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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13 05:10:50

빈 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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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회의 참석자들을 묘사한 기록화. 좌측 의자에서 일어나있는 인물이 의장을 맡은 오스트리아 외무장관 클레멘스 폰 메테르니히[1], 가운데 의자에 앉아있는 인물이 로버트 스튜어트, 우측에서 두번째 의자에 앉아있는 인물이 탈레랑이다.

1. 개요2. 내용3. 회의 결과4. 회의 결과에 따른 각국의 손익과 후일담

1. 개요

1814년부터 1815년까지 오스트리아 제국수도 에서 나폴레옹 전쟁의 승전국들이 유럽 지도를 재구성하기 위해 열린 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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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의의 대표적 주역으로는 러시아 제국 황제 알렉산드르 1세[2], 프로이센 왕국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 오스트리아 제국 외무장관 클레멘스 폰 메테르니히, 그레이트브리튼 아일랜드 연합왕국 외무장관 로버트 스튜어트, 프랑스 왕국 외무장관 샤를모리스 드 탈레랑페리고르가 꼽힌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엘바 섬으로 유배보낸 뒤 나폴레옹 전쟁의 전후 처리와 유럽의 세력 재편에 대해 논의하기 위해 열린 회의로 오스트리아 제국 외무장관 클레멘스 폰 메테르니히가 의장을 맡아 회의를 주도했다. 회의를 주도한 유럽의 다섯 열강은 각각 그레이트브리튼 아일랜드 연합왕국, 프로이센 왕국, 오스트리아 제국, 러시아 제국, 프랑스 왕국이다.[3]

이 회의에 참가한 나라들을 보면 나폴레옹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었던 나라도 일부 참가했던 것을 알 수 있다. 비록 나폴레옹의 부하였지만 스웨덴 왕세자로 선출되는 과정에서 나폴레옹의 도움을 받은 적이 없던 장 바티스트 베르나도트도 로웬히엠 백작을 대표로 하는 사절단을 보냈다. 심지어는 유럽의 전쟁과는 아무 관련도 없던 이로쿼이 연맹미국과의 무력 충돌을 이유로 사절단을 보내기도 했다.

회의 장소는 빈의 발하우스 플라츠(Ballhausplatz)였다. 이곳은 현재 오스트리아의 총리 관저로 사용되고 있다.

2. 내용

회의 목표는 모든 것을 프랑스 혁명 이전 상태로 되돌리는 것이었다. 첫째로 프랑스 혁명나폴레옹 전쟁으로 일어난 자유주의개혁을 청산하고자 하였다. 둘째로 다시는 프랑스 제국과 같은 패권국이 등장하지 않도록 유럽 국가들의 권력을 분배하는 것이었다.

또한 메테르니히가 제시한 5대 원칙이 있었는데, 한마디로 정통주의로의 복귀였다. 나폴레옹에 의해 끌어내려진 기존의 유럽 군주들을 왕좌에 다시 앉혀놓고 혁명으로 오염된 체제를 다시 세우는 것이며, 혁명 이전의 체제로 복귀하며 국경선과 세력권을 조정하여 유럽의 평화와 안정을 추구하는 것. 그러나 명분은 어디까지나 명분일 뿐이었다. 소국의 권리는 철저하게 무시당했고 나폴레옹에 빌붙어서 영토를 확장한 나라들은 대부분 기득권을 인정받아 프랑스를 제외하면 약탈 문화재까지 소유권을 보존하게 되었다. 원래는 프랑스도 포함이었지만 백일천하 때문에 프랑스만 반환해야 했다.

각국의 복잡한 이해관계 때문에 진척이 무척 더뎌 계획대로라면 4주 동안만 진행되었을 회의가 8달 동안이나 지속되게 된다. 이는 빈 회의 이전 1814년 프랑스 전역에서의 회담도 마찬가지였는데 4개국[4]의 이해관계가 서로 다르다보니 이럴 바에는 빈에서 제대로 판을 벌이자고 해서 메테르니히가 조정 역할을 자임하여 오스트리아의 빈에서 벌어진 것이다.

