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모에 미러 (일반/어두운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10-27 04:22:29

안나 파블로브나 여대공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0 0;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ff9900, #ffba49 20%, #ffba49 80%, #ff9900); color: #192b6c; min-height: 31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rowcolor=#192b6c> 빌럼 1세 빌럼 2세 빌럼 3세 빌럼알렉산더르
프로이센의 빌헬미네 러시아의 안나 파블로브나
1
뷔르템베르크의 조피
2
[[발데크피르몬트의 에마|발데크피르몬트의 에마]]
막시마 소레기에타 세루티
}}}}}}}}}
<colbgcolor=#F2B3A9><colcolor=#252525> 네덜란드 빌럼 2세의 왕비
러시아의 안나 파블로브나 여대공
Великая княгиня Анна Павловна России
파일:Anna_holland_királyné.jpg
이름 러시아어 안나 파블로브나 로마노바
(Анна Павловна Романова)
네덜란드어 아나 파울로브나 로마노브
(Anna Paulowna Romanov)
출생 1795년 1월 18일
러시아 제국 상트페테르부르크
사망 1865년 3월 1일 (향년 70세)
네덜란드 헤이그
배우자 빌럼 2세 (1816년 결혼 / 1849년 사망)
자녀 빌럼 3세, 알렉산더르, 헨드릭, 에른스트 카시미르, 소피
아버지 파벨 1세
어머니 뷔르템베르크의 조피 도로테아 공녀
형제 알렉산드르 1세, 콘스탄틴, 알렉산드라, 옐레나, 마리야, 예카테리나, 올가, 니콜라이 1세, 미하일
종교 러시아 정교회
1. 개요2. 작위3. 생애
3.1. 러시아의 공주3.2. 오라녀 공비3.3. 네덜란드의 왕비3.4. 왕대비
4. 가족관계
4.1. 조상4.2. 자녀
5. 여담

[clearfix]

1. 개요

네덜란드의 국왕 빌럼 2세의 왕비이자 룩셈부르크의 대공비. 빌럼 3세의 어머니이자 빌헬미나 여왕의 친할머니이다.

네덜란드의 왕비보다 러시아 제국의 여대공으로 기억되었으며, 정치적으로 영향을 행사하지 않았지만 자선 활동에 집중했다고 알려진 인물이다.

2. 작위

파일:Coat of Arms of Anna, Queen of the Netherlands.svg 파일:Coat_of_Arms_of_Anna_of_Russian,_Queen_of_the_Netherlands.svg.png파일:Royal Monogram of Queen Anna Pavlovna of the Netherlands.svg
러시아에서의 문장 네덜란드에서의 문장 모노그램

3. 생애

3.1. 러시아의 공주

파일:Anna Pavlovna, Queen of the Netherlands.jpg
러시아의 여대공 안나 파블로브나, 1813년
러시아 제국의 황제 파벨 1세의 6녀이자 막내딸로 태어났다. 증조할머니인 안나 페트로브나의 이름을 따서 안나라고 이름 지어졌다. 안나가 태어나고 이듬해인 1796년에 아버지 파벨 1세가 황위에 올랐다. 그러나 안나가 6살이 되던 1801년에 파벨 1세는 암살당했다.

러시아의 공주로서 안나는 다른 형제들과 함께 훌륭한 교육을 받았다. 안나는 오빠와 언니들 중 알렉산드르 1세, 마리야 파블로브나 여대공과의 관계와 매우 우호했고, 자신의 남동생들인 니콜라이 대공, 미하일 대공과의 사이가 각별했다. 하지만 자신의 자매들 중 가장 미인이자 부모에게서도 가장 사랑받는 딸이었던 바로 윗 언니 예카테리나를 질투해서 사이가 안 좋았다고 한다.

1809년에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로부터 청혼을 받았다. 사실 나폴레옹은 처음에는 안나의 언니인 예카테리나에게 청혼했다. 하지만 마리아 표도로브나 황태후[1] 예카테리나를 나폴레옹에게 시집보내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고 유럽의 소문난 깡패였던 나폴레옹을 거절할 수도 없었기에, 급히 예카테리나를 올덴부르크의 공자에게 시집보냈다. 그러자 나폴레옹은 안나와의 결혼을 제안했다. 러시아에서는 안나의 나이가 어리니 그녀가 다 크면 시집을 보내겠다고 나폴레옹에게 천천히 편지를 보냈다.[2] 그러나 후계자가 급했던 나폴레옹은 편지가 도착하기도 전에 오스트리아마리아 루도비카에게 청혼했다.

