 묻기까지 했고, 결국 바이에른 왕국 대표 카를 폰 슈렌크(Karl von Schrenck)를 시작으로 비흡연자를 제외한 거의 모든 대표들이 차례로 담배를 피워 물기 시작했다. 작센 왕국 대표 율리우스 고틀로프 폰 노스티츠(Julius Gottlob von Nostitz)는 내각의 허락을 받아내지 못했지만, 하노버 왕국 대표가 피우는 모습을 보고 고심 끝에 그 다음 석상에서 결국 실행에 옮겼다. 본인 말로는 '칼집에서 칼을 뽑는' 기분이었다고 한다. 나중에는 비흡연자들까지 '조국을 위해 담배를 피우는 희생'을 하였고, 헤센다름슈타트 대표만이 유일하게 담배를 피우지 않은 한 사람으로 남았다. 프로이센이 더 이상 오스트리아의 아래가 아니라고 담배 한 개비로 주장한 것이다.
이후 독일 연방의회에서 임기가 끝나고 1858년 오스트리아의 압력으로 쫓겨나 크림 전쟁에서 러시아 편을 들어 중립을 주장한 인연으로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발령받았다. 이 때 알렉산드르 2세와 차르 가족까지 몰려 나와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고 한다. 비스마르크의 외교 기본 방침 중 대러 친선은 이 시기부터 이어졌다.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가 죽고 빌헬름 1세가 즉위한 후, 군비 확대와 징병제 기간 연장을 두고 의회와 충돌하자 전격적으로 프로이센 총리에 임명되었다.
2.2. 총리 재임기
피켈하우베를 착용한 모습 | 빌헬름 1세와 비스마르크[27] |
2.2.1. 독일의 통일을 이끌다
프로이센 왕국 총리로 취임하자마자 맡은 난관은 징병제 기간 연장과 육군 조직 개편이었다. 명목은 세금 내는 부르주아들이 세금 내기 싫어서 반발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실제 문제는 다른 데 있었다. 당시 프로이센 육군 편제는 1815년 해방전쟁 시기 편제와 동일하게 15만 명에 불과했는데, 19세기에는 인구가 폭증한 데다가 1848년 혁명 진압 시 드러났듯이 군부에서 인원부족을 호소했으므로, 부르주아들도 군인 숫자를 늘릴 필요가 있음은 인정했다.다만 부르주아들이 보기에 가장 큰 문제는 예비군[28] 지휘관을 현역 프로이센 장교가 지휘하도록 바꾸는 것이었다. 군대는 상명하복 조직이라 권위주의를 젊은이들에게 강요할 것인데다가, 현역 장교가 유사시 예비군을 지휘하면 자유주의자들을 탄압하는 용도로 악용할 소지가 높아서 너무 위험하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부르주아들은 군국주의 국가 프로이센에서 융커들이 독점하는 현역 장교 직위는 접근하지 못했으나, 예비역 장교 직위는 일정한 재산이나 사회적 지위가 있으면 보상으로 하사받기에 자신들의 사회적 지위가 축소되는 것으로 여겼다.
이런 국면에서 일반적인 정치인이라면 타협으로 가장 원하는 것을 얻어내고 마지 못한 척 다른 요구를 일부 들어 주기도 하겠지만 비스마르크는 협상 비슷한 것도 없었다. 아예 의회라는 제도 자체를 무시해버렸다. 의원들을 비아냥거리면서 의회 예산권은 무시하고 국가는 항시 존속해야 하기 때문에 의회의 예산 승인이 없어도 준예산으로 운영한다는 식으로[29]으로 밀어붙였다.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승리 이후 베르사유 궁에서 독일 제국 수립을 선포하는 유명한 그림.[30] |
빌헬름 1세를 도와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독일 제국 건국을 이뤄낸 주역이다. 취임사에서 한 "언론이나 다수결이 아닌, 철(=무기)과 피(=전쟁)만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라는 말에서 '철혈 재상'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이는 현대적 관점으로 볼 때 국가를 준전시상황으로 상정하여 정치적 반대파들의 입지를 없애고 헌법을 무시하는 방식의 국가 운영을 이끌어 간 것으로 분명 비민주적인 정책이기는 하다. 하지만 당시에는 유럽의 다른 나라들도 민주적이지는 않았다. 제국 정체성이 유지되던 러시아 제국, 오스트리아 제국은 말할 것도 없고 프랑스조차 나폴레옹 3세의 제국이었던 시절이다. 정작 비스마르크가 무너뜨리긴 했지만 당시 정치적 반대파인 자유주의자들에 대한 사형 등 가혹한 처벌을 오히려 자제했다는 점에서는 평가를 좋게 줄 수 있다. 즉 반동복고 전제 군주파였으나 강압적 수단에만 의지하지 않았던 것이다.
실제로 부르주아들을 엿먹이기 위해서 사회주의자 페르디난트 라살이 운영하는 출판사의 빚을 대신 갚아주기도 했으며 군비 확장 이후 비스마르크의 초기 외교는 전쟁을 회피하지 않았다. 재임 시절에 프로이센은 덴마크(슐레스비히홀슈타인을 점령), 오스트리아 제국, 프랑스 제2제국과 전쟁을 해서 승리했는데, 육군 수뇌부인 헬무트 폰 몰트케와 갈등을 빚을 정도로 정치 우위를 강조했다. 어디까지나 전쟁은 외교의 (강압적) 수단이라는 발상이었다. 이 때문에 몰트케를 비롯한 독일 육군 사령부들과 계속하여 갈등이 생겼으나 프로이센 육해군최고사령관인 빌헬름 1세의 신임을 이용해서 끝내 관철시켰다.
비스마르크가 특히 유명한 것은 1860~70년대의 외교정책과 전쟁 과정 때문이다.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 때는 프랑스가 제시한 보상책에 부인도 시인도 하지 않은 채 모호한 태도를 취해서 프랑스의 기대감을 이용했고[31], 오스트리아를 물리친 뒤에는 엠스 전보 사건 등을 이용하여 국내외 여론에 불을 붙여 구실을 찾던 프랑스에게 미끼를 던져 선제 침공을 유도함으로써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을 발발(1870년)시켰으며, 독일 내에서는 물론 국제 여론도 우호적으로 돌려놓았다. 그 결과 프랑스의 제 2제정은 패망하고, 베르사유 궁전에서 북독일 연방에 남부 독일 국가들이 결합하여 독일 제국이 성립하여 중부유럽 강대국이 탄생했다. 이 장면 하나만으로 비스마르크는 근대사의 중요인물이다.
이 시기의 일을 알려주는 일화가 있다. 독일 제국 성립 전에 독일계 연방 국가들이 모인 프랑크푸르트 연방회의에서 비스마르크가 가슴에 훈장을 주렁주렁 달고 나타나자 군인 출신이었던 오스트리아 대표가 "얼마나 많은 전쟁에 나갔길래 그렇게 많은 훈장을 달았소?"라고 말했다. 비스마르크가 문관 출신임을 비꼰 말이었는데, 비스마르크는 "외교전에서 딴 것이라오."라고 능청스럽게 받아 넘겼다는 일화가 있다.
그 유명한 알자스-로렌을 되찾아 옴도 당시의 일이다.[32] 독일인 다수의 프랑스 영토로 백년전쟁 때 알자스의 동레미에서 잔 다르크를 배출해낸 지방이라고도 하는데, 이후 독일 지역의 제후령이었다. 그 후 17세기에 30년 전쟁의 결과로 프랑스가 재점령했는데, 200년이 조금 지나 비스마르크 시대인 19세기 들어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으로 독일이 다시 점령해 반 세기 정도 통치하다가 1차대전의 결과 이 지역은 다시 프랑스에게 돌아갔다. 역사적으로 독일과 프랑스 경계에 있는 이 지역에 얽힌 문제를 원천적으로 해결하려는 움직임이 유럽 경제통합, 나아가 유럽연합 구상의 기원이었다.
2.2.2. 비스마르크 동맹 체제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이후 절묘한 외교술로 프랑스를 고립시키며 독일의 안전이 보장되었던 1890년대까지의 유럽의 외교 구도를 흔히 '비스마르크 체제'라고 부른다. 베르사유 체제라든가 냉전 체제와 다르게, 외교사에서 한 체제에 특정인물의 이름이 붙은 몇 안 되는 사례이다.[33]사적인 반동 복고주의적 가치관과는 별개로, 수상으로서는 비스마르크 같은 능력자가 아니면 유지하기 곤란한 체제를 만들었다는 점이 까인다. 비스마르크는 퇴임 이후에도 자신을 멀리하는 황제 빌헬름 2세에게 간언하거나 언론을 통해 영향력을 발휘하려고 노력하는 등, 계속 업무를 유지했으면 체제는 더욱 굳건해져 뛰어난 외교관이 없어도 유지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공무에서 은퇴했음에도 여전히 막대한 발언권을 가지고 비선으로서 국가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정계 원로들이 시대와 국가 불문하고 존재함을 생각하건대, 당시 독일 정계가 귀담아들을 준비만 되어 있었다면 비스마르크는 충분히 사망 직전까지 독일 제국의 외교전선을 막후에서 지휘할 수 있었을 것이다.
비스마르크의 외교 정책을 풍자한 그림. 고립되어 울상인 마리안[34]이 요점.[35] |
유럽 중부에 위치한 독일의 여건에서 프랑스가 원교근공 외교를 펼쳐 양면전쟁이 벌어질 가능성을 차단하기는 필수적이었다. 그래서 '프랑스를 고립시킨다'는 가장 핵심적인 목적을 위해 친러시아 정책을 가장 핵심적인 수단으로 추진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프랑스가 유럽의 어떠한 강대국도 우방으로 끌어들이지 못하도록 원천봉쇄되는 결과를 만들었다. 통일 이후에는 전쟁을 벌였던 오스트리아와 관계를 회복시키고 프랑스를 고립시켰으니 비스마르크의 외교력이 어떤 수준이었는가를 잘 나타내주는 사례이다. 이렇게 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러시아 사이에 맺어진 동맹관계를 3제 동맹이라고 하는데, 세 국가가 모두 제정을 고수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으로 19세기 후반 유럽 내 세력균형의 효시로 평가받는다.