대부분의 이해관계 문제가 결국은 영토였다. 프랑스를 어느 정도 축소할지는 4개국이 파리에서 어느정도 합의를 해 놓았으나 그에 따른 전리품 분배를 가지고 너 죽고 나 살자며 개판이 벌어졌다. 프랑스 국경은 메테르니히가 관대하게 1792 ~ 1797년 사이의 국경으로 복구하고자 했고,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르 1세가 너무 관대하다며 강력하게 반발했지만, 결국 메테르니히의 제안에 타협하고 1792년 1월 1일 국경으로 정해졌다.

메테르니히는 회의가 오스트리아 제국에 불리하게 진행되면, 회의를 중단하고 파티를 거행했기에 "회의는 춤춘다. 그러나 진전은 없다."는 소리까지 나왔을 정도였다. 이 때문에 각국의 군주들이 손잡고 춤춰대는 풍자화도 지금까지 남아있다.[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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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회의 기간의 실제 무도회를 기록한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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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그림은 질질 끄는 회의를 춤으로 묘사한 풍자화이다.

십수 년간 전쟁으로 재정이 파탄난 오스트리아에선 회의 비용으로 하루 5만 굴덴[6]씩 펑펑 써대고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르 1세는 40일 연속 파티를 하는 진기록을 세웠으며 눈치 없이 나폴레옹을 너무 오래 편들어서 약간 왕따 취급을 받던 덴마크 국왕[7]도 연신 화끈하게 놀아댄 걸로 소문이 났다.

이렇게 탱자탱자 논 것 같지만 실제로는 실무진들이 발바닥에 땀나게 만나고 있었다. 하지만 유럽의 높으신 분들이 제 주장만 내세워 전혀 진척이 없었다.

더디던 회의를 한방에 해결한 것은 바로 나폴레옹이 엘바 섬에서 탈출했다는 소식이었다. 나폴레옹의 탈출과 황제 복위 소식에 경악한 회의 참가국들은 위기감에 한 마음 한 뜻으로 타협하여 1815년 6월 9일 빈 의정서를 체결했다. 그리고 열흘 뒤 나폴레옹이 워털루 전투에서 패하면서 백일천하는 싱겁게 마무리되었다.

이 회의의 마지막 날 부기록은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다. 여담으로 자허토르테 초콜릿 케이크가 여기서 등장했다는 설이 있지만 신빙성은 낮다. 요리사인 자허 본인부터가 빈 회의 후인 1816년 태생이기 때문이다(...) 다만 메테르니히의 "외교 사절들을 만족할 만한 디저트를 만들어와라."는 엄명에 의해 탄생한 것은 사실이다. 자허토르테는 1832년 세상에 선을 보였다.

3. 회의 결과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빈 체제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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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회의의 결과로 형성된 유럽의 체제를 빈 체제라 부른다. 발칸반도그리스인이나 이탈리아 반도 등 주변부에서의 소요에도 불구하고, 빈 체제는 프로이센 왕국, 러시아 제국, 오스트리아 제국의 신성 동맹을 중심으로 유럽 협조 체계 개념(Concert européen)에 기초하여 40여 년간 유지되었다. 이후 정치적으로는 1848년 프랑스 2월 혁명과 메테르니히의 실각, 외교적으로는 1854년 시작된 크림 전쟁을 기점으로 붕괴되었다.

다시 평화가 복원된 것은 1840 ~ 60년대 이탈리아 통일전쟁보오전쟁, 보불전쟁을 거친 1871년이었고, 이것은 비스마르크 체제라고 불린다. 이렇게 다시 40년간 평화가 지속되다가 빈 회의부터 정확히 100년만인 1914년 모든 열강의 대 전쟁인 제1차 세계 대전이 벌어지면서, 빈 체제가 고안한 오랜 평화는 마지막으로 산산조각이 났다. 보수주의의 등장이란 점에서도 빈 체제는 나름의 의미를 가진다.

