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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18 23:35:06

비스마르크 체제

1. 개요2. 성립3. 비스마르크의 외교 및 국내 정책4. 의의5. 한계
5.1. 외부적 문제5.2. 내부적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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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비스마르크 체제는 1871년 독일 제국의 건국 이래 오토 폰 비스마르크에 의해 주도된 1889년까지 이어진 독일 제국의 국내 정치 체제 겸 국제 외교 체제였다.

2. 성립

알브레히트 폰 론에 의해 칸츨러로 임명된 비스마르크는 철혈 정책을 통해 프로이센 왕국의 군사적 발전을 꾀했으며, 노련한 외교술로 프랑스 제2제국을 외교적으로 고립시킨 뒤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의 승전을 이끌어내었다. 이로써 통일된 독일 제국이 수립되었으며, 비스마르크는 제국 수상으로서 제국의 노선을 결정하게 된다.

결국 1871년 중부 유럽의 강대국 독일 제국이 수립됨에 따라 독일 제국의 칸츨러(Kanzler, 수상)인 비스마르크가 주도하는 유럽의 체제가 형성된다. 빈 체제 이후 다시금 유럽에 성립된 현상유지 형태의 동맹 체제가 바로 비스마르크 체제가 된다.

3. 비스마르크의 외교 및 국내 정책

그의 외교와 국내 정책을 요약하면 반불/친러를 기반으로 한 국제 관계의 안정화식민지보다는 국내산업 우선 및 사회주의 세력 탄압이다.

우선 그는 중부 유럽 내에서 독일 이후의 강대국더이상 생겨나서는 안 된다고 판단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프랑스를 국제적으로 고립시킴과 동시에 유럽에서는 더이상 전쟁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고 판단하였다.

그리하여 동쪽의 인접한 강국인 러시아 제국과는 친하게 지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또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도 손을 잡으면서 보수적 군주제를 유지하는 세 제국의 사이를 돈독해야 한다고 판단하였다. 그래서 1873년 10월 3제 동맹이 성립되었다. 하지만 이 체제는 오래가지 못하는데 러시아의 발칸반도로의 진출, 그리고 거기서 오는 오스트리아와의 태생적인 충돌로 인하여 1878년 베를린 회의에서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하였다. 물론 1881년에 3제 동맹은 다시 맺어지고, 1884년에 갱신되었으나 1887년에 최종적으로 무너지게 된다. 그래도 러시아와 독일은 1887년에 재보장 조약을 통해 그나마 관계를 유지한다. 하지만 러시아와의 동맹은 비스마르크의 실각 이후 빌헬름 2세팽창주의로 넘어가면서 결국 최종적으로 파탄나게 된다.

한편 비스마르크는 3제 동맹이 어려워지면서 프랑스 고립 정책이 힘들어질 것을 대비하여 또 다른 동맹국인 이탈리아 왕국을 끌어들이게 되고, 1882년 이른바 삼국 동맹을 형성하게 된다. 하지만 이탈리아와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사이가 그리 좋지 못했고, 이것은 제1차 세계대전에서 이 동맹의 허약함이 만천하에 드러나게 된다.

또한 비스마르크는 팽창주의보다는 국내 산업 역량의 발전을 우선시했는데, 이는 독일 제국의 화학 및 공업력이 막대하게 발전하는 계기가 된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사회주의자들과 일부 타협하기도 했는데, 그 산물이 사회보장제도이다. 이후 다른 열강들도 자국에 사회보장제도를 도입하기 시작한다.

4. 의의

비스마르크 체제는 빈 체제 이후 유럽에 나타난 프랑스를 제외한 모든 국가를 묶는 동맹 체제이자 집단 안보 제도라는 측면에서 큰 의의를 갖는다. 이러한 체제는 향후 베르사유 체제, 이후에 형성되는 EU에도 적용될 정도로 유럽에 있어서 중요한 요소로 자리 잡는다.

