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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fcd30><colcolor=#000> | |||
출생 | 1818년 4월 29일 | ||
러시아 제국 모스크바 크렘린 | |||
사망 | 1881년 3월 13일 (향년 62세) | ||
러시아 제국 상트페테르부르크 겨울 궁전 | |||
묘소 | 페트로파블롭스크 성당 | ||
재위기간 | 전러시아의 황제[1] | ||
1855년 3월 2일 ~ 1881년 3월 13일 | |||
서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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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알렉산드르 니콜라예비치 로마노프 (Алекса́ндр Никола́евич Рома́нов) | ||
아버지 | 니콜라이 1세 | ||
어머니 | 프로이센의 샤를로테 | ||
형제자매 | 마리야, 올가, 알렉산드라, 콘스탄틴, 니콜라이, 미하일 | ||
배우자 | 헤센의 마리 공녀 (1841년 결혼 / 1880년 사망) | ||
예카테리나 돌고루코바 (귀천상혼) | |||
자녀 | 알렉산드라, 니콜라이, 알렉산드르 3세, 블라디미르, 알렉세이, 마리야, 세르게이[2], 파벨, 유리, 예카테리나 | ||
종교 | 러시아 정교회 | ||
신체 | 186cm | }}}}}}}}} |
공식 초상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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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러시아 제국의 황제.자유주의적인 개혁 정책을 추진하였다. 비록 그의 개혁은 여러가지 문제가 있는 불충분한 개혁이라는 평가를 받았으나, 현대에 다시 재평가를 받고 있다.
어머니 프로이센의 샤를로테는 독일 제국의 초대 황제 빌헬름 1세의 여동생이다. 즉 빌헬름 1세는 알렉산드르 2세의 외삼촌이며, 알렉산드르 2세는 프리드리히 3세와는 외사촌간이고, 빌헬름 2세는 알렉산드르 2세에게 5촌 조카가 된다. 참고로 외삼촌 빌헬름 1세의 황후이자 알렉산드르 2세의 외숙모 작센바이마르아이제나흐의 아우구스타는 알렉산드르 2세의 고종사촌누나이기도 하다.
아버지 쪽으로는 네덜란드 군주 빌럼 3세와 고종사촌 간이다.[3]
아버지 니콜라이 1세는 자신의 네 아들들에게 자신과 형제들의 이름을 물려줬다. 이에 장남인 알렉산드르 2세 본인은 첫째 큰아버지인 알렉산드르 1세, 차남인 콘스탄틴 니콜라예비치 대공은 둘째 큰아버지인 콘스탄틴 파블로비치 대공, 삼남인 니콜라이 니콜라예비치 대공은 아버지인 니콜라이 1세, 막내인 미하일 니콜라예비치 대공은 작은아버지인 미하일 파블로비치 대공의 이름을 물려받았다.
2. 생애
2.1. 어린시절
어머니 알렉산드라 표도로브나 대공비, 여동생 마리야 여대공와 함께 있는 초상화.
1818년 4월 29일, 알렉산드르 1세의 동생인 니콜라이 1세와 프로이센의 샤를로테(알렉산드라 표도로브나)의 맏이이자 장남으로 출생했다. 당시 큰 아버지인 알렉산드르 1세가 재위중이였고, 대공칭호를 받았다. 1826년 큰아버지 알렉산드르 1세가 후계자 없이 사망하고, 아버지 니콜라이 파블로비치 대공이 황제가 되면서 황태자가 되었다.
어린 시절의 알렉산드르 2세.(1830년)
알렉산드르 2세는 자기 세대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황자였고 다른 경쟁자가 없었다. 러시아 제국은 파벨 1세 시절부터 황위 계승에 있어서 엄격한 살리카법을 제정했는데 파벨 1세의 아들들인 알렉산드르 1세, 콘스탄틴 대공, 니콜라이 1세, 미하일 파블로비치 대공 중 결혼하여 아들을 낳은 이는 알렉산드르의 부친인 니콜라이 1세 밖에 없었기 때문.[4] 그래서 알렉산드르 2세는 태어나자마자 미래의 후계자로 여겨졌다. 이제 막 태어난 알렉산드르 2세를 보러 왔던 큰아버지 알렉산드르 1세가 그의 어머니 샤를로테에게 ‘이 조그만 아이는 황제가 될 운명이다’라고 이야기한 적이 있었다. 그래서 알렉산드르 니콜라예비치 로마노프는 어릴 적부터 좋은 교육을 받았다. 유년기에는 지혜롭고 인자한 육군 대위인 메르데르와 명성 높은 시인 바실리 주콥스키(Василий Андреевич Жуковский)로부터 교육받았는데, 주콥스키는 인도적인 교육을 통해 알렉산드르를 잘 교육 받은 인물로 육성하려 했다. 주콥스키는 황태자를 착실히 가르쳤지만, 황제가 황태자의 교육에 개입하면서 주콥스키의 영향력은 많이 줄어들었다.
2.2. 황태자 시절
황태자 시절의 알렉산드르 2세.
황제 니콜라이 1세는 본인이 그랬듯이 황태자도 군사 교육을 받기를 원했고 황태자의 교사들에게도 군사 교육을 강조했다. 군사 교육을 받기 시작하면서 세간에는 알렉산드르가 군대와 규율, 군사의식을 좋아한다는 소문이 퍼져나갔다. 군사 교육의 영향이 있긴 했지만, 황태자는 좋은 교사들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고 부족한 부분은 교육 시찰로 보충했다. 1837년, 황태자는 제정 러시아의 30개 주와 시베리아 지역을 순방하고 그의 백성들이 보내오는 수많은 탄원서를 읽고 백성들의 고충을 살폈다.
그리고 황태자는 순방 중에 부황의 즉위식 날에 반란을 일으켰던 데카브리스트들이 비참한 삶을 사는 것을 보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도움을 주었다. 이 와중에 데카브리스트 유배자 중 한 사람이었던 알렉산드르 게르첸(Алекса́ндр Ива́нович Ге́рцен)을 만나 친구가 되었다. 이 때의 만남과 교분 덕에 게르첸은 알렉산드르의 주선으로 모스크바로 돌아올 수 있었으며 5년 뒤에 러시아를 떠났다. 순방에서 돌아온 뒤, 황태자는 데카브리스트들의 처우 개선을 부황에게 요청했고, 자신이 제위에 오르자마자 그들을 전원 사면했다.
알렉산드르는 천성적으로 온후하고 친절했으며 예의바른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는 감성적이고 예민한 사람이었다. 알렉산드르는 부황을 닮아서 미남이었으며 건장하고 매력적인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우유부단하고 다른 사람들에게서 영향을 많이 받는 성격이기도 했는데, 특히 아버지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강직한 니콜라이 1세의 기질은 알렉산드르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으며 그는 부황의 생각과 행동을 배우고 그의 뒤를 따를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알렉산드르는 성격이 워낙 온후하고 부드러웠기 때문에 니콜라이 1세와 같은 무자비함이나 단호함은 가지지 못했다. 어찌보면 서로 성격이 완전히 다른 두 사람이었지만, 황태자는 부황을 좋아했고 어떤 일이든 순종했으며 부황을 기쁘게 해주고 싶어했다. 황제 역시 황태자를 매우 사랑하고 신뢰했다. 두 사람 간의 성격 차이가 있다보니 니콜라이 1세가 너무 감정에 휘둘리고 이성적이지 못하다고 황태자를 자주 책망했었지만, 두 사람의 사이를 갈라놓을 정도의 문제는 아니었다.
결혼 이후 알렉산드르 황태자는 국정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니콜라이 1세는 황태자에게 다양한 분야의 업무를 맡겼는데, 국무협의회, 국무위원회와 같은 중요한 곳에도 참석시켰을 뿐만 아니라 농민 문제를 관여하는 위원회도 관장하게 했다. 그리고 육군 대장직에 임명하고 군사 업무도 맡겼다. 니콜라이 1세는 수도를 비우는 동안에는 국정 운영을 부탁했다. 국정에 참여하는 10년 동안, 황태자는 황제의 가장 가까운 조력자가 되었고 황제의 통치 과정을 바라보는 목격자가 되었다.
2.3. 결혼
니콜라이 1세는 성인이 된 황태자에게 신붓감을 찾아보라며 여러나라들을 방문하게 했다.1838년, 알렉산드르(21세)는 영국을 방문하고 이제 막 즉위한 빅토리아 여왕(1819 ~ 1901, 20세)과 만나서 함께 춤을 추었는데, 빅토리아 여왕은 자신의 일기에 알렉산드르(1818 ~ 1881)는 굉장히 매력적인 남자였으며 그와 함께 한 시간이 매우 즐거웠다고 서술했다.두 사람은 서로에게 깊은 호감을 느꼈지만 국가적으로 볼 때 두 사람의 결혼은 이루어질 수가 없었다. 알렉산드르의 아버지 니콜라이 1세는 "황후감이 필요하지 여왕의 남편이 될 필요는 없다."며 반대했다. 부동항을 확보하기 위해 열심히 나라를 다스리던 니콜라이의 입장에서 영국이 계속 시비걸고 방해했기 때문에 당연히 영국을 싫어했다. 설령 이루어지더라도 대영제국과 러시아 제국은 서로 세계의 패권을 두고 싸우는 사이였으며, 이는 양국에게 매우 부담스러운 것이었기 때문에 두 사람은 서로에 대한 감정을 정리했다.[5]
같은 해 헤센의 마리 공녀와 만났고 첫 눈에 반해 그녀와 결혼했다. 어머니의 반대가 있긴 했지만, 알렉산드르는 자신의 뜻을 밀어붙여 결혼했다. 마리는 알렉산드르 황태자와 결혼한 뒤 마리야 알렉산드로브나로 개명하고 러시아 정교로 개종했다.