다만 비스마르크는 프랑스를 완전히 주저앉히려고 하지는 않았다. 보불전쟁 때도 승기를 타고 프랑스를 완전히 부숴놓으려는 군부를 말리기 위해 사퇴하겠다며 위협해 임금을 설득한 이도 비스마르크였다. 그리고 프랑스가 알사스-로렌에서 눈을 돌려 해외식민지 확대에 관심을 갖도록 유도해냈다. 그가 정말로 관심하는 바는 사실상 그가 창조해낸 제2제국이 존속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런 정책이 순조롭지만은 않았다. 특히 러시아가 본격적으로 범슬라브주의적 팽창을 시도하면서 슬라브계 민족까지 치하에 넣거나 영향권에 두고 있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갈등을 빚은 점이 정책의 가장 연약한 고리가 되었다. 이로 인해 발칸반도 문제가 유럽 내에서 가장 민감한 문제로 떠올랐다. 1877년 러시아-튀르크 전쟁 당시 러시아의 지지를 받는 발칸 국가들의 영토 확장을 베를린 조약으로 축소시키자 갈등이 심각해져 한때 3제 동맹이 중단되기까지 했다.
그러나 비스마르크 본인은 이 상황에서 오히려 태연하게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독-오 동맹을 체결했다. 이는 러시아가 예컨대 프랑스와 손을 잡는 대안 외교를 추진하려 해도 위기상황에는 사실상 러시아 혼자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를 동시에 상대해야 하는 최악의 상황을 맞닥트리리라 암시한 것이었다. 비스마르크는 그럼에 따라 자연히 러시아가 다시 독일과 손을 잡을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고, 실제로 그렇게 되었다. 이렇게 1881년 재건된 3제 동맹은 1884년에 재확인되었고, 1887년에는 독일과 러시아 간에 재보장 조약이 맺어져 비스마르크가 해임될 때까지 이어졌다. 이에 더해 1882년 이탈리아가 프랑스의 튀니지 확보에 불만을 품은 것을 틈타 이탈리아를 끌어들여 독일·오스트리아-헝가리·이탈리아의 삼국 동맹이 형성되기까지 하여, 비스마르크가 의도한 그림대로 프랑스는 완벽에 가깝게 고립되었다.
이렇게 3제 동맹이 재건되기는 했지만, 이미 러시아는 베를린 회의에서 독일이 러시아 편을 들어주지 않고 중재자 위치를 고수한 것에 대해 엄청난 배신감을 품었다. 무엇보다도 3제 동맹은 꾸준히 유능한 외교관들이 배출되어 관계를 이어가는 시스템이 아니라, 그냥 비스마르크 개인의 능력에 의존하는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다. 결국 비스마르크 퇴진 이후, 독일은 러시아와 전통적 우호관계를 중단하고 말았다. 하지만 이런 외교기조 자체는 의지가 더 중요하지 꼭 능력이 필요한 것만은 아니라 정말 비스마르크의 혼자의 능력만에 의존해야 했는지는 약간 애매하다.
이후의 독일이 엇나간 훨씬 더 큰 원인은 비스마르크의 외교기조에 반발한 빌헬름 2세가 세계 정책을 펼치면서 그동안 이뤄놓은 외교적 성과를 무위로 돌려 완전히 말아먹은 것이었다. 다만 러시아의 독일에 대한 오랜 우호감정이 깨진 것은 이미 비스마르크 정부의 베를린 회의와 러시아산 곡물에 대한 관세부과로 시작된 일이기도 했다. 후일 삼제동맹이 재건되었다고는 하나 과거의 동맹과 같이 오래된 신뢰관계와 이해일치에 따른 것이 아니었다. 그저 오헝제국과 독일이 편먹고 나를 공격하면 큰일난다는 공포감 때문에 러시아가 일순간 화를 삭인 것에 불과했으니 처음부터 금방 깨질 것이 자명했다. 여기에 빌헬름 2세의 실책까지 겹쳤다.
자유주의자인 프리드리히 3세와는 성향상 자주 대립했고, 빅토리아 아델레이드 메리 루이즈 황후와는 사이가 매우 나빴다. 또한 집권 초기에는 철과 피를 외치며 전쟁으로 독일 통일을 달성했지만, 통일 후에는 사람이 바뀐 것마냥 평화주의자로 돌변했다. 엄밀히 말하자면 그는 항상 보수적 현실주의자였고, 독일이 통일된 지배적 강대국이 된 상황에서 더 이상의 전쟁은 독일에 해롭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아무튼 이 때문에 빌헬름 2세를 비롯한 팽창론자들에게 밀려 물러나면서, 비스마르크는 "이런 식으로 가면 내가 떠나고 15년 후에는 파멸이 올 것이다."라고 했다는데, 실제로 15년 후 삼국 협상이 성립되고 독일은 외교적으로 완전히 고립되어 양면전쟁에 위협에 처했다.
그가 해임된 1890년 이후 17년 만에 유럽 내에서는 삼국 동맹과 삼국 협상의 대립이 심해졌고, 그 원인도 빌헬름 2세의 반영 - 반러시아 정책이었다. 다만 기폭제가 된 발칸반도 문제는 오히려 1870년대 이후로 계속 심각해지던 문제로, 비스마르크도 여리박빙의 상황에서 다루었다. 일례로 러시아와 재보장 조약을 맺고 오스트리아와 2국 동맹을 각각 맺었지만 러시아와 오스트리아의 관계는 갈수록 나빠졌다. 이 어려운 관계를 잘 처리한 것은 물론 비스마르크의 외교관으로서의 가장 큰 성과이기도 하다. 하지만 결국 러시아와의 동맹은 빌헬름 2세 시기에 들어 독일의 재보장 조약 갱신 거부로 인해 깨지게 되었고, 분개한 러시아는 1892년에 프랑스와의 러불동맹을 맺어서 독일 포위를 사실상 완성시켰다.
세계 정책으로 식민지 쟁탈전의 막차를 탔던 당시 독일 입장에서는 비스마르크 체제를 유지하면서 팽창하기가 불가능에 가까웠기 때문에, 빌헬름 2세는 이러한 새로운 방향을 포기하기 어려웠다. 그렇지만 중립을 지켰던 과거와 달리 아프리카와 뉴기니 그리고 산동반도를 차지하는 등 공격적인 외교정책은 독일이 영국과 프랑스와 충돌하는 상황을 피하지 못하도록 강요했다. 또한 보어인들에게 간접적으로 지원을 해준 보어 전쟁, 직접적으로 프랑스와 외교로 싸운 모로코 위기로 영국과도 프랑스와도 극심한 외교적 분쟁을 빚었다. 당연히 물러설 리 없는 빌헬름 2세가 해군을 팍팍 밀어주면서 영국의 역린을 건드렸고, 비스마르크 체제에서 러시아와 함께 중요했던 영국이 등을 돌리고 프랑스와 영불협상을 성사시키기에 이르렀다.
유럽의 지정학적 환경에서 비스마르크 체제는 유지되기 극히 어려운 곡예 외교적인 산물이었다. 영-러는 숙적, 독-오도 몇 번이고 전쟁했던 사이, 러-오는 발칸을 두고 대립중 등등. 1차대전만 해도 발칸에서 일어났다. 게다가 비스마르크는 이런 외교상태 유지를 위해 유언비어나 선동 등에 의지했고, 동맹으로 얻을 이득보다는 '동맹을 위한 동맹'에 가까운 정책을 썼다. 이렇다 보니 시간이 지나자 외교가에선 비스마르크가 뭔가를 하면 일단 부정적으로 보는 기조가 확산되었다.
2.2.3. 통일 이후의 내치
국내 정치적 측면에서 보면 민주주의의 제대로 된 정착을 방해하는 헌법적 규범과 의회의 의사를 제멋대로 개변하고 무시하는 등 행태를 보였다. 제국 수상은 제국 의회가 아닌 황제에게만 책임을 진다는 규정인데, 이 때문에 독일의 학자들은 국내 정치에 관한 한 그리 좋게 평하지 않는다. 대표적인 사람이 자본주의를 윤리적 측면에서 정당화한 막스 베버이다. 베버는 아예 대놓고 비스마르크를 가리켜 독일 민주주의의 발전을 가로막은 사람이라고 깐다. 다만 이 규정은 사실 비스마르크가 의회를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는 반면에 빌헬름 1세는 말 그대로 좌지우지하였기 때문에 만들어진 것이다.[37]그 자신도 매우 보수적이었다. 1848년 혁명 당시 국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가 정신이상을 일으켜 노동자들의 시위를 무력진압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쿠데타를 일으켜 국왕을 폐위하고 무력진압에 찬성하는 동생 빌헬름 1세를 국왕으로 올리려는 계획을 주도했을 정도였다. 그 계획 때문에 차후 빌헬름 1세의 수상이 되었을 때도 빌헬름 1세의 왕비는 비스마르크가 실제론 영국으로 일시 망명한 빌헬름 왕세제 대신 야심가인 국왕과 왕세제의 조카를 왕위에 앉힐 음모로 여겼기에 상종하지 못할 역적이라고 생각했다. 또한 소작농 수십 명을 거느린 대지주로서, 소작농을 무장시켜 수도로 진격하려는 생각까지 했을 정도로 전통적 군주제와 반동적 정치관을 따랐다. 물론 이런 과격성은 이후 어느 정도 누그러들었다.
1871년 이후 "문화 투쟁(Kulturkampf)"이라고 불리는 반가톨릭 정책을 시행하였다. 비스마르크는 1873년 유명한 ‘5월법’을 공포하고 성직자의 임면(任免)감독권을 국가에 이양할 것을 규정하였다. 또한 1875년 '5월법'은 프로이센 내의 모든 수도원을 폐쇄하고 수도자들을 추방한다는 조문을 명시하고, 예외적으로 병자 간호에 종사하는 수도회만이 내각이 정한 바에 따라 지속될 수 있었다. 이외에도 예수회원 추방령인 '예수회원법'을 발표하였다. 가톨릭 신자가 많은 바이에른과 라인란트 등의 서남부 그리고 프로이센령 포젠의 폴란드인들을 중심으로 반발이 거셌고[38], 결국에는 사회주의의 성장이 더 위험하다고 보고 교황청과는 타협했다. 1878년 이후에는 반사회주의자법을 통과시켜 독일 사회민주당의 집회, 조직, 출판물 등을 금지했지만 사회주의 성장을 막을 수는 없었다.
