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CD5C5C><colcolor=#FFFFFF> 올덴부르크 대공국의 게오르크 공작부인 뷔르템베르크 왕국 빌헬름 1세의 왕비 러시아의 예카테리나 파블로브나 여대공 Великая княгиня Екатерина Павловна России | ||
이름 | 러시아어 | 예카테리나 파블로브나 로마노바 (Екатерина Павловна Романова) |
독일어 | 카타리나 파블로브나 로마노바 (Katharina Pawlowna Romanowa) | |
출생 | 1788년 5월 10일 | |
러시아 제국 차르스코예 셀로 예카테리나 궁전 | ||
사망 | 1819년 1월 9일 (향년 30세) | |
뷔르템베르크 슈투트가르트 | ||
배우자 | 올덴부르크의 게오르크 공작 (1809년 결혼 / 1812년 사망) | |
빌헬름 1세 (1816년 결혼) | ||
자녀 | 알렉산더, 페터, 마리, 조피[1] | |
아버지 | 파벨 1세 | |
어머니 | 뷔르템베르크의 조피 도로테아 공녀 | |
형제 | 알렉산드르 1세, 콘스탄틴, 알렉산드라, 옐레나, 마리야, 올가, 안나, 니콜라이 1세, 미하일 | |
종교 | 러시아 정교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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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뷔르템베르크의 빌헬름 1세의 왕비.파벨 1세와 뷔르템베르크의 조피 도로테아 공녀의 4남 6녀 중 4녀이자 여섯째이다. 네덜란드의 소피 왕비의 어머니이다.
애칭은 카티야.
2. 생애
2.1. 어린시절
1788년 5월 10일에 태어났으며 당시 어머니 마리야 황태자비가 매우 위독한 상황이었지만 산모와 태아 모두 무사했다. 이름은 친할머니인 예카테리나 2세에게서 따와 지어졌다.부모인 파벨 황태자와 마리야 황태자비는 장남 알렉산드르와 차남 콘스탄틴에 이어, 연달아 딸만 4명이나 태어나자 많이 실망했지만 예카테리나는 모두에게 사랑받는 아이로 성장한다.
가족에게 '카티야'라는 애칭으로 불렸던 예카테리나 파블로브나는 교육을 잘 받았고 대중 앞에 나서는 것을 좋아했다. 또한 아름답고 영리하고 사랑스러웠기 때문에 어머니 마리야 표도로브나가 가장 예뻐하는 딸이었고, 10살 연상의 큰 오빠 알렉산드르 1세도 여동생들 중에서 예카테리나를 가장 애지중지했다고 한다.[2]
반면 막내 여동생인 안나 파블로브나와는 사이가 매우 안 좋았다. 안나는 큰 오빠 알렉산드르 1세의 사랑을 받는 예카테리나를 좋아하지 않았다. 이러한 두 자매의 갈등은 안나의 장남 빌럼 3세와 예카테리나의 차녀 뷔르템베르크의 조피가 불행한 결혼 생활을 하는 계기가 되었다.
예카테리나는 어렸을 때부터 자신감 있고 당당한 성격이었으며, 이러한 성장 배경은 그녀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선택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1796년 할머니 예카테리나 2세가 승하하면서 아버지 파벨 황태자가 파벨 1세로 즉위했지만, 재위 5년만인 1801년 암살당하면서 같은 해에 큰오빠 알렉산드르 1세가 러시아의 차르로 즉위하게 되었다.
2.2. 결혼
1809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황제로서 슬하에 자식이 없는 후계 문제와 동맹 문제를 동시에 해결하길 원했다. 그는 조제핀 드 보아르네와 이혼하고 자신에게 계승자를 낳아줌과 동시에 강력한 동맹이 될 만한 일국의 공주를 황후로 삼으려 했다. 먼저 아내감으로 정한 건 예카테리나 파블로브나였지만 어머니 마리야 황태후는 이 소식을 듣고 경악했다. 마리야 황태후는 찬탈자이며 폭도떼들의 두목(?) 나폴레옹에게 딸을 시집을 보낼 마음이 전혀 없었고, 서둘러 예카테리나를 그녀의 이종사촌인 올덴부르크의 게오르크 공작[3]과 결혼시킨다.[4]러시아 정교회에서는 사촌 간의 결혼을 금하는데도 불구하고, 게오르크와 결혼시킨 걸 보면 정말 한시가 급한 상황이었던 것 같다.