2.4. 즉위
선황 니콜라이 1세는 크림 전쟁이 한창이던 1855년 3월 2일에 죽고 알렉산드르 니콜라예비치 황태자가 황제로 즉위했다. 당시 전세가 불리했기에 황태자 시절부터 전쟁의 종결을 위해 노력했고, 1856년에 파리 조약을 체결해 전쟁을 끝냈다.전쟁 중 러시아의 낙후성을 절감한 알렉산드르 2세는 러시아 제국군의 근대적 개혁을 위해서는 곧 국가 체제 전반의 개혁이 필요하다고 느끼고, 특히 러시아에 남아 있던 중세적 자취인 농노제를 폐지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 결과 나온 것이 유명한 농노 해방령이었다.
2.5. 대개혁 및 당시 경제 상황
2.5.1. 알렉산드르 2세의 대개혁
자세한 내용은 알렉산드르 2세의 대개혁 문서 참고하십시오.2.5.2. 재위 기간 당시 경제
자세한 내용은 알렉산드르 2세/재위 기간 러시아 제국의 경제 문서 참고하십시오.2.5.2.1. 참고 문헌
- 니콜라스 V. 랴자놉스키 『러시아의 역사』
- 따찌야나 미하일로브나 찌모쉬나 『러시아 경제사』
- 문명식 『러시아 역사』
- 세르게이 표도로비치 플라토노프 『러시아사 강의』
- 에이브러햄 애셔 『처음 읽는 러시아 역사』
- 존 M. 톰슨 『20세기 러시아 현대사』
- C. H. 스이로프 『러시아의 역사』
- 한스 율겐 한젠 『서양목조건축』
- 러문위키 알렉산드르 2세 항목 및 제정 러시아 경제 항목, 대개혁 항목 참고.
- 영문위키 제정 러시아 농업 항목.
2.6. 영토 정비
2.6.1. 태평양 방면
개혁 정책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자금이 필요한 것이 당연하지만 크림 전쟁에서 패배한 러시아 정부에는 그럴 재원이 모자랐기 때문에, 광대한 (그리고 쓸모 없는 것으로 인식되던) 영토의 일부인 알래스카(러시아령 아메리카)를 미국에 720만 달러를 받고 팔았다.러시아는 알래스카 문서에도 잘 나와 있듯이 알래스카의 잠재적 가치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너무 멀어서 관리하기도 힘들었고[6] 알래스카를 유지하는 비용이 알래스카에서 거두어들이는 수입보다 훨씬 더 많았다. 거기다가 미국과의 국경 문제가 생길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에 제국 정부는 개혁을 위한 재원 확보, 불법 월경자 문제로 인한 양국간의 갈등 해결, 미국과의 우호 관계 유지를 위한 목적으로 알래스카를 미국에 매각했다. 크림 전쟁의 여파로 영국에게 그냥 빼앗기느니 돈이라도 받고 그나마 (당시로서는) 우호적인 미국에게 판매한 것이다. 당시 미국 국민들은 알래스카를 돈 주고 사온 데 앞장선 정치가들에게 '기껏 사온 게 황무지냐?!'-
한편 남하정책은 러시아 제국의 기본적인 강령이었기 때문에, 흑해→지중해 방면의 남하가 좌절되자 태평양으로의 남하를 시작했다. 제2차 아편전쟁이 발발하자, 제국 정부는 1858년의 톈진 조약을 중재해 주고 그 대가로 우수리 강 이북의 땅을 청나라로부터 얻어냈으며, 1860년에는 베이징 조약을 중재해주고 연해주를 청나라에서 뜯어와 총 한 방 쏘지 않고 엄청난 영토를 획득하는데 성공했다. 발칸 반도에서의 좌절과 비교하면 그야말로 비교체험 극과 극이었다.
1904년 ~ 1905년과는 달리 이 때는 영국이 제2차 아편전쟁에 묶여 있었고 일본은 한창 에도 막부 말 동란의 와중이었기 때문에 두 나라 모두 러시아를 견제할 여력이 없었던 것이 주효했다. 또한 자바이칼 카자크 부대, 아무르시크 카자크 부대의 활동, 러시아 개척자들의 정착, 탐험가들의 보고 같은 것들도 러시아가 이 지역을 차지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그리고 1860년 6월 20일, 러시아 제국 해군은 '동방의 지배'란 뜻을 가진 '블라디보스토크'를 연해주 지역에 건설했고 이 시기부터 블라디보스토크는 해군 기지이자, 동북 아시아 지역의 거점 도시로 기능했다. 러시아의 이런 공세적인 남하전략은 몽골과 중앙아시아는 물론 "부동항"인 한반도(조선)에도 적용되었다.
이 시기에는 사할린 섬과 쿠릴 열도의 영유권을 놓고 일본과의 국경 분쟁도 있었는데, 러시아와 일본 간의 국경선 협상은 상당히 복잡한 편이었다. 크림 전쟁 와중에 중심지에서 멀리 떨어진 태평양 지역에까지 신경 쓰기가 어려웠던 러시아는 일본과의 관계 악화를 피하기 위해 새로운 조건에 동의하여 1855년, 시모다 조약으로 이투루프 섬과 우루프 섬 사이의 해역을 경계로 북쪽은 러시아, 남쪽은 일본에 귀속시키는 것으로 쿠릴 열도를 분할하고 사할린은 양국의 공동소유가 되었다.[8] 그리고 1875년, 상트페테르부르크 조약을 체결하여 사할린 전체를 러시아에게 귀속시키는 것으로 하고, 쿠릴 열도는 일본에게 양도되었다.
2.6.2. 캅카스 방면
알렉산드르 1세 때부터 50년간 치르고 있었던 캅카스 전쟁이 알렉산드르 2세의 치세에 끝났다. 전쟁은 제국 정부가 현지 산악인들에게 높은 세금과 부역을 부과한 것, 러시아의 진출로 산악인들이 토지를 상실한 것, 러시아 문화와 캅카스 문화가 충돌한 것 때문에 일어난 것이었다. 제국 정부가 현지의 노예제를 금지하거나 약탈 행위를 금지한 것은 현지인들의 반발을 불렀다.전쟁 초기의 산악인들은 비조직적인 상태에서 저항했지만, 1820년대부터 수많은 민족으로 이루어진 산악인들을 하나로 묶어 준 사상이 출현했다. <뮤리디즘>이라고 부르는 이 사상은 매우 전투적이었고 무슬림들에게 엄격한 계율 준수를 요구했다. 뮤리디즘 덕분에 하나로 단결하게 된 산악인들은 1820년대 후반부터 이슬람 국가 건설을 시도했고, 캅카스 지역의 정치-종교 지도자로 이맘을 선출, 신권국가를 세웠다.
첫 이맘인 가지물라(가지 무함마드)(Кази-Мулла)가 죽은 뒤에는 감자트 벡(ХIамзат Бек, 아바르어 표기 / Гамзат-бек)가 제2대 이맘이 되었고 그 뒤를 이어서 제3대 이맘으로 샤밀(Шамил, 아바르어 표기 / Шамиль)이 등극했다. 전설적인 산악인 지도자로 명성을 날리게 되는 샤밀은 이맘이 된 뒤로 캅카스의 이슬람 국가에 엄격한 질서를 세웠다. 그는 음주, 가무, 흡연을 즐기거나 계율을 지키지 않고 종교 의식에 참여하지 않는 이들에게 가혹한 형벌을 가했다. 그러나 샤밀은 농노제와 기득권층의 특권을 폐지하고 민중이 그를 필요로 할 때마다 늘 도움을 주었기 때문에 민중의 지지와 보호를 받을 수 있었고 민중의 보호 덕분에 샤밀은 러시아군의 체포 시도를 늘 피해갔다. 1840년대에 샤밀은 러시아군을 상대로 연전연승을 거듭했고 전성기를 누렸다. 그는 통치 조직을 만들어서 각 지방마다 행정 기관과 주둔군을 두었다. 샤밀의 군대는 40,000명에 달했고 모든 행정은 샤밀이 주도하는 회의에서 처리했다.
러시아의 침공을 계속해서 격퇴한 캅카스의 이슬람 국가는 번성하는 듯 했지만 샤밀과 추종자들이 오랜 승리에 자만하여 변질되면서 문제가 발생했다. 지방의 행정을 맡은 샤밀의 대리인들은 지방 영주라도 된 것처럼 물자를 사적으로 유용했고 민중 위에 군림하려 했다. 또한 샤밀도 세금을 국고에 보내지 않고 자신이 독점했으며 관습을 무시하고 권력을 아들에게 상속하겠다고 선언했다. 형벌도 더 가혹해졌고 세금은 끊임없이 올라갔으며 샤밀과 그를 따르는 자들이 권력을 독점했다.
이로 인해 샤밀은 민중의 지지를 상실했고 러시아 측에 합류하는 민족들도 나타났다.[9] 상황이 악화되자 당황한 샤밀은 더 강한 형벌로 상황을 타개하려 했지만 이것은 오히려 역효과를 불렀다. 샤밀의 변질과 실정으로 캅카스의 이슬람 국가는 군사적, 경제적으로 약화되었고 러시아군과의 싸움에서 연전연패하기 시작했다. 튀르크나 영국이 산악인들을 지원하긴 했지만 큰 도움은 되지 못했다.
1856년부터 러시아군의 공세가 강화되었고 바랴틴스키 공작이[10] 이끄는 군대가 샤밀을 압박했다. 약체화된 샤밀의 군대는 점점 수세에 몰렸고 결국 샤밀은 1859년에 마지막 거점을 잃고 러시아군에 생포된 뒤, 칼루가로 추방당했다. 러시아군은 샤밀을 무너뜨린 것에 축배를 들었지만 산악인들이 계속해서 저항했기 때문에 1864년이 되어서야 산악인들의 저항을 완전히 분쇄하고 캅카스 전역을 장악할 수 있었다. 반대로 체르케스인들은 1864년을 학살이 이뤄진 해라고 지금까지도 이를 갈며 시위를 벌이게 된다.
