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F5F0C5><colcolor=#000000> 러시아의 미하일 파블로비치 대공 Великий князь Михаил Павлович Росси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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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미하일 파블로비치 로마노프 (Михаил Павлович Романов) |
출생 | 1798년 2월 8일 |
러시아 제국 상트페테르부르크 겨울 궁전 | |
사망 | 1849년 9월 9일 (향년 51세) |
폴란드 입헌왕국 바르샤바 | |
장례식 | 1849년 9월 16일 |
러시아 제국 상트페테르부르크 페트로파블롭스크 성당 | |
배우자 | 뷔르템베르크의 샤를로테 (1824년 결혼) |
자녀 | 마리야, 옐리자베타, 예카테리나, 알렉산드라, 안나, 나데즈다(사생아) |
아버지 | 파벨 1세 |
어머니 | 뷔르템베르크의 조피 도로테아 공녀 |
형제 | 알렉산드르 1세, 콘스탄틴, 알렉산드라, 옐레나, 마리야, 예카테리나, 올가, 안나, 니콜라이 1세 |
종교 | 러시아 정교회 |
1. 개요
러시아 제국의 황자. 파벨 1세와 뷔르템베르크의 조피 도로테아 공녀의 4남이자 막내이며, 알렉산드르 1세와 니콜라이 1세의 막내 남동생이다.2. 생애
2.1. 유년기
1798년 2월 8일 러시아 제국의 겨울 궁전 파벨 1세와 마리야 표도로브나 황후의 4남이자 막내자녀로 태어났다. 당시 미하일이 태어났을때 파벨 1세는 43세, 마리야 표도로브나 황후는 38세였다. 미하일은 그의 형제자매 중 유일하게 아버지 파벨 1세가 황제로 재임할때 태어난 자녀이다. 정교회 유아세례때 대부모는 그의 큰누나 알렉산드르 황태자와 큰누나 알렉산드라 파블로브나 여대공으로, 그들은 외할머니 브란덴부르크-슈베트의 프리데리케 공녀를 대리로 했다.[1]미하일과 그의 막내 형제들은 엄격한 환경에서 자랐고, 체벌이 큰 역할을 했다. 미하일은 I. M. 람즈도르프 장군의 지도를 받았지만, 주로 어머니 마리아 표도로브나 황후가 아들들에게 과학을 가르치며 군사 경력을 쌓도록 설득했다. 결국 미하일과 형 니콜라이 파블로비치 대공은 군사적인 모든 것에 대한 성향이 있었기 때문에 이것은 아무 소용이 없었다. 16세 때 미하일은 나폴레옹 전쟁에 참여했다.
2.2. 데카브리스트의 난
미하일은 큰형 알렉산드르 1세의 갑작스러운 죽음 이후 데카브리스트의 난 진압하는 데 참여했다. 소식이 전해지자 미하일은 바르샤바에 있었다. 다음 날 콘스탄틴 대공은 자신의 편지를 들고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떠나 황위 계승권을 포기했다. 도착하자마자 그는 콘스탄틴에 대한 충성 맹세가 이미 맹세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바르샤바로 돌아와 형을 설득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12월 14일 새벽에 돌아온 미하일은 포병 부대가 니콜라이 1세에게 맹세를 했고, 콘스탄틴에게 맹세한 사람들이 쿠데타를 일으켰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쿠데타는 1월 3일까지 진압되었다. 참여한 사람들은 투옥되거나 사형을 선고받거나 시베리아로 추방당했습니다. 미하일은 봉기 조사 위원회의 일원이었으며, 대공을 살해하려다 사형을 선고받은 빌헬름 퀴첼베르케어를 투옥과 고된 노동으로 감형할 것을 주장했고, 이는 성공적이었다.1826년부터 1828년까지 그는 근위대 사령관으로서 러시아-터키 전쟁과 11월 봉기에 참전했다. 바르샤바를 공격한 결과, 그는 부관장 계급을 받았다.
