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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fcd30><colcolor=#000> | |||
출생 | 1777년 12월 23일 | ||
러시아 제국 상트페테르부르크 | |||
사망 | 1825년 12월 1일 (향년 47세) | ||
러시아 제국 돈보이스코주 타간로크 (現 러시아 남부 연방관구 로스토프주 타간로크) | |||
묘소 | 페트로파블롭스크 성당 | ||
재위기간 | 전러시아의 황제 | ||
1801년 3월 23일 ~ 1825년 12월 1일 | |||
핀란드 대공 | |||
1809년 9월 17일 ~ 1825년 12월 1일 | |||
폴란드 차르 | |||
1815년 11월 27일 ~ 1825년 12월 1일 | |||
서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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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알렉산드르 파블로비치 로마노프 (Алекса́ндр Па́влович Рома́нов) | ||
아버지 | 파벨 1세 | ||
어머니 | 뷔르템베르크의 조피 도로테아 공녀 | ||
형제자매 | 첫째 남동생 콘스탄틴, 첫째 여동생 알렉산드라, 둘째 여동생 옐레나, 셋째 여동생 마리야, 넷째 여동생 예카테리나, 다섯째 여동생 올가, 막내 여동생 안나, 둘째 남동생 니콜라이[1], 막내 남동생 미하일 | ||
배우자 | 바덴의 루이제 공녀 (1793년 결혼) | ||
자녀 | 장녀 마리야, 차녀 옐리자베타 | ||
종교 | 러시아 정교회 | ||
신체 | 178cm[2], O형(Rh-)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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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러시아 제국의 황제이자 홀슈타인고토르프로마노프 왕조 제10대 황제.파벨 1세와 뷔르템베르크의 조피 도로테아 공녀의 장남이자 맏이. 황태제였던 콘스탄틴 파블로비치 대공과 정식 후임 황제인 니콜라이 1세의 큰형이다. 알렉산드르 2세의 큰아버지이자, 니콜라이 알렉산드로비치 황태자, 알렉산드르 3세의 큰할아버지, 러시아의 마지막 차르이자 로마노프 왕조 제14대 황제 니콜라이 2세의 큰증조할아버지이다. 또한 네덜란드 국왕 빌럼 3세의 큰외삼촌이기도 하다.
2. 생애
2.1. 출생과 어린 시절
어머니 예카테리나 2세와 사이가 안 좋던 파벨 1세와 마리야 표도로브나 황후 부부의 맏이이자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 파벨 1세가 태어나자마자 어머니 예카테리나 2세로부터 떨어져 당시 러시아 황제였던 옐리자베타 페트로브나 밑에서 키워졌듯이, 알렉산드르 1세도 동생인 콘스탄틴과 함께 태어나자마자 부모로부터 떨어져 할머니인 예카테리나 2세 밑에서 교육받고 자랐다.할머니와 함께 지내면서 제왕학 수업 및 자유주의적인 교육을 받았다고 전해지나 예카테리나 2세는 치세 말년에 터진 프랑스 혁명의 영향으로 본인도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처럼 폐위 후 처형당할지도 모른다는 위협을 느끼고 보수적으로 기울었고, 황실 교육은 상대적으로 널널한데다가 알렉산드르와 콘스탄틴 모두 이른 나이에 결혼으로 교육이 중단되어 깊은 수준의 교육을 받지는 못했다.[3]
2.2. 파벨 1세 암살 및 즉위
