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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27 07:32:33

바덴의 루이제 공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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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000> 로마노프 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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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러시아 황제 }}}}}}}}}

<colbgcolor=#E7E1C0,#B0AC92><colcolor=#000000> 러시아 제국 알렉산드르 1세의 황후
바덴의 루이제 공녀
Prinzessin Luise von Baden
파일:Elizaveta_Alekseevna,_by_Jean-Laurent_Mosnier(1805).jpg
이름 독일어 루이제 마리 아우구스테
(Luise Marie Auguste)
러시아어 옐리자베타 알렉세예브나
(Елизавета Алексеевна)
출생 1779년 1월 24일
바덴 변경백국 카를스루에
사망 1826년 5월 16일 (향년 47세)
러시아 제국 벨료프
배우자 알렉산드르 1세 (1793년 결혼 / 1825년 사망)
자녀 마리야, 옐리자베타
아버지 바덴의 카를 루트비히 공세자
어머니 헤센다름슈타트의 아말리
형제 아말리, 카롤리네, 프리데리케, 마리, 카를 프리드리히, 카를, 빌헬미네
종교 루터교회러시아 정교회
1. 개요2. 작위3. 생애
3.1. 유년기3.2. 러시아의 대공비3.3. 러시아의 황후3.4. 말년
4. 가족관계
4.1. 조상4.2. 자녀
5. 여담

[clearfix]

1. 개요

러시아 제국의 황제 알렉산드르 1세의 황후. 바덴 변경백 카를 프리드리히의 후계자였던 카를 루트비히와 헤센다름슈타트의 아말리[1]의 셋째 딸이다.

바이에른 왕국 막시밀리안 1세 요제프의 왕비 바덴의 카롤리네의 동생이며 스웨덴의 프레드리카 왕비바덴 대공 카를, 헤센의 대공비 빌헬미네의 손윗누이다.

또한 알렉산드르 2세의 큰어머니이자, 헤센 대공 루트비히 3세, 헤센의 마리[2], 헤센의 알렉산더 공자, 프로이센의 왕비 엘리자베트 루도비카, 오스트리아의 조피 대공비, 바덴의 대공비 조피의 이모이면서 네덜란드의 국왕 빌럼 3세와 독일 제국의 황후 아우구스타의 큰외숙모이다.[3]

2. 작위

파일:1156px-Coat_of_Arms_of_Empress_Elizabeth_Alexeievna_of_Russia_(Order_of_Maria_Luisa).svg.png
<colbgcolor=#E7E1C0,#B0AC92> 문장

3. 생애

3.1. 유년기

파일:Louise_of_Baden_in_childhood,_by_Augustin_Ritt,_1791.jpg
어린 시절의 루이제, 1791년

1779년 1월 24일에 바덴의 카를 루트비히의 셋째 딸로 태어났다. 유달리 작고 연약하게 태어나 얼마 못 살 것으로 추측되었으나, 모두의 염려와는 다르게 숙녀로 자랐다. 루이제는 따뜻한 가정환경에서 좋은 교육을 받으며 자랐다. 수줍음 많고 친절한 성격의 루이제는 아몬드 모양의 푸른색 눈과 곱슬거리는 금발, 우아한 몸가짐을 가지고 있었다. 루이제는 유럽에서 아름답기로 손꼽히며 이상적인 신붓감으로 여겨졌다.

1792년 10월에 미래의 알렉산드르 1세가 되는 알렉산드르 파블로비치 대공의 신붓감 후보로 동생 프리데리케와 함께 상트페테르부르크로 향했다. 알렉산드르 1세의 할머니인 예카테리나 2세는 아름다운 루이제를 무척 맘에 들어했다. 루이제는 키가 크고 잘생긴 알렉산드르를 보고 한눈에 반했으며, 알렉산드르 또한 루이제에게 사랑을 느끼게 되었다. 몇달 뒤 두 사람은 약혼했다. 루이제는 러시아 정교회로 개종하고 러시아식 이름인 '옐리자베타 알렉세예브나'로 개명하며 결혼을 준비했다.