그런데 그 사상과는 반대로 세계최초로 1883년 의료보험, 1884년 산재보험, 1889년 연금보험 등을 실행하여 사회보장제도의 기틀을 마련한 인물이다. 현재 4대 사회보험 중 3개가 비스마르크 체제 아래에서 최초로 만들어졌다. 4대보험 중 고용보험법은 1927년에 제정되었는데, 이는 네덜란드, 영국에 이어서 3번째였다. 이 부분에 대해선 당시 유럽에서 유행하던 사회주의 세력의 투쟁의지를 꺾어버리기 위한 '선제적 조치'라는 평가가 있다. 사회구조의 혁신인 노동자 혁명이 일어나기 전에 미리 적절한 선을 그어버린 것이다. 비스마르크의 사회보험제도는 사회주의 견제 때문만은 아니었다. 당시 유럽에서는 미국과 브라질, 아르헨티나, 우루과이 등 아메리카 국가로 사람들이 활발히 이주하였고, 출산율도 유럽 국가들보다 아메리카 국가들이 더 높았다. 독일, 프랑스, 영국, 스페인, 이탈리아, 네덜란드, 벨기에를 비롯한 열강국가들에게 있어서 자국 식민지도 아닌 아메리카 국가로 인구가 유출됨이 국력증진에 방해가 될 지경이었기 때문에 골머리거리였다, 이 때문에 산업계에서 차선책으로 복지정책을 늘리자는 데 동의한 것이다.
이 때문에 비스마르크가 당초로 목표로 했던 사회주의 견제는 결과적으로 실패했다. 허나 비스마르크가 이렇게 만들어낸 복지제도는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유지, 발전하면서 독일이 복지국가로 도약하는 기틀이 되었다.
2.3. 퇴임과 사망
반가톨릭 문화투쟁과 반사회주의자법에도 불구하고 1888년에 빌헬름 1세가 사망한 뒤부터 입지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프리드리히 3세가 자유주의 성향이라서 충돌이 벌어질 것이라고 예상되었는데, 프리드리히 3세가 석 달 만에 세상을 뜨면서 자리를 이어갈 듯이 보였다.그러나 그 후 즉위한 빌헬름 2세는 사회 안정을 위해서 가톨릭 세력과 자유주의자, 사회주의자들과 화해를 모색하여 충돌이 이어졌다. 루르 광산 파업을 두고 비스마르크는 강경 진압을 주장한 데 반해서, 빌헬름 2세는 중재하자고 하여 황제와 갈등이 커졌다. 이때는 황제가 작정하고 노동자 권리증진과 가톨릭계와 화합하기를 외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정국은 비스마르크에게 불리하게 돌아갔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치러진 1890년 총선에서 가톨릭계 정당인 중앙당(Zentrumspartei)이 최대 의석을 가진 정당이 되었고, 사회주의 정당인 독일 사회민주당(이 시기 이후 독일 사회민주당은 주요 정당으로 부상)이 최다 득표를 기록했다.[39] 이 총선에서 친(親) 비스마르크파의 주요 정당인 국민자유당(Nationalliberale)이 절반 이상의 의석을 잃는 등 친비스마르크파는 대패했다. 이로써 그동안 시행한 사회주의자-가톨릭 탄압 정책의 명분을 잃은 비스마르크를 1890년 빌헬름 2세가 결국 제국 수상 자리에서 해임하였다.
두 인물에 관한 오늘날의 상반된 평가를 생각하면 언뜻 의외로 여겨질 수도 있지만, 당시 비스마르크가 빌헬름 2세에 의해서 권좌에서 밀려나자, 독일 내에서는 이 조치를 열광적으로 반겼다. 비스마르크가 반대파들을 기만하는 행태에 보수파부터 시작해서 사회주의자에 이르기까지 죄다 질려버렸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장원[40]으로 은퇴할 때는 의장대와 군악대가 기차역 플랫폼에서 송별식을 해주었으며 그 이후에도 프로이센의 영웅으로 추앙받았다.
비스마르크의 총리 퇴임을 풍자한 만평. 배에서 떠나는 선장(비스마르크)의 모습을 바라보는 빌헬름 2세의 모습을 담고 있다. 약 50년쯤 후, 윈스턴 처칠이 제2차 세계대전의 종전 직후 총선거에 패배하여 퇴임할 때도 이를 패러디한 만평이 등장했다.
후대에 비스마르크가 독일 내에서 인기를 끈 것은 빌헬름 2세가 하도 경망스럽게 구는 것에 질려버렸다는 점이 결정적이었다. 빌헬름 2세와 비스마르크의 관계는 사임 이후에도 악화일로였다. 아들의 결혼식으로 빈에 갔을 때 비스마르크는 오스트리아의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를 접견하려 했으나, 빌헬름 2세는 프란츠 요제프에게 편지를 보내 접견을 방해했고, 비스마르크의 후임 수상 레오 폰 카프리비는 각지의 관리들에게 비스마르크를 접대하지 말라는 지시를 내렸을 정도였다. 그러자 당시 황실의 원로가 비스마르크가 죽기 전에 화해하지 못하면 황제에게도 큰 흠이 된다고 직언했을 정도였다.
빌헬름 2세는 차후 비스마르크와 만나긴 했으나 역시 전 수상의 충언을 듣는 체 마는 체할 정도였다. 그러나 비스마르크는 젊은 황제와의 불화로 사임한 이후에도 지방신문 사설의 주요인사로 정계에 다양한 의견을 제시하려 하였다. 국가주의자라는 비난을 들을 수는 있어도 어찌 되었건 일평생 일선에서 열심히 뛴 인물임은 분명하다. 한편 흔히 알려진 것과는 달리 말년에는 거의 평화주의에 기울었고 평화주의자로 불릴 만한 발언도 했다. "전투를 앞둔 병사의 눈동자를 본 사람은 전쟁을 어렵게 생각한다."
함부르크에 위치한 비스마르크 기념비
프리드리스루흐[41]에 있는 비스마르크 영묘 안에 안치된 비스마르크의 석관. 오른쪽은 아내의 석관이다.
말년 황제와의 갈등관계 때문에 빌헬름 2세의 신하라는 말을 듣기는 싫었는지, 석관에는 '황제 빌헬름 1세에게 진정으로 충실했던 독일인 공복'이라는, 생전에 자신이 직접 쓴 묘비명을 쓰라고 유언했다. 그래도 빌헬름 2세는 비스마르크가 사망하자 장례식에 참석했고, 국장도 제안했으나 유족들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한편 비스마르크가 사망했을 때, 임종 자리에 가족들이 비운 사이 일부 기자들이 침입해서 방금 사망한 시신의 모습을 찍어# 잡지에 돌리는 사태가 벌어졌다. 당연히 병자였던 그의 모습은 엉망진창 지저분했다. 결국 기자들은 체포되어 처벌받았고, 이후 그의 사진은 온건한 임종 모습이 유포되었다.
3. 평가
3.1. 긍정적 평가
독일 연방에서 프로이센의 지위는 프로이센의 자유주의가 아닌 프로이센의 권력에 의해 결정될 것이오. (중략) 프로이센은 유리한 순간을 위해 그 힘을 집중하고 또 유지해야 하며, 그 유리한 순간은 이미 수차에 걸쳐 왔다가 가버리기를 반복했소. 빈 회의 이래 우리는 우리의 건강한 정치적 통일체에 걸맞지 않는 형편없는 국경을 가지고 있소. 작금의 거대한 문제 앞에 이루어져야 할 결단은 1848년과 1849년에 이미 범하였던 거대한 실수인 연설과 다수결이 아닌 철과 피로써 이루어져야 할 것이외다.
1862년 9월 29일 제국의회 총리 취임연설
1862년 9월 29일 제국의회 총리 취임연설
철혈재상이라 하여 그를 전쟁광, 초강경파로 인식하는 경우도 있지만, 비스마르크가 강조한 점은 열강들이 외교에서 고려하는것은 이상적인 고귀한 가치 추구(ideals), 헌법의 진보성이 아니라 국력, 즉 경제력과 군사력이라는 것이다. 1848년 혁명 시기 자유주의자들이 프랑크푸르트에 모여 펜대를 굴리며 이게 옳으니 저게 옳으니 허송세월하다가 러시아와 오스트리아의 반대와 주변국들의 압력으로 이전 상황 복귀로 돌아간 것을 보며 이상주의를 경계한 것이다. 독일 통일 운동이 현실적인 고려 없이 독일연방의 34개 제후국과 도시들의 합의로 이뤄지는 것은 이상적으로 옳을지 몰라도 불가능하며 그것도 외세까지 고려하면 현실적인 힘 없이는 어떠한 방법도 불가능하다는 점을 역설한 것이다.
전쟁터에서 죽어가는 병사의 멍한 눈빛을 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전쟁을 일으키기 전에 깊이 생각해 볼 것이다.
오토 폰 비스마르크
오토 폰 비스마르크
보통 널리 알려진, 피도 눈물도 없는 '철혈재상'의 이미지와는 다르게 실제로는 전쟁보다는 외교적 방법을 선호하였다. 전쟁은 외교의 강압적 수단으로만 사용했다. 쉽게 말해 그가 치렀던 덴마크 전쟁과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 그리고 1870년의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은 독일 통일을 위한 전쟁이었지 독일 제국의 정복 야욕을 채우기 위함이 아니었다고 할 수 있다. 위의 일화처럼 그는 전장에서 불구가 된 참전 용사를 볼 때마다 가슴 아파했다.[42]
그 유명한 연설도 '국가의 대문제', 즉 '독일 통일'을 두고 한 이야기지 일반적으로 "나 불도저요!" 한 것이 아니다. 당시 독일 통일에 있어 가장 큰 문제는 "대독일주의를 주장하며 대를 이어 알프스 이북독일 연방에 종주권을 행사하려는 오스트리아, 커다란 중부유럽 통일국가를 이웃으로 두는 것을 경계하는 프랑스를 어떻게 배제하느냐?"였는데, 이것이 외교적으로 해결될 전망은 없었다.
물론 목표를 위해서 불가피할 때는 전쟁도 불사했다. 그러나 그 전쟁도 적에게 필요 이상의 피해나 굴욕을 주는 것에는 매우 반대했다. 비스마르크 재임 시절 발생한 전쟁은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인데, 이는 독일 통일을 위해서는 오스트리아와 프랑스를 전쟁을 통해 굴복시키는 것 이외는 길이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 두 전쟁을 통해 독일 통일이라는 과업을 이룬 후에는 새로 건설된 독일제국을 안정시키기 위해 전쟁을 억제하기 위한 외교적 노력에 전력을 기울였다. 고로 비스마르크는 고전적 현실주의자, 국익지상주의자라고 할 수 있다.