시간이 흘러 결혼 적령기가 된 안나에게 프랑스영국의 왕자들과의 혼담이 오갔다. 그러나 종교적인 이유로 이 혼담은 취소되었다. 1816년, 빈 회의에서 오빠 알렉산드르 1세는 우호를 위해서 동생과 네덜란드 국왕의 후계자와의 결혼을 제안한다. 바로 빌럼 1세의 아들인 오라녀 공 빌럼이었다. 하지만 결혼을 강요할 수는 없었기에 결국 빌럼은 러시아로 가서 안나랑 선을 보게 된다. 안나는 그와 대화를 해보고 결국 그와 결혼하기로 마음먹었다.
이후 안나가 러시아 정교회로 종교를 유지하고 자식들은 개신교로 키운다는 합의 하에 당시 오라녀 공이었던 네덜란드빌럼 2세와의 결혼이 결정되었다. 1816년 2월 21일에 안나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안나가 러시아 여대공이기에 지참금이 많았으며, 러시아에서 연금을 받았다고 한다. 빌럼-안나 부부는 1년 동안 러시아에서 살다가 네덜란드로 떠났다.

3.2. 오라녀 공비

안나는 네덜란드에 잘 적응하지 못했다. 화려하면서 엄격한 러시아 궁과는 달리 네덜란드는 비교적 소박하고 격식이 없었다. 게다가 그나마 마음에 들었던 브뤼셀[3]벨기에 혁명으로 떠나야만 했다. 안나는 향수병에 시달리며 러시아에 있는 가족들에게 편지를 보냈다. 남편과는 예술이라는 공통 관심사로 처음에는 사이가 좋은 편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충돌했는데, 여대공이었던 자신과 달리 남편인 오라녀 공이 신분이 낮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 와중에 빌럼 2세가 바람을 피우면서 부부 사이는 점점 악화되어 한동안 별거를 했었다고 한다.

그렇지만 안나는 공과 사를 구분하는 성격이었던지라 네덜란드 왕실과 아예 등을 돌린 것은 아니었다. 정치적 문제 때문에 시아버지 빌럼 1세와 남편 오라녀 공 빌럼이 불화를 겪게 되자 이를 중재하려고 했었다.

그리고 네덜란드의 문화와 언어를 배우며 네덜란드에 익숙해지려 노력했다. 안나는 정치에 관여하지 않았고 자선 활동에 열중해 네덜란드에 수십 개의 고아원과 병원을 설립하고 교육기관을 후원했다.[4]

3.3. 네덜란드의 왕비

파일:Anna_Pavlovna_(by_Nicolaas_Pieneman).jpg
1840년에 시아버지 빌럼 1세가 퇴위하면서 네덜란드의 왕비가 되었다. 안나는 왕비가 되어도 공비였을 때와 마찬가지로 정치에 개입하지 않았다. 유럽의 외국인 출신 왕비들이 정치에 개입해서 좋은 소리 들은 일이 없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는 현명한 행보였다. 하지만 이는 처신을 잘해서라기보다 개입하고 싶어도 못했을 가능성이 있는데, 배우긴 했지만 안나는 끝끝내 네덜란드어를 잘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만큼 대중들과 소통하는 일이 없었으며, 권위적인 성격 탓에 안나는 인기있는 왕비는 아니었다고 한다.

장남 빌럼 3세와는 사이가 그다지 좋지 못했다. 그리고 며느리인 뷔르템베르크의 조피를 매우 싫어해서 빌럼 3세가 그녀와 결혼할 때 크게 반대했다. 안나는 장남의 결혼을 반대하는 이유로 조피가 빌럼 3세의 사촌이며, 정교회에서는 사촌 간의 결혼을 금지한다는 점을 들었다. 하지만 이는 핑계에 불과했는데 애초에 빌럼 3세는 정교회 신자도 아니었고, 안나의 딸 소피가 사촌인 작센-바이마르-아이제나흐 대공에게[5] 시집 갈 때는 아무 말도 안 했기 때문이다(...). 안나가 이렇게까지 조피를 싫어한 이유는 그녀가 바로 자신의 형제자매들 중에서 가장 싫어했던 넷째 언니 예카테리나의 딸이었기 때문이다. 시작부터 고부갈등으로 삐걱거린 빌럼 3세와 조피의 결혼 생활은 이후에도 좋지 않았다.

