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칸반도를 둘러싼 유럽 강대국들의 회의에 대한 내용은 베를린 회의 문서 참고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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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884년부터 1885년까지 독일 제국 베를린에서 당시 독일 제국의 총리 오토 폰 비스마르크의 주도 하에 열린 아프리카 식민지 분할 회의. 이 회의를 통하여 결정된 국경선은 이 회의 이후 130년 가까이 지난 지금까지도 현대 아프리카 국가들의 일직선에 가까운 기괴한 국경선[1]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부족, 언어, 문화, 역사 등 현지 상황은 무시하고 유럽 강대국들의 편의에 의하여 그어진 국경선이 오늘날 아프리카의 혼란에서 상당한 원인을 차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제국주의의 폐해를 가장 잘 보여주는 회의이기도 하다.2. 배경
19세기 초반까지만 하더라도 유럽 국가들의 아프리카 내륙 지역에 대한 이해도는 낮은 수준이었다. 로마 제국 시절부터 접촉이 잦았던 북아프리카 일대와 대항해시대를 거치면서 알게 된 중/남부 아프리카의 해안지역 정도는 유럽인의 인식 범위였지만, 드넓은 아프리카 내륙 지역은 대항해시대 이후로도 수백 년 간 아프리카인의 나라들이 건재하고 있었다. 18~19세기까지 활발히 식민지화와 교역이 진행됐음에도, 드넓은 아프리카의 내륙 지방에 대해서는 말 그대로 무지했다.이유는 유럽인들이 아프리카 내륙의 기후와 말라리아 같은 열병에 견디지 못했기 때문으로, 1800년 이전까지 유럽인들은 아프리카의 해안 지대에만 머물렀다. 그러다가 1820년 프랑스의 화학자 피에르 조셉 펠트티에르가 말라리아와 열병 치료약인 퀴닌을 발명하면서, 유럽인들은 아프리카 내륙으로 침투하기가 훨씬 수월해졌다.[2] 19세기 중반에 접어들면서 각종 선교사와 탐험가들의 활동 덕분에 아프리카 내륙 지방에 대해서도 속속들이 정보가 들어오기 시작했고, 이러한 정보는 한창 제국주의에 맛을 들인 유럽 강대국들의 구미를 당기게 하는 것이었다. 더구나 18~19세기는 마침 아메리카 식민지가 대거 독립했으므로 유럽인들은 새로운 먹잇감으로 아프리카 내륙 완전 식민화에 더욱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1870년대에 진행된 헨리 스탠리의 콩고 강 답사를 마지막으로 유럽인들은 아프리카 전역에 대하여 파악하게 됐고, 아프리카 전역에 산재한 풍부한 지하자원들은 유럽 주요 국가들로 하여금 너나할것 없이 식민지화에 발벗고 나서게 만들었다.
1880년에 이르면 이런 식민지 쟁탈전은 말 그대로 국제적인 외교전으로 비화하기에 이른다. 프랑스 제3공화국이 튀니지, 기니 등을 손에 넣고 서아프리카에 광대한 세력을 갖춘 뒤 동쪽으로 영토를 확장하는 모습을 보여주었고, 아프리카를 남북으로 종단하는 2C(카이로-케이프타운) 정책을 세우던 영국은 프랑스의 동진을 저지하는데 온 힘을 기울였다. 여기에 벨기에, 포르투갈 왕국과 같은 상대적 약소국들도 자신들의 식민지 국경을 최대한 넓히기 위해 혈안이 된 것은 물론이거니와 기존까지 식민지 개발에 소극적이었던 독일 제국마저 내부에서의 성화[3]로 인해 아프리카에 탐험단을 파견하고 카메룬을 비롯한 식민지를 물색하는 판국이었다.[4]
갈수록 경쟁이 치열해지고 급기야 무력충돌까지 우려되는 상황이 오자 벨기에의 국왕 레오폴드 2세가 유럽 각국의 중재를 호소했고 이에 영국과 독일 제국이 호응하면서 1884년 11월 15일 베를린 총리 관저에서 아프리카 문제를 둘러싼 유럽 각국의 회의가 개최되었는데 이게 바로 베를린 회담이다.[5]
회담 참가국은 영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스페인, 포르투갈, 덴마크, 네덜란드, 스웨덴-노르웨이, 오스트리아-헝가리, 국제 콩고 협회(사실상 벨기에), 미국, 러시아, 오스만, 총 14개국이었다.
3. 결과: 아프리카 분할
[6][7]
- 베를린 회담에서 등장한 몇가지 핵심사항
- 무작정 깃발만 꼽고 '내 땅임'이라고 주장하는 것[8]을 방지하기 위한 목적으로 실효 지배라는 개념이 등장한다.
- 노예제도의 폐지. 이는 높으신 분들께서 '부도덕한 제국주의 국가 사이의 담합'이라는 일부 여론의 비난을 피하고자 일종의 도덕적인 방어막으로 선택한 결과이기도 하다.
- 경제분쟁을 피하고자 북위 5도 이남의 콩고 분지 일대를 자유 무역 지역으로 선포했다.