외교관 출신답게 유럽 내 많은 국가들에 프로이센의 입장을 잘 주지시키려고 노력했고, 이것은 일말의 합리성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또 비스마르크는 스스로 유럽 평화의 중재자 역할을 하기도 했다.[43]
비스마르크는 카를 폰 클라우제비츠처럼 전쟁은 어디까지나 외교, 정치의 연장인 수단으로 보았다. 외교에서 각국의 신뢰를 얻으려고 노력했기 때문에 독일의 외교정책이 성공한 것이며 각국의 첨예한 이익 다툼 속에서 비스마르크가 원하던 대로 정세가 진행된 것은 독일 통일 이후에는 불필요한 식민지는 반대하며 유럽 국경의 현상유지를 주장했기 때문에 그가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이다. 물론 그것은 독일의 강력한 군사력과 그것을 뒷받침하는 기술과 경제력, 그리고 실전에서의 증명 덕분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식민지 확보에 회의적이었던 비스마르크의 재직 시절에 가장 많은 식민지를 얻었고 정작 이후 식민지 확보에 열을 올린 빌헬름 2세는 시원찮았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정말 빌헬름 2세는 비스마르크의 충언을 마지막에라도 들었어야 했다. 그는 비스마르크의 말을 안 듣고 군함과 잠수함을 건조하는 등 열강(특히 영국)의 어그로를 끌 만한 짓만 골라서 일으키더니 제1차 세계 대전을 일으켰다가 져서 자신의 왕좌와 서프로이센 및 포젠, 엘자스-로트링겐, 북부 슐레스비히, 상슐레지엔, 벨기에 국경의 영토 일부를 잃었다. 이것은 또한 아돌프 히틀러와 나치가 발호하는 빌미가 되었으며, 나치가 제2차 세계 대전을 일으켜서 패배하는 바람에 독일은 남아 있던 동프로이센 전체, 슐레지엔, 포메른 대부분, 브란덴부르크 중 노이마르크 지역인 오데르-나이세 선 동쪽을 영구히 폴란드 및 러시아에 할양해야 했고, 남은 영토마저도 동독과 서독으로 분단되어 40년 간 많은 것을 잃어야 했다.
그는 빌헬름 2세가 외교 무대에서 과욕을 부리고 수 차례 무리수를 두는 것을 보면서 이런 미래를 어느 정도 예측했는지, 죽기 얼마 전 이런 말을 남겼다. 과연 그의 말대로, 그가 사망하고 20년 후 베르사유 조약이 체결되었다.
또한 식민지 개척의 부작용을 알고 있었기에 식민지를 개척하는 것보다는 독일의 사회기반을 강화하고 과학기술 발전시켜 국력을 강화하는 것을 중시 하였는데 이를 독일이 세계를 대상으로 2번이나 전쟁에 참패하고 분단까지 됨에도 독일이 부흥하는 것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되려 영국과 프랑스는 2번이나 승전하고도 식민지에 집착하고 큰 비용을 소모하여 독일에 2번이나 추월당했다.
3.2. 부정적 평가
비스마르크는 정치교육을 전혀 못 받은 국민들을 우리에게 물려주었다. 그 결과 정치 분야에서 국민들의 수준은 이미 20년 전에 도달했던 것보다 훨씬 낮은 상태가 되고 말았다.
1917년, 막스 베버
1917년, 막스 베버
앞에서의 평가처럼 비스마르크는 수많은 걸림돌에도 불구하고 끈질기게 자신이 설정한 목표를 고수했고, 그것을 대체로 달성했다. 그러나 목표를 달성하는 과정에서 그는 이해 당사자를 설득하려는 노력은 충분히 하지 않았다. 그는 오로지 순수한 국가이성(reine staatsräson)에 따라 움직였고 따라서 그는 수시로 적과 동지를 바꿨으며 절차보다는 결과만을 중시했다.
비스마르크의 이런 행태는 그의 정책에 불만을 품은 세력들을 결집시켜 정적들을 양산했고 대중들도 그에게 등을 돌렸다. 실무관료들도 마찬가지였다. 28년간이나 비스마르크의 비위를 맞춰야 하다 보니 그런 생활에 넌더리를 낸 것이다. 대표적인 예가 외무성의 정치부장인 프리드리히 폰 홀슈타인(Friedrich von Holstein)이다. 홀슈타인은 비스마르크의 외교전략에서 결정적인 러시아와의 재보장 조약이 연장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는 이 비밀조약이 러시아에게는 많은 이득을 주지만 독일이 얻는 것은 거의 없다고 확신했고, 또 비스마르크의 작품인 이 밀약이 갱신되면 다시 비스마르크가 복귀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빌헬름 2세는 재보장 조약의 갱신을 원했으나 결국 그는 조약이 종료되도록 하는 데 성공했다.
역사적 관점에서 보면, 관용과 소통이 부족한 정치지도자가 오랫동안 독일의 정치무대를 독점하는 바람에 신흥강국 독일의 정치문화가 낙후되는 결과가 초래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독일의 패배로 끝난 후, 독일의 역사학자들은 조국이 파멸한 원인에 대해 분석했다. 이런 논쟁의 와중에서 프리드리히 마이네케(Friedrich Meinecke)의 비스마르크에 대한 평은 곱씹어볼 만하다.
비스마르크의 업적에는 밝은 면도 있고 어두운 면도 있다. 정신보다는 힘을 강조한 독일 제국의 문화는 독일 국민들의 가치관을 타락시켰으며, 정치적인 성장을 가로막았다. 그리하여 독일 국민은 빌헬름 2세의 무책임한 행동(제1차 세계 대전)과 나치즘의 범죄를 용인하는 지경까지 되었다.
독일, 오스트리아 학계의 비스마르크에 대한 평가는 냉전 시기까지는 긍정적이었다. 하지만 냉전이 끝나고 동유럽과의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특히 좌파를 중심으로 그에 대한 부정적 평가가 커졌다. 그에 대한 평가가 박해진 이유는 다음과 같다.
- 독일 내 폴란드인에 대한 차별 정책을 시행하여 슬라브 민족주의와 게르만 민족주의의 충돌구도의 시발점을 만든점.
- 신성 로마 제국의 자치적이고, 자율적인 구조와 평화적인 갈등해결 전통을 무너트렸다는 점.[44]
- 그렇게 억압한 독일권 시민운동을 대신하여 군국주의적이고 전체주의적인 정치문화를 퍼트린 점.
- 프랑스인들에게 필요 이상으로 굴욕을 안겨서 1세기 동안 빠져나올 수 없는 적대관계를 만든 점.[45]
4. 일화
- 사생활 및 사고 방식이 꽤나 독특했던 듯하며, 여러 가지 일화나 명언을 남긴 것으로도 유명하다. 독일 제일의 저술가라는 말도 있을 정도다. 다만 19세기 독일 산문의 대가라는 평가를 받는 대 몰트케와 비교한다면 밀리기는 한다.
- 철혈재상의 강인하고 냉혹한 이미지를 가지고 있지만, 대외적인 이미지와는 다르게 사적으로는 상당히 감수성이 풍부했으며, 신경쇠약 때문에 자주 과식했고, 사인도 과식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의외로 눈물도 많았다고 한다. 아들의 결혼을 반대하는 과정에서 울면서 자살하겠다고 말린 적도 있으며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의 보상 조약 체결을 둘러싸고 빌헬름 1세와 대립이 생겼을 때는 울면서 자살 소동을 벌여 빌헬름 1세의 뜻을 꺾은 적도 있다고 한다. 한 번은 비스마르크가 "신의 말을 들어주지 않으시면 사임하겠습니다!"라고 외치자 빌헬름 1세도 "제국에는 나보다 그대가 더 필요하니 차라리 내가 퇴위하겠소!"라고 맞받아쳤다. 어찌 됐든 빌헬름 1세는 비스마르크가 설득하면 마뜩찮아 해도 들어주었기 때문에 빌헬름 1세가 91세의 나이로 사망하자 비스마르크는 큰 상심에 빠졌다. 이후 빌헬름 2세가 본인 말을 안 듣자 똑같은 짓을 했는데, 빌헬름 2세가 무시하자 열받아서 잉크병을 빌헬름 2세의 이마에 던졌다는 카더라가 있었는데, 알고 보니 찌라시의 보도였다. 실제로는 비스마르크는 빌헬름 2세에게 모독에 가까운 구박을 받았어도 결코 예의를 잃지 않았다. 총리 임기 말년에 빌헬름 2세가 비스마르크에게 누구를 만나는지, 어떤 대화를 하는지 일일이 문서로 보고하라는 명령을 받자 뚜껑이 열려서 잠시 이성을 잃은 적이 있지만, 퇴임 이후에도 아들 뻘 나이인 빌헬름 2세에게 훈계하려고 했지 한판 붙자는 식으로 대들진 않았다.
- 자신의 미국인 친구 존 말트리에게 보낸 편지에 따르면 식료품점 주인이 자기 일을 껄끄러이 생각하는 것처럼 정치를 싫어했단다. 말트리는 비스마르크의 대학 동창이었고, 이후 미국의 외교관이 되었다. 비스마르크와는 노년까지 쭉 편지로 교류했다.
- 젊은 시절 친구와 늪지대를 통과하다가 친구가 늪에 빠졌는데 총대를 내밀었지만 닿지 않자 총을 장전해서 친구에게 겨누고 "평소에 너 정말 꼴 보기 싫었지만 내색은 못 하고 있었는데 이 참에 여기서 죽어라!"라며 악담을 하여 친구가 빡쳐 스스로 있는 힘을 다해 알아서 나오게 한 일화가 유명하다. 이에 대해서는 "자네를 구하진 못하겠고 차마 천천히 죽는 걸 볼 수도 없으니 고통 없이 한번에 보내주겠네."라고 말해 친구가 기겁하게 해서 빠져나오게 한 판본도 있다. 아무튼 친구는 온 힘을 다해 팔다리를 휘저었고 그 덕분에 비스마르크가 서 있는 가장자리에 가까워졌다. 그러자 비스마르크는 비로소 친구를 당겨 꺼내주었는데, 친구가 빠져나오자마자 욕지거리를 하면서 덤빌 기세이자 비스마르크는 친구에게 사죄하면서 말하길, "날 용서하게. 내가 겨눈건 살려고 발버둥치지 않고 포기하려고 했던 자네의 마음이네. 만약 내가 무작정 늪에 뛰어들기라도 했으면 자네를 구하기는커녕 나까지 함께 빠져 죽었겠지 않은가?"라고 하자 친구가 그제서야 받아들였다는 이야기.