캅카스 전쟁을 마무리지으면서 러시아는 바랴틴스키 공작이 예상한 대로 남부 지역의 안보를 확보할 수 있었고 캅카스를 거점으로 해서 중앙아시아와 페르시아 지역으로 진출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캅카스인들은 러시아의 지배 아래에서 경제와 문화를 발달시킬 수 있었다. 러시아의 발달된 농업 기술이 들어왔고[11] 교육과 의료 혜택도 받을 수 있었다. 산업 혁명 이후에는 공장들도 생겨났다. 그리고 국방부 장관 드미트리 밀류틴의 건의에 따라서 제국 정부는 캅카스에 관용적인 정책을 실시했다. 캅카스인들의 종교와 문화, 전통을 존중했고 고위 성직자와 중간층 성직자들에 대한 지지를 표명했다. 캅카스인들이 선출한 대표들이 특별 재판소를 구성해서 사법권을 행사하는 제도도 도입했다.
다만 근대적 문물이 들어왔음에도 대부분의 러시아 지역이 다른 유럽 국가들에 비하면 낙후되어 있었듯이 반식민지 상태였던 캅카스 지역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포로가 된 샤밀도 제국 정부로부터 우대받았다. 그는 칼루가에서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보내져서 러시아의 여러 명소나 문화 공간, 관공서, 군사 기지를 방문했다. 샤밀과 그 가족들은 저택을 받았고 제국 정부는 샤밀을 러시아의 대신으로 대우해 주었다. 러시아의 대신은 정부로부터 15,000루블을 받았는데, 샤밀도 똑같이 그만큼의 액수를 지급받았다. 자식들은 사관학교에서 교육받고 러시아군에 입대할 기회를 받았다. 사관학교는 귀족의 자제만 갈 수 있었기 때문에 샤밀의 자식들도 귀족 대우를 받은 것이었다. 이것은 샤밀을 본인만 귀족 대우를 받는 '개인 귀족'으로 대우한 것이 아니라 귀족 신분을 세습할 수 있는 세습 귀족으로 인정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캅카스 전쟁으로 생긴 피해와 캅카스인들이 겪었던 고통은 막대했다. 전쟁에서 러시아군은 77,000명의 피해를 보았고 300만명이 넘는 캅카스인들이 피난을 떠났다. 그리고 처음부터 제국 정부가 캅카스인들에게 우호적이었던 것은 아니었다. 밀류틴이 건의한 정책이 실시되기 이전의 캅카스는 바랴틴스키 공작의 통제 아래에 있었는데, 그는 캅카스인들이 제국에 적대적이기 때문에 이들을 존중할 필요가 없다고 보았고, 이들의 토지를 빼앗고 내쫓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 때문에 수십만명의 캅카스인들이 고향을 떠나서 같은 이슬람을 믿는 오스만 제국으로 이주해야 했다. 그들이 떠난 자리는 제국 정부가 이주시킨 40만명에 달하는 유럽 러시아 출신 이주민, 카자크, 아르메니아인, 오스만 제국에서 피난을 온 그리스인들이 차지했다. 산악인들은 고향을 떠나면서 재산과 토지를 헐값에 팔아야 했고 많은 이들이 고향에 돌아오지 못했다.[12] 바랴틴스키 공작이 물러난 뒤에야 밀류틴이 건의한 관용적인 정책이 도입되었다. 그렇게 관용적인 정책을 실시한 후에도 1880 ~ 90년대까지 강제로 이주시키는 일들이 벌어졌다.
더불어, 알렉산드르 2세는 체르케스인들이 현지 기독교인들을 탄압하여 이를 구하고자 한다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헛소리였다. 체르케스인들은 그래도 수피즘 무슬림이 대다수라, 아랍권보단 더 관용적이라 기독교인들과 그럭저럭 잘 지낸 편이었다. 위에 상술한 샤밀조차도 "기독교인들이랑 갈등이야 늘 있었다. 하지만, 우리 체르케스인들이 대체 러시아가 주장하는 대로 대대적으로 학살과 탄압을 벌였다는 증거를 보여달라."고 항의할 정도였다. 이런 러시아 제국의 침략으로 수십여만 체르케스인들은 오스만 제국에 살아야 했고 기독교에 대한 증오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1877년에 시작된 식민지 불가리아 독립전쟁에 오스만 제국이 이들을 민병대로 참전시켜 분풀이로 불가리아인들을 학살, 약탈을 해버린다. 이때,불가리아를 독립시킨다고 하곤 막상 조공국으로 만들어버린 게 또 러시아 제국이었다. 불가리아인들은 이번에는 반대로 학살당한 분풀이로 불가리아에 살던 무슬림 포마크인을 상관도 없거늘 마구잡이로 수십여만명을 학살해버렸다. 이때 학살을 피해 달아나기도 하고, 30년이 넘게 지난 발칸 전쟁 때에도 학살과 탄압이 이어지자, 포마크인들도 오스만 제국으로 이주해야했고 분노에 찬 이들은 아르메니아 학살에 민병대로 끼어들어 분풀이로 학살했으니 러시아가 외치던 기독교인 구원이라는 헛소리 명분은 많은 기독교인들 학살로 이어지는 결과만 낳았을 뿐이었다.
2.6.3. 중앙아시아 방면
러시아 제국은 표트르 대제 치세부터 지속적으로 중앙아시아 지역으로의 진출을 시도했고, 19세기 전반에 이르러서는 카자흐 지역을 완전히 장악했다. 1850년대에 남 카자흐를 완전히 장악하고 1854년에 베르노에, 나중에 알마아타가 되는 도시를 건설했다. 그런데 부하라, 히바, 코칸드 칸국이 여러 차례 카자흐를 침공하고 원주민들과 러시아 이주민들을 노예로 잡아갔기 때문에 제국 정부는 국경에 요새들을 구축했고 국경 지역의 총독들이 약탈자들을 응징하기 위한 원정을 감행했다.알렉산드르 2세의 치세부터는 아예 약탈의 근원을 뿌리 뽑고 크림 전쟁에서의 패배를 설욕해서 군의 사기 저하, 국민의 자존감 하락을 회복하기 위한 군사 원정이 계획되었다. 국방부가 주도한 이 원정은 코칸드, 히바, 부하라 3개국을[13] 완전히 병합하기 위한 것이었다. 당시 중앙아시아 지역이 현지 지배층들간의 내전과 지배층의 주민 착취로 피폐해져 있었던 것과 군대는 약하고 무기도 보잘 것 없었던 것도 러시아가 중앙아시아 침공을 시작한 원인 중 하나였다. 외무성은 중앙아시아가 영국령 인도와 맞닿아 있으므로 영국과의 분쟁이 발생할 수 있다는 이유에서 원정을 반대했지만, 외무성의 반대는 묵살되었다. 군 통수권자인 황제가 원정을 지지한 데다가 자본가들도 원료공급지를 구하고 시장을 확대할 수 있다는 이유로 원정을 지지했다. 그리고 3개국은 러시아 상인들을 차별해 높은 세금을 물렸고, 심하면 재산을 강탈하기도 하여 중앙아시아 지역의 러시아 상인들이 제국 정부에 탄원을 보내왔고, 이 문제로 제국 내부에서 정벌이 필요하다는 여론이 강해진 것도 영향을 미쳤다.
1865년, 체르냐예프 장군이 지휘하는 러시아 제국군은 부하라와 코칸드 간의 전쟁을 이용해서 손실 없이 타슈켄트와 코칸드 칸국의 여러 도시들을 점령했다.[14] 그러나 이 침공은 중앙아시아에서 영향력을 확대하려 하는 영국의 반발을 불렀고, 알렉산드르 2세는 체르냐예프를 해임해야 했다. 그러나 러시아는 정복한 지역을 모두 차지할 수 있었다. 침공이 종료된 이후, 제국 정부는 투르케스탄 총독부를 세웠고 황제는 콘스탄틴 카우프만(Константи́н Петро́вич Ка́уфман[15] / Konstantin Petrovich von Kaufmann) 장군을 총독으로 임명했다. 그리고 동부 지역을 지키기 위해 세미르첸스크 카자크 부대를 창설해서 국경지역에 주둔시켰다.
1868년, 부하라 무슬림 군주국의 군주는 중앙아시아 지역을 침공해 온 러시아에 대항하는 성전을 선포했다. 그러나 무슬림 군주국의 중심 도시인 사마르칸트에서는 군주를 지지하는 성직자, 귀족들과 러시아로의 병합을 지지하는 상인, 수공업자들 사이의 내전이 벌어졌다. 1868년 5월, 카우프만의 군대가 내전을 이용해 내부 협조자의 도움을 받아 사마르칸트에 무혈입성했다. 군주의 주력군은 패했고 부하라의 군주는 부하라가 러시아의 종속국임을 인정해야 했다.
1873년, 러시아군은 히바 칸국에 대한 원정을 시작했다. 현지 지배층들에게 착취당하던 주민들은 실질적으로 러시아군을 지지했고 일부 귀족들까지 러시아 측에 합류해 오기도 했다. 1873년 8월, 러시아군의 압박이 강해지자, 히바 칸국의 칸은 러시아와 조약을 맺었다. 조약의 주요 내용에는 히바 칸국의 칸은 러시아 황제의 신하가 된다는 것, 권력을 행사할 때는 러시아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는 것, 러시아 상인들은 면세 혜택을 받고 히바 칸국의 어디에서든지 장사할 수 있다는 것이 있었다. 1873년 9월, 부하라 무슬림 군주국과도 이러한 조약이 체결되었다. 조약으로 러시아의 종속국들은 선박업과 무역에 종사하고 부동산을 소유할 권리와 자치권과 기존의 통치체제를 유지할 수 있는 권리를 받았다.