- 콩고 분지가 벨기에 국왕 레오폴드 2세의 사유지로 인정되었다. 이는 영국ㆍ프랑스ㆍ독일이 모두 타국에게 저 땅이 넘어가는 것을 원하지 않았던 점이 가장 컸다. 그리고 레오폴드 2세가 베를린 회담을 주도한 점, 콩고에 유럽 각국이 '경제적으로' 진출하는 것을 허용했던 점들이 작용하여 이루어진 거대한 외교적 승리였다.[9] 정확히는 회담 시작 전까지 독일과 프랑스가 콩고땅을 원했었고, 영국은 콩고 남부의 영토 5% 정도만 원하던 상황이었는데, 비스마르크가 회의 중 전략을 바꿔서 갑자기 내륙은 포기할테니까 해안 땅[10]을 먹겠다고 하고, 프랑스측은 원래 요구한 땅이 북아프리카에서 동과 남으로 뻗는 형태로 혼자 아프리카 50%는 다 먹겠다는 식으로 주장해서 너무 많다보니 영국이 중앙아프리카 남쪽이랑 동아프리카는 먹지 말라고 하는 견제를 하여 콩고 쪽을 포기하게 됐다. 근데 막상 영국은 회담전 초기 계획에서 소말리아나 에티오피아 등만 포기하는 대신 계획에 없던 땅인 프랑스가 침바른 나이지리아를 먹는 등 계획만큼의 면적은 얻었기에 너무 땅을 많이 먹은편[11]이라 더 먹을 수도 없었다. 그러다보니 벨기에 왕이 그 빈틈을 잘 치고 들어와서 날로 먹은 것이다. 반대로, 날로 쳐먹은 벨기에보다 아프리카에 공들인게 많았던 네덜란드는 아무 땅도 못 건지는 망한 외교[12]가 되어 끝났다.
- 나이저 강과 콩고 강의 자유로운 통항 인정.
- 아프리카 해안의 어느 지역을 점유하거나 보호국으로 삼을 경우 회담에 참가한 다른 참가국들에게 통지할 것.
- 수에즈 운하의 완공 후 체결된 조약이었기에, 사실 홍해쪽 라인 해안 땅들이 매우 중요[13]했는데, 영국에 그럭저럭 협조적이었던 이탈리아 몫으로 할당된 에리트레아를 빼고는 영국이 거의 다 먹어서 전반적으로는 영국이 유리했다. 하지만 아프리카 대륙 동부에 거의 손을 안댄 프랑스도 홍해 입구의 나름 중요한 땅이자, 훗날의 지부티가 되는 프랑스령 소말릴란드는 수에즈 운하 건설 초기부터 노리고 깃발을 꽂은 것을 베를린 회담에서도 끝까지 지켜내면서 자존심을 지켰다.
또한 '아프리카의 분할'(Scramble for Africa)라고도 불리는 회담 결과를 통하여 아프리카 대륙의 대부분은 유럽 백인들의 손에 의해 멋대로 재단당한다. 독립을 유지했던 나라는 미국의 지원을 받던 라이베리아와 이탈리아 왕국의 병탄 시도를 막아낸 에티오피아 제국 정도가 끝. 이러한 임의적인 분할은 아프리카가 대륙 그 자체로 식민지화됐음을 의미한다. 또한 개요 항목에서 상술했듯이, 이 회담을 통해 정해진 국경선은 2차대전 이후 아프리카 국가들이 대거 독립해 나갈 때에도, 그리고 오늘날까지도 유지된다는 점에서 베를린 회담은 한 세기 이상 아프리카의 운명을 점지은 아주 중요한 회의라고 볼 수 있다.
4. 독립국으로 남은 국가
에티오피아 제국 | 라이베리아 |
5. 여담
- 문명 5의 확장팩 멋진 신세계에 추가된 아프리카 쟁탈전 시나리오는 이를 배경으로 만들어졌다.