19세기가 식민지 쟁탈전의 시기가 된 데에도 비스마르크 체제가 어느 정도 기여를 했다. 유럽이 안정되어있으니 유럽 각 열강들도 비유럽 세계로의 세력 투사에 전념할 수 있었던 것이다. 유럽 세계의 "좋은 시대"인 벨 에포크에도 크게 기여한 것이다. 결국 식민지 열강의 대결은 결국 제1차 세계 대전이라는 형태로 피할 수 없었음이 드러났지만, 20~30년이라는 결코 짧지 않은 시간 동안 평화를 유지했다는 의의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5. 한계

비스마르크 체제는 중부유럽 한복판에 위치해 태생적으로 적이 많을 수밖에 없는 독일이 취할 수 있는 방안 중 가장 이상적인 형태 중 하나였지만 태생적인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5.1. 외부적 문제

일단 독일의 지정학적 위치가 너무 좋지 못했다. 우선 제일 큰 문제는 독일의 동남부 이웃국인 러시아 제국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사이에 지속적인 갈등의 불씨가 있었다는 점이다. 러시아 제국은 오스만 제국이 약해진 틈을 타 발칸반도로의 진출을 노리고 있었던 상황이었기에 이미 오래 전부터 발칸 반도의 슬라브인들을 지배하고 있던 오스트리아-헝가리와 사이가 안 좋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 한편으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범게르만주의의 한 축으로 독일로서는 어쨌거나 잘 지내야만 하는 사이였다. 비스마르크는 양면전쟁을 피하기 위한 프랑스 고립 정책으로 러시아에게 손을 내밀었고 동맹국으로 끌어들이려고 했지만 결국 실패했는데 이 역시 이러한 지정학적 위치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사라예보 사건(과 그로부터 시작된 7월 위기)에서 보듯 오스트리아-헝가리와 러시아의 갈등은 결국에 제1차 세계 대전의 도화선이 되고야 말았다.

독일의 동부에만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서부는 동부만큼 여러 나라들 사이에 복잡한 문제가 꼬여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의 패배로 유럽 육군 최강국이라는 명성을 빼앗긴 굴욕을 씻고 싶어하는 프랑스가 항상 잠재적 적국으로 존재하고 있었다. 프랑스는 패전으로 인해 지하자원이 풍부한 알짜배기 땅인 알자스-로렌 지방을 빼앗겼기 때문에[1] 국민들이 지지해줄 전쟁명분도 가지고 있었다. 독일이 약해진 순간을 포착하면 언제든 전면전을 선포할 가능성이 높았기에 독일은 항상 국방력과 외교력을 대프랑스 견제에 투자해야만 했다. 보불전쟁에선 쉽고 빠르게 승전했지만 그건 운도 많이 따라준 결과고 프랑스는 절대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기에 비스마르크는 항상 프랑스 견제를 제 1원칙으로 외교관을 구상했는데, 다른 독일인들은 비스마르크만큼 그 중요성을 이해하지 못하고 프랑스를 과소평가하곤 했다.

또한 해당 체제는 외교를 통해 군사 문제를 풀고자 했는데 문제는 이 시기부터 서구 열강이 제국주의적 확장정책을 펼치면서 동시에 군비 확장에도 열을 올리고 있었다는 데 있다. 결국 비스마르크 한 사람의 카리스마에 의해 외교적으로 유지되던 체제는 힘으로 상대를 굴복시켜야 하는 시기로 넘어가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군사정책 중심으로 외교가 끌려가기 시작했다. 여기에 그동안 산업혁명의 영향으로 유럽 내 최고의 제국으로 스스로 고립을 자처했던 영국의 패권이 서서히 약화되면서 유럽에서 힘을 키우고 있던 독일을 견제하게 되었고 모든 체제가 어그러지는 결과로 가져오게 된다.

5.2. 내부적 문제

독일 내부의 정치적 구도도 좋지 못했다. 사실 비스마르크가 유독 안목이 뛰어났던 것이고, 당시 프로이센을 장악하고 있던 융커나, 비스마르크 본인을 쳐내다시피 하면서 집권한 빌헬름 2세는 비스마르크의 입장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결국에 융커빌헬름 2세세계 정책은 비스마르크 체제와는 정면으로 충돌했다.