1875년, 미하일 스코벨레프(Михаил Дмитриевич Скобелев) 장군이[16] 지휘하는 러시아군은 코칸드 칸국의 군대를 격파했다. 러시아는 1876년 2월에 코칸드 칸국을 무너뜨렸고 영토를 투르케스탄 총독부에 소속시켰다.
중앙아시아 정복은 투르크멘 쪽으로도 진행되었다. 1869년, 스톨레토프 장군이 지휘하는 러시아군은 카스피해 동쪽 해안에 상륙해서 크라스노보츠크 요새를 건설해 거점을 마련했다. 해안 지역에서 러시아군이 침공해 오자, 현지의 투르크멘인들은 거세게 저항했다. 투르크멘인들은 게오크테페와 오아시스 지역을 중심으로 해서 러시아군에 저항했고 러시아군은 오아시스 지역을 계속해서 점령하려 했지만 그 시도들은 모두 실패했다. 러시아군 자신들이 거점으로 이용할 수 있는 오아시스 지역을 점령하려는 시도가 모두 실패로 돌아가자, 러시아군은 안정적인 물자 공급을 위해 크라스노보드에서 게오크테페 방면으로 철도를 놓았고 철도 덕분에 원정을 성공적으로 수행할 수 있게 되었다. 1881년 1월 12일, 러시아군은 마침내 게오크테페를 점령했고 1주일 후에는 아시가바트를 점령했다. 1884년, 러시아군은 메르브를 장악하고 투르크멘의 지도자로부터 항복을 받아냈다. 이것으로 러시아는 투르크멘 지역을 완전히 장악했다. 투르크멘의 귀족들이 러시아에 충성 서약을 한 것은 메르브를 장악하고 3년이 지나서였다.
청나라 영토인 신강 지역에 대해서도 진출이 진행되었다. 1862년 야쿱 벡이 신장 지역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그리고 1896년 청나라, 아프가니스탄과의 협정을 통해 고르노바다흐샨 지역을 편입한 것을 마지막으로 러시아의 중앙아시아 정복은 끝을 맺었다.
러시아의 정복으로 중앙아시아에서 민족 간의 내전은 끝났고 노예제와 노예매매가 폐지되었다. 제국 정부는 러시아에 저항했던 부족장들로부터 토지를 빼앗아서 현지 농민들에게 주었다. 산업의 원료 공급을 위한 목화재배와 전통 수공업을 위한 양잠업이 빠른 속도로 성장했고 유제품 공장과 섬유 공장, 식료품 공장도 생겼다. 자원 수송과 사람들의 이동을 도와줄 철도망도 깔렸고 석유, 석탄, 각종 금속의 채굴도 이루어졌다. 러시아 문화의 영향도 늘어났고 도시에는 점차적으로 현지인의 참여를 보장한 도시 두마와 현대적인 학교들이 설립되었다.
1873년부터 러시아 이주민들에 대한 토지분배가 시작되었고 이주민들은 현지 주민들에게 새로운 공업생산방식과 선진적인 농사방법, 감자와 사탕수수 같은 새로운 작물들을 재배하는 법을 가르쳐주었다. 그리고 현지 주민들도 이주민들에게 도움을 주었다. 현지 주민들은 이주민들에게 현지 사정에 맞는 농사법을 가르쳐 주었고 의료 서비스를 제공했으며 저렴하고 질 좋은 상품들을 판매했다. 그리고 제국 정부는 현지 주민들에 대해서 유연한 정책을 실시했기 때문에 중앙아시아 주민들의 풍습과 문화적, 종교적 전통, 자치권은 유지되었다.
그러나 러시아의 중앙아시아 정복은 부정적인 면도 있었다. 중앙아시아의 러시아 관료들은 유럽 러시아의 관료들보다 질적으로 떨어졌다. 러시아 관리들은 권력을 남용했고 주민들을 착취했으며 뇌물도 강요했고, 현지인들에 대해서도 차별적으로 대했다. 철도망을 건설한 것은 중앙아시아의 캐러밴 무역과 운송업의 쇠퇴로 이어졌고 이주민들과 현지 주민들 간의 토지 분쟁도 일어났다.
2.7. 대외관계
러시아 제국은 크림 전쟁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오스트리아 제국과 우호 관계를 맺고 있었고 다른 유럽 국가들과의 관계도 크게 나쁘지 않았다. 그러나 크림 전쟁이 발발하고 유럽에 반 러시아 동맹이 결성되면서 러시아는 유럽에서 완전히 고립되었다. 역사적으로 러시아가 유럽과는 조금 따로 노는 분위기가 있고 유럽의 문제에도 잘 관여하지 않는 등 고립주의적인 면을 가지고 있긴 했지만, 이번에는 사정이 달랐다. 제국은 내부적으로 농노 문제와 캅카스 전쟁으로 몸살을 앓고 있었고 심각하게 낙후되어 있었다. 따라서 러시아가 개혁과 내부 안정을 도모하고 산업화 중인 유럽 각국을 따라잡기 위해서는 대외적 안정이 필요했기 때문에, 알렉산드르 2세의 외교관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반 러시아 동맹을 해체시키고 고립을 타개하려 했다.이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러시아의 외교관들은 많은 나라를 방문하며 동맹 상대를 찾으려 했지만, 영국은 그레이트 게임을 벌이는 경쟁 상대였고 프로이센을 비롯한 다른 나라들은 반 러시아 정서가 강해서 접촉을 해도 성과가 없었다. 그리고 전통의 동맹국이면서 크림 전쟁에도 참전하지 않았던 오스트리아는 아예 러시아 자신이 동맹국 후보 명단에서 탈락시킨 상태였다. 왜냐하면 오스트리아가 러시아를 '배신'했기 때문이다. 러시아는 1848년 3월에 헝가리에서 발발한 혁명으로 오스트리아가 곤욕을 겪자, 20만의 병력을 보내 헝가리 반란군을 포함한 혁명 세력을 진압해 주고 600만 루블의 차관을 지급해준 적이 있었다. 그래서 당대 러시아인들은 오스트리아가 러시아에 '빚'을 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는 크림 전쟁이 터지자 러시아에 최후 통첩을 날리며 매우 적대적으로 나왔기 때문에 러시아인들은 오스트리아의 '배신'에 격노했다.[17]
러시아 외교관들의 노력이 수많은 실패로 이어지던 중, 희소식이 들려왔다. 파리 강화 회의에서 크림 전쟁의 승리를 즐기고 러시아에게 굴욕을 안겨주었던 프랑스가 러시아의 요청에 응답한 것이다. 얼어붙었던 양국의 관계가 진전되기 시작했고 러시아는 고립에서 벗어나는 듯 했다. 그러나 폴란드인들이 봉기하면서 러시아와 프랑스의 관계는 다시 급속도로 얼어붙었다. 프랑스인들이 폴란드인들을 동정하고, 여론이 폴란드 독립을 지지하기 시작한 것이다. 러시아로서는 폴란드의 독립을 절대로 인정할 수 없었고 양국의 입장 차이는 좁혀지지 않았다.
2.7.1. 독일과의 관계
알렉산드르 2세와 외삼촌인 독일 황제 빌헬름 1세와 오토 폰 비스마르크.(1872년 촬영.) 왼쪽에 실크 햇을 쓰고 키가 큰 사람이 알렉산드르 2세, 가운데 실크햇을 쓴 사람이 빌헬름 1세. 그 옆에 검은 코트를 입은 사람이 오토 폰 비스마르크다.
그리고 이 순간에 등장한 사람이 바로 오토 폰 비스마르크였다. 당시 프로이센 왕국의 재상에 올랐던(1862년) 비스마르크는 폴란드 봉기가 프로이센 주도의 독일 통일에 해가 될 것이라 판단했다. 그래서 폴란드 봉기에 대해서 러시아의 입장을 지지하고 폴란드 독립운동가들이 프로이센으로 넘어오면 즉각 체포하여 러시아에 송환시키기로 약속했다.(알벤스레벤 협정)[18] 이렇게 되자 러시아와 프로이센의 관계는 급속히 개선되었고 이것은 러시아에게 희소식이었다.
이에 자신감을 회복한 러시아는 독일 통일 문제에서 전적으로 프로이센의 편을 들며 오스트리아 제국을 엿먹였고, 그러는 사이 착착 군제 개혁과 군사력 확충을 지속하며 기회를 노렸다. 그리고 1870년에는 비스마르크의 요구대로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서 중립을 지켜주고 그 대가로 파리 강화 회의의 결정 사항을 무력화하는 데 통일 독일의 지지를 받아냈다. 러시아의 일방적인 파기 선언에 경쟁국이었던 영국이 반발하긴 했지만, 러시아는 비스마르크의 도움을 받아 이 문제를 해결했다. 영국이 반발하여 런던에서 이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유럽 각국의 대표들을 모았지만, 비스마르크가 러시아를 지지하고 유럽 각국들이 크게 반대하지 않아서 러시아는 파리 강화 회의의 결정 사항을 무력화하는 내용의 런던 의정서를 체결했다. 이로써 러시아는 흑해 함대 주둔권과 흑해 연안 도시의 요새화에 대한 권리를 되찾았다.
