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모에 미러 (일반/어두운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03-21 20:58:12

니콜라이 알렉산드로비치 황태자

<colbgcolor=#C4D2E4><colcolor=#000000> 러시아의 황태자
니콜라이 알렉산드로비치 로마노프
Цесаревич Николай Александрович
파일:Nyikolaj_Alekszandrovics_orosz_nagyherceg.jpg
이름 니콜라이 알렉산드로비치 로마노프
(Никола́й Алекса́ндрович Романов)
출생 1843년 9월 20일
러시아 제국 상트페테르부르크
사망 1865년 4월 24일 (향년 21세)
프랑스 제국 니스
신체 193cm[1], O형(Rh-)
아버지 알렉산드르 2세
어머니 헤센의 마리 공녀
형제 알렉산드라, 알렉산드르 3세, 블라디미르, 알렉세이, 마리야, 세르게이, 파벨
1. 개요2. 생애
2.1. 황태손2.2. 황태자가 되다2.3. 안타까운 최후2.4. 사후
3. 가족관계
3.1. 조상
4. 여담

[clearfix]

1. 개요

러시아 제국의 황태자. 알렉산드르 2세의 장남이다. 알렉산드르 3세의 형이고 니콜라이 2세의 큰아버지이다. 니콜라이 1세의 4명의 아들들은 모두 장남에게 니콜라이라는 이름을 붙였다.[2]

조카 니콜라이 2세와는 동명이인이다. 니콜라이 황태자가 알렉산드르 2세 사후에도 계속 생존하여 즉위했다면 니콜라이 2세라는 황제명을 받을 사람은 이 사람이었을 것이다.

2. 생애

2.1. 황태손

러시아 제국의 황태자인 알렉산드르 2세헤센의 마리 공녀 황태자비의 6남 2녀 중 둘째이자 장남으로 출생했다. 위로 누나 알렉산드라가 있었지만 6살에 요절해서 사실상 집안에서 맏이였다.

어린 시절의 니콜라이 황태자는 닉사라는 애칭으로 유명했으며 자신도 그렇게 불리기를 원했다.

니콜라이 황태자는 어려서부터 머리가 아주 좋았고, 교양도 있는 사람이어서 알렉산드르 2세는 그를 러시아의 희망이라고 불렀으며, 어머니 헤센의 마리 공녀 역시 자녀들 중에서 본인을 닮은 니콜라이를 제일 예뻐했으며, 부모의 사랑을 독차지했다.

숙부인 콘스탄틴 니콜라예비치 대공도 그를 보고 완벽한 왕관이라고 칭찬했다.

2.2. 황태자가 되다

파일:니콜라이 황태자와 알렉산드르 3세.jpg
첫째 남동생 알렉산드르 알렉산드로비치 대공과 함께.

크림 전쟁 중 할아버지인 니콜라이 1세가 1855년 3월 2일 세상을 떠나고 아버지 알렉산드르 2세가 차르로 즉위하자 황태자가 되었다.

니콜라이 황태자는 아버지가 추진하고자 하는 개혁의 파트너였다. 니콜라이 황태자는 자신이 예전부터 사진을 모을 정도로 강력하게 짝사랑하고 있었던 덴마크다우마 공주와 약혼했다.
파일:Nixa_és_Dagmar .jpg
약혼 사진
반면, 그의 남동생 사샤는 형과 달리 단순한 성격에, 키는 컸으나 파티 시간에는 가만히 춤을 지켜보는 재미없는 성격이었다.

니콜라이 황태자는 영특한 인물했고, 외모도 준수했으며 키도 193cm나 되는 장신이였다. 첫째 남동생인 알렉산드르 3세도 키가 190cm로 역대 러시아의 지도자 중에서 키가 2번째로 컸는데[3] 그런 남동생보다도 키가 컸다.[4]현재 전세계에서 평균키가 가장 큰 유럽에서도 저 정도 키면 장신이다. 다만 키에 비해 대두여서(...) 영 그리 보이지 않는게 흠.