아버지인 파벨 1세는 약간의 정신 이상이 있었고[4] 피해망상이 암살 의심으로 발전했는데 정적들이 이를 이용하여 가족들이 파벨 1세를 암살한다는 헛소문을 내서 가족들을 궁정에서 내쫓기도 했다. 파벨 1세는 귀족들에게 인기가 많았던 예카테리나 2세 시절의 정책들을 파기해 귀족들의 특권을 제한하고 황제 중심적으로 바꾸려 했지만 즉위 5년만에 불만을 품은 팔렌 백작을 비롯한 귀족들이 주도한 반란에 휘말려 암살당했다. 그리고 얼떨결에 형제자매 중 맏이이자 파벨 1세의 적장남이었던 알렉산드르 파블로비치 로마노프 대공이 황위를 차지하여 러시아의 알렉산드르 1세가 되었다.이때 알렉산드르 1세는 많은 죄책감을 느꼈다. 그도 그럴 것이 아버지의 암살 계획을 그도 알고 있었다. 한 마디로 암살 모의에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딱히 적극적으로 막은 것도 아니었다. 또한 당시 상황은 아버지 파벨 1세도 가족들이 본인을 암살한다는 음모론에 빠져 황후이자 알렉산드르 1세의 친모인 마리아 표도로브나[5]와 이혼한 뒤 정부와 불륜을 저지르고 그 사이에서 난 아들들[6]의 계승권까지 박탈하고 차남이자 군사적 재능에 두각을 나타낸 첫째 남동생 콘스탄틴 파블로비치 대공을 편애하다 못해 황태자의 지위인 체사레비치 칭호를 수여하려고 했다. 알렉산드르 파블로비치 대공이 사전에 암살을 알고 있었고 일이 벌어지고 난 후 죄책감까지 느꼈음에도 암살을 막지 않은 것은 바로 적장남이자 맏이로서 황위를 되찾기 위해서였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그는 암살 후에도 미적지근한 모습을 보였는데, 본인을 위해 반란을 주도한 귀족들을 추방 혹은 처형하거나 포상하지 않는 식으로 잔인하게 토사구팽하지는 않고 면직만 시키는 가벼운 처벌로 사건을 마무리했다.
즉위교서에서 아버지 파벨을 추모한다고 했지만 어디까지나 사적으로만 아버지를 애도하고 공적으로는 할머니 예카테리나 2세의 정책을 따랐다. 다시 말해 아버지가 지운 예카테리나 대제의 업적과 정책들을 예카테리나 시절로 회귀시켰다. 어려서부터 친할머니 예카테리나 2세가 친부모 파벨 1세와 마리야 표도로브나로부터 직접 양육권을 빼앗아 장기간 동안 친부모보다 친할머니와 함께 지낸 추억이 많았기 때문에 아버지보다 할머니에게 우호적일 수밖에 없었다. 러시아 황제로서도 아버지의 업적보다 할머니 예카테리나 대제가 이룩한 업적들을 더 높게 평가했던 모양. 또한 자신의 아버지가 할머니의 사람이라는 이유로 개인적으로 매우 싫어해서 장례식 규모마저 축소시키면서까지 푸대접을 한 러시아 제국의 위대한 구국 영웅이자 할머니가 가장 총애하는 충신이었던 알렉산드르 수보로프 대원수[7]를 진심으로 존경했다. 수보로프 대원수를 추모하고 업적을 기리기 위해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마르스 광장에 거대한 조각상 건설을 지시하는 등 여러 모로 아버지와는 정치적으로는 완벽한 안티테제일 정도로 부자가 서로 상반되는 정반대 행보를 보인 셈이다.
애초에 아버지가 즉위 5년 만에 불명예스럽게 암살당한 원인이 황제로서 확고한 공사구분도 못하고 할머니 예카테리나 2세를 향한 개인적인 증오심과 정신 이상을 가정과 나랏일에까지 적용하려 들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극심한 의처증에 걸려 자길 도와준 둘째 부인 마리야 표도로브나와 멋대로 이혼하고 정부를 들이거나 맏이인 알렉산드르와 자기 남동생들의 계승권까지 박탈하는가 하면 예카테리나 대제의 업적들을 모조리 지워버리려는 시도로 귀족들의 격렬한 반발과 분노를 샀다. 본인도 인격적 결함이나 크게 저지른 잘못이 없는 엄연한 적장남임에도 형제들과 함께 황위 계승권을 박탈당할 뻔하는 억울한 피해를 입었다. 그만큼 파벨은 러시아 황제는 물론 남편이자 아버지로서도 하자가 많았고 같은 피해자로서 귀족들이 아버지를 죽일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이해하고 인정했던 것이다. 동시에 귀족들의 반란과 아버지의 죽음을 방조한 것에 대해 친모 마리야 표도로브나로부터 아버지 살해 의혹과 강한 질책을 들었다. 본인도 황위를 되찾기 위한 정당성 있는 반란이었고 아버지가 원인을 제공했으니 자업자득이라고 하지만, 재위 기간 내내 피붙이인 아버지를 죽였다는 상당한 책임감과 죄책감에 시달렸다.