2.3. 올덴부르크의 게오르크 공작부인
예카테리나의 시가인 올덴부르크 대공가는 홀슈타인고토르프 왕조의 방계가문으로 예카테리나의 할아버지인 표트르 3세는 홀슈타인고토로프 왕조의 종주였다.1809년에 결혼한 예카테리나는 남편 게오르크에게 다정했다고 하며 부부의 사이도 매우 조화로웠다. 이후 예카테리나는 1810년에 장남 알렉산더를, 1812년에 차남 페터를 낳았다.
올덴부르크 공작 게오르크는 러시아의 장군으로 복무했으며, 예카테리나와의 결혼 후 트베리에서 함께 살았다. 올덴부르크 공작부인이 된 예카테리나는 트베리 사교계의 중심인물로 자리잡았다.
2.4. 사별과 재혼
1812년 결혼 생활 3년 만에 남편 게오르크가 장티푸스로 세상을 떠나면서 예카테리나는 두 아들을 둔 과부가 되었다. 이후 친정인 러시아로 돌아가 친정 식구들과 지내게 된다. 특히 큰오빠 알렉산드르 1세는 가장 아끼는 여동생인 예카테리나를 데리고 유럽의 여러 군데를 여행했다고 한다.이후 영국을 여행하면서 재혼 상대를 만나게 되는데 바로 뷔르템베르크 왕국의 빌헬름 왕세자였다. 빌헬름 왕세자의 새어머니가 조지 3세의 장녀 프린세스 로열 샬럿[5]인 인연으로 아마 영국에서 만난 듯 하다. 빌헬름 왕세자도 예카테리나와 사촌 관계였으며[6] 둘은 첫눈에 사랑에 빠졌다. 사실 빌헬름은 이미 바이에른의 카롤리네 아우구스테 공주[7]와 결혼한 유부남이었지만 곧바로 별거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빌헬름은 이 결혼을 매우 싫어해 이혼을 원했고, 결국 1816년 카롤리네 아우구스테와의 결혼이 무효가 되었다. 이후 빌헬름과 예카테리나는 1816년 1월 24일에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2.5. 뷔르템베르크의 왕비
뷔르템베르크의 왕세자비가 된 예카테리나는 곧 임신을 하게 되어 1816년 가을에 장녀 마리 프리데리케 샤를로테를 낳았고, 시아버지 프리드리히 1세가 사망하고 남편 빌헬름 1세가 뷔르템베르크의 국왕이 됨과 동시에 예카테리나도 왕비가 되었다.예카테리나는 왕비로서 다른 여성 왕족들처럼 자선 사업을 하게 되었고, 수많은 자선 단체를 설립했다고 한다.[8]
2.6. 죽음
1818년 차녀 조피를 낳았지만 6개월 만에 폐렴으로 인한 홍반증으로 1819년 1월 9일에 30세의 나이로 사망하게 된다. 빌헬름 1세는 사랑하는 아내를 위한 영묘를 만들었다. 전 남편 게오르크 소생인 예카테리나의 두 아들은 러시아 황실로 보내져 키워졌고, 빌헬름 1세 소생의 두 딸 중 특히 조피는 예카테리나의 시누이인 뷔르템베르크의 카타리나 공주에게 양육되었다고 한다.3. 가족관계
3.1. 조상
본인 | 부모 | 조부모 | 증조부모 |
러시아 제국 여대공 예카테리나 파블로브나 (Grand Duchess Catherine Pavlovna of Russia) | <colbgcolor=#fff3e4,#331c00> 파벨 1세 (Paul I) | <colbgcolor=#ffffe4,#323300> 표트르 3세 (Peter III ) | |
홀슈타인고토르프 공작 카를 프리드리히 (Karl Friedrich, Duke of Holstein Gothorf ) | |||
러시아 제국의 안나 페트로브나 황태녀[9] (Tsesarevna Anna Petrovna) | |||
예카테리나 2세 (Catherine II) | |||
안할트체르프스트 공작 크리스티안 아우구스트 (Christian August, Prince of Anhalt-Zerbst) | |||