3.2. 러시아의 대공비

파일:Empress_Elisabeth_Alexeievna_by_Vigee-Le_Brun_(1795,_Castle_of_Wolfsgarten).jpg
러시아의 옐리자베타 알렉세예브나 대공비, 1795년

1793년 9월 28일, 14살의 루이제는 한 살 연상인 알렉산드르 파블로비치 대공과 결혼했다. 불행히도 어리고 순진한 루이제는 러시아 궁정에 쉽게 적응하지 못했다. 고향에 비해 러시아 궁정은 매우 화려하고 엄격했으며, 동시에 문란했다. 일단 당시 황제이자 루이제의 시할머니인 예카테리나 2세부터 남성 편력이 화려하기로 유명했다. 그리고 궁인들은 부정한 행동을 아무렇지도 않게 했다. 한번은 예카테리나 2세의 애인 주보프가 어린 루이제를 유혹하려 든 적도 있었다. 혼란스러운 궁정에서 겉돌던 루이제는 동생 프리데리케가 고향으로 돌아가자 향수병에 시달리며 우울해했다.

루이제는 사랑하는 남편과 함께 있을 때만 편안함을 느꼈다. 이 시기에 루이제는 어머니에게 보내는 편지에 "나를 유일하게 행복하게 해주는 존재인 남편이 없었다면 나는 천 번은 죽었을 거에요."라고 써서 보냈다.

그러나 부부의 애정은 오래가지 못했다. 루이제는 결혼한 지 5년이 넘는 기간 동안 한 번도 아이를 갖지 못했으며, 시아버지인 파벨 1세와 사이가 안 좋았다. 그러던 중 동생 프리데리케스웨덴 국왕 구스타브 4세 아돌프와 결혼하면서 루이제는 난처한 처지가 되었다. 구스타브 4세 아돌프는 과거에 루이제의 시누이인 알렉산드라 파블로브나 여대공과 혼담이 있었다. 그러나 개종 문제로 갈등을 빚다가 약혼을 거절했고, 이 때문에 러시아 황가의 체면이 크게 손상되었다.[4] 그런데 루이제의 동생이 그런 구스타브 4세 아돌프와 결혼하면서 루이제는 시댁 식구들의 따가운 눈초리를 받았다. 이처럼 여러 문제가 있는 상황 속에서 루이제와 알렉산드르의 사이는 점점 멀어졌다. 그리고 애정이 식은 부부는 각자 애인을 두기 시작했다.

1796년에 루이제는 남편의 친구이자 폴란드 귀족인 아담 차르토리스키와 교제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3년 뒤인 1799년에 드디어 첫 아이를 낳았다. 부모는 모두 금발에 파란 눈이었으나 아기는 검은 머리카락과 검은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다. 궁인들은 아이의 머리카락과 눈 색깔이 차르토리스키와 같다고 수군거렸다. 아기는 돌이 지나고 한 달 만에 사망했다. 부부는 크게 낙담해 서로를 위로했다.

3.3. 러시아의 황후

파일:Elizaveta_wife_of_tsar_Alexander_I_by_Mosnier.jpg
러시아의 황후 옐리자베타 알렉세예브나, 1805년

1801년에 파벨 1세가 암살당하고 알렉산드르 파블로비치가 알렉산드르 1세로 즉위했다. 황후가 되었으나 궁에서 루이제의 입지는 좁았다. 실권은 시어머니인 마리야 표도로브나에게 있었고, 남편의 사랑은 알렉산드르 1세의 정부 마리야 나리쉬키나가 독차지하고 있었다. 알렉산드르 1세는 루이제를 형식적으로 대했다.

1806년 11월 15일, 루이제는 딸 옐리자베타를 낳았다. 그러나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궁중에서는 아기가 루이제의 연인 오코토니코프 장교의 아이라는 소문이 퍼졌다. 그리고 옐리자베타 또한 유아기를 넘기지 못하고 사망했다. 부부는 슬픔을 나누면서 잠시동안 가까워졌다. 루이제는 아직 20대였으나 건강이 좋지 않았고, 알렉산드르 1세와 루이제는 더 이상 아이를 가지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부부는 신의 뜻에 따라 아이를 가지려고 애쓰지 않기로 했다.