이들이 아버지를 암살한 덕분에 본인이 잃어버린 계승권을 되찾고 러시아 황위에 오를 수 있었기 때문에 암살 사건의 가장 큰 방관자이자 수혜자가 된 본인도 이에 대해 마냥 떳떳하게 비난만 할 수 있는 처지는 아니었다. 할머니의 업적들을 지우고 본인의 계승권마저 박탈하려 든 아버지를 몰아낸 귀족들과 암살자들의 도움을 받아먹고도 이대로도 아버지이자 선황 파벨 1세를 기린다는 이유로 반 예카테리나 정책들을 계속 밀어붙이면 귀족들이 보복으로 또 무슨 짓을 저지를지 알 수 없었고, 본인이 황위에 오르게 된 계기인 반란의 명분도 무의미해지기 때문이다. 다만 할머니의 정책들로 회귀시켰으면서 아버지가 세운 여성의 즉위를 금지시키는 성차별적인 법안은 폐지하지 않고(...) 그대로 내버려두는 이중적인 모습도 보였고, 죄책감 탓인지 여러 모로 사이가 좋을 수 없는 큰아우 콘스탄틴 파블로비치 대공과 여전히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 노력하는 한편 정식으로 황태제로 삼아 곁에 두었다.[8][9]
1801년에 즉위했으나 예카테리나 2세 때부터 시작된 프랑스 혁명은 러시아 상류층에서도 걱정하고 있었는데, 하필 알렉산드르 1세가 즉위할 때 서유럽에서 떠오른게 이미 프랑스를 넘어 이 시기 유럽 역사의 아이콘이자 고유명사가 되어버린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였다. 여기서부터 자유주의자로 교육받아 왔지만 혁명의 물결에 맞서 이를 억압해야 하는 아이러니한 알렉산드르 1세의 치세가 시작되었다.
2.3. 나폴레옹 전쟁
나폴레옹과의 악연의 스타트를 끊게 만든 건 바로 아우스터리츠 전투였다. 러시아 제국은 제2차 대프랑스 동맹에서 1799년에 강화하고 나선 손을 빼고 있었는데 오스트리아에서 SOS를 치자 유럽의 균형을 위해 다시 참전했다. 알렉산드르는 군사 면에서 배운 바도 없었는 데다[10] 젊은 혈기로 미하일 쿠투조프의 말을 씹고 적을 가볍게 여긴 탓에 여기서 무참히 깨졌다. 이후 독일·폴란드 원정에서도 10만 대군을 파견하여 나폴레옹에 맞섰지만 프리틀란트 전투에서 패전하자 아우스터리츠에서의 호전성과 달리 군과 신하들의 반대를 거부하고 결국 틸지트 조약을 체결했다. 비록 패전하긴 했지만 러시아를 유럽 지배의 파트너로 삼고 싶어한 나폴레옹의 구상과 개인적 호감 등이 더해져서 양국은 명목상으론 동등한 대우를 받고 강화를 맺었다. 스웨덴 국왕 구스타브 4세 아돌프가 영국 쪽으로 기울자 러시아를 같은 편으로 묶어두려던 나폴레옹으로부터 핀란드 점유를 인정받자 스웨덴을 상대로 핀란드 전쟁을 일으켜 1809년 프레드릭스함[11] 조약으로 핀란드를 빼앗아 대공국으로 만들었다.하지만 대륙 봉쇄령은 러시아의 국익에 도움이 안 되었기 때문에 대륙 봉쇄령을 대놓고 씹으며 여전히 영국과 교역을 계속했고, [12] 거기다가 프랑스는 프랑스대로 대륙 봉쇄령을 강화하려고 라인강 서안의 영토에만 프랑스 제국 영토를 둔다는 합의를 나폴레옹이 깨고 라인강을 넘어 엘베강 하구의 항구까지 프랑스령으로 합병하는데 여기엔 외가 친척이 다스리는 올덴부르크 대공국도 포함되어 있었다.[13] 이에 항의하여 1811년 프랑스 대사 쿠라긴 공작을 소환했다. 결국 나폴레옹은 다음해 알렉산드르를 굴복시키기 위해 러시아 원정에 나섰는데 처음에는 무력시위 정도로 끝나겠지 하고 심각한 충돌이 일어날거라곤 예상치 못했다고 한다. 프로이센 왕국 국경 코앞인 빌나에서 댄스파티 중에 소식을 듣고 황급히 도주했으며 겨우 4일 후 빌나는 나폴레옹이 접수했다.