- 1960년대 아프리카에서 한창 신생국들이 독립할 무렵, 아프리카에서는 아프리카주의라는 사상이 젊은 지식인들 사이에서 인기를 구가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들에게 베를린회의에 대한 인식은 당연히 만악의 근원. 몇몇 사람들은 오늘날에도 내전이 끊이지 않는 아프리카의 현실을 놓고 베를린의 저주라고 부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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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실제로 당시로서 침략 및 개발의 정도가 낮았던 내륙지역은 진짜 자를 써서 직선으로 국경선을 그은 일이 많았다. 그나마 복잡한 국경선을 가진 지역들은 과거부터 유럽이 침략을 대규모로 하거나 개발을 나름 오래한 적이 있는 지역들(홍해랑 이어지는 쪽이나 남아프리카나 해안 지역 일부)이다.[2] 출처: 전쟁이 발명한 과학기술의 역사/도현신 지음/시대의 창/ 107~108쪽[3] 비스마르크 본인은 식민지 개척에 썩 내켜하지 않았지만, 당시 독일 사회의 중견층을 차지했던 기업가들이 비스마르크에게 다른 열강처럼 독일도 식민지를 확보할 것을 엄청나게 재촉했었다.[4] 결국 독일도 이 회담 결과 아프리카의 7.7%에 해당하는 땅을 얻게 되는데, 나중에 제1차 세계 대전 패전으로 탄자니아는 영국이, 르완다와 부룬디는 벨기에가, 토고와 카메룬은 영국령과 프랑스령으로 양분되었다.[5] 여담이지만 1878년의 베를린 회의와 1884년 베를린 회담 모두 비스마르크의 집무실에서 협상이 이루어졌다.[6] 참고로 리비아는 1911년 전까지는 오스만 제국령(오스만령 트리폴리타니아)이었으나 이탈리아가 이탈리아-오스만 전쟁을 통해 리비아를 빼앗았다. 대신 베를린 회담에서는 다른 나라들이 거기를 이탈리아 땅으로 일단 합의해 주고 넘어갔는데, 이탈리아 보고 니네가 능력껏 알아서 오스만제국에게 빼앗으라고 요구한 것이었다. 오스만제국은 베를린 회담 참가국도 아니고 기본적으로 이슬람 국가들은 극소수를 제외하면 서유럽 세계의 적이었기 때문이다.[7] 가만 보면 영국을 잉글랜드라고 해 놓았는데, 서구권에서 잉글랜드는 지방뿐만이 아니라 영국 전체의 다른 이름으로도 쓰이기 때문이다.[8] 포르투갈이 협상 초기에 400년전 토르데시야스 조약을 근거로 아프리카가 다 자기네 땅이라고 주장했지만 완전히 씹혔다. 그 조약을 같이 한 스페인도 이미 옛날에 영국한테 쳐발렸고, 회담으로부터 100년도 안 된 시점에서는 프랑스(나폴레옹)한테 짓밟혔던 이빨 다 빠진 호랑이 수준이라 별 힘이 없었다.[9] 콩고 땅에는 콩고 자유국이라는 위선적인 이름의 괴뢰국이 세워졌으나 실질적으로는 그냥 벨기에의 식민지였고, 다른 식민지보다도 비인간적인 학살과 수탈이 만연한 지옥이었다.[10] 지금의 카메룬, 탄자니아, 나미비아 등을 독일이 차지했다. 원래의 독일은 오히려 지금의 앙골라 동부 내륙, 보츠와나, 콩고 등에 해당하는 땅을 차지하겠다고 주장했다가 거의 다 포기하고 전혀 다른 곳을 차지한 것. 카메룬은 원래 에스파냐가 요구하던 지역이었는데 영국이 묵살해버렸다. 원래 영국은 현재의 탄자니아까지 먹어서 남아공에서 시작되는 식민지를 케냐-우간다 쪽까지 이어버리며 그대로 수단과 이집트까지, 즉 남아프리카부터 북아프리카까지 육로로 이어버리길 원했었지만 포기하고 탄자니아쪽 땅을 독일에게 양보하였는데, 대신 프랑스를 견제하는 쪽에 힘을 보태길 요구했다. 전반적으로는 최강대국 쪽 협상이 영국-독일 연합 vs 프랑스의 구도. 독일은 프랑스랑 노리는 땅이 덜 겹쳤지만, 땅이 많이 겹친 영국의 양보로 프랑스쪽을 많이 견제했다.[11] 프랑스는 애초에 계획이 과해서 계획면적보다 실제 획득면적이 많이 깎였지만, 깎이고 남은 게 영국이 계획한 면적과 유사해서 둘이 비슷한 영토를 먹었다. 그래도 영국은 오히려 프랑스보다 작은 요구조건으로 시작해서(물론 그것도 매우 큰 영토이다) 자기들은 이미 양보하면서 참여했다는 식의 주장을 하며 협상을 잘했기에, 전체 면적이 큰 차이까지는 아니어도 엄밀히 영국이 오히려 약간 더 넓다. 영국 1위, 프랑스 2위 순.[12] 네덜란드 외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도 아무것도 못 건지고 끝났다. 네덜란드는 나름 남아공 초기 개발에 큰 지분이 있었고 남아공 전체도 아닌 남아공 서부의 크지 않은 영토만 요구했는데도 세계 최강자 영국이 이빨빠진 대항해시대의 호랑이였던 네덜란드를 쫓아내버렸다. 사실 영국은 17세기부터 과거 네덜란드가 초기에 침발라 놓은 식민지를 빼앗은게 되게 많다. 미국의 뉴욕(뉴 암스테르담), 뉴질랜드(뉴젤란드) 등이 대표적이다.[13] 지금도 그렇지만 수에즈 운하 직후의 당시 홍해는 아주 해적 때문에 뻑하면 생지옥이 되고 난리나던 공포의 동네였다. 심지어 군대가 해적으로 위장하고 노략질을 하기도 하는 등 별일이 다 있었다. 근데 당시 세계무역의 핵심루트였던 만큼 경제적으로 너무나도 중요했기에 계속 유럽 상선들은 수없이 다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