베를린 회담에서 독일령 동아프리카, 나미비아 등의 식민지를 획득하면서도 유럽 밖 식민지 획득의 실효 가치에 대해서는 냉소적이던 비스마르크와 달리, 식민지 획득을 위해서는 영국과의 정면충돌도 불사하려 한 빌헬름 2세의 정책은 자연히 독일이 건함 경쟁에 뛰어들게 하는 결과를 낳았다. 이는 해군력 2, 3위를 차지하는 국가의 합산을 상회하는 해군력을 유지하겠다는 영국의 2강국 표준(Two Power Standard)을 시험대에 오르게 만들었고, 결국 영국이 다른 차원에서 독일을 견제하기 위해 위대한 고립(Splendid Isolation) 정책을 포기하고 프랑스, 그리고 비스마르크가 그렇게 붙잡고 싶어했으나 발칸 반도 문제로 결국 갈등의 불씨를 죽이지 못했던 러시아와 영국의 협조[2] 체제를 형성하게 만들었다. 결국 독일의 정책 변동으로 열강들이 각자의 입장에 따라 줄을 서게 된 상황에서 사라예보 사건은 강대국과 강대국들이 연쇄적으로 충돌하게 하는 결과를 낳았으며, 유럽은 제1차 세계 대전이라는 결과를 피할 수 없게 되는 상황으로 끌려나가게 된다.

빌헬름 2세를 위시한 대부분의 독일 정치인들과 군인들이, 비스마르크만큼 국가 대전략에 대한 이해가 부재했다는 점에서 파탄이 날 수 밖에 없는 체제였다고 봐도 무리는 아니다. 비스마르크 실각 이후에 독일이 전폭적으로 투자한 해외 식민지나 해군은 1차대전에서 독일에게 아무런 이득도 주지 못했고[3], 오히려 우호관계였던 영국과의 관계를 파탄내서 프랑스의 동맹으로 만들었다는 점에서 완전한 패착이었을 뿐이다. 비스마르크의 관점에 동의하고 이를 좀 더 오래 추구했더라면 세계대전을 막기까진 못하더라도 적어도 독일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정세를 이끌 수 있었겠지만[4] 팽창주의적 독일 군부의 태도는 결국 양면전쟁이라는 최악의 형태로 독일을 몰아넣었다.

양차대전 시절 프로이센 출신 정치인과 군인들은 대부분 이렇게 대전략관이 부재된 상황에서 지엽적인 목적에만 집착하는 성향을 공유했기에 그 이상의 안목을 가지고 있던 비스마르크가 독일인들 중에선 이상한 별종에 가까웠다. 그러니 비스마르크의 실각 이후에는 그의 외교적 방향성이 유지될래야 될 수 없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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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때문에 애초에 비스마르크는 알자스-로렌의 지배를 원치 않았으나 군부의 의견에 밀려 추진하게 되었다.[2] 영러협상 직전까지 러시아와 영국은 그레이트 게임으로 유라시아 전역을 무대로 경쟁하던 관계였으므로, 이러한 관계 개선은 더욱 극적으로 느껴지는 것이었다.[3] 해군을 많이 키워내긴 했지만 영국-프랑스 해군과 전면전을 붙으면 승산이 거의 없었기에 항구 밖으로 거의 나가지도 못했고, 그렇게 재해권을 빼앗겼기에 해외 식민지에서 아무것도 들여오지도 못했다. 애초에 독일이 끼고 있는 북해라는 바다 자체가 영국이 봉쇄하기 쉬운 지형이라 독일로서는 불리한 여건이다.[4] 7월 위기 문서와 위 외부적 문제에서 보듯 오스트리아-헝가리와 러시아의 충돌은 결국 피할 수 없는 일일지도 모르나, 발칸 반도의 일은 두 제국의 주요 관심사이지 독일이 전 국민을 총력전에 갈아넣어야 할 만한 사안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