군사 분야는 황태제인 첫째 동생 콘스탄틴이 원래 담당했기 때문에 군무에는 전혀 아는 바가 없지만, 남북 전쟁 당시 정치인들이 북군에게 했던 것 마냥 궁정에서 일일이 장군들을 컨트롤하다가 여러 병크를 겪은 후 결국 신하들의 간청에 총사령관을 임명하는데 1군 사령관이자 군무장관이던 바클라이 드 톨리[14]를 임명했으나 어디까지나 바지사장이었다. 러시아 원정의 승인으로 꼽히는 청야전술을 전혀 이해도 못하고 승인하지도 않았다. 거점이 적에게 넘어갈 때마다 총사령부를 질책했고 사사건건 전술에 간섭했다. 결국 스몰렌스크가 함락되고 나선 드 톨리를 경질하고 러시아인 쿠투조프를 그 자리에 앉혔다.[15] 그러나 이후에도 간섭은 그치지 않아 쿠투조프가 모스크바를 포기할 때부터 나폴레옹을 추격할 때까지 사사건건 전술은 물론 인사문제까지 시어머니마냥 간섭했다. 심지어 쿠투조프의 참모장 레온티 레온티예비치 베니히센[16][17]을 첩자로 활용하여 총사령부의 동향을 감시했고 동생 콘스탄틴 대공을 보내 군권을 인수하려고도 했으니 군사적으론 거의 똥별이나 다름없었다.
1813년 초반엔 새로운 징집에 반대하고 국경 밖에서 싸움엔 이길 확률이 떨어진다 하여 새 전쟁을 반대하는 쿠투조프를 경질하려 했으나 국가 원로에다 큰 공을 세웠기에 박대는 했지만 경질은 못하는데 쿠투조프가 쇠약해져 알아서 사망하자 비트겐슈타인을 새로 임명했으며 이후 비트겐슈타인이 또 삽질을 하자 이전에 이용해먹고 버렸던 바클라이 드 톨리를 다시 임용했다.
드레스덴 전투 때는 동맹국이 승기를 잡아 프랑스군을 공격하면 승리할 확률이 높았는데 알렉산드르가 참관하러 온다고 하루를 기다리는 바람에 공격 투입시기를 놓쳐서 패전.
그러나 결국 라이프치히 전투에서 프랑스군에게 괴멸적인 타격을 입히고 나폴레옹을 몰락시켰다. 그리고 1814년, 드디어 파리에 입성했다.