워낙 황당한 일화라 "한국 등에서 훈육용으로 지어낸 거짓말[46]이 아니냐?"고 하는 사람들도 있을 정도.[47] 하지만 이 일화는 비스마르크 생전인 1882년에 나온 신문기사에도 이미 언급된 적이 있는 실제로도 있었던 유서 깊은 이야기다. 물론 세설신어에 조조와 원소 버전으로 동일한 이야기가 실린 것을 생각해 보면 동서고금으로 널리 퍼져있던 교훈적인 민담 내용이 비스마르크의 일화로 각색된 것일 수도 있다.
- 귀족 여식을 아내로 맞이할 때 장인을 상대로 치밀한 작전과 노력을 해 사기친 일화 같은 카더라식 에피소드도 있다. 하지만 결혼에 이르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무신론이나 다름없던 이신론(理神論)[48]에서 루터교로 개종한 것이고, 그나마도 33세 때였다. 러시아 대사 시절 47세 나이에도 러시아 대사의 25살 난 아내와 불륜을 벌였다. 아내와 러시아 대사가 대인배라서 눈감아주지 않았다면, 엄청난 스캔들로 비화해서 꽤나 골치아팠을 것이다.[49]
- 자주 인용되는 비스마르크의 명언으로서 "청년들에게 해줄 말은 단 세 마디뿐이다. 일하라, 더욱 일하라, 죽을 때까지 일하라."가 있다. 그러나 위에 쓰였듯 정작 본인의 청년시절 생활은 성실함과는 상당히 거리가 멀었다.
- 훈장에 관련된 일화도 유명하다.원수 시절, 전쟁에서 화려한 공을 세운 병사 한 명이 있었다. 원수인 비스마르크가 직접 훈장을 수여하는데, 이때 철혈재상이네 웃음을 모르네 하던 걸로 소문이 자자하던 비스마르크가 갑자기 씩 웃으면서 그 사병에게 농담을 건내었다.그러자 병사가 질문했다."도대체 이 훈장을 현금으로 치면 얼마나 되기에 그러십니까?"그 즉시 비스마르크는 대답했다."이거… 현금으로 치면 고작해야 1 마르크밖에 안 될 걸세."그러자 그 병사도 즉각 우렁차게 말하길, "그럼 저는 그 훈장과 99 마르크를 받고 싶습니다!"이 말에 비스마르크도 잠깐 멍해있다가 크게 껄껄 웃으면서 그의 말대로 해주었다고 한다.
단순한 유머 혹은 대담한 병사 개인에 대한 주목을 위한 이야기로 자주 받아들여지지만, 국가에 의해 만들어지는 가치와 현실 사이의 거리감을 지적할 때 언급되어 국가주의를 비판하는 데 자주 인용되는 뼈 있는 일화다. 이 이야기는 그의 이름을 언급하지 않고 탈무드에서 유머로 언급한다. 공산주의 유머에도 비슷한 일화가 있다.[50]
- 사랑의 학교에 따르면 은퇴한 후 비스마르크가 몰트케를 만나기 위해 마차를 타고가다 한 소년을 보고 태워줬다. 그 소년은 가난한 연극배우로 홀로 있는 어머니를 위해서 주머니의 돈을 드린 다음 극장으로 가려고 하자 그가 극장에 좀 늦게 가면 어떠냐고 말하자 소년이 약속을 지켜야 하지 않냐고 이야기했다. 그 소년의 모습에 감동 받은 그는 극장으로 찾아가 화환을 보내 경의를 표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 빌헬름 1세는 "비스마르크 아래에서 황제 노릇 하기 참 힘들다." 하는 명언을 남겼다.
- 독일 제국의 식민지였던 독일령 뉴기니를 방문할 당시 그곳에서 봉사 활동을 하고 있던 독일인 수녀들한테 연설을 했는데 "자매들이여, 순종하라!"라고 아주 짧게만 하고 떠났다고 전해진다.
5. 여담
- 비스마르크는 자신의 원하던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 무력을 사용했다. 두 전쟁 모두 중요한 전투에서 이긴 다음 고삐를 쥐고 원하는 것을 가져갔다. 1870년 독일 통일 이후 실각할 때까지 그의 정책 목적은 철저히 전쟁을 막기 위한 세력 균형을 추구하는 데 있었다.
- 대학 시절에 25번이나 결투를 한 것으로 유명하다. 이런 기질은 나이를 먹은 후에도 여전해서 심지어 프로이센 총리로 재임 중이었던 1865년에도 자신의 군비 증액을 사사건건 반대했던 진보당 의원 루돌프 피르호에게 홧김에 결투를 신청하기도 했다. 물론 비스마르크의 이런 행동은 당시에도 철딱서니없는 행위로 여겨져 많은 비판을 받았고, 루돌프 피르호도 어처구니없다는 반응을 보이며 결투신청을 거절했다.[51]
- 아이러니한 건 빌헬름 2세와 아우구스테 빅토리아 황후의 결혼에 대해 적극적으로 지지한 인물이 비스마르크였다는 거다. 원래 프로이센 왕실은 아우구스테 빅토리아가 공주가 아니라는 이유로 결혼을 반대했지만 빌헬름 2세가 결혼하겠다고 밀어붙혔고, 오토 폰 비스마르크가 이 결혼으로 프로이센 왕실과 슐레스비히홀슈타인 가문과의 분쟁이 종식될 수 있을 것이라며 둘의 결혼을 적극적으로 지지했기에 두 사람은 결혼할 수 있었다.
- 왕년에 언어 공부에 심취했던 적이 있는 만큼 여러 가지 언어에 능통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중에서도 특히 영어에 능통해 역시 영어에 통달한 이홍장과 만났을 때는 통역사의 도움을 받지 않고도 의사소통이 가능했다고 한다.
- 개를 좋아했다. 키우던 애견이 비스마르크에게 죽어가는 모습을 보이기 싫어 스스로 잠수를 타버린 적이 있다. 개를 비롯해 무리생활을 하는 동물들은 이런 습성이 있다. 때문에 비스마르크는 죽기 직전까지 말썽 부리는 줄 알고 개를 야단치려고 찾고 있었던 사실을 몹시 후회한 기록도 있다. 임종 시에도 그 개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고 하는데, 그 이름은 술탄. 그레이트 데인이다. 개를 본인의 오른편에 놓고 협상을 하기도 했다. 상대방이 흥분해서 주먹쥔 팔을 휘두르자 개가 주인님을 공격하려는 줄 알고 상대방을 공격하려든 일화도 있다.
- 20세기 중후반 일부 라디노어 언어 공동체에서 사용되던 특유의 표현으로 "ir al Bismarck"라는 표현이 있었다. 직역하면 "비스마르크로 간다"라는 의미인데, 실제 의미는 화장실에 갔다온다는 의미의 완곡 어법이었다. 라디노어는 일부 프랑스어의 영향을 받았는데, 비스마르크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던 프랑스인들의 개인적 감정이 섞여든 것으로 추정된다.
* 은퇴한 곳인 프리드리스루흐는 현재 당시 철도역 건물을 개조한 비스마르크 박물관이 있다. 비스마르크의 상징이 되는 레인코트, 베르사유 독일 황제 선포식 그림, 훈장 등 엄청난 레어템들이 가득하다. 다만 찾아가기는 조금 껄끄러운데, 함부르크에서 S반(전철 격)으로 갈 수 있는 마지막 역 다음 역(2km 상당)에 있다는게 문제. 이 구간(즉, 한 정거장 구간)을 걸어가든가 아니면 2시간마다 한 번씩 오는 차 시간 맞춰서 맞는 승강장에서 기다려야 한다. 원칙적으로는 돈을 내야 하지만 말 그대로 한 정거장 구간에 열차표 검사는 거의 하지 않으므로 돈은 들지 않는다. 역 바로 옆에 있는 박물관 입장료는 저렴한 편이다. 비스마르크와 아내의 석관이 안치된 영묘도 근처에 위치하며, 찾아간다면 참배도 할 수 있을 듯.
- 한편 쇤하우젠(Schönhausen)[52]에 있던 비스마르크 생가는 1700년경 비스마르크의 조상이 짓고 비스마르크가 태어난 쇤하우젠 1성(Schönhausen I)[53]과 70회 생일 선물로 받은 쇤하우젠 2성(Schönhausen II)이 있었는데, 하필 쇤하우젠이 2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민주공화국에 들어가면서 1958년에 프로이센 융커와 그 잔재를 청산한다는 명목으로 쇤하우젠 1성을 파괴하여 이제는 부속건물밖에 없다.
- 당시 한반도는 조선 말기로 비스마르크는 흥선대원군과 비슷한 시기에 활동한 인물이다. 실제 사망년도도 1898년으로 같다. 다만 비스마르크가 흥선대원군보다 나이가 다섯 살 위고, 흥선대원군이 비스마르크보다 5개월 정도 먼저 죽었다. 그러나 사상이 크게 다르다보니 둘이 잘 비교되지는 않는다.
* 동시기 청나라에서 활동한 (8년 늦게 태어나 3년 늦게 죽은) 이홍장과 비교되기도 한다. 실제로 둘은 모두 일선에서 퇴진한 1896년 서로 만나기도 했다. 면담 내용을 수록한 동아일보 기사. 이 기사를 패러디한 "이홍장과 비스마르크"라는 팬픽이 존재한다.
- 일본 제국, 메이지 유신의 주역들에게는 롤 모델이 되기도 했다. 마침 일본 제국과 독일 제국은 비슷한 시기에 건국되었다. 빌헬름 1세는 메이지 덴노처럼 통일 및 근대화의 상징적인 군주였고, 오토 폰 비스마르크는 오쿠보 도시미치나 이토 히로부미처럼 통일 및 근대화의 실질적인 주역이였다.
- 가끔 비스마르크 때의 독일을 제2제국, 히틀러 때의 독일을 제3제국이라 해서 비스마르크가 제1차 세계 대전에 가담한 줄로 잘못 아는 사람들이 있다. 비스마르크는 20세기가 되기 전에 사망했다. 비스마르크 동맹 체제 항목에 설명되어 있지만, 비스마르크는 유럽의 평화와 세력 균형을 꾀했던 인물이다. 만일 비스마르크가 살아있었다면, 가담은 커녕 극구 반대했을 것이다.[54]
- 미국 노스다코타 주의 주도인 비즈마크(Bismarck)는 그의 이름을 따서 지은 것으로, 독일계 미국인이 이 주에 압도적으로 많이 거주하는 것과도 연관되어 있다. 도시 자체는 전형적인 행정 중심 도시로, 노스 다코타 주 안에서는 파고(Fargo)에 이어 두 번째로 인구가 많은 도시. 그러나 인구 적기로 유명한 노스 다코타답게 두 번째로 인구가 많은 도시라고 해 봤자 광역권 다 합쳐서 약 12만 명 밖에 안 된다.