그러다가 1875년 오스만령 보스니아에서 발생한 반란을 계기로 다시 발칸 문제가 불거지자 오스만 정부의 야만적인 탄압을 이유로 간섭, 1877년 제2차 동방 전쟁을 일으켰다. 개혁의 성과인지, 오스만 군대가 너무 약했던 건지 압승을 거두며 코스탄티니예까지 위협했으나, 영국의 위협으로 협상에 나서 산 스테파노 조약을 체결해 불가리아 공국을 성립시키고 세르비아 공국, 몬테네그로 공국과 루마니아 공국을 위성국으로 독립시키며 발칸반도에서 패권을 장악하나 싶었으나... 오스트리아와 영국의 맹렬한 반발과 양국의 전쟁 불사 위협으로 위기가 고조되자, 독일 제국이 끼어들어 '성실한 중개인'을 자처한 비스마르크에 의한 베를린 회의(1878년)에서 문제의 조정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비스마르크의 조정 결과 러시아가 설정한 불가리아 공국의 영토는 절반 이하로 축소되어 러시아는 지중해로 나갈 길이 막혔고, 러시아의 보상은 크림 전쟁 당시 루마니아에게 할양한 부자크 지방을 돌려받고 아르메니아 일부를 조금 얻는 수준에 그쳤다. 오히려 총 한 방 쏘지 않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에 대한 위임통치권을, 영국이 키프로스에 대한 위임통치권을 따냄으로써 영국과 오스트리아만 큰 이득을 얻고 러시아의 남하가 또다시 저지당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결국 러시아는 막대한 국력을 투입해서 벌인 전쟁에도 독일한테 크게 엿을 먹고 얻은 것이 없었다.
이에 제대로 빡친 알렉산드르 2세는 독일과의 우호관계를 끝내기로 하고, 1873년 맺었던 삼제협정의 무효를 선언했으며, 러시아-독일 접경지대에 대규모 병력을 배치시키고, 외삼촌에게 전쟁 선포에 버금가는 살벌한 서한을 보내는 등 분노를 억누르지 못하고 막나가기에 이르렀다. 그만큼 당시 러시아의 분노는 컸다. 결국 제1차 세계 대전의 협상국vs동맹국의 구도가 점차 현실화된 것이다.
2.8. 《로리스멜리코프 헌법》과 암살
결국 전쟁에서 아무 성과도 얻지 못하고 좌절만을 겪어야 했던 알렉산드르 2세의 행보는 전제군주정에 대한 국내의 불신만 키웠다. 전쟁에 이기고도 이득을 보지 못한 것과 베를린 회의에서 당한 망신은 많은 러시아인들로 하여금 분통을 터뜨리게 만들었고, 베를린 회의에서 러시아와 함께 불이익을 당한 발칸 반도의 슬라브계 국가들도 러시아에게 크게 실망했다. 대중들이 정부에 대해서 불만을 품기 시작하자, 인민주의 혁명가들은 분위기가 무르익었다고 판단하고 대규모 테러 활동을 시작했다.1878년 3월, 여성 혁명가 베라 자술리치가 트레포프 장군을 암살하려고 했다. 암살미수범인 베라는 지식인들에게 ‘정의의 화신’으로 환영받았고 4월에 열린 법정에서 배심원들은 무죄를 선고했다. 그리고 혁명가들이 그녀의 영향을 받아 테러 활동이 더 확산되었다. 1878년 8월에는 황제원 제3부 국장 메젠체프 장군이, 1879년 2월에는 하리코프 지사인 크로포트킨이 암살당했고 1879년 4월에는 알렉산드르 솔로비예프(Александр Константинович Соловьев)가 황제를 암살하려고 했다.
비밀경찰 조직의 핵심 인사와 고위 관료들이 암살당하는 사건들이 터지자, 당황한 제국 정부는 테러와 맞서 싸우자며 대중의 지지를 호소했다. 하지만 대중은 이미 여러 번 병크를 터뜨린 정부에게 실망했기 때문에 정부의 호소를 외면했고 지방의 젬스트보들도 마찬가지였다. 일부 젬스트보 의원들은 정부의 무능함을 비판하기까지 했다. 무능한 관료들과 경찰들은 혁명가들을 제대로 체포하지도 못했으며, 경찰 당국의 강경한 진압으로 1879년 4월 ~ 1880년 7월 동안 575명이 유배당하고 16명이 사형선고를 받았지만 그럴수록 혁명가들은 더 과격한 테러를 일으켰다.
늘어나는 테러로 제국 정부는 자신감을 잃었고 테러에 대한 공포에 떨게 되었다. 그리고 1879년 11월 중순부터 1880년 초까지 3개월 동안 인민의 의지(Народная воля) 계열의 테러 단체 3곳이 황제 암살 시도를 감행했다.
1879년 11월, 첫 번째 암살 시도가 있었다. 두 혁명가가 철도 수비대에 위장 취업해서 황제의 기차가 지날 오데사에서 황제를 암살하려 한 것이었는데, 기차가 오데사가 아닌 알렉산드르프스크를 통과해 실패했다. 2번째 암살 시도는 아예 기차 자체를 날려버리려 한 것으로, 젤랴프가 이끄는 단체가 감행했다. 혁명가들은 상인으로 위장해 철로 밑에 폭탄을 설치했는데, 황제의 기차가 통과할 때 폭탄이 터지지 않아서 실패했다.
페롭스크가 이끄는 3번째 단체가 감행한 3번째 암살 시도는 모스크바에서 71km 떨어진 철로 밑에 폭탄을 설치한 것이었다. 이번에는 폭탄이 제대로 터졌지만, 황제가 탄 객차가 아니라 수행원들이 탄 객차가 지날 때 폭탄이 터져서 실패했다. 혁명가들 입장에서 굴욕적인 것은, 폭탄을 터뜨렸음에도 아무도 다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그 다음 암살 시도는 혁명가 스테판 할투린(Степан Николаевич Халтурин)이 마호가니 가구 제조업자로 위장해서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겨울궁전에 잠입한 뒤, 황제의 식당 옆에 있는 시종들의 방에 다이너마이트를 조금씩 반입해 총 23kg의 다이너마이트를 설치한 것이었다. 폭탄은 황제와 모든 귀족들의 정찬이 열릴 1880년 2월 5일에 폭발하게 되어 있었는데, 정찬 시간이 변경되어서 경비병과 시종들만 피해를 입었다.
그 다음 암살시도는 아예 직접 황제에게 폭탄을 던지려 한 것이었는데, 혁명가가 폭탄을 점화하자 곧바로 손에서 폭탄이 터지는 사고가 발생해서 실패했다. 이 이후에도 여러 차례 시도가 있었으나 모두 실패했다.
이렇듯 수없이 많은 암살시도가 있었지만 신의 가호 덕인지, 피델 카스트로급 행운을 가지고 있어서였는지 황제는 항상 죽음을 피했다. 하지만 이로 인해 그는 늘 불안해하게 되었고 정신적인 문제도 겪었다. 특히 알렉산드르 2세는 사냥과 산책을 좋아해서 예전에는 자주 했지만 계속된 암살 위협 때문에 바깥 출입을 마음대로 못하게 되었고, 어쩌다 외출할 때도 철통 같은 경호를 받아야 했다. 결국 1880년 초에 황제는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기존 노선을 과감하게 바꾸기로 결정, 미하일 로리스멜리코프 백작(граф Михаил Тариелович Лорис-Меликов / Միքայել Լորիս-Մելիքյան, 아르메니아어 표기)[19]을 비상전권을 가진 최고 집행 위원회 의장으로 임명하고 그 동안 요직을 차지하고 있던 강경 보수파 관료들을 개혁의 필요성을 인정하는 온건파로 교체했다.
최고 집행 위원회 의장이 된 로리스멜리코프는 혁명가들을 진압하는 한편, 어느 정도 자유를 허용해 자유주의자들을 혁명 세력에게서 떼어내 혁명 세력을 고립시킨 다음 제거하려 했다. 또한 마음대로 사람들을 체포할 수 있었고 독단적인 행동을 해서 민중의 증오를 받았던 황제원 제3부를 폐지해 그 업무를 내무성으로 옮겼으며 출판에 대한 규제를 완화했다. 그밖에도 소금세를 폐지하고 그때까지 자리를 지키고 있던 교육성 장관 드미트리 톨스토이 백작을 파면했으며[20] 젬스트보에 개혁정책들을 구상하라고 촉구했다.
1881년 2월 28일, 로리스멜리코프는 자신의 개혁안을 황제에게 제시하고는, 대중을 진정시키고 국가가 안정을 되찾으려면 다시 개혁을 해야 하며 이번 개혁에는 사회세력들을 동참시킬 것을 제안했다.
로리스멜리코프 개혁안의 내용을 살펴보자면, 황제가 젬스트보와 도시 두마의 의원들을 선발해서[21] 임시 위원회인 <경제행정 위원회>와 <재정 위원회>를 설립하고, 이 위원회에서 개혁 법안을 만들어 경제와 재정 문제를 전담하게 했다. 그리고 이 임시 위원회에서 준비한 법안들을 젬스트보와 도시 두마에서 선출한 대표자들로 구성한 <일반 위원회>로 보내고, 일반 위원회에서 인준한 법안들을 황제와 일반위원회가 뽑은 10 ~ 15명의 위원들로 구성한 입법자문기관인 <국가 위원회>로 보내도록 하는 것이었다.
《로리스멜리코프 헌법(Конституция Лорис-Меликова)》이란 명칭을 얻은 이 개혁안은 알렉산드르 2세가 전제정을 유지하고 싶어했기에 매우 온건한 수준으로 만들어졌으며 그래서 러시아 제국 정치 체제의 본질적인 변화를 이끌어낼 수는 없었고 황제의 권력이 여전히 핵심적인 권력으로 기능했지만, 국정 운영에 민중이 선출한 대표들이 참여할 수 있고 입헌군주국의 토대를 확립하는 기초가 될 수 있는 개혁안이었다. 황제의 불안을 염려한 로리스멜리코프는 서유럽의 대의제 정치 제도를 도입하는 형태의 개혁은 아니라고 단언했다.