2.4. 나폴레옹 시대 이후 빈 체제
유럽의 해방자라고 불리며 열렬한 지지를 받은 알렉산드르 1세는 당연히 빈 회의에서 오스트리아 제국의 클레멘스 폰 메테르니히, 영국의 외무장관이자 캐슬레이 자작인 로버트 스튜어트[18]와 함께 가장 큰 영향을 발휘하였다. 빈 회의에서 러시아가 폴란드 전체를 차지하고 프로이센령 폴란드를 러시아에 넘기는 대신 프로이센이 작센 왕국을 모두 차지하려 결탁하였으나 러시아의 힘이 커지는 것을 원하지 않은 오스트리아와 영국이 견제하였기 때문에 어느 정도 입장을 굽힐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폴란드 대부분을 차지하고 아무도 원하지 않았던 신성 동맹을 결국 체결시키며 크림 전쟁 때까지 유럽에서의 대규모 전쟁을 막아낸다.하지만 신성 동맹 제의에서 알 수 있듯이 알렉산드르 1세는 젊을 적 시기의 자유주의와 계몽주의에 크나큰 실망을 하게 되었고, 이후 대표적인 반동 군주로 알려졌다. 예를 들어 초기엔 계몽주의 성향이었던 스페란스키를 중용하고 정부를 체계화하는데 주력했지만, 이후 보수적인 아렉쳬예프를 중용하여 정책을 180도 돌린다. 거기에 미신 같은 것에 빠져들었다고 하니,[19] 안 그래도 상대적으로 막장이었던 기존의 절대군주 체제와 러시아 사회 구조에 불만이 쌓인 것도 당연했다.
하지만 알렉산드르 1세는 일단은 러시아의 구국 영웅이었기 때문에 재위 중엔 혁명은 모두 꿈도 못 꿨다. 그러나 나폴레옹 전쟁 이후 정신적으로 거세파라는 사이비종교에 경도되어서 성욕을 죄라고 생각하게 되며 성관계를 하지 않았다. 그는 러시아의 옐리자베타 알렉세예브나 황후와의 사이에서 두 딸인 장녀 마리야 알렉산드로브나 로마노바 여대공과 차녀 옐리자베타 알렉산드로브나 로마노바 여대공만을 남겼고 딸들은 둘 다 요절했고 당시 러시아 제국의 법률상 계승할 수 없었다. 파벨 1세가 예카테리나 2세와의 악연으로 여성의 황위 계승권 인정과 즉위를 금지시킨 탓에 여대공은 맏이라고 해도 법적으로 황태녀 책봉 및 황위 계승이 불가능했고, 알렉산드르 1세 본인도 즉위 초기 정책들을 예카테리나 시절로 되돌렸지만 이 법안만큼은 폐지할 의지와 노력이 없었다. 옐리자베타 황후와는 젊은 시절에는 정부인 마리야 나리쉬키나에게 애정을 쏟을 만큼 서로에게 무관심한 형식적인 쇼윈도 부부 관계었다.
그러나 중년기에 진입하면서 몇 차례에 걸친 나폴레옹 전쟁으로 인한 고뇌가 심해진 알렉산드르 1세는 자유주의 및 계몽주의에서 반동주의로 노선을 틀고 마리야 나리쉬키나와 헤어지면서 부부가 서로를 진심으로 사랑하게 되었고 관계를 회복했다. 하지만 사이가 좋아졌을 때는 루이제도 나이를 많이 먹었고 건강도 좋지 않아서 더 이상 출산이 어려웠다고 한다. 이렇게 옐리자베타 황후와의 슬하에 딸들도 요절했고 아들도 없었기에 이대로 러시아의 황위는 아버지 파벨 1세가 황태자로 책봉하려 한 큰아우이자 황태제인 콘스탄틴 파블로비치 대공에게 승계될 예정이었다.
결국 알렉산드르 1세가 죽자마자 황태제였던 둘째 동생 콘스탄틴을 황제로 추대하려는 데카브리스트의 난이 일어났다. 그런데 콘스탄틴 대공은 1820년 귀천상혼을 하고 자신의 계승권을 포기했다. 그래서 17살 연하의 아들뻘 동생 니콜라이 파블로비치 대공에게 양위하였다. 그리고 데카브리스트의 난을 진압하며 즉위한 알렉산드르의 셋째 동생 니콜라이 1세는 러시아의 반동 체제를 더욱더 굳건히 하게 된다.