- 1945년 당시 미 육군청이 제작한 군사 교육용 영상물(Your Job In Germany, 1945)에서는 총리(Chancellor)가 아닌 총통(Fuhrer)으로 왜곡당했다. 본 영상에서는 비스마르크가 오직 철과 피만을 외치며 덴마크, 오스트리아, 프랑스를 침략한 호전적인 전쟁광으로 그려져있는데, 이는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사실과는 거리가 멀다. 그러나 선전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영상들이 다 그렇듯 정확한 역사적 분석은 배제한 채 비스마르크를 전형적인 전쟁광으로 묘사하고 있다. 아예 빌헬름 2세[55], 심지어는 진짜 총통과 동일 선상에 놓였다.
- 2024년 현재 생존한 후손으로는 증손자인 알렉산더 폰 비스마르크가 있다.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장기화되자 독일 내 친러 세력에 의해 협상으로 전쟁을 끝내자는 반전(反戰) 시위가 열렸는데, 이 사람도 여기에 참석했다고 한다. #, # 게다가 2023년 독일을 위한 대안의 주도 하에 포츠담에서 열린 비밀 회동에 참석하여 독일의 이민자 200만 명을 국외로 추방하는 계획을 논의했다는 것이 밝혀져서 독일에서 전국적인 논란의 중심에 섰다. #
- 1889년 목소리를 녹음했으며 2012년에 공개되었다.참고자료 1957년에 발견된 저장 장치가 있었는데 별 생각없이 방치했다가 2014년부터 미국 에디슨 연구소가 혹시 에디슨이 맨 처음 녹음한 동요가 있지 않을까 싶어 분석해보니 123년 전(1889년) 비스마르크가 한 연설이 녹음되어 있는 것을 확인한 것. 원래 목표한 바는 아니었지만 이것도 꽤 큰 성과다. 참조 링크.
미국 민요 "옛날 좋은 식민지 시절에 In Good old Colony Times"
In good old colony times,
옛날 좋은 식민지 시절에
When we lived under the King,
우리가 왕 밑에서 살아가던 때
Three roguish chaps fell into mishaps
세 명의 악당이 곤경에 처했네
Because they could not sing.
왜냐하면 그들은 노래를 부를 수 없었으니까
독일 시인 루트비히 울란트 (Ludwig Uhland)가 쓴 "붉은수염 황제 이야기 Als Kaiser Rotbart lobesam"의 1연[56]
Als Kaiser Rotbart lobesam
황제로서 위대하신 붉은 수염께서
Zum heil'gen Land gezogen kam,
당신의 위대한 성지로 행차하시네
Da mußt er mit dem frommen Heer
그의 경건한 군대와 함께
Durch ein Gebirge wüst und leer.
황량하고 텅 빈 산들을 넘으시며
라틴어 권주가 "젊은이의 노래 Gaudeamus igitur"
Gaudeamus igitur,
우리 모두 기뻐하자
juvenes dum sumus.
우리가 아직 젊다는 것에
Post jucundam juventutem,
유쾌한 젊음이 지나가고
post molestam senectutem
힘든 노년이 지나가면
nos habebit humus.
우리는 흙에 묻히리라
프랑스 국가 "라 마르세예즈"의 1절[57]
Allons enfants de la Patrie
일어나라 조국의 아이들이여
Le jour de gloire est arrivé
영광의 날이 왔도다
Contre nous de la tyrannie
우리에 대항하여 압제자의
L'étendard sanglant est levé.
피 묻은 깃발이 일어났도다
아들에게 전하는 음성 편지
Treibe alles in Maßen und Sittlichkeit, namentlich das Arbeiten,
모든 것을 윤리적으로 적당히 하거라
dann aber auch das Essen, und im Übrigen gerade auch das Trinken.
특히 일하는 것, 먹는 것도 말이다. 그리고 쓸데없는 음주도 하지 말거라
Rat eines Vaters an seinen Sohn.
아버지로서 아들에게 보낸다
In good old colony times,
옛날 좋은 식민지 시절에
When we lived under the King,
우리가 왕 밑에서 살아가던 때
Three roguish chaps fell into mishaps
세 명의 악당이 곤경에 처했네
Because they could not sing.
왜냐하면 그들은 노래를 부를 수 없었으니까
독일 시인 루트비히 울란트 (Ludwig Uhland)가 쓴 "붉은수염 황제 이야기 Als Kaiser Rotbart lobesam"의 1연[56]
Als Kaiser Rotbart lobesam
황제로서 위대하신 붉은 수염께서
Zum heil'gen Land gezogen kam,
당신의 위대한 성지로 행차하시네
Da mußt er mit dem frommen Heer
그의 경건한 군대와 함께
Durch ein Gebirge wüst und leer.
황량하고 텅 빈 산들을 넘으시며
라틴어 권주가 "젊은이의 노래 Gaudeamus igitur"
Gaudeamus igitur,
우리 모두 기뻐하자
juvenes dum sumus.
우리가 아직 젊다는 것에
Post jucundam juventutem,
유쾌한 젊음이 지나가고
post molestam senectutem
힘든 노년이 지나가면
nos habebit humus.
우리는 흙에 묻히리라
프랑스 국가 "라 마르세예즈"의 1절[57]
Allons enfants de la Patrie
일어나라 조국의 아이들이여
Le jour de gloire est arrivé
영광의 날이 왔도다
Contre nous de la tyrannie
우리에 대항하여 압제자의
L'étendard sanglant est levé.
피 묻은 깃발이 일어났도다
아들에게 전하는 음성 편지
Treibe alles in Maßen und Sittlichkeit, namentlich das Arbeiten,
모든 것을 윤리적으로 적당히 하거라
dann aber auch das Essen, und im Übrigen gerade auch das Trinken.
특히 일하는 것, 먹는 것도 말이다. 그리고 쓸데없는 음주도 하지 말거라
Rat eines Vaters an seinen Sohn.
아버지로서 아들에게 보낸다
- 한국외대 정문 쪽에 50년 가까이 되는 비스마르크 라는 호프집이 있다. 최근 가게 크기를 반으로 줄였다고. #
6. 어록
인생에 홀로 할 수 있는 일이란 아무것도 없다. 신의 발자국 소리에 조용히 귀를 기울이고 있다가 그가 지나갈 때 기회를 놓치지 않고 외투자락을 잡아채는 것이 정치인의 임무다.
Americans are very lucky people. They are bordered to the North and South by weak neighbors and to the East and West by fish.
미국인은 매우 운이 좋다. 북쪽과 남쪽에 약한 이웃이 있고 동쪽과 서쪽에 물고기가 있다.
책 《세기의 다툼》 제4장 중 오토 폰 비스마르크의 미국에 관한 농담
미국인은 매우 운이 좋다. 북쪽과 남쪽에 약한 이웃이 있고 동쪽과 서쪽에 물고기가 있다.
책 《세기의 다툼》 제4장 중 오토 폰 비스마르크의 미국에 관한 농담
Nicht durch Reden und Majoritätsbeschlüsse werden die großen Fragen der Zeit entschieden, das ist der große Fehler von 1848 und 1849 gewesen, sondern durch Eisen und Blut.
이 시대의 중요한 문제들은 더 이상 언론이나 다수결에 의해 좌우되는 것이 아니며 이를 잘 보여주는 것이 바로 1848년과 1849년에 일어났던 일련의 사건이라고 생각합니다. 즉, 당면한 문제들은 오직 철과 피에 의해서만 해결될 수 있는 것입니다.
1862년 9월 29일 제국 의회 총리 취임연설
이 시대의 중요한 문제들은 더 이상 언론이나 다수결에 의해 좌우되는 것이 아니며 이를 잘 보여주는 것이 바로 1848년과 1849년에 일어났던 일련의 사건이라고 생각합니다. 즉, 당면한 문제들은 오직 철과 피에 의해서만 해결될 수 있는 것입니다.
1862년 9월 29일 제국 의회 총리 취임연설
"비록 군비가 우리의 빈약한 몸에 비해서 지나치게 크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우리에게 유익하다면 우리들은 그것을 몸에 지니는 정열을 지녀야 야 할 것이며, 또한 감히 그와 같이 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독일이 착안해야 할 것은 프로이센의 자유주의가 아니라 군비인 것입니다. 지금의 대문제는 언론이나 다수결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철과 피(血), 곧 병기(兵器)와 병력에 의해서만 해결할 수 있습니다."
연설 전문
연설 전문
"모든 군인과 정치가들은 전쟁을 가볍게 여겨서도 두려워해서도 안 된다."
"어리석은 사람은 경험에서 배우고 지혜로운 사람은 역사에서 배운다."[58]
"작금의 유럽은 화약고이고, 지도자들은 무기고 위에서 담배를 피고 있을 뿐이다. 작은 불씨 하나가 우리 모두를 집어삼킬 전쟁을 일으킬 것이다. 언제 그 폭발이 일어날지는 모르지만, 어디서 일어날지는 말해줄 수 있다. 발칸에서 벌어질 저주받을 바보짓[59]이 그 폭발을 일으킬 것이다."
"음악이란 사랑처럼 무상으로 주어져야 한다."
Wir Deutschen fürchten Gott, aber sonst Nichts in der Welt.
우리 독일인은 신을 두려워할 뿐, 세상의 그 무엇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1888년 2월 6일, 제국의회에서의 연설 중. 매우 호전적인 발언처럼 보이지만, 이는 독일 내부의 군국주의 여론을 비판하려는 의도였으나 언론까지 다 호전적인 발언으로 받아들이고 인용하는 바람에 비스마르크는 이 발언을 한 걸 후회했다고 한다.
우리 독일인은 신을 두려워할 뿐, 세상의 그 무엇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1888년 2월 6일, 제국의회에서의 연설 중. 매우 호전적인 발언처럼 보이지만, 이는 독일 내부의 군국주의 여론을 비판하려는 의도였으나 언론까지 다 호전적인 발언으로 받아들이고 인용하는 바람에 비스마르크는 이 발언을 한 걸 후회했다고 한다.
Die Gottesfurcht ist es schon, die uns den Frieden lieben und pflegen läßt.