1881년 3월 1일[22], 알렉산드르 2세는 《로리스멜리코프 헌법》을 승인하고 3월 4일에 최종적인 추인을 위해 각료 회의 소집을 지시했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했다. 로리스멜리코프가 국정을 맡으면서 테러는 줄어들고 국가가 안정을 되찾았기 때문에 더 이상 비상전권을 유지할 필요성이 사라졌다. 그래서 로리스멜리코프는 최고 집행 위원회를 폐쇄시키자는 제안을 했고, 알렉산드르 2세도 승인했다. 이후에 벌어질 일을 생각하면 로리스멜리코프와 알렉산드르 2세는 엄청난 실수를 저지른 셈이었다. 헌법을 승인하고 난 뒤, 황제는 위험하다는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원래 일정대로 기병학교 열병식에 참석했다.
한편 1879년부터 알렉산드르 2세 암살을 추진해 온 테러단체 '인민의 의지'는 이러한 개혁에도 불구하고 혁명을 촉발하기 위해서는 거사가 불가피하다는 판단을 내렸다. 이들은 황제가 행차한다는 정보를 입수한 다음 그간 여러 차례의 실패를 토대로 이중삼중의 계획을 수립한 상태였다. 우선 이들은 황제가 보통 시내에서 행사를 치르고 환궁할 때 말라야 사도바야(Малая Садовая, 작은 정원) 거리나 예카테리나 운하를 따라가는 길을 이용한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그래서 말라야 사도바야 거리에 치즈 가게를 하나 열고, 이 가게 지하에서 거리 쪽으로 땅굴을 파서 다이너마이트를 매설해놓고 황제 행렬이 지나갈 때 이를 폭파시킬 준비를 해놨다. 만약 황제의 행렬이 말라야 사도바야 거리를 통과하다 폭발로 정지하면, 단원 4명이 사제폭탄을 들고 현장에 뛰어들어 확인폭사를 시킨다는 계획이었다. 행여나 이쪽이 아닌 운하변 도로를 이용할 경우에는 곧장 사제폭탄을 투척할 작정이었다. 그리고 만약 황제가 폭탄으로 죽지 않았다면 암살조를 총괄하던 안드레이 젤랴보프(Андрей Иванович Желябов)가 권총과 단검을 들고 현장에 난입하여 최후의 일격을 가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젤랴보프가 공교롭게도 거사 결행 이틀 전에 체포되었기에 최후의 일격은 그의 아내 소피야 페롭스카야(Софья Львовна Перовская)가 담당하기로 했다.
이 가운데 알렉산드르 2세는 3월 1일(구력) 열병식을 마치고 정오 경에 황궁으로 향했다. 황제의 일정을 미리 파악하고 있던 '인민의 의지' 단원 중 이그나치 흐리니에비에츠키(Ignacy Ioakhimovich Hryniewiecki / Игнатий Гриневицкий, 폴란드인 단원이었다), 니콜라이 리사코프(Николай Иванович Рысаков), 티모페이 미하일로프(Тимофей Михайлович Михайлов), 이반 예멜랴노프(Иван Пантелеймонович Емельянов) 4명은 사제폭탄을 소지하고 말라야 사도바야 거리 쪽에서 대기 중이었다. 그런데 황제의 행렬은 말라야 사도바야 거리로 가지 않고, 다른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망을 보고 있던 소피야 페롭스카야는 이에 수신호로 빨리 운하 쪽으로 이동하도록 지시했다.
그래도 이들 암살단원들이 빨리 위치를 다시 잡기는 쉽지 않아서, 알렉산드르 2세가 곧장 황궁으로 돌아갔다면 암살을 면할 수 있었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그날따라 알렉산드르 2세는 친척인 예카테리나 미하일로브나 대공녀[23]를 잠시 보고 가겠다고 하는 바람에 또 시간을 지체하여 암살자들이 다시 위치를 잡을 여유를 주고 말았다.
결국 황제의 행렬은 오후 2시 경에 예카테리나 운하를 따라 다시 이동했다. 이어 2시 15분 무렵, 니콜라이 리사코프는 소피야 페롭스카야의 신호를 받고 손수건에 싼 첫 번째 사제폭탄을 투척했다. 폭탄은 마차 뒤편에서 폭발하고, 황제의 마차를 뒤따르며 호위하던 카자크 기병이 이에 치명상을 입고 그날 사망했다. 폭탄 파편으로 거리를 지나던 애꿎은 14세 소년도 부상을 입었다. 폭발로 주변도 아수라장이 되었다. 그러나 알렉산드르 2세는 프랑스의 나폴레옹 3세가 선물한 방탄 마차에 탑승하고 있었기에 전혀 부상을 입지 않았다. 리사코프를 현장에서 체포한 경찰들은 리사코프가 체포 직전에 누군가에게 소리치는 걸 듣고 암살자들이 또 있음을 직감했다. 이에 신하들이 알렉산드르 2세에게 곧장 온전한 마차로 바꿔타고 궁으로 향할 것을 주청했으나, 황제는 자리를 피하기는커녕 "난 괜찮다." 라고 말하며 마차에서 나와 폭발에 휘말려 다친 사람들을 수습하려고 했다.[24]
당시 상황을 그린 삽화. 왼 쪽에 쓰러진 사람이 암살자인 흐리니에비에츠키이고 중앙에 쓰러져 수행원 한 명이 잡고 있는 사람이 알렉산드르 2세이다.
하지만 이는 암살자들에게 좋은 기회를 제공했고 그 사이에 달려온 흐리니에비에츠키가 황제 앞으로 난입하여 두 번째 폭탄을 발밑에 던졌다. 이번엔 암살범이 워낙 가까운 데서 폭탄을 던져 자살 폭탄테러나 마찬가지였다. 폭탄에 맞은 알렉산드르 2세는 즉사하지는 않았지만 팔 하나와 두 다리가 날아가고 배와 얼굴이 찢어지는 치명상을 입었으며 흐리니에비에츠키도 중상을 입었다. 또한 이미 인파가 몰려든 가운데 폭발이 일어나 근위병들과 주변 약 20여 명의 구경꾼들까지 부상을 입었다. 이외에 암살조 중 이반 예멜랴노프도 언제든 폭탄을 터뜨릴 준비를 마치고 기다렸으나, 알렉산드르 2세가 이미 상태가 심각해 가망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자리를 떠났다.
치명상을 입은 황제는 주변 사람들에게 겨우
"짐은 궁전에서 죽고 싶도다..."
라는 말을 했고, 신하들과 근위병들에 의해 급히 겨울 궁전으로 실려 갔으나 9시간 만에 그의 서재에서 사망했다. # 암살범 흐리니에비에츠키도 주변 군 병원으로 이송되었으나, 그는 자기 이름도 발설하지 않고 일체 협조를 거부하다가 그날 저녁에 사망했다. 반면 첫 번째 폭탄을 던진 리사코프는 순순히 조사에 응해 다른 단원들의 신원을 자백했다. 이에 경찰은 대대적인 검색을 벌여 '인민의 의지' 단원들을 1881년 3~4월에 걸쳐 연이어 체포했다.러시아 전제정의 상징인 황제를 쓰러뜨린 인민주의 혁명가들은 '이제 러시아 각지에서 인민들이 혁명을 일으켜 전제정을 완전히 끝장낼 것'이라고 생각했으며, 설령 혁명이 일어나지 않더라도 본격적인 개혁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기대를 품었지만 그들의 생각은 완전히 빗나갔다. 인민들은 혁명을 일으키기는커녕 오히려 황제의 참혹한 죽음에 큰 충격을 받았다.[25] 자유주의자들은 입을 다물었으며 보수파들은 "정부가 테러리즘에 맞서서 단호하게 무력을 행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황제의 암살 이후 1881년 3월 8일에 열린 회의에서, 헌법을 만든 로리스멜리코프는 ‘죽은 황제의 의지는 그 후계자에게 법이 된다’는 전례를 황태자가 따를 것이라고 생각해서 침묵을 지켰다. 그러나 ‘죽은 황제의 후계자’인 알렉산드르 3세는 《로리스멜리코프 헌법》을 거부했고 전제 정권을 보존할 것을 선언했다. 자기 아버지의 잔혹한 죽음을 목격하고 큰 충격을 받은 알렉산드르 3세는 권좌에 앉은 후 아버지의 개혁 정책 중 일부를 철회하며 중앙집권에 열을 올렸고 자기 아버지를 앗아간 테러리즘을 뿌리뽑으려 했다. 또한 그는 아버지가 암살당한 자리에 피의 성당을 지어 아버지를 애도했다.