2.3. 결혼
26세 였던 미하일은 마리아 표도로브나 황태후를 통해 그를 뷔르템베르크의 샤를로테 공주(1807–1873)에서 아내로 맞이했다. 옐레나 파블로브나로 개명한 샤를로테는 뷔르템베르크의 파울 왕자와 작센-힐트부르하우젠의 샤를로테 공녀의 딸로, 황태후의 큰 오빠인 프리드리히의 손녀였다. 1822년, 미하일은 슈투트가르트로 여행을 떠나 공주를 알게 되었는데, 많은 사람들이 공주를 모든 면에서 매력적으로 평가를 받았다.. 모든 면에서 미하일은 약혼녀를 좋아하지 않았는데, 이는 작센코부르크잘펠트의 율리아네 공녀의 이혼한 콘스탄틴 대공의 영향과 독일의 공녀에 대한 편견이 있었다.[2]어머니의 뜻을 따른 미하일은, 1824년 2월 19일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결혼했다. 부부관계는 데면데면 했다. 미하일이 무슨 수를 써서라도 피한 아내에 대한 무관심은 "(엘레나 파블로브나의) 입장은 여성의 자부심과 일반적으로 여성에게 특유한 섬세함에 모욕적이다. 그녀가 변하지 않는 비참한 상황이라면 이것은 잃어버린 여성이다."라고 쓴 콘스탄틴조차도 충격을 받았다.
옐레나 파블로브나 대공비는 남편의 취향에 맞추려고 노력했지만 원칙적인 문제에 대해 자제하기 어려웠다. 옐레나는 워낙 지적과 정치적인 견해가 풍부한 사람인지라 미하일이 니콜라이 1세와 콘스탄틴 모두와의 강한 관계와 지위를 고려할 때 국정에서 더 진지한 역할을 해주길 바랐지만, 그는 여전히 군대에 관심이 많은 무골이었다. 미하일 대공은 황실에서 가장 사랑받는 인물이었는데 본질적으로 친절한 사람이었던 그는 유쾌한 의사소통자로 알려져 있지 않았고 종종 '매너가 없다'고 인식되었다. 더군다나 미하일은 아들을 원했지만 슬하에 딸 다섯을 낳아서 실망한 것도 없지 않았다.
2.4. 죽음
미하일은 강해 보였지만 특별히 건강하지는 않았다. 1819년, 그는 카를로비 바리 온천에서 치료를 받던 심각한 병에 걸렸다. 1837년, 그는 유럽 리조트에서 몇 달 동안 치료를 받았지만 여전히 고통을 겪었다. 미하일은 종종 의사의 권고를 가볍게 여기며 항상 따르지는 않았다고.1845년 차녀이자 나사우 공작부인이었던 옐리자베타가 출산 중 사망한 것은 가족에게 큰 충격이었다. 이듬해 장녀 마리아는 평생 건강이 좋지 않아 빈에 머물던 중 21세의 나이로 미하일의 품에서 요절했다. 미하일은 코피를 흘리기 시작했고, 3년 후 신경 쇠약을 겪었다.[3]
건강이 악화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대공은 1849년 7월 바르샤바로 가서 경비병과 척탄병 부대를 돌보겠다고 고집했다. 검문 중에 그의 손이 마비되기 시작했고, 그는 벨베데레 궁전으로 급히 이송되었다. 미하일은 2주 반 동안 마비되어 병마를 싸우게 되었다. 그의 아내와 딸 예카테리나는 바르샤바에 도착하여 병상에서 마지막 날을 보냈다. 미하일 파블로비치는 1849년 9월 9일에 사망했다.