의외로 프랑스는 패전국 처지인데도 불구하고 아주 큰 손해는 보지 않았다. 프랑스 혁명 이전으로 돌아가자는 명분 때문에 프랑스 자체가 쪼개지지도 않았다.[8] 당시 유럽에서, 혁명 이전 부르봉 왕조의 프랑스와 혁명 이후 보나파르트가의 프랑스는 각각 다르게 이해되었다. 무엇보다 프랑스를 패전국이라고 도륙을 내버리면 세력의 균형은커녕 다른 국가들이 제2의 프랑스가 되어 또다시 유럽의 패권을 거머쥐거나, 프랑스에 지나치게 가혹한 강화조약을 할 경우에는 프랑스인이 정부를 인정하지 않을테고 그러자면 외국군대를 계속 주둔시켜야 했고, 주둔뿐만 아니라 계속해서 전쟁이 이어지기 때문이었다.

러시아 제국과 프로이센 왕국, 그리고 오스트리아 제국이 폴란드-작센 분할 문제로 인해 갈등이 극에 달할 동안 당시 프랑스의 외교관이었던 탈레랑이 이 갈등을 최대한 활용하면서 이득을 보았다. 정확히는 메테르니히가 주도했고 탈레랑이 여기에 제대로 결탁한 것이었다. 메테르니히는 영국의 캐슬레이와 짜고 탈레랑을 승전 4국[9]의 비밀회담을 방청할 수 있게 하면서 군사 동맹까지 맺어 러시아 제국과 프로이센 왕국의 팽창을 위협하였다.

메테르니히는 스스로 나서서 조정자 역할을 자임하고 정통주의와 복고주의 드립을 친 덕 때문에 오스트리아 제국의 협상력을 떨어뜨려 영토적 국익은 많이 챙기지 못했다. 앞서 프로이센 왕국과 러시아 제국에 맞서 러시아 제국과 프로이센 왕국이 노리는 바르샤바 공국(폴란드)와 작센 병합 문제를 오스트리아 제국의 메테르니히가 대단히 경계했기 때문인데 결과적으로는 프로이센 왕국과 러시아 제국이 밀착해서 동유럽에서 오스트리아 제국의 운신폭이 좁아졌고 장기적으로 프로이센 왕국은 작센 대신 라인란트 지방을 발판으로 경제력이 일취월장해서 독일 관세동맹을 구성하는등 독일 연방에서의 영향력을 후진적 농업국인 오스트리아 제국보다 높였기 때문에 오스트리아 입장에서는 독일 통일을 주도하는 발판을 조공으로 바친 셈이 되었다. 프랑스가 빈 회의에 참석한건 부르봉 왕조 복귀의 영향이 있고 당시 국제정세에서 프랑스를 아예 배제할 수 없어서였다.[10]

단순히 메테르니히가 대단해서이거나 탈레랑먼치킨이라서가 아니다. 프로이센 왕국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가 무능해서 이용당했다는 소리가 나오는데, 프로이센 왕국의 대표자는 물론 국왕이었으나 실제 실무는 카를 아우구스트 폰 하르덴베르크 수상이 일임했기 때문에 호구 잡힐 일은 없었다. 그리고 다른 나라 외교관들이 장님들만 있는것도 아니었고 실무진도 있었기 때문에 한두 사람의 무능으로 결과가 바뀌고 뒤집힐 일은 아니었다.

4대 승전국 중 그레이트브리튼 아일랜드 연합왕국러시아 제국의 발언력과 대립이 가장 컸고[11] 프로이센 왕국은 러시아 제국에 붙고 오스트리아 제국은 심판보는 척 하면서 그레이트브리튼 아일랜드 연합왕국에 동조하는 입장이었다. 결국 백일천하가 겹치고 발등에 불이 떨어지자 가장 큰 목표였던 세력 균형과 유럽 평화를 위해서 각국이 양보를 하면서 협상이 타결되었다.

이 국면에서 메테르니히의 여러 활약상은 헨리 키신저가 『회복된 세계(A World Restored: Metternich, Castlereagh and the Problems of Peace, 1812-1822)』에서 대가다운 필치로 정리해놓았다.

4. 회의 결과에 따른 각국의 손익과 후일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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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and Duchy of Warsaw은 바르샤바 대공국이다.