1848년에 안나가 가장 아끼는 자식이었던 알렉산더르 왕자가 요절했다. 슬픔이 채 가시기도 전인 1849년에 남편 빌럼 2세가 급사하면서 안나는 궁에서 나왔다.

3.4. 왕대비

1849년 남편 빌럼 2세가 위독해지자 안나는 남편을 간호했는데, 결국 남편 빌럼 2세가 심장마비로 사망하자 그 모습을 본 안나는 매우 충격을 받았다. 안나는 며칠 간 남편의 시신 옆에 오래도록 무릎 꿇고 기도했다.

빌럼 2세는 사망하면서 많은 빚을 남겼다. 안나는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 자신의 예술품 컬렉션 중 몇 개를 남동생 니콜라이 1세에게 팔아야 했다.

평생 편하지 않았던 네덜란드 궁에서 나온 후에 안나 왕대비는 몇 차례 러시아를 방문했다. 그러나 왜인지 러시아로 완전히 돌아가지 않고 네덜란드에서 여생을 살다 1865년 3월 1일에 헤이그에서 숨을 거두었다.

4. 가족관계

4.1. 조상

본인 부모 조부모 증조부모
러시아 제국 여대공 안나 파블로브나
(Grand Duchess Anna Pavlovna
of Russia)
<colbgcolor=#fff3e4,#331c00> 파벨 1세
(Paul I)
<colbgcolor=#ffffe4,#323300> 표트르 3세
(Peter III)
홀슈타인고토르프 공작 카를 프리드리히
(Karl Friedrich, Duke of Holstein Gothorf)
러시아 제국의 안나 페트로브나 황태녀[6]
(Tsesarevna Anna Petrovna)
예카테리나 2세
(Catherine II)
안할트체르프스트 공작 크리스티안 아우구스트
(Christian August, Prince of Anhalt-Zerbst)
홀슈타인고토르프의 요한나 엘리자베트 공녀
(Princess Joanna Elisabeth of Holstein-Gottorp)
뷔르템베르크의 조피 도로테아 공녀
(Princess Sophie Dorothea of Württemberg)
뷔르템베르크 공작 프리드리히 2세 오이겐
(Frederick II Eugene, Duke of Württemberg)
뷔르템베르크 공작 카를 알렉산더
(Charles Alexander, Duke of Württemberg)
투른운트탁시스의 마리 아우구스테 공녀
(Princess Marie Auguste of Thurn and Taxis)
브란덴부르크슈베트의 프리데리케 공녀
(Princess Friederike of Brandenburg-Schwedt)
브란덴부르크슈베트 변경백 프리드리히 빌헬름
(Friedrich Wilhelm,Margrave of Brandenburg-Schwedt)
프로이센의 조피 도로테아 공주[7]
(Princess Sophie Dorothea of Prussia)

4.2. 자녀

자녀 이름 출생 사망 배우자/자녀
1남 빌럼 3세
(Willem III)
1817년 2월 19일 1890년 11월 23일 뷔르템베르크의 조피
슬하 3남
발데크피르몬트의 에마
슬하 1녀[8]
2남 알렉산더르 왕자
(Prince Alexander)
1818년 8월 2일 1848년 2월 20일
3남 헨드릭 왕자
(Prince Hendrik)
1820년 6월 13일 1879년 1월 13일 작센바이마르아이제나흐의 아말리아
프로이센의 마리
4남 에른스트 카시미르 왕자
(Prince Ernest Casimir)
1822년 5월 21일 1822년 8월 22일
1녀 작센바이마르아이제나흐의 대공비 조피
(Sophie, Grand Duchess of Saxe-Weimar-Eisenach)
1824년 4월 8일 1897년 3월 23일 작센바이마르아이제나흐 대공 카를 알렉산더
슬하 1남 3녀

5. 여담



[1] 파벨 1세의 아내로 본명은 뷔르템베르크의 조피 도로테아.[2] 당시 안나는 14살이었고 나폴레옹은 마흔이 넘었다.[3] 헤이그와 함께 네덜란드 연합 왕국의 공동 수도였다.[4] 안나 파블로브나가 개인 재산이 많았기 때문에 폭넓은 자선 사업이 가능했다.[5] 작센-바이마르-아이제나흐의 대공 카를 알렉산더. 안나의 언니 마리야 파블로브나 여대공의 아들로, 소피와는 이종사촌 지간이다.[6] 표트르 1세예카테리나 1세의 장녀.[7]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하노버의 조피 도로테아의 차녀.[8] 빌헬미나 여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