대공의 시신은 9월 16일 페트로파블롭스크 성당에 안장되기 위해 슈체친에서 증기선을 타고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옮겨졌다. 군대와 경비병들은 3개월 동안 상복을 입었고 황실은 1년 내내 애도했다. 미하일의 죽음은 니콜라이 1세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3. 가족관계
3.1. 조상
본인 | 부모 | 조부모 | 증조부모 |
러시아의 미하일 파블로비치 대공 (Grand Duke Michael Pavlovich of Russia) | <colbgcolor=#fff3e4,#331c00> 파벨 1세 (Paul I) | <colbgcolor=#ffffe4,#323300> 표트르 3세 (Peter III) | |
홀슈타인고토르프 공작 카를 프리드리히 (Karl Friedrich von Holstein-Gottorp) | |||
안나 페트로브나 여대공[4] (Anna Petrovna) | |||
예카테리나 2세 (Catherine II) | |||
안할트체르프슈트 후작 크리스티안 아우구스트 (Christian August von Anhalt-Zerbst) | |||
홀슈타인고토르프의 요한나 엘리자베트[5] (Joanna Elusabeth von Holstein-Gottorp) | |||
뷔르템베르크의 조피 도로테아 공녀 (Sophie Dorothea von Württemberg) | |||
뷔르템베르크 공작 프리드리히 2세 오이겐 (Friedrich II Eugen von Württemberg) | |||
뷔르템베르크 공작 카를 알렉산더 (Karl Alexander von Württemberg) | |||
투른탁시스의 마리 아우구스테 (Marie Auguste von Thurn und Taxis) | |||
브란덴부르크슈베트의 프리데리케 (Friederike von Brandenburg-Schwedt) | |||
브란덴부르크슈베트의 프리드리히 빌헬름 (Friedrich Wilhelm von Brandenburg-Schwedt) | |||
프로이센의 조피아 도로테아[6] (Sophia Dorothea von Preußen) |
3.2. 자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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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예카테리나, 옐리자베타, 마리야 |
자녀 | 이름 | 출생 | 사망 | 배우자 / 자녀 |
1녀 | 마리야 미하일로브나 여대공 (Grand Duchess Maria Mikhailovna) | 1825년 3월 9일 | 1846년 11월 19일 | |
2녀 | 나사우 공작부인 엘리자베트 (Elizabeth, Duchess of Nassau) | 1826년 5월 26일 | 1845년 1월 28일 | 룩셈베르크 대공 아돌프[7] |
3녀 | 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 공작부인 카타리나 (Catherine, Duchess of Mecklenburg-Strelitz) | 1827년 8월 28일 | 1894년 5월 12일 | 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 공작 게오르크 아우구스트 슬하 4남 2녀 |
4녀 | 알렉산드라 미하일로브나 여대공 (Grand Duchess Alexandra Mikhailovna) | 1831년 1월 28일 | 1832년 3월 27일 | |
5녀 | 안나 미하일로브나 여대공 (Grand Duchess Anna Mikhailovna) | 1834년 10월 27일 | 1836년 3월 22일 |
다섯 딸 중 두명은 아동기 때 죽었고 또 두 명은 성인이 되자마자 죽었다. 유일하게 중노년기까지 살아남은 셋째딸만이 후손을 남겼는데 그 외손자녀 4남 2녀 중 차남인 게오르크 알렉산더(1859 ~ 1909)만 결혼해서 자식을 남겼다.
[1] 미하일이 세례를 받은지 한 달후에 프리데리케가 사망했다.[2] 아이러니하게도 미하일의 어머니인 마리야 표도로브나, 할머니 예카테리나 2세는 독일의 공녀였으며, 또한 콘스탄틴 대공이 이혼의 원인 제공자 였다. 가정폭력을 저질러 안나 표도로브나를 힘들게해 러시아 황실을 적응하지 못하게 했다 . 안나 표도로브나의 조카였던 빅토리아 여왕은 이를 알고있어서 훗날 외손녀들이 러시아 황실로 시집을 갔을때 매우 우려했다고 한다.[3] 아내 옐레나 파블로브나 대공비가 자선사업과 의료에 관심이 적극적으로 한건 장녀, 차녀의 죽음으로 인한 영향이 컸다.[4] 표트르 1세의 딸이다.[5] 홀슈타인고토르프 가문이므로 할아버지 표트르 3세와 할머니 예카테리나 2세는 6촌 지간이다.[6]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와 하노버의 조피 도로테아의 딸이다.[7] 옐리자베타의 사후 나사우 공작이었던 아돌프는 훗날 룩셈베르크 대공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