3. 가족 관계
헤센의 마리 공녀 |
- 아내 헤센의 마리 공녀 (1824년 ~ 1880년)
자세한 건 항목 참조. 헤센의 마리는 겨우 16번째 생일을 지나자마자 알렉산드르 2세와 결혼하면서, 러시아 정교회로 개종하고 이름도 러시아 식인 마리야 알렉산드로브나로 불리게 되었다. 하지만 어린 나이부터 임신과 출산의 반복, 그리고 추운 러시아의 기후를 견디기 어려워 건강이 매우 안 좋았다. 슬하에 6남 2녀를 두었다. 알렉산드르 2세는 몸이 아픈 아내를 두고 위에서도 언급된 예카테리나 돌고루코바를 정부로 삼아, 그녀와의 사이에서 사생아까지 낳고 이후 마리야가 사망하자 1년 만에 그녀와 귀천상혼으로 결혼한다.[26]
3.1. 조상
본인 | 부모 | 조부모 | 증조부모 |
알렉산드르 2세 (Alexander II) | 니콜라이 1세 (Nicholas I) | 파벨 1세 (Paul I) | |
표트르 3세 (Peter III) | |||
예카테리나 2세 (Catherine II) | |||
뷔르템베르크의 조피 도로테아 공녀 (Duchess Sophie Dorothea of Württemberg) | |||
뷔르템베르크 공작 프리드리히 2세 오이겐 (Frederick II Eugene, Duke of Württemberg) | |||
브란덴부르크슈베트의 프리데리케[27] (Margravine Friederike of Brandenburg-Schwedt) | |||
프로이센의 샤를로테 공주 (Princess Charlotte of Preußen) | |||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 (Frederick William III) | |||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 (Frederick William II) | |||
헤센다름슈타트의 프리데리케 루이자 (Landgravine Frederika Louisa of Hesse-Darmstadt) | |||
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의 루이제 (Duchess Louise of Mecklenburg-Strelitz) | |||
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 대공 카를 2세 (Charles II, Grand Duke of Mecklenburg-Strelitz) | |||
헤센다름슈다트의 프리데리케 공녀 (Princess Frederica of Hesse-Darmstadt) |
3.2. 자녀
자녀 | 이름 | 출생 | 사망 | 배우자 / 자녀 |
1녀 | 알렉산드라 알렉산드로브나 여대공 (Grand Duchess Alexandra Alexanderovna) | 1842년 8월 30일 | 1849년 7월 10일 | |
1남 | 니콜라이 알렉산드로비치 황태자 (Tsesarevich Nicholas Alexandrovich) | 1843년 9월 20일 | 1865년 4월 24일 | |
2남 | 알렉산드르 3세 (Alexander III) | 1845년 3월 10일 | 1894년 11월 1일 | 덴마크의 다우마 공주 슬하 4남 2녀[28] |
3남 | 블라디미르 알렉산드로비치 대공[29] (Grand Duke Vladimir Alexandrovich) | 1847년 4월 22일 | 1909년 2월 17일 | 메클렌부르크슈베린의 마리 여공작 슬하 4남 1녀[30] |
4남 |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 대공[31] (Grand Duke Alexei Alexandrovich) | 1850년 1월 14일 | 1908년 11월 14일 | 알렉산드라 주콥스카야 슬하 1남 |
2녀 | 작센코부르크고타 공작부인 마리아 (Maria, Duchess of Saxe-Coburg and Gotha) | 1853년 10월 17일 | 1920년 10월 24일 | 작센코부르크고타 공작 알프레트 슬하 1남 4녀[32] |
5남 | 세르게이 알렉산드로비치 대공 (Grand Duchess Sergei Alexandrovich) | 1857년 5월 11일 | 1905년 2월 17일 | 헤센의 엘리자베트 공녀[33] |
6남 | 파벨 알렉산드로비치 대공[34] (Grand Duke Paul Alexandrovich) | 1860년 10월 3일 | 1919년 1월 28일 | 그리스와 덴마크의 알렉산드라 공주[35] 슬하 1남 1녀 |
올가 발레리아노브나 카르노비치 슬하 1남 2녀 |
4. 여담
- 알렉산드르 2세는 부황 정도의 워커홀릭은 아니었지만[36] 업무에 대한 집착이 강하여 오랜 시간 일하였다. 특히 아침 9시부터 업무를 시작해 6시까지 일했으며 잠깐 잠깐 휴식 시간을 가지고 식사를 했다. 업무가 끝나면 그는 가족과 시간을 보내거나 공적 행사에 나갔다. 그는 늘 관료들에게 업무를 미루지 말라고 지시했으며 관료들이 처리해야 하는 업무에 기한을 두었다. 그 자신도 예외는 아니라서 매일 매일 막대한 양의 서류가 올라와도 그는 스스로가 정한 업무 처리 기한을 철저히 지켰다.
- 알렉산드르 2세의 취미는 사냥과 산책이었다. 특히 사냥을 매우 좋아했는데 기회만 되면 사냥을 자주 나갔다. 당시 러시아에는 두 가지 종류의 사냥이 있었는데, 대규모 인력을 동원해 사냥에 나서는 것이었고, 하나는 사냥에 나설 사람 한 두 명과 함께 조용히 사냥하는 것이었는데 그는 후자의 방식을 쓰는 사냥꾼이었다.[37] 그는 소수의 인원을 대동해서 장기간의 사냥 여행을 떠났는데 숲속에서 곰이나 들소, 엘크를 잡는 것을 좋아했다.[38] 하지만 말년에는 계속된 암살 위협으로 인해 산책과 사냥도 함부로 하지 못했다.
- 부황과 선대 황제들이 그랬듯이, 알렉산드르 2세도 경호원 없이 혼자서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거리를 산책하는 것을 즐겼고, 가끔씩 반려견과 함께 산책에 나섰다. 그러나 계속된 암살 시도로 그는 경호원 없이는 산책을 못 하게 되었고, 이후 그 어떤 러시아 황제도 경호원 없이 거리를 산책하지 않았다.
- 처음으로 사진을 찍은 러시아 황제이다. 처음으로 사진을 찍은 러시아 황후는 알렉산드르 2세의 어머니인 프로이센의 샤를로테다. 사실 사진은 선황 니콜라이 1세 때 나왔는데 정작 니콜라이 1세는 사진을 찍은 적이 없다. 참고로 사진이 나온 이후 국가원수 중에서 최초로 사진을 찍은 사람은 프랑스의 루이필리프 1세(1842년 촬영)였고, 미국의 존 퀸시 애덤스(1843년),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1844년), 독일의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1847년)가 그 뒤를 따랐다. 비단 니콜라이 1세뿐만 아니라 당대(1840~50년대) 러시아 황족, 귀족, 상류층, 지식인층의 사진도 동시대 서유럽에 비해 매우 드물었던 것을 보면 사진을 거부해서 안 찍었다기보단 러시아 같은 당대의 동구권에선 아무리 상류층이라도 사진 촬영 자체가 흔하지 않아서 못 찍은 것에 가깝다.
- 19세기 초반 태어난 서양 남성답게 콧수염과 구레나룻을 이어붙일 정도로 길렀다. 이는 외삼촌 빌헬름 1세와 프란츠 요제프 1세도 마찬가지로 길렀다.[39]
- 러시아 제국의 국기로 알려진 흑황백 삼색기가 그의 치세인 1858년에 러시아 제국 최초의 국기로 지정된 것이다. 그 이전에는 국기가 없었고 1705년에 표트르 1세가 지정한 백청적 삼색기가 상선기로 있었다. 그러다가 1883년 알렉산드르 3세 시대에 백청적 삼색기가 러시아 제국의 국기로 지정되어 소련의 멸망 후 현재에도 사용되고 있다.
- 러시아 제국의 남성 황제들 중 유일하게 환갑을 넘긴 황제다. 여제들도 포함하면 환갑을 넘긴 여제가 한 명 있으나 이마저 70은 넘기지 못했다. 이는 러시아 제국의 황제들 대부분이 40~50대에 일찍 사망했고 요절한 황제들도 수두룩하기 때문이다.
4.1. 가정사
알렉산드르 2세는 인간적으로는 선량한 황제였지만, 가족사와 관련해서는 정반대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장남 니콜라이 알렉산드로비치 황태자가 매우 유능하다는 이유로 장남만 편애했고, 무능했지만[40] 가정적으로는 선했던 알렉산드르 알렉산드로비치 대공(후일 알렉산드르 3세)은 찬밥신세였다. 게다가 정부와 사생아들을 두었고, 장남 니콜라이가 1865년 수막염으로 숨을 거둘 때에는 오로지 니콜라이만 신경쓰고 다른 자녀들은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니콜라이 황태자의 사망 이후에는 알렉산드르 알렉산드로비치 대공을 차남이라는 이유만으로 그의 정치관에 귀 기울여 보지 않고 황태자 자리에 세웠다. 게다가 니콜라이 황태자의 약혼녀 다우마 공주(마리아 표도로브나)를 알렉산드르 알렉산드로비치 대공과 강제로 결혼하게끔 했다.[41] 당시 알렉산드르는 사랑하는 애인이 있었으나 차르는 신경쓰지 않고 결혼을 밀어붙였고, 그 무렵 개혁군주로서의 모습을 버리고 전제적으로 변하며 나태해졌다.알렉산드르 2세와 마리야 황후 |
아내와의 관계가 소원해진 이후 알렉산드르 2세는 대놓고 외도를 했다. 수많은 여성들과 관계를 맺었고, 시녀나 하녀부터 시작해서 심지어는 나이가 최소 20살 이상 차이 나는 스몰니 학원의 여학생들과 관계를 맺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수 많은 여성들과 관계를 맺는 외도를 저질렀음에도 불구하고 비판을 받지 않았다. 왜냐면 당시 러시아의 모든 이들이 그를 사랑한다는 이유 덕분에 그의 '일탈'은 늘 용서받았기 때문이다.
몇 명이나 사귀었는지도 기억을 못하던 48세의 나이에, 알렉산드르 2세는 스몰니 학원의 학생이었던 19살의 예카테리나 돌고루코바(Екатери́на Миха́йловна Долгору́кова)와 사랑에 빠졌다. 두 사람은 매일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여름 정원에 나와 산책을 했고 거리의 행인들은 아리따운 아가씨와 손 잡고 걸어가는 이 거구의 신사를 못 알아 보는 척 해야 했다. 이 신사의 얼굴이 제국의 모든 관공서에 걸려 있는데도 말이다.(...) 두 사람은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굉장히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으며 네 명의 자식을 낳을 정도로 금슬이 좋았다. 예카테리나는 황제와 연애를 시작한 뒤로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겨울 궁전에 머물렀으며 거의 비공식적인 '황후'로서의 지위를 누렸다. 외도를 저지른 것 때문에 벌을 받은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1866년에 있었던 드미트리 카라코조프의 황제 암살 미수 사건도 황제가 예카테리나와 여름 정원에서 산책하러 나온 것을 노린 것이었다.
예카테리나 돌고루코바 |
이와 대비되게 다음 황제인 차남 알렉산드르 3세는 자신의 아내인 마리아 표도로브나 황후와 끝까지 금슬좋게 살았으며, 외도 같은 건 양쪽 다 하지 않았으며, 장손이자 마지막 황제였던 니콜라이 2세 역시 마찬가지로 알렉산드라 표도로브나 황후와 끝까지 금슬이 좋았다.