홀슈타인고토르프의 요한나 엘리자베트 공녀 (Princess Joanna Elisabeth of Holstein-Gottorp) | |||
뷔르템베르크의 조피 도로테아 공녀 (Duchess Sophie Dorothea of Württemberg) | |||
뷔르템베르크 공작 프리드리히 2세 오이겐 (Frederick II Eugene, Duke of Württemberg) | |||
뷔르템베르크 공작 카를 알렉산더 (Charles Alexander, Duke of Württemberg) | |||
투른운트탁시스의 마리 아우구스테 공녀 (Princess Marie Auguste of Thurn and Taxis) | |||
브란덴부르크슈베트의 프리데리케 공녀 (Princess Friederike of Brandenburg-Schwedt) | |||
브란덴부르크슈베트 변경백 프리드리히 빌헬름 (Friedrich Wilhelm,Margrave of Brandenburg-Schwedt) | |||
프로이센의 조피 도로테아 공주[10] (Princess Sophie Dorothea of Prussia) |
3.2. 자녀
자녀 | 이름 | 출생 | 사망 | 배우자/자녀 |
올덴부르크의 게오르크 공작 (Duke George of Oldenburg) | ||||
1남 | 알렉산더 게오르기비치 공작 (Duke Alexander Georgievich) | 1810년 8월 30일 | 1829년 11월 16일 | |
2남 | 페터 공작 (Duke Peter) | 1812년 8월 26일 | 1881년 5월 14일 | 나사우바일부르크의 테레제 공녀 슬하 4남 4녀 |
빌헬름 1세 (William I) | ||||
1녀 | 나이페르크 백작부인 마리 공주 (Princess Marie, Countess of Neipperg) | 1816년 10월 30일 | 1887년 1월 4일 | 나이페르크의 백작 알프레트 |
2녀 | 네덜란드의 왕비 소피아 (Sophie, Queen of the Netherlands) | 1818년 6월 18일 | 1877년 6월 3일 | 빌럼 3세 슬하 3남 |
[1] 빌럼 3세의 첫번째 왕비.[2] 알렉산드르 1세는 예카테리나에게 과도할 정도의 애정을 쏟아부어서, 일부에서는 그가 여동생에 대해 사랑의 감정을 느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3] 예카테리나의 이모 뷔르템베르크의 프리데리케와 올덴부르크 대공 페터 1세의 차남.[4] 이후 나폴레옹은 또 한 번 예카테리나의 막내 여동생인 안나에게 결혼을 제안했지만 러시아 황실은 또 거절했다. 안나는 훗날 빌럼 2세와 결혼해 네덜란드의 왕비가 된다.[5] 사실 프린세스 로열 샬럿의 의붓아들인 빌헬름 1세는 샬럿의 고모인 영국의 오거스타 공주의 외손자이다.[6] 빌헬름의 아버지 프리드리히 1세와 예카테리나의 어머니 조피 도로테아가 남매 지간이다.[7] 막시밀리안 1세 요제프의 차녀. 빌헬름 1세와 이혼 후 오스트리아 황제 프란츠 2세와 재혼했다.[8] 예카테리나가 러시아의 여대공이었고, 남편은 물론 친정인 러시아 황실의 지원을 받을 수 있었기에 자선 사업을 할 수 있었다고 한다.[9] 표트르 1세와 예카테리나 1세의 장녀.[10]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와 하노버의 조피 도로테아의 차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