아이러니하게도 데카브리스트 반란을 주도한 자들은 대부분 알렉산드르 1세가 세운 대학들에서 지식을 배운 학생들이었거나 알렉산드르가 나폴레옹 역관광시킬 때 파리로 데려가 파리물을 먹고 온 젊은 장교들이었다. 결국 알렉산드르 1세는 후반기 통치를 통해 절대왕정을 고수하는 정책을 세우지만, 19세기 후반에 러시아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키는 러시아의 인텔리겐치아 계층 역시 알렉산드르에 의해 태어난 것이다. 여기서 우여곡절은 니콜라이 1세 문서 참고.
참고로 나폴레옹 전쟁을 다룬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에도 등장하는데, 역시나 관대하지만 무능한 인상이다.
2.5. 표도르 쿠즈미치 전설
공식적으로는 크림 반도로 요양을 가 있는 도중에 사망했다는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러시아에서는 알렉산드르 1세가 사실 크림 반도에서 사망하지 않고 은둔하여 성직자가 되었다는 전설이 널리 퍼져있다. 19세기 시베리아에서 활동했던 정교회 성직자이자 훗날 러시아 정교회의 성인으로 시성된 표도르 쿠즈미치(Фёдор Кузьмич)가 사실 은둔한 알렉산드르 1세라는 이야기다. 알렉산드르 1세는 부황인 파벨 1세 암살에 직·간접적으로 개입했던 일에 대한 죄책감과 젊었을 적 자신이 품었던 계몽주의, 자유주의적 통치의 꿈과 달리 빈 체제 이후 자신이 직접 반동 정책을 펼치게 되면서 겪게 된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나타난 내적 갈등, 1824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대홍수로 발생한 시민들의 막대한 인명 피해를 목격하고 난 뒤에 든 절망감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현실 정치에 큰 환멸을 느꼈다고 한다. 재위 말년에 황제는 황후와 측근들에게 평범한 시민이 되어 스위스에서 살고 싶다고 이야기하거나 수도원으로 가서 성직자와 장시간 독대를 하는 등 권력에 대한 미련을 버리는 모습을 보였다.그 후 알렉산드르 1세는 황후와 함께 크림 반도로 요양을 가고 곧 사망하였다. 하지만 알렉산드르 1세가 사망할 무렵 그때까지 계속 써 왔던 황후의 일기가 비어 있었고 임종 의식도 제대로 치러지지 않는 등 수상한 조짐들이 보이기 시작하였다. 더군다나 임종 당일에 황제의 건강은 그렇게 나쁜 편이 아니었다.
황제의 최측근들 역시 미심쩍은 모습을 보였는데 알렉산드르 1세의 사망 후 측근들이 황제의 관을 여는 것을 거부했으며[20], 주치의는 황제의 사망 증명서에 서명하는 것을 거부했다.
얼마 뒤 시베리아에서는 표도르 쿠즈미치라는 노인이 출현하였는데, 치유 능력으로 유명세를 펼치기 시작하였다. 놀랍게도 이 성직자의 행동 거지나 모습이 10년 전에 죽은 알렉산드르 1세와 똑같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심지어 알렉산드르 1세의 하인이 표도르 쿠즈미치를 만난 후 "이 분은 선황이셨던 알렉산드르 1세 폐하이시다."라는 말을 할 정도로 모습이 흡사했다고 한다. 농노 출신이라는 사람이 궁정 예법을 잘 알고 있었고 알렉산드르 1세의 파리 입성에 대해서도 너무나 잘 알고 있었으니 논란이 될 만 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표도르 쿠즈미치가 알렉산드르 1세라는 소문이 러시아 전역에 쫙 퍼졌다. 그 후 이러한 소문에 부담을 가진 쿠즈미치가 은거한 후에는 이게 사실인지 아닌지 확인이 불가능하게 되었다. 후일 조사한 것에 따르면 알렉산드르 1세의 관은 텅 비어 있었다고 한다. 출처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도 2012년 1월 8일에 이 전설을 방영했다. 여기서는 성직자가 아니라 광부로 등장한다.