참고로 니콜라예비치/니콜라예브나 세대(니콜라이 1세의 자녀들)부터 러시아의 남성 황족들은 대부분 장신에 미남이었고, 바람둥이 기질이 다분해 상당한 정부를 들였다. 본부인한테만 충실했던 황족은 알렉산드르 3세, 니콜라이 2세, 콘스탄틴 콘스탄티노비치 대공, 미하일 니콜라예비치 대공[47] 정도밖에 없었다.
[1] 폴란드 차르, 핀란드 대공 겸임.[2] 옐리자베타 대공비의 남편[3] 고모 안나 파블로브나 여대공의 아들.[4] 정확히는 니콜라이 1세의 형인 콘스탄틴 대공에게 아들이 두 명 있었지만 둘 다 사생아였다.[5] 이렇게 썸을 탔던 두 사람은 나중에 2대에 걸쳐서 사돈이 된다. 알렉산드르 2세의 딸 마리야와 빅토리아 여왕의 차남 알프레드 왕자가 결혼했고, 알렉산드르의 친손자 니콜라이 2세와 빅토리아의 외손녀 헤센의 알릭스 공녀가 결혼했다.[6] 상행위와 밀렵을 하려고 불법적으로 국경을 넘는 미국인들은 넘치는데, 수비군의 숫자는 턱없이 모자랐다.[7] 러시아 제국 입장에선 허탈하게도 미국에 팔자마자 알래스카에서 새로운 금광이 발견되었던데다가 나중에는 알래스카 지역에 골드 러시가 벌어질 정도로 금맥이 풍부했다.[8] 시모다 조약이 체결된 뒤로, 사할린의 일본 이주민 수가 크게 줄어들었다.[9] 이전부터 오세트인처럼 러시아에 합류한 민족들이 있긴 했다. 이 경우는 원래 샤밀 밑에 있었던 민족들이 샤밀의 실정에 반발하여 러시아 측에 합류한 사례이다.[10] 바랴틴스키 공작은 캅카스를 장악해야 남부 지역의 안보를 확보할 수 있으며 캅카스를 거점으로 하여 중앙아시아와 페르시아 지역으로 진출하자고 주장한 인물이었다.[11] 러시아가 이 지역을 장악한 이후로 차가 전래돼서 차를 재배하기 시작했다.[12] 지금도 체르케스인들의 다수가 미국과 튀르키예를 비롯한 외국에서 살고 있다.[13] 이 지역에서 거주하는 우즈베크와 타지크인들은 주로 관개 농업에, 투르크멘, 키르기즈, 카자흐인들은 주로 목축과 유목에 종사했다.[14] 이 침공은 중앙 정부가 계획한 것이 아니라 체르냐예프가 독단적으로 벌인 것이었고 나중에야 중앙 정부의 추인을 받았다.[15] 독일어 표기를 살려 фон-Ка́уфман이라 표기하기도 한다.[16] 스코벨레프는 이후 서부 투르크멘의 러시아군 지휘관으로 임명되었다.[17] 니콜라이 1세가 임종을 맞이했을 때 그 어떤 오스트리아인도 그 자리에 참석할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18] 이는 프로이센도 오스트리아, 러시아와 함께 폴란드를 갈라 먹고 있던 처지였기 때문이다.[19] 크림 전쟁, 러시아-튀르크 전쟁에서 활약했고 지방 총독직을 지내며 그 능력을 입증했다.[20] 대표적인 보수파 인사. 황제 암살 시도 이후에 있었던 그의 교육 정책은 많은 사람들의 반감을 샀다. 그래서 그를 파면했을 때 많은 인민들이 환호했다고 한다.[21] 젬스트보나 도시 두마가 선정한 전문가도 위원에 포함될 수 있었다.[22] 러시아 구력 기준, 그레고리력으로는 3월 13일.[23] 알렉산드르 2세의 작은아버지인 미하일 파블로비치 대공의 셋째 딸이었다. 즉 사촌. 예카테리나의 어머니 옐레나 파블로브나 대공비는 농노 해방이나 개혁 등 이슈에서 알렉산드르 2세와 정치 견해가 상당 부분 일치해 황제와 늘 친했던 숙모였고, 예카테리나는 그런 어머니가 생전에 운영했던 여러 사회 사업들을 물려받은 딸이었다. 이런 점에서 당대 사람들 중 일부는 황제가 개혁을 앞두고 생각이 비슷한 황실 가족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지 않았을까 추측하기도 했다.[24] 세계 역사를 통틀어 전제군주제에서 이 정도로 민간인이나 호위병 등을 위해 생명의 위험을 무릅쓴 전제군주는 눈씻고 찾아봐도 이름 하나 대기가 어렵다.[25] 피의 일요일 사건을 보면 알겠지만 일반 민중들은 이 때까지도 일종의 왕권신수설에 가까운 개념을 믿고 있었다. 그런데 하느님의 대리자인 황제가 웬 폭도들의 테러로 처참하게 죽었으니 얼마나 충격이었겠는가.[26] 정작 이렇게 귀천상혼한 돌고루코바와 그녀의 자식들은 알렉산드르 2세가 폭탄 테러로 사망하자마자, 연금만 지급받은 채 러시아 황실에서 내쳐져 두 번 다시 돌아오지 못하고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며 살아야 했다. 이 꼴에 진력이 난 차남 알렉산드르 3세는 아내인 덴마크의 다우마 공주만을 사랑하며 나름 행복한 결혼 생활을 했다.[27]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의 외손녀이다.[28] 니콜라이 2세, 올가 알렉산드로브나 여대공, 크세니야 알렉산드로브나 여대공 등.[29] 피의 일요일 사건에서 잘못된 대처로 인해 러시아 제국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인물.[30] 그리스와 덴마크의 니콜라오스 왕자비 엘레니 등.[31] 셜록 홈즈 미공개 사건집 중 일곱 시계의 모험에 등장한다. 작중 대사는 없으나 홈즈 덕택에 암살을 모면할 수 있었다.[32] 루마니아의 왕비 마리아, 러시아의 빅토리아 표도로브나 대공비, 갈리에라 공작부인 베아트리스 등.[33] 세르게이 대공의 외사촌 루트비히 4세의 차녀로 오촌 조카다.[34] 첫번째 아내 알렉산드라와 사별한 후 귀천상혼한 아내와의 사이에선 1남 2녀를 낳았지만 러시아 혁명 직후 망명을 시도하다 체포되어 총살당했다. 여담으로 장남인 드미트리 대공은 훗날 그리고리 라스푸틴 암살에 가담하였다.[35] 1870~1891. 요르요스 1세와 올가 콘스탄티노브나 여대공의 장녀로 파벨 대공에겐 오촌 조카다. 21세에 둘째인 드미트리 파블로비치 대공을 조산하고 사망했다.[36] 니콜라이 1세는 아침 7시부터 업무를 시작해서 11시에 산책을 나가 점심을 간단히 먹은 뒤, 다시 황궁에 돌아와 20시까지 일했다. 그 뒤로는 극장을 관람하거나 공식 행사에 참여했고 가족과도 시간을 보냈다. 개인 시간을 보내고 난 뒤에는 자정에 집무실로 돌아와서 3시까지 일했다.[37] 당연히 전자의 방식은 비용도 많이 들고 지역 주민들에게 민폐를 끼치기 때문이다.[38] 러시아에서는 호랑이가 극동의 시베리아에 사는터라 니콜라이 2세는 가혹한 기후의 시베리아로 가지 않았다.[39] 아버지 니콜라이 1세도 초상화를 보면 구레나룻을 길렀지만 콧수염과 이어붙일 정도로 기르진 않았다.[40] 딱히 아버지와 비교해서 반동적이여서 그렇지 아들인 니콜라이 2세에 비하면 그렇게까진 무능하지는 않았다.[41] 다만 법률상으로는 황태자가 자식 없이 죽으면 차순위 계승권자인 차남이 자동으로 확정상속인이 되기에, 원칙적으로는 알렉산드르가 자동으로 황태자가 되는 것이 맞다. 그리고 황태자는 반드시 왕족과 동등결혼을 해야 하기에 원래 애인이었던 시녀와 이별시키고 형의 약혼자와 결혼시킨 것도 어떤 면에서는 당연한 결과였다.[42] 이들 중 3명만이 성인으로 자라났다.[43] 황후의 자식들은 물론이고 귀족들마저 병이 들어 오늘내일하는 마리야 황후가 돌고루코바 때문에 알렉산드르 2세에게 외면받는다고 생각해 돌고루코바를 매우 싫어했다. 특히 러시아 궁정의 여성들이 돌고루코바를 가장 적대시했다고. 또한 만약 돌고루코바가 정식으로 알렉산드르 2세와 혼인하면 그녀가 황후가 되어 정치적 권력에 다가가고, 그녀의 자식들이 공식적으로 적자가 되어 황위계승권을 받게 될 것도 우려했다고 한다.[44] 돌고루코바가 낳은 알렉산드르 2세의 자식들도 각각 유리옙스키 공작, 유리옙스카야 여공작 칭호를 받았다.[45] 알렉산드르 2세의 장례식에서 다른 황족들과 같이 서있지도 못했고 추도식에는 아예 참석을 금지당해 외부인 취급을 받았으며, 러시아를 떠난 뒤에도 해외에 나가있는 다른 로마노프 황족들이 유리옙스카야 일가를 방문하는 걸 꺼릴 정도로 외면받았다. 사실 총애해주던 국왕 및 황제의 사망으로 뒷배를 잃은 로얄 미스트리스의 말로는 대부분 이렇게 비참하다.[46] 알렉산드르 2세의 뒤를 이어 즉위한 알렉산드르 3세는 비밀 경찰을 통해 정기적으로 유리옙스카야 일가에 대한 보고를 받았다고 한다.[47] 알렉산드르 2세의 막내동생으로 형제들 중에서 유일하게 정부와 사생아를 둔 적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