파일:Europe_1815_map_en.png
1815년 유럽

이는 빈 회의 만의 독자적인 결과가 아니라 이전 프랑스와 나폴레옹 전쟁 때의 합의된 국경선도 참조했다. 나폴레옹에 빌붙어서 영토를 확장한 중소규모의 영방들의 기득권도 인정되었다.

[1] 빈 회의 당시에는 아직 재상이 아니었다.[2] 위 사진에는 알렉산드르 3세의 사진으로 잘못 나와있다.[3] 빈 회의를 주도한 다섯 열강 중 영국, 독일, 러시아, 프랑스 4국은 현대에 들어서도 강대국의 지위를 가지고 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오스트리아는 다섯 열강 중에서도 약체 신세를 벗어나지 못했고, 제1차 세계대전에서 패전하자 제국이 해체되어 약소국으로 전락하고 말았다.[4] 영국, 러시아, 프로이센, 오스트리아[5] 하단에 있으며 역사 교과서에서도 가끔 나온다.[6] 1870년 화폐 기준으로 35만 유로에 해당한다는데, 1814 ~ 15년이니 물가 상승을 고려하면 더 높았을 것이다.[7] 대륙 봉쇄령에 적극 동참했고 그 대가로 프랑스 제1제국으로부터 "스웨덴을 견제하라."는 목적으로 특권을 받았다. 일찍 뒷통수치고 빠진 바이에른 왕국, 뷔르템베르크 왕국은 물론이고 오스트리아 제국이고 프로이센 왕국, 러시아 제국도 한때는 나폴레옹에 쳐발려서 강제 동맹 신세였기에 큰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작센 왕국처럼 정신 못 차리고 라이프치히에서 개박살이 났는데도 끝까지 충성을 바치는 미련한 경우만 빼고...[8] 시도가 없었던 건 아니다. 1814년 프랑스 전역에서 오스트리아 황제 프란츠 2세의 아우 카를 대공을 수반으로 이전 합스부르크령인 알자스, 부르고뉴 등을 묶어서 프랑스에 떼내 새로운 군주국을 만들려고 했으나 프로이센 왕국과 러시아 제국 등이 가볍게 무시했다.[9] 러·오·영·보(=프로이센)[10] 백일 천하 때는 동맹국에서 프랑스가 아닌 개인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에게 선전포고했다.[11] 이 두 국가만이 당시 유럽 국가들 중 유이하게 나폴레옹에게 굴복하지 않고 끝까지 맞서 싸웠다. 다만 러시아의 경우 나폴레옹의 러시아 침공 전에 잠시나마 나폴레옹이 조성한 소위 신 유럽 질서에 자의 반으로 편입한 전적이 있다. 또한 러시아는 기존의 대 동맹전에서 서유럽에 파병한 적은 많았지만 핵심적인 활약은 불분명했다.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이 실패하고 러시아 제국군이 유럽 본토로 본격 개입하기 시작하면서 지분이 높아진 점이 있다. 반면 영국은 나폴레옹이 스스로 인정한 최대의 적국으로 나폴레옹의 집권 이전 프랑스 혁명 전쟁 초기인 1793년부터 아미앵 조약으로 인한 평화 기간(이것도 상호 평화 조약이었지, 어느 한쪽이 굴복해서 맺은 종전 조약은 아니었다.) 1년을 빼고 1815년까지 계속 프랑스에 맞섰다. 나폴레옹의 세력이 가장 강했던 1807 ~ 1811년 사이엔 오직 영국만이 유일하게 프랑스와 맞설 수 있었다. 당대 최강이었던 영국 해군 덕에 본토가 침공받을 위험이 없이 전쟁기간 내내 함대결전에서 100% 승리하고 전 유럽의 해상을 장기간 봉쇄할 수 있었고 영국 육군도 1808년부터 이베리아 반도에 파병되어 웰링턴의 걸출한 지휘하에 1814년 종전 무렵엔 남프랑스에 진입했다.