2.3. 안타까운 최후

1865년 이전까지만 해도 건강한 체질으로 여겨지던 니콜라이 황태자는 남유럽을 여행하는 동안, 요통과 목 통증을 포함한 수많은 이상증세를 보였다. 당시 니콜라이 황태자를 진찰했던 의사는 황태자의 병이 류머티즘이라고 잘못 진단했고, 니콜라이 황태자 본인 스스로도 자신의 병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이탈리아 여행을 계속했다.

그러나 이후 니콜라이 황태자의 건강은 급격히 악화되었고 결국 니콜라이 황태자는 요양을 위해 남프랑스로 보내졌다. 그러나 황태자의 몸 상태는 나아지지 않았고 결국 황태자의 병은 류머티즘이 아닌 뇌척수막염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에 많은 이들이 4대 로이히텐베르크 공작[5][6]과의 레슬링 경기[7]에서 입은 상처가 황태자의 병의 원인일 것이라는 추측을 하기도 했다고.[8]

죽음을 직감한 니콜라이 황태자는 유언을 했다.
"오, 아버지. 제 동생 사샤를 잘 돌봐주세요. 사샤는 참 성실하고 좋은 사람입니다." - 아버지 알렉산드르 2세에게[9]
"다우마를 잘 부탁한다." - 남동생 사샤에게
유언을 마친 뒤, 니콜라이 황태자는 1865년 4월 24일, 프랑스 니스에서 사망했다. 이때 그의 나이 불과 21세였다.[10]

2.4. 사후

가족들은 물론 러시아 제국 백성들도 총명한 황태자였던 그의 죽음에 크게 슬퍼했다. 그의 우애 좋은 동생은 제위를 계승하여 알렉산드르 3세가 되었으며, 그의 유언[11]에 따라 다우마는 알렉산드르 3세와 결혼해 6자녀를 낳았다.

알렉산드르 3세는 먼저 간 형을 추모하는 의미에서 형의 이름을 맏이이자 장남인 니콜라이 2세에게 붙여줬다.

3. 가족관계

3.1. 조상

본인 부모 조부모 증조부모
러시아의 니콜라이 알렉산드로비치 황태자
(Tsarevich Nikolai Alexandrovich of Russia)
<colbgcolor=#fff3e4,#331c00> 알렉산드르 2세
(Alexander II)
<colbgcolor=#ffffe4,#323300> 니콜라이 1세
(Nicholas I)
파벨 1세
(Paul I)
뷔르템베르크의 조피 도로테아 공녀
(Duchess Sophie Dorothea of Württemburg)
프로이센의 샤를로테 공주
(Princess Charlotte of Prussia)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
(Frederick William III)
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의 루이제 여공작
(Duchess Louise of Mecklenburg-Strelitz)
헤센의 마리 공녀
(Princess Marie of Hesse and by Rhine)
헤센 대공국 대공 루트비히 2세
(Louis II, Grand Duke of Hesse and by Rhine)
헤센 대공국 대공 루트비히 1세
(Louis I, Grand Duke of Hesse and by Rhine)
헤센다름슈타트의 루이제 공녀
(Princess Louise of Hesse-Darmstadt)
바덴의 빌헬미네 공녀
(Princess Wilhelmine of Baden)
바덴의 대공세자 카를 루트비히
(Charles Louis, Hereditary Prince of Baden)
헤센다름슈타트의 아말리 공녀
(Princess Amalie of Hesse-Darmstadt)

4. 여담

영국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빅토리아 여왕의 장손이자 에드워드 7세의 장남인 앨버트 빅터도 니콜라이 황태자와 똑같이 원래 영국의 차차기 왕위계승자[12]였다. 하지만 독감으로 요절하게 되면서 군인의 길을 걷던 동생 조지 5세가 왕위를 계승하게 되었고, 앨버트의 약혼녀인 테크의 메리와 결혼하게 되었다. 공교롭게도 두 사람은 니콜라이 황태자의 약혼녀 다우마 공주의 조카(언니의 아들들)이다. 즉 알렉산드르 3세는 앨버트 왕자와 조지 5세의 이모부가 된다.

조선에서도 효명세자가 비슷한 입지를 차지하고 있다. 아버지의 희망이였으나 요절한 것과 비슷하다.