3. 여담
- 나폴레옹과 싸운 전쟁이 제일 유명하지만 남쪽으로 동유럽과 캅카스 지방을 점령하여 러시아의 영토를 넓히기도 했다. 강대국에서 호구로 바뀌어가던 오스만 제국을 여러차례 털어먹은 결과 1812년 부쿠레슈티 조약으로 프루트강 동쪽의 몰다비아 공국 영토를 할양받아 베사라비야 현을 설치했다.[21] 심지어 캅카스 산맥 남쪽에 영향력을 행사하던 페르시아도 쳐바르며 캅카스 일대의 소국들을 각개격파 하였고 이때 정복한 땅들은 러시아의 중요한 거점이 되었다.[22] 그리고 체첸과 러시아의 피로 얼룩진 갈등의 역사가 시작한 장본인이다.
[1] 다음 황제[2] 아버지 파벨 1세(166cm)보다 크다.[3] 어쨌든 이러한 전제군주제의 황제답지 않은 초기의 자유주의성향과 아래의 수보로프를 향한 강한 존경심은 나폴레옹과 알렉산드르 1세가 서로에게 어느 정도 개인적인 호감과 공감대를 품고 동맹을 체결하는 계기로 작용한다. 비록 원수 관계인 두 사람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진지하게 둘이 동성 연인이 아니냐는 소문이 전 유럽적으로 돌았을 정도로 인간적인 호의와 관심도도 높았다. 또한 알렉산드르 1세는 프랑스 제1제국 황후이자 나폴레옹의 전처 조제핀 드 보아르네와도 절친 사이였다. 나폴레옹의 몰락 이후에도 사교계의 여왕다운 뛰어난 처세술과 지혜로 공작부인이 된 조제핀이 말메종 저택에서 무도회를 열자 초청을 받고 친히 찾아갔는데, 사적으로 만나 둘이서 즐거운 대화와 여가를 보냈다. 이때는 나폴레옹이 라이프치히 전투에서의 처절한 패배를 계기로 엘바 섬으로 유배를 간 데다, 불임이 된 조제핀과 이혼하고 황태자를 낳기 위한 정치적 이유로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루도비카와 재혼한 상태임에도 마치 조제핀이 아직도 나폴레옹의 황후인 것처럼 순수한 존경과 예우를 표했다.[4] 지금에 와선 훗날 정적들에게 과장된 면이 많다고 한다.[5] 본명은 뷔르템베르크의 조피 도로테아 공녀.[6] 자신과 둘째 남동생, 셋째 남동생, 막내 남동생[7] 한국에 비유하면 '러시아의 이순신 장군'이나 다름 없을 정도로 불패의 명장이다. 알렉산드르 1세의 숙적이자 라이벌, 개인적 호감의 대상이기도 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도 본인이 가장 존경하는 인류사에 길이 남을 전설적인 명장 중 하나로 꼽았다.[8] 이것 때문에 종증손며느리인 알렉산드라 표도로브나 황후가 시어머니이자 종손며느리인 마리야 표도로브나 황태후로부터 빨리 아들을 낳으라는 부당한 시집살이와 압박에 시달려야 했다.[9] 올가, 타티야나, 마리야, 아나스타시야 여대공을 비롯한 네 딸들을 낳고 막내아들인 알렉세이 황태자를 보게 되었다. 만일 알렉산드르 1세가 여성의 즉위를 금지시키는 법안도 폐지했다면 종증손 니콜라이 2세의 맏이이자 장녀 올가 여대공이 예카테리나 2세 이후 오랜만의 차리나이자 차기 러시아 황제가 되었을 것이다. 알렉산드라 황후는 헤센 대공국의 공녀로 예카테리나 2세처럼 독일인 출신 황후이기도 하다.[10] 군대는 동생 콘스탄틴 대공이 군인 교육을 받고 황실을 대표하여 담당했다. 물론 그렇다고 콘스탄틴 대공이 전쟁에 도움이 많이 됐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유능한 스코틀랜드 출신 독일 태생의 바클라이 드 톨리를 헐뜯는 등 전쟁 전반에 걸쳐서 형처럼 똥별 짓을 더 많이 했다.