우리가 평화를 사랑하고 가꾸는 것, 그것이 정말 신을 경외하는 것이다.
위의 연설에 이어서. 연설의 핵심이지만 앞의 자극적인 발언에 묻혔다.
우리가 평화를 사랑하고 가꾸는 것, 그것이 정말 신을 경외하는 것이다.
위의 연설에 이어서. 연설의 핵심이지만 앞의 자극적인 발언에 묻혔다.
"겸손은 훌륭한 미덕이지만 정치가는 자신감을 가져야 한다."[60]
"황제께서는 매일같이 생일상을 받으려 하신다."
빌헬름 2세에 대해 탄식하며
빌헬름 2세에 대해 탄식하며
Treibe alles in Maßen und Sittlichkeit, namentlich das Arbeiten,
dann aber auch das Essen, und im Übrigen gerade auch das Trinken.
Rat eines Vaters an seinen Sohn.
"모든 것을 윤리적으로 적당히 하거라. 특히 일하는 것, 먹는 것도 말이다. 그리고 쓸데없는 음주도 하지 말거라. 아버지로서 아들에게 보낸다."
1889년 녹음. 아들에게 보내는 음성 편지.
dann aber auch das Essen, und im Übrigen gerade auch das Trinken.
Rat eines Vaters an seinen Sohn.
"모든 것을 윤리적으로 적당히 하거라. 특히 일하는 것, 먹는 것도 말이다. 그리고 쓸데없는 음주도 하지 말거라. 아버지로서 아들에게 보낸다."
1889년 녹음. 아들에게 보내는 음성 편지.
"법률이 만들어지는 과정은 소시지가 만들어지는 과정과 같아서, 보지 않는 것이 좋다."[62]
비스마르크가 한 말로 알려져 있지만 그가 이 말을 했다는 주장은 1930년대에서야 나오기 시작했다. 이와 비슷한 논지의 말이 실린 최초의 문헌은 1869년 3월 29일자 The Daily Cleveland Herald에 실린, 미국의 시인 겸 변호사인 존 고드프리 색스(John Godfrey Saxe)[63]의 기고문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Wikiquote 링크
비스마르크가 한 말로 알려져 있지만 그가 이 말을 했다는 주장은 1930년대에서야 나오기 시작했다. 이와 비슷한 논지의 말이 실린 최초의 문헌은 1869년 3월 29일자 The Daily Cleveland Herald에 실린, 미국의 시인 겸 변호사인 존 고드프리 색스(John Godfrey Saxe)[63]의 기고문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Wikiquote 링크
“외교란 러시아와 싸우지 않는 것이다.”
비스마르크 시대 독일 외교의 특징 가운데 하나로 알려진 말. 유럽 중부에 위치한 독일의 지정학적 환경에서, 양면 전쟁의 위험을 경계해야 한다는 의미로도 인용된다.[64] 이를 무시하고 빌헬름 2세의 독일 제2제국이 러시아를 적으로 돌리고 제1차 세계 대전에서 무리한 양면전쟁을 벌였다가 패망으로 들어선 것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비스마르크 시대 독일 외교의 특징 가운데 하나로 알려진 말. 유럽 중부에 위치한 독일의 지정학적 환경에서, 양면 전쟁의 위험을 경계해야 한다는 의미로도 인용된다.[64] 이를 무시하고 빌헬름 2세의 독일 제2제국이 러시아를 적으로 돌리고 제1차 세계 대전에서 무리한 양면전쟁을 벌였다가 패망으로 들어선 것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인생이란 치과의사 앞에 있는 것과 같다. 그 앞에 앉을 때 마다 최악의 통증이 곧 찾아올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러다 보면 어느새 통증이 끝나 있는 것이다."
Mit schlechten Gesetzen und guten Beamten läßt sich immer noch regiren, bei schlechten Beamten aber helfen uns die besten Gesetze nichts.
악법과 훌륭한 관리들을 가지고서는 지속적인 통치가 가능하다. 그러나 최고의 법이 있더라도 무능한 관리가 함께한다면 우리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1850년, 헤르만 바게너[65]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악법과 훌륭한 관리들을 가지고서는 지속적인 통치가 가능하다. 그러나 최고의 법이 있더라도 무능한 관리가 함께한다면 우리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1850년, 헤르만 바게너[65]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Die einzig gesunde Grundlage eines großen Staates, und dadurch unterscheidet er sich wesentlich von einem kleinen Staate, ist der staatliche Egoismus und nicht die Romantik.
소국과 본질적으로 구분되는 대국의 건전한 밑바탕은 낭만이 아니라, 국가적인 자부심이다.
1850년, 의회 연설에서
소국과 본질적으로 구분되는 대국의 건전한 밑바탕은 낭만이 아니라, 국가적인 자부심이다.
1850년, 의회 연설에서
Es ist soviel Müssen in meinem Leben, daß ich selten zum Wollen komme.
살면서 그토록 많은 해야만 하는 것이 있었지만, 그것들 중 내가 원해서 했던 건 드물었지.
1865년, 누이에게 보낸 편지에서
살면서 그토록 많은 해야만 하는 것이 있었지만, 그것들 중 내가 원해서 했던 건 드물었지.
1865년, 누이에게 보낸 편지에서
흔히 비스마르크가 한 말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비스마르크의 정책에 반발한 독일 자유주의자들이 비꼬면서 한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스마르크의 정책을 잘 보여주는 말이라서 꽤 자주 인용된다.
나는 스페인이 세계에서 제일 강한 나라라고 확신한다. 몇 세기에 걸쳐 스페인은 스스로를 파괴하려고 시도했지만 아직도 성공하지 못했다.
I am firmly convinced that Spain is the strongest country of the world. Century after century trying to destroy herself and still no success.
흔히 비스마르크가 한 말이라고 떠돌지만 당시의 스페인 정치인이 비스마르크가 했다고 인용한 말이라서 확실하지 않다.
I am firmly convinced that Spain is the strongest country of the world. Century after century trying to destroy herself and still no success.
흔히 비스마르크가 한 말이라고 떠돌지만 당시의 스페인 정치인이 비스마르크가 했다고 인용한 말이라서 확실하지 않다.
7. 대중매체에서
- 시드 마이어의 문명 시리즈에서는 문명 3, 문명 4, 문명 5 등에서 독일의 지도자로 등장한다. 3과 5에서는 단독으로, 4에서는 프리드리히 2세와 공동 출연.
- 유럽전쟁 6과 그 후속작인 유럽전쟁 6:1914에도 등장하지만 두 게임에서 모두 취급이 좋지는 않다.
- 국내에서 서비스 되고 있는 중국의 방치형 게임인 소녀전쟁: 환상의 천하통일전에 모에화 되어 나왔다. 국내 성우는 여윤미.
- 콜 오브 듀티: 월드 앳 워의 캠페인 중, 마지막 미션에서 그의 초상화가 독일 국회의사당 곳곳에 걸려있다. 자신이 세운 독일국의 몰락을 지켜보는 것처럼 보여서, 독일 역사를 아는 플레이어에겐 다소 씁쓸하게 느껴지는 부분.
- 호시노 유키노부의 만화인 멸망한 짐승들의 바다에선 전함 비스마르크가 등장하는데, 지휘하는 제독의 얼굴이 영락없는 비스마르크다.
- 빅토리아 3에서 프로이센의 정치인으로 등장 가능하다.