[1] 동생 알렉산드르 3세(190cm)보다 크다.[2] 반대로 삼남 니콜라이 니콜라예비치 대공을 제외하면 모두 차남에게는 자신의 이름을 붙였다.[3] 최장신은 203cm인 6대조인 표트르 1세.[4] 니콜라이 황태자와 알렉산드르 3세의 동생들인 블라디미르 대공과 알렉세이 대공도 비슷한 키의 장신이였으며, 키가 190대 이상인 사촌들도 있다. 그 중에서 니콜라이 니콜라예비치 대공(1856년생)의 키는 무려 198cm로 황족들중에서 최장신이다.[5] 4대 로이히텐베르크 공작은 니콜라이 1세의 장녀이자 알렉산드르 2세의 여동생인 마리야 니콜라예브나 여대공외젠 드 보아르네의 막내아들, 막시밀리앵 드 보아르네 (또는 막시밀리안 폰 로이히텐베르크)의 아들이던 니콜라이 막시밀리아노비치 로마놉스키 공이었다. 즉, 니콜라이 황태자와 로이히텐베르크 공작은 서로 사촌인 셈.[6] 프랑스가 발상지인 보아르네 가문이 러시아에 자리잡게 된 이유는 꽤나 복잡한데 우선 외젠의 아내가 바이에른의 공주 아우구스테였던 탓에, 나폴레옹 전쟁이 끝나자 외젠은 아내와 함께 바이에른에 정착했고 그곳에서 장인 막시밀리안 1세 요제프에 의해 초대 로이히텐베르크 공작에 임명되었다. 이후 외젠의 후계자였던 2대 로이히텐베르크 공작, 오귀스트 드 보아르네는 포르투갈의 마리아 2세와 결혼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하는 바람에 외젠의 막내아들이자 오귀스트의 동생이던 막시밀리앵 드 보아르네가 3대 로이히텐베르크 공작이 되었다. 이후 막시밀리앵은 어머니의 반대를 이겨내고 니콜라이 1세의 장녀이자 알렉산드르 2세의 여동생인 마리야 니콜라예브나 여대공과 결혼했는데, 이때 니콜라이 1세가 둘의 결혼을 허락하면서 내건 조건이 장녀 부부가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떠나지 않는다는 것이었기 때문에 막시밀리앵은 러시아로 귀화하게 되었다. 니콜라이 1세는 사위에게 로마놉스키 공(Prince Romanovsky)이라는 작위와 함께 황실 전하(Imperial Highness) 경칭을 내렸고, 이후 막시밀리앵과 마리야 여대공의 후손들은 작위라고 하기엔 가문의 등급에 더 가까운 독일-러시아 특유의 작위 분할상속으로 인해 가문의 당주는 로이히텐베르크 공작 겸 로마놉스키 공(Duke of Leuchtenberg and Prince Romanovsky), 나머지 구성원들은 모두 로이히텐베르크 공자 겸 로마놉스키 공 (Prince of Leuchtenberg and Prince Romanovsky)을 칭했다.[7] 일설에 따르면 니콜라이 황태자가 자신의 사촌인 로이히텐베르크 공작을 궁으로 초청해 함께 레슬링을 즐기고 있었고 황태자의 남동생 알렉산드르 대공(사샤)은 평소처럼 구경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레슬링에 너무 몰입하다 보니 둘의 경기는 점차 과격해졌고 결국 니콜라이 황태자가 대리석 탁자 모서리에 등을 부딪혔다고 한다.[8] 또한 여우사냥 도중 낙마하는 바람에 뼈에 결핵균이 퍼졌다는 설도 있다.[9] 알렉산드르 2세는 장남인 니콜라이 황태자를 제외한 나머지 자녀들에겐 애정표현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물론 어머니도 그렇고.[10] 위에 언급된 것처럼 니콜라이 황태자는 건강체질이었음에도 단 1년만에 급격하게 건강이 악화되었다.[11] 아버지 알렉산드르 2세의 압박도 있었다. 원래 알렉산드르 3세는 연인이 있었다.[12] 당시에는 할머니 빅토리아 여왕이 살아서 왕위에 있었고 아버지 에드워드 7세는 아직 왕태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