[12] 현 프랑스 니스[13] 오늘날의 스리랑카[14] 후의 남아프리카 공화국[15] 하노버 왕조는 원래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 공작 가문으로 벨프 가문의 직계인데 수도를 뤼네부르크에서 하노버천도하고 선제후 가문이 되고나선 하노버 가문으로 불렸다.[16] 현재의 벨기에룩셈부르크.[17] 단순히 메테르니히와 탈레랑이 프로이센을 견제하려는 의도가 아니라 러시아 제국 때문이었다. 영국은 폴란드 전체를 합병한 러시아가 지나치게 강력해져 서유럽으로 팽창하는 것을 결사 반대하였고 오스트리아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탈레랑이 영국-오스트리아 편을 들어 삼국은 만일 러시아와 프로이센이 양보를 하지 않으면 전쟁을 선포한다는 내용의 비밀 조약까지 맺었다. 이 소식을 들은 알렉산드르 1세가 한발 양보하여 폴란드 전역을 합병하지 않고 프로이센 왕국과 나누는 선에서 타협하며 실마리가 풀렸다.[18] 초창기 라인란트의 사람들은 프랑스의 지배에 대해 상당히 호의적이었다. 프랑스 혁명 정부가 봉건 질서를 해체하면서 자유주의자들에게 호의를 얻었기 때문인데, 호감은 오래 가지 못했다. 당시 자유주의자들과 젊은 지식인들에게 민족주의가 퍼지면서 압제자로 인식되었고 나폴레옹시대 프랑스 본토도 세금과 징병으로 쥐어짜이다 못해 들고 일어났는데 합병된 독일 영토야 뭐.[19] 덴마크는 중립을 지키려 했으나, 영국은 프랑스와 육지로 연결된 덴마크가 프랑스에게 점령되어 강력한 해군력을 넘겨줘 버릴까봐 두려워했고, 결국 '평화를 지키기 위한 선전포고'라는 미명하에 코펜하겐을 습격해 전함들을 불태웠다. 이에 분노한 덴마크는 프랑스 편에 서기는 했지만 거의 모든 전함들이 불탔기 때문에 전황에 별다른 영향은 미치지 못했다.[20] 영국이 깡패짓을 했음을 부정할수는 없지만, '중립선언했으나 프랑스에 점령되어 해군력 조공하기'는 스페인, 네덜란드와 같은 다른 해군 강국에서 실제로 일어난 사례다. 편집증적인 반응의 근거는 있었던 것[21] 정확하게는 스웨덴이 노르웨이를 얻는 조건으로 스웨덴령 포메른을 덴마크에게 양도했고, 덴마크는 이를 원래 프로이센이 차지할 예정이었던 라우엔부르크 공국과 교환했다. 덴마크 입장에서 덴마크 본토와 따로 떨어진 월경지인 스웨덴령 포메른 대신 본토(정확하게는 동군연합인 홀슈타인 공국)와 바로 접한 라우엔부르크를 가지는게 더 나았기 때문.[22] 현 이탈리아 롬바르디아주 손드리오도 일대. 그라우뷘덴 주의 전신인 삼동맹이 밀라노 공국에게서 점령한 지역이다.[23] 프로이센을 견제하는 역할로 프랑스에서 이권을 많이 받았는데 바르샤바 대공국 대공도 겸임했다. 라이프치히 전투 후에 포로로 잡히고 왕위 복귀가 유보 되었으나 복위는 승인 받았다.[24]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에게 패한 에른스트계의 작센 선제후 요한 프리드리히 1세가 6촌인 작센-마이센 공작 모리츠에게 영토 일부를 할양하고 선제후 작위를 넘겨준 사건을 말한다.[25] 마인츠 선제후국 · 트리어 선제후국 · 쾰른 선제후국[26] 합병되어 없어진 소국의 왕가들은 이전과 똑같은 결혼에서의 특권이 주어졌다. 즉, 귀천상혼에서 제외되어 다른 왕가와 혼인이 계속 가능했다.[27] 교황청에서 성직제후령의 복귀를 강하게 주장했으나 아무도 듣지 않았다.[28] 바덴 대공국은 앞서 나폴레옹에 줄을 잘서서 받은 영토 기득권을 그대로 인정받았는데 라인강 이서 지역을 프랑스에 조공으로 바치는 대신 라인 강 동편에 8배에 달하는 대토보상(?)을 받았다. 여기엔 오스트리아 제국의 외지오스트리아도 있었다.