나폴레옹 전쟁 이후 알렉산드르 1세는 신비주의 종교에 빠져들었다. 이 때문에 성욕을 죄악처럼 여기게 된 알렉산드르 1세는 1818년에 마리야 나리쉬키나와 헤어졌다. 부부는 함께 있는 시간이 늘어났고, 서로를 이해하게 되면서 화해했다. 가장 아름답던 젊은 시절 서로를 경원시하던 두 사람은 중년에 들어서서 서로를 진심으로 사랑하게 되었다. 이때 루이제는 어머니에게 보내는 편지에 마치 자신이 알렉산드르의 정부가 된 것 같은 느낌이 든다고 하며 남편에게 사랑받는 행복을 드러냈다.

3.4. 말년

1825년에 루이제의 건강이 크게 나빠졌다. 의사들의 권유에 따라 황제 부부는 타간로크로 요양을 떠났다. 요양지에서 두 사람은 소박한 거주지에 머물렀다. 그런데 1825년 겨울에 건강하던 알렉산드르 1세가 갑자기 앓더니 발진티푸스로 사망했다. 루이제는 큰 충격을 받고 상실감에 빠졌다.

알렉산드르 1세가 사망한 다음 해인 1826년 5월 16일, 루이제는 심부전으로 숨을 거두었다.

4. 가족관계

4.1. 조상

본인 부모 조부모 증조부모
바덴의 루이제
(Louise of Baden)
<colbgcolor=#FFF3E4,#331c00> 바덴의 공세자 카를 루트비히
(Karl Ludwig, Hereditary Prince of Baden)
<colbgcolor=#FFFFE4,#323300> 바덴 대공 카를 프리드리히
(Karl Friedrich, Grand Duke of Baden)
<colbgcolor=#E4FFEC,#00330f> 바덴두를라흐의 프리드리히
(Friedrich, Hereditary Prince of Baden-Durlach)
나사우디츠의 아멜리
(Princess Amalia of Nassau-Dietz)
헤센다름슈타트의 카롤리네 루이제
(Princess Caroline Louise of Hesse-Darmstadt)
헤센다름슈타트 방백 루트비히 8세
(Ludwig VIII, Landgrave of Hesse-Darmstadt)
하나우리히텐베르크의 샤를로테 여백작
(Countess Charlotte of Hanau-Lichtenberg)
헤센다름슈타트의 아말리
(Princess Amalie of Hesse-Darmstadt)
헤센다름슈타트 방백 루트비히 9세
(Ludwig IX, Landgrave of Hesse-Darmstadt)
헤센다름슈타트 방백 루트비히 8세
(Ludwig VIII, Landgrave of Hesse-Darmstadt)
하나우리히텐베르크의 샤를로테 여백작
(Countess Charlotte of Hanau-Lichtenberg)
팔츠츠바이브뤼켄의 카롤리네 여백작
(Countess Palatine Caroline of Zweibrücken)
츠바이브뤼켄 궁정백 크리스티안 3세
(Christian III, Count Palatine of Zweibrücken)
나사우자르브뤼켄의 카롤리네 여백작
(Countess Caroline of Nassau-Saarbrücken)

4.2. 자녀

자녀 이름 출생 사망 배우자 / 자녀
1녀 마리야 알렉산드로브나 여대공
(Grand Duchess Maria Alexandrovna)
1799년 5월 29일 1800년 7월 8일
2녀 옐리자베타 알렉산드로브나 여대공
(Grand Duchess Elizabeth Alexandrovna)
1806년 11월 15일 1808년 5월 12일

5. 여담



[1] 어머니 아말리의 여동생이자 루이제의 이모인 헤센다름슈타트의 빌헬미네는 파벨 1세의 전처였다. 러시아식 이름으로 나탈리야 알렉세예브나(Наталья Алексеевна). 또다른 이모인 프리데리케 루이제는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의 왕비이다.[2] 아랫동서 알렉산드라 표도로브나 황후의 큰며느리.[3] 빌럼 3세는 루이제의 막내 시누이 안나 왕비의 장남이고, 아우구스타는 셋째 시누이 마리야의 차녀였다.[4] 심지어 정중하게 거절의 뜻을 전한 것도 아니고 약혼 발표날에 약혼식장에 나타나지 않았다(...). 덩그러니 남겨진 알렉산드라와 러시아 황가의 어른들은 이 일로 큰 충격을 받았다. 오죽하면 예카테리나 2세의 죽음을 앞당긴 원인이라는 설이 있을 정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