[11] 현재 핀란드 하미나.[12] 러시아는 산업이 낙후되어 수입을 하려면 곡물을 수출해야 하는데, 산업 혁명으로 농산물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어난 영국과의 교역이 끊긴다면 러시아에게 큰 손실이었다.[13] 나폴레옹이 청혼한 넷째 여동생 예카테리나 파블로브나를 여기에 시집보내기도 했다. 예카테리나는 이종사촌인 올덴부르크 공작 게오르크와 결혼해 두 아들을 낳았다.[14] 발트 태생으로 조상은 스코틀랜드계다. 러시아군 주류와 달리 청야전술을 시도해서 표트르 바그라티온을 비롯한 주전파와 극심한 갈등을 빚었고 미하일 쿠투조프도 처음엔 드 톨리를 무지하게 깠다. 독일에서 망명한 외국인 출신 장교들을 등용했으며 여기엔 카를 폰 클라우제비츠도 있었다. 현재에는 그의 전술이 옳다고 하지만 당시엔 외국인에 대한 배타적 감정과 청야전술로 겁쟁이 독일인이라 무지하게 까여서 결국 해임되나 총사령관만 해임되고 1군은 계속 맡는다.[15] 쿠투조프는 원래 청야전술에 부정적이었고 "한번도 싸워보지도 않고 모스크바를 내주진 않겠습니다." 하고 황제를 안심시켰는데 실상 실무를 맡고보니 생각이 달라져서 나중엔 "모스크바는 싸워보고 포기한다는거지 포기 안한다고 하진 않았는데요?" 드립을 쳤다.[16] 독일 출신으로 아버지 파벨 1세의 암살과 관련이 있었다. 프리틀란트 전투의 지휘관이었는데 레프 톨스토이의 평으론 지휘보단 전투보고서 작성 실력이 월등히 높아 문관이 어울릴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았다.[17] 실제로도 베니히센은 나폴레옹의 책략에 크게 낚여 프리들란트 전투에서 아일라우에서 얻은 이점을 상당부분 날려 먹었다. 비록 상대가 나폴레옹이었다고 쳐도 이때 베니히센의 지휘는 상당히 졸렬했기에 러시아에서도 크게 까여 결국 베니히센은 짤리게 된다.[18] 제2대 런던데리 후작이기도 했다.[19] 나폴레옹 전쟁 이전에는 종교에 무관심했지만, 나폴레옹 전쟁을 치르면서 열렬한 종교인이 되었고 말기엔 광신자라고 불러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수준이었다. 러시아 원정에서 나폴레옹이 이끈 프랑스 대군을 몰아낸 다음 프랑스 본토로 진군하는 도중에는 길에서 잠시 쉬는 시간마다 성경을 꺼내서 읽을 정도로 변했다. 심지어 인간이 성욕을 끊어야 구원을 받는다는 황당한 사이비 종교인 거세파의 교리에도 깊은 관심을 가지기까지 했다.[20] 출처 : "알렉산드르 1세의 후기 생애" 한국 브리태니커 온라인.[21] 러시아 제국 입장에서는 영토 확장이나, 역설적으로 민족주의가 강성한 오늘날의 입장에서 보면 루마니아와 몰도바가 갈라지는 원인을 제공한 셈이다.[22] 사실 제정 러시아의 기본 강령이었던 남하정책의 일환으로 200여년에 걸쳐 지속적으로 이뤄지던 일이다. 이때 호되게 털린 오스만과 페르시아는 나폴레옹에게 사절단을 보내어 "러시아 좀 막아줘요!" 하며 사정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 결과는 비참했는데 파트 알리 샤 카자르 문서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