8.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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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외부 링크
- 한국어
[1] 현 독일 작센안할트 주 쇤하우젠[2] 현 독일 슐레스비히홀슈타인 주 프리드리히스루[3] 북독일 연방은 하나의 국가가 아니었다.[4] 헬무트 콜과 함께 독일 총리 중 최장신이다.[5] 비스마르크는 Fürst von Bismarck 작위와 Herzog von Lauenburg 작위를 모두 받았으나, 공작 작위는 빌헬름 2세의 뜻으로 반강제적으로 은퇴할 때 보상으로 받았으므로 정작 본인은 공식석상에선 단 한 번도 사용하지 못했다.[6] 정계 은퇴후 특진하였다.[직역] 오늘날의 문제는 연설이나 다수결이 아니라 철과 피에 의해 결정된다.[8] 특히 비스마르크 본인은 자유주의를 반대하였기에, 자유주의자는 아니었지만 자유주의에 긍정적인 생각을 가진 빌헬름 2세와 더 충돌하였다. 다만 정치적, 이념적으로 갈라섰고 뒷담 까긴 했지만 황제와는 죽을 때까지 상호존중관계를 유지했다.[9] 현재 작센안할트 주.[10] 그래서 비스마르크는 본인의 고향을 가리켜 '프로이센의 요람(Wiege Preußens)'이라고 말했다. 프로이센 왕국의 전신인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의 뿌리가 그의 고향이 있는 알트마르크(Altmark) 지역이었기 때문이다.[11] 요약하면 순열식으로 상속된다. 상속자 순위가 1, 2, 3.... 같은 식이었다면 1, 3, 5, 7… 순으로 가다가 나중에 1순위로 다시 반복되는 상속법이다.[12] 이 토지를 비스마르크 지지자들 70세 기념 선물로 반환해 주었다.[13] 외증조부가 자유주의자여서 여러 불이익을 당했으나, 스웨덴 공사 시절 나폴레옹 전쟁으로 다른 직원들이 모두 도주하는 바람에 20대에 스웨덴 대사가 되었다.[14] 그래도 자식들과의 관계는 우호적이었다.[15] 이유는 어머니 빌헬미나가 놀러다니기 위해서였다.[16] 오토는 1831년 베를린의 삼위일체 교회에서 입교의식을 치르기도 하였다.[17] 당시 대학의 도시라 칭해지던 하이델베르크로 가지 않은 것은 오토의 어머니가 '얘 성격에 거길 보내면 큰일나겠다' 싶어서였다고 한다.[18] 한번은 친구들이 오토를 빼놓고 파티를 열였는데, 이를 알고서는 잠긴 문을 총으로 쏴서 열어 결국 파티에 참가했다.[19] 2년 후 프로이센 당국으로부터 반정부 단체로 지정 받아 가입자들에게 공직 금지령이 내려졌다. 이 때문에 비스마르크는 정적들에게 이 일로 공격을 받았다.[20] 일주일간 벼락치기로 공부했는데 이를 두고 두고 후회했다고 한다.[21] 당시 관습상 법관이 되려면 서기를 거쳐야 했다.[22] 말이 시험이지 연줄 닿는 고위 공직자가 써오란 논문 몇 개 써 오기가 전부였다. 또한 이때 오토가 쓴 논문의 내용은 지극히 평범했다고 한다.[23] 그의 아버지가 매우 유명한 교수였다.[24] 기숙학교 시절에는 체조와 체육을 싫어했다고 한다. 당시 프로이센의 교육과정에서는 체육 과목을 매우 중요시했으나 비스마르크에게는 영 적성에 맞지 않았다고 한다.[25] 옛 상관 포츠담 연대장에게 이를 알리자 연대장은 국왕의 진압 명령이 떨어지지 않았고 떨어진다고 해도 농부들의 도움은 필요없다고 했다. 비스마르크도 자신의 계획이 허망함을 알고 포기했다.[26] 비스마르크의 베프인 알브레히트 폰 론(Albrecht von Roon) 장군이 국왕의 수행 무관이었다. 폰 론 장군은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당시 국방장관으로도 활약했다.[27] 보면 알겠지만 비스마르크는 대단한 거구였다. 참고로 빌헬름 1세의 키는 180cm. 180cm라는 빌헬름 1세가 작게 보인다. 물론 180cm는 현대 기준으로도 꽤 장신이다. 단지 비스마르크가 너무 커서 작아 보일 뿐이다.[28] 현역 복무 후 4년간 예비군이었고 제대 후엔 란트베어(지역방위군)으로 5년간 편성되었다.[29] 의회 초창기라 제도적 미비 탓도 있었다.[30] 원래 비스마르크도 검은색 육군 예복을 입고 있었으나 빌헬름 1세의 어명으로 그림에서 통일의 주역을 더욱 돋보이게 하고자 흰색 예복을 입은 모습으로 그려졌다.[31] 당초 프랑스는 이탈리아가 오스트리아를 털길 바랐기 때문에 반대편에 붙을 일은 없었다.[32] 19세기에 와서는 이 지역이 산업, 자원적으로 알짜기도 했고, 독일과 프랑스 사이에서 전쟁이 벌어질 때 이 지역을 가진 나라가 매우 유리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이 부분이 더 궁금하면 동북아역사재단에서 펴낸 "유럽의 영토분쟁과 역사분쟁"을 참조.[33] 빈 체제를 메테르니히 체제라고 부르기도 하나 전자에 비해 후자의 용례가 적은 편이고, 이 경우는 메테르니히 본인의 주도권보다는 유럽 보수주의 열강의 연합이라는 성격이 강하다. 비견할 만한 다른 사례로는 차라리 나폴레옹 체제를 꼽음 직하다.[34] 프랑스를 뜻한다.[35] 해당 외교정책을 차륜동맹(Hub-Spoke Aliance)이라고 부른다.[36] 이를 위대한 고립(Splendid Isolation)이라고 한다.[37] 수상이 의회를 대표하고 견제를 받는 시스템이 존재했는데 비스마르크가 없앤 게 아니라, 그런 게 애초에 없었다는 말이다.[38] 당시의 폴란드인 중에서도 오스트리아의 지배를 받은 크라쿠프의 폴란드인들은 오스트리아인과 헝가리인을 포함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주민들 대다수가 자신들처럼 가톨릭을 믿었기 때문에, 오스트리아에 대한 악감정과는 별개로 종교적으로는 프로이센 치하나 러시아 치하의 폴란드인들보다 훨씬 자유로웠다. 덤으로 오스트리아는 자국의 피지배 민족들에게 대폭적인 자치권을 보장해줬다. 물론 대타협으로 헝가리를 지배층으로 끌어올린 걸 제외하면 피지배 민족들에게 진정 동등한 주권을 주지는 않았다.[39] 독일 제국의 선거법이 복잡했기 때문에 득표수와 의석수가 불일치였다.[40] 함부르크 근교의 프리드리히스루흐(Friedrichsruh)[41] 위치는 함부르크 근교에 있으며, 이곳에 가기 위해서는 S반 타고 가야한다.[42] 그의 인간적인 면모는 특히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에서 발견된다. 당시 이 전쟁에 참전한 장남 헤르베르트가 무사한지 알고 싶어서 견딜 수 없었던 비스마르크는 직접 말을 타고 전장에 나가 들판에 널린 사상자들을 살피고 다니며 생사불명의 아들을 애간장이 타도록 찾았다. 그 곳에서 비스마르크는 잠자리를 찾아 헤메다가 발을 헛디뎌 오물구덩이에 빠지거나 급히 말을 몰던 중 낙마하는 등 개인적으로도 끔찍한 일을 많이 겪었다. 다행히 헤르베르트는 이 전쟁에서 살아남아서 1904년에 세상을 떠났다고 전해진다.[43] 다만 여기서 문제는 프랑스를 굉장히 왕따 취급했다는 점이다.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이후 비스마르크가 프랑스 파리의 베르사유 궁전에서 독일의 제2제국을 선포하자 이를 본 프랑스인들은 당연히 분노했다. 여기에 후술할 빌헬름 2세의 실책까지 더해지면서 프랑스는 독일에 대한 복수의 명분이 더욱 강해졌으며 결국 진짜로 복수가 성사되어 버렸다.[44] 이것은 결국 대독일주의를 뜻하는 것인데, 전쟁을 통한 독일 통일 자체가 필요없었다는 주장. 당연히 통일에서 배제된 오스트리아의 역사가들은 그를 나쁘게 볼 수밖에 없다. 오스트리아가 먹기만 하면 되도록 준비된 케이크를 접시채 채간 사람이 비스마르크니까.[45] 베르사유 궁전에서 즉위식을 올렸다는 것 하나로 자존심을 구기게 만들었음이 이유라지만, 이는 자신들이 먼저 선전포고한 전쟁에서 패배한 프랑스인의 지나친 욕심이다. 그리고 당시 비스마르크는 독일 통일을 명시적으로 반대한 프랑스의 영향력을 배제하는 선까지만 전쟁을 진행했다. 외교적 결과를 얻는 선까지만 무력을 사용한다는 태도는 보오전쟁 때에도 마찬가지여서, 승기를 잡아 이긴 전쟁을 더 큰 승리로 이끌려는 임금이나 군부와 매번 다투어야 했고, 자기 자신의 힘으로 안 되면 왕세자의 힘을 빌려 왕을 설득했다.[46] 일례로 사자는 자기 새끼를 절벽에서 떨어뜨린다거나 하는 등의 엄격한 교육을 미화하는 예문들.[47] 그 말을 친구가 받아들였다는 점도 친구조차 일반적이지 않고 상당히 대인배인 것으로 보이게 만들기에 더더욱...[48] 신의 존재를 인정하긴 하지만, 종교적인 의미로 신봉하는 것이 아니라 보편규칙의 일환으로서만 인정한다.[49] 러시아 대사가 국익을 위해 참은 것도 있었을 것이다. 당시 러시아는 영국과 그레이트 게임 중이었는데, 비스마르크는 거물급 친러 외교관이므로 그가 프로이센의 외교정책을 주도한다면 친러 정책을 하리라 예상되었기 때문이다.[50] 사실 공산주의 유머와는 뉘앙스가 미묘하게 다른데, 그쪽에선 훈장을 주는 정치위원이 다른 선택지로 상금을 제시하고 거기에 훈장을 받는 사병이 훈장의 값을 묻자 정치위원이 화내면서 값을 말해주는 것, 마지막에 그 사병이 어떻게 되었는지가 나오지 않는다는 것(정황상 훈장이나 상금은 고사하고 징계를 받았을 확률이 높다) 등의 차이점이 있다.[51] 오늘날에는 피르호가 결투를 받아들이는 대신에 무기를 자신이 선택한다는 조건을 걸었고, 비스마르크도 이를 받아들였으나 결투 당일에 피르호가 결투에 쓸 무기로 소세지를 가져와 그를 골탕먹였다는 이야기가 널리 퍼져있다. 다만 이는 실제 결투신청으로부터 30여 년 후에야 유포되기 시작한 이야기이므로 사람들이 재미로 지어낸 루머일 가능성이 더 높다. 이런 웃기는 이야기가 나돌 정도로 당시 사람들이 비스마르크의 행동을 우스꽝스럽게 여겼다는 반증일 것이다.[52] 작센안할트 주[53] 자란 곳은 가족의 다른 영지인 포메른의 크니프하우젠(현 폴란드 땅)[54] 단적으로 독일을 국제 왕따와 전쟁의 도가니로 몰아넣은 빌헬름 2세는 비스마르크를 몰아내고 나서야 영국을 향한 패권 경쟁을 할 수 있었다.[55] 이 사람도 어디까지나 센 척하려고 호전적인 발언을 한 거고, 실제로는 전쟁광과 거리가 먼 유약한 성격이었다는 이야기가 있다.[56] 신성로마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바르바로사를 말한다.[57] 자신이 전쟁으로 무너뜨린 프랑스의 국가를 불러서 놀라워하는 반응이 많다. 의도는 알 수 없으나 승자의 여유인 셈.[58] 바보는 경험을 통해 배우고 현명한 사람은 남의 경험을 통해 배운다.[59] 발칸반도는 당시 안정되어 전성기, 벨 에포크를 보내던 유럽에서 유일하게 분쟁이 잦은 지역이었다[60] 이홍장에게 한 말이라고 한다.[61] 비스마르크는 잔뼈가 굵은 외교관 출신인만큼 미국의 잠재력에 대해서 꿰뚫어본 것으로 보인다.[62] 현대에 와서는 비교적 위생적인 가공 과정과 원료로 만들고, 특히 이 분야의 본진인 독일조차도 소시지를 만들 때는 엄격하게 위생 규정을 지키도록 하기에 큰 염려 없이 먹을 수 있다. 그러나 19세기 후반 ~ 20세기 초반까지만 해도 소시지 공장과 거기에 쓰이는 고기의 상태는 말이 아니었다. 자세한 것은 소시지 항목 참조.[63] 《장님과 코끼리》이야기의 창작자로 유명한 인물이다.[64] 따지고 보면 당시 독일과 프랑스의 관계가 워낙 적대적이었던 점을 반영한 것이기도 했다. 양국은 2차세계대전 이후에도 드골-아데나워 시절의 관계 개선 전까지도 줄곧 경쟁 관계를 유지했다. 물론 그 이후부터 프랑스와 독일은 급격히 친해졌고, 공동 역사 교과서까지 편찬하는데 성공하는 등 사실상 가장 친한 국가가 되었다.[65] 프로이센 왕국의 보수 성향 정치인이자 법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